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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흘러도 색바래지 않은 《첫수확》
조글로미디어(ZOGLO) 2011년12월19일 09시19분    조회:7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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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김세형


      학창에서 공부하고 농촌에 돌아와
      부지런히 일하여 첫수확을 거두었네
      로동으로 가꾸어온 오곡의 물결은
      농촌에 뿌리박고 꽃피운 열매
      시련을 이겨나온 투쟁의 열매
      에헤라 얼씨구 좋다 절씨구 좋아
      광활한 천지에서 억세게 싸우리

                                      가요 《첫수확》 1절

      지난세기 60~70년대에 지식청년으로 농촌에 내려갔던 세대들이 제일 많이 부르던 가요도 《첫수확》이고 40~5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도 고달프면서 보람찼던 그 시절을 뒤돌아볼 때면 제일 먼저 떠올리는 가요 역시 《첫수확》이다. 거의 반세기가 흘러갔어도 색바래지 않고있는 이 노래의 작사자 김세형선생을 만나본다.
      힘들었던 중소학교시절
     
1933년에 도문시의 회막골에서 태여나 왕청현 쌍하향에서 자라난 김세형은 항렬로는 6남매중 셋째였지만 아버지가 돌아간후부터 맏이의 역할을 하며 버거운 인생을 살아야 했다. 우로 형님 한분이 참군을 하고 누님 한분이 출가하는 바람에 섬약한 어머니를 도와 농사를 짓고 다섯식구의 생계를 이어가는 중임이 열두살짜리 김세형의 어깨에 떨어졌던것이다.
      당시 쌍하소학교 학생이였던 그는 수학, 어문, 작문, 미술 등 학과목성적이 우수해서 항상 우등을 했지만 농사일때문에 쩍하면 결석을 하다보니 동학들이 모두 중학교에 진학한것도 통 모르고 지냈다. 먼저 시험을 친 친구들이 자랑을 해서야 이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어머니 몰래 10리 상거한 대흥구에 달려가 보충시험을 치고 중학교에 붙었다.
      이렇게 매일 20리길을 오르내리며 대흥구중학교에 다니게 된 김세형은 공부를 잘한건 물론 학교 연극대에 들어가 주역을 맡기도 하고 무대배경을 제법 그리기도 해서 전면적으로 발전한 우수한 학생으로 긍정을 받았다.
      뜻밖의 재앙
     
1950년 여름, 초중졸업을 앞두고 여느 동학들은 고중시험을 친다고 법석을 떨었지만 어려운 가정형편때문에 공부를 계속할수 없게 된 김세형은 집에 돌아가 농사일이나 할 타산을 했다. 고맙게도 김세형의 천부를 아깝게 여긴 학교지도부에서 그를 교무간사 겸 미술교원으로 채용해주었다.
      그런데 미술시간이면 학생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면서 교원생활에 적응하느라 무던히도 신경을 쓰던 그에게 뜻밖의 재앙이 들이닥쳤다. 철봉을 리용하여 도립운동을 하다가 떨어졌는데 목뼈를 크게 상해 고개를 움직일수 없게 된것이였다.
      지금같으면 수술을 통해 치료할수도 있으련만 의료수준이 락후하던 그 시기 그것도 산골에서 목뼈골절을 치료한다는것은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이였다. 그래서 뜸도 뜨고 침도 맞고 민간처방을 쓰기도 하면서 나름대로 치료를 했는데 3년이 되도록 골절된 목뼈는 원상태를 회복하지 못했다.
      그즈음 김세형에게 사랑하는 녀자가 있었는데 갑자기 사고를 당하다보니 당장 결혼할수 없어 목이 어느 정도 나은후 식을 올리기로 약속하였다. 그런데 아무리 치료를 해도 상처는 나을줄 모르고 장기간 출근하지 못하다보니 교직도 그만둔 상태라 언제 그 약속을 실현할지 장담할수 없었다. 그렇다고 과년한 처녀를 마냥 기다리게 할수는 없는지라 그는 처녀를 불러놓고 더는 기다리지 말고 행복을 찾아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문예창작대오에 가담하기까지
     
3년세월이 흘러 골절된 목뼈가 그대로 고정이 되면서 곧은목이 되였지만 통증이 덜해져서 가벼운 일은 할수 있게 되였다. 그때 마침 쌍하에서 구락부 주임감을 물색하던중이라 문예면에서 일정하게 소질이 있는 김세형을 적임자로 점찍었다. 이렇게 김세형은 쌍하중심구락부 주임(지금의 문화소 소장)으로 되여 농촌문화사업에 몸을 담게 되였다.
      이때로부터 김세형은 공연대를 무어 공연을 조직하면서 농촌과외문예활동에 품을 많이 넣었는데 보다 신선한 종목을 선보이기 위해서는 연극대본이며 재담 등을 직접 창작해서 무대에 올리기도 하였다. 김세형의 처녀작인 장막연극 《한집안 사람》은 바로 이 시기에 창작된것이다.
      민족단결을 소재로 하는 이 작품은 왕청에서 창작상을 타고 1953년에는 《장백산》잡지에 게재되였다. 이를 계기로 김세형은 연길에서 조직된 연출훈련반에 참가하여 허동활선생을 만나게 되였고 허선생의 신변에서 많은것들을 배우면서 실력을 키운 보람으로 보다 성숙된 작품인 재담 《소의 공소》를 창작하기에 이르렀다.
      그후 문교위원직무를 맡고 여러 학교를 관리하기도 하던 김세형은 1958년에 왕청현문공단이 설립되면서 13명으로 조직된 창시자대오에 가담, 《여기는 벌써 봄이로다》(김동진 작곡), 《봉오골처녀》(윤송령 작곡) 등 가요을 비롯한 작품을 무더기로 내놓는 한편 연출도 맡아하고 3로인에 출연하기도 하면서 솜씨를 자랑하였다.
      성숙에로 통하는 길
     
겨우 초중을 졸업한 김세형선생이 연극, 재담, 3로인, 가사, 노래이야기 등 여러가지 형식의 문예작품을 륙속 내놓으면서 실력을 과시하게 된것은 본인이 다년간 부지런히 배우고 꾸준하게 련마한 결과라고 할수 있다.
      당년에 척추결핵으로 장춘대학 부속병원에 입원한 선생은 병상에서도 길림재정학원에 재학중인 동생 김병형을 통해 《문학개론》 등 리론서적이며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였는가》, 《림해설원》, 《홍기보》 등 소설책을 얻어들여 열심히 탐독하였고 가사 《증산절약타령》, 《새해의 결심》 등 작품을 창작하였다.
      1961년, 당시 왕청현당위 정학서기의 알선으로 장춘에서 열린 제2차소수민족영화문학학습반에 참가(연변에서 소수민족으로는 유일한 한사람)하여 7개월간 학습하게 된 선생은 조수리 등 유명작가들의 강의를 청취하면서 많은것을 배웠다. 그후 또 극작가 황봉룡선생과 인연을 맺고 희곡창작기량을 닦은 선생은 희곡작품 《5.1절전야》를 창작하여 또한번 소문을 놓았다. 전 주 종업원문예경연에서 창작, 표연 1등상을 따내고 전 성 종업원문예경연에서 2등상을 수상한 이 작품은 그후 한어로 번역되여 성급간행물인 《로동자문예》에 게재되였다.
      그후에도 김세형선생은 중국영화희곡문학창작중심에 입학해 북경, 장춘을 드나들며  2년이나 통신학습을 견지하였다. 이렇게 지식을 탐구하면서 창작실천가운데서 부단히 자기를 제고한 보람으로 김세형선생은 날따라 성숙된 작품들을 창작해낼수 있었다.
     

      명가사의 탄생
     
김세형선생의 작품가운데서 제일 인기를 끈것은 그래도 1960년대에 창작된 가사 《첫수확》과 《논물관리원》이라고 할수 있다.
지난세기 60년대초, 중국대지에서는 중학생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 돌아가 농촌에 뿌리박고 지식을 소유한 신형의 농민으로 되는 열조가 일어났는데 우리 주에서도 룡정시 동성공사의 려근택, 안도현 만보공사의 류창은, 왕청현 소왕청의 김일권 등 많은 전형인물들이 용솟음쳐나왔다.
      당시 왕청현문공단에서 가사창작을 맡은 김세형선생은 처음에 《돌아온 중학생》을 써볼 계획으로 왕청현내의 지식청년전형들을 취재하기 시작했다. 소왕청의 김일권을 찾아갔을 때 가장 깊은 인상을 준것은 그의 과학실험정신이였다. 야생콩(쥐콩)과 재래종콩을 잡교시켜 저항력이 강한 새 품종을 만들어보겠다고 밭머리에 풍막을 쳐놓고 꽃피는 시간을 기다리느라 지새운 밤이 그 얼마인지를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선생은 그 실험이 결국에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고향건설에 모든것을 다 바치려는 그 꿈은 너무나 소중하고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몇번이나 현지에 내려가 푸르싱싱한 실험전을 돌아보면서 생활체험을 하고나서 선생은 졸업장을 들고 돌아오던 중학생이 고향산 령길에서 고향벌을 바라보며 “아, 불타는 나의 맹세, 널 위해 돌아왔다”고 격정을 토로하는 모습을 담은 가사 《불타라 나의 맹세》를 써냈다. 그러나 웬 영문인지 이 가사는 작곡가 김동진선생이 곡을 붙여 남성독창곡으로 불리우기도 하고 어느 가요집에 실리기도 했지만 얼마 빛을 보지 못하고 자취를 감추고말았다.
      1963년 여름에 주에서 소집한 연극창작학습반에 참가한 김세형선생은 황봉룡선생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하나라도 더 배우느라 극성을 부렸다. 이렇게 려근택을 찾아가는 황선생을 따라 동성으로 떠났는데 올빼미의 독침에 쏘이면서 “연변의 미츄린”이라 불리우는 육종가 려근택네 댁에까지 찾아가니 서로 다른 벼품종을 심은 수십개의 화분통들이 반겨주었다. 어떤 벼들은 하얀 꽃을 피우고있었고 어떤 벼들은 화분잡교가 끝나 열매맺기를 기다리고있었다. 그런데 려근택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우량품종을 배육한다는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 실패를 밥먹듯하면서 “세알의 종자”를 얻어냈고 겨울에 그 종자를 기온이 따뜻한 해남도에 갖고가 번식시켜 그 이듬해에 대면적에 보급시키고 풍작을 따냈다는것이였다.
      그 “세알의 종자”에서 계발을 받은 김세형선생은 인차 《첫 열매》라는 제목으로 가사를 썼고 나중에는 그것을 바탕으로 《첫수확》을 완성하였다. 퍼그나 품을 넣어 쓴 이 가사는 작곡가 김동진선생이 곡을 잘 달고 홍정숙가수가 노래를 너무 잘 부른 덕분에 그다음해에 있은 전 주 전업문예단체회보공연에서 인기돌풍을 안아왔다. 후에  전화자, 조옥형 등 가수들이 부르고 신문잡지며 여러 노래집들에 실린 이 가요는 연변인민방송국의 《매주일가》, 《배워주는 노래》, 《요청음악》 등 프로를 통해 자주 전파를 타면서 대중들에게 친숙한 노래로 자리매김하게 되였다. 그리고 왕청현에서는 이 노래가 왕청의 자랑으로 되고있다는 의미에서 왕청고중교정에 《첫수확》노래비를 세우기도 하고…
      1964년의 전 주 전업문예단체회보공연에서 김세형선생이 금방 작사한 노래 한수가 《첫수확》과 함께 인기를 누렸는데 그것인즉 윤송령 작곡으로 된 《논물관리원》이였다. 이 가사는 선생이 논농사를 많이 하는 왕청현 서위자공사에 내려갔을 때 창작한것이라고 한다.
      1964년 봄, 전 주 전업문예단체회보공연을 위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할 임무를 맡은 김세형선생은 생활체험을 하고저 서위자공사에 내려갔다. 때는 마침 벼모내기를 당금 시작할 시기라 농민들은 써레를 놓는다, 논두렁을 감는다 하면서 눈코뜰새없이 분주히 보내고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삽을 메고 논벌을 오르내리는 논물관리원들이 꽤나 인상적이였다.
      (그래, 논물관리원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가사를 써보자!) 이렇게 생각한 선생은 의식적으로 논물관리원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귀울였다. 들어보니 매일 꼭두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논판에서 살다싶이 하는 논물관리원들은 논벌을 지켜선 초병같은 존재로서 노래의 주인공으로 등장시킬만했다. 그런데 서두를 어떻게 떼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선생은 또다시 논으로 향했다.
      선생이 한 논뙈기에 이르니 한창 논두렁을 감는중이였는데 논물관리원 한분이 금방 감아놓은 논두렁우로 지나가면서 움푹하게 패인 발자국들이 줄을 지었다. 그 장면을 목격하는 순간 “논물관리원들이 봄부터 가을까지 논판을 오르내리느라면 저런 발자국을 얼마나 남겨야 할가?”라는 생각이 뇌리를 쳤다. 그러노라니 저도몰래 “푸름한 새벽에 해지는 저녁에/논물을 보살피며 다니던 논뚝길 얼마더냐…”라는 가사가 절로 흘러나왔다. 이렇게 1절 가사를 만든 선생은 논물관리원들은 일기변화가 생기면 한밤중이라도 논판으로 달려나와야 한다던 말이 떠올라 2절 가사는 “비바람 몰아쳐도 깊은 밤 번개쳐도/마을의 논물관리원 이 논 지켜나섰다네…”로 하고 3절 가사는 신근한 로동으로 풍년든 황금가을을 맞아온다는 의미를 부여해서 “눈부신 해빛아래 기름진 이 논에도/몸과 마음 다 바치여 황금물결 안아왔네…”로 조직하였다.
      왕청현문공단 최태수가수의 열창에 무용를 곁들인 이 작품은《첫수확》과 더불어 수상의 영예를 따내면서 그번 회보공연무대를 들썽케 하였고 후에는 무용 《논물관리원》의 주제곡으로 선정되였다.
      독특한 창작풍격
     
4청운동과 문화대혁명시기의 몇년간을 제외하고 장장 50여년을 예술작품창작의 한우물만 파온 김세형선생은 지금까지 무려 200여수의 가사, 200여편의 연극과50여편의 구연작품(재담, 만담, 삼로인, 노래이야기)을 발표하였는데 그중 적지 않은 작품들이 여러 급별의 상을 타고 대중들의 환영을 받았다.
      김세형선생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가사 《첫수확》, 《논물관리원》, 《푸른 모야 어서 나가보자》, 노래이야기 《참외장사 최령감》, 삼로인 《장도 볼겸 님도 볼겸》을 비롯해서 대부분이 농촌제재로 생활맛이 다분하다. 이것은 농촌에서 태여나 농촌에서 자라나고 농사일을 하면서 뼈가 굵어진 그의 생활경력과 갈라놓을수 없다. 어려서부터 지탑을 잡는 일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농사일을 다 해본 실천경험이 있었기에 농민형제들과 보다 가까와질수 있었고 농촌실정을 보다 진실하게 표현할수 있었다는것이다.
      수십년의 창작실천에서 김세형선생은 남다른 안목으로 “종자”를 발견하고 승화시켜 정품을 창출하기에 류의하였다. 국외로 진출하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고있는 최근년에 와서 리별의 슬픔을 다룬 작품들이 많이 나오고있다. 그러나 선생은 래일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오늘의 잠시적인 리별때문에 슬퍼하지 말고 눈물을 흘릴것이 아니라 웃으며 타향살이를 떠나야 한다면서 《웃으며 나는 간다》라는 제목의 가사를 써내기도 했다.
      가사를 많이 쓰고있는 김세형선생은 또 음악적으로 사색하면서 형상성과 서정성을 제고하여왔는데 가사 《파아란 내 고향》에서는 “파아란”이란 단어를 무려 14차나 반복하면서 절주감을 부여하기도 했다. 하기에 선생의 가사는 전통적인 수법을 취한것 같지만 음악이 튕겨나올듯한 진실한 언어로 되여있고 음수률, 음보, 시행 등 면에서도 특이한 음악적색채를 보여주고있다.
      책임감이 강한 세대주
     
재직기간에 선후로 왕청현문공단 당지부서기, 왕청현문련 주석 등 직무를 담당한 김세형선생은 실생활에서 책임감이 강한 세대주로 되기에 손색이 없다.
      29살에야 늦장가를 가서 아들딸 오누이를 낳아키운 선생은 가정생활에서 대들보의 역할에 충직했고 가정과 자식을 위해서라면 자기를 희생할 각오로 살아왔다.
      당년에 선생의 아들은 거금을 투자하여 사업을 벌렸다가 곤두박질하고 빚구럭에 빠져들었다. 아들 혼자의 힘으로는 그 많은 빚을 갚을길이 없다는것을 알게 된 선생은 단연히 자신의 이름으로 되여있는 아빠트를 팔고 한국으로 진출, 69세의 고령에 오토바이를 타고 신문배달을 하면서 3년간 억척스레 돈을 벌어 빚을 몽땅 청산해주었다. 그리고 귀국한후에는 부인과 둘이서 한국에 나가있는 딸을 대신하여 외손군을 돌봐주느라 시간가는줄 모르고있다.
      1993년에 정년퇴직을 하고서도 필을 놓은적 없는 선생은 80고개를 바라보는 지금도 창작에 정진하며 《해란강여울소리》를 비롯한 신문간행물에 부지런히 작품을 발표하고있다. 그리고 요추간판탈출때문에 외출이 불편해진 몸이지만 박흥률, 리명 등 후배들과 손을 잡고 왕청현작가협회를 구성, 《백의녀》잡지를 출간하며 여생을 뜻깊게 보내고있다.
      인젠 허리가 아프고 숨이 차서 층계를 오르내리기 힘들어 왕청진 하북에 위치한 왕청촌에 단층집을 사놓고 조용하게 살아가고있는 김세형선생이 아무쪼록 지금의 건강상태를 유지하고 창작수명을 최대한 연장해가길 기대한다.                                

       연변라지오TV신문     채선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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