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명박 한국 전 대통령 재임 기간 한국외교에는 미국을 향해 “한쪽으로 기우는” 국면이 형성됐고 현재에는 한국에서 완만하게 고조되는 “중국열” 및 교육영역에서의 “중문열”이 한동안 냉각되어 양국 경제, 문화 교류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 “중국열”은 대세의 흐름을 따르는 것이며 막을 수 없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부임한 뒤 적극적으로 대중관계를 발전시켜왔고 양국은 경제무역, 인문, 관광, 의료 등 여러 분야의 교류에서 거대한 발전을 거뒀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올해 한국에서 의료 관광을 향수한 외국인 중 최고 소비 군체는 중국인이었다. 중국 소비군체의 거대한 잠재력이 많은 한국인들이 중국 시장에 주목하게 했으며 한국 대기업 중 많은 고위직 관리인원들 역시 적극적으로 중문 공부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경제 영역의 활성화된 교류에 비해 현재 한국 정계의 많은 인사들이 중국에 대한 요해가 깊지 못한 상태다. 많은 한국인들이 현재 중국에 대한 인상은 여전히 2000년좌우의 모습에 그쳐있다. 따라서 중국에 대한 인식에 일부 오해와 편향이 남아있다. 이에 대해 김교수는 현재의 중국은 이미 지난날의 모습이 아니며 개혁개방 초기와 비교해도 거대한 변화가 발생했다면서 한국의 정계 인사들은 지난날의 중국을 바라보던 낡은 시각을 버리고 일종의 “찬양”과 “우호”적인 안목으로 중국을 새롭게 지켜보아야 한다고 밝혔다.
김교수는 또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라와 나라의 교류는 사람과 사람의 왕래에 의존해야 한다. “한 나라의 국민을 통해 한 나라의 이미지를 보아낼 수 있다”. 한국인 마음속의 중국 이미지를 바꾸려면 한국인과 중국인 모두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한국인은 중국에 대한 기존의 편견을 버리고 참신한 시각으로 중국을 인식해야 하며 한국 사회에서도 중국의 발전을 최대한 드러내보여야 한다.
김교수는 웃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재의 한국인은 모두 중국인에게 돈이 많고 한국의 경제 발전을 위해 큰 기여를 해주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 그러나 중국인들도 실제 행동으로 한국인의 관점을 바꾸는데 일조할 필요가 있다. “일부 중국관광객들이 한국에서 보여주는 소양이 높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한국인이 중국인에 대한 인상을 바꾸려면 중국인이 해외에서 스스로의 이미지를 개선하는데 의존해야 하며 양호한 예의범절을 보여주는 것도 중요한다. 예의, 태도 등 작은 부분에서부터 시작해 전면적인 향상이 필요하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말하면서 김교수는 다음과 같이 내비쳤다. 중국정부에서 조선반도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힘써주기를 바란다. 동시에 중한 양국관계의 발전이 점점 더 밀접해지고 서로 깊이있게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점점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중국과의 인연으로 중한교류의 사절이 되다
김교수 일가는 당시 전라북도 전주에 거주했고 현지 화교 초등학교에서 중문을 가르쳤었다. 김교수의 어머니는 중국의 방대한 인구와 광활한 국토, 또 찬란한 미래발전 비전을 내다보았고 6살에 불과한 김교수를 그의 평생에 영향줄 한어의 세계로 이끌었다.
대학 진학 후 김교수는 자연스럽게 중문과를 선택했고 한중 번역 생애를 시작했다. 번역 경력중 가장 인상깊었던 순간은 1983년 처음으로 통역을 담당했을 때라고 김교수는 말한다.
1983년, 6명의 폭도가 대륙의 비행기 한대를 납치했고 한국 춘천 공항에 긴급 불시착하게 됐다. 비록 당시 한국과 중국이 정식 수교한 상태는 아니였지만 한국 정부에서 선의를 표하기 위해 기내 승무원 조와 승객들을 그때 당시 한국에서 가장 호화로웠던 쉐라톤그랜드워커힐호텔에 배치하고 대학교 1학년에서 재학중인 김교수를 포함한 10명의 여성 통역을 파견해 기내 승무인원들과의 소통을 담당하게 했다.
당시의 중국 대륙은 한국인들에게 생소하기도 하고 신비한 존재였단다. 줄곧 대만식 “국어”만 공부해온 김교수에게 처음으로 만난 대륙 손님들의 가장 직접적인 인상은 언어적인 차이였다. 그는 “마지막 날이였다. 승무인원들이 대륙으로 돌아가는 날, 년세 있으신 분이 무거운 짐을 드는 것을 보았다. 도우려고 다가갔더니 나한테 ‘메이설(沒事兒, 일이 없습니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너무 이상했다.” 그도그럴 것이 김교수가 공부한 “국어”에서 습관적인 괜찮다는 의미의 표현 방법은 “메이관시(沒關係, 괜찮습니다는 뜻)”였으니 말이다. 처음으로 “대륙식 표현법”을 들으면서 김교수는 양안 문화의 차이를 직관적으로 체험하게 됐다.
그번 사건은 한국사회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연속 며칠간 주류 매체의 톱기사로 다뤄져다. 김교수도 앵글에 담겨 “유명세”를 타는 느낌도 체험해 봤다고 한다. 그뒤 그는 본격적으로 통역의 길에 올랐고 중한 양국 사이 여러 중대 행사에 참여해 역사의 참여자, 견증인이 되었다.
신화넷 한국어판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