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옛날과 지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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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5대 성인 중 유일 관직 진출한 공자 댓글:  조회:2584  추천:0  2015-07-01
【논어명장면】벼슬에 임하는 공자의 자세         子曰 道千乘之國 敬事而信 節用而愛人 使民以時    자왈 도천승지국 경사이신 절용이애인 사민이시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그가 나라를 이끄는 공직자라면 마땅히 자신의 소임을 중히 여기고 백성들이 그를 믿을 수 있게 한다.    물자를 아끼고 사람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백성을 부릴 때는 순리를 따른다.   -‘학이’편 5장         1. 공자, 벼슬을 얻다 공자와 더불어 석가, 예수, 소크라테스, 마호메트 등은 인류 최고의 성인으로 꼽히는 사람들이다. 공자는 이들 가운데 유일하게 관리 생활을 경험했다. 성인에 대한 일반적 이미지를 생각하면 관리 생활은 조금 특별한 ‘경력’이 아닐까 싶다. 과연  공자가 몸소 겪은 ‘벼슬살이’는 어떠했을까? 관리, 나아가 정치라는 직업 체험이 그의 삶과 사상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나, 이생이 전해들었던 장년의 공자는 열렬히 벼슬을 원했다. 누군가의 벼슬을 사는 것을 천분으로 여긴 골수 사인(士人)의 시기였다. 학숙의 제자들에게도 열과 성을 다해 사관(仕官)의 길을 가르쳤다. 군자가 되어 벼슬을 얻어 인(人)과 민(民)을 더 높은 인격의 사람-선생님은 신분이 낮은 인민도 수양을 통해 군자가 될 수 있다고 본 중국 최초의 지식인이다-으로 이끄는 것을 사명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토록 추구하는 벼슬도 명분이 없는 것이라면 그 또한 가장 경멸하는 바이기도 했다. 군자를 자임하는 공자에게 벼슬이란 그 자체로 정당한 것이 아니면 안되는 그 무엇이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말했다. “선생님의 40대가 시대와의 불화로 일관했던 것은 정당한 방식으로는 벼슬을 얻을 수 없는 시대였다는 겁니다. 불혹(不惑)은 그 유혹을 견뎌낸 자신에게 수여한 훈장이고요.”   벼슬을 하고 싶은데, 주겠다는 쪽은 불의(不義)한 세력이었다. 그렇게 세월만 흘러 노인 반열(당시에 나이 50은 장로를 의미했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시운(時運)이란 것이 그에게도 찾아왔다.   “선생님이 그토록 권도(權道)를 나누길 꺼린 양호 정권이 자멸하고, 새로운 정치 공간이 열린 겁니다. 겨우 정권을 회복한 귀족들은 때묻고 불신받는 자신들을 대신해  민심을 수습해 줄  참신한 신진세력이 필요해졌습니다.”   귀족들의 눈에 공자는 그 ‘신진그룹’의 대표적 인물이었고, 공자 역시 기꺼이 ‘시대의 부름’을 받아들였다.  ‘가슴 속에서만 그려왔던 새정치의 청사진을 세상에 펼쳐보일 때가 왔다.’   공자가 전율처럼 느낀 ‘지천명’(知天命)은 이 출사(出仕)의 선택과 결코 무관할 수 없었다. 이후 그가 걸어간 환로(宦路)를 따라가보면 공자가 기꺼이 받아 안은 이 천명이 공자 자신의 영달만을 의미하지 않았음을 우리는 목격하게 된다.    안락을 꿈꾸는 사람은 선비라고 할 수 없다(士而懷居 不足以爲士矣).-‘헌문’편 3장①   벼슬길에 나간 공자는 일개 관리에서 어느덧 ‘정치가’로 도약할 때에 이르자, 안주(安住) 대신 개혁의 험로를 선택했다. 망명은 그 험로의 결과이자 새로운 고난의 출발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출사는 출세의 길이 아니라 세상을 바로잡겠다는 웅지(雄志)의 깃발을 든 것으로 역사에 남을 수 있었다.   *영화 중에서   2. 공자가 맡은 벼슬  공자는 서기전 501년 그의 나이 51살 때 관직에 나가 56살에 국외로 망명할 때까지 약 5년간 벼슬살이를 했다. 공자는 이 기간동안 중도재(中都宰·중도라는 읍의 읍장)라는 지방장관급 직책으로 시작하여, 건설부장관에 해당하는 사공(司空)을 거쳐 오늘날의 사법부 수장에 해당하는 사구(司寇)의 자리에 올랐다고 한다. 일설에는 대사구(大司寇)가 되어 국정을 대리하기도 하였다.( ‘공자세가’)   공자의 관직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나, 이생이 들은 바는 이러하다. 공자는 중도재로 약 1년간 일하다가 임금이 참석한 국제회의에서 공을 세워 사구로 승진했다. 그런데 이때 공자가 임금에게 받은 사구의 직위는 조정대신인 사구가 아니라 공실(公室) 직할령의 사법권을 담당하는 사구직이었다. 당시 조정 3대 요직인 사마(司馬·국방부장관), 사구, 사공은 귀족 가문의 세습직이었다. 사공직은 삼환의 한 축인 맹의자가 맡고 있었고, 사구 자리는 계손씨와 가까운 종족인 장(臧)씨 가문이 세습하고 있었다. 따라서 공자가 사공과 사구직을 잇따라 맡았다는 것은 당시 노나라 실정을 잘 몰랐던 후세 사람들의 와전일 뿐 사실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공자가 사공이 되었다는 설도 공자가 중도재로서 사공인 맹의자를 보좌해 수행한 어떤 사업(중도와 가까운 지역에 있던 공실묘지에서 벌인 대규모 토목 공사일 가능성이 크다.)에 근거해 생겨난 전설이었을 개연성이 높다.② 또 춘추시대에는 ‘대사구’라는 벼슬이 없었는데도 사마천이 ‘사구 중에 가장 높은 사구’라는 의미로 "대사구 운운"한 것 역시 잘못된 전승을 반영한 사료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5년이라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공자의 관직생활은 크게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는 중도재에서 사구에 이르는 2~3년의 목민관 시절이다. 공자는 중도를 잘 다스리고, 예교전문가로서 국제회의에 참가해 공을 세워 임금의 주목을 끄는데 성공했다. 목민관으로서 예법을 정비하고 사구가 되어 민생을 보살폈다. 사구 또는 대사구로서 보낸 후반부는 임금을 보좌해 국정개혁을 시도한 ‘정치의 시기’였다. 참주(僭主)의 권한을 삭감하고 군주권(君主權)을 부흥시켜 궁극적으로는 귀족 대신 사대부 관료가 중심이 되는 군주정을 꿈꿨다. 원대한 그 ’플랜’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 시기는 개혁가의 면모가 여실했던 ‘정치적 공자’의 절정기였다.   3. 인간 공자의 황금시대 세속적 의미에서 이 때가 인간 공자의 황금기였다. 한미한 무사(武士)의 아들로 태어나 거의 고아나 다름없이 성장한 사람이 조당에서 경대부(卿大夫) 귀족들과 나란히 국정을 논하는 지위에 이르렀으니, 지금이나 당시나 "개천에서 용이 났다"고 할만한 ‘출세’였다. 특히 일정 규모의 학단을 이끌고 있는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포부를 벼슬을 통해 현실에 적용해 볼 기회를 가졌고, 그 상당부분이 성공적-귀족들의 반격이 있기 전까지는-이었으니 개인적으로도 영광의 시기가 아닐 수 없었다. 경제적으로도 풍족했던 때였다. 상당한 규모의 녹봉은 자신 뿐 아니라 공문(孔門) 전체에 물질적 여유와 정신적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가난한 제자에게 많은 봉급을 줄 수 있게 된 공자의 흐뭇한 심정을 상상해 보라.    제자 원헌이 공자가 준 녹봉이 너무 많다며 사양하자 공자가 말했다. “사양하지 말아라. 너무 많다고 여겨지면 형편이 어려운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 주면 되지 않겠느냐?(原思爲之宰 與之粟九百 辭 子曰 毋 以與爾隣里鄕黨乎)” -‘옹야’편 3장③   집에 불이나 적지 않은 재산을 잃었을 때도 크게 개의치 않을 수 있었다.    마굿간에 불이 났다. 선생님께서 조정에서 돌아와 이를 듣고 ‘사람이 다쳤느냐’고 물으시고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셨다.(廐樊 子退朝曰 傷人乎 不問馬) - ‘향당’편 12장④   당시에 말 한필은 노예 몇 명의 몸값에 해당하는 큰 재산이었다. 높아진 신분에 존중과 존경이라는 명예 급부도 따랐다. 공자도 그런 자신이 뿌듯할 때가 있었을 것이다. 은근히 새어나오는 기쁜 감정을 감추지 못해 그만 제자들에게 핀잔을 들을 정도였으니….    공자가 나이 쉰여섯(정확히는 쉰다섯이다)에 대사구로서 상국의 일까지 대리하게 되자 얼굴에 기뻐하는 기색이 있었다. 문인들이 물었다. “듣건대, 군자는 화가 닥쳐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이 찾아와도 기뻐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만…” 공자가 겸연쩍게 말했다. “그런 말이 있지. 그러나 사람이 귀해지는게 즐거운 때도 있지 않을까?” - ‘공자세가’   공자도 사람인 이상, 벼슬이 국정을 대리하는 지위에까지 이르렀는데 어찌 소회가 없을 수 있겠는가. 아버지, 어머니가 살아계셔서 오늘을 보았더라면, 하는 감상이 어찌 일지 않겠으며, 미천한 시절을 겪어본 사람이 노력을 다하여 지위를 얻은 감회가 어찌 남다르지 않겠는가? 공자도 한 사인(士人)으로서 적어도 한번쯤은 그런 기분에 젖어보았을 것이라고 나, 이생은 생각한다. 그렇다해도 그런 기분을 남의 눈에 띌 정도로 드러낸다는 것은 공자같은 대인격에게는 흠결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어렵게 얻은 출세를 대의를 위해 던져버리기도 했기에 그 뜻밖의 흠결은 ‘성인’ 공자의 ‘인간다움’을 보여주는 아주 특별한 예외로 기억될 수 있는 것이리라.   4. 목민관, 공자 나, 이생이 고제들로부터 들은 말을 종합하면, 공자는 맹의자가 집정인 계환자에게 추천하는 방식을 통해 벼슬길에 나갔다. 맹의자는 쌍둥이 동생 남궁경숙과 함께 어릴 때부터 공자의 문하에서 배웠다. 양호의 난을 평정할 때 맹손씨의 수장으로서 큰 공을 세웠다. 이때문에 삼환 중 가장 세력이 작은 집안의 젊은 수장임에도 발언권은 상대적으로 높았을 때였다. 계환자는 그런 맹의자를 무시할 수 없어서 공자의 등용을 수락하기는 했는데, ‘맹씨 사람 ’인 공자에게 선뜻 조정의 대부 벼슬을 주기는 꺼름칙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조정과 귀족들에 대한 공자의 처신도 살펴볼 겸 임금인 정공에게 공실 직할령인 중도재 자리에 공자를 천거했던게 아닌가 싶다. 중도(中都)는 현대의 중국 산동성 문상현 부근 지역으로, 가까운 감 땅에 공실 묘역이 있었다. 중도는 아마도 공실 묘역을 관리하면서 유사시에는 수도의 기능도 맡는 공실의 본읍 같은 도시로 추정된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중도재는 공자 자신이 내심 원했던 벼슬일 가능성도 있다. 당시 공자는 정치적으로 삼환의 참주정치를 혐오하고 있었으므로, 삼환의 직접적인 영향권 밖인 지방직에 있으면서 임금의 ‘근신(近臣)’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벼슬을 공자도 내심 환영했을 것이란 추정이다. 공자가 나중에 사구가 되자 공실묘역을 대대적으로 재정비하여 정공과 정치적 공감대를 이룬 뒤 삼환을 상대로 본격적인 정치개혁에 나선 것을 보면 이 시나리오는 나름 설득력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공자는 중도재가 되자 그동안 자신이 준비해온 정책들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공자는 중도의 재가 되자 여러 제도를 만들었다. 산 사람을 봉양하고 죽은 사람을 장례 지내는 절차를 제정(制爲養生送死之節)했다. 어른과 아이는 먹는 것을 다르게 하며(長幼異食), 강한 자와 약한 자가 할 일을 달리 하며(强弱異任), 남녀는 각기 길을 달리 다니도록 하며(男女別途), 길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줍지 않게 하며(路無拾遺), 그릇에 조각을 하거나 거짓되게 만들지 못하게(器不雕僞) 하였다. - ‘상로’   중도의 백성은 공실의 영지에서 농사를 짓는 일반 백성과 노역을 담당하는 야인과 노예계층이 있었다.  공자는 이들 신민(臣民)들을 예로써 교화한다면 더 높은 수준의 공동체를 만들수 있다고 보았다. 공자는 맨 먼저 사람의 예, 즉 산 사람을 위하고 죽은 자를 장사 지내는 도리를 가르쳤다. 어른을 공경하고 노약자를 보호하게 하였으며, 남녀를 구별하여 풍속의 문란을 막고, 남의 것을 탐내지 않아 이웃간에 믿음을 쌓는 것이 더 큰 이익임을 알게 했다. 기물(器物)에 사사로운 표시를 할 수 없게 하여 백성들 사이에 차별과 파당이 생겨나는 것을 경계했다. 나, 이생이 그때의 일을 고제들에게 상세히 물었다.  “이런 정책이 바로 성과가 있었나요?” “어떤 사람들은  ‘서쪽 지방 제후들까지 선생님의 정책을 본받았다’⑤고 말하지만, 1년여란 짧은 재임 기간을 생각하면 이는 부풀려진 말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일찌기 노나라에서 지방수령이 이와같이 예(禮)에 입각한 교화 정책을 펼친 적이 없었으므로 상하의 사람들이 모두 선생님의 높은 식견에 놀란 것은 틀림없었습니다.”   5. 선비가 벼슬을 얻고자 할 때 공자는 벼슬을 시작할때부터 자신이 세운 명분과 원칙을 잊지 않았다. 정당하지 않은 벼슬살이는 진실로 그가 원하는 바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는 한창 벼슬할 나이를 벼슬을 거부하며 보냈지만, 나중에는 그것이 그의 소중한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 공자가 그 때의 의지를 단호하게 표현한 말이 있다.     세상에 도가 있을 때는 몸을 드러내고, 세상에 도가 사라지고 없을 때는 몸을 숨긴다.(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 -‘태백’편 13장⑥   주변 사람들이 벼슬운이 없다며 때를 만나지 못하는 공자를 안타까워하자 공자가 웃으며 말했다.    자리가 없음을 걱정하지 말고, 어떻게 그 자리에 서야 하는 지를 걱정합시다.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한탓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나라는 존재를 사람들이 인정하게 할지를 먼저 생각해 봅시다.(不患無位 患所以立 不患莫己知 求爲可知也) - ‘이인’편 14장⑦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당부했다.     모름지기 군자란 자기의 능력없음을 괴로워하는 법이지,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괴로워하는 따위의 사람이 아니다.(君子 病無能焉 不病人之不己知也) - ‘위령공’편 18장⑧   후세의 맹자는 이 시절의 공자를 염두에 두고 선비가 어떤 태도로 벼슬에 임해야 하는 지를 알기 쉬운 비유로 설명한 적이 있다. “남녀가 서로 짝을 맺는 것은 인간이라면 모두 원하는 바이오. 그렇다고 해서 부모와 중매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구멍을 뚫어 서로 들여다보고 담장을 넘어 서로 쫓아다니는 일은 부모와 나라 사람들이 모두 천하게 여기는 바이오. 옛사람들이 벼슬을 살고 싶어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또한 정당한 도리에 따르지 않는 것을 싫어하였소. 정당한 도리에 따르지 않고 벼슬하러 나가는 것은 구멍을 뚫는 따위나 다름없는 일이오.” - ‘등문공 하’ 편.   6. 벼슬에 임하여  공자가 중도재에 이어 사구의 자리에 오르자 공문의 수많은 문도들이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아침마다 조정에 나가는 공자의 모습은 공문의 미래가 활짝 열렸음을 상징하는 듯 했다. 공문의 연찬회도 자연스레 벼슬살이에 관한 실질적인 궁금증들이 자주 주제가 되었다. 그때를 전후하여 공자와 문도들이 나눈 출사의 도에 관한 문답들이 어록에 남아 전하고 있다.    “벼슬하는 자로서 맨 먼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정신(正身)이다. 자기부터 바르게 하는 것이다. 자기를 바르게 닦지 않고서 어떻게 남을 바르게 이끌 수 있겠느냐. (목민관으로서) 그 몸가짐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행해지고, 그 몸가짐이 바르지 않으면 명령을 내려도 백성들이 따르지 않는다.(其身正 不令而行 其身不正 雖令不從) -‘자로’편 6장⑨  진실로 그 몸가짐이 바르면 행정을 펴는데 무슨 망설임이 있겠으며, 자기 몸가짐이 바르지 못하면 어찌 다른 사람을 바르게 이끌수 있겠는가.(苟正其身矣 於從政乎 何有 不能正其身 如正人 何) - ‘자로’편 13장⑩    “벼슬하는 자의 자세를 말씀해 주십시오.”  그가 천승의 나라를 이끌고자하는 공직자라면 마땅히 자신의 소임을 중히 여기고 백성들로 하여금 믿음을 갖도록 해야 한다. 물자를 아끼고 사람을 귀하게 여기며, 백성을 부릴 때는 때를 살펴 해야 한다.(道千乘之國 敬事而信 節用而愛人 使民以時)  -‘학이’편 5장⑪     “무엇으로 백성을 이끌어야 합니까?”   예(禮), 의(義), 신(信)이 아니겠느냐. 윗 사람이 예를 좋아하는데 백성들이 어찌 공경하지 않으며, 윗 사람이 정의를 좋아하는데 백성들이 어찌 본받지 않겠으며, 윗사람이 믿음을 보이는데 백성들이 어찌 마음으로 따르지 않겠느냐. 무릇 이와 같이 하면 사방에서 백성들이 자식을 포대기에 싸업고 찾아올 것이다. (上 好禮則民莫敢不敬 上 好義則民莫敢不服 上 好信則民莫敢不用情 夫如是則四方之民 襁負其子而至矣) -‘자로’편 4장⑫      “임지에 있을 때의 자세를 말씀해 주십시오.”  벼슬을 가진 자는 백성의 눈과 귀 속에서 사는 사람임을 명심하라. 일상 생활에서는 공손하고, 일에 임하여는 정성을 다바쳐라. 다른 사람과 일할 때도 진심을 다하라. 이 세가지는 설사 오랑캐 땅에 가더라도 버려서는 안된다.(居處恭 執事敬 與人忠 雖之夷狄 不可棄也) -‘자로’편 19장⑬     “어떻게 해야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습니까?”   서둘지 말고 작은 이익에 구애받지 마라. 빨리 성과를 내려고 하면 오히려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고, 작은 이익에 얽매이면 큰 일을 이루지 못하는 법이니. (無欲速 無見小利 欲速則不達 見小利則大事不成) - ‘자로’편 17장⑭     “어떻게 해야 과오를 줄일 수 있습니까?”   많이 듣되 의심나는 것은 빼버리고 그 나머지를 가지고 신중하게 말하면 허물이 적어질 것이다.  많이 듣되 위태로운 것은 빼버리고 그 나머지를 가지고 신중하게 행하면 후회하는 일이 적을 것이다. 말에 허물이 적고, 행실에 후회할 일이 적으면 벼슬이야 늘 그 안에 있는게 아니겠느냐? (多聞闕疑 愼言其餘則寡尤  多見闕殆 愼行其餘則寡悔 言寡尤 行寡悔 祿在其中矣) -‘위정’편 18장⑮    “어떻게 하면 벼슬하는 사람답다고 하겠습니까?”    선비는 무엇이 부끄러운 짓인지를 아는 사람이다. 또한 어디가서든 나라를 욕되게 하지 않는다면 가히 벼슬할만 자라고 할 것이다.(行己有恥 使於四方 不辱君命 可謂士矣)   “그 아래 벼슬아치는 어떻습니까?”  안으로는 효자 소리를 듣고, 밖으로는 우애가 깊다고 칭송받는 사람이다.(宗族稱孝焉 鄕黨稱弟焉)   “그 아래도 있습니까?”  말을 바꾸지 않고, 원칙을 고수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하면 고지식한 소인이란 소리를 듣기는 해도 차선의 벼슬아치는 될 수 있다.(言必信 行必果 갱갱然小人哉 抑亦可以爲次矣) -이상 ‘자로’편 20장      “함께 일하는 사람은 어떻게 이끌어야 합니까?”   누군가와 같이 일할 때는 자신을 늘 돌아보아야 한다. 군자는 잘못을 자신에게서 찾는 이이고, 소인은 다른 사람을 탓한다.(君子 求諸己 小人 求諸人) -‘위령공’편 20장  일을 하다 잘못이 생기면 자신부터 엄중히 꾸짖고 남의 잘못은 가볍게 질책한다. 그래야 원망이 쌓이지 않는다.(躬自厚而薄責於人 則遠怨矣)-‘위령공’편 14장    “부하에게 좋은 상관이 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군자는 남의 좋은 점을 완성시켜주고, 남의 나쁜 점을 가려준다. 소인은 반대로 한다.(君子 成人之美 不成人之惡 小人 反是) -‘안연’편 16장     “선생님은 어떤 사람과 더불어 하고 싶습니까?”  중용을 알며, 말과 행동을 중도(中道)로서 하는 사람을 얻고 싶다. 그 다음으로는 반드시 뜻이 높아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는 사람, 절의를 지킬 줄 아는 사람과 더불어 함께 하고 싶다. 뜻이 높은 사람은 거침없이 나아갈 줄 알고, 절조를 아는 사람은 금도를 지킨다.(不得中行而與之 必也狂견乎 狂者 進取 견者 有所不爲也)-‘자로’편 21장    “그런 사람과 같은 줄이 되면 유익하지 않겠습니까?”   군자란 모름지기 자부심을 가지되 그것으로 남과 다투지 않으며, 더불어 함께 일을 도모하되 편을 가르지 않는 자이다.(君子 矜而不爭 群而不黨)-‘위령공’편 21장      “백성이 모두 좋아한다면 좋은 관리가 된 것이지요?”  그럴 순 없다. 고을 사람 중에 선한 사람들이 좋아하고, 선하지 못한 사람들이 미워하는 사람이 가장 바람직하지 않을까? (子曰 未可也 不如鄕人之善者好之 其不善者惡之)-‘자로’편 24장   *영화 중에서     7. 법만으론 선정(善政)을 이룰 수 없다 공자가 사구가 되어 업무를 시작하자, 제자들이 다투어 말했다. “우리 선생님이라면, 무슨 송사든 잘 처결하실 거야.”그 말을 들은 공자가 웃으며 말했다.    난들 특별히 다를 것이 있겠느냐. 나는 송사를 잘 판단하는 사람이기에 앞서 송사 자체가 생겨나지 않도록 하고 싶구나. (聽訟 吾猶人也 必也使無訟乎) -‘안연’편 13장     “판관으로서 어찌해야 밝다는 소리를 듣겠습니까?”   옷이 물에 젖듯이 은근히 헐뜯는 말과 뜨거운 물이 살갗에 닿듯이 절박하게 호소하여 오더라도 그가운데 진실을 간파하여 그것을 따르지 않을 수 있다면 밝다고 할 수 있다. 어디 그뿐이랴, 가히 멀리 내다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浸潤之讒 膚受之소 不行焉 可謂明也已矣. 浸潤之讒 膚受之소 不行焉 可謂遠也已矣) -‘안연’편 6장      “법을 집행하는 자리에 오르셨으니 법으로 이끄시렵니까?”  이끌기를 법으로 하고, 가지런히 하기를 법으로 하면, 백성들이 형벌을 면할 수는 있으나 부끄러워 함이 없을 것이다. 이끌기를 덕으로 하고, 가지런히 질서를 세우기를 예로써 하면,  백성들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고 또한 스스로 바른 마음을 갖고자 할 것이다.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 -‘위정’편 3장     “선정의 요체는 무엇입니까?”   모름지기 백성은 공평한 명분을 가지고 이끄는 것이지, 지도자의 야망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다. 덕있는 지도자는 백성들이 자기의 교화를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내세우지 않아도 저절로 드러난다면 이미 선정이 아니겠느냐. (民可使由之 不可使知之) -‘태백’편 9장   8. 벼슬하는 자, 마땅히 역사를 두려워하라  선비에게 벼슬은 축복이면서 동시에 재앙의 근원이다. 무엇이 좋은 벼슬이며, 어떤 자가 훌륭한 벼슬아치인가? 공자에게도 늘 자신을 성찰하게 만드는 화두였다. 누군가가 공자에게 벼슬아치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바를 물었다면 공자는 틀림없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가 군자라면 마땅히 역사를 두려워 할 것이다.’ 말년의 공자에게 손자뻘되는 제자가 있었다. 이름이 증참(曾參)인 그는 뒷날 공자의 학통을 계승하였기에 증자로 존숭되었는데, 그가 한 말이 선생님의 어록에 남아 있다. 벼슬길에 들어선 전후 무렵의 공자 모습을 그대로 닮은 듯하여 여기에서 함께 전한다.    벼슬하고자 하는 선비는 뜻이 넓고 굳세지 않으면 안된다. 맡은 일은 무겁고 갈 길은 멀기 때문이다. 인정(仁政)을 소임으로 여기는 자이니, 또한 (그 책임이) 무겁지 않겠는가? 죽어서야 비로소 끝나니 어찌 장구한 임무가 아니겠는가? (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 仁以爲己任 不亦重乎 死而後已 不亦遠乎) -‘태백’편 7장   만년의 공자께서 노나라에 돌아와 노나라 사서인 를 편찬했다. 맹자는 그 일을 이렇게 적고 있다.  세상이 쇠퇴하고 정도가 미약해져서 괴이한 학설과 난폭한 행위가 또 생기어, 신하가 제 임금을 죽이는 일이 있고, 자식이 제 아비를 죽이는 경우도 있다. 공자께서 이런 세상을 두렵게 여기시어 춘추를 지으셨는데, 춘추는 천자가 하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를 알려고 하는 사람도 이 춘추를 볼 것이고, 나를 책하려는 사람도 이 춘추를 볼 것이다.’ - ‘등문공 하’.             *은 소설 형식을 취하다 보니 글쓴 이의 상상력이 불가피하게 개입되었다. 역사적 상상력을 통해 논어를 새롭게 해석해보자는 글쓴 이의 취지를 살리면서 동시에 독자들의 주체적이고 다양한 해석을 돕기 위해 원문을 글 말미에 소개한다. 소설 이상의 깊이 있는 논어읽기를 원하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2014년 11월호 연재부터 원문보기에 인용할 한글 번역본은 (이재호 정해,솔)와 (배병삼 주석, 문학동네)이다. 표기는 이(논어정의)와 배(한글세대가 본 논어)로 한다. 이밖에 다른 번역본을 인용할 때는 별도로 출처를 밝힐 것이다. 영문 L은 영역본 표시이다. 한문보다 영어가 더 익숙한 분들의 논어 이해를 추가하였다. 영역 논어는 제임스 레게(James Legge. 1815-1897. 중국명 理雅各)본을 사용하였다.    ***는 편명만 표시하고, 그 외의 문헌은 책명을 밝혔다.      ①헌문편 3장  子曰 士而懷居 不足以爲士矣(자왈 사이회거 부족이위사의)  이-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비이면서도 편안하게 거주하는 것만 생각한다면, 선비가 될 수 없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사(士)라면서 ‘편안한 생활(居)’을 염두에 두면, 이미 ‘사’라고 이를 수 없으리라.     L-The Master said, “The scholar who cherishes the love of comfort is not fit to be deemed a scholar.”    ②중도의 위치 및 도시 기능에 대해서는 현대의 여러 전문학자들이 다각도로 고증하고 있다. 글쓴이는 중도가 공실의 직할령이며, 지리적으로 가까운 감땅의 공실묘역을 관리하는 업무도 겸했다는 주장을 지지한다.    ③옹야편 3장  (…)原思爲之宰 與之粟九百 辭. 子曰 毋 以與爾隣里鄕黨乎(원사위지재 여지속구백 사. 자왈 무 이여이린리향당호)  이-원사(원헌)가 공자의 가신이 되었는데, 공자께서 봉급으로 곡색 9백을 주니 이를 사양하므로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사양하지 말고, 그대의 이웃 마을과 고을 사람들에게 주도록 하여라.”  배-원사가 선생님의 비서가 되었다. (녹봉으로) 곡식 9백을 주었는데, 사양하였다. 선생님 말씀하시다. 아서라! (받지 않을 양이면) 네 이웃과 고을 사람들에게 나눠주려무나.  L-Yuan Sze being made governor of his town by the Master, he gave him nine hundred measures of grain, but Sze declined them. The Master said, “Do not decline them. May you not give them away in the neighborhoods, hamlets, towns, and villages?”    ④향당편 12장   廐樊 子退朝曰 傷人乎不問馬(구분. 자퇴조왈 상인호불문마)  이-마구간이 불에 탔는데, 스승께서 조회를 마치고 물러나와 말씀하셨다. “혹시 사람이 다치지는 아니했는가?” 그런 다음에 말에 대해서 물으셨다.  배-마굿간이 불탔다. 선생님, 퇴청하여 말씀하시다. 사람이 상하였느냐?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시다.  (*이재호는 일반적인 독법인 ‘傷人乎, 不問馬’ 대신  ‘傷人乎不, 問馬’로 끊어 읽어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L-The stable being burned down, when he was at court, on his return he said, “Has any man been hurt?” He did not ask about the horses.    ⑤ ‘공자세가’ 중  (…)“정공은 공자를 중도의 재로 삼았는데, 일년 뒤에 사방의 각 제후들이 모두 공자가 다스리는 방법을 따라했다. 이로말미암아 공자는 중도의 재에서 사공이 되었고, 사공에서 다시 대사구가 되었다.”    ⑥태백편 13장  (…)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천하유도즉견 무도즉은). 邦有道 貧且賤焉 恥也 邦無道 富且貴焉 恥也(방유도 빈차천언 치야 방무도 부차귀언 치야)  이-천하가 태평하면 나가서 벼슬하고, 천하가 문란하면 숨어서 살아야 한다. 나라가 태평할 때에 가난하고 비천한 생활을 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며, 나라가 문란할 때에 부유하고 귀달(貴達)한 생활을 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다.    배-천하에 도가 있으면 나타나고, 도가 없으면 숨는 것. 나라에 도가 있을 적엔 가난하고 천한 것이 부끄러움이요, 나라에 도가 없을 적엔 넉넉하고 귀한 것이 부끄러움이니라.  L-When right principles of government prevail in the kingdom, he will show himself; when they are prostrated, he will keep concealed. When a country is well-governed, poverty and a mean condition are things to be ashamed of. When a country is ill- governed, riches and honour are things to be ashamed of.    ⑦안연편 14장  子曰 不患無位 患所以立 不患莫己知 求爲可知也(자왈 불환무위 환소이립 불환막기지 구위가지야)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벼슬자리가 없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자기가 벼슬자리에 설 수 있는가를 걱정할 것이며, 남이 나를 알아주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남이 나를 알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자리 없음을 근심하지 말고, 서지 못하는 까닭을 근심하라. 자신을 알아주지 않음을 근심하지 말고, 알 수 있게 되기를 구하라.  L-The Master said, “A man should say, I am not concerned that I have no place, I am concerned how I may fit myself for one. I am not concerned that I am not known, I seek to be worthy to be known.”    ⑧ 위령공편 18장  子曰 君子 病無能焉 不病人之不己知也(자왈 군자 병무능언 불병인지불기지야)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자기에게 재능이 없는 것을 근심하고, 남이 자기 재능을 알아주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지 않는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군자는 자신의 무능함을 병통으로 여길 뿐,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음은 병통으로 여기지 않느니.  L-The Master said, “The superior man is distressed by his want of ability. He is not distressed by men’s not knowing him.”     ⑨자로편 6장  子曰 其身正 不令而行 其身不正 雖令不從(자왈 기신정 불령이행 기신부정 수령부종)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자기 자신이 바르게 행동하면 백성들에게 명령하지 않아도 명령이 시행되고, 자기 자신이 바르게 행동하지 못하면 백성들에게 명령하더라도 그들이 명령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그 행실(身)이 바르다면 명령하지 않아도 행해질 터이나, 그 행실이 바르지 않다면 명령한들 좇지 않으리라.  L-The Master said, “When a prince’s personal conduct is correct, his government is effective without the issuing of orders. If his personal conduct is not correct, he may issue orders, but they will not be followed.”    ⑩자로편 13장  子曰 苟正其身矣 於從政乎 何有. 不能正其身 如正人何(자왈 구정기신의 어종정호 하유 불능정기신 여정인하)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진실로 자기 몸을 바르게 한다면 정사를 하는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이와 반대로) 자기 몸을 바르게 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을 바르게 할 수 있겠는가.”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정녕 자기 행실이 올바르다면 정치에 종사하는데 무슨 문제가 있을까! 또 제 행실도 바로잡지 못하는 주제라면 남은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을까!      L-The Master said, “If a minister make his own conduct correct, what difficulty will he have in assisting in government? If he cannot rectify himself, what has he to do with rectifying others?”    ⑪ 학이편 5장  子曰 道千乘之國 敬事而信 節用而愛人 使民以時(자왈 도천승지국 경사이신 절용이애인 사민이시)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천승(제후)의 나라를 다스리는데 있어, 일을 신중히 처리하면서 백성에게 믿도록 하며, 나라의 제반 용도를 절약하고서 백성을 사랑하며, 백성을 사역할 적엔 제 때에 맞게 해야 할 것이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천승의 나라를 다스림에는 일을 어렵게 여기고 미쁘게 하며, 쓰임새는 맞춤하게 하고, 사람을 아끼며, 때에 맞춰 백성을 부려야 하느니.  L-The Master said, “To rule a country of a thousand chariots, there must be reverent attention to business, and sincerity; economy in expenditure, and love for men; and the employment of the people at the proper seasons. ”    ⑫자로편 4장  (…)上 好禮則民莫敢不敬 上 好義則民莫敢不服 上 好信則民莫敢不用情. 夫如是則四方之民 襁負其子而至矣.(상 호례즉민막감불경 상 호의즉민막감불복 상호신즉민막감불용정. 부여시즉사방지민 강부기자이지의.)  이-윗사람이 예절을 좋아하면 백성들이 윗사람을 공경하지 않을 수 없고, 윗사람이 의리를 좋아하면 백성들이 복종하지 않을 수 없고, 윗사람이 신의를 좋아하면 백성들이 성심을 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방에 있는 백성들이 어린애를 포대기에 싸서 등에 지고 모여들 것이다.  배-윗 사람이 예를 좋아하면 백성이 공경하지 않을 리 없고, 윗 사람이 의를 좋아하면 백성이 복종하지 않을 리 없으며, 윗사람이 믿음을 좋아하는데 백성이 마음 주지 않을 리 없다. 대저 이렇게만 하면, 온 사방에서 사람들이 애는 들쳐업고 세간은 짊어지고 몰려들 것이다.  L-If a superior love propriety, the people will not dare not to be reverent. If he love righteousness, the people will not dare not to submit to his example. If he love good faith, the people will not dare not to be sincere. Now, when these things obtain, the people from all quarters will come to him, bearing their children on their backs.    ⑬자로편 19장  樊遲問仁 子曰 居處恭 執事敬 與人忠 雖之夷狄 不可棄也(번지문인 자왈 거처공 집사경 여인충 수지이적 불가기야)  이-번지가 인에 대해서 물으니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몸을 지키는 도리는 공손해야 하고, 일을 처리하는 방법은 공경(근신)해야 하며, 사람들과 같이 일할 때는 성실할 것을, 비록 오랑캐의 나라에 가더라도 (이 세가지 일을)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배-번지가 인을 여쭈었다. 선생님 말씀하시다. 평소에는 공손하고, 일할 땐 조심스럽고, 사람들과 함께 할 땐 진심을 다하는 것이다. 비록 야만의 땅에 가서라도 버려서는 안되느니.  L-Fan Ch‘ih asked about perfect virtue. The Master said, “It is, in retirement, to be sedately grave; in the management of business, to be reverently attentive; in intercourse with others, to be strictly sincere. Though a man go among rude, uncultivated tribes, these qualities may not be neglected.”    ⑭자로편 17장  子夏爲거父宰 問政 子曰 無欲速 無見小利 欲速則不達 見小利則大事不成(자하거보재 문정. 자왈 무욕속 무견소리 욕속즉부달 견소리즉대사불성)  이-자하가 거보 고을의 장관이 되어 정사에 대해서 물으니,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일을 빨리 하려고 서두르지 말아야 하고, 작은 이익을 보고 일을 시작하지 말아야 할 것이니, 빨리 하려고 서두르면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게 될 것이고, 작은 이익을 보고 일을 시작하면, 큰일을 이루지 못하게 될 것이다.”  배-자하가 거보 땅의 책임자가 되어, 정치를 여쭈었다. 선생님 말씀하시다. 빨리 이루려고 서둘지 말고, 소소한 이익에 연연하지 말아라. 빨리 이루려고 서둘면 끝을 보지 못하고, 소소한 이익에 연연하면 큰일을 이루지 못하나니.  L-Tsze-hsia, being governor of Chu-fu, asked about government. The Master said, “Do not be desirous to have things done quickly; do not look at small advantages. Desire to have things done quickly prevents their being done thoroughly. Looking at small advantages prevents great affairs from being accomplished.”    ⑮위정편 18장  子張學干祿 子曰 多聞闕疑 愼言其餘則寡尤 多見闕殆, 愼行其餘則寡悔 言寡尤 行寡悔 祿在其中矣(자장학간록 자왈 다문궐의 신언기여즉과우 다견궐태. 신행기여즉과회 언과우 행과회 녹재기중의)  이-자장이 (벼슬을 하여) 녹봉을 구하는 방법을 물으니 스승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많이 듣고서도 의심나는 것은 빼놓고 그 나머지만 조심스럽게 말한다면 과실이 적을 것이며, 많이 보고서도 미심(未審)한 것을 빼놓고 그 나머지만 조심스럽게 시행한다면 뉘우침이 적을 것이니, 자기의 한 말에 과실이 적고 자기가 행한 일에 뉘우침이 적으면 녹봉은 그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배-자장이 벼슬 구하는 법을 배우고자 하였다. 선생님 말씀하시다. 많이 듣고 미심쩍은 것은 제쳐두고 나머지를 조심스레 말하면 허물이 적으리라. 널리 보고 위태로운 것은 제쳐두고 나머지를 조신하게 행동으로 옮기면 뉘우칠 일이 적으리라. 말에 허물이 적고, 행동에 뉘우침이 적으면 벼슬은 그 가운데 있느니.  L-Tsze-chang was learning with a view to official emolument. The Master said, “Hear much and put aside the points of which you stand in doubt, while you speak cautiously at the same time of the others:-- then you will afford few occasions for blame. See much and put aside the things which seem perilous, while you are cautious at the same time in carrying the others into practice:-- then you will have few occasions for repentance. When one gives few occasions for blame in his words, and few occasions for repentance in his conduct, he is in the way to get emolument.”    자로편 20장  子貢 問曰何如 斯可謂之士矣. 子曰 行己有恥 使於四方 不辱君命 可謂士矣. 曰 敢問其次 曰 宗族 稱孝焉 鄕黨 稱弟焉. 曰 敢問其次 曰 言必信 行必果 갱갱然小人哉 抑亦可以爲次矣. 曰 今之從政者 何如 子曰 噫 斗소之人 何足算也(자공 문왈 하여 사가위지사의. 자왈 행기유치 사어사방 불욕군명 가위사의. 왈 감문기차 왈 종족 칭효언 향당 칭제언. 왈 감문기차왈 언필언 행필과 갱갱연소인재 억역가이위차의. 왈 금지종정자 하여 자왈 희 두소지인 하족산야)  이-자공이 물었다. “(처신을) 어찌 해야만 이를 (벼슬할 수 있는) 선비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 (잘못이 있으면) 부끄러운 마음이 있어야 하며, 사방 여러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임금의 명령을 욕되게 하지않는다면 (벼슬할 수 있는) 선비라고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다.” 자공이 그 다음에 대해 물으니, 스승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종족(친족)들이 효성이 있다고 칭찬하고, 향당(고을)에서 공손하다고 칭찬하는 인물이니라.” 자공이 그 다음에 대해 다시 물으니,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말은 반드시 믿음있게 하고 행실은 반드시 과단성 있게 하는 것은 딱딱해서 주변성이 없는, 즉 견식과 도량이 좁은 소인이지만, 그래도 그 다음은 될 것이다.” 자공이 말하였다. “요즈음 정치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아아. 기량이 작은 사람들을 어찌 낱낱이 셀 수가 있겠는가?”  배-자공이 여쭈었다. 어찌해야 ‘사(士)답다’고 할 수 있을는지요? 선생님 말씀하시다. 자기 행실을 부끄러워할 줄 알고, 외국에 사신으로 가서 임금의 명을 욕되게 하지않으면, ‘사답다’고 이를 만하리라. (자공이) 말하였다. 감히 그 다음을 여쭙습니다. 말씀하시다. 온 집안이 ‘효성스럽다’고 칭찬하고, 온 마을이 ‘공손하다’고 칭찬하는 사람이지. 말하였다. 또 그 다음을 여쭙습니다. 말씀하시다. 말을 하면 반드시 (실천하니) 믿음직스럽고, 업무상에는 반드시 끊고 맺음이 분명한 사람이지. 꼬장꼬장해서 소인배라고들 하겠지만, 억지로 또 그 다음은 될 게야. 말하였다. 오늘날 정치에 종 사하는 사람들은 어떤지요? 선생님 말씀하시다. 아이고! 한 말 닷 되나 될까 말까 한 놈들을 어찌 셈에 넣는단 말이냐.  L-Tsze-kung asked, saying, “What qualities must a man possess to entitle him to be called an officer?” The Master said, “He who in his conduct of himself maintains a sense of shame, and when sent to any quarter will not disgrace his prince‘s commission, deserves to be called an officer.” Tsze-kung pursued, “I venture to ask who may be placed in the next lower rank?” And he was told, “He whom the circle of his relatives pronounce to be filial, whom his fellow-villagers and neighbours pronounce to be fraternal.”  Again the disciple asked, “I venture to ask about the class still next in order.” The Master said, “They are determined to be sincere in what they say, and to carry out what they do. They are obstinate little men. Yet perhaps they may make the next class.” Tsze-kung finally inquired, “Of what sort are those of the present day, who engage in government?” The Master said “Pooh! they are so many pecks and hampers, not worth being taken into account.”    위령공편 20장   子曰 君子 求諸己 小人 求諸人(자왈 군자 구제기 소인 구제인)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자신에게서 (과실이 있는가를) 찾고, 소인은 다른 사람에게서 (과실이 있는가를) 찾는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군자는 스스로에게서 (문제의 원인을) 구하고, 소인은 남으로부터 구하더구나.  L-The Master said, “What the superior man seeks, is in himself. What the mean man seeks, is in others.”    위령공편 14장  子曰 躬自厚而薄責於人 則遠怨矣(자왈 궁자후이박책어인 즉원원의)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자기 자신을 많이 책망하면서도 다른 사람은 적게 책망한다면, 사람들의 원망에서 벗어날 것이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저 자신은 몹시 꾸짖고, 남 탓하기는 가볍게 한다면 원망을 멀리할 수 있으리라.      L-The Master said, “He who requires much from himself and little from others, will keep himself from being the object of resentment.”     안연편 16장   子曰 君子 成人之美 不成人之惡 小人 反是(자왈 군자 성인지미 불성인지악 소인 반시)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남의 좋은 점을 도와 이루어 주고, 남의 나쁜 점을 도와 이루어 주지는 않는데, 소인은 이와 반대되는 행동만 한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군자는 남의 장점을 이루게 하지만 단점은 고쳐준다. 소인은 그와 반대로 하나니.    L-The Master said, “The superior man seeks to perfect the admirable qualities of men, and does not seek to perfect their bad qualities. The mean man does the opposite of this.”    자로편 21장  子曰 不得中行而與之 必也狂견乎 狂者 進取 견者 有所不爲也(자왈 부득중행이여지 필야광견호 광자 진취 견자 유소불위야)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중도를 실천하는 사람을 얻어 함께 일할 수 없다면, 반드시 광자나 견자를 택할 것이다. 광자는 진취성이 있는 사람이고, 견자는 절대로 하지 않는 일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언행에 적실한 사람(中行)’을 얻어 함께 하지 못한다면, 반드시 ‘광견한 사람(광견)’을 얻으리라! 광자는 진취하고, 견자는 (차마) 하지 않는 바가 있기 때문이지.   L-The Master said, “Since I cannot get men pursuing the due medium, to whom I might communicate my instructions, I must find the ardent and the cautiously-decided. The ardent will advance and lay hold of truth; the cautiously-decided will keep themselves from what is wrong.”    위령공편 21장  子曰 君子 矜而不爭 群而不黨(자왈 군자 긍이부쟁 군이부당)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긍지를 가지면서도 남과 다투지 아니하며, 여러 사람과 같이 어울리면서도 편당을 만들지는 않는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군자는 자부하되 다투지 않으며, 어울리되 패를 짓지는 않는다.     L-The Master said, “The superior man is dignified, but does not wrangle. He is sociable, but not a partizan.”    자로편 24장  子貢問曰 鄕人 皆好之 何如 子曰 未可也  鄕人 皆惡之 何如 子曰 未可也 不如鄕人之善者好之 其不善者惡之(자공문왈 향인 개호지 하여. 자왈 미가야. 향인 개오지 하여. 자왈 미가야. 불여향인지선자호지 기불자오지)  이-자공이 물었다. “고을 사람들이 모두 저를 좋아하면 어떻습니까?”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옳지 못한 일이다.” “고을 사람들이 모두 저를 미워하면 어떻습니까?”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그것도 옳지 못한 일이다. 고을 사람들 중 착한 사람은 나를 좋아하고, 착하지 못한 사람은 나를 미워하는 것만 못하다.”    배-자공이 여쭈었다. 마을 사람들이 다 좋아하면 어떻습니까? 선생님 말씀하시다. 충분하지 않다. 마을 사람들이 다 싫어하면 어떻습니까? 선생님 말씀하시다. 충분하지 않다. 마을 사람들 가운데 선한 자가 좋아하고, 선하지 않은 자가 싫어함만 못하느니.  L-Tsze-kung asked, saying, “What do you say of a man who is loved by all the people of his neighborhood?” The Master replied, “We may not for that accord our approval of him.” “And what do you say of him who is hated by all the people of his neighborhood?” The Master said, “We may not for that conclude that he is bad. It is better than either of these cases that the good in the neighborhood love him, and the bad hate him.”    안연편 13장  子曰 聽訟 吾猶人也 必也使無訟乎(자왈 청송, 오유인야, 필야사무송호)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송사를 판결하는 것은 나도 남들처럼 할 수 있으나, (먼저)반드시 송사가 없도록 해야 하겠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송사를 듣는 것이야 나도 남만 못하지 않겠지만, 반드시 송사가 없도록 해야 하리라.  L-The Master said, “In hearing litigations, I am like any other body. What is necessary, however, is to cause the people to have no litigations.”    안연편 6장  子張問明 子曰 浸潤之讒 膚受之소 不行焉 可謂明也已矣. 浸潤之讒 膚受之소 不行焉 可謂遠也已矣(자장문명 자왈 침윤지참 부수지소 불행언 가위명야이의. 침윤지참 부수지소 불행언 가위원야이의)  이-자장이 명철함에 대해 물으니,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물이 차츰 젖어 스며드는 듯한 참소와 살결에 와 닿는 듯한 하소연이 행해지지 않는다면 명철하다고 할 수가 있다. 물이 차츰 젖어 스며드는 듯한 참소와 살결에 와 닿는 듯한 하소연이 행해지지 않는다면 먼 장래를 본다고 말할 수가 있다.”  배-자장이 투명성을 여쭈었다. 선생님 말씀하시다. 가슴에 젖어드는 참소와 살갗을 파고드는 하소연에 초연할 수 있다면 ‘투명하다’고 이를 수 있으리라. 정녕 가슴에 젖어드는 참소와 살갗을 파고드는 하소연에 초연할 수 있다면, ‘멀리 보는 안목을 가졌다’고 이를 수 있으리라.  L-Tsze-chang asked what constituted intelligence. The Master said, “He with whom neither slander that gradually soaks into the mind, nor statements that startle like a wound in the flesh, are successful, may be called intelligent indeed. Yea, he with whom neither soaking slander, nor startling statements, are successful, may be called farseeing.”    위정편 3장  子曰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자왈 도지이정 제지이형 민면이무치. 도지이덕 제지이례 유치차격)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백성을 정령으로써 인도하고 형벌로써 다스리면, 백성들이 형벌은 면하여도 부끄러운 마음은 없어지게 된다. 백성을 도덕으로써 인도하고 예의로써 다스리면, 백성들이 부끄러운 마음도 있게 되고 또한 선행에 이르게 될 것이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정법으로 이끌고 형벌로 가지런히 하려 들면, 백성들은 면하려고만 하지 부끄러움을 느끼지는 않는다. (반면) 덕으로 인도하고 예로서 가지런히 하면, (백성들은) 부끄러워할 뿐 아니라 또 (스스로) 바로잡는다.  L-The Master said, “If the people be led by laws, and uniformity sought to be given them by punishments, they will try to avoid the punishment, but have no sense of shame. If they be led by virtue, and uniformity sought to be given them by the rules of propriety, they will have the sense of shame, and moreover will become good.”    태백편 9장  子曰 民可使由之 不可使知之(자왈 민가사유지, 불가사지지)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백성들에게 지사(指使)할 만한 일은 지령(指令)을 따르게 하고, 지사할 수가 없는 일은 (가르쳐서) 알도록 해야만 한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백성들은 따르게 할 수는 있어도, (까닭을) 알게 할 수는 없더구나.  L-The Master said, “The people may be made to follow a path of action, but they may not be made to understand it.”    태백편 7장  曾子曰 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 仁以爲己任 不亦重乎 死而後已 不亦遠乎(증자왈 사불가이불홍의. 임중이도원. 인이위기임, 불역중호. 사이후이, 불역원호)   이-증자가 말하였다. “선비는 도량이 넓고 의지가 굳세지 않으면 안되니 책임이 무겁고 앞길은 멀기 때문이다. 인(仁)으로써 자기의 책임을 삼았으니 책임이 또한 무겁지 아니한가. 죽은 뒤에야 책임이 끝날 것이니 앞길이 또한 멀지 않겠는가.”  배-증자가 말하였다. 사(士)는 뜻이 넓고 굳지 않아서는 안 되리라. 맡은 임무는 무겁고, 길은 멀기 때문이다. 인으로써 자임하였으니 또 무겁지 아니한가! 죽어서야 마칠 것이니 또 멀지 아니한가!  L-The philosopher Tsang said, “The officer may not be without breadth of mind and vigorous endurance. His burden is heavy and his course is long. Perfect virtue is the burden which he considers it is his to sustain;-- is it not heavy? Only with death does his course stop;-- is it not long?”   한겨레 휴심정 이인우  
2    공자, 노자를 만나다<상> 댓글:  조회:2460  추천:0  2015-03-27
【논어명장면】공자, 노자를 만나다 이인우     子曰 無爲而治者 其舜也與 夫何爲哉 恭己正南面而已矣   자왈 무위이치자 기순야여 부하위재 공기정남면이이의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억지로 하지 않으면서 저절로 다스린 이는 순임금이시라!    대저 무엇을 하셨겠는가? 몸을 공손히 하고 바르게 남면하 시어 임금의 자리를 지키셨을 뿐이다! -‘위령공’편 4장           1. 공자의 스승 공자는 박학다식한 사람이었다. 그는 묵묵히 이해할 뿐(默而識之-술이편 2장), 결코 아는 체 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도 그의 지식은 저절로 밖으로 드러났다. 수십년을 함께 한 제자들은 그런 스승을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生而知之者)이 아닐까 여겼을 정도였다. 그러나 공자는 제자들이 타고난 재능을 믿고 공부를 소홀히 할까 염려하여 자주 이렇게 말했다.    열 집이 사는 작은 마을에도 반드시 나만큼 성실하고 신의있는 사람이 있겠지만, 나만큼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十室之邑 必有忠信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也①) -‘공야장’편 27장.    나는 결코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이 아니다. 옛 것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구하는 자일 뿐이다.(我非生而知之者 好古敏以求之者也) -‘술이’편 19장.   어떤 이들은 공자의 학문적 배경과 교수법의 원천을 궁금해 하기도 했다. 공자는 이런 의문을 가진 제자들에게 진지하게 말하곤 했다.    그대들은 내가 감춰놓고 가르쳐 주지 않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시는가? 나는 결코 그런 일이 없네. 나는 그대들과 더불어 함께 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그것이 바로 나, 구(丘)의 본모습일세.(二三子 以我爲隱乎 吾無隱乎爾 吾無行而不與二三子者 是丘也) -‘술이’편 23장.   공자에게는 따로 계통을 지을만한 스승이 없었다는 사실을 종내 믿으려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공자 자신도 이런 질문이 종종 지겨웠던지, “어려서 비천하게 살았기 때문에 이것 저것 줏어들은게 많았지(吾少也賤 故多能鄙事-‘자한’편 6장)”라고 말하며 웃어넘기곤 했다. 누군가 그에게 가르쳐 주는 사람 없이 공부하는 방법에 대해 물었을 때는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 가운데 반드시 스승을 삼을 만한 사람이 있는 법, 좋은 점을 보면 본받아 배우고 나쁜 점을 보면 반성하면서 배운다.”(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②)-‘술이’편 21장.   스승이란 어떤 사람인가라고 물었을 때는 이렇게 말했다.    옛 것을 익히고 그것으로 미루어 새로운 것을 안다면 남의 스승이 될 자격이 있다.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③)-‘위정’편 11장.   훗날 제자 자공은 공자가 학문적 문파가 없음을 의아해 하는 어떤 자와 이런 대화를 남겼다.    위나라 대부 공손조가 자공에게 물었다. “공자께서는 어디서 배웠습니까?”(仲尼焉學)  “문왕과 무왕의 가르침이 아직 땅에 떨어지지 않고 사람들 사이에 남아 있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그 가운데 큰 것을 알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라도 작은 것을 배우게 되지요. 위대한 성현의 도가 없는 곳이 없는데, 왜 선생님이 배울 곳이 없겠습니까? 선생님께서는 따로 스승이 없으셨습니다.” (子貢曰 文武之道未墜於地 在人 賢者識其大者 不賢者識其小者 莫不有文武之道焉 夫子焉不學 而亦何常師之有)-‘자장’편 22장.   *영화 중에서   2. 노자는 공자의 스승인가 자공의 분명한 회고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터인가 공자에게 스승이 있었다는 주장이 생겨났다. 공자에게 예(禮)를 가르쳤다고 전해지는 사람은 노자(老子)라고 존칭되는 어떤 인물이다. 훗날 도가(道家)에 의해 자신들의 비조(鼻祖)로 추앙된 바로 그 철인(哲人)이다. 노자가 공자의 스승이었다는 설은 노자를 높이고 공자를 낮추려던 도가우위 시대의 산물임은 불문가지이다. 그러나 사상투쟁이 낳은 조작이라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노자가 ‘공자의 동시대인으로 실존한 인물’이라는 믿음은 매우 오래동안 지속되었다. 어떤 설화가 생겨나 수천년을 전승할 때는 반드시 그럴만한 ‘실체적 진실’이 계기가 되었기 마련이다. 나, 이생도 그 ‘설화의 실체적 기원’이 궁금하여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후, 여러 지방을 여행하며 전설의 진원(震源)과 진위(眞僞)를 추적한 적이 있다. 동양사상의 양대 거봉인 공자와 노자는 정말로 조우한 적이 있는가? 그랬다면 두 사람은 어떤 영향을 주고 받았을까? 노자는 역사와 설화가 공히 전하는 ‘노담(老聃)’이라는 바로 그 인물인가? 이 이야기는 이런 궁금증을 좇아 중원 일대를 떠돈 한 늙은 순례자의 기록이다.   3. 공자가 존경한 노팽 공자가 따로 스승이 없이 대성(大聖)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공자 생전에도 그렇고, 사후의 사람들에게도 매우 경이롭게 여겨졌던 것 같다. 그래서 사람들은 공자의 어록과 행적을 근거로 공자가 영향을 받았음직한 사람들을 꼽아보기도 했다. 공자가 고대 관제(官制)에 밝은 것은 젊어서 담(炎+방)자에게 배운 탓이고, 음악에 정통한 것은 장홍(장弘)과 사양자(師襄子)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또 공자가 존경한 현자로는 주(周)나라의 노자(老子), 위나라의 거백옥(거伯玉), 제나라의 안평중(晏平仲·안영), 초나라의 노래자(老萊子), 정나라의 자산(子産), 노나라의 맹공작(孟公綽) 등( ‘중니제자열전’)이 꼽혔다. 이 가운데 특별히 주목되는 사람이 ‘노자’이다. ‘노자’는 열거된 ‘현자’ 가운데 유일하게 실존 자체가 의문시되는 사람임에도, 공자에게 직접 ‘예(禮)를 가르치고, 일종의 도덕적 각성까지 촉구한 언술을 남긴 사람’으로 사서(史書)에까지 올라 있다. 게다가 유가와 쌍벽을 이룬 도가(道家)의 비조로 추존되고 있으니, 만약 그가 공자와 동시대를 살면서 사상을 교류하였다면 이는 인류문화사의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후대 사람들의 ‘기록’에도 불구하고 정작 선생님의 어록에는 노자라는 사람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에는 이름이 비슷해 후대의 일부 사람들이 이 사람이 바로 노자가 아닐까 추정한 노팽(老彭)이라는 사람이 딱 한번 등장한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서술하되 짓지 않음은 옛 것을 믿고 좋아하기 때문이니, 나는 이를 몰래 우리 노팽과 견주어보노라. (子曰 述而不作 信而好古 竊比於我老彭④)-‘술이’편 1장.   내가 노팽이라는 사람에 대해 고제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유사(儒士) 출신의 제자들은 대개 이 노팽이라는 ‘고대인’을 알고 있었다. “노팽은 선생님이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고대 무축(巫祝;원시 제정일치 사회의 군장이자 제사장. 무당의 원류이다)의 한 사람이다. 그는 유명한 열명의 대무(大巫) 중 네번째 서열을 가진 무팽(巫彭)이란 분이며⑤, 축도문을 낭송하고 이를 전승하는 집단인 사무(史巫)의 원조격이다. 고천의식(告天儀式)을 치를 때 훌륭한 무사(巫史)는 하늘의 뜻을 정확히 전달할 뿐, 사사로히 의미를 더하거나 빼지 않았다. 술이부작(述而不作)의 전통은 여기서 비롯되었으니, 선생님께서는 저 위대한 현자에 당신의 구도(求道) 정신을 견주어 겸손하게 자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노팽(老彭)의 노는 무팽(巫彭)의 존칭인가요?” “노(老)란 나이가 많고 경험과 지식이 풍부해 남의 스승이 될만한 사람을 뜻하지. 주 왕실에서도 임금의 스승을 ‘삼로’(三老)라 했다. 여러 제후국에서도 주나라의 예를 따라 종종 ‘나라의 삼로(三老)를 존중한다’며 고을의 현명한 노인들을 우대하였는데, 이때의 ‘삼로’ 역시 ‘나이 많은 현자들’을 가리켰다. 민간에서도 농사 경험이 많은 지혜로운 농부를 `노농'(老農)이라 했는데, 선생님께서도 그런 표현(子曰 吾不如老農 -`자한'편 4장)을 쓰신 적이 있으셨지."   그럼 노팽이 노자가 아니라면 노자는 그러면 누구를 가리키는가?   4. 사실(事實)과 사실(史實) 선생님의 어록에 언급이 없음에도, 노자라는 사람이 존재하여 공자에게 예를 전수했다는 이른바 ‘문례(問禮)설화’가 역사적 사실로 ‘공인’된 데는 역사가 사마천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사마천은 중국사를 통틀어 최고의 역사가로 꼽히는 인물. 그가 자신의 사서에 노자를 실존인물로 다룬 후부터 사마천을 신뢰하는 후학들이 대부분 그 기록을 따랐다. 만약 사마천이 문례설화를 역사적 사건으로 간주하지 않았다면, 공자와 노자의 조우(遭遇)설은 필시 하나의 ‘설’로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사마천은 ‘공자세가’에서 이때의 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노나라의 남궁경숙(南宮敬叔)이 노나라 군주에게 말했다. “공자와 함께 주나라에 가고자 청합니다.” 이 말을 듣고 노나라 군주는 그에게 수레 한 대와 말 두 마리 그리고 어린 시종 한 명을 갖추어 주고 주나라(낙양)에 가서 예를 물어보게 했다. 공자는 이때 노자를 만났다고 한다. - ‘공자세가’      노자는 초나라 고현 여향 곡인리 사람으로 성은 이(李)씨, 이름은 이(耳), 자는 백양(伯陽), 시호는 담(聃)이다. 그는 주나라의 장서를 관리하는 사관(史官)이었다. 공자가 주나라에 가 머무를 때 노자에게 ‘예’를 물었다(孔子適周 將問禮於老子) - ‘노자·한비열전’   이를 종합하면, 노자는 주나라 사관(史官)을 지낸 사람으로, 공자가 노나라 군주의 명을 받아 주나라 낙양에 갔을 때 만나게 되어 그로부터 예를 배웠다는 사람을 가리킨다. 공자가 노자를 찾아가 예를 배웠다는 이 ‘문례(問禮) 설화’는 매우 유명하여, 역사가 사마천이 생존했던 시대에도 공자와 노자의 사상을 말하는 사람치고 한두번 화제로 삼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장주(莊周;의 저자. 서기전 369~289?)를 비롯한 후대 사상가들이 공자와 노자의 대화를 내세워 자신의 논지를 전개하게 되면서 사상사의 측면에서도 노자의 실존이 확고해졌다. 춘추전국 시대 제자백가의 쟁명을 거쳐 진한(秦漢) 시기의 통치이념 수립 과정에서 공자와 노자의 사상은 치열하게 대립하는 관계가 되었고, 공자 사후 3백여년 뒤의 사람인 사마천이 살던 한나라 시대에 이르러서는 이미 양립불가(兩立不可)의 세계로까지 여겨졌다. 사마천은 당시 두 학파간의 대립이 얼마나 심했는 지를 이렇게 기록해 놓고 있다.    “세상에서 노자의 학문을 배우는 이들은 유가 학문을 내치고, 유가 학문을 배우는 이들은 역시 노자의 학문을 내쳤다. ‘길이 다르면 서로 도모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정말 이러한 것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世之學老子則출(물리칠출 絲+出)儒學 儒學亦출老子 道不同不相爲謀 豈謂是邪) - ‘노자· 한비열전’⑥   그러나 나, 이생이 공문의 일꾼이 되어 여러 문도들과 생활할 때 그 누구로부터도 노자라고 존칭되는 현자에 대해 들은 적이 없었다. 만약 공자보다 나이가 많고 대중적으로 인기가 높은 노자라는 저명한 현자가 있어서 공자에게 특별한 가르침을 전수하였다면, 민간 학숙으로서 학생들을 유치해야 하는 공문(孔門)의 입장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선전하지 않을 이유가 없을텐데 말이다. 선생님 생전이든 사후이든 노자라는 인물이 존숭되거나 혹은 폄하된 흔적이 선생님의 어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노자가 후대에 도가 사상의 비조로 떠받들어졌을지라도, 적어도 이 시기에 노자는 대중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설령 그런 현인이 있었다 해도 그는 ‘여러 현인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그의 사상도 당시에는 공자 사상과 대립되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우호적인 통섭의 관계였을 것이다. 현대의 학자들이 논구한대로 공자가 살던 시기는  여러 사상들이 아직 완전히 분화되기 전이었다. 유가와 도가는 후대로 가면서 점차 사상적 분화과정을 밟았지만, 한동안은 자신들도 어쩌지 못할 동출이명(同出異名;이름이 다르지만 연원을 같이 함)의 ‘혈통’을 나눠가지고 있었다.    아무튼 사마천이 에서 말한 노자는 도가의 원조가 된 노자, 바로 그 사람이지만, 도가의 원조인 노자라는 사람이 공자와 같은 시대를 살며, 공자에게 예를 교수한 바로 그 사람이라고는 사마천 자신도 확신하지 못했다. 사마천은 노자가 공자와 동시대를 산 주나라 사관 노담이라고 해놓고 뒤에 가서는, 어쩌면 초나라 사람 노래자, 혹은 훗날의 주나라 태사 담이 노자일지 모른다는 식(周太史 담…或曰담卽老子 或曰非也-상동)의 여운을 남겼다. 사마천의 시대에 벌써 노자는 그 실존 여부를 규명하기 어려운 인물이었던 것이다. 사마천은 사실을 기록해야 할 사가로서 노자라 불리는 대사상가의 생몰조차 적시할 수 없자, 그를 그냥 은군자(隱君子), 즉 ‘숨어사는 군자’라고 얼버무리고 말았다.(이상 ‘노자·한비열전’)   나, 이생의 추적 결과, ‘최초의 노자’는 분명 노담이었다. 내가 여러 고제들의 증언을 종합한 결과, 공자가 주나라 수도 낙양에 갔을 때 노담을 만났으며, 그가 훗날 노자라는 인물을 형성하는 최초의 계기가 되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비록 사마천은 시대적 한계로 인해 노자의 실체를 얼버무리고 말았지만, 가장 자연스러운 결론은 ‘노자’가 여러 세대에 걸쳐 창조된 ‘역사화된 인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최초에 실존한 노자’는 ‘최후에 완성된 노자’가 아니지만, 노자라는 인물의 기원이 된 것은 역사적 사실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란 것이 나, 이생의 결론이다. 그렇지 않다면 ‘노담=노자’라는 등식이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성립 과정을 거치지 않았을 것이며, 공자 사상에 비판적이었던 경쟁자들이 노담의 존재를 그렇게까지 열심히 활용하지는 않았으리라.   노담이 ‘최초의 노자’일 것이란 ‘물증’도 있다. (이라고도 한다)라는 5천 자의 짧은 책의 존재이다. 이 책 내용을 분석해 보면, 공자보다 훨씬 후대에 여러 사람의 참여로 형성된 위작(僞作)임을 알 수 있는 내용이 많이 포함돼 있다. 그러나 책의 기본 뼈대나 원천 사상의 표현방식은 한 사람의 일관된 관점이나 집필이 아니면 나오기 어려운 측면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이는 적어도 이 책이 최초에 쓰여질 때는 단일 저자의 작품으로 출발했음을 의미한다. 그 ‘최초의 저자’가 바로 ‘최초의 노자’라면, 그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현재까지 노담을 제외하고는 달리 상정할 만한 인물이 없다.(김용옥, )   그렇다면 노담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으며, 공자를 만났을 때 무슨 대화를 나누었을까? 공자는 그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던 것일까? 이에 대한 사서의 언급은 지극히 단편적이고, 유가의 경쟁자들이 남긴 진술은 일방적이어서 객관성을 담보하고 있지 못하다. 나는 두 사람이 나눈 육성이 궁금해 한동안 잠을 못이룰 지경이 되었다. 견디다 못해 어느날 부터인가는 자로와 안연 등 당시 낙양에 함께 갔던 고제들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질문하기 시작했다. “고제님들, 공자님과 함께 낙양에 갔던 이야기를 해주세요. 저도 낙양에 꼭 한 번 가보고 싶군요.” “선생님과 함께 주례를 수입하려고 갔던 주나라 낙양에서의 일 말이냐?” “그렇습니다. 그때가 언제였나요?”   *영화 중에서   5. 공자, 낙양에 가다 다시, 사마천의 기록에 주목해 보자.    노나라의 남궁경숙이 노나라 군주에게 말했다. “공자와 함께 주나라에 가고자 청합니다.” 이 말을 듣고 노나라 군주는 그에게 수레 한 대와 말 두마리 그리고 어린 시종 한 명을 갖추어 주고 주나라에 가서 예를 물어보게 했다. 공자는 이때 노자를 만났다고 한다. - ‘공자세가’   공자가 노자를 만났다는 사실을 고증하기 위해서는 이 기록이 제시하는 역사적 장면들을 꼼꼼히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기록에서는 특정되지 않았으나 공자 일행이 낙양에 간 시기가 언제인지도 매우 중요하다. 시점에 따라 공자와 노자의 나이 차이, 학문적 수준 정도 등을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기 때문인데, 이는 사상의 전수라는 점에서 무시할 수 없는 분석 조건이다.   “저, 이생이 듣기로 선생님이 주나라 수도 낙양에 가서 노자를 만난게 17~30살 사이거나, 34, 35살 때의 일이라고 하던데, 그것이 사실인가요?” “그렇지 않다. 선생님이 20대를 전후한 시기에 유(儒)의 일원으로 여러 지방을 다니며 상례(喪禮)를 수집하신 적이 있는데 그때 낙양에도 들렀을 수 있겠지만, 남궁경숙과 함께 낙양을 공식방문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또 선생님이 34살 때는 맹손씨의 수장인 맹희자의 3년상이 치러지던 때라 그의 아들인 남궁경숙이 먼 여행을 할 수 없었던 때였다.”    나, 이생이 고제들의 여러가지 증언과 당시 시대적 상황, 공자의 행적 등을 종합해 보건대, 선생님이 주례를 배우러 낙양을 방문한 시기는 노정공 4년 즉 서기전 506년 즈음이었다. 이때는 선생님이 제나라 망명에서 돌아와 곡부에 학숙을 다시 연지 4년째 되던 해로, 선생님의 나이 45~46살 때였다.⑦ 서기전 507년 노정공이 즉위한 지 3년째 되던 해 노나라는 각종 국가의식을 치르기 위한 예법과 시설물을 다시 상고(尙古)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노나라 집권당인 계손, 맹손, 숙손씨 등 삼환(三桓)은 내부 논의 끝에 주나라 왕실이 비전(秘傳)하고 있는 주례(周禮)에 관한 고례전장(古禮典章)을 구해 올 사절단을 낙양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때의 일을 자로는 이렇게 회고했다.   “당시 조정과 삼환은 심각한 정통성의 위기에 시달리고 있었다. 돌아가신 소공께서 7년을 망명해 있는 동안 조정과 공실의 예법이 많이 망실되거나 흐트러져 있었고, 임금 자리에 세자 대신 소공의 동생인 금상(노정공)이 계씨의 손에 옹립되면서 임금의 정통성도 많이 취약해져 있었다.” 염백우가 수염을 쓸며 말을 이었다. “정공이 즉위한 이듬해 궁궐 남문의 양관(兩觀)이 불에 탔지.( 노정공 2년) 알다시피 궁궐의 남문인 치문 양쪽에 망루가 있지 않은가. 양관은 국법과 조정의 정령(政令)을 게시하는 곳인데 이곳을 방화했다는 것은 명백한 반체제 시위였지. 게다가 임금께서 진(晉)나라에 조공을 갔다가 황하도 건너지 못하고 되돌아오자 삼환도 더 이상 이 상황을 방치해선 안되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지.” 삼환 세력은 민심 회복을 위해 무엇보다 취약해진 공실의 정통성을 조속히 안정시킬 필요성에 공감하게 되었고, 그 방책의 하나가 국가 예법의 복구였던 것이다. 주례(周禮)를 다시 전수해 옴으로써 주공(周公)의 아들 노공(魯公;이름이 백금이다)이 봉건된 나라라는 전통을 새롭게 확립하고자 했던 것이다.   주나라로서도 노나라 사절의 방문은 환영할 일이었다. 주나라는 십여년 전 왕실 내란에서 패배한 서왕 세력이 주나라 왕실의 고대 전적들을 가지고 초나라로 망명하는 바람에 예법시행에 중대한 공백을 맞고 있었다. 주왕실은 내란이 수습되고 낙양이 안정되자 동성(同姓)의 제후국들이 소장한 주왕실 관련 전적들을 왕실도서관에 바치도록 했다. 주나라 왕실 입장에서 보면 주공의 봉국으로 유일하게 왕례(王禮)로 제사하고 있는 노나라의 사례는 가장 밀접한 상고 대상이었을 것이며, 삼환의 입장에서도 노나라 역사서인 와 천문·역법을 담은 등 노나라가 개찬한 전적을 바쳐 주나라 왕실의 환심을 살 수 있는 좋은 기회였으리라.   “아, 그렇게 되어 노나라 사절단이 주나라 도읍 낙양에 가게 된 것이군요. 그런데 그 일을 남궁경숙과 공자가 맡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때 집정대신인 계평자는 낙양사절단의 임무를 삼환의 큰집인 맹손씨에게 일임했다. 맹손씨가 대대로 사공(司空)의 벼슬을 세습하는 집안이었기 때문이지. 사공(오늘날의 건설부장관과 상공부장관 정도를 겸직하는 벼슬이다)은 국가 주요시설들인 궁궐과 성곽, 조정의 묘당과 묘역 등의 건설과 보수를 담당했으므로, 그에 따른 예법을 정비하고 관리하는 업무와도 무관할 수 없었다. 맹손씨가 주례를 수집하는 일을 맡은 것은 이런 연유때문이지.” “정공 원년(서기전 509년)에 낙양의 성주(成周) 성을 새로 쌓을 때 여러 제후국들이 역부(役夫)와 물자를 바쳤는데, 우리 노나라에서는 사공인 맹의자가 이 일을 맡았던 것도 같은 이유였지.” “선생님이 이 일에 참여하게 된 것은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맹의자와 남궁경숙은 쌍동이 형제로 이때 나이가 25~26살이었습니다. 맹의자는 이 중요한 임무를 동생 남궁경숙에게 맡겼는데, 아직 예법 전반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던만큼, 사절단을 자문하고 지도할 예악 전문가가 필요했습니다. 그때 그들의 눈에 띈 분이 스승님 말고 누가 있었겠습니까?” 안연이 조용히 당시의 정황을 설명해 주었다.    맹의자·남궁경숙 형제는 일찌기 아버지 맹희자가 임종하면서 자식 교육을 공자에게 맡길 것을 유언( 노소공 7년)한 바로 그 형제이다. 즉 공자는 이들 형제의 스승이었던 것이다. 또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이 맹손씨가 주도한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인연( 노양공 10년)으로 두 집안이 친분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런 인연도 공자가 정부 공식사절단의 자문관으로 선발되는데 일정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맹의자 형제가 사절단의 일원으로 공문의 참가를 정공에게 보고하자, 임금께서 선생님의 참가를 격려하시기 위해 특별히  수레 한 대와 말 두마리 그리고 어린 시종 한 명을 선생님에게 하사하기도 하였지.” 자로가 안연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 어린 시종이 바로 저 사람 안연일세. 하하하.” 공자는 낙양 사절단에 공문의 여러 제자들을 데리고 갔다. 이때 공자를 수행한 제자로는 자로를 비롯해 염백우, 안연의 아버지 계로(안로) 등 초기 제자들이 있었고, 안연이 시종 자격으로 이 여행에 참가했다. 안연은 이때 나이가 15,16살로 곡부의 사족(士族) 사이에서는 이미 수재로 소문이 자자했다. 공자는 공문의 미래이자 자신이 아들처럼 사랑한 안연을 데리고 가 낙양의 높은 문물을 직접 보고 배울 기회를 주고 싶었던 것이다. 훗날 안연의 후학들이 유가의 여러 유파 중 가장 ‘철학적’인 학단으로 기억되고 있는 것은 어쩌면 안연이 이 여행에서 노담을 만났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6. 공자, 노담을 만나다 노나라의 문례사절단이 낙양에 도착한 것은 서기전 506년 공자 46살때였다. 낙양은 이때 동왕(東王)과 서왕(西王)간의 왕위 다툼이 동왕의 승리로 일단락된 지 10년이 지나고 있었다. 왕실 내부의 갈등이 진화되고 성주성 등 왕도의 주요 시설들이 재정비되는 등 전란의 후유증이 어느 정도 수습되고 있던 시점이었다. 사절단의 선발대로 먼저 낙양의 동정을 살펴본 자로가 보고했다. “우리의 임무 상으로 볼 때 낙양에서 꼭 만나보아야 할 인물은 장홍이라는 대부가 될 것 같습니다. 그는 태사(太史)로서 천문과 귀신의 일에 능통해 3대에 걸쳐 왕실의 총애를 받고 있는 자입니다.” 남궁경숙이 말했다. “장홍이라면 3년 전 형님이 낙양 성주성 축성에 참가했을 때 축성 책임자였습니다. 그때 우리 집안과 인연을 맺은 사람이니, 그를 잘 활용하면 어렵지 않게 이번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입니다.” 장홍은 음악 분야에도 뛰어났는데, 이때 공자는 장홍에게서 주나라의 궁중음악과 주나라가 여러 제후국으로부터 수집한 시(詩)에 대해 많은 견문을 얻을 수 있었다.   “장홍이 현직에 있는 가장 뛰어난 지식인이라면, 재야 인물로는 노담이란 전직 태사가 으뜸이라고 합니다.”   자로가 공자에게 따로 말하였다.  “제가 낙양에 먼저 와보니 일반 사관들이 한결같이 노담을 대석학으로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편찬한 책들을 주왕실이 소장케 하는데는 노담의 감수가 지름길이라고들 합니다.” 공자도 낙양에 들어와 여러 경로로 노담에 대해 더 알아본 뒤  남궁경숙에게 말했다. “낙양의 재야에 노담이라는 노사(老師)가 계시다는데,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그가 옛 일을 넓게 알고 지금 일도 모르는 것이 없으며, 예악의 근원에 능통하고 도덕의 귀추에 밝다고 말합니다. 사절단이 가르침을 받을만 한 듯 하니, 노담과 따로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시기 바랍니다.” - ‘관주’편   노담은 태사를 지낸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왕실로부터 장로(長老)의 예우를 받은 이래 자신도 그 존칭을 물려받아 ‘노담’이라 불리었다. 노담은 일찌기 정치에 환멸을 느껴 정계와 절연한 뒤 주왕실도서관장으로서 오직 고도(古道)를 지키고 전승하는 일에만 전념하다가 얼마전에 60여세의 나이로 은퇴했다고 한다. 훗날 자로가 회상하기를 “노담을 만나보니 석학이 따로 없었다. 선생님의 박학이야 내가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노담의 박학 또한 대단했다. 나이많은 철인답게 사물을 초월적 경지에서 인식하는 심미적 직관도 빼어났다. 사관으로 오래 재직하면서 여러 정치적 사건을 경험한 탓인지, 치술治術)에도 남다른 조예가 있는 듯 했다.”(김용옥, 에서 인용하여 각색)   아직 어린 나이였으나 시종인 관계로 스승과 노담과의 대화를 곁에서 들을 수 있었던 안연도 노담에게 깊은 인상을 받은 듯 했다. “제가 보기에 노사(老師)께서는 궁정생활을 경험하고 또 동시에 일반 백성들의 비참한 생활을 목격하여 정치의 양면에 대해 깊은 철학적 통찰을 얻은 듯 했습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그 분을 뵈었을 때는 이미 깊은 명상생활의 묘리를 체득한 듯 했습니다. 마치 끝모를 해저를 유영하는 바다용처럼, 구만리 장천을 나는 천룡처럼 도의 심연을 노니는 듯 했습니다.” 공자 일행은 노담과의 만남이 주선되자, 노담이 살고 있다는 낙양의 북망산 아래 초옥으로 찾아갔다. 공자와 노담은 이때 나이차가 20살 안팎⑧이었다. 이때 나눈 대화의 내용이 후세의 서책( ‘공자세가’와 ‘노자한비열전’, 외편 등)에 실려 전한다. 그러나 어떤 것은 가탁(假託)의 흔적이 농후해 진위 자체가 의심스럽고, 어떤 것은 너무 단편적이어서 전후 맥락을 알기 어려워 후대의 아쉬움을 사고 있다. 나, 이생이 가장 궁금했던 것도 바로 그 공백 속에 숨어 있는 진정한 주제와 내용이었다. 과연 두 사람은 무슨 말을 주고 받았을까? 일행의 수레가 북망산 아래 대나무숲에 이르자, 멀리서 시동이 일행을 맞이하러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낙양의 아침 해가 정오를 향해 가던 어느 날이었다.                   *은 소설 형식을 취하다 보니 글쓴 이의 상상력이 불가피하게 개입되었다. 역사적 상상력을 통해 논어를 새롭게 해석해보자는 글쓴 이의 취지를 살리면서 동시에 독자들의 주체적이고 다양한 해석을 돕기 위해 원문을 글 말미에 소개한다. 소설 이상의 깊이 있는 논어읽기 를 원하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2014년 11월호 연재부터 원문보기에 인용할 한글 번역본은 (이재호 정해,솔)와 (배병삼 주석 , 문학동네)이다. 표기는 이(논어정의)와 배(한글세대가 본 논어)로 한다. 이밖에 다른 번역본을 인용할 때는 별도로 출처를 밝힐 것이다. 영문 L은 영역본 표시이다. 한문보다 영어가 더 익숙한 분들의 논어 이해를 추가하였다. 영역 논어는 제임스 레게(James Legge. 1815-1897. 중국명 理 雅各)본을 사용하였다.            ***는 편명만 표시하고, 그 외의 문헌은 책명을 밝혔다.     ① ‘공야장’편 27장  子曰 十室之邑 必有忠信 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也(자왈 십실지읍 필유충신여구자언 불여구지호학야)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10호쯤 되는 조그만 고을에 반드시 성실하고 믿음직스럽기가 나, 구와 같은 사람은 있겠지만, 나처럼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열 가구의 작은 고을에도 나만큼 ‘자신에게 충실하고(忠)’ 또 ‘남에게 성실한(信)’ 사람이야 반드시 있을 터이지만, 나만큼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있지 않을게다.  L-The Master said, “In a hamlet of ten families, there may be found one honourable and sincere as I am, but not so fond of learning.”    ② ‘술이’편 21장  子曰 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자왈 삼인행 필유아사언 택기선자이종지 기불선자이개지)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세 사람이 행동할 때면 반드시 그 가운데 나의 스승이 있는 법이니, 그 중 착한 사람을 가려 살펴보고는 그 사람을 따르고, 착하지 못한 사람을 가려 살펴보고는 자신의 잘못을 고쳐야 한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ㅅ 사람이 길을 가도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게 마련. 그 가운데 잘난 것은 골라서 좇고, 잘못된 것은 고칠 일이다.  L-The Master said, “When I walk along with two others, they may serve me as my teachers. I will select their good qualities and follow them, their bad qualities and avoid them.”     ③ ‘위정’편 11장   子曰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자왈 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의)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옛날의 듣고 배운 것을 연구하고 새로운 이치를 깨달아 안다면, 남의 스승이 될 수가 있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옛것을 익히고 새것을 알면, 스승이 될만하리라.   L-The Master said, “If a man keeps cherishing his old knowledge, so as continually to be acquiring new, he may be a teacher of others.”    ④ ‘술이’편 1장  子曰 述而不作 信而好古 竊比於我老彭(자왈 술이부작 신이호고 절비어아노팽)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전술(傳述)하면서 창작(創作)하지 않으며, 선왕(先王)의 도(道)를 믿고서 옛것을 좋아하기를 내 스스로 노팽에게 견주어 본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서술하되 짓지 않고, 옛것을 믿고 좋아함이여! 삼가 우리 노팽에게 견주련다.  L-The Master said, “A transmitter and not a maker, believing in and loving the ancients, I venture to compare myself with our old P’ang.”    ⑤ 일본의 저명한 한문학자인 시라카와 시즈카는 노팽이 고대의 유명한 무축이었다고 주장한다. 시라카와는 노팽이 ‘대황서경’에 등장하는 고대의 십무(十巫) 중 네번째 서열인 무팽일 것으로 본다. 무팽은 축도문의 낭송과 전승을 담당하는 사무(史巫)의 원조이다. 참고로 에서 십무는 열 개의 태양의 신을 뜻하는데, 무함(巫咸), 무즉(巫卽), 무분(巫분(月+分), 무팽(巫彭), 무고(巫姑), 무진(巫眞), 무례(巫禮), 무저(巫抵), 무사(巫謝), 무라(巫羅)를 말한다.     ⑥ ‘공자세가’, ‘노자·한비열전’ (김원중 옮김)     ⑦공자가 주나라에 가서 예를 배운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주장이 있다. 사마천의 공자세가는 이때를 공자 17~30세 사이의 일로, 는 34,5세 때로, 역도원의 는 17세 때로, 사마정의 은 34세의 일로 주장한다. 허동래의 는 여러가지 정황을 종합하여 이때를 공자 나이 46세의 일이라고 주장한다.(김학주, ) 나는 허동래의 설을 지지한다.      ⑧ 근대 중국 철학자 호적(胡適·1891~1962)의 주장이다.     ⑨ ‘공자, 노자를 만나다’편(상·하 2편)은 등을 비롯한 전적들과 후대 학자들의 연구서를 기본 토대로 스토리를 구성하되, 이야기 전개상 필요한 부분에서는 지은이의 상상력이 가미되었다. 전거가 있는 것은 괄호 등의 방식으로 그 출처를 모두 표기하였으며, 지은이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이라고 여기는 부분과 지은이의 독자적인 견해(또는 추정, 해석 등)는 따로 출처를 표시하지 않았음을 밝힌다.     한겨레  
1    강청의 일생 댓글:  조회:2617  추천:0  2009-12-08
강청의 어린시절 강청(1914~1991년)은 문화대혁명기간에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4인방”의 핵심인물로서 본명은 리운학(李云 )이고 산동성 제성( 城)출신의 녀자였다. 제성은 산동남부의 회하(淮河)상류에 위치한 현으로 밀, 고구마, 콩, 수수, 옥수수 등의 주산지이다.강청의 할아버지는 원래 2만여평의 토지를 소유한 지주였으나 아버지 리덕문(李德文)대에 이르러 파산하였다. 리덕문의 본처는 원래 지주집안의 딸이였으나 늙고 못생겼다는 리유로 리덕문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리덕문은 50세에 다시 결혼하여 20여세의 젊고 예쁜 란씨를 첩으로 삼았다. 1914년 3월, 란씨는 딸을 낳았는데 그녀가 바로 몇십년후 중국대륙을 떠들썩하게 흔들었던 리운학(강청)이다. 당시 산동지역에는 여전히 전족이라는 악습이 성행하고있었다. 리운학은 6살때 전족한 발이 너무도 아파서 밖에서 놀 때는 몰래 전족을 풀어버리고 집에 올 때 다시 전족을 하군 했다. 이러한 일은 당시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수 없는 대담한 행동이였다. 리덕문은 성미가 급하고 거칠어 걸핏하면 자기 안해에게 손찌검을 하군 했다. 어느해 정월 대보름에 리운학의 어머니 란씨는 실수로 넘어져 그릇을 깨뜨렸다. 이에 화가 난 리덕문이 삽으로 마구 때리는 바람에 란씨는 손가락이 부러졌고 놀라서 울던 리운학은 따귀를 얻어맞아 이가 부러졌다. 더이상 고통과 멸시를 당할수 없다고 생각한 란씨는 딸을 데리고 그 집을 나왔다. 그러나 아무것도 가진게 없었던 란씨는 생계를 위하여 남의 집 종살이라도 해야 했다. 그녀는 리운학을 친척집에 맡겼는데 이로부터 리운학에게는 가난하고 힘든 생활이 계속되였다.   영화배우 람평에서 모택동의 안해 강청으로 1926년, 12살의 리운학은 어머니와 함께 천진의 언니네 집으로 가서 살았다. 1929년 봄 리운학은 형부 왕극명(王克 : 당시 봉계군벌의 군관)이 제남으로 전근되여 그녀도 언니식구를 따라 제남으로 갔다. 15살되는 해에 리운학은 산동실험극원에 들어가 연극과 고전음악을 배웠다. 실험극원 입학은 그녀의 인생을 바꾸는 첫번째 전환점으로 되였다. 연극배우 리운학이 없었다면 후날 영화배우 란평이 있을수 없었기때문이다. 1930년, 실험극원은 정국의 변화로 문을 닫게 되였다. 1931년 봄, 리운학은 청도에 있는 스승 조태모(당시 청도대학교 교장)를 찾아갔다. 그의 배려로 리운학은 청도대학 도서관에서 일했다. 당시에 그녀는 조태모의 처남 황경과 사랑에 빠져 동거생활을 하였으며 조태모의 안해이자 황경의 누나인 류산을 따라서 전한이 창설한 극단 남국사(南 社)에 들어갔다. 1933년 2월, 19살의 리운학은 황경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해 7월, 반역자의 밀고로 황경이 체포되자 리운학은 상해로 피신했다. 상해에서 그녀는 전한과 그의 동생 전원의 도움으로 서명청이 책임자로 있는 “신경공학단"에서 교편을 잡았다. 1933년 겨울, 체포되였던 황경이 석방되여 상해로 돌아왔다. 그러나 황경의 부모님의 반대로 그들은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고 따로 집을 구하여 다시 동거를 시작하였다. 1934년 1월 28일, 상해에서 “1.28” 항전2돐을 기념하는 시위에 참가했던 리운학과 황경은 체포될 위기에 처해 북경으로 피신했다. 북경에서도 그들은 계속 동거했다. 황경의 부모가 둘이 같이 있는것을 반대하면서 생활비를 보내주지 않았다. 리운학은 황경의 곁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1934년 5월중순에 상해로 돌아갔다. 1934년 10월말, 리운학은 상해시경찰국에 약 1개월간 수감되였다가 기독교 상해녀성청년회의 도움을 받아 보석으로 풀려나왔다. 이때 마침 황경이 상해로 돌아왔다. 갈곳이 없었던 리운학은 황경의 큰어머니네 집에서 황경과 동거했다. 1935년 봄, 그녀는 상해과외극인협회에 들어가 유명한 희곡 《인형의 집》의 녀자주인공 노라역을 맡게 되였다. 이것은 그녀의 인생을 또다시 바꾸는 중대한 전환점이 되였다. 이때로부터 리운학은 예명을 람평이라 하였다. 그녀는 당시 상해영화계에서 영향력이 있는 영화평론가 당납과 사랑에 빠졌다. 1936년 4월 21일, 두 사람은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으나 결혼등록을 하지 않았다. 1937년 5월, 리운학은 당납과 헤여지고 상해 연극계에서 매우 명망이 높던 연출가 장민(章泯)과 동거했다. 1937년 7월, 상해에서 더이상 발붙일 곳이 없게 된 리운학은 명배우의 꿈을 접고 도망치듯 상해를 떠났다. 이때 그녀는 황경이 연안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연안으로 갈 결심을 하고 서안에 있는 서명청을 찾아갔다. 서명청은 엽검영의 부인과 친분이 깊었다. 엽검영부인의 소개로 리운학은 서안팔로군사무소에서 사업하는 주은래의 부인 등영초를 만났다. 등영초는 리운학이 연안으로 갈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1937년 8월말, 리운학은 연안에 도착하여 제3초대소에 투숙하였다. 그녀는 숙박부에 이름을 적을 때 “람평” 대신 “강청”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강청은 연안에 도착한후 곧장 심사를 받았다. 2개월간의 심의를 거친후 강청은 황경의 도움으로 다시 당적을 회복하고 1937년 11월에 중국공산당 중앙당교에 입학하여 6개월간의 교육을 받았다.1938년 7월 7일, “7.7항전” 1돐기념행사가 연안에서 열렸다. 이날 오전에는 모택동의 보고가 있었고 오후에는 문화행사가 있었는데 이 문화행사에서 강청은 경극 《타어살가》의 주역을 맡아 관중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공연을 끝까지 관람한 모택동은 배우들을 격려하기 위해 분장실로 들어가서 강청과 악수를 하고 담소를 나누었다. 이로써 강청과 모택동의 력사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 강청이 연안으로 갔을 때 모택동의 두번째 부인 하자진은 서안에 있었다. 당시 강청은 다른 사람에 비해 용모가 출중한편이였으며 연기도 뛰여났다. 지금은 그녀를 삼류배우라 폄하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 당시의 상황에서 그녀는 분명 연안과 섬북지역의 인기배우였다. 그녀는 연기뿐만아니라 노래도 잘 불렀으며 모택동은 그녀가 공연한 《타어살가》를 좋아했다. 1938년 8월, 강청은 군위원회사무실 비서로 발령받아 모택동과 함께 일할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였다. 모택동과 강청의 련애설이 퍼져나가자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다.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에서는 모택동의 결혼문제를 토론에 붙여 모택동의 뜻에 따르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강청에 대해서는  “약법3장( 法三章)”을 규정했다. 첫째, 모택동과 하자진의 부부관계가 공식적으로 정리되지 않고 그대로 존재하는한 강청은 모택동의 부인으로 행세할수 없다. 둘째, 강청은 모택동의 일상생활과 건강을 책임지고 돌보아야 하며 차후 그 누구도 당중앙에 이와 류사한 요구를 제기할 권리가 없다. 셋째, 강청은 모택동의 사적인 업무와 생활에만 관여해야 하며 20년동안 당내의 어떠한 직무도 맡는것을 금한다. 당내의 인사문제와 정치활동에도 절대 참여할수 없다. 강청은 이 규정에 묶여 문화대혁명이 일어나기전까지는 어떠한 정치활동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1938년 11월, 강청은 24살에 자기보다 21살이나 많은 모택동(당시 45살)과 결혼식을 올렸다. 강청은 모택동과 결혼하기전에 이미 네번의 결혼경험이 있었으며 황경과 동거할 때는 임신도 하였으나 상해에서 수술로 락태시켰다. 그때 그녀는 배우활동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있었기때문에 아이를 원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모택동과 결혼한후에 그녀는 빨리 아이를 갖고싶어했다. 아이가 있으면 무료한 시간을 달랠수도 있고 더우기 “모택동의 정실”자격을 확실히 다질수 있다고 생각했기때문이다. 1940년 8월, 그녀는 마침내 딸 리눌을 낳아 모택동의 사랑을 받았다. 그후 그녀는 재차 임신을 하였으나 더 이상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생각에서 락태수술을 한후 다시 임신중절수술을 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창립된후 강청은 일을 하고싶다면서 공식적인 직책을 요구했다. 당에서는 신중한 상의를 거쳐 그녀에게 중국공산당 중앙선전부 영화처 부처장이라는 직함을 주었다.   잃어버린 황제의 꿈 1966년,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강청은 “중앙문화혁명소조” 제1부조장 겸 대리조장을 맡아 실권을 장악했다. 그후 “중앙문화혁명소조”는 조직과 권한이 비대해져 중공중앙서기처와 중공중앙정치국을 압도했다.  1969년 4월 28일에 거행된 중국공산당 9기 1중전회에서 강청은 중공중앙정치국 위원으로 되였다. 1971년 9월 13일, 모택동의 후계자로 지목되였던 부주석 림표가 반란사건으로 사망되자 강청은 모택동, 주은래, 강생에 이어 서렬 4위에 올랐으며 1972년 1월에 강생이 병으로 은퇴한후 다시 서렬 3위로 올랐다. 림표사건이후 건강상태가 점점 악화된 모택동은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문제에 부딪치게 되였다. 당내에서 서렬 3위인 강청은 내심 자기가 후계자로 될수있다는 기대를 하였지만 모택동은 그녀를 안중에 두지 않았다. 1973년 3월, 강청은 서렬에서 한참 뒤로 밀려나고 모택동의 총애를 받는 왕홍문이 강력한 후계자로 부상되였다. 강청은 왕홍문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장춘교, 요문원과 함께 “4인방”을 결성하여 정치적주도권을 잡아나갔다. 1974년 6월, 암진단을 받았던 주은래의 병세가 위중해져 병원에 입원하였다.모택동과 주은래의 운명이 눈앞에 다가와있다는것을 감지한 강청은 그들의 사후에 정권을 장악할 새 내각을 구상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길 준비를 했다. 1974년 7월, 모택동은 중앙정치국회의를 소집한 자리에서 강청과 “4인방”의 정치적행동에 대하여 엄중히 경고하였다. 1975년 9월, 모택동의 병세가 더욱 위중해져 말을 잘 못할 정도였으며 주은래도 4차 수술을 받았다. 이때 모택동은 조카 모원신을 곁에 두고 자기와 중앙정치국사이의 특수련락원으로 삼았다. 모택동의 지시가 모두 모원신을 통해서 전달되게 된것이였다. 그러나 모원신은 강청을 어머니라고 부를 정도로 그녀와 아주 각별한 사이였다. 이 기회를 리용하여 강청은 모원신과 결탁하고 잠간동안 “최고지시”를 반포하는 대권을 장악했다. 1976년 1월 8일, 중국공산당 중앙부주석, 국무원총리, 전국정협주석인 주은래가 서거했다. 강청은 요문원을 시켜 전국언론에 주은래의 애도를 축소보도하라고 지시하며 “황제의 꿈”을 꾸었다. 화국봉은 모택동의 후계자로서 정국을 수습하면서 강청을 견제하였지만 강청은 그러한 화국봉을 안중에 두지 않고 모택동사후의 정권장악을 위한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1976년 9월 9일 새벽, 모택동이 서거한지 얼마 안되여 “4인방”이 타도되였다.1977년 7월, 중국공산당 10기 3중전회에서 강청의 당적을 영원히 박탈하고 당내외의 모든 직무를 해임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1981년 1월 25일, 중화인민공화국 최고인민법원 특별법정은 강청에게 반혁명집단 주범으로 사형을 선고하고 2년후에 집행하도록 하였다. 1983년 1월, 최고인민법원 형사법정은 판결문에서 그녀에게 내린 사형판결을 무기징역으로 감하고 모든 정치적권리를 종신토록 박탈한다고 선고하였다. 1991년 5월 14일에 강청은 감옥에서 자살했다. (중국의 어제와 오늘《주요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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