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남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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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중국조선족문학의 현황과 전망 댓글:  조회:2117  추천:108  2008-07-24
중국조선족문학의 현황과 전망 조남철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수   1. 왜 조선족 문학인가 이 글을 시작하기 전에 왜 지금 조선족 문학에 대해 말하려는 가에 대해 먼저 생각해 보려고 한다. 해외에 있는 동포로만 말한다면 이민의 역사가 100년이 넘는 미국의 동포도 있을 것이며 해외 이주의 역사가 중국동포의 경우와 비교해 보더라도 결코 뒤지지 않는, 2004년 이주 140주년을 맞는 연해주의 러시아 동포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지금 이 시기 중국의 조선족 문학을 다루려는 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미국의 동포나 옛 소련의 동포와 비교할 때 중국의 동포들은 그 누구보다도 우리말과 글을 잘 보존하고 있으며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에 힘입어 민족문화의 유산을 포함하여 우리 글로 이루어진 문학적 유산을 적지 않게 보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한다면 중국 동포들의 문학적 유산은 다른 해외 동포들의 경우와 비교하여 우리 민족문학의 지평을 풍부하게 할 수 있는 귀한 유산으로서의 의미가 남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우리 민족의 근대적 체험과 관계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사실 우리 근대사를 돌아보면 우리 민족은 전세계 어느 민족과 비교해보더라도 파란만장한 근대를 헤쳐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금년으로 우리 민족이 미국으로 이주한 지 100년이 넘었으며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우리 재외동포의 수는 720만에 이르고 있다. 이제 우리는 우리 국토의 한계를 뛰어 넘는 의미로서의 민족을 생각해야만 할 시기에 이르렀고 그럴 경우 가장 먼저 떠올려야 할 대상이 중국에 거주하고 있는 우리 동포일 것이다. 새삼 중국으로 이주한 우리 민족의 역사를 여기서 다시 거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런 조선민족의 중국으로의 이주를 다룬 논문은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쉽게 구해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중국으로 이주한 우리 민족의 경우 다른 나라로 이주한 우리 민족에 비할 경우 우리 근대사에서 매우 특별한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경험들이 지금 중국 연변을 중심으로 거주하는 우리 조선민족의 문학에 남다른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한 마디 덧붙인다면 이 논문에서 다루려는 연변 조선족 동포의 문학이 우리 역사 속에서 민족문학이라는 범주를 보다 확대할 수 있게 하며 더 나아가 우리 민족문학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유산이 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간단한 예를 든다면 20세기 초, 조선반도가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압제아래 놓이게 되자 당시의 간도지방, 지금의 연변조선족 자치주로 들어 와 우리말과 글로 문학활동을 한 작가들이 적지 않다. 그 대표적인 문인들로 김택영, 신정, 신채호, 이육사, 윤동주 등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동시에 이들 문인들은 한반도 내에서도 작가로서 활동하였으며 실제로 한국문학사의 특별한 의미를 갖는 주요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처럼 중국내 조선동포문인들은 조국의 문단과 간도 등지의 해외에서 동시에 작품활동을 하였으며 이 점에서 해외 다른 나라의 동포문학과 뚜렷한 차이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건립에서부터 1967년 문화대혁명 직전인 1966년에 이르기까지의 중국동포들의 문학, 이른바 이들이 말하는 당대문학1)의 앞부분을 중심으로 이 시기의 문학적 배경, 민족문학의 건설과 전개과정, 문예이론의 내용 등과 함께 소설의 발전과정을 살펴보려 한다.    위의 문제를 거론하기 전에 ‘조선족’이라는 명칭에 대해 잠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중국에 거주하고 있는 우리 동포들을 부르는 공식적인 명칭은 ‘조선족’이다. 그리고 이 낯선  ‘조선족’이라는 명칭이 한국의 일반인들에게 약간의 거부감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왜 ‘조선인’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조선족’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지에 대한 의문과 혼란, 그리고 거부감이 있는 것이다. 이 경우 ‘조선족’이라는 의미는 중국정부와 중국의 다른 소수민족들이 중국의 우리 동포들을 중국에 있는 여러 소수민족 중의 하나로 본다는 뜻이다.    원래 ‘조선족’이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은 1955년 이후부터이다. 그 이전에는 ‘조선민족’ 이라는 용어가 일반적인 용어였다. 이 문제에 대해 이광일은 그의 『해방후 조선족 소설문학연구』(경인문화사, 2003.8)에서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새 중국이 건국된 후 중국공산당은 1952년 2월에 ‘중화인민공화국 민족구역 자치강요’를 반포하였고 전국적인 범위에서 민족구역자치제도를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이 제도에 의해 1952년 9월 3일 연변에도 조선족의 구역자치제도가실시되고 자치구가 성립되었는데 그 전칭은 ‘연변조선민족자치구’였다. 그러다가 1955년에 길림성인민위원회는 헌법 제2장 제제4절의 규정과 연변 조선민족 자치구의 보고서에 근거해 자치구를 자치주로 이름 변경하는 사항을 국무원에 보고했고 국무부 내무부의 동의를 거쳐 8월 30일에 길인편자(吉人編字) 제 2085호 통지를 내려보냈고 12월 20일부터 27일까지 열린 연변조선민족 자치구 제 1기 인민대표대회 제 2차 회의에서 이 통지를 공포했고 ‘연변조선민족자치구’를 ‘연변조선족자치주’로 개칭함을 선포하였다. 위의 글에서 주목해야할 것은 두 가지 사실이다. 하나는 자치구가 자치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행정기관의 규모와 관련되는 것으로 중국 내 우리 민족의 수와 지역의 규모 등과 관련해 생각해 볼 문제라고 하겠다. 다른 하나는 우리 민족의 명칭의 변화이다. 즉 그 이전의 ‘조선민족’에서 ‘조선족’으로 바뀐 것이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길인편자 제 2085통지에서는 그 이유를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다.       그 명칭은 중앙민족사무위원회와 내무부의 연구를 거쳐, 전국의 기타민족자치 지역과 일치시키기 위해 연변조선민족의 ‘민’자를 생략하고 그 명칭을 ‘길림성 연변 조선족자치주’라고 할 것을 제의한다.2) 이러한 명칭의 변화에는 물론 중국정부의 소수민족 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한족을 포함한 56개 민족의 통합을 꾀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전체 56개 민족을 ‘중화민족’이라는 용어로 묶고 그 ‘중화민족’의 하나로서 ‘조선족’이 존재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중국에서 한족을 제외한 소수민족의 인구는 전체 인구의 10%미만이지만 이들이 거주하는 지역은 전국토의 60%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수민족에 대한 정책은 중국당국에서 가장 주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소수민족에 대한 정책의 우선 순위는 1949년 중국건국이전부터 중국공산당이 관심을 기울였던 부분이기도 하다.    따라서 현재 ‘조선족’이라는 명칭은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중국 국적을 갖고 중국에서 살고 있는 조선인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향후 중국내 ‘조선인’ 문학이라는 용어는 중국 건국 즉 1949년 이전의 한글문학을 의미하며 ‘조선족’문학은 1949년 이후의 한글문학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윤은진은 「중국조선인 문학연구에 나서는 몇 가지 문제」(『문학과 예술』 1993. 6기)에서 1949년 전의 문학은 중국조선인 문학이라고 지칭해야 하며 그 후의 문학은 조선족 문학이라고 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문학은 조선민족 문학의 갈래에서, 그 이후의 문학은 중국소수민족 문학의 갈래에서 고찰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필자는 이 견해에 일부 동의하며 앞으로 ‘중국 조선족 문학’의 위상을 우리 민족문학과 어떠한 관계 속에서 이해할 것인가와 관련해 매우 주목할 만한 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그 동안 중국 내 우리 동포문학을 이야기하면서 조선인문학과 조선족 문학을 혼동하여 쓴 경우가 적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1949년 이전의 조선동포에 의한 문학을 ‘중국 조선인 문학’으로, 1949년 이후 조선동포에 의한 문학을 ‘중국 조선족 문학’으로 규정하려고 한다. 2. 시대적 배경과 조선족문학의 전개 과정 2. 1. 해방과 건국, 조선족문학의 등장과 건설    1945년 8월 일본이 전쟁에서 패하자 중국 역시 오랜 항일전쟁에서 벗어나 새로운 국가건설을 위한 뜨거운 열정이 대륙 전체를 휩쓸게 되었다. 그러나 항일전쟁의 승리 이후 동북 삼성3)의 정세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일제의 주구 노릇을 한 괴뢰만주정부는 이미 전복되었으나 이 지역에서 국민당은 지방조직을 확대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으며 이에 맞서 중국 공산당 역시 동북 삼성 지방을 그들의 든든한 근거지로 구축하려 하였기 때문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던 것이다. 1946년 6월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의 내전이 다시 일어나자 조선동포들은 제3차 국내 혁명전쟁에 다시 한번 앞장 서 뛰어 들었으며 결국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건설에 다른 어떤 소수민족보다도 커다란 공을 세우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중국의 여러 소수민족 중 조선족이 남다른 사회적 위치를 갖게 하는 주요 요인이기도 하다.      1949년 10월 1일은 세계사적으로도 커다란 의미를 지니는 해이다. 오랜 내전을 마감하고 중국대륙에 하나의 국가로서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하는 해였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이 즐겨 쓰는 표현을 빌린다면 ‘중국역사에 새로운 기원을 열어 놓았으며 중국 신민주주의 혁명의 기본적인 결속과 사회주의 혁명의 시작을 표징’하는 역사적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혁명적 변화의 와중에서 중국에 거주하는 우리 조선동포들의 경우에는 건국의 과정에서 크게 공헌한 만큼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도 그에 걸 맞는 소수민족으로서의 역할을 요구받았다. 또한 그것은 중국 건국의 과정에서 다른 어떤 소수민족보다도 더 많은 피와 땀을 통해 건국의 한 축을 담당한 우리 동포들의 권리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조선동포들은 민족문화 건설을 위해 다양한 방면의 민족적 계몽운동에 힘썼으며 1949년 설립된 연변대학교의 경우가 바로 이 운동에 가장 구체적인 결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중국 건국 이전인 1949년 4월 1일 종합 민족대학으로 창립된 연변대학은 지금까지 중국내 우리 민족교육의 선구자로서 중국 조선족 역사에 남다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1949년의 건국 이후 중국의 역사발전 과정을 살펴보면 중국 건국 이후 우리 민족이 중국에서 뿌리를 내리는 일은 그렇게 순탄하지만은 않았다는 사실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다 잘 알고 있는 것처럼 1957년의 반우파 투쟁의 확대화, 1958년의 ‘대약진 운동’과 농촌인민공사화운동, 1959년의 ‘반우경 투쟁’과 지방민족주의를 반대하는 ‘정풍운동’, 1963년에서 1965년에 이르는 시기의 계급투쟁화 확대화와 절대화 등의 ‘좌경적 오류’ 등과 같은 이런 저런 정치, 사회적 이유들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 사회적 배경 속에서 중국내 조선족의 문학 역시 파란만장한 곡절을 겪으며 변화, 발전해 왔다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후 흑룡강성, 길림성, 요령성 등 동북 삼성에 흩어져 살고 있던 조선동포문인들에게 건국 이후 전개되는 중국의 역사 속에서의 역할을 찾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띤 일이었으나 그만큼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1949년 건국 후 중국 전역의 인민들은 감격과 흥분에 들떴으며 이는 조선동포들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른바 ‘위대한 혁명적 변화’가 만들어 낸 새로운 현실 속에서 특히 조선 동포문인들은 문학활동을 위한 새로운 사회적 기반을 확립하기 위한 노력과 함께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건국한 중국 사회의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고 동시에 새로운 시대에 걸 맞는 민족문학을 건설하기 위한 노력을 병행해 나가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하여 동북 삼성 여러 곳에 흩어져 활동하고 있던 작가문인들이 조선동포들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인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주도 연길로 몰려들었다. 흑룡강성의 목단강과 할빈 등에서 활동하던 김례삼, 김태희, 최수봉, 황봉룡, 리홍규4), 임효원, 최현숙 등과 길림성 통화지역에서 활동하던 백남표, 최정연, 그리고 태항산에서 활동하던 김학철5)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다.6) 동시에 연변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수많은 신문, 잡지 등의 출간이 이루어졌다.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연변일보』(연길지역), 『인민신보』(목단강지역), 『민주일보』(할빈지역), 『단결일보』(통화지역) 등의 신문과 『불꽃』(연길지역), 『민주』(연길지역), 『대중』(연길지역), 『연변문화』(연길), 『문화』(연길지역), 『건설』(목단강지역), 『효종』(영안지역) 등의 잡지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다.7)    한편 이 시기에는 대중적인 문예활동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경우가 전문적인 문예공연단체들의 활동이다. 특히 ‘이쓰크라 극단’, ‘길동군구 문공단’, ‘양양극단’, ‘166사선전대’, ‘연변문공단’, ‘송강로신예술극단’, ‘송강군구 제3지대 선전대’, ‘164사선 전대’, ‘리홍광 지대 선전대’ 등의 활동이 주목을 끌었다.    한편 중국 동북지방에 흩어져 살고 있던 각 지역의 동포문인들도 지역에 실정에 맞는 문학단체들을 결성하여 민족문학 수립에 힘썼다. 그 대표적인 단체들로는 연길 지역에 결성된 ‘간도문예협회’, ‘동라문인동맹’, ‘중쏘한 문화협회’와 목단강 지역의 ‘동북신흥예술협회’, ‘도문 지역의 ’로농예술동맹‘들이다. 이들 문화예술단체들은 각 지역별로 문예평론회, 작품감상회, 문예연구회의 밤, 신춘문예 현상모집 등의 활동을 통해 민족문화의 지평을 확대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이러한 활약과 함께 이들 문예단체들은 지역적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중국의 전국적인 문예운동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소수민족 문예로서의 독특한 의미와 지위를 지켜 나갔다. 1948년 3월 심양에서 열린 ‘동북문예공작가 회의’와 1949년 7월 2일에서 7월 19일까지 북경에서 열린 ‘중화 전국 제1차 문학예술일꾼 대표대회’에 각각 대표를 파견한 것이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이 대회 이후 1950년 1월 15일 최채, 현남극, 김동구, 리홍규, 임효원 등이 발기하여 연길에서 ‘연변문예연구회’를 결성하고 문학, 연극, 음악, 무용, 미술 등 5개 분과를 설치하였다. 이 ‘연변문예연구회’는 ‘연변에 있어 모주석의 새 문예방향에 의거한 문예공작자가 되며 인민의 문예를 연구하고 창작함으로써 참다운 인민의 문예공작자가 되며 문예로써 인민을 위하여 복무함을 목적’8)으로 하는 규약을 통해 그 존재의미를 분명히 하고 있는데 조선민족의 문단적 기반을 닦기 위한 최초의 노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연변문예연구회’는 1951년 4월 23일 해소되고 연변문학예술계 연합주비위원회가 결성되어 『연변문예』(이 잡지는 6호까지 발간된 후 폐간되었음)지를 발간하는 등의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결국 1953년 7월 10일 제 1차 ‘연변 조선족 자치주 문학예술일군 연합회’(약칭 연변 문련)를 성립하기에 이른다. 연변 문련은 기관지 『연변문예』를 복간하여 1956년 12월 35호까지를 발간하여 동포문학예술인들에게 창작의 공간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동포문학예술활동의 활발한 전개에 힘입어 1956년 8월 15일과 16일 이틀 동안 제 1차 연변 조선족 자치주 작가 대표대회를 열어 중국작가 협회의 결정에 따라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를 설립하게 된다. 이 대회에서는 연변분회의 주요한 과제를 다음과 같이 확정하였는데 이 단체의 성격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작가들로 하여금 우리 문학의 주인공들의 생활실제에 깊이 침투하도록 조직하고 도와주며 작가들을 사상성과 예술성에서 성숙하도록 하는 방면에서 가능한 일체의 방조를 아끼지 않으며 문학방면에서의 일체의 잠재력량을 발견하고 조직하여 작품을 쓰도록 하며 적극적으로 청년작자를 배양하며 창작경쟁과 자유토론을 전개하면서 당의 ‘백화만발 백화쟁명’의 방침을 잘 관철시켜야 한다.9)   또 하나 이 시기 조선 동포문학의 특징을 찾아본다면 모택동의 ‘연안 문예좌담회에서 한 연설’에 대한 학습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목단강 지역에서 발행된 『인민신보』를 보면 앞의 ‘동북신흥예술협회’의 추천아래 1946년 9월초부터 10월말까지의 기간 동안 모두 25차례에 걸쳐 ‘연안문예좌담에서 한 연설’을 번역하여 게재하였으며 연변지역에서도 이 연설의 학습을 위하여 그 내용을 『중국문예의 새로운 방향』이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간하기도 하였다. 모택동의 이 연설에 대한 학습은 조선동포문학의 전개방향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중국내 조선동포문학의 위상을 결정하는 중요한 계기이기도 하였다.      다음으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대중적인 문화예술 활동의 하나로서의 창작노래의 보급과 적극적인 연극활동이다. 이 시기 많은 사람들이 즐겨 부른 노래로는 아무래도 항일가요 등이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일본제국주의자의 오랜 압제로부터의 해방을 자축하기 위하여 만들어 부른 노래들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토지얻은 기쁨’,  ‘전선지원의 노래’,  ‘방어공사의 노래’,  ‘우리 패장동무’,  ‘꿩탕극의 노래’ 등이 그 좋은 예이다. 이러한 노래들과 함께 이 시기 주요한 대중적인 문화예술활동의 하나인 연극활동으로는 당시의 현실투쟁을 반영한 것이 많았다. 당시 공연된 연극활동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해방이후부터 건국전까지의 기간에 공연된 극본들을 초보적으로 조사한 데 근거하여 종합해보면 모두 86편’10)이나 된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실로 엄청난 숫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2. 2. 문예사상 투쟁과 민족문학의 좌절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의 중국문단을 살펴보면 끝없는 문예사상투쟁과 사상운동을 통하여 사회주의 문학건설의 길을 걸어 나갔다. 영화 ‘무훈전’에 대한 토론, 『홍루몽』연구 중의 자산계급 유심론에 대한 비판, 호풍문예사상에 대한 비판운동이 그것인데 우리 조선동포 문단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러한 비판운동을 통해 마르크스주의 세계관과 문예관을 확립하려는 것이 이들 사상투쟁과 사상운동의 목표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문예운동이 시간이 지나면서 지나치게 정치적인 성격을 띄게 되고 이는 결국 이른바 ‘좌경적인 오류’를 범하게 되고 이는 이후 조선동포문단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조선동포문단에서의 반우파투쟁은 1957년 후반에 시작한다. 반우파투쟁은 다음해 봄에 이르러 마무리되는데 중국 건국 초기에 중국내에서 벌어진 가장 영향력이 크고 범위도 매우 넓은 문예사상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극소수 자산계급들이 중국 공산당이 전당적으로 정풍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그 기회를 엿보아 이른바 ‘대명 대방’을 고취하고 공산당과 사회주의제도를 공격한 것이 반우파투쟁이 일어난 이유였다. 그러나 이 반우파투쟁은 지나치게 확대되면서 결정적인 오류를 범하게 된다. 즉 학술문제나 문화예술의 문제를 정치문제로 비화시키면서 민족문화건설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게 된 것이다. 그 구체적인 내용을 앞의 조성일, 권철 등은 『중국조선족 문학사』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첫째, 조선족 문단의 반우파투쟁은 자기의 창작성과로 독자들의 광범위한 공명대를 획득한 이름난 작가들 그리고 자기의 사상미학적 주장에 따라 대담하게 탐구의 창문을 열던 문인 이른바 ‘자산계급 우파분자’로 몰아 혹독하게 투쟁였다. (중략)    둘째, 조선족 문단의 반우파 투쟁은 현실생활 중의 부정적인 인소와 모순들을 대담하게 건드린 소설작품들과 우리 시대 인간들의 애정륜리와 인간미를 읊조린 서정시들을 이른바  ‘사회주의 정치표준’에 어긋아는 ‘독초’로 몰면서 터무니없는 비판의 모닥불을 사정없이 안기였다. (중략)    셋째, 조선족 문단에서의 반우파투쟁은 문예사상분야에서의 교조주의적 이론을 배격하는 탐구적인 평론과 ‘백화만발, 백가쟁명’방침의 고무하에 예술적 민주를 발양하여 발표한 언론들을 죄다 ‘수정주의’거나 반동적인 글과 견해로 간주하면서 혹독한 비판을 가했다.11) 결국 '반우파투쟁'의 확대는 중국내 소수민족의 하나에 지나지 않았던 조선족 문학건설에 적지 않은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제 막 뿌리를 내려 제 모습을 갖추려한 조선족 문단은 이 투쟁을 겪으면서 뿌리채 파괴되었으며 적지 않은 중견작가와 작가들이 ‘우파'로 몰려 농촌으로 추방되었다. 그들은 이른바 ‘노동개조'라는 명목의 고된 시련을 겪게 되었던 것이다. 동시에 ‘백화만발, 백가쟁명'의 방침에 기초한 다양한 문예창작은 자취를 감추고 정치성만이 강조되어 오로지 좌경적 경향만이 강조되었다. 당연히 문학예술의 다양한 창조성과 실험성은 사라지고 정치적 성격만 남게 된 것이다.   1958년에는 이른바 '수정주의 문예사조'에 대한 비판운동이 전개된다. '반우파투쟁'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할 수 있는 이 비판운동은 ‘백화만발, 백가쟁명'의 방침에 따라 일기 시작한 사상해방의 조류를 청산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 운동의 내용은 크게 둘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수정주의 문예사조’의 대표적 인물들에 대한 비판이고 다른 하나는 ‘수정주의 문예사조’의 대표적인 견해와 작품을 집중적으로 비판하는 것이었다. 결국 이러한 비판운동의 결과로 김학철, 최정연, 주선우, 김동구 등과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김학철의 장편 『해란강아 말하라』등이 수정주의 문예노선의 해악의 대표적인 예로 말해지며 이 결과 이들의 모든 문학활동과 문학적 주장, 문학작품이 모두 부정당하는 상황에 몰리게 되었다. 결국 조선동포 문단은 말 그대로 뿌리채 뽑히는, 철저하게 붕괴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수정주의 문예사조’에 대한 비판과 함께 조선족 문단에는 또 다른 문학적 위해가 가해지는데 그것은 지방민족주의를 반대하는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자산계급 조국관’, ‘언어의 순결화’ 등을 대상으로 하여 행해진 것으로 조선족 작가들과 조선족 문학에 대한 또 다른 문학적 압제였다. 1959년부터 진행된 이 ‘지방민족주의를 반대’하는 운동은 그 동안 행해진 민족구비문학의 수집이나 조선어 규범화 등에 대하여 냉혹한 비판을 가해 이제 막 그 모습을 갖춰나가는 조선 민족문화 건설에 결정적인 영향을 가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민족문학’을 계승, 발전한다고 할 때 이 계승이나 발전이라는 용어 자체가 지방민족주의의 표현이라고 비난하였던 것이다. 특히 조선족 작가들이 그들의 작품 속에 조선민족의 생활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려는 일조차 지방 민족주의적 행위라고 비난하였으니 이 운동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문학과 언어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각각의 민족어가 갖는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공통’부분만을 강조하고 심지어는 한어와의 융합만을 강조하여 조선어의 규범화를 강력 비난하였던 것이다. 결국 이런 분위기에서 김창걸12)이 1957년 7월호 『아리랑』에 발표한 ‘연변의 창작에서 제기되는 민족어 규범화 문제’13)라는 논문이 집중 비판의 대상이 되게 된다. 당시 조선민족 작가들이 겪는 조선어사용에 있어서의 혼란을 지적한 이 논문에서 김창걸은 ‘민족어 규범화란 우리 민족의 영광스러운 과업을 위해서 우리 작가 시인들은 모두 다 함께 최대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매우 적절한 지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김창걸의 지적은 지방민족주의를 반대하는 쪽에서 민족어의 순결화를 고취하는 지방민족주의분자로 몰아 비난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결국 반우파투쟁의 어려움을 넘긴 몇몇 문인들마저 이 비판운동을 통해 문단을 떠나게 된다. 이처럼 많은 문인들이 떠나게 된 조선동포문단은 붕괴되고 그 명맥만을 간신히 이어가게 된다.       2. 3. 신민가 운동과 문학의 정치적 예속    1958년에서 1959년은 중국의 이른바 ‘대약진’시기이다. 이 시기에 중국 각지에서는 이러한 대약진 운동에 발맞춰 대중적인 문예창작운동을 전개하였고 이 운동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신민가 운동’이었다. 건국 이후 사회주의 국가체제를 정비한 중국은 이에 따라 사회주의 경제와 문화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이러한 사회주의 건설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를 위한 문학운동 역시 열정적으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1957년 겨울과 1958년 봄에 있었던 조선 동포들의 ‘수리건설 양양 운동’과 이에 따른 신민가 창작의 예로 출간된 『연변민가선집』, 『연변민가집』이 이러한 대중적 문예창작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신민가를 통해 집단노동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사회주의적 노동열정과 혁명적 이상을 높이 구가하였으며 사회주의 제도와 공산당의 위대함을 노래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신민가들은 비록 비현실적인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작품 자체에 대해서는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이 신민가 운동 역시 후기에 이르면서 좌경적 오류를 범하게 된다. 1958년 10월호 『아리랑』지에 실린 ‘문학위성을 올리자’라는 사설이나 다음해인 1959년 1월호 『연변문학』에 실린 ‘전당, 전민적 창작운동을 전개하자’는 사설이 이러한 좌경적 예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 사설들은 ‘사람마다 시인이 되고’, ‘사람마다 문학위성을 발사하자’ 는 다소 허황한 주장을 내놓으며 남녀노소와 학력 등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이 다 신민가 창작에 참여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연변문학』에 실린 ‘전당 전민적 창작운동을 전개하자’라는 다음의 글을 보면 그러한 한계를 쉽게 알 수 있다. 각급 당위, 문련과 작가협회들에서는 이 헌례운동을 매우 중시하고 있으며 모두 창작계획을 세우고 우람찬 구호들을 제출하고 광범한 군중창작운동을 발동하고 있으며 적지 않은 성적들을 거두고 있다. 왕청현(중국 조선족 자치주에 속해 있는 현 중의하나; 필자)에서는 자기들의 창작임무와 구호를 아래와 같이 제출하였다. ‘전당이 동원되고 전민이 꾸리며 로, 농, 상, 학, 병이 일제히 동원되여 보수와 미신을 철저히 타파하고 공산주의 사상을 강으로 삼아 창작의 대고조를 일으키며 7개월 동안 착실히 노력하여 1백만건의 작품을 창작하여 10만건의 우수작품을 례물삼아 국경 10주년을 영접하자!‘ 왕청현에서는 이러한 구호와 임무를 실천하는 제1차 전투 중에서 각종각양의 형식으로 된 작품을 10만건이나 창작하였으며 장백산 밑 첫 마을인 화룡현 숭선향 (중국 조선족 자치주에 속해 있는 현과 향 중의하나; 필자) 인민군중들은 135만건을 창작할 계획을 제출하였으며 훈춘현에서는 일주일 민가창작운동주간에 7만건의 민가 를 창작하였다.14) 이처럼 신민가 운동은 지나치게 작품의 양적 생산에만 관심을 기울여 조잡한 작품의 창작을 막을 수 없었으며 동시에 반사실주의 경향의 작품 창작에도 영향을 끼쳐 문학작품의 질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면 부정적인 측면이 너무 많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당시 평론을 살펴보아도 이러한 문학적 오류는 전혀 지적하지 않은 채 이를 오히려 혁명적 낭만주의의 산물정도로 여기는 분위기를 조장하여 그 한계를 막기 어려웠다.    한편 이러한 신민가 운동은 다른 분야의 대중문예창작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그 대표적인 경우가 항일투쟁 회상기이다. 항일투쟁 회상기는 말 그대로 항일운동 시기의 회상을 적은 글을 말하는데 그 내용은 대체로 1930년대 연변지역에서 있었던 조선동포들의 항일무장투쟁을 다루고 있다. 즉 당시의 항일 투사들이 실화에 기초하여 직접 집필한 것으로 이 시기 신민가 운동 중에서 제일 바람직한 경우로 평가할 수 있겠다.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반우파 투쟁으로 시작한 1957년부터 문화대혁명까지의 기간 동안 있었던 여러 문학이론투쟁으로 인하여 조선 동포문학은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 내용을 다시 요약해 보면 1. 이러한 비판운동으로 인하여 적지 않은 중견작가들이 정치적 권리와 함께 창작의 권리를 박탈당했으며 동시에 예술창작과 탐구에의 열의를 상실하게 되었으며, 2. 문학작품의 사실주의적 특징이 약화되었으며, 3. 작품창작에 있어서 구체적인 정책과 정치적인 문제들에 대해 신경을 쓰게 되어 도식적이고 개념적인 작품들이 등장하게 되는 배경을 조성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중국내 조선동포문학은 민족적 특성을 잃지 않고 우리 민족만의 독특한 광채를 발휘하는 문학작품을 창작하는데 그 역량을 모아 나갔다고 할 수 있다.      3. 이 시기 소설문학의 성과 앞장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중국 건국 이후 문화대혁명 직전까지의 17년 동안 우리 조선동포 문학은 험준한 탄압과 외적 환경의 악화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발전을 거듭하여 왔다. 특히 소설분야에 있어서는 중국의 건국 이후 바뀌어진 생활양식과 다양한 인물군상의 등장으로 창작의 지평을 더욱 확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하였다. 일반적으로 중국 건국 이후 문화혁명까지의 조선동포문단의 소설은 두 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15) 즉 중국 건국에서 반우파투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직전까지를 1단계로, 반우파투쟁에서 문화대혁명시기까지를 제2단계로 나누어 이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소설문학의 발전단계를 전제로 하여 각 단계에서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자.    먼저, 반우파투쟁 직전까지의 1단계 소설문학은 건국의 흥분과 함께 민족문학을 건설하겠다는 열정에 영향받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소설문학은 ‘현실에 급격한 변화를 놓치지 않고 다룰 수 있는 단편소설’16)에 창작적 관심이 집중된 시기이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김학철의 단편집 『뿌리박은 터』(1953), 이근전의 『과일꽃 필 무렵』(1956)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 밖에도 ‘김창걸의 ‘새로운 마을’,  렴호렬의 ‘소골령’,  김학철의 ‘새집 드는 날’과 같은 작품을 그 에로 들 수 있겠다. 이들 소설과 산문들은 사회주의 제도의 우월성, 새생활에 대한 희열, 근로대중의 전형적 인간형 창조, 묘사의 사실성 등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물론 이 시기의 소설 중에는 이와 달리 사회주의 제도 아래서의 새로운 애정윤리를 보여주는 작품도 있다. 최현숙의 단편 ‘나의 사랑’, 리근전의 ‘참된 사랑’ 등이 그 예이다. 특히 최현숙의 단편 ‘나의 사랑’은 서간체 소설로 당시 문단에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킨 작품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나름대로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소설문학은 적지 않은 한계를 노출하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발표된 작품의 수가 많지 않았으며 그 소재 또한 지나치게 제한적이었다. 덧붙여 적지 않은 작품들이 정치적 선전과 선동에 신경을 쓴 나머지 예술적 감동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보다 분명하게 한계를 지적할 수 있겠다.    두 번째 단계의 소설은 반우파 투쟁에서 문화대혁명 직전까지의 소설이다. 이 시기는 중국에서 생산관계의 사회주의적 개조가 거의 이루어지고 사회주의 건설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시기이다. 당연히 이 시기 조선동포소설문학은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며 전개되었다. 즉 앞의 글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반우파 투쟁, 대약진 운동, 계급투쟁 확대화 등의 좌경적 오류의 피해를 입으면서 동시에 또 그를 극복하면서 변화, 발전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 시기 소설의 특징은 정치사상의 문제, 예술적 아름다움의 문제 등에 집중적인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사회주의 건설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인 것이 사실이다. 또한 소재의 확대와 다양화, 사회주의 건설에 매진하는 근로대중의 혁명적이고 영웅적인 삶의 태도에 대한 찬양, 노동자와 농사군, 그리고 군인에 대한 집중적인 관심, 항일제재의 심도있는 발굴이라는 측면 등에서 그 특징을 보여준다. 특히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는 근로대중의 사회주의 혁명의식아래 영웅주의적 태도를 보여주는 주인공을 그린 작품들이다. 김병기의 ‘쇠돌골의 변천’(1958), 안창욱의 ‘병상 위의 해연’(1958), 박태하의 ‘사막에서의 조난’(1959) 등이 있다. 그 내용을 개괄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쇠돌골의 변천’은 주인공 김영감을 통해 농촌건설이라는 명제 아래 매진하는 당대 농민들의 감동적인 삶을 그리고 있다. 동시에 이들의 사상적 변화의 과정을 잘 그리고 있어 사회주의 혁명건설을 위해 고투하는 전형적인 인간형을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낭만주의적 색채와 농민들의 열정과 지향, 꿈과 이상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둘 수도 있다.    ‘병상 위의 해연’은 농촌제방공사 현장에서 일하는 인민해방군 병사인 상등병 종인이의 영웅적인 모습을 그린 소설이다. 일기체의 형식을 지닌 이 작품은 사회주의 조국의 발전을 위해 개인의 욕망과 고통을 모두 벗어 던지고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주인공의 뜨거운 열정과 강인한 의지를 보여준다. 특히 일기체의 형식을 선택함으로써 1인칭 소설이 갖는 뛰어난 심리묘사의 특질을 통헤 등장인물의 내면의 세계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도 이 소설의 뛰어난 덕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막에서의 조난’도 앞의 두 작품과 마찬가지로 영웅적인 인물형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특히 고비사막을 소설의 무대로 하고 있어 한국소설과는 달리 그 소재의 지평을 확대하고 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주인공 김태희의 조난과 그에 따른 고난, 그를 극복하려는 불굴의 의지, 결국 주인공 김태희는 엄청난 고난을 이겨내고 동료에게 구출된다. 그러나 그 죽음과 최후까지 싸워 이겨 동료들에게 구출된 뒤에도 그는 사회주의 조국과 인민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의미하는 자신의 자동차의 안부를 먼저 묻는 것이다. 주인공 김태희의 영웅주의적인 풍모와 락관주의적 역사의식을 뜨겁게 그려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밖에도 이 시기에는 새로운 사상과 낡은 사상과의 투쟁, 민족단결의 주제를 다룬 소설들도 적지 않게 발표되어 다양한 소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좌경적 오류에 기초하여 겪게 되는 몇 차례의 정치적 풍랑이 조선동포 소설의 경우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겠다. 즉 생활의 긍정적인 묘사라는 측면만이 강조되어 소설의 다른 한 중요한 축인 현실의 어둡고 부정적인 면을 지적하고 미래의 전망을 제시하는 기능은 매우 빈약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또한 계급투쟁이 확대되고 절대화함에 따라 남녀간의 애정문제를 그리거나 민족적인 관심이 모아지는 문제를 다루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던 것이다. 인물의 창조에 있어서도 지나치게 영웅적이고 이상화된 인물만을 그려 엄밀한 의미에서의 근대적인 인간형을 그리는 데는 실패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요약한다면 이 시기의 조선동포들의 소설문학은 나름대로의 성과를 인정할 수 있기는 하지만 문학작품을 둘러 싼 외적 환경의 악화와 특히 문학이론 투쟁, 또는 좌경적 오류에 기초한 반우파투쟁의 영향에 밀려 소설 본래의 성과를 얻는 데에는 다소 미흡했다고 할 수 있겠다. 4. 결론을 대신하여 이상으로 간략하게나마 중국 건국 이후 조선족 문학의 전개와 주요 소설들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결론 삼아 중국 조선족 문단의 현황과 그 대안을 제시하며 이 글을 마치려 한다.    국외자일 수밖에 없는 입장에서 중국 조선족 문학을 언급한다는 일이 매우 조심스럽기는 하나 많은 중국의 조선족 문인들과 연구자들은 중국 조선족 문학이 위기에 놓여 있다고 한다. 적지 않은 시간 조선족 문학을 지켜 본 필자의 입장도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우선 문학잡지들의 위기가 눈에 띈다. 오랜 전통의 유명 문학잡지들이 그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절치부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중국의 조선족 문인들은 모두 걱정하고 있다. 문학지에서 종합지로 다시 종합지에서 오락지로의 부침을 거듭하며 그 명맥을 유지하기도 쉽지 않은 현실에 놓인 것이다. 독자의 감소에 따른 판매부수의 격감, 좋은 필자를 확보하는 일의 어려움 등이 그것이며 사실 이러한 현상은 잡지의 경우에 그치는 일이 아니라 조선족 문단 전체에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다. 다행스러운 것은 요즘들어 뜻있는 이들의 헌신과 봉사로 척박한 문학 풍토 위에서도 <도라지>, <문학과 예술>, <연변문학>, <장백산> 등이 단단한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음으로는 독자와 문인지망생의 감소현상이다. 먼저 독자의 감소현상은 조선족 인구의 분산현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를 중심으로 한 조선족의 생활반경이 중국의 개혁개방, 그에 따른 한국과의 다양한 접촉의 결과 이들 조선족 동포들은 중국의 연해지구를 비롯하여 한국의 기업이 있는 곳으로 또는 개혁개방 이후의 사회적 변화에 발맞춰 돈을 벌 수 있는 곳으로 넓혀지게 된 것이다. 이 결과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조선족 인구비율은 빠른 속도로 감소하게 되었으며 예전의 조선족 문학의 독자들도 그들의 생활터전이 옮겨지게 됨에 따라 점점 문학잡지의 구독기회를 계속하기 어렵게 되었다.    한편 문인지망생의 경우도 위 독자의 감소원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개혁개방의 시기에 크게 돈벌이가 되지 않는 글쓰는 일은 젊은 세대에게 그리 매력적이지 않은 일일 수밖에 없다. 더욱이 한글을 쓰고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그렇지 않은 다른 중국인들보다 많은 수입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에 능력있는 젊은 조선족들에게 글을 쓰는 일은 더 이상 매력적인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중국 조선족 문학도 상업주의의 냉혹한 현실에 던져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 조선족 문학의 오늘을 냉정히 살펴보면 지금 이 시기는 위기이면서 동시에 기회일 수도 있다. 오히려 지금 이 시기를 중국 조선족 문학의 새로운 도약의 시기로 삼아야 하며 그러한 가능성도 충분하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인 것이다. 위기는 기회를 위한 준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매우 조심스러운 몇 가지 제안을 해 본다.      우선 중국 조선족 문단과 한국문단과의 적극적인 교류가 그 도약의 첫 걸음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 한국문단과의 교류는 많이 이루어졌으며 앞으로도 그러한 교류는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 동안의 교류와는 다른 교류의 질적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이다. 한국문단과의 교류 이후 중국 조선족 문학의 수준이 매우 높아졌다는 이야기를 적지 않은 조선족 문인들의 입장인데 이는 한국문학의 우수성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족 문단의 시야가 한국문단과의 교류를 통해 다양해졌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설명할 수 있겠다. 그래서 다소 비약적인 의견을 제시한다면 연변 문인의 문인들에게  한국문인협회(특정문인단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닌, 일반적인 의미로서의 한국문단)의 회원으로서의 자격을 주어 한국의 권위있는 문예지에 작품을 게재할 기회를 주거나, 권위있는 문학상에 응모할 자격을 주는 일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즉 한국문단과 중국 조선족 문단과의 교류를 지금까지의 교류보다 한 단계 더 높여 질적 변화를 꾀하자는 제안이다.               다음으로는 중국 조선족 문인들이 그들 작품의 독자층으로 한국의 독자를 염두에 두라는 제안이다. 이 제안은 앞의 제안과 마찬가지로 중국 조선족 문학의 성격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와 관계하여 매우 미묘한 문제이다. 앞의 윤은진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중국의 조선족 문학은 중국의 56개 소수민족문학 중의 하나이다. 여기에 중국 조선족 문학의 이중성이 있다. 중국의 소수민족 문학의 하나라는 조선족 문학의 기본 성격과 넓은 의미의 한글문학으로서 한국문학과 전혀 무관한 존재일 수 없다는 것이 조선족 문학이 갖는 이중성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중성은 조선족 문학의 지평을 넓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중국의 조선족 문단이 한국의 독자를 그들 문학의 독자로 삼는 것은 조선족 문학의 또 다른 기회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중국의 조선족 문학은 해외 한글문학 중 그 역사나 작품이 질적 양적 면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존재이다. 러시아의 고려인 한글문학이 거의 빈사상태에 있고 일본과 미국의 한글문학의 수준이 중국의 그것에 크게 미치지 못하는 현실을 생각해 볼 때 중국의 조선족 한글문학이 갖는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중국과의 수교 이후 조선족 문단과 한국 문단은 다양한 교류를 통해 우리 한글문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향후 이 두 문단의 보다 다양하고 빈번한 교류를 통해 우리 한글문단의 지평이 더욱 넓어지기를 기대한다.  
5    우리말에 대한 어떤 기억 댓글:  조회:1695  추천:118  2008-06-24
  우리말에 대한 어떤 기억조남철 한국방통대 국문과 교수대학에서 한국문학을 강의하는 일이 직업이다 보니 우리말과 글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가지게 된다.우리말과 글이 우리들이 서로가 하나의 핏줄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도와주고 또 처음 보는 사람들도 하나의 핏줄로 묶어주는 정서와 소통의 주요한 도구라는 사실을 새삼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낯선 나라에서 우리말을 쓰는 사람을 만났을 때의 그 감동을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말과 관련해 다소 특별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러시아의 고려인 동포와 관련된 경험이다. 2,3년 전 관계하고 있는 시민단체에서 러시아의 우수리스크에 한글학교를 세우기 위해 후원회를 결성하고,‘후원회 밤’에 우수리스크의 실행위원장인 러시아인 동포를 초청하였다.의례적인 몇 가지 행사가 끝나고 실행위원장인 동포 여성이 인사말을 하였다. 1937년 ‘스탈린에 의한 강제이주’로 다른 지역의 동포들에 비해 우리말을 잘 하지 못하는 고려인 실행위원장은 원고지를 써 와 떠듬거리며 인사를 했다. 장내에 모든 이들이 고려인 동포 여성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떠듬거리기는 했지만 진심이 담긴 그 말은 그 자리에 같이 한 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말이 더 이어졌다.‘정말 미안합니다. 같은 민족인데도 우리말을 잘 하지 못해 이렇게 글을 써 와 읽고 있는 사실이 너무 미안합니다. 다음에 만날 기회가 있을 때에는 유창하지는 못해도 원고를 보지 않고 말 할 수 있도록 우리말을 열심히 배울 것을 여러분에게 약속드립니다’. 순간 나는 너무 엄청난 충격에 쌓였다. 누가, 그 자리에 있었던 우리들 중 누가 그 러시아 동포에게 우리말을 하지 못한다고 비난할 수 있단 말인가? 몇 십 년 동안 낯 선 남의 땅에서 온갖 시련과 고통을 혼자 견디어 내야 했던, 나라도 겨레도 아무도 그들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았던, 이제야 겨우 우리 곁에 함께 선 이 누이와 핏줄들에게 누가 우리말을 모른다고 비난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탄식이 절로 터져 나왔다. 그 동포의 너무나 순박한 모습에 가슴이 저려 왔다. 다른 한 기억은 중국에 있는 어느 동포 대학에서의 경험이다. 그 동안 이런 저런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을 모아 동포 학생들에게 아주 적은 금액의 장학금을 지원하는 일을 할 수 있었다. 얼마 전 그 장학금 전달식에서의 기억이다. 전달식이라고 해야 한국에서 문학기행을 같이 간 대학생 40여명에게‘민족’을 느끼게 할 생각으로 급조된 의식이어서 한국 학생들 이외에는 조선족 동포와 대학교의 중국인 관계자, 그리고 장학금을 받는 동포 학생들이 전부였다. 조촐하게 식이 진행되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같이 한 한국인 모두를 당황하게 하는 일이 생겼다. 식을 모두 중국어로 진행하는 바람에 축하하기 위해 참석한 한국 학생들은 멍하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민족’을 느끼게 하기 위한 행사가 오히려 이질감을 더 분명하고 크게 드러낸 것이다. 학생들을 이끌고 그 자리에 참석한 글쓴이도 크게 당황하였고, 순간 크게 불쾌했다. 행사 후 그들에게 불만을 표시하였고, 그들 역시 미안하다는 뜻을 표현하기는 했지만, 꽤 오랫동안 불쾌한 감정을 버리기 어려웠다. 그것은 분명 우리말을 모욕한 일이었고, 말을 모욕하는 일은 민족을 모욕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말과 글은 민족을 하나로 엮는 가장 큰 얼개이다. 당연히 세계화 시대 700만 동포를 하나로 묶는 가장 쓸모있는 도구도 우리말과 글이다. 그리고 이것은 재외 동포에게 우리말과 글에 대한 교육을 더 강화할 이유이기도 하다.
4    우수리스크 한민족 문화학교를 아십니까? 댓글:  조회:2263  추천:171  2008-05-18
우수리스크 한민족 문화학교를 아십니까? 조남철 한국방통대 국문과 교수여러분, 혹시 우수리스크 한민족 문화학교를 아십니까?   아시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러시아의 연해주 지역은 우리 민족의 슬픈 근세사를 잘 보여주는 뼈아픈 현장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 민족이 연해주에 공식적인 주민등록을 하고 거주하기 시작한 것이 1864년이니 벌써 14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1920년대 이미 20만 이상의 우리 동포들이 집단 거주지인 신한촌을 이루고 ‘레닌기치’, ‘권업신문’ 등을 발행하였고 각급의 학교까지 운영하고 있었다고 하니 역사에 걸맞은 규모를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들 동포들은 1937년 스탈린에 의해 그들의 땀과 노고가 배어 있는 연해주를 떠나게 됩니다.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한 이들 고려인들은 소련 연방 해체 이후에는 다시 러시아로 쫓기듯이 돌아 올 수밖에 없었던 기구한 운명의 주인공들이기도 합니다.   러시아로 쫓기듯 돌아 온 이들 고려인 동포들은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예전 그들의 선조들이 떠났던 연해주로 다시 모여 들고 있으나 국적문제 등의 해결도 쉽지 않고 오랫 동안 우리말 교육을 받을 기회마저 갖지 못해 매우 어려운 형편에 놓여 있습니다.     러시아 이주 140주년을 맞는 2004년, 연해주 지역에는 두 가지 의미있는 사업이 준비되었습니다. 하나는 140주년 기념관을 건립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러시아 연방정부에 청원을 넣어 우수리스크에 한민족 문화학교를 개교하는 일입니다. 140주년 기념관은 한국정부와 뜻있는 인사들의 도움으로 건물구입을 마치고 내부 공사를 하는 단계에 와 있습니다만, 우수리스크 한민족 문화학교 개교는 아직 어려움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작년 9월 1일 개교하여 한글과 우리 민족문화 교육을 시작하기는 했습니다만, 부족한 교실을 마련하는 일 등은 진척이 쉽지 않아 어려운 형편에 봉착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2005년 7월 한국에서 ‘우수리스크 민족학교 후원회’를 만들고 다양한 도움의 방법을 찾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우수리스크 제 3학교의 러시아인 교장을 비롯하려 관계되는 몇몇 동포들도 초청하였습니다. 그리고 후원회의 발족식을 가졌습니다. 그 자리에서 아주 감동적인 순간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함께 한 많은 한국인 관계자들에게 부끄러움과 감동을 함께 준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러시아 측 실행위원장인 고려인 동포 조 엘레나의 인사말이었습니다. 조 엘레나 위원장은 우리말에 익숙하지 못해 종이에 써 왔다며 우리말을 떠듬떠듬 읽어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마다 덧 붙였습니다. ‘정말 진심으로 이 자리에 함께 한 모국의 여러분에게 미안합니다. 한 민족으로 우리말을 잘 하지 못해 너무 미안합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우리말을 배워 다음에는 종이에 쓰지 않고 인사말을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 자리에 함께 한 모든 이들이 침묵했습니다. 마침 사회를 보던 제가 한 마디 거들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어느 누가 조 위원장의 한국어가 서툴다고 말할 수 있느냐? 그 동안 우리 정부와 우리가 이들 고려인 동포들이 한국어를 할 수 있도록 도와 준 일이 도대체 무엇이 있느냐? 지금 이만큼이라도 한국말을 할 수 있는 조 위원장에게 오히려 우리 모두 부끄러워해야 하지 않느냐? 라고 말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이제는 한국의 정부를 포함한 모든 이들이 그 동안 우리 해외동포들의 우리말, 글 교육을 위해 어떤 일을 해 왔는지, 그리고 앞으로는 어떤 일을 해야 할 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인 것입니다.    민족이라는 단어가 그 어느 때보다 우리에게 소중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한 생각이 간절합니다.
3    서울, 연길, 그 거리에 대해 댓글:  조회:2833  추천:181  2008-05-17
  서울, 연길, 그 거리에 대해 조남철 한국방통대 교수      꽤 오래 전 한국의 민간회사인 KTF에서 지원하는 연길시 연북소학교의 민족문화교실 개관식과 시범수업에 참가하기 위해 연길을 다녀왔다. 아직 따뜻한 서울의 날씨에 비해 많이 추었는데 그 기온의 차이만큼이나 큰 서울과 연길의 거리를 느낄 수 있었다.      장면 1 - 아쉬운 미안함-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시범수업을 하는 연북 소학교의 교실은 교사와 학생들의 흥분한 마음만큼 뜨거웠다. 1교시 역사교실에서의 수업은 중국으로 이주한 조선인들의 이주역사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려는 그들의 노력이 따갑게 느껴졌다. 2교시의 예절 수업은 또 다른 감동이었다. 한국에서는 쉽게 보지 못할 ‘한복 입기 수업’은 선생님의 꼼꼼한 지도와 학생들의 진지한 자세로 한국에서 건너 온 참관단 일행을 감격하게 하였다. 몇 번의실수 끝에 의젓하게 한복의 옷고름을 매고 앉아 있는 아이들의 또랑한 눈망울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가 없었다. 26살이라는 젊은 여교사 역시 수업을 위해 여러 날 동안 한복 입는 법을 배웠다며 보람찬 미소를 수줍게 흘렸다. 3교시의 민족문화 수업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김치에 관한 수업을 경험했다는 이 수업의 학생들은 자신들이 조사한 ‘떡’에 관한 내용을 한 시간 동안 막힘없이 설명했다. 교사의 지도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한국의 우리들도 모르는 떡에 관한 이들 학생들의 발표를 들으며 가슴 한 편에 왠지 모를 미안함을 느낀 것은 필자만이 아니었다. 참관인 모두가 가슴 뿌듯한 감격과 함께 왠지 모를 아쉬움과 미안함을 느꼈던 것이다.   장면 2 -섭섭한 아쉬움-   다음 날 저녁 연길의 몇몇 지인들과 식당을 찾았다가 그곳에서 지금 한국에서 방영중인 중국 조선족 동포를 소재로 한 연속극을 같이 볼 기회가 있었다. 주인공 중의 한 명이 중국 조선족 동포였으므로 식사자리는 자연스레 그 연속극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로 이어졌다. 그런데 자리를 같이 한 중국 동포들은 하나같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조선족 동포를 희화화시켰다며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필자도 몇 번 본 일이 있는 연속극이어서 그 내용을 잘 알고 있었기에 중국 지인들의 반응은 사실 너무 의외였다. 그 내용을 물었더니 '주인공의 중국어가 매우 낮은 수준이었다, 극의 내용이 지나치게 비현실적이다, 어떻게 그 많은 한국어를 짧은 시간에 중국어로 번역할 수 있겠느냐'는 등 매우 지엽적인 것이었다. 결국 그들은 이미 한국인에 대해 갖고 있는 편견의 안경을 쓰고 그 극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인이  부럽고 한국에 가고 싶기는 하지만 그들이 무언가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섭섭한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중국의 우리 동포들은 한국의 우리보다 훨씬 더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민족’이라는 단어는 피와 땀, 눈물이 배어 있는 구체적인 실존의 단어였다. 그들의 노고에 감격과 고마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은 같은 민족인 한국인들에게 무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섭섭하고 아쉬운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간혹은 섬뜩한 증오의 감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한 겨울의 날씨보다 더 큰 이 거리를 좁히는 일에 더 많은 이들의 관심이 필요하다. 민족은 가장 끈끈한 연대의 끈이며 21세기를 열어 갈 우리의 귀한 자산이기 때문이다. 
2    조선족을 위한 변명 댓글:  조회:2269  추천:150  2008-04-25
조선족을 위한 변명 하나조남철 한국 방송통신대학 교수요즘 들어 한국인들이 중국동포, 조선족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느낌이다. 어느 구직신문에는 사람을 모집하며 ‘중국동포 사절’이라는 문구를 적어 놓기도 하여 한국내 조선족동포에 대한 비판과 실망의 감정이 위험수위를 넘은 느낌이다. 그런가하면 조선족 동포들의 혐한 분위기는 오히려 일반 중국인들의 그것보다 훨씬 심하다. 조선족 사회붕괴의 원인도, 상대적으로 높은 이혼률의 원인도 모두 한국과 한국인 때문이라는 것이다. 조선족 동포들의 인터넷 게시판을 보면 차마 입에 담기조차 어려운 분노의 감정들을 만나게 된다. 이는 매우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중국의 개혁개방과 한중 수교 이후 많은 수의 조선족 동포들이 ‘코리안 드림’을 위해 한국을 찾았고 현재 국내 거주 조선족 동포의 수는 30만에 이른다. 이들이 한국에 대해 갖는 편견과 분노, 동시에 한국인이 조선족 동포에 대한 편견과 무시는 우리 민족의 내일을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다. 750만 명에 이르는 재외동포 중 조선족 동포의 수는 220만 명에 가깝다. 21세기 한국과 가장 가깝고 필요한 이웃 중의 하나가 중국이다. 그리고 중국의 조선족 동포 또한 21세기 한민족을 위한 아주 쓸모있는 중개자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더 이상의 조선족 동포들과의 갈등은 한 중 양국과 7000만 한민족 모두에게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특히 다른 지역에 거주하는 재외동포들의 경우도 비슷한 경우이긴 하지만, 조선족 동포들의 대부분이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에 제 나라 조선이 힘없어 제 백성을 먹이지 못하고 지켜주지 못해 낯선 땅 남의나라로 이주한 후손들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면, 조선족 동포들에 대한 우리 한국민들의 보다 따뜻한 관심과 이해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물론 일부 조선족 동포들의 경우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 조선족 동포 지식인은 “대부분의 한국인들의 인상 속의 중국동포 이미지는 ‘게으르고 상식이 안 통하는 사람들, 돈이라면 모든 것을 마다하지 않고 공중장소에서 규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 감쪽같이 도망치고 잠적하며, 단결심이 적고 내홍(內訌)이 많은 사람’들로 각인되어 있다”고 지적하며 조선족 동포들의 분발과 변화를 요구하고 있기도 하다. 양식있는 지식인의 용기있는 지적이다. 이제 우리 한국인들도 조선족 동포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또 그들을 이해하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한 시기이다. 이를 통해 조선족 동포들과의 이런 저런 문화와 의식의 차이를 좁힐 필요가 있다. 그들의 한국에 대한 분노와 증오 또한 우리들의 상상을 뛰어 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갖는 가장 큰 반감의 이유는 그들 조선족 동포들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짓밟는 같은 민족의 무례함이다. 많은 조선족 동포들에게 있어 한국은 일확천금의 꿈을 이뤄 그 동안 중국에서 소수민족으로 살아 온 설움을 단번에 떨쳐 버릴 수 있는 ‘꿈의 나라’이다. 또한 세계 10위 규모의 경제력을 지닌 발전한 고국, 한국은 대다수 조선족 동포들에게 민족적 자긍심과 우월감을 갖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한국은 그런 조선족 동포들에 기대와 긍지를 단숨에 짓밟아 버린다. 조선족 동포들이 그들로서는 일생 모으기도 어려운 엄청난 비용을 지불하고 고국인 한국 땅에 도착했을 때, 그들이 느끼는 생소감과 소원감은 말할 수 없이 크다. 특히 그들이 인천국제공항에서 입국수속을 위해 처음 만난 고국의 동포들은 방금 전까지 비행기 안에서 ‘고국에 왔다’는 기대감에 마음을 설레었던 이들에게 찬물을 끼얹고 만다. 어느 먼 나라 난민들의 입국을 심사하는 듯한 공항공무원들의 위압적이고 냉담한 태도와 불친절에 인간적 수모와 분노를 느끼게 된다. 더욱이 같은 ‘중국 여권’을 가진, 그리고 언어가 통하지 않은 한족 중국인들은 별 문제없이 입국 심사대를 통과하는 것과 달리 언어가 통하는 조선족 동포들은 온갖 곤경을 치루게 되는 경우에 이르면, 그들이 분노는 더욱 거세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법무부 출입국 관리 사무소에 안내되어 재심사를 받는 이들의 대부분은 놀랍게도 중동국가에서 와 ‘테러범’으로 의심받는 아랍인들과 조선족 동포들이다. 이는 한국 공무원들의 편견과 불신이 작용한 것으로 ‘코리안 드림’의 부푼 꿈을 안고 온 한겨레 조선족 동포들에 대한 모욕이며, 인격적 살인이다. 그래서 많은 조선족 동포들에게 ‘고국의 이미지’는 불친절한 공항 및 출입국관리소의 공무원들의 차별과 멸시인 것이다. 200만 조선족 동포를 비롯해 700만 재외동포는 우리 민족의 미래를 위한 귀중한 자산이다. 특히 220만에 이르는 조선족 동포사회는 한중 양국의 우의와 이해를 위해 크게 공헌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많은 조선족 동포를 위한 변명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1    방문취업제 1년을 돌아보며 (조남철) 댓글:  조회:3916  추천:137  2008-04-04
방문취업제 1년을 돌아보며 조남철 한국방송통신대 교수, 재외동포신문 편집위원장 2007년 시작한 방문취업제가 시행 1년을 맞았다. 그동안 중국 및 구소련동포들에 대한 기존의 특례고용허가제가 방문취업제로 바뀌면서, 한국에 연고가 없었던 중국 및 구소련 지역 동포들의 한국입국 및 합법적인 취업이 가능해졌다. 2007년 11월말 한국어시험과 추첨을 거친 방문취업제 합격자들의 한국행이 진행되고 금년에 다시 무연고동포 선발을 위한 한국어시험 등록이 시작되면서 방문취업제는 재외동포사회의 가장 뜨거운 관심사가 되었다. 이제 겨우 첫 걸음을 내디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방문취업제에 대한 동포사회의 반응은 대체로 긍정적인 듯하다. 그들의 반응은 1) 중국과 CIS지역의 무연고동포에게 고국 방문과 취업기회를 부여하여 재외동포사회와 고국간의 유대강화의 계기를 마련했고 동시에 고국에 대한 ‘불신의 벽’을 크게 낮추는데 기여하였다. 2) 방문취업제 실시로 5년 유효한 복수사증이 발급되어 재외동포들의 자유로운 출입국이 보장되었으며 이는 중국조선족사회의 ‘공동체 이완’ 우려의 소지가 해소되었다.3) 방문취업제의 실시로 출국을 위한 위장결혼과 브로커 초청사기로 인한 피해사례가 줄어들었으며, 조선족동포들의 출국비용도 크게 감소되었다. 4) 이 제도의 시행으로 고국 행을 갈망하던 중국동포를 비롯한 재외동포들에게 한국정부의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바꿔 놓았다는 것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물론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장 큰 문제점은 동포밀집지역인 동북3성에 한국어시험장소가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동북3성에 거주하는 중국동포 수는 전체 조선족인구의 85% 이상이지만, 2007년에 배정된 시험정소는 중국전체 15개 시험지역 중 장춘과 대련 2개 지역뿐이었다. 2008년에는 중국 관계기관과의 협의를 거쳐 연길과 할빈 등 4개 지역이 추가되었지만 여전히 시험장소가 부족하다. 이밖에도 인터넷을 통한 등록접수에 따른 농촌지역의 어려움 등을 동포언론과 시민단체에서 문제점으로 지적하고 있다. 이유있는 지적이다. 이런 문제점들을 빠른 시간 안에 개선해 나간다면 방문취업제는 재외동포와 고국과의 거리를 단숨에 좁힐 수 있는 의미있는 제도로 뿌리내릴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동포사회의 지도자와 시민단체, 언론 등에 부탁하고 싶다. 무엇보다도 이 제도가 합법적이고 합리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동포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지난 3월 18일 방문취업제 1년을 돌아보는 동포단체 공개토론회에서 정부 당국자는 “27만여 동포가 방문취업비자를 받았지만 불과 5천여명의 동포만이 어디, 어떤 업종에서 일하고 있는지 신고했을 뿐 나머지 26만 5천여명의 행방을 알 수 없어 동포정책에 상당한 혼선을 빚고 있다”며 동포들의 협조를 부탁했다.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재외동포는 우리 민족의 큰 자산이다. 동시에 재외동포들 역시 고국인 한국의 법과 질서를 존중하여 상호간의 믿음을 쌓아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상호불신을 제거하는 것이 재외동포와 고국의 한국인이 함께 하는 첫 걸음이라는 사실은 더 말할 필요조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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