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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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분석해보는 중국의 엘리트 체육과 대중체육 댓글:  조회:2557  추천:0  2013-02-28
    지난해에 있은 1212 런던장애인올림픽에서 중국장애인올림픽대표팀은 금메달 95매, 은메달 71매, 동메달65매로 종합순위 1위를 기록하였다. 이는 2위를 한 로씨야와 3위를 한 영국의 메달총수(도합 242매)와 거의 맞먹는 수자(중국은 도합 231매)이며 6위를 기록한 미국의 메달총수와는 2.5배에 달하는 위력을 나타냈다. 우리 중국은 올들어 지난 8월 13일(북경시간)에 결속된 런던올림픽에 이어 올들어 재차 세계적인 체육대축제에서 엘리트 체육강국임을 과시하였다.     하지만 반면에 현재 중국의 대중체육의 상황을 보면 그닥 리상적이 되지 못하고있으며 엘리트 체육에 비해 많은 실망적인 기록을 남기고있다.     그럼 여러가지 수치를 통해 중국의 엘리트 체육과 대중체육 사이의 관계를 비교해본다. 엘리트 스포츠 분야 아시아 1위, 세계의 제1집단군        1991년의 아시안게임으로부터 20여년래 중국의 엘리트 체육은 각각 6회에 달하는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에서 거침없이 승승장구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과 1996년의 아틀란타올림픽에서 금메달랭킹 제4위로 제2집단군의 주자가 되였고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는 금메달 28매, 금메달랭킹 3위로 제1집단군에 진입했으며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는 금메달 32매로 금메달랭킹 2위를 기록하였고 2008년의 북경올림픽에서는 금메달 51매로 세계정상에 우뚝 올라섰었다. 그리고 이번 2012 런던올림픽에서는 금메달 38매로 미국한테 뒤져 2위로 처지기도 했지만 우에서 언급하다싶이 런던장애인올림픽에서는 2위를 기록한 로씨야와 금메달수자에서 59매의 차이를 보이면서 “엘리트 체육의 제국”이란 명성을 갖게 되였다.     우리 중국의 올림픽력사는 그야말로 험난하고도 간고한 려정이였다. 1932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개최된 제10회 올림픽에는 중국에서 단 1명의 선수로 륙상에서 류장춘이 참가했지만 메달권에도 진입하지 못해 당시 중국은 “동아의 병부”란 오명을 썼었다. 그뒤 국민당통치하의 중국은 1936년 베를린올림픽과 1948년의 런던올림픽에 참가하였으나 여전히 금메달획득에 실패했다. 해방후 우리 중국은 1970년에 와서야 올림픽에서의 중국의 합법적지위를 회복, 1984년 로스안젤레스에서 개최된 제23회 올림픽부터 금메달(15매)을 따기 시작했고 2000년부터는 올림픽에서 제1집단군의 위치를 확립하게 되였다.      중국의 올림픽참가력사는 100년도 되지 않으며 금메달을 따기 시작한 력사 또한 30년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올림픽에서의 중국이 이룩한 성과는 세인들을 놀래울만한것으로 기록되기에 손색이 없다고 해야 할것이다. 대중체육분야 국민체질 아시아 3위 세계 38위       우에서 언급한 엘리트 체육과는 달리 중국의 대중체육은 지난 25년래 많은 우려를 자아내고있다. 특히 국민체질면에서 아시아의 3위와 세계의 38위를 기록하여 엘리트 체육강국이라는 미명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있는 상황이다.     지난 세기 90년대부터 중국에서는 매 5년에 한번씩 대규모적인 국민체질감측을 진행, 그 결과를 보면 그중 달리기에서 속도소질, 내력소질과 유연성소질 및 순발력소질과 력량소질 등이 전면적으로 하강되였다. 특히 내력소질을 검측하는 800메터와 1000메터 달리기에서 그것이 더욱 돌출하게 나타났는바 중학교 남녀학생들의 달리기에서 각각 평균 9.6초와 12.6초가 늦어졌고 대학교 남녀학생들의 달리기에서는 각각 평균 20초와 15.1초가 늦어졌다. 그리고 최근 새로 발표된 우리 나라 국민체질보고에 따르면 우리 나라 청소년의 비만률이 지난 2000년에 비해 50%가 증가, 도시 남학생의 1/4 정도가 비만아로 평가되고있으며 청소년의 근시률도 지난 2000년의 20%로부터 31%로 증장되여 짙은 우려를 자아내고있는 실정이다.     또한 지난 2007년 유엔의 모 기구에서 발표한 세계국민체질랭킹을 보면 네덜란드, 단마르크와 독일이 앞 3위를 차지했고 아시아 1위인 한국이 24위, 아시아 2위인 일본이 29위, 아시아 3위인 우리 나라는 38위로 나타났다. 만약 세계 각국에서 국민체질올림픽을 개최한다면 엘리트 체육의 제1집단군에 속하는 중국의 국민체질랭킹은 더없이 참담하게 되여 재차 “동아의 병부”란 오명을 쓸 가능성도 있다는 말이 되고있다. 원인분석 1 급속도의 도시화 운동환경 제약        주지하다싶이 최근 몇년간 우리 나라의 도시화속도가 빨라지면서 지난해말에 이미 도시인구가 50%선을 넘어섰다. 도시화에로의 급속한 확산은 중국의 생활환경에 많은 유리한 일면도 있지만 우리 국민들한테 활동공간이 좁아지고 활동량이 적어지는 등 일련의 문제점도 초래하고있다. 특히 청소년의 경우 도시교통의 차질때문에 학교에 다닐 때 자전거를 타지 못하게 하는 가정이 허다하며 이렇듯 활동량이 적어지는데다 영양과잉으로 비만청소년이 대폭 늘어나고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현재 도시의 곳곳에 수영관, 헬스클럽같은 생활시설이 많이 들어서고있지만 청소년들은 벅찬 공부부담때문에 그러한 곳으로 다닐 시간도 없거니와 이러한 이런 시설 또한 거개가 상업성을 띄고있는데서 경제상의 부담도 적지 않은 실정이다. 원인분석 2 외동자녀가정 자녀교양 문제돼       다년간의 계획생육국책으로 가정들 대부분이 외동자녀만 키우기에 자녀교육을 공부에 집중시키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또한 청소년들의 체질하강을 불러오는 큰 요소중의 하나이다.     그런 가정을 놓고보면 부모들이 자녀한테 과외체육활동을 권장하는 경우가 적은데다 자녀들 또한 가정의 “왕자” 혹은 “공주”로 되여 과외체육활동을 외면하는 경우가 많다. 집계에 따르면 일본의 중소학교 학생들중 매일 2시간 이상씩 운동하는 학생이 21.3%인 반면에 우리 나라 중소학교 학생들중 매일 2시간 이상씩 운동하는 학생은 6.3%에 그치며 일본에서 매일 3시간 이상씩 운동하는 중소학교 학생이 21.3%인 반면에 우리 나라에서 매일 3시간 이상씩 운동하는 학생은 1.3%에 그치는것으로 우리 중국에서 운동시간이 길어질수록 이를 견지하는 학생비률이 이웃나라들에 비해 점점 떨어지고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경상적으로 과외체육활동을 견지하는 초고중학생은 중국은 8%에 그치지만 일본은 65.4%나 되고있다. 원인분석 3 금전만능 기형적발전 초래         우에서도 언급하다싶이 우리 중국의 대다수 가정이 외동자녀만 키우기에 그런 자녀들한테 리기주의 및 금전만능 사상이 농후해졌다. 이런 자녀들은 자기의 안위만 생각할뿐더러 돈이라면 뭐든지 한다는 현상도 심각하다. 허다한 가정들에서 자녀가 운동을 회피하며 자기의 몸을 아끼는것이 그런가 하면 엘리트 체육중 중국선수들이 올림픽 혹은 기타 선수권에서 죽어라고 메달을 따내려고 하는 현상도 어찌보면 이런 범주에 속한다.     한편 엘리트 체육중 우리 중국의 개인종목은 뛰여난 성적을 올리고있지만 단체종목은 오히려 내리막질이다. 이 역시 자아위주현상의 구체적인 표현이 아닐수 없다. 단체종목 즉 축구같은 경기는 다치게 되는 위험요소가 많은데다 이겨도 그 영광이 단체로 돌아가는 비률이 크고 개인한테 돌아오는 비률이 적기때문이다.       총적으로 우리 중국에서 엘리트 체육을 대폭 발전시키는것은 계속 제창할바이나 엘리트 체육과 대중체육과의 평형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분석이다. 어느 한 나라의 국민체질을 평가하는 지표중에는 엘리트 체육의 메달수가 포함돼있는것은 결코 아니다. 국민의 체질, 체육산업화 및 체육인구의 비률 등 국민건강과 련관되는 모든 해당지표가 올라가야만이 비로서 명실에 부합되는 “체육제국”이라고 할수 있는것이다.  
19    2012중국축구 갑급리그 10대 경기 댓글:  조회:2289  추천:0  2013-01-06
일전 2012년 중국축구 갑급리그의 30라운드의 240경기중 특색이 있고 신기록도 있는 10대 경기를 선정해보았다. 그 10대 경기들로는 다음과 같다.   중경더비전 관중 신기록 작성 3월 31일, 갑급 제3라운드 갑급리그의 중경더비전이 진행, 중경FC가 “맏형님”인 중경력범과 대결하게 됐다. 중경더비전은 각계의 주목을 받았다. 중앙TV에서 기자를 현장에 파견하였고 관전한 관중수는 1만 6580명, 이는 제3라운드가 있은 후 7경기에 있은 관중수의 합계와 같았다. 그날 중경FC는 4 : 1로 중경력범을 대승하여 “하루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른다”는 평가를 받게 됐다.   승전뒤 “샤커”소리 들은 감독 4월 8일, 갑급 제4라운드 홈장경기에서 심수홍찬팀의 트루시에 감독은 팀을 이끌고 4 : 2로 중경FC팀을 제압하면서 이전의 2련패의 수렁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경기후 그는 “패전장군”이란 말을 들으면서 “샤커(下课)”웨침소리를 들은 한편 그를 우롱하는 표어가 내걸렸고 도처에서 그를 향해 손삿대질을 하는 모습도 볼수 있었다. 그뒤 그는 몹시 상심해하면서 슈퍼리그진출의 의지마저 꺾이였다고 한다.   의등 홈장서 5련승 기록 4월 28일, 갑급 제7라운드 홈장에서 갑급 “새내기”인 할빈의등은 슈퍼리그진출을 꿈꾸는 남방의 강호 심수홍찬팀을 4 : 1로 대승했다. 이는 의등팀 “마귀홈장”의 시작에 불과했다. 그뒤 의등팀은 홈장5련승이란 전적을 올렸는데 그중 2경기는 모두 4꼴씩 득점한 경기였으며 그뒤 그 어느 강호도 “새내기” 할빈의등을 낮잡아볼수가 없었다.   심북 제8라운드 겨우 첫승 지난해 년초 슈퍼리그진출목표를 내세웠던 심양심북팀은 5월 6일, 갑급리그 제8라운드에 와서야 할빈의등을 2 : 0으로 격파하며 겨우 첫승을 올렸다. 지난해 년초 명감독 네덜란드의 아르에한을 모셔오고 진성, 뢰영지, 김경도 등 국내실력선수들을 영입하였던 심양심북이였건만 시즌초반부터 강급권에서 맴돌았으며 마지막 겨우 갑급권에 턱걸이를 하는데 성공하였다.   의등 홈장련승기록 로능 초과 6월 30일, 갑급 제15라운드 홈장에서 할빈의등은 훅호트동진을 1 : 0으로 격파, 3점벌이에 성공한 동시에 을급시절부터 갑급에 이르기까지 홈장 13련승을 기록, 이는 이전에 슈퍼리그 강호인 산동로능이 세운 12련승 기록을 추월했다. 한편 의등팀은 그 기록을 연장시키지 못했다. 제16라운드 홈장에서는 무한줘르에 패하고말았다.   의등 5 : 1 대승 두번 기록 7월 28일, 갑급리그 제19라운드 홈장에서 할빈의등팀은 5 : 1의 큰 점수차이로 북경리공을 물리치며 “마귀홈장”의 명성을 이어갔다. 뿐만 아니라 할빈의등은 갑급 제24라운드 원정에서도 연변팀을 5 : 1로 대승하기도 했다.   동아와 줘르 페널티킥 두고 승패 엇갈린 대결 9월 23일, 갑급 제26라운드 상해동아와 무한줘르와의 대결이 상해에서 있었다. 경기전야 상해동아와 무한줘르 사이의 점수차이는 4점이였다. 유력한 슈퍼리그진출후보인 두팀 사이의 경기에서 무한줘르가 요한림이 이끌어낸 페널티킥에 성공, 후에 상해동아도 페널티킥을 만들어냈지만 무뢰가 실축하여 무한줘르가 1 : 0으로 승리했으며 두팀 사이의 점수차이가 1점으로 되였다.   동아 할빈 “마귀홈장” 공략 9월 29일, 갑급 제27라운드에서 선두주자 상해동아가 원정에서 할빈의등과 격돌하게 되였다. 만약 상해동아가 할빈의등을 공략하면 앞당겨 슈퍼리그진출에 성공할 가능성이 컸지만 할빈의등의 홈장은 “마귀홈장”으로 불리우기에 경시할수 없었다. 그러나 이변은 없었다. 경기결과 상해동아가 3 : 0으로 할빈의등을 완승, 3라운드 앞당겨 슈퍼리그진출에 성공했다.   력범과 줘르의 엇갈린 운명 10월 6일, 갑급리그 제28라운드일 때 중경력범은 원정에서 연변팀과 맞붙게 됐다. 당시 중경력범과 무한줘르는 모두 슈퍼리그진출희망이 있었다. 그런데 중경력범팀은 연변팀에 2 : 3으로 패하면서 슈퍼리그진출꿈이 수포로 돌아갔고 아울러 무한줘르가 2륜 앞당겨 슈퍼리그진출에 성공하게 됐다.   더비전 팔희 리공에 대승 10월 6일, 갑급 제28륜 북경팔희와 북경리공과의 북경더비전이 있었다. 당시 팔희는 강급의 변두리에서 헤매는 팀이였고 리공은 상대적으로 약간 안전했다. 두팀사이의 경기는 많은 팬들의 주목을 끌었다. 경기는 생각밖으로 팔희팀의 4 : 0완승으로 결속, 하지만 최종 팔희팀은 강급의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8    새해 시즌 재미있는 축구 좀 볼수 없을가? 댓글:  조회:5483  추천:0  2012-12-16
      올 중국축구 갑급리그가 막을 내린지도 이젠 한달 남짓한 시일이 지나갔다.     올시즌초반 슈퍼리그진출 슬로건(口号)을 내걸었던 우리 연변장백호랑이팀(이하 연변팀)은 리그 13에 그치며 겨우 강급만은 모면했다. 어처구니가 없다 못해 허글픈 웃음밖에 나오는것이 없다. 단 성적이 크게 뒤쳐져서만이 아니다. 실력이 약해서 패하는건 서운하긴 하지만 리해가 간다. 하지만 째임새가 없고 격정이 없으며 거기에 정신력 또한 제로(령)에 가까왔다. 어떤 경기를 보노라면 이 팀이 그래 그제날 그토록 자랑하는 연변팀이 맞긴 맞는가고 의심이 갈 지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그제날의 연변축구는 이렇지 않았다. 축구팬이라면 다 알고있다싶이 지난 세기 90년대 후반기 낡고 허름한 연길경기장은 전국에서도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입장권 한장에 30원씩 하였지만 매껨의 경기마다 평균 3만명 이상의 관중들이 모여들었다. 경기장을 찾는 관중 모두가 축구를 잘 알아서가 아니였고 축구가 그냥 좋아서도 아니였다. 축구장의 무드(분위기)가 좋아서 가는 사람, 소수민족지구의 축구팀이니 마땅히 밀어줘야 한다며 가는 사람, 지어는 어떤 녀성팬들은 축구단 어느 한 선수의 모습을 일부러 보려고 찾아간다고도 했다. 웬간하면 경기장밖의 나무에조차 사람들이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모습, 이는 중국축구무대는 물론 세계 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이색장면으로서 “기네스북”에 오를만하다고 할수 있었다. 한편 당시 연변팀(삼성, 현대자동차, 오동 등으로 관명)은 특색이 있는 팀이였다. 1994년부터 련속 3년간 늘 강급후보로 점찍히는 팀이긴 했지만 대련만달, 북경국안, 상해신화 등 강팀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패할 때는 패하더라도 전면공격, 전면수비의 축구로 경기내용에서만은 늘 상대방을 몰아부쳤으며 늘 이채로운 장면을 연출해내기도 했다. 선수 개개인도 개성이 있었다. 경기장에 고종훈이 나타나면 마음 깊속까지 든든하였고 방근섭의 “상대방수비 따돌리기”와 천학봉의 변선돌파는 축구라기보다는 예술에 가까왔고 외적용병 졸라의 표현 또한 서커스(교예)단원을 방불케 했다. 또한 해마다 안정한 컨디션을 유지하는 고종훈과 더불어 1997년엔 황동춘, 그 이듬해는 천학봉, 1999년에는 정동칠을 발굴하여 그 “산맥”을 이어왔다. 개괄해서 말한다면 그러한 분위기때문에 당시 관중들은 연변팀의 승패에도 관심이 컸지만 경기장무드에 관심이 더 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는 생각이다.      반면에 현재 연변팀에서는 그제날의 그런 무드를 거의 찾아볼수가 없다. 우선 선수진영에서 개성이 강한 선수를 크게 찾아볼수 없다. 몇년전까지는 그래도 조명(변선던지기능수), 박성(공방조직자), 한청송(중앙수비수) 등이 있어 연변팀은 풍격이 강한 팀으로 불리워왔으나 그들이 이적해갔고 올시즌엔 강홍권, 최인 등 중견선수들도 그닥 자아개성을 보이는데는 크게 한물이 간 모습이였다. 경기 또한 승패를 떠나서 늘 상대방한테 끌려다니는 양상을 보였다. 특히 10월 28일 홈구장에서 0 : 2로 패한 대 심양심북전이 그랬다.     우리는 완벽한 경기만을 원하는것이 아니다. 완벽성을 따지려면 스페인 바르셀로나 혹은 영국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경기가 최고이다. 우리 연변축구가 그런 팀과 비길수가 없다. 다만 무드가 관건이다. 승패를 떠나서 말이다. 례하면 무용을 말할라치면 로씨야의 발레 “백조의 호수”는 세계의 일류로서 이는 모두가 공인하는바이다. 그렇다면 이 “백조의 호수”에 비해 싸이의 “일명 강남스타일ㅡ 일명 말춤”은 예술이라기보다는 “지랄”에 가깝게 망가진 모습이다. 하지만 “강남스타일” 역시 나름대로 관중을 사로잡는 무드가 있다. 스트레스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그 무엇이 있기때문이다. 일전 한국의 축구스타 리영표가 한국축구의 성적지상주의를 비판하는 글을 보았다. 동감이다. 명년 시즌 우리 연변팀은 갑급보존의 기초상 신진 발굴과 단련에 그 목표를 정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한번 관중들의 마음을 매료시킬만한 카드도 한번 시도해보는것이 바람직하다. 사람들더러 경기장을 찾아달라고 선동만 하지 말고 사람들 모두가 스스로 경기장을 찾게 하는 카드 말이다. 그리고 우리 또한 경기승패에 크게 관계없이 재미있는 경기를 관람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17    구단에서의 감독의 비중은? 댓글:  조회:2654  추천:0  2012-12-11
    올 갑급리그 13위에 그친 연변구단에서 아직 누가 감독직을 맡는가 하는것을 결정하지 못한것으로 알려지고있다. 명년도 목표를 갑급보존으로 정한 상황에서도 구단지휘봉을 누가 잡는가 하는것을 결정하지 못하고있다는것은 연변축구계의 현실을 잘 말해주고있다고 해야 할것 같다. 특히 이는 올시즌 세번이나 감독교체를 하면서 얻은 교훈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보아진다.      주지하다싶이 2007년 11월 20일 이른바 “감독경쟁선거”가 있은 후부터 연변축구단은 잦은 감독교체를 번복해왔다. 그와중 자신의 뜻과는 별도로 김광주는 감독조리로부터 감독으로, 다시 감독조리로 됐다가 나중에는 대리감독으로 되는 “희생물”이 되기도 했다.     하다면 구단에서의 감독의 비중은 과연 얼마의 정도를 차지할가? 이전에 구단에서의 꼴키퍼의 중요성은 구단의 절반을 차지한다는 말이 있었지만 구단에서의 감독의 비중을 가늠해본이는 거의 없었다.     그럼 구단에서의 감독의 비중은?     지난 세기 90년대 대련만달의 선수진영을 놓고 적지 않은 축구인들은 “대련만달은 웬간한 중학교 체육교원이 지휘봉을 잡아도 몇해간은 얼마든지 좋은 성적을 낼수 있다”고 평하였다. 과연 그럴듯했다. 당시 대련만달의 감독은 지상빈, 그는 일정한 능력의 소유자이긴 했지만 국내의 명감독들인 척무생, 서근보, 김지양 등과 비기면 어쨌든 능력차질은 있었다. 그럼에도 지상빈은 대련만달에 몸담고있는 기간 수차 우승컵을 안아간 인물이였다.      다음 한국감독인 리장수의 경우를 보자. 그는 중국축구계 진출이래 중경륭흠, 청도이중 등 구단을 선후로 갑A와 축구협회컵의 챔피언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중국생활을 잠시 접고 귀국한 후에는 FC서울을 한국K리그의 챔피언으로 되게 했다. 그뒤 제2차 중국진출에는 북경국안을 이끌고 2008년과 2009년에 거쳐 련속 2차 준우승(두번째는 시즌 끝날 무렵 경질)을 따내게 했으며 제3차 중국진출에는 광주항대를 이끌고 당해에 갑급 우승을 따낸 뒤 슈퍼리그로 진출한 이듬해에는 슈퍼리그우승을 일구었다. 그리고 올해 광주항대가 리비치에 의해 슈퍼리그 챔피언이 되였지만 기실 이는 리장수가 닦아놓은 기반우에서 이룩한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구단에 따라 상황이 물론 다르겠지만 구단에서의 감독의 작용을 절대 무시할수 없다는 생각이다. 특히 연변구단처럼 경제토대가 없고 선수실력도 일반인 구단은 더군다나 감독의 중요성을 감안해야 할것 같다. 연변구단은 대련만달이 아니다. 때문에 감독에 의해 구단성적 혹은 구단정서 안정에 큰 작용이 있는것이다.     그렇다면 연변구단은 유럽이나 남미의 명망 높은 감독보다는 그래도 한국이나 본토감독이 유리하다는것을 말하고싶다. 왜냐하면 많은것을 선수들의 자각에 맡기는 서양감독보다는 최선을 다해 솔선수범하는 한국감독이나 연변의 실정을 잘아는 본토감독이 더 낫기때문이다. 그 사례로 기적을 말할라 치면 1997년의 최은택을 최고로 꼽을수 있고 구단의 성적 및 정서를 말할라치면 “고훈감독시대”인 2005년부터 2007년까지 그래도 어느때보다도 안정했었다.  
16    2012년 연변장백호랑이팀 총결산 댓글:  조회:2693  추천:0  2012-12-02
     중국축구 갑급리그는 지난 10월 28일, 전반 30륜의 경기를 마치고 중국축구의 진면모를 그대로 로출시키며 그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우리 연변장백호랑이팀(이하 연변팀)은 전체 30륜 경기중 10승 4무 16패 승점 32점으로 제13위를 기록, 갑급 8년래 가장 최악의 “흑색기록”을 연출해냈다.     그럼 올해의 연변팀 상황을 놓고 지난 8년래의 상황을 비교해보면서 참답게 총화해보는것도 필요한것이라 보여진다.       올시즌 연변팀에 주어진 환경     지난해말 주정부 리룡희주장은 주체육국에서 사업연구를 하면서 “새해 연변축구팀이 슈퍼리그진출에 성공하여 자치주창립 60주년에 헌례”하라고 지적하였다. 이는 리룡희주장이 어디까지나 주체육국을 비롯한 해당 부문에서 계획보고서 등에 의거해 내린 결단성적 지시이지 결코 스스로 연변축구를 판단하고 주먹구구로 내린 결단은 아니라는 분석이다. 그렇다면 주장한테 해당계획서를 올려보낸 보고서에 큰 구멍이 생긴것이 틀림없다는 진단이 나올수밖에 없다.      기실 지난해 연변팀의 상황을 보면 지난해 시즌 중후반기에 사령탑을 잡은 정상룡감독에 의해 간신히 갑급보존에 성공한 상황이였으며 구단으로 놓고볼 때 커다란 변화가 없었다. 이럼에도 주정부에서 투자하는 2000만원이란 자금으로 실력파 외적용병을 영입해 슈퍼리그진출에 성공한다는 목표를 정했다. 헌데 올시즌 들어 갑자기 갑급일정에 커다른 변수가 생겨 시즌초반 연변팀한테 련 7경기가 원정으로 배정되였다. 거기에 기대와는 달리 영입했다는 4명의 외적용병중 쿠리바리와 한국의 홍진섭외 별로 큰 역할을 하지 못했으며 그중 한명은 몇경기 출전하지도 못한채 본국으로 소환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한편 그 7경기의 원정중 연변팀은 2 승 2무 5패 8점으로 갑급 12위에 머물어있으면서 슈퍼리그진출가능성이 아주 희미해지게 됐다.        감독풍파 정상적인 경기운영에 악영향     7경기에 달하는 원정에서 겨우 8점을 챙긴 연변팀은 제8륜부터 있게 되는 홈경기에 큰 기대를 걸게 됐으나 홈장에서의 첫상대가 올리그 슈퍼리그진출에 성공한 무한줘르였다. 홈경기였지만 워낙 상대가 강했기에 0 : 2로 패했고 두번째의 홈장에서는 성도셀틱한테 2 : 3으로 패하면서 사람들은 점차 정상룡의 감독수준을 의심하던끝에 그를 경질시켰고 한국축구협회와 련계하여 감독물색을 하기 시작, 그와중 감독대행을 맡은 김광주가 팀을 이끌고 갑급 제11륜 북경리공과의 홈경기(2 : 1)와 중국축구협회컵 중경FC(5 : 4)과의 경기에서 이기면서 연변팀 선수들에 대해서는 그래도 본토감독이 더 잘 료해한다는 평가를 했다. 하지만 그때는 구락부에서는 이미 한국적 조긍연감독을 물색해 계약까지 맺은 상황이였다.     연변팀 사령탑을 맡은 조긍연감독은 “1꼴 허락하면 2꼴 넣는 축구를 펼치겠다”, “최은택감독을 존경하지만 그를 초과하련다”고 강한 자신심을 나타냈다. 하지만 그가 중국축구리그를 너무 얕잡아보았을가? 모든것은 그의 뜻대로 돼주지 않았다.        조긍연감독은 제12륜 홈장에서 광동일지천과 1 : 1로 빅었고 원정에서 중경력범한테 2 : 1로 패했으며 사령탑을 잡아 세번째 경기인 심수홍찬팀과의 경기에서 1 : 0으로 겨우 이겼다. 최초 호언장담하던것과는 많은 차이를 보였다. 그는 또 경기운영중 훈련에 게을리한다는 리유로 외적용병들인 쿠리바리, 홍진섭, 라피치 등을 포기하고 순 본토선수들로 경기를 운영, 그의 작법에 반신반의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결과 그는 지병을 리유로 제22륜부터 일선에서 물러나고 다시 김광주가 감독대행을 맡았은데 그때는 연변팀의 슈퍼리그진출이란 리론상에서만 존재할뿐이였다.        8년래 가장 최악의 “흑색기록” 연출      올해 연변팀의 슈퍼리그진출목표는 시즌중반에 무산되였다. 이를 탓하는것이 아니다. 많은 요소들은 시즌초반에 예견되던것이였다. 문제는 슈퍼리그진출에 실패한건 물론 마지막 두번째륜까지 갑급보존을 위해 허우적거렸으며 갑급 8년래 가장 최악의 “흑색기록”을 연출했다는 점이다.     올시즌 연변팀의 여러 기록들을 정리해봤는데 여러가지가 어처구니가 없는 기록을 했다. 우선 갑급순위에서 8년래 최악을 기록했다. 8년래의 갑급에서의 연변팀 순위를 보면 갑급으로 진출한 2005년에는 5위, 2006년과 2007년에는 각각 6위, 2008년에는 9위, 2009년에는 6위, 2010년에는 3위, 2011년에는 11위였고 올해는 13위였다. 그중 2008년, 2011년과 올해들어 감독교체가 빈번했으며 순위 또한 각각 9위, 11위와 13위가 됐다.       꼴득실에서도 8년내의 가장 최악을 기록했다. 자료에 따르면 꼴득실에서 가장 득점을 많이 한해가 2005년 시즌이였고 실점을 가장 많이 한 해가 올해로 무려 51꼴을 허락, 평균 한경기에서 1.7꼴씩 허락했다. 비록 올시즌이 지난해보다 4경기가 더 많았지만 지난해의 37꼴 실점에서 올해의 51꼴 실점, 13꼴 실점의 차이는 팬들이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리고 홈장패전도 올해가 많다. 16경기 패전중 홈장패전이 5경기였고 그중 지난 7월 28일에 있은 제19륜의 홈경기에서는 0 : 3으로 상해동아한테 완패당했고  9월 1일에 있은 제24륜 홈경기에서는 할빈의등한테 1 : 5로 대패했으며 제일 마지막 륜에서도 약체팀 심양심북한테 0 : 2 로 홈장완패를 당했다.   그외 꼴잡이중에서도 연변의 꼴잡이는 하위그룹에 속했다. 1위로는 심수홍찬팀의 바바카가 23꼴을 성공시킨 반면 7꼴을 넣은 연변의 허파는 성도셀틱의 풍탁의, 호남상도의 동방탁과 더불어 공동 10위에 머물었다. 이 역시 2010년 시즌 11꼴로 꼴잡이 단독 6위에 오른 루둘라와는 큰 차이를 보였다.        ※                            ※                   ※       슈퍼리그진출이란 말이 나왔으니 하는 얘기지만 연변팀은 갑급진출 4년만인 2008년부터 슈퍼리그진출이란 구호를 제출해왔다. 하지만 그때로부터 5년이 지난 올해까지 슈퍼리그진출은 물론 갑급보존마저 위태로운 징크스에 깊숙히 빠져 갈수록 슈퍼리그진출이란 목표가 흐지부지해지게 됐다. 그래서 “연변축구의 ‘체질’은 갑급이 가장 적합하다”, “연변축구의 전성기는 다시 도래하지 않는다”는 등 여러가지 분석들이 많다. 이런 분석들이 맞아떨어질지도 또한 가장 과학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그래도 연변축구의 슈퍼리그진출꿈을 버리지 말아야 하며 그것을 위해 분투해야 한다는것이다. 설마 그것이 언제 실현될지 모르더라도, 또한 그냥 꿈에 그치는것으로 되더라도 말이다.      
15    허순자ㅡ서비스분야에서 그 소망 이뤄가며 댓글:  조회:3113  추천:1  2012-12-02
  지금으로부터 약 20년전인 지난 세기 90년대 초기 연변을 포함한 국내외의 많은 조선족청취자들은 연변라지오방송국에서 방송된 드라마 “여기는 동북아호텔입니다”를 듣고 많은 감동을 받았을것이다. 우리 연변에서 호텔업이 갓 흥성하기 시작한 초창기 선진적인 시스템과 량질서비스로 연변내외에 연길동북아호텔을 널리 홍보하여 고객들의 발길을 모았던 녀인, 그 녀인이 바로 드라마  “여기는 동북아호텔입니다”의 주인공모델이였던 허순자총경리였다. 허순자ㅡ 그가 연변의 호텔업과 음식업에서 성공하기까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나 이런 업종에서 성공할수 있는 별다른 배경이 있은것은 아니였다. 순전히 자신의 꾸준한 노력과 끊임없는 도전속에서 이룩한것이였다. 지난 세기 50년대 중반 연길현(지금의 룡정시) 삼합향에서 태여난 허순자는 어릴 때부터 뭔가를 한다고만 하면 끝을 보고야마는 그런 끈끈한 성격을 가지고있었다. 자신의 미래를 두고 확실하게 어떤 사람이 되겠다는 목표를 제정한것은 없었지만 정신상태에서 여느 사람과는 다르다는 인상을 강하게 주는 그런 사람이였다. 그러던 허순자가 화룡시 팔가자진 음식복무공사의 경리(당시는 주임)로 배치받은것은 1970년, 그때로부터 허순자는 자신의 장래를 서비스업에서 찾아보련다는 굳은 결심을 가졌다. 그는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팔가자란 필경 작은 진이였고 인구와 시장이 제한된 곳이였기에  꿈을 펼치기에도 여러가지 제약을 받지 않을수 없었다. 당시 허순자는 연길이라면 자신의 뭔가를 실현함에 있어서 많은 도움을 줄수가 있을것 같았다. 그도그럴것이 연길이란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수부도시로서 많은 사람들이 동경하는 곳인것만은 틀림없었다. 허나 계획경제시대였던 그 당시 허순자의 꿈은 그냥 꿈에 불과했다. 그는 오래동안 자그마한 팔가자진에서 자신의 청춘을 흘려보내야 했다. 그러다가 개혁개방의 초창기인 1983년 허순자는 꿈에도 동경하던 연길로 전근하게 되였고 연길시 동북아 제3산업유한회사의 총경리직을 거쳐 1992년에는 새로 선 연변동북아호텔의 총경리직을 맡게 되였다. 그기간 허순자는 여러차례 성, 주와 연길시의 로력모범, “3.8붉은기수”, “우수기업가”와 “우수공산당원”으로 되였고 주내의 동업종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한편 서비스분야의 책임자로 근무하면서 허순자는 지식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는 선후로 길림공업대학 기업관리학부, 상해관광전과학교의 공부를 마쳤으며 한국 서울의 신라호텔에서의 연수과정을 거치기도 했다. 또한 그 기간에 연변동북아호텔로 하여금 현대적인 시스템과 일류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호텔로 연변내에서는 백산호텔과 더불어 호텔업분야에서는 두개의 큰 산맥으로 되였다. 그뒤 허순자는 연길시정부 해당 일군들의 설득에 의해 새로 선 연길성보호텔의 총경리직도 맡았었고 2004년에는 역시 신축한 왕청 천부호텔의 총경리직도 맡아보았었다. 허순자의 개인사상에 있어서 그 시기는 가장 힘든 시기였기도 했거니와 사업에서 가장 바삐 보낸 나날이기도 했으며 또한 가장 성과를 많이 올린 보람있는 시기이기도 했다. 허순자는 늘 사업에만 열중하면서 가정을 돌보지 않는 사람은 기실 완벽한 사람이 못된다”고 말한다. 이는 남편과 자녀를 사랑할줄 모르는 사람은 사업에서도 제대로 된 성공을 가져올수 없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허순자는 가정에서도 합격된 안해였고 어머니였다. 특히 두 딸은 선후로 일본류학까지 시켜 어디에 내놓아도 남한테 짝지지 않는 인간으로 되게 하였다. 그리고 허순자의 친정쪽은 물론 시집쪽을 놓고봐도 그만큼 사업과 가정에서 성공한 사람은 허순자라고 해도 실로 과언이 아니였다. 2006년 호텔업에서 은퇴한 뒤 허순자는 연길에 “아크아”로 명명한 일식료리집을 차렸다. 30여년간 호텔업에서 근무해오던 허순자로 놓고말할 때 언젠가는 사영업체를 만들어보겠다는 소망이 실현된셈이였다. 거기에 큰딸 김홍희와 결혼한 일본인 스즈끼상 역시 일본료리사(일본의 유명한 정통라면종가집 후예)로서 허순자가 차린 일식료리집의 흥성과 발전에 큰 한몫을 하고있다. 현재 허순자가 차린 일식료리집에서는 일본료리를 상품화하였는데 그런 상품들은 연길백화 8층의 가게를 비롯한 여러 대형가게들에서 잘 팔리는 인기상품으로 되고있다.   뿐만 아니라 허순자는 신축 연변대학성에 800만원을 투자하여 600여평방메터가 되는 영업방을 매입, 이제 곧 인터리어작업에 들어가며 명년초에 오픈예정이다. 그리고 그때가면 서비스분야에 도전을 걸고있는 허순자의 꿈은 새롭게 업그레이드가 될것이다. 현재 허순자는 연길시정협위원으로 활약중이다.
14    중국축구 “만달현상”과 “항대현상” 희냐 비냐 댓글:  조회:3031  추천:2  2012-11-27
          최근 중국축구의 프로화 18년사를 훑어보다가 아주 선명하게 대비가 되는 2개의 팀을 발견하게 되였다. 즉 프로화초기부터 2000년시즌까지의 갑A리그에서 선후로 5회에 거쳐 챔피언(1994, 1996, 1997, 1998, 2000)이 된  대련만달(2000년엔 대련실덕)과 지난 2011년에 갑급에서  슈퍼리그로 진출한 후 올해 시즌까지 련속 2년간 슈퍼리그에서 챔피언이 된 광주항대이다.     주지하다싶이 이 2개팀은 모두 초강팀이다. 대련만달은 중국축구의 프로화초창기 몇년간 중국축구 갑A무대를 거의 쥐락펴락했고 광주항대 또한 2011년 갑급리그에서 슈퍼리그로 진출한 당해에 슈퍼리그 챔피언이 됐는가 하면 올해도 그 여세를 몰아세워 역시 챔피언트로피를 안아갔으며 앞으로 역시 몇해간 광주항대의 기세를 스톱시킬 구단은 거의 없을 전망으로 보인다.     그럼 이 2개의 초강팀 내막을 투시해보면서 이 2개팀의 진실한 구단실력과 중국축구에 대한 기여도 및 기타의 몇가지 현상들에 대해 담론해보자.   대련만달현상 국내 A급 선수들의 산실        대련은 중국북방의 중점적인 축구발전지구였다. 거기의 연해지구에 위치한 대련의 경제상황 또한 북경이나 상해 등 직할시와 같은 실력은 없으나 기타 지구급 도시로서도 열손가락안에 꼽을만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축구의 인프라구축이 량호한데다 거기에 든든한 경제실력 그리고 축구에 대한  지도층의 중시 등이 축구의 프로화초창기 중국축구무대에 “대련만달현상”이 산생하지 않았는가싶다.     당시 대련만달의 선수진영을 보면 국내 A급 선수들인 한문해(키퍼), 서홍(중앙수비), 손계해(변선수비), 리명(하프), 학해동(스트라이커), 왕도(스트라이커) 등으로 구성, 거기에 해마다 역시 수준급의 외적용병들을 영입해 말그대로 “대련만달현상”을 창조해냈다. 그 “대련만달현상”의 주요한 특점중 하나가 국내선수들의 실력이 외적용병에 비해 별로 짝지지 않았다는것이다.     1998년 갑A 꼴잡이통계를 보면 대련만달의 학해동이 18꼴로 국내꼴잡이 1위를 차지했고 역시 대련만달의 왕도가 14꼴로 2위를 차지했으며 대련만달의 외적용병 한스는 8꼴로 6위에 그쳤다. 이로 보아 득점선수중 국내선수가 현저하게 앞섰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총 26경기중 대련만달은 19승 5무 2패로 62점을 기록, 득점꼴이 64꼴이고 실점꼴이 16꼴이였다. 이긴 경기가 많았고 패한 경기가 겨우 2경기로 이는 학해동과 왕도가 주류인 스트라이커선이 강한 한편 서홍, 손계해 등이 지키는 수비라인이 허점이 적었음을 보여주었었다. 따라서 당시 중국국가팀을 구성할 때면 항상 대련만달의 선수들이 많은 비률을 점하기마련이였으며 이는 중국축구에 대한 대련만달의 기여도가 높았음을 여실하게 보여주었었다.      한편 당시 대련만달뿐 아니라 기타 구단들에도 이름이 쟁쟁한 기둥선수들이 많았었다.     말하자면 스트라이커라인에는 학해동, 왕도, 려병 등 에이스들이 활약했고 하프라인에는 고종훈, 리명 등이 있었으며 수비라인에는 범지의, 김광주, 서홍 등이 버티고있었다. 실력도 중국축구사상에서는 최고의 전성기라 할수 있었다. 그 사례로 1994년 일본 히로시마에서 있은 제12회 아시안게임 축구종목에서 구초량, 범지의, 김광주, 고종훈, 왕도 등이 출전한 중국팀은 조별리그에서 3승 1무(중국 2 : 2 뚜루크메티스딴, 중국 4 : 0 예멘, 중국 3 : 2, 중국 1 : 0)로 소조에서 출선했고 준결승에서 사우디아라비아를 2 : 0으로 이겨 결승까지 진출했으며 최종 준우승(우승은 우즈베끼스딴)을 하게 되였다. 이는 중국축구사상 국제대형게임에서의 최고의 성적이라 할수 있었다.   광주항대현상 외적용병들의 노다지판?       우에서 언급한 북방의 대련과 더불어 남단의 광주 역시 중국축구의 중점발전지구중 하나이다. 발재간이 좋고 수전(水战) 에 능한것 등은 광동축구의 특점중 하나이기도 했다. 거기에 경제실력이라면 두말 할것도 없이 국내의 북경, 상해 등 “부자도시”와 어깨를 나란히 할만한 도시가 바로 광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이 두가지 요소를 겸비한 광주의 축구가 춰설것만은 번연한 일이다. 번복하지만 최근년만 해도 슈퍼리그로 진출한 지난해에 리그 챔피언이 됐고 올해도 그 영광을 재현했는가 하면 올해엔 축구협회컵 챔피언까지 되면서 쌍관왕이 되기도 했다. 뿐만이 아니다. 올 3월 7일엔 한국인감독 리장수의 지휘하에 아시안챔피언스리그 H조 조별리그에서 한국의 전북현대를 5 : 1로 꺾는 사상최초의 이변을 토하기도 했다.  말그대로 수십년간 “공한증(恐韩症)”으로 시달려오던 중국축구의 수치를 일거에 해소해버린 장거를 낳은셈이였다.     헌데 유감스러운것이라면 이는 프로팀인 광주항대가 낳은 “기적”이지 중국국가팀의 “기적”이 아니라는것이다. 말하자면 광주항대에 합류해있는 외적용병들의 역할이 과반수를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바로 그점이다.     그리고 올해 슈퍼리그에서 광주항대는 30경기에서 20승 8무 2패로 68점을 기록, 득점꼴이 67꼴을 차지하는중 외적용병 5명(1경기 외적용병 3명만 출전 가능)이 넣은 꼴이 무려 31꼴로 근 50%를 점하면서 말그대로 외적용병 천하였다. 그리고 꼴잡이순위중 1998년 대련만달에서 국내용병인 학해동과 왕도가 국내꼴잡이 1 – 2위를 한것과는 확실히 다른 양상을 보이고있다. 이러한 현상은 광주항대의 현상뿐이 아니다. 올 슈퍼리그 꼴잡이중 1위부터 10위까지는 몽땅 외적용병이 차지하고  산동로능의 왕영백이 11위를 기록하는데 그치고말았다.      그러니 이 모든것을 단지 광주항대의 현상이라고만 점찍는것도 그닥 합리한것은 아닌것 같다.   ※                ※             ※       중국축구협회에서 외적용병을 영입할 때는 그들의 실력과 자질로 중국축구 자체의 발전을 추동하려는데 있은건 사실이나 현실은 그렇지가 못한것이 유감이다. 그것은 최근 몇년간 국제경기에서의 중국축구팀의 성적이 모든것을 말해준다.      거기에 올해 광주항대는 무려 5명의 외적용병을 영입했으며 중국축구협회가 허락하면 명년에는 추가로 외적용병영입을 신청할 방침이라고 한다. 진짜 중국축구의 앞날이 어떤 양상을 보일지 우려심이 들지 않을수 없다.     지난 세기 90년대에 우리는 국내의 기둥선수들로 운집돼 갑A무대에서 쥐락펴락하는 대련만달현상을 두고 많은 론쟁을 했었다. 1개 팀이 전반 리그를 쥐락펴락하면 중국축구의 공평경쟁과 고르로운 발전에 불리하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세계수준급의 선수들을 대거 영입해 중국슈퍼리그를 쥐락펴락하면서 국내선수들이 발붙일 틈이 갈수록 적게 하는 광주항대 및 기타 구단들의 현상에 대해서는 과연 어떻게 봐야 할는지?…    
13    조선족인구 마이너스성장 그 대비책은? 댓글:  조회:2210  추천:0  2012-05-16
    올들어 연변의 상하가 자치주창립 60주년을 맞으면서 각종 행사가 빈번하다.     자치주창립 60년을 돌이켜보면 우리 연변이 확실히 정치, 문화와 경제를 비롯한 각 분야에서 거족적인 발전을 가져왔다는 느낌이다. 그중 유감이라면 조선족인구가 련속 16년간 마이너스성장을 거듭, 이젠 조선족인구비률이 자치주창립초기인 62.01%로부터 이젠 32.45%로 그 비률은 거의 절반 수준으로 하락했다. 조선족자치주라는 지역특성을 봐도 그렇고 일개 조선족일원으로 봐도 몹시 가슴아픈 일이 아닐수 없다.     지금 조선족인구의 마이너스성장을 두고 국가해당부문으로부터 지방정부에 이르기까지 그 원인을 파헤치는 한편 그 대책마련을 위해 조선족에 한해 이전에 실시하던 여러가지 생육제한정책을 취소하고 해당 우대정책을 출범하는 등으로 고심하고있는 상황이다. 효과가 없는것도 아니다. 해당집계에 따르면 2010년 연변조선족의 두번째 아이 출생수는 821명, 출생률은 19.04%였으나 2011년에는 두번째 아이 출생수가 840명, 출생률은 20.7%로 미세한 증가세를 보였다.      하지만 이상의 정책조절같은것으로는 조선족인구의 마이너스성장추세를 스톱시킬수 없다는 생각이다.      현재 조선족인구의 마이너스성장원인을 분석하면 자녀양육투자부담의 대폭 증가, 대량 가임녀성들의 한국 및 기타 나라와 국내 연해지구에로의 진출과 두번째 아이를 낳기 싫어하는 현대인들의 심리 등 여러가지 요소를 꼽을수 있다. 그중 자녀양육투자부담의 대폭 증가와 두번째 아이를 낳기 싫어하는 요인은 우리 연변의 조선족뿐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존재하는 보편적인 현상으로서 막기 힘든 추세가 아닐수 없다. 그렇다면 연변조선족 가임녀성들의 한국 및 기타 나라와 국내 연해지구에로의 진출현상에 들어서는 연변이 한국이나 기타 선진국 및 국내 발달한 연해지구의 경제수준과 접근하거나 초과하면 그런 녀성들의 “연변배타” 현상은 절로 주춤하게 될수 있다.     지난 세기 90년대부터 연변의 많은 조선족인구가 대량 해외나 국내 연해지구로 류출되는 원인중 가장 근본적인것이 연변의 경제상황이 그만큼 처져있기때문이다. 결코 한국이나 청도같은 곳에서 빼앗아간것이 아니다. 절로 류출한것이다. 그렇다면 관건은 연변의 경제가 하루 빨리 급속도로 춰서야 한다는것이 최종 결론이다.      만약 연변경제가 크게 춰서갖고 “한강기적”이나 “심수속도”같은것을 이룬다면 그때의 상황은 크게 달라질수 있다. 내지의 조선족들이 돌아올건 물론 많은 한국인들도 연변을 보금자리로 자리매김을 할수 있을것이다. 거기에 두번째 아이에 대한 더욱 많은 우대정책의 출범 등을 가첨하면 연변조선족녀성들의 둘째출산붐도 일어나지 않겠는가싶다.     그리고 연변의 조선족가정 특히는 조선족녀성들에게도 한마디 여쭙고싶은 말이 있다.     농촌에서 밭을 1헥타르 다룰 때 0.5헥타르를 다룰 때나 마찬가지로 소와 수레 등이 있어야 하고 로력투자도 비슷하며 식당에서 사람이 3명이 식사하나 4명이 식사하나 비용이 엄청 더 드는것이 아니다. 그것은 둘째 아이를 출산한다 해서 생각하는것처럼 생활압력이 엄청 커지는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12    기전술변화 승패의 관건 댓글:  조회:2226  추천:0  2012-05-16
      올시즌들어 연변장백호랑이팀(이하 연변팀)의 몇껨의 패전을 분석하면서 “지피지기 백전백승”이란 고대성구를 떠올리게 됐다.     연변팀의 패전요소를 보면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가장 치명적인것이 자신의 기전술시스템이 상대방한테 지나치게 로출되였다는 점이 아닌가싶다.     쿠리바리를 중심으로 한 공방조직, 프리키기회때마다 키커로 나서는 쿠리바리의 슈팅특점(脚法) 등은 상대방이 철저하게 장악하고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듯싶다. 그 실례로 올시즌 첫게임부터 연변팀의 쿠리바리는 상대방한테 꽁꽁 묶일수밖에 없었으며 일품이던 그의 프리킥재주도 이젠 한물이 갈수밖에 없었다. 지난 5일 룡정에서의 제8륜 경기가 끝난 뒤에 있은 감독초대석에서 무한줘르팀의 정웅감독은 연변팀의 기전술시스템을 깊이 료해하고 쿠리바리에 대한 대인마크에 중점을 두었다고 했다. 그러니 그들은 경기전에 벌써 50% 이상을 이긴셈이라고 할수 있었다.     필자의 생각이라면 본팀의 기전술시스템이 상대방한테 로출되였다면 반드시 기전술변화를 일으켜야 한다. 1997년 연변오동팀의 황동춘이 이름을 날리자 모두가 그에 대한 대인마크에 집중하였다. 그러자 그 이듬해 연변오동팀은 천학봉이라는 “비밀카드”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2004년 연변세기팀은 출중한 꼴잡이가 없는 상황에서 공격망을 여러개 점을 구축하는 기전술로 을급리그 북방구의 우승고지에 오르기도 했다.     “비밀카드” 여러개를 준비하는것은 감독마다 구비해야 할 기본중의 하나로서 정상룡감독도  반드시 이에 대비하기를 바라는바이다.          
11    슈퍼리그진출목표 선수들 압력 되지 말아야 댓글:  조회:2011  추천:0  2012-04-22
금일(23일) 연변장백호랑이팀(이하 연변팀)은 원정에서 중경FC팀과 격돌하게 된다. 저녁 7시에 개시될 경기를 두고 지금 많은 축구계의 인사들과 매스컴 및 축구팬들이 크게 주목하고있다. 왜냐하면 이번 경기의 승패여부에 따라 팀순위가 중위권에 진입하느냐 아니면 재차 벼랑끝으로 밀려나느냐가 달려있기때문이다. 가령 금일 저녁의 경기에서 연변이 이기게 되면 다음 제7륜은 지금까지 2무 3패로 갑급 15위에 머물러있는 훅호트동진과 붙게 된다. 그러면 원정이지만 이길 승산이 아주 크며 다음 제8륜부터는 연변팀의 첫 홈장으로 되므로 숨통이 트이게 될수 있다. 이는 물론 필자를 비롯한 모든 연변팬들이 바라고있는 결과이다. 반면에 우리는 반드시 최악의 경우도 념두에 두어야 한다. 만약 금일 저녁의 경기가 지고 제7륜 훅호트동진과의 경기에서도 지거나 빅을 경우 연변팀의 사기가 재차 저락되여 제8륜에 들어 홈장경기를 치러도 패전의 징크스에서 헤여나오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는것이다. 그러면 우리 모두한테 주는 실망은 클수밖에 없다. 지난 한시기 연변팀이 제2륜부터 제4륜까지 패전을 거듭하자 연변의 매스컴과 팬들 사이에는 김빠진 소리가 적지 않게 터져나왔다. 매스컴에서는 “이길수 있는 경기였는데 왜 졌나”고 물음표를 달았고 팬들도 “슈퍼리그진출목표를 내건 팀이 왜 이꼴이냐?!”며 질의를 내쏟았다. 여기서 언급하고싶은것은 가령 연변팀이 올해 슈퍼리그진출목표를 내걸지 않았다면 이런 볼부은 소리가 나오지 않거나 적게 나왔을수도 있다는것이다. 최근 몇년래 연변팀이 원정승을 일구기는 아주 가물에 콩나듯 했다. 원정경기란 많은 환경요소가 작용하는바 여러가지로 힘들수밖에 없다. 특히 올해는 시즌초반 원정경기가 7게임이나 된다. 이러한 요소를 감안할 때 연변팀의 성적에 대해 지나치게 실망하거나 질타할것이 못된다고 생각는다. 기실 제5륜까지 1승 1무 3패의 기록은 리상적은 못되나 그래도 어느 정도 예견했던 결과이기도 하다. 현재 연변팀의 감독진과 선수들이 받는 압력은 클수밖에 없다. 압력이 동력으로 된다는 말도 있지만 지나친 압력은 오히려 그 동력에 손상가게 할수도 있다. 특히 축구에서 감독의 기전술이 장내에서 관철이 잘 되지 않고 선수들의 기량발휘가 최저점에 달하는 경우가 허다한바 이런 표현은 모두 선수들이 받는 심리압력이 크기에 나타나는 페단이다. 금일 저녁 진행되는 경기에서 연변팀이 지거나 빅을수도 있고 다음의 제7륜에서도 생각밖에 결과가 초래될수도 있다. 그러면 감독진과 선수들이 또 연변팬들의 원성을 들을수도 있다. 하지만 그 원성이 제발 동력으로 돼야지 압력으로 되지 말아야 할것이며 매스컴과 팬들 또한 전반 구단이 힘을 낼수 있도록 목소리의 옥타브를 조정해야 할것이다.    
10    주객관으로 타진해보는 연변축구 댓글:  조회:6735  추천:0  2011-12-25
                                                                                                                                                                                                                 연변축구의 력사와 전통      연변축구를 말할라치면 우선 그 력사가 긴바 지난 세기 초엽 축구란 스포츠운동이 중국땅에 생겨서부터 연변땅(옛날엔 간도땅)에 있었다. 또한 연변축구는 줄곧 조선족을 위주로 진행이 돼왔다. 연변축구의 전통 역시 조선족의 굴함없는 정신과 령리한 지혜가 부여돼왔으며 중국땅에서는 오래동안 축구라 하면 “북방의 연변”과 “남방의 매현”을 꼽아왔다.     다음 연변축구는 조선족을 위주로 진행이 돼왔기에 중국조선족축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중국에서 유일한 소수민족 프로팀을 운영하기에 중국소수민족축구를 대표한다고 할수도 있다. 동시에 연변에는 조선족만 살고있는것이 아니고 한족을 포함한 여러 민족이 함께 살고있기에 국내언론들에서는 흔히 “연변축구”라고 일컽키도 한다. 그런가 하면 조선반도외 세계 각국에서 코리안민족프로축구단을 갖고있는 곳은 오직 중국 연변밖에 없기에 우리의 연변축구는 더욱 여러가지 의미를 내포하고있다.      연변축구는 일련의 휘황한 성과와 무수한 인재를 산출하기도 했다. 일찍 위만주국시기 당시의 간도축구팀은 만주국축구운동대회에서 늘 우승했는가 하면13명의 조선인선수를 갖고있는 만주국축구팀은 조선과의 경기(만-선축구대회)에서도 자주 상대방을 제압하군 했다.     새중국의 탄생후 중국조선족축구는 더욱 휘황한 일로를 걸어왔다. 1952년 상해에서 있은 전국청년축구대회에서 연변청년축구팀은 대회의 준우승을 쟁취, 그뒤 국가에서 조직한 웽그리아류학축구팀에는 전체 성원20여명중에 박만복을 비롯한 조선족이7명이나 들어있었으며 제1대의 중국국가축구팀에도 리봉춘을 비롯한 조선족선수 여러명이 있은걸로 알고있다. 그와중1955년 주로 연변의 조선족들로 구성된 길림성축구팀이 창립됐다. 길림성축구팀은 창립되자 바람으로 국내4개 강팀중의 하나로 당시의 중국축구1부리그인 전국축구갑급리그에서 종횡무진해왔으며 마침내1965년에는 전국축구갑급리그의 우승고지에 오르는 괄목할만한 력사의 한페지를 엮었다. 용솟음쳐나온 인재들을 말할라치면 박만복, 리광수, 동경춘, 지청룡, 허경수, 정지승 등 그 수가 헤아릴수 없이 많으며 전국의 수많은 축구팀중 조선족선수가 없는 축구팀이 거의 없을 정도였고1950년대말의 중국국가림업팀은 일색의 조선족들로 조직되였다고 한다.     연변축구 역시 장기간에 거친 “계급투쟁”고 문화혁명 등으로 하여 많은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굴곡적인 일로를 걸으면서도 연변은 여전히 국내의 축구발전 중점지구로 수많은 축구인재를 산출했으며 국내의 축구무대에서는 늘 조선족선수들이 뛰는 모습을 볼수 있었고1994년 중국축구가 프로화궤도에 진입된후에도 주로 조선족들로 구성된 연변팀( 혹은 길림성팀)은 국내1부에서7년간이나 그 투혼을 불살랐으며 지금 여전히 국내이 지구급으로서는 유일하게 자기의 프로구단을 갖고있는 상황이다.                                                          연변축구의 현주소      2005년 갑급리그로 복귀한 연변축구팀은 몇해간 갑급리그의 중위권을 맴돌다가 지난해에 갑급3위를, 올해엔 갑급11위에 머물었다. 이를 두고 여러가지 설법이 뒤따르고있다. 어떤이들은 “지난해엔 운이 좋았고 올해는 운이 나빴다”고 하는가 하면 또 어떤이들은 “지난해의3위나 올해의11위 모두가 연변팀의 진짜 실력이 아니다”고 하고있다.      이는모두 일리가 있는 설법들이다. 여기서 필자의 관점이라면 지난해엔 외적용병영입이 비교적 성공했고 올해엔 외적용병영입이 기본상 실패한데 귀결된 순위결과라고 말하고싶다. 중국축구가 프로화궤도에 들어선이래 외적용병영입의 성사여하가 팀의 운명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상해, 북경, 광주 등 대도시의 호화구단들이 그런가 하면 연변 역시 그 범주에서 벗어날수가 없었다. 팀성적이 외적용병에 의해 좌우지된다는건 슬픈 일이지만 어쩔수 없는 상황이다. 외적용병의 대량 영입이 중국축구발전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를 떠나서 팀성적이 추락하여 강급될 경우 다시금 원자리로 복귀한다는것이 매우 어렵다는것이 곧바로 중국축구의 현실이다. 우리 연변축구만 놓고봐도2000년 갑A리그에서 강급되여 팀을 매각한후 옹근5년이란 세월이 흘러서야 2부리그인 갑급권으로 복귀할수 있었다.      그럼 우리 연변의 현실정에서 슈퍼리그진출 가능여하를 타진한다면?     한편 이번에 연변축구팀의 슈퍼리그진출목표는 구락부나 주체육국보다는 주정부의 리룡희주장이 직접 엄령을 내려 정해준 목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을급에서 갑급으로 올라오는 년한이5년이 걸렸고 갑급에서 “남정북전”한 년한만 해도7년이라 이젠 슈퍼리그를 견줄 때가 되였거니와 연변팀의 실력을 놓고봐도 이젠 슈퍼리그목표를 내걸수 있다는 확신이 된다. 왜냐하면 외적용병을 제외한 본토배기 선수들로 구성된 진영을 놓고볼 때 우리 연변팀은 그래도 갑급에서 맴돌기는 아까운 팀이기때문이다.     주체육국 우장룡 부국장에 따르면 현재의 연변팀 선수구성에 있어서 평균 나이가25세미만으로 국내에서 신로교체가 가장 완벽하게 잘된 팀이라 한다. 이는 우장룡 부국장 역시 국내의 여러개 구단들 상황을 면밀하게 분석해본후 밝힌 일가견으로서 설복력이 있는 말이다. 연변구단을 놓고볼 때 국내 구단들중 국내선수를 가장 적게 영입하는 구단으로서 이는 연변내의 선수잠재력을 말한다. 다른 구단의 선수를 적게 영입한다는건 여러가지로 좋은 점이 있다. 첫째, 돈이 적게 든다는것이고 둘째, 본토배기 선수들고 구성되니 연변을 위해 뽈을 찬다는 정신이 보다 강할것이며 셋째, 선수들 사이의 호흡이 보다 잘 맞을수 있다. 그리고 연변적선수가 대부분이다보니 외지선수들이 와도 연변선수들의 “기”를 잘 받아들여 곧바로 정신력이 강해졌는바 그제날의 황경량과 왕광위가 그랬는가 하면 몇년전의 탕초 또한 그랬다.이는 우리 연변축구팀의 가장 큰 우세이다.       이렇듯 연변축구팀으로서의 우세가 있는 반면 부인할수 없는 렬세 또한 몇가지로 나눌수 있다.     우선 자금사정이다. 2005년 연변팀이 갑급리그에 참전해서부터 지난해까지 국내에서 유일하게 관명권협찬을 유치하지 못한 팀이였다. 이는 지난날 갑A시대에 비해서도 훨씬  렬악한 환경을 조성했다. 갑A시대에는 자금난이 심각하다고 해도 해마다 관명권협찬상이 나타났으나 갑급시대에 와서 그것이 단절됐다. 명년에 주정부에서2000만원을 투입하여 팀을 밀어준다고 하나 다년간에 거쳐온 자금난을 일시에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다음 우에서 “정신력”을 연변팀의 우세라고 했지만 현재 이 “정신력” 역시 연변팀의 “특허”가 아니라는것이다. 이젠 슈퍼리그와 갑급리그의 많은 팀들에서도 “정신력”을 강조, 연변팀의 “정신력”도 적지 않게 무색해진 상황이다. 거기에 선수 개개인의 기술을 볼 때 전국의 축구마당에 내노라 하고 내놓을 선수도 몇명이 되는가 하는것도 의문스럽다.지난 세기50-60 년대는 그렇다치더라도 지난 세기80-90년대의 고종훈처럼 체력과 기술 등이 겸비한 선수를 찾아볼수 없는것도 사실이다.자신감의 결여 역시 홀시할수 없는 고리이다. 특히 올해 시즌을 점검해보면 몇껨의 경기는 자신감의 결여현상이 현저하게 드러났다. 어떤이들은 올해 시즌 연변팀 선수들의 체력이 형편없이 떨어졌다고 하는데 필자는 그 관점에 자신감이 떨어지니까 체력도 정비례로 떨어질수밖에 없었다고 보태고싶다. 최근 몇년간 자주 있은 감독교체, 로임체불 및 몇껨의 이길수 있은 경기에서의 패전 등은 모두 자신감이 떨어질수밖에 없는 요소이다. 앞에서 제기되다싶이 연변축구팀의 진짜 실력은 절대 올 상반년에 반영된 그런 실력은 아니였다. 올해 슈퍼리그에서2위 팀과 많은 점수 차이로 우승한 광주항대와도 대등한 경기(지난해 시즌)를 펼쳤던 연변팀이다. 그리고 강팀과는 과감히 도전해보군 하던 전통이 여전히 남아있는 연변팀이다. 그럼 주눅이 든 “양무리”를 어떻게 하면 용맹한 “사자무리”로 탈바꿈시키겠는가 하는것은 사령탑을 잡은 감독이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나서고있다.                                               갑급리그와 슈퍼리그     연변에 있어서 갑급리그는 슈퍼리그와 마찬가지로 열광적이다. 아니 축구를 좋아하는 연변팬들은2004년 을급리그때도 매껨의 홈장경기를 관람하면서 연변팀을 열광적으로 응원, 매껨의 홈장경기때마다 평균2만명 정도의 관중들이 경기장을 찾았다. 그래서 당시 성내 모 매체의 한 기자는 “을급리그경기장의 슈퍼리그분위기”라고 연길홈장을 평가했다. 최근 몇년간 전국의 축구붐이 식어지면서 연변홈장도 그 분위기가 지난 세기90년대의 갑A시대보다 많이 못해진 상황이다. 하지만 갑급리그인 연변홈장의 관중수는 중국슈퍼리그의 그 어느 경기구보다도 결코 짝지지 않는다고 감히 장담할수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갑급리그팀이든 을급리그팀이든 연변에 프로구단이 있기만 하면 축구를 사랑하는 연변팬들은 곧바로 경기장을 찾을것이고 또한 성세호대한 응원전을 벌일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연변을 벗어나서 론할 때 갑급리그와 슈퍼리그의 그 중량은 엄청난 차이가 난다. 우선 대외적인 홍보가 다르다. 2000년도5.1절 련휴기간 필자가 개인사유로 북경에 갔을 때 적지 않은 북경사람들이 길림오동팀이라 하면 대단한 축구팀이라면서 엄지손가락을 내밀군 했다. 그때만 해도 길림오동팀은 우리 길림성을 대표하는 축구팀으로 간주되기가 일쑤였다. 헌데 지금은 외부에서는 우리 길림성축구라면 장춘아태를 꼽지 결코 연변팀을 꼽지 않는다.     다음 기업인들이 관명권매입 등 협찬을 함에 있어서도 슈퍼리그와 갑급리그를 다른 안경을 걸고 본다. 그 사례로 연변축구가 갑A에서7년간 몸담고있을 때 선후로 한국삼성, 한국현대자동차, 길림오동 등 굴지기업들이 연변축구를 도와나섰지만 갑A에서 강급하고 다시 을급에서 갑급에 진급하여 뛰는 동안 단 하나의 기업도 관명권매입에는 나서지 않았다. 구락부의 홍보마케팅 등 전략에도 문제가 있겠지만 갑급리그와 슈퍼리그 사이의 중량을 감안하지 않을수 없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것은 관중수이다. 우에서 연변홈장의 관중수가 다른 경기구보다 락관적이라고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인것이였지 이전 지난 세기90년대와 비교한것은 아니다. 그때는 연변내는 물론 멀리 흑룡강 녕안시에서도 단체로 축구구경을 오는 경우가 많았다. 관중석이 꽉 차고도 경기장밖의 나무에도 사람들이 달려있었다. 메히꼬인파가 자주 일었고 저녁이 되면 팬들이 켜든 라이타불빛 또한 독특한 풍경선을 이루었다. 현재 유럽이나 남미의 적지 않은 구단들에서는 기업의 협찬같은건 바라지도 않는다고 한다. 경기장 티켓수입만으로도 구단운영이 가능하기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연변축구도 그렇게 안된다는 리유가 없다.                                                              에필로그     연변축구의 슈퍼리그진출 – 자치주창립60주년에 드리는 헌례로 간주하는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떠나 연변축구가 슈퍼리그에 진출하여 보다 활성화되면 그것을 통해 더욱 많은것을 얻을수 있다. 정치, 경제와 문화 및 또 다른 연변사람들의 이미지를 세상에 알릴수 있다. 그리고 “축구의 고향”이라는 명성을 더욱 새롭게 새길수 있을것이다.        
9    연변축구와 중국슈퍼리그 댓글:  조회:2544  추천:0  2011-10-30
 □ 김철균        최근 주체육국 우장룡 부국장이 “명년도 주정부에서2000만원을 출자하여 연변축구의 슈퍼리그진출을 돕게 된다”고 밝힘에 따라 연변의 축구계는 물론 광범한 축구팬들속에서 연변축구에 대한 새로운 기대감으로 부풀어오르고있다.     중국축구 슈퍼리그와 연변축구ㅡ 참으로 오래간만에 이 량자간을 하나로 련결해본다. 연변축구가 실력이 부족하거나 락후해서가 아니다. 연변이 내지보다 경제가 처진 변강오지에 위치해있기에 축구의 시장화진입이 극히 어려운데다 정부측의 실제적인 지원혜택을 크게 입지 못했기에 슈퍼리그를 바라볼 사정이 되지 못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4년 중국축구의 프로리그시시템이 가동된이래 연변프로축구의 상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1994년 한국 삼성기업 협찬, 1995년- 1996년 한국 현대자동차회사 협찬, 1997년부터2000년까지 길림오동그룹 협찬 – 이렇게 연변프로축구의 갑A기간 해마다 협찬기업이 있었으며2004년 한해동안 빛을 보이다가 사라졌지만 연변세기그룹에서 연변축구팀을 협찬, 그해에 을급리그에서 갑급리그에로의 진출에 성공했다.     그뒤 연변축구는 관명권협찬기업이 없는 상황에서 갑급리그에서7년간 버티여왔다. 2008년 원래 사령탑을 잡고있던 고훈감독을 락마시키면서2년내에 슈퍼리그진출을 한다고 했으나 관명권협찬기업이 없고 정부의 지원력도 미비한 상황에서 그것을 실현할수 없었다. 지난해 갑급리그의3위에로 진입, 슈퍼리그진출의 가능성을 보였으나 올해는 시즌중반의 련전련패의 부진으로 강급의 변두리에까지 이르렀다가 후반단계에 들어 요행 부진국면을 돌려세우고2륜 앞당겨 갑급보존을 실현하게 되였다.     축구팀 운영이란 여러가지 요소가 구비돼야 함은 모든 축구인들이 다 아는바이다. 팀실력과 감독의 정확한 기전술 구사 등을 기본토대로 이를 받쳐주는 경제적협찬이 반드시 따라가야 한다. 이 일련의 시스템구성에서 볼 때 우리 연변축구는 축구팀을 만들 기본 요소는 갖추었으나 운영에 있어서의 많은 조건들이 부족하다고 할수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명년에 정부에서 투자하는것으로 연변축구의 진짜 실력을 점검해보는것은 매우 필요한것이라고 인정된다.     올해의 갑급리그는 이미 막을 내렸다. 올해 연변장백호랑이팀의 성적을 볼 때 우리의 기대했던것과는 큰 거리감을 보였다. 하지만 명년도 정부에서 잘 밀어주고 구단측 역시 정품외적용병영입 등 일련의 팀개조를 잘하기만 한다면 연변프로축구의 슈퍼리그꿈 또한 얼마든지 실현될수 있을것으로 장담한다.      일찍 지난 세기50년대부터 길림성을 대표한 연변축구팀은 전국4개 강팀중의 하나였고 연변은 지금도 여전히 전국에서 주요한 축구중점발전지구로 각광받고있다. 그렇다면 국내 주요 축구중점발전지구에 슈퍼리그구단이 있어야 함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아닐가? 부언하고싶은것은 정부에서1년쯤 먼저 큰 투자를 하여 올해에 슈퍼리그진출에 성공하게 하고 명년 자치주창립60주년이 되는 해에 연변팀 선수들이 중국축구슈퍼리그에서 뛰게 했더라면 더욱 리상적이 되였을것이다.
8    연변장백호랑이팀 중위권에 진입하자면 댓글:  조회:3648  추천:1  2011-09-04
  올시즌 갑급리그가 최후의5륜 경기가 남았다. 우리 연변장백호랑이팀은 홈에서2경기, 원정에서3경기를 치르는데 홈에서의 상대는 호북중박과 광동일지천이고 원정에서의 상대는 각각 상해동아, 심양동진 및 심양심북 등 팀들이다. 상대방의 실력들을 볼 때 현재 갑급2위를 달리고있는 광동일지천을 비롯하여 모두가 연변팀보다 순위가 높은 팀들로서 얕잡아볼 팀은 하나도 없다. 그리고 홈장이 두개이고 원정이 세개인것도 장백호랑이팀으로서는 불리한 요소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상대방이 강팀들이라고 기죽을 필요는 없다. 연변축구는 력사적으로도 강팀을 두려워한적이 없거니와 올해도 제19륜 경기에서3 : 2로 중경력범팀 역전승한 사례가 있다. 그리고2위인 광동일지천외 기타 팀들은 실제상 연변팀보다 별로 특별히 강한 실력을 갖고있는것도 아니며 광동일지천도 대단한것이 아니라는 분석이 나온다. 관건은 자신심이다. 올들어 장백호랑이팀은 제5륜부터 있은 련패전으로 자신심이 많이 하락한 상황, 지난17륜 귀주통원과2 : 0으로 원정승을 하면서 자신심이 많이 회복된것은 사실이나 아직도 조선족축구의 고유전통을 완전히 되찾자면 일정한 거리가 있는것으로 알고있다. 때문에 이 기간 정상룡감독이 선수들한테 어떻게 자신심을 심어주냐 하는것이 관건이 아닐수 없다. 다음 상대방을 잘 알아야 한다. 아무리 약체팀이라 해도 강팀과 이길수 있는30% 좌우의 기회가 있다는 말이 있다. 그 기회를 잘 포착해야 한다. 올시즌들어 이른바 약체팀들이 우리 장백호랑이팀과 이기거나 빅은것은 다 그30% 좌우의 기회를 잘 포착하고 활용했기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장백호랑이팀도 이를 잘 포착하고 활용한다면 광동일지천도 그닥 무서운것이 아니며 이제 남은5경기중 적어도2경기 이상은 이길 가망이 큰것이다. 한편 연변장백호랑이팀으로 놓고볼 때 올시즌 슈퍼리그진출을 바라볼수 없는 상황에서 지금부터 명년도 시즌준비를 착실하게 하는것도 바람직한 일이라 해야겠다.      
7    연변축구 부단히 자체 “브랜드” 창출해야 댓글:  조회:2442  추천:0  2011-08-21
  최근년에 들어 우리 연변축구는 내지축구의 준엄한 도전을 받고있다. 연변축구의 “전통브랜드”였던 정신력과 총제적배합이 상대들한테 잘 먹혀들지 않고있기때문이다. 지금은 내지의 구단들도 정신력과 총체적배합을 강조하고있는 실정, 정신력과 총체적배합의 기초상 새로운 뭔가를 보여줘야 할 때이다. 연변축구가 내지의 장신선수들과의 “몸싸움”에서 이기자면 구단총체는 물론 선수들마다 자체의 “브랜드”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이다. 례하면 남미의 축구영웅 마라도나는 키가 작다. 키가 작기에 장신선수들과의 공중공쟁탈에서 우세할수 없었다. 때문에 그는 민첩성과 돌파에서 상대를 이겼다. 그것이 바로 마라도나의 “브랜드”였다. 우리 연변에도 “자아브랜드”가 특출한 선수들은 많았었다. 일찍 지난 세기50-60년대엔 “대포”, “도리깨”, “참새”, “무쇠골”, “집게” 등 별호를 가진 선수들이 많았으며 지난 세기90년대 김광주의 프리킥은 전국에서도 일품이였고 천학봉의 변선돌파는 황홀하기로 예술에 가까왔다. 가령 천학봉더러 수비나 중원 위치에 세웠다면 그같은 진가를 보여주지 못했을것이다. 현재 연변장백호랑이팀의 선수구성을 보면 나름대로 선수장끼에 따라 진영을 배치했겠지만 그 선수장끼가 선명하지 못한것이 유감이다. 스트라이커선 선수들의 돌파 및 슈팅능력이 돋보지이지 못한가 하면 수비에서의 위치선정 및 대인방어능력이 수수하며 중원에서의 경기통제능력도 옛날의 고종훈시대에 비하면 많은 차질을 보이고있다. 팀이란 장끼가 있는 선수들로 이루어지는 총체이다. 장끼가 없는 총체란 있을수 없다. 구단감독진에서 선수들에 대한 장끼키우기에 진력하는 한편 장끼에 맞는 진영배치에도 신경썼으면 하는 마음이다.    
6    사자 이끄는 양떼 “사자무리” 된다 댓글:  조회:2474  추천:1  2011-08-04
                                                                          사자 이끄는 양떼 “사자무리” 된다       지난 14일, 중국축구 슈퍼리그 제16륜까지 “마귀감독”리장수가 이끄는 광주항대는12승4무 령패40점의 성적을 기록, 지난10륜부터 선두주자였던 북경국안을 따돌리며6련승으로 슈퍼리그의 단독선두(북경국안과9점차)로 달리게 되였다.          지난해 갑급에서 슈퍼리그진출에 성공한 광주항대를 놓고볼 때 올들어 거금을 투자한만큼 호화군단인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구단이 그렇듯한 성적을 낼수 있은데는 감독 리장수씨의 축구사상과 리더십에 의한 결과라는 분석도 나온다.     축구인 리장수를 놓고보면1998년 중국축구계에 진출하여 그해에 중국축구협회컵 우승을 따냈고2000년도에중국축구협회컵 우승을 따냈으며2002년에는 청도이중팀을 이끌고 재차 중국축구협회컵의 쌍관왕을 따내기도 했다. 그외2008년에 재차 중국축구계에 진출하여 북경국안팀을 맡고2년 련속 팀을 아시안챔피언스리그에 진출시켰는가 하면2010년엔 광주항대팀을 이끌고 당해에 팀을 슈퍼리그로 진출시켰으며 올해에 들어서는 현재 팀으로 하여금 슈퍼리그의 선두주자자리를 굳히게 했다.     “사자가 이끄는 양떼는 얼마든지 ‘사자떼’로 될수 있다”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양떼”가 “사자떼”로 탈태환골하자면 양머리 선두주자의 강한 “리더십”을 떠날수가 없다.     일전 리장수의 “보좌관” 역할을 감당하고있는 추명씨로부터 알아본데 따르면 리장수감독은 강한 개성을 갖고있다고 한다. 구단핵심측을 존중하면서도 일단 자기의 관점이 옳다고 생각하기만 하면 구단핵심측에서 아무리 강요해도 자기 주견을 굽히지 않는다고 했다. 또한 선수들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으면서도 훈련과 경기에서만은 단 한번의 양보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어느 선수를 봐주고하는것이 전혀 없이 컨디션이 좋은 선수들만을 선발해 경기에 내보내기에 선수 모두가 그를 존경하면서 훈련에서 땀을 더 흘리게 됐고 경기에서도 그만큼 힘을 내게 됐으며 따라서 경기성적도 상승선을 긋게 됐단다. 사자가 이끄는 “양떼”ㅡ우리 연변축구력사에서도 그런 사례는 있었다.      1997년 최은택감독이 그랬다. 게으름과 라태성으로 뒤죽박죽이던 구단에 대담히 수술칼을 들이대여 대개조를 했으며 선수진으로 하여금 자아두리에 똘똘 뭉치게 했다. 결과9륜 련속 무패행진이라는 기록과 더불어 최종 갑A의4강이란 신화도 만들어냈다.     그리고1999년의 고훈감독이 그랬다. 강한 리더십으로 잠재력이 제한된 선수진영을 발굴, 과학적인 훈련과 경기포치로 그해에 선후로 료녕무순, 북경국안, 상해신화, 중경력범, 산동로능 등 갑A의 선두자리를 지키던 팀들을 끌어내려 “거물킬러”로 각광받았다.      한편 이런 “양떼”를 이끌던 감독들은 흔히 구단핵심들과의 관계가 별로 여의치가 않았다. 그제날의 최은택이 그랬는가 하면 리장수와 고훈 모두가 그랬다. 왜서일가? 구단핵심측에서 하라는대로만 하면 성적을 낼수가 없기때문이다.  따라서 구단핵심측과 늘 마찰이 생기군 했다. 결과 최은택은1998년 시즌도중에 귀국해야 했고 리장수는 중경에서 청도로, 청도에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을 선택해야 했고…     여기까지 쓰고있을 때 연변장백호랑이팀이 경기하고있는 귀양으로부터 장백호랑이팀이2 : 0으로 상대방을 제압했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오래간만에 들어보는 희소식이다. 연변장백호랑이팀의 승전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필자가 오늘 이를 재삼 곱씹는것은 다름이 아니다. 바로 연변장백호랑이팀을 이끄는 감독도 “양떼”를 이끄는 사자로 되여달라는 바램이여서이다. 
5    장백호랑이팀 “동산재기”의 돌파구 찾자면? 댓글:  조회:3077  추천:26  2011-06-19
  장백호랑이 “동산재기”의 돌파구 찾자면?                               □ 김철균       중국축구 갑급리그는 이미 제13륜까지 제1단계의 경기가 끝났다. 지금까지 연변장백호랑이팀은 2승 4무 7패로 마지막 두번째 순위까지 추락돼있다. 이는 애당초의 짐작보다 더 험하게 이그러진 모습이며 2005년 연변축구가 갑급리그에 들어선이래 가장 큰 위기라고 할수 있다. 그럼 장백호랑이팀이 왜 그 명성에 걸맞지 않게 이렇듯 모든 팀들의 “제물”로 되였을가? 그 원인을 제대로 찾아야 이에 대한 대비책이 나오기마련이다.       공격조직자의 부재 득점력 부진의 원인     올시즌 장백호랑이팀의 부진은 외적용병영입의 실패로 인기된것이 많다는것은 모든 축구전문가들의 공동으로 지적한 문제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중원에 시야가 넓고 패스감각이 뛰여난 공격조직자가 없는것이 더 큰 문제라고 보아진다. 외적용병영입을 놓고보면 우리 연변팀이 지난해외 거의 어느 시즌도 외적용병의 “덕”을 크게 본적이 없다. 허나 공격조직자가 잘 활약하면 그 허점을 미봉할수 있었다. 바로 공격망을 강화하는것이다. 즉 공격수만이 득점하는것이 아니라 미드필더 혹은 수비수도 득점할수 있는 시스템을 응용하는것이다. 이러자면 반드시 지난해의 박성같은 공격조직자가 있어야 할텐데 올해는 그런 선수가 없었으며 시즌초반 전반 공격선을 누비던 리광재마저 옛상처가 도지자 장백호랑이팀의 공격선은 그야말로 “이발 빠진 호랑이”에 가까울수밖에 없었다.         변선돌파, 쾌속침투, 대인마크 그리고…     이전에 연변팀으로 말하면 천학봉의 변선돌파, 허파의 쾌속침투, 강홍권의 대인마크 그리고 한청송의 수비감각 등은 갑급권에서는 물론 슈퍼리그무대에 내놓아도 별로 짝지지 않을 일품이였었다. 헌데 최근들어 천학봉이 퇴역하면서 천학봉같은 변선돌파기능을 가진 선수를 볼수 없는가 하면 올시즌 들어 허파, 강홍권과 한청송한테서도 예전과 같은 그런 모습을 찾아볼수 없었다. 이들도 나이가 들어 “한물 간것”인가? 아니면 그 어떤 정서파동이라도 생긴것일가? 총체적으로 올시즌들어 보면 상대방 선수들보다 늘 한발씩 늦은 감과 노상 상대방의 전술에 끌려다니는듯한 감이 들군 했다.            감독의 책임감 두고 한마디     제9륜 장백호랑이팀이 상해동아한테 0 : 1로 패하자 관중석에서는 “감독사퇴”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구단의 부진을 두고 감독한테 모든 책임을 떠넘겨서는 안되며 또한 현재 연변에 장백호랑이팀의 사령탑을 맡을 적임자가 과연 있는가 하는것도 문제시된다. 하지만 구단의 부진에 대해 감독도 일정한 책임을 져야 함은 마땅하다. 감독의 책임감이란 다만 기전술운영뿐이아니다. 우선 감독진구성을 잘 해야 하고 감독진과 전반 구단의 단결을 강화해야 하며 매 선수들의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발굴해야 한다. 감독의 기전술을 두고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지만 변화무쌍한 기전술을 도입하고 그 기전술이 선수들의 몸에 배기게 해야 한다. 오죽하면 “선수들은 땀에 절지만 감독은 피가 마른다”는 말이 다 나왔겠는가? 이런 견지에서 볼 때 장백호랑이팀의 감독석은 절대 “벼슬자리”가 아니라고 봐야 할것이다.                ×            ×              ×    후반단계에 들어 연변장백호랑이팀에서는 아프리카 말리국가대표팀에서 뛴적이 있는 쏘메라 쿠리바리를 영입해 팀에 합류시키게 된다. 거기에 한국적 리광재선수의 상처도 거의 완쾌되여가는 상황, 팀 전력이 크게 개선될 조짐이다. 또한 누군가 공격하프로 공격조직을 잘해주기만 하면 장백호랑이팀의 중상위 부상은 시간문제라는 분석이다. 그리고 구단현황을 볼 때 “슈퍼리그진출”은 이미 지나간 물이나 마찬가지인만큼 선수들한테 지나친 압력을 주지 말고 기량껏 경기에 림하게 하는것이 가장 명지한 전략이라고 생각는다.
4    심판에 대한 처벌결과도 반드시 공개돼야 댓글:  조회:3337  추천:46  2011-06-12
                  중국축구협회 규률위원회        심판에 대한 처벌결과도 공개돼야     지난 3일, 중국축구협회 규률위원회에서는 지난 5월 28일 룡정 해란강경기장에서 있은 극소수 축구팬들의 “소동”으로 심판원이 제때에 퇴장하지 못한 사건을 두고 “전국축구경기구안전질서규정” 제17조의 규정에 의하여 연변경기구에 통보비판결정을 내렸다.     연변경기구에 대한 중국축구협회 규률위원회의 통보비판결정은 그날 룡정 해란강경기장에서의 축구팬들의 “소동”정절에 따라 내린 결정으로서 이는 경기장의 안전질서의 유지거나 “문명경기구창조” 활동 등을 위해서도 필요한것이란 생각이다.      다만 지금까지 중국축구협회 규률위원회에서는 연변경기구에 한해서만 처벌결정이 내려졌을뿐 그날 “소동”의 도화선작용을 한 심판원 장묘에 대한 처벌결과에 한해서는 가타부타 공개하지 않고있다.     그날의 경기상황을 분석해보면 심판원 장묘는 완전히 의도적으로 편파판정을 한것이 분명했다. 전반전에 김경도와 한청송에게 준 엘로카드, 상대방 수비수에 의해 넘어진 박중우한테 준 엘로카드, 심양동진팀의 주장 락배사의 핸드를 눈감아준것 등등을 보면 중국축구협회 규률위원회의 관원들도 “소동”의 불씨가 뭔가를 판단해야 했으며 반드시 심판한테도 해당 규정에 따라 마땅히 처벌조치가 내려져야 할것으로 본다. 또한 그날 사건의 발단으로 놓고보아 마땅히 심판에 대한 처벌이 1차적이요, 경기구에 대한 처벌이 2차적이 되여야 한다. 연변의 축구팬들은 연변경기구에 대한 통보비판에 대해 접수하지 못하는것이 아니라 다만 심판에 대한 처벌조치가 미비한데 대해 리해하지 못할뿐이다.
3    항일가요와 황정일할머니 댓글:  조회:3072  추천:30  2011-06-10
항일가요와 황정일할머니 □ 김철균   혁명을 찾아서 암초많은 바다로/ 감옥살이 두려우랴 혁명대렬 앞으로// 어느곳의 감옥이 내집으로 되든지/ 단두대에 오른대도 겁날것 없어라 적은 무리 잘살고 많은 대중 못사는/ 자본주의 노예된 그 설음이 원통해// 일어나라 로동자 농민과 녀성들/ 불평등한 자본사회 때려나 부시자 … 지난해 여름, 본편집부에서 조직한 통신원원고평의 모임에서였다. 경치가 아름다운 연길공원 뒤산이라 원고평의가 끝나자 자연히 술파티와 더불어 오락이 시작됐다. 통신원들이란 거개가 60-70대가 되는 로인들인지라 그 오락모임에서 나는 로인들의 정서에 알맞게 항일가요 몇수 불렀다. “적기가”, “결사전가”, “연길감옥가”, “메데가”, “우리는 로동자 농민의 청년돌격대”, “인민주권가”… 그러자 로인들은 젊은 나이인데 진짜 항일가요를 아는것이 많다면서 어디에서, 누구한테서 배웠느냐고 했다. 로인들의 그 물음에 나는 즉각 떠오르는 인물 한분이 있었는데 그분이 바로 녀성항일투사 황정일할머니였다. 내가 황정일할머니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된것은 할머니의 친구였던 나의 셋째 고모에 의해서였다. 1972년 내가 16살이 되던 해의 여름이였다. 그때 흑룡강성 동녕현에서 살던 셋째 고모가 훈춘으로 오게 되였는데 어느날 내가 고모의 손목에 이끌려 황정일할머니네 댁으로 가게 되였다. … “이보게 동갑이, 얘가 부모없이 형님의 집에서 얹혀자라는데 동갑이 아들삼아 자래우면 랑패가 없을걸세.” 이에 황정일할머니는 “앞으로 얘가 뭐 나같은 늙은이하고 함께 있고싶어하겠나?” 이러면서도 은근히 기뻐하는 모습이 확연했다. 후에 들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할머니는 훈춘시복장공장에 출근하면서 18살 되는 견습공을 딸 삼아 집에 두고 보살펴주다가 20살을 넘기자 시집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니 나같은 남자애를 아들삼아 두고싶은 마음이 많을상싶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나를 키워두던 형님이 “형인 내가 퍼렇게 살아있으면서 왜 동생을 남한테 주겠수”하고 거절하는통에 그 일은 그렇게 무산되고말았다. 이렇게 내가 황정일할머니의 양아들로 되지는 못했지만 가끔씩 할머니댁으로 놀러다니군 했다. 홀로 살기에 생활적여유가 있어 내가 가면 맛있는 음식을 해주기에 다닌것도 있지만 더우기는 할머니와 함께 있노라면 많은 옛말을 들을수 있어서였다. 그러던중 한번은 내가 조선영화 “영원한 전사”에서 배운 삽곡을 코노래로 흥얼거렸더니 할머니가 대뜸 그것을 받아 부르시는것이였다. 나가자 마중가자 밝은 동이 튼다/ 싸우자 총과 칼로 우리의 길 닦자// 용감히 걸음도 굳세게 청년들 모두다 나서자/ 우리는 로동자 농민의 청년돌격대… “어머님께서도 이 노래를 아시나요?” “그래 내가 아마도 너보다 더 옛날사람이니 조금은 더 알것이 아니냐?!” 그러면서 할머니는 “녀성해방가”, “혁명가”, “인민주권가” 등을 거침없이 줄줄 부르시는것이였다. 그속에는 지금 대한민국의 국가로 불리우는 “태극가”도 망라되여있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 만세… 지금와서야 비로서 알게 되였지만 그 옛날 전체 조선인들이 부르던 “애국가”로서 동북항일련군내의 조선인병사들이 불렀는가 하면 태항산의 조선의용군들도 불렀으며 중경의 한국독립군 병사들도 부르던 노래였다. 다르다면 곡이 지금의 한국국가의 곡이 아닌 외국곡에 가사를 붙여불렀다는것뿐이였다. 한편 할머니를 통해 나는 많은 항일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대황구항일유격구의 이야기, 연통라자항일유격구의 이야기…그외 일본의 이또히로 부미를 저격한 안중근의 이야기도 들려주었는데 놀랍게도 중국내 안중근의 활동을 동조한 사람중에는 황정일할머니의 부친인 황병길선생도 들어있었다. 그리고 할머니의 모친인 김숙경녀사와 언니인 황정신, 남동생인 황정해 등도 모두 항일혁명에 투신하였는데 특히 남동생 황정해는 항일련군 패장으로 항일련군 제1로군 위증민 부총사령의 경위원으로 임무를 집행하다가 24살 일기로 장렬한 최후를 마치기도 했었다. 그럼 할머니의 항일력사는? 말치 않아도 할머니 역시 그제날 항일련군 피복공장의 일군으로 유격대의 원호사업과 녀성해방사업에 투신한 항일투사였다. 다만 항일유격대와 떨어져 흑룡강성 동녕현 경내에서 활동중 일제에 의해 체포되였고 후에 항일유격대의 쏘련경내로의 이동으로 인해 더는 항일투쟁에 참여하지 못한것이 할머니의 생애에서는 가장 큰 오점이였다.  하긴 력사적원인으로 봐도 1940년초에 들어서는 일제의 가혹한 토벌로 동만경내의 항일근거지가 초토화로 된것도 사실이였다. 이 력사로 하여 해방후 할머니는 오래동안 항일간부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할머니는 이로 인해 억울해한적이 없었다. 오히려 공산당이 있었기에 못살던 만백성이 사회의 주인으로 될수 있었다고 말씀하시군 하였다. 할머니에 대해 탄복되는 다른 한가지라면 옛날로인들이라면 당연히 흘러간 옛노래인 “홍도야 울지 말라”, “나그네설음”, “번지없는 주막” 등에 잘 알고있었으련만 나한테 이런 노래에 대해선 일절 배워주지 않고 오직 항일가요뿐이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지난 세기 70년대까지만도 우리 중국조선족의 항일가요에 대해여 부르지 못하게 할 때 할머니가 나한테 많은 항일가요를 배워주었다는것은 우리 조선족의 항일력사에 대한 공정한 평가를 바라는 소망이기도 했다. 덕분에 나 또한 할머니를 통해 항일가요를 배움과 동시에 우리 조선족의 항일투쟁사에 대해 알게 된것도 사실이였다. 나뿐만이아니라 정영석 등 많은 작가들도 항일제재를 다루는 작품을 집필하면서 할머니를 통해 력사적제재를 제공받기도 했었는데 그중 채광춘선생의 회억록 “눈보라치는 밀영”에서의 많은 사실은 황정일할머니가 제공한것였다. 한편 할머니한테 자식이 없은것은 아니였다. 1930년대에 결혼한 할머니한테는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해방이 되자 동북민주련군에 입대시켰고 후에 조선에 나가 조선인민군으로 개변되였다가 조선전쟁중에서 전사했다. 이렇듯 할머니의 가정은 아버님 황병길선생으로부터 형제들인 황정신, 황정해 모두가 혁명투사였도 아들까지 혁명에 목숨을 바친 혁명가정이였다. 할머니는 1987년에 력사문제가 풀리여 그 이듬해 항일로간부의 대우를 받던중 고질병이던 고혈압, 관심병 등으로 사망하였다. 그때 할머니의 슬하에는 13살 때부터 키워주던 시동생의 딸 김련순이가 있었다.  할머니의 양자로 될번했고 또한 할머니를 통해 많은 항일가요와 항일력사를 알게 된 필자로서는 오늘 이 한편의 글로 할머니를 추모함과 아울러 할머니가 즐겨불렀던 “녀성해방가”를 적으면서 할머니의 명복을 빈다. 권리를 박탈한 자본사회에/ 청춘의 붉은꽃 못피는 원한// 아느냐 그대여 녀성동무들 남몰래 조용히 우는 눈물은/ 청춘의 고운 낯에 주름 생기고// 매맞아 얻은 병 정말 싫어요…     녀성들 우리 동무 다 일어나라/ 부르죠아제도를 없애버리고//동등한 권리 위해 총들을 들자…  
2    요즘의 고민거리- 자녀의 학교 붙이기 댓글:  조회:2736  추천:46  2011-06-07
    요즘의 고민거리- 자녀의 학교 붙이기           요즘 들어 나한테는 돈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한가지 고민이 생겼다. 바로 이제 7월 달에 곧 소학교를 졸업하게 될 14살 짜리 딸애의 중학교 진학문제 때문이다.      사연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사는 연길시에서는 그제 날부터 자녀가 소학교를 졸업하면 자신이 거주하는 구역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기본 원칙이었다. 그러다보니 이전엔 연길에 호적이 없는 애들을 학교에 붙이려면 돈을 많이 써야 하거니와 무등 애를 먹기도 했다. 지금으로부터 18년전 바로 내가 훈춘으로부터 금방 연길로 왔을 때 우리 가정은 한동안 연길에 호적을 옮기지 못한 상황이었다. 당시 12살짜리 아들애는 훈춘에서 소학교를 다니다가 연길로 오게 됐는데 학교 붙이기가 여간만 힘들지 않았다. 연길호적이 없는데다가 학교마다 애들이 넘쳐나 자리가 없었고 거기에 애의 공부성적마저 그닥지 않는지라 어느 학교에서도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내가 근무하는 편집부의 부장님이 뛰어 다니며 인맥을 통해 아들애의 입학문제를 해결했는데 그때의 돈으로 약 2000원 가량 날려 보내고서야 아들애를 연길시 어느 한 모퉁이의 학교인 동산소학교에 붙일 수가 있었다. 그 때로부터 18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이번에는 우리 부부가 연길에 와서 본 딸애가 이젠 중학교에 붙게 되었다. 18년이 지난 오늘날 14살 되는 딸애를 중학교에 붙이자고 보니 새로운 문제에 봉착했다. 사연인즉 호적이 있는 구역에 따라 딸애가 붙을 중학교는 연길시 8중인데 애가 한사코 8중엔 가지 않고 13중에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부모로서 딸애의 요구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학교가 학생이 많아서가 아니라 학생수가 너무 적어서 자기네 학교로 오게 되는 학생을 다른 학교에 빼앗기지 않으려고 학교마다 눈이 “화등잔”만하게 되었다. 인맥을 통해서도 안되었고 돈을 아무리 쓴다 해도 일절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요즘 나는 딸애의 요구를 거절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13중에 보낼만한 능력도 없는 그런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다. 여기서 내가 인맥과 돈을 내서라도 딸애의 요구를 들어주려고 하는 것이 맞고 그름을 떠나서 중요한 건 18년 전엔 학교마다 학생이 넘쳐나서 모두들 배 부른 흥정을 하던 것이 요즘 와서는 왜 학교마다 학생수를 채울 수가 없어 안달복달하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 연길시로 놓고 말하면 그래도 조선족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곳으로서 조선족 인구가 전체 인구의 50% 이상을 차지하는 편이다. 하지만 몇년 전부터 조선족 학생의 래원이 고갈되면서 태평소학교와 중앙소학교가 합병했고 동산소학교는 한족반을 설치하여 한족학생을 받기 시작했으며 중학교 또한 11중과 8중이 합병된 상황이다. 연길시 상황이 이렇다 할 때 기타 시와 현, 더우기 농촌의 상황은 더구나 어떠하겠는가?! 그야말로 조선족의 앞날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1998년 우리 부부가 둘째 아이를 출산할 때만 해도 웬간한 농촌의 남성 청년들 대부분이 장가를 갈 수 있었고 둘째 아이까지 낳는 현상이 가끔씩 있었으나 지금 농촌은 물론 도시의 남성 청년들조차 웬간한 재력이 없이는 장가들 엄두도 못낸다. 또한 애를 낳을 수 있는 가임기 여성들도 결혼을 거부하는 “싱글현상”이 점점 많아지는가 하면 설사 결혼해도 출산을 거부하는 현상도 가끔씩 있으며 두번 째 아기를 보는 부부는 진짜 가물에 콩나듯 드문 상황이다. 한 민족의 부강을 이끌자면 교육이 따라가야 하고 교육이 따라가자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고 많아야 할텐데 중국 조선족의 현상은 그렇치 못하고 있다. 이제 최근에 출산된 애들이 몇년 후에 학교에 붙을 때가 되면 우리 조선족 학교가 도대체 몇개 소나 남아 있을는지?
1    프로필 댓글:  조회:2561  추천:53  2011-06-07
김철균1959년 8월 26일 생대학문화메일: jinzj@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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