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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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3.1”독립만세운동 발상지 오산역 댓글:  조회:1401  추천:0  2013-01-23
“3.1”독립만세운동 발상지 오산역   겨울려행지로 한국에 도착한 다음날 나는 경기도 오산시로 가야 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우연하게 우리민족독립운동사에서 유명한 “3.1”독립만세운동 기념비를 보게 되여 놀랐고 문득 오산의 겨울이 한결 따스하고 이채로운듯 싶어 마음은 감동으로 설레였다   경기도오산시 지하철광장 앞에서 11호버스를 기다리다가 한 아주머니에게 버스가 언제 오냐고 물었더니 1시간에 한번씩 있는데 아직은 멀었다고 한다. 그래서 초행길인 오산시지하철광장을 두루 살펴보니 포장마차가 몇 개있는 가운데 비석이 우뚝 솟아있는 것이 눈에 뛰 였다. 그래서 발길을 그리로 옮기면서 살펴보니 중심에 우뚝솟아있는 비석에는  “3.1독립항쟁의사 추모비”라고  큼직하게 새겨져있고 정방형모양으로 콩크리트기둥이 둘어있고 주비석 량옆에는 두개의 해설비석이 주비석을 옹위해 서있다. 나는 이 우연한 발견에 깜짝놀랐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기본상에서 상해나 만주에서 일어난걸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게 웬일이냐?    그래서 다시 오른쪽의 해설비문을 상세히 훗터보기 시작하였다.    “3.1”독립항쟁의사 추모비 건립 취지문에는 “3.1”독립만세운동은 1919년3월1일 서울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해 독립선언서 선포식이 거행된후 3월28일 오산장날을 기하여 오산역광장에서 8의사주도하에 800여명군중이 집결하여 오산역사, 우편소, 주재소, 면사무소, 금융조합, 일본인 상점, 주택 등 다수 일본인들을 몰아내므로써 일본경찰에 체포, 고문 및 징역을 받았다. 이는 일제의 치욕적인 무단통치에 항거하여 우리의 민족정신을 드높인 사건이다. 오산”3.1”독립만세운동을 기리고 항쟁의사들의 구국정신을 후예들에게 길이 물려주고자 “3.1”독립만세운동 발상지인 오산역 광장에 추모비를 건립한다고 하였다. 왼쪽해설비에는 독립선언서 공삼장이 그대로 새겨져 있다. “금일오인의 차거는 정의인도 생존존영을 위하는 민족적요구이니 오직 자유적정신을 발휘할것이요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일주 하지말라”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 “일절의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야 오인의 주장과 태도로 하여금 어디까지든지 광명정대하게 하라.”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94년전  “3.1”독립만세운동 력사의 자취를 더듬어 새겨가면서 선렬들의 위대한 민족정신과 민족혼에 숙연히 모리숙여 인사를 올리면서 글로벌시대 우리민족의 세계적인 위상과 민족통일의 앞날을 그려보기도 하면서 이번 한국려행로정에서 목표가 생기게 되였음을 의식하면서  오늘따라 오산의 겨울은 너무 감동이고 너무 따스함을 가슴깊이 느끼였다. 경기도 화성시 병점에서 2013년1월15일 초고
6    즐거운 려행 안타까운 마음 댓글:  조회:2087  추천:3  2012-02-11
        즐거운 려행 안타까운 마음                   ---함경북도청진지구 려행을 끝맞치고   지난 7월16일 나는 룡정해란강 려행사와 조선 칠보산려행사가 주체로하는 제33차 려행단의 일원으로 즐겁고 흥겨운 마음으로 동족애의 심정을 지니고 고국으로 향한 관광뻐스에 몸을 싫었다. 난생 처음으로 조선인민민주주의 공화국 함경북도 청진지구 관광을 떠나게 되였다.  청진시는 함경북도수부로서 조선에서 세번째 큰 도시이며 인구가80만이나 되는 성급도시였다.   칠보산려행사 제33차 려행단 성원들은 도합33명이였다.  우리 교직원19명, 화룡집단 로인들11명, 룡정에 거주하는 정선생, 김룡남, 리희자부부 등33명으로 구성된 우리 일행을 싫은 관광뻐스는 일정에 따라 제시간에 삼합교두를 향해 떠났다.  가이드 강씨 젊은이는 이번 려행에서의 주의 사항을  상세히 알려주었다. 흥미진진하게 가이드의 말을 들으면서 관광뻐스는 어느새 오랑캐령을 넘어 삼합교두에 도착하게 되였다.  나는 관광단성원  2호로 우리측의 검역을 맞치고 조선측 입구에 이르렀다. 조선측 당직군인의 지시에 따라 다리우에 머무르게 되였다. 나는 통행증만 있으면 되는가 했는데 그게 아니였다. 절차가 몹시 번다스러웠다. 우리일행은 번호대로 줄을 서서 입구허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선의 압록강축구팀이 우리쪽으로 느러지게 넘어온 다음 우리의 입구가 허락되였다. 조선의 검역은 매우 엄했다. 통행증만 검역하는게 아니라 소지품을 하나하나 세심히 검역하고 지어는 호주머니에 들어있는 인민페 액수도 검사하고 기록하였다. 드디여 지루한  검역을 끝마치고 우리를 영접하려온 조선칠보산 려행사의 관광뻐스에 몸을 싫었다.   관광뻐스가 떠나면서부터 조선의 안내원 강동지가 자기 소개와 더불어 려행로정과 주의사항을 알려주었다. 호주머니까지 검역을 받은 언짢는 기분을 다잡기도 전에 뻐스는 회령군에 들어섰고 오산덕에 정중히 모셔진 김정숙동상앞에 이르렀다.  하늘에선 이슬비가 잔잔히 내렸다. 한복을 산뜻하게 차례입은 접대원녀성이 나와서 인사를 하고 김정숙동상앞에 모여서게 한다음 꽃을 드리고 정중히 묵도를 드렸다. 접대원의 잔잔하고 고운 음성으로 률동있게 김정숙에 대한 사적을 이야기 하였다. 집체적인 기념촬영을 하고 서둘어 안내원을 따라 오산덕층계를 오르면서 보니 주위엔 온통 살구나무들이 였다. 회령은 백살구 기지로서 소문이 높다고 한다. 오산덕언덕을 넘어 아담하게 꾸려진 초가집이 보였는데 그 집이 바로 김정숙동지가 생활했던 집이였다. 접대원의 해설을 들으면서 나는 초가집 우측  돌비앞에서 기념찰영을 남겼다. 다음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청진시를 향해 떠났다.   회령시에서 청진시까지는92키로메터라 한다. 관광뻐스는 회령시을 떠나 부령군에 들어섰고 부령군을 지나 무산령을 톺아오르고 있었다. 무산령 중턱 샘물터에서  10분정도 휴식을 취한다음 뻐스는 다시 청진시를 바라고 떠났다. 뻐스에서 스쳐지나는 조선의 산천을 두루 살펴보고 드문드문 나타나는 조선의 이름모를 마을들을 굽어보면서 마음은 개운하지 못했다. 해방을 맞아 반세기 세월이 넘어 흘렀건만  조선은 아직도 전쟁후 복구건설시기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느낌에 서운한 기분을 다잡기 어려웠다. 안내원 강동지가 일어서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우리들도  다 같이를 불렀다. 는 명곡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악되고 포만한 정서로 노래선률은 정서가 높았다.   드디어 청진시에 들어서게 되였다. 관광뻐스는 청진시중심에 거연히 솟아있는 김일성의 동상앞에 멈추어섰다. 하늘에선 계속하여 잔잔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전체관광단 성원들은 안내원의 안내하에 김일성동상앞에  꽃을 드리고 숙연히 묵도를 드린다음 기념찰영을 남기고 청진시제강소 유아원으로 향하였다. 유아원원장이  반갑다면서 열정적으로 맞이하였다. 3층에 이르러 제강소유아원 어린이들의 공연을 관람하게 되였다. 자고로 조선은 집체무로 세계에 이름을 자랑하고 문화예술의 긍지로 자랑이 높다. 제강소 유아원 어린이들의 공연은 잠시나마 우리일행의 정서를 높여주었다. 4-5세되는 어린이들의 세련된 공연은 자못 이채로웠다. 어떻게 하면 이처럼 훈련을 시켰고 배양하였을까? 하는 생각을 도살리고 있는데 공연은 서서히 막을 내리였다. 50여명의 어린이들이 무대에 나와서 환영의 인사를 올리는 것이였다 우리들은 기념품과 례물을 안겨주고 그들과 합영하여 기념찰영을 하였다. 미래를 위해 땀을 흘린 교양원들에게 따뜻한 인사를 올리고 칠보산 려행사 본부에 도착하였다. 몇분간의 휴식을 취하고 우리들의 려행종점인 숙영지 경성이란 곳을 향해 떠나야 했다.   경성은 청진시에서50키로메터 떨어져 있다고 한다. 조선경내에 들어서면서부터 또한 청진시에서 경성으로 가는 로정에서 밖을 내다보면 표어가 많았고 표어의 내용들은 아주 특이하였다. 정치적이고 선동적인 내용과 수령에 대한 충성의 내용들이 아주 많았다. , 이런 표어들은 그래도 마음에 들어왔다. 경성으로 달리는 로정에서 더욱 희귀한 일들을 목격하였다. 양로공들도 알쭌한 녀성들이였고 사람들은 자전거에 무건운 짐을 실고 오갔다. 녀성들은 네바퀴구르마에 도목나무를 가쯘하게 박아실고  힘겹게 끌고 다녔다. 차량이라해서 목탄트럭들이였다. 짙은 연기속에 앉아다니는 군인들의 모습은 너무 군상스러웠다. 사람마다 배낭을 잔등에 메고 다니는 모습에서 어려운 생존의식을 감득하게 되였다. 더욱 한심한것은 네바퀴구르마에 남편인듯한 남성이 앉고 가냘픈 녀성이 끄는 모습은 참으로 꼴불견이였다. 이런 현실에서 핵무기를 운운한다는것이 도무지 리해가 가지 않았고 어째서 촬영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하는지? 그 원인을 알것 같았다. 대 남자주의가 성행하고 봉건세습습관이 농후한 이런 현실이 너무 안타까웠다. 관광뻐스가을 넘고있을 때 안내원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것이였다. 샘비령이란 힘겁게 령을 넘을때 샘물을 마시면 힘이 솟아서 한달음에 넘는다는 간단한 이야기로부터  하는 유머적인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원도 풍부하고 기름진 옥토가 잠자는 조선의 현실에 서글픈 마음을 억제할수 없었다.  나는 우리 고국이 잘살기를 간절히 바란다. 드디여 경성 칠보산려행사 분사 숙영지에 도착하여 행장을 내려놓고 하루의 스트레스와 피곤을 해소하면서 하루저녁을 묵게되였다.   이튼날 아침식사를 끝맞치고 서둘러 새날의 려행이 이어졌다. 관광뻐스가 경성에서15분정도 달려 처음으로 이른곳이였다. 세영웅이 모여 나라를 구하기 위한 대사를 담론했다고 해서이라고 했다는 바다기슭의 자그마한 어촌이였다. 안내원의 뒤를 따라  김정숙 사적이 새겨진 비석도 보고 우물도 마시고 바다를 향해 기념촬영도 남기였다. 다음에 이른곳이이란 곳이였는데 소금이 많다는 동해바다 기슭이였다. 한눈에 동해바다의 넓디넓은 검푸른 장관이 안겨오고 기복을 이룬  절벽과 바위이며 거세찬 바다물은 기가막혔던 우리들의 마음을 활짝 열어주는 듯이 시원하였다. 우리들은 바다가 백사장에서 조수가 밀려오고 밀려가는 바다물과 유희를 놀면서 한창 즐겁게 보냈다. 마음은 한결 젊음으로 설레였다.   그래도 바다가 우리들의 려행의 종착역이였다. 마음껏 즐기고 감상하고 얼마나 좋은가? 드디여 바다와의 리별을 하고 고국땅을 떠나야하는 시각이 닥쳐왔다. 조선국민은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사상을 갱신해야 하고 분발해야 한다. 왜 공기가 좋고 옥토가 기름진 광활한 고국이 생존앞에서 허덕여야 하는지? 마음을 활짝 열고 자양분을 흡수해야 한다. 어느때까지 항일유격대식으로 굶주려야 하겠는가? !  번영창성한 조선의 미래를 약속하면서  조선이여 잘 있으라.  마음속으로 웨치면서 귀로에 올랐다.     
5    강원도에서의 1박2일 댓글:  조회:2614  추천:15  2011-08-23
                                                                           강원도에서의 1박 2일   여름방학 한국초청연수활동을 원만히 마무리고 귀국을 4일 남겨놓고 우연히 강원도 속초, 삼척, 강릉시를 돌아보는 행운을 가지게 되였다. 나는 간단히 관광준비를 하고 13일 아침 9시 25분, 서울시 고속뻐스터미널에서 동행들과 만나 속초행 고속뻐스에 올랐다. 우리일행은 고속뻐스에 몸을 싣고 안전별트를 착용한 다음 저마다 혼곤히 잠들어버렸다. 그동안 줄줄이 이어지는 연수활동으로 몹시 피곤하였기 때문이였다.   고속뻐스기사가 마침 여름휴가철이라 오가는 차량들이 많기에 운행시간이 지연될수 있으므로 량해를 구한다고 하기에 창밖을 내다보니 정말 오가는 차량들이 속도가 느리였다.   우리를 태운 고속뻐스는 5섯시간을 달려 드디여 속초고속뻐스터미널에 도착하였다. 속초시 《하나뷔페》대표 리주동선생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우리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고 다시 그의 차에 올라 《아바이마을》로 달리였다. 청초호공원 《아바이마을》의 유명한 단천식당에서 시원한 랭면으로 중식을 먹고 일행은 청초호공원을 돌다가 전망대에 올랐다.   산과 바다와 호수가 어우러진 속초시는 참으로 한폭의 수채화를 방불케하는 아름다운 도시로서 그 매력을 뽐내고 있었다. 아득히 펼쳐진 바다에 갈매기가 자유롭게 재롱을 부리고 시야엔 등대가 우람지게 안겨들었다. 《가을동화》와 《대조영》 촬영지로 널리 소문이 나 근래엔 대형행사가 이어지고 거기에 KBS의 《1박 2일》팀의 방문공연으로 인기가 대단하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급급히 전망대를 내려서 청초호공원을 빠져나와 영랑호기슭을 달리면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다음 도착지는 영랑호공원의 세계 말타고 활쏘기 대회장이였다. 리주동선생도 속초에서 태여나 여지껏 살면서 처음보는 운동이란다. 비속에서 선수들이 말을 질주하면서 활을 쏘는 신출귀몰하고 용맹스러운 모습은 너무 신기하였다. 텔레비죤에서나 보아오던 운동을 직접 현장에서 관람하는 기분은 정말 기묘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는 동해바다가의 《열린 바다카페》로 옮겨 동동주를 마시면서 스토리를 이어갔다. 나는 리주동선생의 기동령활하고 진정어린 마음에 감탄했고 한곳이라도 더 보여주려는 그의 열정과 성의에 감동을 먹었다. 그리고 출렁이는 동해바다를 감상하면서 동해바다와 갯벌을 삶의 터전으로 오늘과 같은 세계적인 행사가 이어지는 도시로 건설한 속초인들의 신근한 노력과 지혜에는 감탄을 금할수 없었다.   리주동선생의 안내로 한국에서 관광지로 유명한 설악산을 바라보면서 설악산산맥에 자리잡은 화엄사를 돌아보고 저녁 모듬자리로 옮겼다.   우리 일행이 도착하니 속초지구 문인들이 미리 준비하고 우리들을 반겨 맞아주었다. 우리는 동족애가 짙은 분위기속에서 우의와 문화교육교류를 위하여 술잔을 높이 들었다. 저녁어둠이 서서히 짙어가고 청초호공원 6층노래홀은 환락의 노래소리로 들끓었다. 나는 속초시 소설가, 시인, 작가분들의 정성과 열정에 또 한번 감동으로 가슴이 울컥하였다.    다음은 청초호공원 엑스포광장으로 옮겨 김태원탬버 속초공연 마지막부분을 감상하는것이였다. KBS방송국 《위대한 탄생》에서 중국 연변적 백청강을 지도하여 1등으로 탄생시킨 김태원가수가 한창 열정적으로 기타연주를 하고 몇천명의 속초관중들이 잔잔히 내리는 비속에서 전체 기립하여 열광하는 모습은 말그대로 장관이였다. 나는 무대우의 김태원을 바라보면서 조용히 감사의 인사를 올리였다.   우리일행은 이튿날 려행을 위하여 급급히 대회장을 빠져나와 리주동선생의 댁으로 이동하였다.   이튿날 늦은 아침 삼척여자고등학교 박문구교사와 합류하고 대구해물탕으로 해정삼아 아침식사를 하고 커피점으로 옮겨 안동지구 려행을 론하였다.   가석하게 나와 서선생의 귀국일정때문에 우리 두사람은 안동려행을 가지 못하고 박문구교사의 안배를 따르기로 하였다. 그리고 하루동안 우리들에게 물심량면으로 도움을 주고 편리를 도모해주신 리주동선생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다음지점으로 이동하였다.   박문구교사는 우리일행을 강릉시 《강릉오죽헌시립박물관》으로 안내하였다. 그날따라 강릉의 하늘은 맑고 날씨는 너무 무더웠다. 《강릉오죽헌시립박물관》에 도착하니 차량과 관람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일행은 입장권을 구매하고 박문구교사의 안내하에 율곡기념관, 오죽헌, 문성사, 어제각, 바깥채 등 곳을 돌아보면서 기념촬영을 하였다. 박문구교사는 사임당을 《겨레의 어머니》라고 칭하는 원인을 구수하게 들려주었다. 정몽주 어머니 리씨. 세종대왕의 어머니 민씨, 퇴계 리황의 어머니 박씨, 리순신장군의 어머니 변씨 등 우리 력사속에는 훌륭하고 자랑스러운 분들이 수없이 많지만 그들은 어느 한분야에서 뛰여났지만 사임당은 지극한 효녀요, 어진 안해요, 7남매의 훌륭한 어머니인데다가 학문이 깊고 시문에 뛰여난 녀류문인으로서 글씨와 그림, 바느질과 자수에 이르기까지 정묘하지 않은 분야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의 아들 율곡에 대하여서도 들여주었다. 16세기 정치, 문학, 교육가이면서 조선 성리학을 꽃피운 대학자 율곡 이이(1536---1584)가 1972년에 오천원권 화페 인물이 됐다면 그로부터 37년이 지난 2009년 어머니 사임당까지 오만원권 화페인물이 되였다. 이로써 세계최초 모자가 함께 화페에 들어가는 유일한 국가가 되였다고 자랑하였다. 확실히 《겨레의 어머니》, 《겨레의 스승이 태여난 성지》 라 높이 찬송함에 손색이 없음을 절감하게 되였다.   우리는 박문구교사가 살고있는 삼척시에서 점심을 먹고 관동팔경의 제일루인 죽서루로 이동하였다. 관동팔경의 제일루라고 하니 문득 고중학생들에게 관동별곡을 강의하던 기억이 살아나면서 무척 흥미를 가지고 재료를 펼쳐들었다.   재료에는 삼척 죽서루 유래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현재 삼척시 성내동 오십천 절벽위에 위치한 보물 제213호인 죽서루는 루각이다. 조선시대에 일종의 관아시설로 활용된 루각이였고 삼척부의 객사였던 진주관의 부속건물이였다. 지방에 파견된 중앙관리들이 묵던 숙소로서 공공시설이면서 접대와 향연을 위한 장소로 활용되여 삼척을 찾아오는 시인 묵객들이 정신수양을 위한 휴식공간으로 사용되였다고 전하고있다. 우리일행은 죽서루, 용문바위성철유적, 삼척읍성지표식, 허목의 죽서루루기를 읽어내려갔고 송강 정철가사의 터표석을 돌아보면서 깊은 감회를 느껴보기도 하였다.   송강 정철가사의 터표석 정면에는 커다랗게 송강 정철의 가사의 터라고 새겨져있고 해설문이 있었다. 한국문화관광부에서는 1991년 2월을 송강 정철의 달로 정하고 가사문학에 커다란 업적을 남긴 송강 정철을 기념하는 표석을 2개소에 세웠다. 하나는 《관동별곡》에 나오는 관동8경의 하나인 삼척 죽서루 경내이고 다른 하나는 《성산별곡》의 무대인 전남 담양의 식영정부근이다. 삼척과 담양에 세워진 《송강 가사의 터》 표석은 종전의 일반적인 시비와는 달리 팔각형의 장대 표석과 8각형의 기단으로 이루어 졌는데 기단 8각의 각면마다 송강의 대표작과 친필, 수결, 세움말, 가사창작의 배경을 담아 송강의 생애와 문학에 관한 미니박물관 구실을 하도록 되여있다고 밝히고있다. 우리일행은 우리말의 정수이며 가사창작의 대가이신 송강정철에 대한 경모의 정을 표하면서 삼척해변가로 이동하였다.   삼척해변가는 여름철 휴가를 즐기는 유람객들로 북적거렸고 동해바다의 맑은 물에 몸과 마음을 적시면서 스트레스 해소로 즐기였다. 우리일행도 그들속에 끼여들어 무거운 마음을 털어버리고 피곤한 몸에 충전하면서 맑고 깨끗한 공기로 몸과 마음을 흠뻑 적시였다. 박문구교사는 자신이 근무하고있는 삼척여자고등학교로 마지막코스를 정하였다. 삼척여자고등학교 정문에 들어서니 참으로 환경이 깨끗하고 정갈하였다. 박문구교사는 약간 흥분된 기분으로 우리일행에게 고3교실, 교무실, 학생숙소, 학교체육관 등에 대하여 일일히 설명하면서 교사의 긍지감을 숨기지 않았다.   각일각 헤여질 시각이 다가오고있었다. 아쉽지만 별수 없었다. 《말타고 꽃구경》식으로 1박 2일을 꽉 챙겨가면서 관광과 배움의 즐거움을 만끽하였다. 그 와중에도 박문구교사는 느긋하게 삼척시뻐스고속터널부근의 단골음식점으로 안내하였다. 한잔의 막걸리로 리별의 아쉬움을 달래면서 중한문화교육의 교류를 기원하였다.   나는 진정으로 우리 일행의 강원도 속초, 삼척, 강릉시 관광에 사심없는 배려와 도움을 주신 속초지구 문인들과 리주동선생 그리고 박문구교사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싶다. 기회가 되면 중국에서 만나 다시 회포를 나눌수 있기를 희망한다.                                                                                                                                                                           김정섭특약기자
4    천년고도 경주로 가다 댓글:  조회:3028  추천:11  2011-08-11
                                                                                    천년고도 경주를 가다   세계58개 국가 한글학교 교사 초청연수활동 제2단계 마지막코스는1박2일로 일정이 잡혀진 경주지역 력사문화체험이였다.   대형전용뻐스5대에 갈라앉은 우리 일행233명은8월7일 아침8시에 한양대학교 창의인재관을 떠나 경주지역 력사문화체험을 떠나게 되였다. 중국에서 온 조선어문 교사31명은 제2팀으로 구성되여 가이드 최희덕의 인솔을 받게 되였다. 모두들 간단한 세면도구를 준비하여 가지고 제2호차에 승차하여 자리를 잡고 안전벨트를 착용하고 들뜬 기분으로 출발을 기다리였다. 한양대학교 봉사팀의3명 학생과 촬영팀의2명 학생이 승차하여 간식으로 매개 교사들에게 샘물과 바나나, 과자와 사탕이 들어있는 비닐주머니를 나누어 주고 인원을 점검한 다음 정식 출발하였다.    우리를 실은 고속전용뻐스는 서서히 한양대학교 정문을 차례로 천천히 빠져나가고있었다. 최희덕씨는 한때 금강산가이드팀에서 봉사한적 있는 자신의 경력을 소개하고 중국 조선어문 교사들과 함께 경주행을 하게 되여 무척 기쁘고 즐겁다고 하면서 려행시 주의사항에 대해 상세하게 소개하였다.   고속전용뻐스는50호 영등고속국도를 달리다가 안산시, 수원시를 경유하여 다시1호 경부고속국도에 들어서 천안, 청원, 대전, 옥천, 김천, 구미, 대구를 경유하여 드디여 경주에 도착하였다. 경주까지 달리는4시간동안의 로정에서 중국 조선어문 교사들과 한양대학교 봉사팀 학생들, 재외동포재단 이영선과장과 기사까지 합세하여 환락과 즐거운 노래자랑이 이어졌는데 노래와 춤을 좋아하는 우리민족의 특성이 돋보였다. 차창밖으로 스쳐지나는 수려한 산천과 생태환경문화는 우리들을 놀라게 하였고 편리한 교통시설은 말그대로 감동이였다.   경주에서 유명한 신라쌈밥음식점에서 중식을 치루고 대릉원일대에서 신라시대로 돌아가는 기분을 느껴보는 시간이 주어졌다. 제한된 시간이지만 우리들은 천마총, 첨성대, 계림, 안압지 등 여러곳을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서 스탬프를 들고 보고 듣고 느끼면서 스탬프투어의 시간동안 기념촬영을 하면서 즐기였다.   3시30분이 되여 다시 용담정으로 이동하였다. 가이드의 소개에 따르면 용담정은 경주시내에서 북동쪽으로 략10km 떨어진 현곡면 가정리에 해발594메터인 구미산에 있으며 천년고도 경주의 정기를 받아안아 후천다시개벽의 대성 수운 최재우대신사의 탄생을 예고한 곳이며 천도 동학을 계승받은 천도교의 발상지라 한다. 그러면서 용담정의 유래를 들여주었다. 한양대학교 문학박사 윤석산박사는 인내천 경주 용담 재외 한글학교 교사를 위한 특별강좌를 가지고 용담, 수운선생, 동학에 대하여 들려주었다. 천도교에 대하여 별로 흥취가 무딘 필자는 조용히 용담정 정자를 찾아보고 샘물터에서 샘물을 마시면서 기념촬영을 한 다음 하산하여 잠간 휴식을 취하였다.   5시30분, 전 팀은 다시 경주에 돌아와 코오롱호텔에 주숙을 정하였다. 저녁만찬후 잠이 오지 않아 일행중 남성교사6명이 나의 침실에 모였다. 우리는 다시 우리식으로 맥주를 마시면서 하루동안 보고 들었거나 느낀 바를 나누다가 한밤중이 되여서야 헤여졌다.   이튿날 새벽에 기상하여 밖을 내다보니 비가 억수로 쏟아지고있었다. 꽉 짜여진 그날 일정이 근심스러웠다. 그런대로 아침을 먹고 체크아웃한 다음 전용뻐스에 피곤한 몸들을 실었다. 잠시후 주최측에서 매개 팀원들에게 일회용 비옷을 나우어 주고 일정대로 첫 코스인 석굴암을 향해 움직이였다. 전용뻐스는 힘겹게 안개에 휩싸인 석굴암의 굽이굽이를 톺아올랐다. 다행히 정차장에 이르니 비는 멎었으나 안개가 자오록하여 앞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운무속을 헤집으며 가이드의 뒤를 따라 석굴암의 구석구석을 누비였다. 석굴암은 자랑스럽게도 유네스코에 등록된 문화재였다.   한국의 날씨는 정말 변화무쌍하였다. 맑았다가 흐리고 비오다가 끊고 안개가 자오록하다가도 거짓말처럼 불시에 개이는데 종잡기 어려웠다. 우리들의 호기심은 날씨의 변화와는 상관없이 변함이 없었다. 석굴암로정의 비와 안개속을 누비다가 불국사로 이동하니 비는 그치고 날씨는 완전히 맑아졌다.   재료에 의하면 경주불국사는 신라 경덕왕10년(751)에 재상 김대성이 발원하여 개창되고 혜공왕10년(774)에 완성되였다. 조선 선조26년(1593) 임진왜란때 의병의 주둔지로 리용된 탓에 일본군에 의해 건물이 모두 불타버렸다.    그후 대웅전 등 일부를 다시 세우고1969년부터1973년까지 처음 건립 당시의 건물터를 발굴조사하고 대대적으로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였단다. 동서길이90여메터 되는 석축과 청운교, 백운교, 위에 자하문, 대웅전, 무설전이 남북으로 놓였고 석가탑, 다보탑이 서있다. 그 서쪽에 연화교, 칠보교, 안양문과 여래좌상 금동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이 있다. 무설전 뒤편에는 금동비로자나불 좌상을 모신 비로전과 관음전이 있다.   불국사는 화려하고 장엄한 부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워 찬미하던 수도자들의 불도를 닦던 곳이다. 풍부한 상상력과 예술적인 기량이 어우러진 신라 불교미술의 정수로1995년 석굴암과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되였다고 전해지고있다. 우리 일행은 숭엄한 마음으로 불국사를 돌아보면서 짧은 순간이나마 신라1000년의 시대를 이끌어간 원동력을 절실히 감안하면서 다음 코스로 이동하였다.   우리는 경주에서 유명한 순두부음식점에서 중식을 먹고1박2일 마지막 코스인 양동마을로 이동하였다.   최희덕 가이드는 양동마을은 500여년의 력사와 생생한 삶이 공존하는 력사마을로서 전 세계적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력사마을중에서도 손꼽는 마을이란다. 양동마을은 단순한 문화재나 민속관광지가 아니라 국제적인 권위를 가진 살아있는 정주유산이라 양동의 모든것은 귀중한 유산이란다. 그러면서 사람이 실제 살고있기에 주민사생활 보호하기, 정중한 옷차림하기, 쓰레기 줍기, 소음줄이기 등4개 면에서 주의를 돌리기 바랐다.   필자는 집체로 움직이는데 따라가지 않고 략도를 보면서 몇곳을 돌아보았다. 그중에서도 처음으로 500년을 그대로 담았다는 3칸 초가 정순이 가옥을 돌아보고 500년 마을지기 노거수를 돌아보면서 양동의 생명같은 특별한 존재를 감지하였다. 현재 양동에는150여그루의 노거수들이 자신의 내력과 풍경을 자랑하고 있다. 은행나무, 느티나무, 배롱나무, 감나무, 오동나무 등 몇가지 나무들을 직접 확인하면서 양동의 다양한 노거수들은 다양한 품격과 상징성을 보여주고 위풍당당함을 절실하게 느꼈다.   경주지역 1박2일 력사문화체험은 너무나도 감동적이였고 감미로웠다. 그도 그럴것이 한국의 전통과 문화유산 지킴이 돋보였고 그 개발의 령활성이 너무나도 선진적이였다. 경주의 곳곳은 문화유산이고 경물이라는 말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선조들의 고귀한 정신을 마음껏 누리기에는 시간이 많이 부족하였지만 그래도 재외동포재단과 한양대학교에서 우리 연수단에 돌려준 지극하고 따뜻한 배려는 영원히 우리들의 마음속에 오래오래 남아있을것이다.    한국 화성시 창곡리에서 2011년8월11일 오전   
3    리욱시비를 찾아서 댓글:  조회:1757  추천:63  2011-05-02
리욱시비를 찾아서   올해 여름방학에는 유람삼아 연변의 몇개 현시 관광명소들을 돌아볼 타산이였다.   얼마전에 도문의 일광산 화엄사, 도문강공원의 정몽호문학비, 량수진의 온성단교를 돌아보고 집에서 휴식하는데 장춘사범대학을 다니는 련옥학생으로부터 두만강문학답사에 동행해줄것을 요청해왔다. 련옥학생은 고중시절부터 글짓기에 남다른 흥취를 가지고 열심히 글을 써왔고 여러차례 상을 받은 문학지망생이였다. 나는 흔쾌히 제자의 요청을 수락하고 어디로 갈것인가를 생각던 끝에 오래전부터 한번 찾아보고 싶었던 중국조선족 시문학의 선구자의 한분인 리욱선생님의 시비가 모셔져 있다는 화룡시 로과촌 호곡령을 찾아 문화산책을 하기로 하고 다음날 떠나기로 약속했다. 다음날(7월17일) 한 아빠트단지에 있는 후배 김선생과 함께 약속한 지점에 도착하여 정각 8시에 우리 일행 3명을 싫은 택시는 화룡시 로과촌 리욱시비를 찾아 떠났다. 룡정과 화룡구간을 40십여분정도 달리면서 차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농촌마을들은 그처럼 정다웠다. 화룡에서 우심산을 지나 소골령밑에 이르면 도로는 두갈래로 갈라지는데 좌측도로는 남평방향이고 우측도로는 숭선방향이였다. 택시는 우측 숭선방향 소골령 굽이굽이를 힘겹게 오르기 시작하였다. 소골령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우리들은 창밖으로 바라보이는 신기한 풍경에 취해버렸다. 공기가 맑고 신선할뿐만아니라 울울창창 나무숲이 우거지고 우불구불 아슬아슬하게 한굽이 한굽이를 톺아 오르는데 마치 자연의 원시림을 달리는 상쾌하고 긴장되고 이상한 기분이였다. 문뜩 머리속에 옛시구가 떠오르면서 입속으로 읊어보았다. 《산이 첩첩하고 물이 겹겹하여 길이 없나했더니 굽이를 돌아서니 새 마을이 나타나네.》 과연 선인들이 과찬하던 명시구였다. 가까스로 소골령을 내려서면서 눈앞이 확 트이고 두만강이 가로 막아서고 조선의 산천경개가 한 눈에 안겨왔다. 두만강기슭에 자리잡은 로과촌에 도착한것이다. 그런데 차는 변방부대훈련기지라고 간판이 보이는 건물앞에서 멈추어서야 했다. 한창 도로건설중이라 사처에 흙을 파헤쳤놓았고 차량들이 앞을 막고 있어 건어갈수 없었다. 그참에 슬적 차에서 내려 길옆집에 찾아 들어가서 공손히 인사를 드리고 리욱시비를 찾아가자면 어떻게 가야하는가고 물었더니 집주인은 아주 따뜻하게 대해주면서 상세하게 알려주는것이였다. 남평방향으로 6리쯤 가면 령이 있는데 그 령에서 오른쪽 오솔길로 50-60메터쯤 올라가면 있다는것이다. 너무 감사했다. 길옆집에서 돌아서 나오니 길이 열리였다. 그곳을 재빨리 빠져나와 남평방향으로 달리였다. 울퉁불퉁하고 산처럼 파헤친 흙무지를 에돌아가면서 천천히 가파롭고 위험한 산고개를 향해 달렸다. 도로건설로동자들의 곳곳에 표시해놓은 안내패쪽에 따라 산마루에 도착하니 차는 더는 나갈수 없었다. 차에서 내려 오른쪽을 보니 과연 오솔길이 있었다. 무더운 여름날씨에 땀을 흘리면서 나무숲이 우거진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니 리욱시비가 눈앞에 나타났다. 시비로 올라가는 층계는 풀이 많이 자랐고 참나무가지가 우거져 층계를 가리고 있어 멀리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드디여 리욱시비를 마주하고 묵묵히 인사를 드리면서 시비를 살펴보니 보수가 잘 되지 않아 시비곳곳에 금이가고 기초부분의 벽체가 떨어져있어 마음한구석은 어쩐지 아쉽고 섭섭하였다. 우리는 파손된 콩크리트쪼각들을 바로잡아놓고 시비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기였다. 리욱시비는 1988년 9월 5일에 정부와 문화지성인들에 의하여 세워졌고 시비정면에 리욱선생님의 시 《할아버지의 마음》 전문을 새겨넣었다. 우리들은 함께 시비에 새겨진 시를 읊어 내려갔다. 할아버지의 마음에 담긴 깊은 뜻을 음미하면서 자리를 찾아 앉아 땀을 들이면서 조선무산시의 전경을 굽어보고 있는데 련옥학생이 선생의 생애와 문학활동을 알고싶다고 물어왔다. 그래서 얼마전에 찾아본 재료를 더듬으면서 강의를 하게 되였다. 리욱(1907.7.25.-1984.2.6) 저명한 조선족시인, 로씨야 연해주 신한촌에서 출생. 1910년 봄 화룡현 로과향 강장동에 이주. 1923년에 룡정 동흥중학교에 입학. 1924년에 《생명의 례물》, 《봄비》를 각기 《간도일보》와 《조선문단》에 발표하여 시적재능을 과시하였다. 30년대말부터 1945년 《8.15》광복까지의 민족문화사의 암흑기에 《척촉화》, 《바위》, 《금붕어》, 《석양》, 《봄꿈》, 《혈흔에 핀 꽃》, 《나의 노래》, 《락엽》, 《5월》, 《별》, 《모아산》 등 대표적인 작품을 발표하였는데 이런 시작들은 모두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으로 빚어진 참담한 현실을 고발하면서 그 험난한 환경에서도 민족의 얼을 간직하고 자유로운 미래에로 나아가려는 민족에 대한 충정과 념원과 신념을 노래한 작품들이였다. 본문 저자와 련옥학생 이렇게 질서없이 시인에 대한 소개를 마무리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련옥학생과 김선생은 이번 걸음에 한차례 문학공부를 하게 되여 기쁘고 조선족 시문학의 개척자이신 리욱선생을 알게 되여 많은것을 배웠다고 거듭 치하, 그러면서도 보수가 잘 되지 않아 볼품없이 된 시비에 대해서는 아쉽고 섭섭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거기에 후배로서 이렇게 늦게 찾아온 부끄러운 마음이 내내 우리의 발목을 잡아 죄스러운 생각까지 갈마들어 귀로에 오르는 우리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였다. 보기에도 민망스러운 리욱시비 우리의 심정은 착잡하기만 하였다.
2    알송정의 푸른넋 댓글:  조회:2007  추천:70  2011-04-25
내고향 명물;                                     일송정 푸른넋   룡정시 비암산 북쪽 산봉우리 정상에는 정자모양의 한그루의 소나무가 자라고있다. 그 소나무가 선구자의 이미지로 우리 마음속에 깊게 부각되여있는 일송정소나무이다. 소나무의 모양은 아주 신기하다. 비암산 절벽우에 있는 너럭바위에 억척스레 뿌리박고 모진 가물과 매서운 설한풍을 용케도 이겨가면서 그 넓은 세전벌과 평강벌을 흘러가는 해란강의 푸른 물줄기를 굽어살피며 우뚝 서있는 소나무의 그 름름한 모습은 마치도 나라 잃은 우리 선조들이 고향을 등지고 남부녀대하여 두만강을 건너 이 땅에 와서 뿌리내리고 열심히 살아가는 선구자의 형상인듯 하다.   1919년 일어났던 반일운동을 시작으로 룡정에서는 항일의 불길이 갈수록 세차게 타올랐다. 이 꺼질줄 모르는 항일투쟁의 근원이 비암산 일송정에 있다는 풍수쟁이의 말을 믿고 일본놈들은 갖은 방법으로 이 소나무를 죽어벼렸으니 그때가 바로 1938년이라고 민간에서는 전해오고있다.   중국대지에 개혁개방의 봄바람이 세차게 불어오자 룡정사람들은 비암산 일송정 소나무를 다시 심어야 할 필요성을 심심히 느끼고 1991년3월12일에 비암산 일송정소나무를 다시 심고 전에 없던 6각형정자도 새로 건설하여 그해 9월3일에 준공하였다.   비암산 일송정 푸른 소나무는 오늘도 민족의 얼을 안고 선구자의 름름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1    일광산을 찾아서 댓글:  조회:1630  추천:46  2010-12-24
[서울=동북아신문] 얼마전에 대학입시를 끝마치고 학생들과 함께 장춘, 북경 등지의 직업교육에 대한 문화려행과 고찰을 다녀온후 홀가분한 마음으로 휴식을 취하고 있던 7월 4일 도문에 있는 동서의 전화를 받고 우리 부부는 도문으로 가게 되었고, 우연한 기회에 일광산 화엄사로 찾아가기로 약속하고 재료를 찾아보게 되었다. 도문시는 산과 물을 끼고 있는 경치도 좋고 교통도 편리한 변경통상구도시로서 자고로 《도문강반 첫도시》라는 미칭을 갖고 있으며 도문시 구역면적은 1142.3평방킬로메터, 인구는 12.99만명, 그중 조선족이 7.02만명으로 전체 인구의 54.04%를 점한다고 한다. 뿐만아니라 도문시에는 매우 풍부한 관광자원이 있다. 독특한 매력을 갖춘 두만강공원, 웅위롭고 장엄한 국문, 경치가 수려한 일광산, 불교성지 화엄사, 민족풍정이 다분한 월청조선족 《농가락》, 풍경이 아름다운 《룡가미원》과 전원생활을 체험할수 있는 량수유가농업관광원 등 관광구와 관광명소가 있다. 그밖에 동하국 도읍-성자산장, 발해국시기의 24개 돌 등 많은 문화재와 력사유적이 있다. 하지만 우리부부는 일광산화엄사에 호기심이 동했고 한번 가보기로 작심하였다. 이틀날 오전 9시경에 도문시에서 5키로메터 상거해있는 일광산 화엄사를 찾아 떴났다. 일광산 화엄사는 한창 건설중이였고 간밤에 내린 비로 인해 진흙길은 물이 고여있고 미끄러웠다. 조심조심 마른땅을 골라 걸으면서 화엄사의 첫 관문인 산문에 이르렀다. 산문앞에서 굽어보니 도문시의 전경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남양시의 아름다운 경치가 매력적으로 눈앞에 안겨들면서 저도몰래 무한한 격정이 감돌아쳤다. 앞을 바라보니 화엄사주위는 푸른 수림이 우거지고 무성하며 삼면에 기암괴석이 우중충한 산을 등지고 물을 끼고 있어 가관이였는데 마치 하나의 조각예술작품을 감상하는 느낌이 새삼스러웠다. 화엄사의 전반 건축은 중국과 조선의 고대건축예술을 융합하여 독특한 풍격을 갖추었는데 동북에서 제일 큰 사찰중의 하나이고 국내에서 유일하게 조선풍격과 당나라풍격을 모방한 사찰이라고 한다. 화엄사가 중생들로 하여금 선량한 심지와 복스러운 덕을 키우게 하고 곤혹을 풀고 도리를 깨우치며 고난을 멀리하고 락을 보게 하며 나아가서 성불하는 보기드문 훌륭한 인연이라니 더욱 매력적이고 감동의 마음을 감출수 없었다. 와중에 우리 부부는 일광산 화엄사의 첫 문인 산문을 지나 천왕전에 이르렀고 천왕전 돌기둥과 벽면에 교묘하게 조화롭게 조각된 룡과 학을 감상하면서 드디여 대웅전 전당에 들어섰다. 대웅전 정면에 웅장하고 위엄스러운 5개의 불상이 정중히 모셔져 있었다. 그리고 전당에는 공작일군인듯한 5-6명 녀성들이 오갔고 그중에 한명의 조선족 아가씨가 다가오면서 반갑게 맞아주면서 어찌나 살갑고 정답게 헌금으로부터 소망을 기탁하며 기도를 드리는 방법까지 해설해주는지 선뜻이 단돈 5원을 험금하고 정성껏 기도를 드리였다. 돈 10원을 더 내고 건축에 사용하는 기와장에 소망을 서명하고 기념으로 남기기도 하면서 신비스러운 마음으로 대웅전 이모저모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우리부부의 눈길은 고집스레 불상좌측에 모셔진 서월선사의 안내글에 쏠리게 되였고 처음부터 자세하게 훑어보게 되였다. 1912년 조선의 대덕고승 수월선사는 두만강을 건너 일광산에 터를 잡고 《수월정사》를 지었다. 정사에서 들려오는 경읽는 소리와 청정한 범어는 그 당시 주변의 중생들에게 길상과 복을 가져다 주었다고 한다. 수월선사는 일광산과 그 주변지역에 불법의 도리를 고양하여 중생을 구제하며 선행과 희사를 즐겨 병을 봐주고 죽는 삶을 구하고 부상입은 사람을 치료하며 리재민을 구제하고 가난한 사람을 구해줌으로써 부근 백성들의 마음을 덥혀준데서 성승으로 불리웠다. 그 당시 일본중들도 일광산의 풍경을 매우 선호하여 사찰을 지었고 일광산이라 이름하였는데 지난세기 3,40년대에 일광산에는 여러개의 사찰이 있었고 출가한 중과 집에서 수련하는 사람들도 아주 많았다고 한다. 일광산 화엄사에는 많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아주 먼 옛날부터 태고의 신비한 거룡 한마리가 장백산으로부터 동쪽으로 날아가는 도중에 수려한 두만강에 매혹되여 몸놀림을 멈추고 은빛으로 반짝이는 두만강을 넋없이 바라보다가 웅장하고 우미하며 상서로운 기운이 감도는 불교성지 일광산으로 변했다고 하는가하면 근대조선시대의 리성계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활을 쏘아 가파로운 절벽을 만들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그외에도 많은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는 불손산, 사자봉, 범바위, 와불 등 모습은 너무나도 신비하고 우미하여 려행객들의 눈길을 모으고 있었다. 우리는 일광산 화엄사 중심선 건축물을 돌아보면서 하냥 즐거웠고 리평림거사가 정부와 종교부문의 대폭적인 지지하에서 가산을 팔아 파란곡절을 겪으면서 화엄사를 재건한데 감탄을 금할길 없었다. [저작권자(c) 동북아신문(www.dbanews.com), 무단복제-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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