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동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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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잡담29] 나도 도템시에 한마디 댓글:  조회:3481  추천:102  2008-03-20
잡담29  나도 <도템시>에 한마디       ----김관웅교수님의 <일언 님에게 답함>을 읽고  1 도템시 개념존재의 합리성에 대하여       남영전시인의 <도템시>에 다루어지는 시적대상이 도템의 범주를 초월한듯한 자연물(현상)이 존재한다 .(례를 들면 시 <물> )  도템이란 원시씨족 또는 원시부족들이 동물이라든가 자연물을 씨족과 부족의 혈연과 관련시키고  구체적인 동물과 자연물을 씨족 또는 부족의 표식물로 간주하고 숭배하는 미신을 일컫는다면 남영전시인의 <도템시>가 분명 도템만을 다룬것이 아니므로 <도템시>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나는 남영전시인의 <도템시>를 대하면서 우선 도템시가 <시>임을 전제로 한다. 때문에 시인이 자아명명한 <도템시> 개념이 과학적인가 합리한가보다도  <도템시>의 詩意가 어떠한가에 관심을 두고싶다. <도템시>라는 개념은 필경은 학술적인 개념이 아니고 詩적이고 개인적이고 随意적인 개념이므로. <도템시>라 해도 좋고 <도템문화시>라 해도 좋다.  어떻게 명명한다 하여도, 또  명명하는 목적과도 전혀 련관이 없이 남영전시인의 <도템시>는 종국에는 詩作으로 될뿐이다. 따라서 오늘날 <도템시>에 도템이 아닌 자연물이 다루어졌기에  < 도템시>라는 개념이 론쟁을 만들고는 있지만,  <도템시> 개념은 學理와 거리를 둔 詩理상에서의 성립과 존재의 합리성을 보여준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작품을 대함에 있어서 학리적인 연구도 있어야 하지만 문학창작의 창조적本性인 文理와 藝理에 대한 수긍도 문학연구의 출발점이 아닐가는 생각을 해본다.(산천선생님의 <도템시>평론에도 비슷한 견해가 있음) 魔幻주의, 표현주의, 상징주의, 인상주의, 초현실주의 등등의 문학사조 개념을 두고 볼때에도 그 명명이 과학적인 학리적인 명명이 아닌 흔적이 보인다. 그 원인은 문학예술창작의 내재본질과 관련이 되며 또 번역과정(서방어로부터 중국어로의 전환)에서의 표현습관과 표현력과도 관련이 된다고 생각된다. 남영전시인의 <도템시>도 마찬가지이다. 과학적이고 학리적인 명명은 아니지만 문리적으로 藝理적으로 시리적으로는 합리성을 보이는 개념이고 또 중국어로부터 조선어로의 語境의 전환에서도 장애를 받은 개념이라고 생각된다.   2 조선족도템과 시집 <원융>     조선민족의 도템을 해명하려면 시간상에서는 조선민족이 통일민족(나라통일이 아님)으로 완전형성된 시기로부터 그 형성과정을 거슬러올라야한다. 조선민족이 통일민족으로의 완전형성시대가 삼국시대라는 조선시대라는 또는 다른 설이 있기도 하겠지만 그런 설들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이 우리 조선민족도 다른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씨족과 부족들이 부단히 융합된 산물이 아닐수가 없다. 한다면 조선족을 구성해온 여러 씨족들과 부족들의 도템들을 조선족도템의 구성부분에 속한다고도 인정할수 있다.            또 살펴보면 어느 나라도 민족도 통일형성과정에 여러가지 도템에 대한 보존과 舍弃를 과정을 지니게 되여있다. 다시 말하면 민족응집력을 만들고 민족내의 모순을 완화시키는 수단으로서 민족내 어느 강대부족의 도템을 인위적수단으로(행정 문화 등) 전민족도템으로 모셨다던가  혹은  민족내 어느 부족과도 련관이 없는 새로운 도템을 구상해서 전민족적인 도템으로 만듬은 력사진전중에 사용되는 상투수단이다. 중국의 도템史도   바로 수많은 도템들이 龍도템으로 통일되는 과정이라고 보여진다. 단군신화도 통일민족완성이라는 리념을 앞두었다는 흔적이 보인다고 나는 억측해본다.   문헌자료결핍과 도템연구부족 등 원인으로 말미암아 어느 민족과도 마찬가지로 우리도 조선족도템에 대한 진실한(고증을 거친) 결론을 내리기는 아주 어렵다.  인류에게 있어서 先史시대란 지금도 謎의 존재이고 도템이란 몽롱한 불확정적인 과거이다. 이런 조건하에서 남영전의 <도템시>를 조선족도템을 다룬 시가 아니다 론함은 남영전시인이 자신의 <도템시>에 다루어진 <도템>들이 조선족도템들이라고 언설함과 마찬가지로 모두가 불확실한 一言일뿐이다. 남영전시인의 <도템시>로 편성된 시집 <원융>은 시적대상의 단조로움과 詩意의 편애성으로 손상을 받았다는 평의(羅侃平 평)를 지닌 시집이다. 만일 남영전시인더러 확정된 조선족도템만 시적대상으로 하라 한다면 (물론 그런 요구는 읽어보지 못했다)  불정당한 요구일것이며 시인의 창작자유와 창작활보를 제한한다는 의심을 받을 언행일지도 모른다. 남영전시인이 조선족을 <두번> 대표한 시인이라 할지라도 필경은 <원융>은 시인 개인의 시집이고 그 다음에야 조선족시인의 시집임을 알아야한다. 3  민족정체성과 <도템시> 민족정체성에 대한 론의가 계속되고 있다.  혈연을 크게 여기는 유학의식이 <뿌리캐기>에 열중하는 주관원인이라고 한다면 조선반도의 장기적인 분렬상태와 우리와 한국과의 거래급증중에 발생하는 충돌과 위기 그리고 중국조선족이 중국에서의 劣勢에로의 전환 등등이 사회객관원인으로 보여진다. 감정적으로는 조선반도인들이 반겨주든 싫어하든 우리는 조선반도와 혈연을 끊어버리는게 싫다 . 또 그들과 對等하게 지내고 싶다.  그리고 세계 어디 있는 배달의 족속과도 마찬가지이다 . 현실적으로는 우리는 중국에서 버젓하게 살고싶다. 흩어지지 말고 싸우지도 말고 인구감소도 없이 나날이 번창하게 살고싶다. 주관원인과 객관원인의 교차작용으로 하여 또  리상과 현실사이의 격차는 조선족사회더러 민족정체성에 대한 반성을 거듭 진행하게 한다. 언론도 좋고 지성인들도 좋고 민족정체성에 론의를 모음은 민족정체성에 대한 우리의 자각성을 높이는데 훌륭한 작용을 하여 왔다. 헌데 <도템시>와 민족정체성이 어떤 련관존재일가? 나는  42수의 <도템시>가 민족정체성을 혼동하게 한다는 설은 성립불가능이라 생각한다. 민족정체성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물로서, 우리의 인식수준하에서 불투명한 부분도 존재하지만은 누구의 생각이나 작품에 의하여 변하는 사물은 아니다. 민족정체성이란 기나긴 력사의 흐름으로 형성된 <진실된 모습과 본질>이다. 나는 세계 각지에 살고 있는 배달족속들 모두가 우리의 민족정체성에 대하여서 개인적으로 인식수준의 차이를 보일수는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共認의식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혈연적인 문화적인 력사적인 정체성).  또한 주위에 사는 다른 민족들도 우리 배달민족에 대한 정체성을 부인하려는 부인하는 사실은 없는듯하다. 우리의 민족정체성이 자아인지와 타인인지를 받는 객관존재인 사실앞에서  <도템시>가 어떤 시일지라도 또 그 <홍보>가 여차여차 할지라도 배달민족의 정체성에 대해서 추호의 영향을 줄수가 없음은 아주 명백한 일이다. <도템시>의 사회효력에 대한 과대억측은 나로서는 杞人忧天이라 생각된다. 남영전시인의 도템에 대한 연구와 詩作은 조선족정체성의 기나긴 형성과정에 대한  시적인 표현이고  서술이며 그것을 통하여 각 형제민족과 여러 나라의 화목과 공동번영을 기원했다는게 근본특징이다. 김관웅교수의 조선족도템에 대한 주장과 민족정체성에 대한 주장은 조선족공동도템과 민족정체성형성의 종극적인 결과에 착안점을 둔 주장이고 해석이다. 그러므로 두분의 주장은 다만 민족력사과정과 민족력사결과에, 문화진행과정과 문화진행결과에  부동한 착안점을 두었다는 구별점을 지니게 된다.  4  나의 작은 항의  나도 자아비애에 걸린 사람인것 같다. 그래서 현재 나를 포함한 중국조선족들은 여러가지 원인으로  하여 <불쌍한 상>을 보인다 생각된다. 조금은 먹고 입는 흉내는 보이지만 우리에게는 현재가 비상시기가 아닐수가 없다. 이런 비상시기에 조성일회장님 김관웅교수님 남영전시인 등 지성인들이 민족을 위한 몸부림치는 모습이 아주 돋보인다. 특별히 문학계 분들은 이 점을 잘 알리라 믿는다. 비상시기에 쟁론은 불가피적이다. 하지만 쟁론방식의 선택이 중요하다. < 문학동네> 라든가 <조선족발전추진회>는 개인이 운영하는 싸이트이기는 하지만 현재는 거의 공용자원으로 사용되고 있고 , 화합이라는 낱말의 거력을 알고 있는 한 , 나는 누구든지 쟁론을 편격적이고 인격침입적이고 사인적인 면으로 돌리는데 견결한 항의를 표한다. 
79    미국의 외국적군인과 중국의 농민근로자(역고) 댓글:  조회:2567  추천:80  2008-03-15
  미국의 외국적군인과 중국의 농민근로자   等待戈多 미국의 현역군인중에 3만7천명은 외국籍인으로서 그중 3만명이 이라크주둔 복역중이므로 미국정부는 외국적군인을 대포밥으로 사용한다는 혐의를 받을만 하다. 전쟁에서 죽은뒤에 미국적을 획득했다는 중국인 손명이 그 중의 한사람이다.  손명의 죽음을 두고 각자의 평판은 다를수도 있겠지만 누구도 국적을 물론하고 생명의 가치라든가 생활추구라든가 본질은 一同하다. 때문에 이라크에서 전사한 손명과 중국의 수도 북경에서 참사한 농민근로자 왕건민에 대해서 비교법을 적용해보련다.   1 외국적군인과 농민근로자의 존재의 합리성과 合情성   공민의 권익과 의무로부터 보면 병역과 로동은 일치성을 지닌다. 병역은 생존보호이고 로동은 생존건설이다.   손명은 비록 미국永住권을 획득했지만 미국공민은 아니다. 그러므로 선거권은 없다. 중국적 소유자로서 손명은 미국을 위해 전쟁에 나갈 의무가 있는가? 이렇게 생각할 사람도 있겠지만 미국의 영주권소유자로서 손명은 미국병역법에 따르면 미국을 위해 전쟁에 나서야 한다. 워싱톤은 모국은 영국이지만 모국과 자기를 낳아 키워준  미국 사이에 분쟁이 있을 때엔 미국독립의 령도자로 되였다. 1937년, 독일과 일본이 동맹관계였으므로 만일 독일의 립장에서 출발한다면 독일인 拉贝는 남경대학살시에 중국인을 도와주지 말어야 한다. 하지만 중국에서 10여년간 생활한 그는 무엇인가 중국인을 도와야하겠다는 생각에서 독일 국기를 내거는 수단으로 중국난민들에게 안전구역을 하나 제공하였다. 이런 사실로부터 출발하면 중국적을 지닌 손명이 미군에 입대함도 합리하고 合情한 일이라 생각된다.    왕건민이나 북경인이나 모두가 중국공민이지만 왕건민은 농촌호적이고 북경인은 도시호적이다. 왕건민이 북경인보다 더 소유한것한 촌장선거권이다.하지만 대다수 중국인들이 민주를 증오하듯이 그는 촌장선거권을 포기하고 市長선거권도 주지않는 북경에 가서 막로동에 참가했다. 동일한 나라에서 동일한 도시에서 동일한 중국인으로서 동일한 언어문자를 사용하는 공민이였지만 왕건민은 북경에서 나라법치가 허락하는 부동한 사회대우를(북경동인병원 복도에서 돈이 없어서 각혈하다 참사) 받았다. 왕건민사건의 합리성과 합정성이  어디에 있는지 나는 의문이 된다.      2 손명과 왕건민이 죽지않았다면 어떻게 되였을가?  미국리익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만 미국국적획득이 가능하다. 손명이 전쟁터에서 죽지않고 안전귀가를 했더면 영주권을 공민권으로 바꾸어 완전무결한 미국공민이 될수있었다. 또 5년이라는 병역 뒤에 5만달러의 조학금도 신청할수 있고 그 금액이 많지는 않지만 얼마든지 국립대학을 나올수가 있다. 그러면 그의 생활전경이 그렇게는 암담한것은 아니라는 판단은 된다.      만일 왕건민이 同仁병원(얼마나 사랑스러운 병원이름인가?) 급진부 복도에서 죽지않았다면 , 북경에서 5년간 막로동을 했다면 그 결과는 어떠했을가? 북경시 호적을 딴다는것은 불가능할것이고 자녀를 학교에 보낸다는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소위 五证(家长或监护人暂住证、在京实际住所居住证明、在京务工就业证明、户口所在地出具的在当地无监护条件证明、全家户口簿) 이 없고 择校费라는 경제래원도 보장이 없다. 또 헌법에는 무료의무교육이라고 하지만 앞으로도 왕건민의 자녀는 북경에서 그런 권익을 향유할 가능성이 없다. 5증도 그렇고 월급1200원으로는 왕건민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만일 왕건민이 동인병원에서 처참한 객사를 하지 않았다면 언젠가는 북경시민과 동등한 생존대우를 받기 위하여 북경호적을 신청했을지도 모른다. 헌데 왕건민은 본과대학학력증도 북경房産증도 없어서 , 또 韩寒과 같은 천재도 아니므로 불가능함을 예시해준다. 하지만 왕건민이 꼭 학력과 방산증을 만들어서 북경호적신청을 한다고 하면 적어도 10년은 막로동에 참가해야 하고 또 초중밖에 나오지못한 그는 7년이라는 시간 지불을 해야한다.(왕건민의 월급 1200원이면 7년간의 교육투자와 생활비 10여만원을 만들려면 먹지도 않고 입지도 않는 상황에서 7년간을 막로동해야한다)  북경 아파트가 평균가격이 0.78만원/平方米인데 35平方쯤하는 아파트를 하나 소유하려면 또 20여년의 시간이 요구된다. 상술한 산수문제를 풀이해여 보면 왕건민이 북경시호적을 신청하여 북경시민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는것은 天大笑話로 보여진다 3  손명과 왕건민이 죽은뒤의 비교 어느 나라이든지 나라와 사회를 위해 죽은 군인은 긍정적인 사회지위를 지닌다 .미국은 영주권소유자군인이라 하더라도 전사한 뒤에 훈장을 발급하고 국기를 절반 내리우는 등 대우를 해준다. 일전에 군인 孟祥斌이 见义勇为중에 죽었는데 우리 산동성과 절강성정부는 어떤 대우를 해주었는지 나는 잘 모른다.(국기를 절반 내리운다는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또 어떤 나라이든지 공민이 비정상적인 죽음을 당했다면 공정한 조사와 해결책을 댄다. 허나 내가 알건대로는 재판소에 나와 왕건민의 죽음에 대하여 실말을 하련다는 동인병원의 대문지기 보안인원은 보안회사의 배척과 구금을 받었고 재판소에 증인으로 나선 뒤에는 실업을 당했다. 또 왕건민사건에 대해 어느 관리자가 책임추궁을 받었다는 뉴스도 얻어듣지못했다. 만약 령혼이 있다면 왕건민의 령혼은 하늘나라에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가?    4  운명의 선택     만일 미군과 중국군이 싸운다면 손명은 어떤 선택을 했을가?      2차대전시에 일본계군인 5000명이 제대를 당하고 안치중심에 있다가 미국에 충성한다는 맹세를 하고 다시 전쟁에 나갔다. 그 중에서 일본계군인들로 편입된 100营과 442团은 미군중에서 용맹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이런 실례로부터 보면 손명도 중국이 아닌 미국을 위해서 중국군인과 대결할지도 모른다거나 혹은 제대할지도 모른다는 운명선택이 된다 .  농민근로자 왕건민의 북경에서의 선택은 복잡하고 슬픈 사연이다. 하늘나라에서 천사가 왕건민과 래세에도 또 중국의 농민근로자직업을 선택하라고 권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해보니 나는 울고싶어진다.  
78    [잡담28] 웃으며 지나갈 일일가? 댓글:  조회:3038  추천:76  2008-03-14
 163.com 보도에 의하면 21명의 연예계 정협위원들이 나라통일(대만과 홍콩 그리고 싱가포르를 제외한 해외중화계에서는 현재 漢繁字를 사용함)과 중화문화발전을 위하여 중국소학교에서도 漢繁字를 필수과목으로 해야 한다는 련명제안을 내놓았다 한다. 웃으운 일이다. 혹시 어느 精英인물들의 추종을 받았거나 민간조사연구를 하고 심사숙려적으로 진행된 행위일지도 모르지만은,  정협대표회란 그 누구나 暢談을 할 여건이 주어진 장소 또는 방식이라 할지라도 언어학자들도 아니고 문화학자들도 아닌 연예계인사들이 이런 전문적인 제안을 했다는것은 나더러 실소를 금하지 못하게한다. 漢繁字과를 소학교필수과목으로 하라는 제안은 아무리 목적성이 좋고 리상적이라할지라도  절때 애들의 장난은 아니다. 인구대국으로서 또 행정집권국가로서 중국에서의 어떤 문화시책의 실행도 막대한 본가總量을 지불하게 된다. 그 본가에 대하여 경제적으로는 환산은 가능하겠지만, 새로운 문화시책의 실행이 전국민과 전나라의 문화심리와 문화생태에 가져다주는 終局본가에 대해서는 누구도 예측하기 어렵다. 과학적이고 세밀한 조사연구가 없이는 엄청난 언어문화학자라 하여도 감히 화제로 담지를 못하는 漢繁字사용이라는 전문적인 과제에 대하여 연예인들이 제안을 내놓는다는것은, 중국의 언어학자들을 비롯한 전문문화인들에 대한 목독에 가까운,  세인들을 놀래우는 一擧가  아닐수가 없다.       정협대회란 무슨 잔치집이 아니다. 명예욕을 실천하는 쇼 장소도 아니다. 또 提案성행이란 민주의 표징이고 결과이다 라고 할수도 있겠지만 정협대표로서 민고의 돈을 허비하지 말고 국민들의 시비판단능력을 깔보지 말었으면 좋겠다.
77    빈곤하지만 많은것을 소유하고 있었다에 대하여 (선역) 댓글:  조회:2850  추천:89  2008-03-12
  景凯旋,남경대학교수   신화넷 뉴스에 의하면 전유고슬라비아지역 주민들은 현재 전쟁과 경제침체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주민들은 과거로 돌아가기를 원하여 테토의 묘지에서 자발적으로 추모활동을 진행한다든가 유고슬라비아主題公園을 건립한다든가 테토와 관련되는 여러가지 기념상품이 판매된다든가 등 사건들이 발생하고 있다 한다.어느 현지인의 말을 빈다면 < 테토시데는 빈곤했지만 우리는 많은것을 소유하고 있었다> 는 <懷舊주의문화>가 성행하고 있다 한다. < 이전에 빈곤했지만 우리는 많은것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언론은 처음 듣는 말은 아니다 . 일전에 구쏘련이 무너질 때 러시아에서도 성행하던 회구주의다. 개혁개방이 시작된지 30여년이 된다. 우리도 늘 회구주의에 젖어있는 경우가 있다. 90년대에 혁명가곡이 류행되던 일과 21세기에 들어서서 옛날 <철밥통>과 <큰솥밥>식 생활을 그리면서 <이전에 우리는 빈곤했지만 우리는 실업자도 없었고 간부들 봉급이 서민들보다 적은 경우도 있었다.> 는 언론을 듣게 된다. 러시아든 유고슬라비아지역이든 중국이든 회구주의가 발생하는것은 계획경제로부터 시장경제로의 진입과정에 발생하는 모든 진통을 弱勢군체 홀로 감당하여 무료교육 무료医疗 고정수입 무료주택 등이 소실 된 뒤 주민들의 빈부가 엄청난 격차를 보이기 때문이다.     사회주의권의 개혁은 계획경제의 실패에서 기원된다. 사실 계획경제 시대는 누구를 상대해도 현재보다는 물질적으로 빈곤한 시대임은 틀림이 없다. 그리고 정신세계도 아주 빈곤한 시대이다. 또 의심할바없이 개혁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적지않는 마이너스면도 지니고있다. 례를 들면 개인자유와 사회평등의 균형발전이라든가 개혁성과분배라든가 개인권리의 보장문제라든가가 현재 우리가 직면한 문제이다. 이런 문제들은 절때 개혁의 결과가 아니다. 개혁의 비완벽성에서 기래된 사회과제들이다. 그러므로 다시 옛날로 돌아가는것이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 아니다. 以赛亚・伯林 는 자유를 <사람이 자신의 주인으로 되는 적극자유>와 <다른 사람의 지배를 받지않는 소극자유>로 나누었다.  현재 우리의 출발점은 소극자유임을 잘 알아야한다. 동시에 자유란 물질의 풍부함에 그치는것이 아님을 알아야하고 유고슬라비아 작가 米哈耶罗夫가 말한  <적극적인 불자유 (국과권력의 절대적인 지배하에 심리적으로 자유에 적응성이 없고 심지어 자유를 거절>에 매몰될 위험성을 제거하여야한다. < 빈곤하지만 많은것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회구주의는 기형년대를 리상화시키는 틀린 작법이다. 개혁은 적어도 우리에게 인생선택의 가능성을 제공하고 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76    파금선생의 진말(선역) 댓글:  조회:2734  추천:81  2008-03-11
            파금선생의 진말(선역)              남경대학교수 景凯旋       우리는 로신은 잘 기억하지만 파금은 별로 의론하지 않는다. 파금은 壽者로서 중국인들이 머리태를 남겼던 만청시대에 태여나 인터넷을 비롯한  소위 글로벌시대에 세상과 작별하였다. 그는 만년에 병으로 하여 사회생활과 리탈되여서도 작가협회주석을 지냈다. 그래서 간혹 파금에 대한 뉴스같은것이 있기는 했지만 그가 살아있다는 신호에 불과했던 사실이다 .로신의 이름은 사람들의 격정을 불러일으켰지만 파금의 이름은 그에 대한 동정심을 불러일으킨다.   忠厚한 로인으로서 이 세상을 작별한것이 파금의 해탈이였을지도 모른다.           파금은 소설 <파멸>으로부터 시작하여 만년의 <수감록>에 이르기까지 일생동안 수많은 작품을 써냈다. 사람들에게 익숙된 작품은 구중국의 중국식대가족과 음울한 공관 그리고 청춘의 화원을 묘사한 력작들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파금의 청춘시대인 중국대변혁시기의 산물이다. 이 시기는 중국의 언론자유시대로서  각성한 청년들이 자유에 대한 갈망을 불태우던 시기로서 파금도 편벽한 성도평원에 살면서도 <신청년>  <매주평론>  <소년중국> 등 잡지를 통해 신문화를 접촉하였다. 그러한 원인으로  파금의 작품은 인성에 대한 탐구보다도 사회개조에 대한 경향성을 내보였고 무정부주의에 대한 신조가 짙다. 그 시기 무정부주의는 하나의 큰 사조로서 리대소 운대영 등 공산당활력자들도 그 영향을 받았다. 누군가 지적한바와 같이 그 시기 중국무정부주의 핵심사상은  모든 强权을 반대하고 개인자유를 추구하는것였다. 파금이라는 필명은 巴枯宁과 克鲁泡特金의 이름에서 따온것이라는 一設은 파금 본인의 부정을 당하기는 했지만 그의 작품에서의 나젊은 주인공은 전제주의를 반대하고 서민층을 사랑하는 무정부자의 혼신이다. 당대의 나젊은 물욕주의자들과는 달리 富贫을 물론하고 정신귀족의 형상으로 표현되여 허무와 방종의 행위를 이룬다. 그러므로 파금의 작품은 시대와 청춘기반항정신의 산물이라고 할수있다. 기존세계에 대한 회손과 테로적인 희생적인 民粹主义英雄의 이야기를 통해 청년들의 반역심리에 응합했고 약자에 대한 동정과 강권에 대한 증오심을 불러일으켰다. 많은 청년들이 파금의 작품을 읽고 혁명에 투신한 사실로부터 그의 작품은 中国式 《汤姆叔叔的小屋》로서 위대한 예술성은 결핍하지만 사회력사변혁에 참석한 작품이라 판명된다.         파금은 종래로 순수예술작가로 되려고는 하지않았다. 그는 원래 사회현실에 참석하려는 강력한 욕망을 지니고 있었으며 심지어 희생될 각오도 지녔던 작가로서 그 연고로 40살에야 결혼을 하였다. 하지만 40년대  작품 《寒夜》를 발표한 뒤에는 더는 좋은 작품을 못써냈고 건국뒤에는 정계에 몸을 담고 각종 회의와 출국방문 국내시찰 등에 몸매이여 사회변혁을 갈망하던 작가로서 사회변혁의 원인으로 말미암아 문학창작의 완전쇠퇴기를 보내게 되였다. 그래서 만일 문화대혁명중 파금에 대한 박해가 없었더라면 문화대혁명 뒤에 파금은 < 진말을 하자>는 언론을 할수 있었을가? 하는 의문도 성립될 가능성이 존재한다.           문화대혁명이 끝난뒤 창작된 파금의 <수감록>은 다시 파금에게 작가의 영예를 가져다주었다. 파금은 본인도 자신의 제일作으로 생각한 < 수감록>을 통하여 력차의 정치운동중에서의 자신의 언행을 회억하고 남한테 피해를 준 사실들을 자책하였다. 대부분 사람들이 재부와 향락에 대한 추구에 일심할 때, 파금은 도리여 청년시절의 성실하고 진지한 기백을 되살려 자신의 참회록을 또박또박 기록하여 문화대혁명재난을 잊지 말기를 호소했다. 파금의 참회록은 권력시스템이 인정하는 참회록이였기에 관방의 존중을 받았고 각종 사회활동에 다시 출면했으며 사회지성인의 형상으로 받들리였다. 파금이 세상을 뜬 뒤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중국의 양심>이라 칭르고 그의 <진말을 하자>를 파금의 제일 훌륭한 유산이라 하였다.       파금의 현대사에서의 위치로부터 보면 더 유력한 <진말>을 할수 있는 능력이 없은것은 아니였지만 그의<수감록>은 본질적으로 상처어루만지기에만 머물고 수많은 사람들의 심목중에서 로신을 초월하지 못했다는 인상을 받고 있는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는 파금의 차실이 아니라 이 시대의 차실이다.           진실이라는 말은 문학 평론가들의 말밥에 잘 오르기는 하지만 문학명제도 아니고 문화명제도 아닌 명제임을  우리는 잘 모른다. 파금이 <진말을 하자> 의론을 진행할적에 체코의 작가 哈维尔도 <진실한 생활을 하자>는 주장을 보이면서 < <어느 과일가게에서 사회조류와 同步하기 위해 가게 문앞에 < 전세계 무산자는 연합하라>는 프랑카트를 걸어놓았는데 그 행위가 가게주인의 진실한 생각이 아니다. 空泛한 이델레오기의 득을 보려고 했지만도 그 이델레오기에 순종하는 치욕을 드러내는 행위이다>>는 실례를 든 것처럼 우리 시대도 그러한 비진실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우리의 대다수는 일상생활에서도 거짓말속에 살아가고 있다. 파금과  哈维尔는 계몽급 작가로서 허위를 증오하고 진실을 추구하는 경향성이 농후하고 생명의 가치에 대하여 확고한 신념을 지니어 문학이라는 방식으로 사회생활에 개입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結局은 조금 부동하다. 파금이 용감한 걸음을 멈추고 외부세계의 압력하에 침묵을 선택하였을 때 哈维尔은 숭고한 도덕용기로서 진실에 대한 더욱 완벽한 주장을 견지하면서 옥살이도 몇번 겪었고 또한 사람들에게 <진실한 생활의 가능성도>을 보여주었다.          서구에서는 진실과 진리가 같은 낱말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시인  赫西奥德의 < 시의 목적은 진실을 제시하는것이다>는 언조로 시작해서 철학가 플라톤과 亚里斯多德을 통하여 희랍문화에서 진실을 종극가치라는 철학중심위치에 모셔왔다. 또 유태문화에서도 사람마다 하느님앞에서 진실에 대한 추구를 보이라는 종교문화지향을  크게 추구하였다. 荒诞派 戏剧家로서 哈维尔는 진실은 인류를 통치하는 <절대적인 지평선>으로서 진실추구를 형이상학적신앙의 위치에 놓았다. 하지만 중국문화에는 진실이라는 종극가치가 담백하다. 진실이라는 관념이 중국어에 나타난것은 불과 백여년간의 일이다. 절대다수의 중국인을 상대해서는 상술한 서구진실관념론이라든가 哈维尔이 든 事例는 분에 넘친 절대적인 ( 苛刻)  관념이고 자아보호를 위해서 <전 세계 무산자는 연합하라>는 프랑카트를 걸면 타인의 생각도 인신도 해치지 않았으니 가히 리해를 할만한 일이라고 판명을 하고 있다. 국내 어느 존경하는 학자가  講座에서 언술의 표준은--- 1 되도록이는 진말을 하자 2 진말을 못하게 되는 경우에는 침묵을 지키자 3 침묵권마저 소유하지 못해 부득불 거짓말을 할 때에는 타인을 해치지 말자—고 고취한 사실로부터 보아도 우리는 진실에 대한 문장도 쓰고 읽기는 하지만 진실의 함의에 대한 리해력이 결핍함을 설명하고 있다. 서구에서의 진실이란 神性이 력력한 인성추구이고 또한 서구문화는 진실에 대한 추구를 통하여 사람의 자존과 생존을  보존하는(진실앞에서 침묵을 지킴도 죄이다)  문화이므로  索尔仁尼琴 의 “거짓말로는 살지 말자>> 언론이라든가 肖斯塔科维奇의 암암리에 창작한 <<证词》가 출현되였고 哈维尔의 사회진상을 통찰하는 괴력도 출현한다. 서구와 비교하면 상기 중국 학자의 말씀은 인성에 부합되기도 하겠지만 진실에 대한 그의 표준은 유아적이라 할수 있다. 진실이 형이상학적인 근거를(정신적인 추구적인) 근거를 잃으면 인성도 底线을 지키기 힘들다. 현재 우리는 많은 경우에 뜨르르한 套话를 사용하지만 현실의 不义에 침묵을 지키고 있음이 바로 后极权社会의 특점이다. 대다수 사람들이 마음속말이 아닌 거짓말로 또는 침묵으로 리상세계와 거리가 있는 현실에 순종하는 특점을 보이고 권력의 본질적결과를 묵시한다. 진실에 대한 이러한 리해와 태도는 우리들더러 인간의 자아근거를 회멸당하고 哈维尔가 이야기한것처럼 “사람이 실패한 견증물에 지나지 않는” 배역을 할뿐이다           혹시는 일반인으로서 진말을 할 자격과 능력이 없기에 우리는 마음속으로 파금이 우리 대신 이 시대의 진실을 이야기할것을 바랐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수감록>에서는 진실의 진정한 의미를 찾기힘들다. 문화대혁명뒤 파금이 赫尔岑의 <<往事与随想》을 번역한 사실부터 러시아 위대한 작가를 따라배우려는 몸부림을 엿볼수도 있고 또 < 진말이란 마음을 독자들에게 드리고 마음속의 말을 하고 자신이 믿는 말을 하고 생각이 정리된 말을 하고> 하는 명언을 내놓기는 하였지만 파금은 만년에 이르러서도 중국을 대신해 진말을 할 자아독립성을 갖추지 못하였다 .문화대혁명에 대한 반성중에 거의 중국인 모두가 자아반성이 결핍한 사실과 대조해보면 파금의 아주 성실한 고백이 돋보인다. 파금은 < 호풍을 그리며>에서 심각한 자아반성을 진행했지만 문련회의에서의 정치립장표명과 동시에 진행되였다는 점으로 보면 어딘가 우리에게 유감을 남겨주었다. 큰 재난뒤에도 진말이란 기껏해야 선악에 대한 설교에만 머무르고 인성에 대한 심각한 반성이 없다면 철저한 반성으로 판명할수가 없다.            진실을 가치신앙에 저명하디 않는 경우 , 우리는 거짓말중에 살면서도 犬儒主义를 실행하게 된다. 또한 진실을 사물의 본질로 인지하지 않기에 기본적인 사실을 발견할수도 없다. 파금의 회억록 --<수감록>이 이러한 특점을 지닌다. 우리는 <수감록>독서중에서 파금의식세계에 존재하는 < 진말>과 현실과의 거리를 직감할수 있으며 그의 画地为牢식의 제한성과 진실한 태도를 표명하지 못하여 발로되는 莫名한 고통감을 직감할수 있다.< 수감록>은 파금의 개인경력이기는 하지만 인성에 대한 적극적인 해명이 없다. 독자들에게 준 史實과 평가는 구속되였고 정치정확성이 강하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파금 개인의 소심성이라든가 인지정도라든가에 귀결이 될수도 있다. < 수감록>  落筆뒤에 파금을 연구하는 어느 학자가 파금을 방문했는데 그적의 파금의 수심에 응고된 표정을< 어떤 악몽에서 깨여나지못한 얼굴표정으로서  정치투쟁에서 보였던  吞吞吐吐 欲言又止의 소위동방지혜인 얼굴상이였다> 기록하고 있다.         파금의 진실에 대한 내재결핍증은 개인원인도 있고 시대적인 원인도 있다. 파금은 5.4운동의 산물로서 서구의 자유관념과 사실주의창작법을 흡수하여 처음에는 <인성>이라는 시각으로 세계를 관찰하는 걸음을 시작했지만 과정에 새로운 科学观을 받아들이면서 自由와 진실의 神性에 아무런 리해력을 지니지 못했기에 종국은 그의 자유관념이  無源之水로 변했고 세속세계의 革命이라는 강에서 말라들고 말았던것이다 . 파금 몸에서 나타나는 상술 부족점이 바로 新文化运动의 부족점이다 . 비록 시대와 사회에 대한 책임감이 넘치기는 하지만 무정부주의 영향으로 하여 어떠한 종교의식도 배척하고 형이하학투쟁에만 몰두하였기에 그의 작품은 인성의 복잡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였고 진정한 진실감이 부족하다. 그래서 40년대에 이르러 폭력투쟁에 실망을 지니고 현시대 서민들에게 눈길을 돌렸을 때의 작품이 파금의 진정한 력작으로 되여있다. 信仰과 智性이 없는 道德激情은 지속적인 흡인력을 지니지 못한다. 때문에 파금은 <나의 작품들이 로쇠했다. 어떤 분식과 가공을 진행한다 하더라도 생명력을 부입하지 못한다>는 말을 남겼다.         파금은 문화혁명박물관을 만들자는 건의도 내놓았고 계획경제시대에도 나라의 봉록을 먹지않은 일로부터우리의 존경을 받는다. 하지만 사상대가는 아니다. 만년에 너무 신중했고 무정부주의를 신앙했다는 말도 감히 하지 못했다. 수호지 인물처럼 聚义堂에서 출발하여 결국은 忠义堂에서 생명의 종지부를 찍었다.
75    [잡담27] 한가지 리해되지 않는 일 댓글:  조회:2898  추천:71  2008-03-10
잡담 27  한가지 리해되지 않는 일         고중 1학년에 금방 입학했을 때의 일이다. 嚴打를 해서 류망범들을 총살하는 날, 나도 그 觀客의 대렬에 참가했다. 그날치고 온 현성의 버스고 트럭이고 총동원하여 사형장으로 내려갔는데, 남녀로소를 불문하고( 그래도 나젊은 사람이 많고 남자들이 많았다) 길거리에 나와 차를 잡아타고 마치도 큰 행사에 참석하는듯한 흥성흥섬함을 보여주었다. 현운동대회를 해도 그런 장면을 보기가 힘들었는데 도대체 사형에 대한 흥미가 왜서 그렇게 도도했을가?           학교 문앞에서 사람을 만재한 트럭에 기여올라(지금 생각하면 나도 그때는 날파람이 좀 있었던 모양이다. 질주하는 트럭를 따라잡아 키를 넘는 높이를 기여넘어서 사람을 빼곡하게 실은 트럭에 오른다는 일은 말이 쉽지 지금은 엄두를 못내겠다) 사형장에 도착하니 공안국사람들이 수두룩했고 전혀 사형장에 접근도 못하게 했다. 멀리서 망원경도 없이 사람그림자나 바라보다가 탱하고 총소리가 울리는듯 하더니 사람들이 다시 차에 몰려서 귀로에 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것도 못보고 다시 공짜 트럭에 올라 학교로 돌아왔다. 심정은 맹랑했다. 아무것도 못보고 땀만 흘리고 고생만 하고.           이 사건에 대하여 나는 지금도 자아리해를 완성하지못했다. 호기심이라든가 隨从심리인가 관객심리인가 하는것도 있었겠지만 사형집행에 대한 드높은 흥미의 근원에 대하여 명철히 알지를 못하겟다. 사형당하는 류망범들을 그렇게 증오한것도 아니였고 또 사람은 누구나 제가 죽는것은 무서워한다는데 어째서 남이 사형당하는것은 구경하고싶어할가? 人之初 性本善이라고도 하는데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인성의 음영을   적라라하게 드러내던 사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조금 소름이 끼칠뿐 리해가 아니된다.  
74    [잡담26] 나도 '조선족은 왜 일하기 싫어하는가?' 에 한마디 댓글:  조회:3220  추천:94  2008-03-10
잡담 26 나도 '조선족은 왜 일하기 싫어하는가?'에 한마디  허동식 거의 매년 겨울마다 연변행을 하면 시골은 말할것없이 도시에서도 놀고 먹는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물론 연변의 實業경제상황이 좋지않어서 취직이 힘든것도 사실이기는 하지만, 한족들에 비해서는 조선족이 일하기 싫어하는 경향이 두드러져있다. 하지만 나는 <<일하기 싫어함이>>이 조선족의 근성이라고는 느껴지지않는다. 력사의 퇴적물이고 특별시대 특별현상이다. 1 로동이란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로동과 로동내재의 쾌락을 위하여 하는 로동으로 구분이 된다. 아주 오래동안 우리는 먹고 살기 위한 로동에만 종사해왔다. 로동과정중에서의 쾌감과 로동성취의 쾌감을 위하여서 하는 로동과는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살어왔다. 집체로동에 따르는 <큰솥> 분배형식과 로동성취의 미소화(소위 원시자본축적이 불가능)가 조선족들의 로동을 다만 먹고살기 위해 하는 수준에 머물게 했다. < 죽게 벌어도> 로동의 재미를 얻을수 없었던, 사회경제구조가(연변경제는 근본적으로 附價値가 저하인 농업경제이다) 조선족의 로동심리에 마이너스적인 그림자를 만들어주었다. 2 정체성의 혼란과  유농민의 근성도 문제이다. 중국이 작년에야 <물권법>을 통과했다. 헌법에서의 사유재산에 대한 인정을 실용화시킨 법적인 사회적인 행동이 좀 늦은 편이다. 바로 이런 시기에 조선족중에서 여러가지 경로를 거쳐 한국국적을 취득한 사람도 많아졌고 많은 사람들이 < 나는 한반도 사람인가 대륙사람인가> 하는 심리적인 장애를 받았다. 부지런히 일해서 무엇인가 장만한다면 지니고 갈수 있을가 하는 의구심과 에라 모르겠다 우선 먹고 놀고 보자 하는 유농민들의 근성이 대폭팔을 이루면서 원시자본축적에 있어서의 고정재산투자가 비률이 낮은 <조선족식운영>을 어느 정도 보편화시켰다. 근년에 정체성의 혼란의식이 적어지고 중국의 사유재산보호가 좋아짐에 따라 아파트를 구입하는 등등의 경제운영방식의 변화가 있지만 경제초창기의 비고정재산투자비률이 높은 탓으로 본 경제손실은 조선족이 한족보다 막대하다. 3 중국경제수준과 한국경제수준의 현차도 문제이다. 연변에서는 놀고 먹지만 한국에 나가면 엉뎅이 나가는줄 모르고 일한다. 원인은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한국에서의 취직이 비교적 쉽고 한국 임금이 중국보다 엄청 높기 때문이다. 사실 아직은 우리의 경영술과 손재간으로는 중국에서 아무리 노력한다 하더라도 한국에서의 로동자가치를 따라가기는 힘들다. 연변에서 만일 한달에 4-5천원정도 벌수 있다면 조선족들의 노무수출인원수가 많이 줄어들거라 생각된다.       4 사회풍기로 표현되는 사회결구가 리상적이 아니다. 한국에서 벼라별 고생을 하면서 묵돈을 쥐고 온 사람들도 연변에 돌아오면 눌러앉아 사는 <<똑똑>한 사람들 생활도 웬간한 수준이 아니고 심지어  사치할정도로 지내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래서 심리평형을 이룰수가 없다. 너들은 앉아놀면서도 먹고마시는데 에따 이젠 나도 모르겠다 하는식으로 변해버린다.       한마디로 조선족이 일하기 싫어함은 혈연적인 문제가 아니고 사회개혁의 침체와 생존환경 격변의 산물이다.
73    [잡담25] 평등과 자유란 무엇일가? 댓글:  조회:3020  추천:74  2008-03-09
잡담25  평등과 자유란 무엇일가?   평등과 자유는 자주 듣고 써먹기도 하지만 나로서는 완벽한 리해를 진행하기 어렵다. 유럽문화권의 낱말이 漢文문화권의 낱말로 전변하는중에 語境의 장애를 받은것은 물론이고, 또 오래동안 평등 자유 하면 브르죠아 쓰레기사상이라는 감투를 쓰는것도 두려운 일이였고, 무엇이든 현실리익을 따지는 습성으로 하여 평등 자유를 알아서는 밥이 생기느냐? 하는 론리도 작간을 하였는지 여태껏 평등과 자유의 진미에 대해 진지한 생각을 굴리기가 무척 힘들었다.           헌데 밥먹고 할짓이 없어 그런지 평등과 자유라는 낱말의 위대성을  頓悟하고싶은 욕구가 커진다.       평등과 자유, 어학적인 법률적인 사회정치적인 차원에서 벗어나서 어느 중국학자의(이름은 까먹었음) 평등은 인간의 神性이고 자유는 인간의 人性이라는 해석에 대한 나의 옅은 리해를 기록하고하고싶다.       인간은 현실사회에서 절대적인 평등을 이루기 힘들다. 인간이 상호간에 인간을 참조물로 하였을 때에는, 인종 성별 년령 능력 등으로 표현되는 생리적인 사회적인 불균형을 만나게된다. 이런 불균형이 인간불평등의 자연상태이고 원인이다. 하지만 神이라는 참조물을 상대하여서는 절대적인 인간평등이 가능하다. 전지전능하신 신앞에서는 상기한 인간들 사이의 <<세소>>한 차이점과 그로서 형성되는 불평등이 너무나도 보잘것없다. 비록 불평등이 사회화되고 제도화되고 문화화로 응고될수있지만 神의 위대한 도덕성과 능력성을 상대로 하는 경우에는 모든 인간 불평등은 존재의 의미가 연기처럼 날려버리고만다. 인간으서 인간의 국한성(시간적인 공간적인 능력과 인성의 비완벽성)을 알게 되면 심혼은 자연적으로 신의 세계에로 서서히 다가서는 경우가 많으며 인간의지를 신에게 의탁한다. 그러므로 평등이란 바로 인간자아판단이며 유심주의로 표현되는 일종 아름다운 경지에로의 행군이다.      인간은 자연과 사회를 떠날수가 없으므로 절대적인 자유를 얻을수가 없다. 하지만 인간은 인신적으로 심혼적으로 자유(인간능력의 절대화)에 대한 무한한 욕구를 지니고 있다. 그 욕구실현이 불가능하지만 또 불가능함도 잘 알지만은 자연과 사회를 초월하려는 , 자신을 초월하려는 심지어 신령을 초월하려는 심층적인 욕구가 바로 人性이다. 그러므로 자유에 대한 인간의 추구는 사람의 천성으로서 어떤 수단으로도 압제할수가 없다. 평등과 자유, 신성과 인성, 인간의 영원한 동반자이다.     
72    [잡담24] 대학교시절의 나의 공부 댓글:  조회:3119  추천:71  2008-03-09
잡담 24  대학교시절의 나의 공부       나는 대학에서 소위 공상행정관리학을 전공했는데 合同관리 市場관리 기업등록관리 상표관리 광고관리 등을 배우는척했다.  실말이지만 신물이 났다. 시장관리도 합동관리도 기업등록관리도 상표관리도 광고관리도 노예사회로부터 시작하여 봉건사회 자본주의사회 사회주의사회이라는 틀에 째인 순서로 배워야했는데, 이미 기초과목인 정치경제학이라든가 맑스주의철학이라든가 농공상업경제학에서도 그러한 사회발전순서들을 얼음판에 박 밀듯 암기하느라 진땀을 많이 흘렸으니, 하기싫은 사회발전사 공부때문에 나라돈(지금 생각하면 나라돈이 아니라 민고의 돈이다)과 부모 돈을 헛되게도 썼다. 졸업뒤에 언젠가 대학교 선생님 한분을 만나서 선생님 고맙습니다. 지금도 강단에서 노예사회로부터 사회주의 길을 다그칩니까? 고 분풀이를 했다.             지금까지 좋은 인상을 남긴것은 필수전업과가 아닌 선택과목인것 같다. 특별히 종교학이라든가 문화사라든가가 현재까지 기억에 좀 남는데 내가 그런 문사면을 좀  좋아한 원인도 있겠지만도 교과서도 없고 필기만 하는 상기 과목들 강연중에 선생님들이 간혹 모르는척하고(혹은 고의로?) 禁區를 벗어나 異說들을 소개하기도 했던 원인도 있다고 생각된다.      또 아주 인상이 깊은 일은 <자본론선독>을 배울 때다. 중국의 자본론은 독일어에서가 아니면 러시아어에서 번역한것이라 생각되는데 나 같은 서구어의 표현방식에 깜깜부지인 사람들은 天書읽기였다. 그런데다가 자본론을 강의하시는 선생님마저도 거의 강의중마다 오리무중에 빠져서 강의가 自圓其說커녕 학생들의 비웃음을 자아내는 정도여서 <자본론선독>은 사회발전순서를 암기하는 효력도 보지못했다.       그럭저럭 3년반을 허송하니 학교에서는 졸업론문을 준비하라고 했다. 론문명제는 선생님들이 내준것에서 학생들이 자아선택을 했는데 나는 제일 작은 명제를 선택하여는데 << 중국시장관리를 론함>이였다. 다른 명제들은 <중국>보다도 큰것들이 내비치어서 나는 엄두도 못냈고 또 은근히 시장관리는 <도적>할만한 자료들이 많다고 생각했던 탓이였다. 그래서< 시장이란 상품교환을 진행하는 장소이다……시장관리는 국가권력기관이 국민경제를 령도하는 방식이다 > 하는 만장의 허튼소리를 베껴서 지도교수한테 바치고 또 굽신굽신도 하고 미남식미소도 던지고(지도교수는 師姐였음) 얼룽땅뚱 고비를 넘겨 급제를  했다. 그적에는 중국이 계획경제를 하느냐 시장경제를 하느냐 쟁론중에 우리 대학에서 한 학생이 졸업론문을 <중국은 시장경제를 하여야 한다>는 반동주장을 제안하여 졸업장을 못탄 사례가 있었기에 그 누구나 선생님 말씀대로 나라의 말슴대로 졸업론문을 쓰는게 아주 류행이였다.      나는 대학교란 우선 학생들의 독립사고능력과 독립판단능력 등을 키워주는 장소여야 한다고고 생각한다. 헌데 돌이켜보니 내가 다닌 대학교는 사실 독립성이 아닌 괴뢰성을 만들어주는 장소였길래 마음 어딘가가 쓰려진다.   
71    [잡담23] 나도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에 한마디 댓글:  조회:3363  추천:74  2008-03-08
잡담 23 나도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에 한마디 허동식 우리의 여러가지 <<렬근성>>에 대하여 <합리한 반성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욕심을 두고 많은 조사연구와 깊은 생각을 벗어난 쪼박글들을 갈겨대기로기로 한다. 선배님들 제군들 미안합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어는 거의 긍정적인(褒义) 말로가 아니라 부정적인(贬义) 말로 사용되는듯 하다. 그릇된 질투심을 두고, 그 질투심의 악질성에 대해서도 잘 알지만도 , <배가 아픈것은> 정당하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는 포용의미도 다분하게 내포되여 있다고 생각된다. 어느 종족이든 질투심을 면하기는 어렵겠다. 하지만 우리 몸에서 질투심이 질벅하게 표현이 되는 한, 또 지금까지도 비도덕적으로 진행을 이루는 상황에서는 나도 그 질투심을 타매하고 싶은 의욕이 굴뚝같음을 어찌할 방도가 없다. 우선은 동북아지역이라는 생존單元의 농경생산방식과 가족운영을 축으로 하는 농경생활방식에 대한 검토해본다. 동북아지역은 력사적으로 큰 홍수의 피해를 본적은 없다고 생각된다. 비교적 리상적인 植被조건과 길이가 상대적으로 짜른 하천, 그리고 하천이 경유하는 남북위도차지가 작은 등등의 원인으로 말미암아 하천범람이 적었고 관개업도 큰 발전을 이루지못했다. 관개업이 발전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농경사회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집단로동보다도 개인적인 가족적인 로동이 많았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하지만 동북아지역은 춥고 곡물의 생장기가 제한되였기에 주기적으로 농경에 있어서 집단로동을 진행하였음도 사실이다. 당대에 이르러서도 파종계절이라든가 수확계절이라든가에는  <고양이 손도 빌고싶은 때>에는, 그리고 집단로동효력이 개인로동효력을 초월하는 경우에는 집단로동방식을 채용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점은 동북아지역의 농경집단로동의 목적이 장기목적성을 꽤나 떠나, 코앞의 고개를 넘기 위하여 이루어지는 림시로동조합에 있다. 림시로동조합이란 장기적인 고용관계도 존재하지않고 림시동일목적을 이루기 위하여서는 장기적인 의무와 책임도 불필요하다. 그러므로 림시로동조합에 존재하는 사람간의 합작은 림시적이고 현실적이다. 공동리익의 장원성결핍과 합작과정의 림시성은 집단로동과정에서의 인간관계를 가냘프게 만든다. 동북아지역에 장기간 존재한 상술한 림시집단생산방식은 로동력사이의 관계를 조화롭게 만드는데 아주 불리하다. 필요성이 있으면 로동력간에 림시합작으로 끝내고 갈라지면 상호간의 독립성을 보존하던, 지역특색이 다분한 생산방식이 협조심 대신 질투심을 만든 원흉이 아닐가 생각해본다.       동북촌락에 가면 중국 중원지역과 강남지역의 촌락과 비교를 해본다. 동북은 촌락구성이 비교적 너르다. 물론 사람이 적고 땅이 넓은 원인도 있겠지만 어느 측면에서는 동북아지역의 가족과 가족사이의 상호의존도가 작다는 나름의 추측도 해보았다. 그리고 상호의존도가 완전히 령으로 하락한 상태가 아니므로 촌락을 이루기는 하는구나고 나름의 판단을 해보았다,      집단생산로동중에서의 인간상호관계상태가 상응한 문화심리를 만들어준다면 민간의 가족운영방식을 대표로 하는 생활방식도 문화심리형성에 큰 영향을 할지도 모른다. 동북아지역의 가족운영은 장남장손식이다. 아주 오래동안 잘 사는 가족이든 못사는 가족이든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장남장손켠에 큰 경사도를 이루었기에 결국은 가족운영에 있어서도 질투심의 번창을 만든것이 아닐가 생각해본다. 유럽은 중세기에 분봉제를 채용했기에 딸자식도 부모의 유산을 물려받거나 형제자매들과 나누어받는 현상이 존재했지만 동북아지역은 장남장손이 아닌이상 그런 평균대우를 받을 가능성이 없었다. 장남장손식 가족운영은 불공성을 내포하였기에 가정내부에서도 질투심을 만연시키는 내재적인 론리성을 제공하였다고 생각된다. 문화적인 요인도 생각해보고싶다. 기독교권에서는 하느님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는 의식이 오래동안 자리매김을 해왔다. 그래서 현세에서의 불평등이 많이 존재하여도 누구나 하느님앞에서는 죄인이고 다 같이 심판을 받으리라는 문화심리가 인간사이의 질투심을 어느 정도 완화시킨다. 하지만 동북아를 포함한 동아시아는 현세에서의 불평등을 합리화시키고 제도화시키고 문화화시키는 과정에 질투라는 악령을 유별나게 만들었을수도 있다.     전통농경사회의 흔적이 나날이 옅어지고 있다고 판단되는 한. 대규모산업화의 진전에 따라 집단로동의 목적이 하루이틀이 아닌 장기성을 충분히 보여주고 , 또 사회분업의 필연성과 합리성이 전사회적 인지를 받고, 가족운영에 있어서의 불평등이 사라지고, 문화의식상에서의 정당한 진취심이 이루어지면, 우리도 언제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를 옛말 듣듯이 대하고 또는 외국인들처럼 전혀 알아듣지 못할수도 있겠다.             
70    [잡담22] 나도 '냄비근성' 에 한마디 댓글:  조회:2933  추천:72  2008-03-08
잡담 22 나도 <<냄비근성>>에 한마디        소위 <<냄비근성>>을 문화심리이고 행위방식이라 점찍는다면 무엇이 <<냄비근성>>일가 생각해보고싶다. 빨리 비등하고 빨리 랭각되고 또는 침착하지 못하고 <<약삭바르게 >> 돌아치든가 지구력결핍 등등의 현상들로 라렬되는데 나는 사물에 대한 리지적 사고능력의 결핍증과 감성주의로 작법으로 귀결해보고싶다.        국민 또는 민족의 비교적 보편적이고 유전적인 습성으로까지 잠적하고 있다면 조금은 웃으면 대할 일이 아니다. 또 여차여차하게 마이너스면도 지니고 있으니 나도 나름의 <<반성>>을 해본다.       혹시 인종적인 원인이 작간을 하는것은 아닐가? 유물론사관을 지닌 사람들한테 욕먹을 의문이다. 물론 피의 내용이란 력사의 결과임을 나도 인정하기는 하지만 혈연적으로 동질성을 지닌 人群이 동질성을 지닌 자연환경과 인문환경에서 수천년 비좁게 살아왔다는 점은 나더러 눈길을 지역적생존환경의 지속성을 돌이켜보게한다.       일반적으로 북방수렵민족과 반도토착인들이 피를 섞어서 우리를 만들었다 한다. 산이 많고 평야가 적으며(경작지의 결여), 곡물의 종류와 수확고가 높지를 않은데다가 또 비교적 추운 기온대에 견뎌내려는 暖房의 원가가 높아서 우리는 중세기는 물론 근현대에 이르러서도 생활재부의 잉여를 축적하기가 아주 힘들었다. 구체적인 통계수자는 잘 모르지만 책에서 읽어본 력사사건 하나를 나름의 근거로 대 보련다.        누루하치가 중원정복을 시작하니 중국명나라에서 대신들이 상책을 내놓느라 옥신각신 하는중에 누군가 조선과 협력하여 앞뒤로 공격을 합시다 하는 주장을 세웠다. 황제가 상기 주장이 거의 근사한 책략이라 생각하여 머리를 끄덕이자 다른 대신 하나가 각별한 반대를 하였다. 아뢰기를 누루하치는 명과 조선의 협공을 받는게 두려워서 중원진공전에 이미 조선토벌을 했나이다. 조선군 만여명이 전멸을 당했나이다. 페하께서 생각해보십시오. 만여명이 전멸을 했는데 조선이 무슨 힘(인력과 물력)으로 누루하치의 배후를 엄습할수 있겠나이까? 그 말에 명의 황제는 앞뒤공격 책략을 포기하고 .       현대인의 시각으로 보면 중세기 전쟁에서 만여명이 전멸했다는것은 별로 큰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생각해볼진대 만여명이 전멸당하고 다시는 명을 도울 인력과 물력 재력을 갖추지못했다는 사실이 그 시기 조선국력의 크기를 잘 말해줌이다. 국토가 작고 삼면으로 편하지 못한 항해능력으로는 개발엄두도 못내는 바다가 있고 , 북으로는 그적의 생산력으로는 운영가치가 크지않은 만주벌과 시베리아( 시베리아가 있는줄은 알았을가?) , 또 매냥 범처럼 도사려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엄청난 중화제국의 존재—이것이 바로 반도사회가 중세기로부터 거의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지성학적인 생존환경이다. 수동성을 만들게 하는 지역자연환경과 지성학적인 생존환경으로 하여 또 생산력의 열악성으로 하여 부득불 여러가지 습성들을 지니게 된것이 아닐가? 물론 어떤 습성은 아니 좋은줄을도 알았겠지만 객관조건의 미숙과 주관노력의 결핍으로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옛날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변화다단한 국내정세와 국제정세에 견디려면, 개인도 좋고 나라도 좋고 물질재부의 축적과 정신재부의 비약이 있어야 한다. 물질재부의 축적은 가능성을 만들어주고 정신재부의 비약은 자신심과 좋은 방책을 제공하여준다. 그렇지않는 상황에서는 , 먹고 살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든지 심사숙고할 겨를이 없이 빨리 돌아치고 약삭바르게 해야만 생존이 가능하다. 사물에 대한 리지적 사고능력의 결핍증과 감성주의로 작법이 살판을 치게된다.       2차대전뒤의 다원사회의 도래는 <<약자>>에게는 참으로 챤스이라고 생각된다. 또 지역적인 제한성을 어느 정도 수정해주는, 통신수단과 교통수단을 포함한 현대과학기술발전이 <<덩치를 크게 만드는>>중의 최대수단이다. 잘 서두르고 운이 좋으면  <<잉여>>를 축적할 가능성이 비교적 존재하는 이 시기를 잘 리용하여 어느날인가 사물에 대한 리지적 판단대신 무엇이든 행동으로 앞자리를 차지하려는 문화심리 또는 행위책이 빨리 개조되고 국민 또는 민족성원들 모두가 <<사색하는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여본다.
69    [잡담21] 일본 그리고 일본인을 잘 아는 중국학자 댓글:  조회:3902  추천:111  2008-03-05
잡담21 일본과 일본인을 잘 아는 중국학자허동식      알고 지내는 아무개가 일본려행을 다녀왔다. 마침 중학시절 반주임선생님이 남경려행을 마치고 돌아온터라 선생님을 모시고 식사를 마련했으데 선생님의 일본이 어떻던가 하는 물음에 아주 좋더라 답하니 선생님은 대번에 검으락푸르락 변해지면서 하는 말씀이 내 금방 남경에서 일본인들의 만행을 샅샅이 뒤져보고 왔는데 어떻게 그런 종족들의 나라를 좋다고 하느냐? 그 노발대발하는 기세에 놀라 그만 입을 꾹 다물었다 한다. 만행을 저지른 종족과 그 종족의 나라—필연적인 론리관계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 중국인들은 일본과 일본인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을가? 우리가 알건대로는 일본인들중에는 중국통이 아주 많다. 먼 옛날 견당사가 중국을 방문하던 중세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중국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중국인을 깔보든 우러르든  일본인은 중국과 중국인을 여러모로 통한 전문가들이 많다. 반면에 중국은 일본과 일본인을 아는 사람이 적다. 또 알려는 사람도 많지는 않다. 일반인으로서는 기껏해야 지리교과서에서 배운 토끼꼬리만큼한 일본개황, 그리고 스모우라든가 사무라이라든가 사쿠라라든가 또는 일본의 전자제품과 자동차, 좀 나아가서는 중국과 同族同文이라는 등등이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거의 전부의 인지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중국사회학과에서 사용된 어휘의 절반이상이 일본에서 수입한것이고 일본인은 탐욕스러울 정도로 외래문화를 배우고 소화하며, 심혼이 섬세하고 정력적라는 등등의 일본과 일본에 대한 긍정적인 면에 대하여 아는 사람은 적다. 근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인들은 <<운무중의 꽃구경>>방식을 일본과 일본인을 상대하는 문화심리로 행위방책으로 사용하여왔다. 민간사회에서 지금도 일본 하면 <<小일본>>이고 일본인이면 <<鬼子>>라고 하는 현상들과 그 본질은, 중국과 일본의 지성학적인 내재관계와 경제리익관계를 리성적으로 받아들이고 <<원한을 지속시키려는 욕심이 없다는>> 경지에 오름에 있어서의 조화로운 징조는 아니다. 지나친 문화자부심을 버리고 력사적으로 현실적으로 미래지향적으로 일본과 일본인을 상대함은 바람직한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재 중국인으로서 일본과 일본인을 비교적 객관적인 시각으로 보아왔던  중국학자들과 그들의 력작들이 학술계의 높은 평가를 받고있다.  1 黄遵宪(1848-1905) 청나라 말엽 외교가이고 저명한 애국시인으로서 청나라 일본주재 대사관 참잠을 지낸적이 있으며 <<일본국지>>라는 력작이 출간시에 <<몇년만 일찍 출판되였더면 갑오전쟁에서 중국이 참패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2 周作人 (1885~1967)근대 저명한 문학가, 1945년 매국죄로 징역살이,1949년 출옥뒤 문학편집으로서 문학작품번역에 정진. 주작인은 자신의 일본생활경력과 객관적인 독립사고를 통해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객관적인 인지를 지닌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 3 戴季陶 (1891~1949.2.11.), 중국국민당 우익사상가로서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진행한. <<일본론>>이라는 서적은 경전적인 력작으로 평가되고있다.  
68    [잡담20] 고전중국을 알려면 어떤 서적을 읽으면 좋을가? 댓글:  조회:3133  추천:89  2008-02-27
잡담 20 고전중국을 알려면 어떤 서적을 읽으면 좋을가?       오늘 張遠山의 <<고전중국에로 진입하는 5부경전>>이라는 글을 다시 읽으면서 꽤 재미있어 그 내용을 간추려본다.     많은 사람들이 나더러 고전중국을 알려면 어떤 책을 읽으면 좋은가 묻지만 나는 그런 재간이 없어 줄곧 침묵을 지켜왔다. 근간에 그런 일이 계속 발생하고 있어 비록 부끄럽기는 하지만 수십년간 눈봉사가 코끼리를 더듬는 작업을 계속해온 경력으로 표층적인 리해력은 어느 정도 있겠다는 자아위안삼아 청년들의 참고로 5부의 경전을 추천해본다. << 홍루몽>>은 종법사회였던 중세기 중국의 가정에 대한 백과전서이다. 음울하고 인성을 압제하는 가정운영방식은 중국인의 성격에 비건건강성을 내비치게 하였고 생명이 극단적인 압제를 받으면 악성적인 파괴력과 회손력을 지니게 되는 과정을 쓴 글로서 고전중국으로 들어가는 입문서적이다.( 가보옥의 출가가 보복적인 파괴력의 로출이다.—나의 리해) << 수호전>>은 가정을 뛰쳐나와 사회로 입문하는 서적이다. 중국의 사회는 江湖(민간사회)로도 표현이 돼왔고, <<수호지>> 가 바로 고전중국의 관청과 마적이 결탁하고 피비린 수단으로 생존을 갈구하는 강호의 축영도이다. 민간사회에서 사회주류로 부상하면 종법사회의 틀과 질곡을 벗어나 당연히 가정의 지배자로 될수가 있다.( 례를 들면 형인 무대랑도 동생인 무송의 지배를 받고, 멸문을 당한 扈三娘도 애각호 왕영의 마누라로 되여야 한다—나의  리해). 피비린 강호을  상대하여서 음울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가정이 어느 정도는 따사로운 보금자리가 아닐가? << 삼국연의>>는 민간사회를 벗어나 중국정치사회로 입문하는 서적이다. 廟堂이란 최고권력중심지로서 가정통치권과 민간사회통치권을 초과한 국가통치권쟁탈장소이다. 때문에 <<삼국연의>>에서는 음울하지만 따사로운 가정도 없고, 피비리지만 의기로운 강호도 없다. 다만 모든 륜리도덕 리상을 팽개친 음모와 판가리뿐이다. 중국인의 지혜가 자연을 탐색하고 국민의 복지를 만드는데 잘 사용되지 못하는 유전적인 원인을 얼마간 알수가 있다. << 사기>>는 고전중국의 진정한 백과전서이다. 가정과 강호와 묘당의 갈래갈래를 비교적 진실하게 , 노예사회로부터 봉건사회에로 발전하는 맥락을 확연하게 묘사한 서적이다. << 장자>>는 고전중국에 있어서 문학의 취미성과 력사서적의 진실성을 벗어나 중국인 특유의 시적철학에로 진입하는 서적이다. 음울한 가정과 피비린 강호 그리고 음험하고 잔인한 정치를 초탈하여, 순수한 경지에로 이르려는 몸부림이 엿보인다.              여기까지 간추려보니 , 5부경전이 중국현대사회를 아는데도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67    [잡담19] 생활의 미로 댓글:  조회:2967  추천:80  2008-02-27
잡담19   생활의 미로   곁에 있는 아무개가 앞으로는 시골에 내려가 토종돼지나 키우면서 한가롭게 살겠다는 의사표달을 했다. 그것도 좋지 하는 한마디로 수긍적인 답을 해놓고 나는 나의 일상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대학교시절 연변 어느 시인의 시집을 읽고서 <<농경문화의 말로>>라는 독후감을 쓴 적이 있다. 오랜 농경과 소농경제에 젖으면 목가적인 향토애도 추하게 변모된다는 斷論적인 글이였는데 꽤나 옳은 말이였다고 줄곧 자아시인을 하여왔다.     거의 20년사이에 생활환경은 많이 변화였다. 물론 천지개벽식은 아니지만 중국식산업화시대에 살면서 인간의 이화를, 물질세계의 종속감을  때로는 느끼기도 하는것이  나의 생활상 일부분이다. 그래서 농경문화를 <증오>하던 나도 앞으로 경제적인 허락이 되면 일년사시절 발이 가는대로 려행을 하고싶다 또는 여름에는 오대산에 살고 겨울에는 해남도 삼아시에 살련다는 욕망을 내비치기도 하고 시골에 가서 채마전이나 가꾸면서 한적한 독서생활을 하고싶다는 욕구표달을 하기도 한다.    구식농경에 대한 철저한 비판자로 자처하면서도 배운것이 없어 그런지 현대사회의 불화를 대하며는 또다시 향토의 귀화를 꾀하는 나는 도대체 무엇일가?    말이 쉽지만 현재 내가 시골 내려가면 살아갈수가 있을가? 경제와 체력은 뒤전에 치더라도 배수설비가 없는 화장실과 온돌에(내 심중의 시골은 북방시골) 불을 지피면서 콜록콜록 기침도 해야 하고 또 술을 먹고싶으면 말이 오갈수 있는 친구들이 있어야하고 인터넷도 있어야 하고 간혹 시내로 다니려면 자가용도 있어야 할텐데! 이렇게 생각을 쓰담듬어보면 내가 바라는 시골꿈도 거의 불가능한 일임을 판단한다.    중국은 도시인들도 많이는 시골태생이다. 내 나이 또래에서 할아버지가 시골출신이 아닌 사람은 거의 보지를 못했다. 그래서인지 도시인들도 머리속에는 시골의 때가 많이 남아있고 농경의 전통적인 인륜에 미련을 지닌 사람이 많다. 헌데 근년의 산업화가 가속화화되면서 고독감이라든가 소외감이라든가 또는 실패감과 실망감을 느끼면서 전통적인 향토생활에 돌아가 안락처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조금은  많아졌다는 무단적인 느낌이 든다.    나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이런 상을 생활의 미로라 이름해본다. 생활의 미로는 성자가 아닌 이상 누구나 당할수 있는 일이기는 하겠지만, 집단적이고 추세적이고 보편적인 일이라면 사회적인 근원이 있을것이다. 그 근원에 대한 연구와 대책은 사회학자들과  정치인들에게 돌려주고 나는 다만 내 자신을 어떻게 하면 당금 생활의 미로에서 빼돌릴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외국류학을 생각해보았다. 미국에 가서 무슨 둥딴지같은 공부를 생각했지만 영어를 전혀 모르고 비자도 힘들고 돈도 없으니 꿈에 불과하다.    큰 부자가 될 생각을 해보았다. 실업적인 재능은 없으니 본전을 마련해서 주식을 하면 될가 했더니 요즘은 주식시장에 찬 바람이 쌩 하고 분다. 어느 사원에 가서 스님들의 시중이나 들어볼가? 헌데 좋은 사원에는 큰 돈을 시주해야 하고 <뒤문>도 잇어야 한다니. 그런 능력은 없고. 솔직한 말이지만 생활의 미로를 깨칠 방책이 주어져있지않다. 솔직한 생각이지만 중국식산업화속에서 농경의 그림자를 되돌어보는것도 바람직한 이야기는 아니다.    
66    [잡담18]《연변문학》의 현황을 두고 댓글:  조회:3212  추천:79  2008-02-27
      < < 연변문학>>의 현황을 두고    문예지의 운영이 많이 힘들어졌다. 문예지를 대체하는 여러가지 문예형식의 활성화가 주요한 객관원인이다. 하지만 문예지의 자책적인 반성이 없이는 문예지의 정상적인 운영에로의 귀환도 불가능한듯하다.       <연변문학>이 독자들을 잃었다. 인구의 감소, 여러가지 문예형식의 활성화에 따라 취미적으로 오락적으로 <연변문학>을 읽던 독자들의 버림을 받은지가 꽤나 오래다. 그 다음은 문학인들을 잃었다. 문학인들이 꼭 챙겨야 했던 호황기가 끝나고 많은 문학인들마저 코웃음으로 대하는 경우에까지 이르렀다.        < 얼음이 석자로 얼어든것은 하루아침 추위를 탓하지 못한다>는 말처럼 <연변문학>의 현황을 두고 현임운영진이라든가 현임작가협회만 대성호질하는 작법도 옳은 판단이 아니다. 아주 오래동안 <연변문학>이 문맥을 벗어나 관맥과 인맥에서 자맥질하여온 사실이 바로 <연변문학>이 오늘날을 지니게 된 주관원인이다.       지나친 官緣과 人緣을 취지로 하여 말만은 듣기좋은 순수문학지이고 거재된 작품과 평의된 수상작들이 저질화를 이루었다. 저질화를 만드는,독자들을 무시하고 문학인들을 무시하는 작법이 쌓이고 부패되여 세인들의 웃음을 자아낼만한 현황을 만들었다.       그리고 운영책에 있어서도 반성할 필요가 있다. 잡지의 装帧은 비현실적인 한국화를 보이면서 구매자의 경제수준을 무시하는 본가를 만들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다. 장편이 많고 련재가 많다. 어떤 의미에서는 소위 快粲활용으로 사용되여야 할 문예지가 단행본 연회석에 가가운 잔치를 벌리니 독자들이 피곤하다. 원고료도 문제이다. 많든 적든 글쓰는 사람들의 자존심과 허용심을 무시해서는 아니된다. 어떤 문예지로 부상할가 하는 자아착상이 주요하다. 소위 중국어에서 말하는 定位로서 <장백산>과 <도라지>와 동등한 착상이 아닌 , 말하자면 취미성이 좋은 방향으로 갈것인가 아니면 엄정한 방향으로 갈것인가 또는 그 가운데를 갈건가 하는  자아착상을 구안하고 실천하여야 한다. 우리를 상대해서는 가격이 싸고 내용이 풍부한 문예지가 그래도 방침책이다.  
65    [잡담17] 위대한 스포츠문화정신도 필요하다 댓글:  조회:3357  추천:80  2008-02-16
       희랍문명의 성과는 인간의 정신건강과(본체론철학)과 몸건강(올림픽정신)에 대한 끈질긴 추구라는 말이 있다. 인간으로서 누구나 생명력은 제한되였고 인간의 생리적기능은 자연을 상대로 하였을 때 너무나도  보잘것없기는 하지만, 대신 인간은 영원히 도달할수 없는 경지에로의 영원한 추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올림픽을 대표로 하는 위대한 스포츠문화정신이 바로 그 실례의 하나이다. 우리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스포츠문화정신은 아직은 반성할 여백이 많다. 여러가지 주객관원인으로 하여 우리를 지배하는 스포츠문화정신은 스포츠를 떠나 실리라든가 종족주의라든가 협애한 애국주의라든가 정치라든가에 무던히도 리용된다. 중국이 올림픽을 주최한다는 일은 참으로 경사로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지닌 스포츠정신은 퍼그나 람루하다. 우리도 이제는 중국에 다녀온 외국스포츠대표단의 장끼를 감상할줄 알아야 하고 뜨거운 갈채를 보낼줄 알아야 한다.       얼마전 중국의 림단이 한국에서 진행된 바드민톤경기에서 재판에게 당하던 억울함과 같은 추태극을 절때 만들지 말어야한다. 위대한 올림픽과 스포츠문화정신에 미안한 일을 삼가하여야 한다. 과장한 이야기로 가령 래년에 혹시 중국 대표단이 금메달 하나를 따지 못하는 일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해도 우리는 서운함을 신사숙녀식으로 감출줄 알아야 하고 다른 사람들의 기쁨을 축하할줄도 나눌줄도 아는 기질도 지녔으면 좋겠다. 중국스포츠계는 어떤 나라와는 달리 선수선발법이 조금 <이채>롭다. 이채롭다 해서 해서 다 좋은것은 아니고 공평한것은 더욱 아니다. 다만 금메달을 위해서는 선수선발법을 포함하여 위대한 스포츠문화정신과는 거리를 둔 여러가지기 작법이 많이 존재하고 있음은 누구나 아는 비밀이다 . 얼핏 보기에는 가난하고 발전도상에 있는 나라일수록 금메달과 금메달 뒤에 작각하는 민족자존심과 같은 은페물을 선호하는것 같지만 사실은 그런 나라의 봉페되고 포섭력이 빈약한 문화심리와 관련이 크다.     만일 당나가 중국스포츠계의 不成文규칙의 희생자이고 또 한국에서 확실하게 올림픽 참가선수권을 가질수가 있다면( 중국에서 하는 올림픽에서 본적이 중국인 선수를 내보내여 무슨 쇼라도 벌리려는 생각이 있을지도 모른다.) 래년 북경올림픽에 참가해도 전혀 무방하다. 당나가 중국을 이겨도 좋고 중국에 져도 좋다. 다만 좋은 경기를 해준다면 중국인 한국인을 물론하고 너그럽고 인류정신에 넘치는 시각으로 당나의 경기를 바라볼줄을 알아야 한다.       나는 오히려 만일 당나가 우승을 한다면 중국의 스포츠선수선발제도개혁의 좋은 힌트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당나를 두고  매국역적인가 무엇인가 거론함은 우리의 스포츠문화정신이 아직은 유아기에 맴돌고 있음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64    [잡담16] 남방 빙설재와 중국의 댓글:  조회:3072  추천:74  2008-02-06
      올해 음력설을 앞두고 중국 남방에는 보기드문 빙설재가 발생했다. 직접적인 경제손실과 간접적인 경제손실 그리고 사회적손실은 엄청나서 우리 중국인들의 마음에 큰 상처를 남길것이다. 그 지역의 공공기초시설이 자연재해에 견디는 힘이 빈약하고 정부를 비롯한 여러분야의 돌발상태에 대처하는 능력이 큰 차지를 보여주고 있음은 의심할바가 없다.      주강삼각주는 중국의 수출제조업이 제일 밀집된 지역이다. 때문에 렴가의 로동력-<농민공>들이 제일 많이 집중되여있다. 현재 귀향하여 음력설을 보내려던  1500만의 <농민공>들이 경광선등 통로의 불순통으로(현재는 통하고 있음) 1000여만명이 귀향을 포기했다고 한다.      중국인들을 놓고말하면 음력설이란 시적 의미가 넘치는 명절이다. 특별히 전통의식이 강한 사람들은 꼭 부모에게로 형제들에게로 자식들에게로 친지들에게로 달려가 단원의 꿈을 이루어야 하는 날이다. 중남지역과 북방지역 그리고 서남지역의 1600만명의 <농민공>들이 올해는 그 꿈을 불안과 초조속에서 꾸었다. 몇일전 광주역을 출발한 광주-무한 림시행 렬차 한대는 광주를 떠나 한번 회전운동을 한것이 19시만에 무한커녕 다시 광주동역에 도착했다는 뉴스도 읽었는데 그 렬차에 앉은 사람들은 얼마나 원통했고 불안했을가? <농민공>들의 신세가 가련하다. 돈이 없으니 항공편은 생각도 못하고, 기차를 타려니 평소에는 시간이 허락안되고, 귀향을 포기하려니 고향과 친지들이 그립고 .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들의 모습을 눈앞에 보는듯하다.     사실 나는 <농민공>이라는 명칭마저 싫다. 공인이면 공인이지 무슨 <농민공>? 공장에서 일하는데도,직업이 로동자인데도 농사군이라는 모자를 벗겨주지않는 그 기시책이 중국 특색일가?     중국은 산업화과정을 가고있는 나라이다.때문에 <3농-농촌 /농업/농민)문제가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하고 있다. 농촌이 황페해지고 농업이 불안정하고 농민들이 몰락하는 종극적인 원인에 대하여서는 산업화의 필연성, 호적제도의 락오성,농업세를 비롯한 농업운영성본의 고가성,농촌관료체제의 횡포 등에 귀결하고 있지만 <3농>문제는 장기간 존재할 추세를 보이고 있다. 정부에서도 적극적인 태도를 표명하고 관심을 보이고 여러가지 조치를 대기는 하지만 < 3농>문제가 근본적인 해결을 보기가 아주 힘들다. 인도적인 차원에서 보면 농민들더러 고향을 등에 두고 타향으로 떠나게 한다는 일은 좋은 일은 아니다. 하지만 경제의 산업화과정과 경제의 세계화중에서 중국도 수억을 헤아리는 농업인구가 반드시 산업인구로의 전변을 진행하여야 한다. 그 전변은 < 목가적인> 전변은 아니다. 눈물도 있을거고 피땀도 있을것은 누구나 잘 아는 일이다. 하지만 정부적인 차원에서는 현재<3농>에 대한 해결책들이 근본책이 아닌 < 문예가 시골로 내려간다>든가 < 의료제도가 시골로 내려간다>든가  사람이 다 사라진 시골마을에 길을 포장해준다는 등에만 그친다. 중국의 <3농>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은 농지운영집약화문제 호적문제 농민공기능훈련문제 등이 관건임을 누구나 잘 알지만 어찌하여 해결진행은 겉층에만 쇼행위에만 머무르고 있을가?       주강삼각주 지역에 일하는 수천만 농민공들이 주강삼각지에 장기거주를 할 주객관 여건이 주어지지 않는 한, 해마다 음력설은 인파의 재난을 련속하리라 생각된다.           
63    문화필록5 문화모식 개략 댓글:  조회:2517  추천:89  2008-02-04
문화필록5  문화모식 개략   模式을 사물의 형식의 규칙이라 리해를 한다면 문화모식이란 특정된 인간군체가 특정된 시대에 일반적으로 지니고 있는 문화정신과 가치취향 그리고 습성과 륜리규칙 등으로 구성된, 비교적 定穩적인 사유방식과 행위방식이의 규칙적인 로출이라 보여진다. 문화모식은 정치제도라든가 사회제도와는 달리, 그 존재의 과정에 소유한 인간군체더러 자각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내재적으로 문화모식을 사용하게 한다. 때문에 그 표현과 영향력이 은페성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超長期性과 최종결정력을 지니고있다. 문화형태의 구조로부터 보면 문화모식은 물질적인 외곽부분과 제도부분인 내심부분이 아닌,핵심부분에 속하는 정신문화 범주에 속한다. 때문에 문화모식은 문화철학과 문화학연구에 있어서 아주 주요한 一環이라고 생각된다. 문화모식에 대한 연구가 모든 문화연구방법을 대체할수는 없지만, 비교적 형상적인 연구결론으로서 실용의 가치에 이를수도 있고 여러가지 문화학설도 곁들어야 하므로 중점적인 언술을 진행하고 싶다. 문화모식은 종적인(시간적인) 축과 횡적인(공간분포적인) 축으로 이루어진 좌표에서  표현된다.   1 력사발전이라는 종적인 차원에서의 문화모식(일반성) 인류의 생성과 발전은 각 지역과 민족이 부동하고 우회적인 흔적을 뚜렷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부동한 지역과 민족의 문화정신의 구체적인 차이성을 次요적인 위치에 놓고 대신 력사의 흐름이라는 시간의 천평에 놓으면 종적인 규칙성을 보인다. 이러한 전제하에서 현재까지의 문화모식은 많은 학자들에 의하여 원시사회문화모식, 전통농업문명사회문화모식, 현대공업사회문화모식으로 구분되였다. a 원시사회문화모식은 생산력수준과 생산관계수준 그리고 인류의식의 혼돈상태로 말미암아 무의식적이고 동물본성적인 자연주의특징을 기본으로 한다. b 전통농업문명사회문화모식은 3대분업을 경유하여 사회제도와 정신문화의 인문적인 발전을 촉구한 결과 경험주의특징을 기본으로 한다. C 현대공업사회문화모식은 생산력의 비약적인 발전중에서 문화정신도 도약을 이루었으며 리성주의특징을 기본으로 한다.   2 다원발전이라는 횡적인 차원에서의 문화모식(차이성) a국가와 민족을 단위로 하는 문화모식:공동한 지역과 공동언어를 소유하고 공동경제를 경유한 민족은 공동한 문화심리를 지니게 되였으며 민족의 대소와는 관계없이 민족문화모식을 지닌다. 례를 들면 영국인의 실증주의,독일인의 사변주의, 미국인의 실용리성주의가 부동한 국가민족문화모식이다. b 문명형태를 단위로 하는 문화모식: 부동한 문명형태는 부동한 생태계통을 소유하였기에 부동한 문명형태문화모식을 배태한다. 례를 들면 오아시스문화, 해양문화,산지고원문화 등이 부동한 문명형태모식이다.  
62    문화필록 4 문화학사조 개략 댓글:  조회:2670  추천:87  2008-02-03
문화학이 독립적이고 자족적인 발전을 起源한 지역은 서구이다. 서구는 근대 산업화과정에서의 식민지운영을 직접적인 경험으로 비교적 폭넓은 시각에서 문화에 대한 깊은 연구를 진행하여 왔으며 현재까지도 문화철학이라는 높은 차원에서 문화학연구의 거의  독점적인 지위를 보존하고 있다. 서구의 여러 문화학사조를 점검하면 크게는 전통공업사회의 문화학과 현대공업사회의 문화학 문화학으로 분류가 된다. 1 전통공업사회의 문화학(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초엽에 이르기까지) a고전주의문화진화론: 생물진화론과 실증주의정신의 영향을 받아 생성된 학설로서 문화의 진화발전성과 각종 문화가 진화발전중에 보여주는 동일성의 보편성에 착안점을 두었다. 고전주의문화진화론의 대표인물은 인류학창시자로 이름높은 泰勒(영국인)와 摩尔根(미국인류학학자,저서로서는 <고대사회>) 巴霍芬(스위스인류학학자,저서로는 <母權論>)이다. b 문화전파론: 문화전파론학파는 고전주의문화진화론의 각종 문화가 진화발전중에 보편적인 동일성을 보여준다는 주장에 내재한 문화多元說에 대응하여 각종 문화는 인류의 一元문화가 전파된 산물이라 주장하였고 인류력사는 문화전파과정이라는 관점을 내놓았다. 문화전파론의 대표인물은 독일계 학자들이다.    C 력사특수론학파: 고전주의문화진화론의 문화의 보편적인 동일성에 대응하여 력사특수론학파는 각종 문화는  각 지역과 각 민족이 특이한 력사발전을 거쳐 생성된 특수산물로서 자아적인 독립적인 특징과 규칙을 지닌다고 주장하였다.   2 현대공업사회 문화학(20세기 초엽으로부터 현재까지) 전통공업사회의 문화학은 문화의 거시적인 共性에 대한 연구가 특징이라고 한다면 현대공업사회의 문화학은  문화의 구체적인 異性에 대한 세밀한 연구가 특징으로 되여있다. a 문화模式론파: 부동한 문화가 지닌 존재특징과 특이성에 대한 비교를 착안점으로 하였다. 대표인물로는 미국의 녀류학자 本尼迪克特로서 인디안의 酒神형문화모식과 日神형문화모식에 대한 걸출한 문화비교와 << 국화와 꽃>>이라는 저서에서의 일본인의 치욕형문화심리와 서양인의 원죄형문화심리의 비교를 통해 경전적인 학술성과를 취득하였다. b문화형태사관론파: 지역과 민족을 중심으로 표현되는 여러 문명을 배경으로 문화형태비교를 진행하였다. 대표인물로는 斯宾格勒(독일학자,저서로는 <서방의 몰락>)과 汤因比(영국학자, 저서로는 <력사연구>)이다. 斯宾格勒는 보편적인 력사발전규칙에 대하여 부정적인 태도를 표명하였고 력사연구는 부동한 문화연구의 전제하에서 진행되여야 한다 주장하였다. 斯宾格勒 부동한 민족과 국가라는 력사사실을 기준으로 인류의 문명형태를 애급문화, 바비론문화, 인도문화, 중국문화, 고전문화(희랍문화), 아랍문화, 마야인문화, 서방문화 등 8가지 형태로 나누었다.  汤因比는 국가와 민족을 초월한 동일한 구조속에서의 동일성을 기준으로 하는 문화형태를 애급사회、苏美尔사회(메소포타미아평원 고대원주민)、米诺斯사회(지중해 克里特섬)、고대중국사회、안디스사회(남아메리카安第斯산맥지역)、마야사회、赫梯사회(기원전1900년 소아시아 부족국가)、바빌론사회、고대인도사회、희랍사회、이란페르샤사회、시리아사회(叙利亚)、아랍사회、중국사회、인도사회、조선사회、서방사회、동로마제국사회(拜占庭),러시아사회、메끼시코사회、育加丹사회(남아메리카의 유카탄반도지역) 등 으로 나누었고 그 중에서  先位를 차지하는 6개 문명은 원시사회로부터 탄생한 문명이고 나머지15개문명은 6개문명에서 파생된 문명형태라고 인정하였으며 그밖에 또 요절한 문명으로서는 玻里尼西亚(태평양중부 갈색인종문명)、북유럽사회 애스키모인사회 유목사회,오스만민족사회 ,스파르타사회를 언설하였다. c상술한 문화학사조외에도 문화공능주의학파, 문화 인격학파,결구주의문학학파,인류의식상징학파 등도 문화에 대한 세부적인 구체적인 연구를 치밀히 진행하여왔다.
61    문화필록3 중국근대로부터의 문화비교와 문화운동 맥락 댓글:  조회:2611  추천:108  2008-01-31
문화필록3   중국근대로부터의 문화비교와 문화운동 맥락   문화의 3가지 형태특징에 대한 리해를 하기 위하여 중국근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중국에서 진행된 동서문화비교와 문화운동의 맥락을 더듬어보는것도 무방하다고 생각된다. 근대로부터 시작되는 중국인의 동서방문화비교와 문화운동은 시작에는 수동적인 표현을 많이 보이였다. 아편전쟁이후 청제국의 기세가 기울어지면서 일부 관료배들은 외래세력의 핍박아래 동서문화비교를 진행하였고 청제국 패망의 원인을  물질문명의 락오성에 귀결하였다. 결과 총과 대포에 대한 갈망과 근대산업에 대한 요구성을 <<양무운동>>이라는 력사사건으로 표현하였다. 그 뒤에는 물질적인 차원을 떠나 사회제도의 차이성에서 원인을 찾는, 강유위 양계초를 대표인물로 하는 유신파들이 광서황제와 자희태후를 리용하여 <<백일유신>> 이라는 력사사건을 만들게 된다. 또  유신실패 뒤에는 진독수 호적을 대표로 하는 문화거인들이 나타나 중국락오의 근원을 정신문화라는 차원에서 탐색하였고 문화운동의 결과는 바로 <<5.4운동>>이다 . <<양무운동>>으로부터 <<백일유신>>에로 다시 <<5.4운동>>의 전환이 바로 근대 중국의 동서문화비교와 문화운동의 맥락이며 물질문화로부터 출발하여 사회제도문화에로 다시 정신문화에로 운동한 과정이고 결과이다. 력사는 반복법이라는 우스개를 하기도 한다. 당대에 이르서서 진행된 개혁개방도 사실은 문화비교와 문화운동이라는 근본적인 배경을 지니고 있다. 화국봉시대에 일본으로부터 생산라인을 구입하여 상해에 큰 강철회사를 만든 일부터 시작하여 80년대 중엽에 일어난 <<문화열>>이라든가 사상개방이라든가 사회문화 현상에로의 진입, 그리고 근년에 다시 나타나는 소위 신유학현상의 출현도 사실은 중국 당대의 동서문화비교와 문화구축이 물질적인 사회제도적인 정신문화적인 3 단계를 걸치고 있다는 입증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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