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zhengyinwenahua 블로그홈 | 로그인
정음문화칼럼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홈 > 칼럼

전체 [ 162 ]

조선족은 누구인가:조선족 민족정체성 연구의 방법을 론하다 방미화 조선족은 19세기 후반부터 조선반도에서 중국으로 이주하여, 1990년대 이전까지는 이동이 거의 없이 동북지역에서 생활하며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형성되여온 집단이다. 하지만 동북아시아의 정치경제적변동속에서 1990년대 이후 조선족들은 중국의 대도시나 연해 개방도시, 미국, 일본, 로씨야, 한국 등 국외로 이주하는 행렬에 들어서게 되며, 현재까지 한국으로 입국한 조선족들이 가장 많은 수치를 차지한다. 한국이주 초기, 많은 조선족들은 한국인들과 "같은 민족"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또 다른 나라에 비해 한국은 상대적으로 적응이 쉬울것이라는 기대를 걸고 한국으로 입국하게 된다. 그러나 이주 초기 한국의 산업연수제도하에 대부분 미등록자의 신분이였던 조선족들은 입국하기전의 기대와는 달리, 임금체불, 사기피해, 폭행 등 불평등한 대우를 받게 되며, 더우기는 "못사는 중국에서 온 중국인", "3D업종에 종사하는 최하층 로동자"라는 고정관념속에 위치해있으면서 무시, 편견, 차별의 경험을 하게 된다. 이와 같은 경험속에서 재한조선족들은 한국을 “조상의 나라”라고 생각하던데로부터 스스로에게 “조선족은 과연 누구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게 되며, 따라서 조선족정체성에 대한 중・한・일 학계의 학문적접근이 증가하게 된다.  그렇다면, 조선족정체성에 대한 연구는 현재 어떠한 수준에 와있는가. 초기 조선족정체성연구에서는 정판룡교수(1996)의 “조선족은 중국으로 시집온 며느리”라는 “며느리론”과 “모국은 한국이고 조국은 중국”이라는 “이중정체성”이 가장 많이 론의되였다. 이에 김강일(2001)은 “변연문화론(邊緣文化論)”을 주장하면서 “며느리론”과 “모국-조국론”을 강하게 비판함과 동시에, “조선족의 문화와 정체성은 중국과 조선의 문화와 정체성이 융합되여 만들어진 새로운 문화와 정체성으로서 자신을 ‘며느리’라고 여기는것은 주권국가의 국민으로 당당하게 여기지 못하는 굴종적인 자세”라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이중정체성”론의에 대해 황유복교수(2009) 또한 “‘중국공민’은 국적과 관련된 개념이고 ‘조선민족’이란 민족과 관련된 개념으로서 서로 다른 개념을 함께 싸잡아서 이중성을 이야기할수 없다”며 조선족 “이중정체성”론의를 반박하였다.  이와 같은 기존의 론의들은 서로 다른 립장에서 조선족정체성을 전반적으로 규정하고자 했으며 조선족정체성에 대한 문제를 학계의 쟁점으로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연구의 의의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론의에서 조선족의 정체성은 어떤 하나의 고정된 실체로 간주되며, 조선족정체성에 대한 일반화의 경향이 비교적 강하다.  이러한 연구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조선족정체성에 대한 연구는 설문조사를 통해 계층별, 년령별, 성별, 지역별, 교육수준, 소득수준 등 변수에 따라 중국 현지 조선족 및 한국이주 경험이 있는 조선족의 국가의식, 민족의식, 소수민족의식, 한국관, 남북통일관 등을 실증적으로 고찰하는 량적연구가 증가하게 된다. 그러한 량적연구 또한 조선족들의 여러 변수에 따라 국가, 민족 의식의 실태를 파악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으나, 정체성에 접근함에 있어서 항상 국가, 민족이라는 경계를 설정하거나, 그것의 외연인 소수민족의식, 한국관, 남북통일관 등 범주들에 대한 내용들만 고찰하여 기술하기에 연구자가 설정한 측정범주들을 넘어 이주공간에서 수많은 경계들을 넘나들며 스스로의 “민족적소속”을 나름대로 판단하고 선택하며 해석하는 력동적인 자기인식의 형성과정을 간과한다.  그리하여 2000년대이후의 연구에서는 정체성을 어떤 하나의 고정적이고 정태적인 실체로 가정하던 기존 연구의 한계에서 벗어나 정체성을 류동적이고 동태적인 과정속의 구성물로 간주하면서 정체성 (재)형성과정에 주목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연구들에서는 조선족의 민족/국가 정체성이 한국사회에서의 생활경험을 통해 분화되고있다고 주장하고있다.  그렇다면, 조선족의 민족정체성(민족적 소속감, 귀속의식)은 어떻게 분화되고있는가. 지난 몇년간의 연구과정에서 필자는 민족적귀속을 표출함에 있어, 조선족들이 국가, 지역 및 대상에 따라 자신의 민족적소속을 다르게 표출하고있음을 발견하였다. 일례로 일부 조선족들은 중국에 있을적에는 스스로를 “중국인”이라고 생각하기보다 “조선족”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일단 다른 나라(한국이 아닌)로 이주했을 경우에는 “조선족”이라는 정체성에 비해 “중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더욱 강하게 표출한다. 그외 어떤 조선족은 한국에서 국적을 취득한 뒤, 한국 주류사회에서나 한국의 조선족사회에서나를 막론하고 “동포이지만 귀화했다”는것을 강조하면서 조선족정체성을 회피하고자 한다. 이러한 사례들은 조선족의 귀속의식은 단일한 요소로 획일화되거나 고정되여있지 않고 지금 현재의 공간과 상황에 따라 달리 표현되며 류동하고있음을 말해준다.  이와 같은 현실적상황에서 조선족정체성에 대한 연구는 어디까지나 행위주체들이 사회적관계망속에서 자신의 위치와 립장을 설정해나가는 과정에 주목해야 할것이다. 정체성은 항상 타자와의 상호작용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자아의 경험을 떠나 론할수가 없기때문에 정체성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각 개인의 귀속의식의 배렬 및 표출 등 구체적인 류동방식에 대한 고찰을 통해 한 민족 집단의 정체성과 삶의 방식을 재조명해야 할것이다. 따라서 한 민족집단-조선족 정체성에 대한 폭넓고 심도 깊은 연구는 민족 공동체 및 정체성 리론을 심화시키고 학술적공헌도를 높이는데 기여하게 될것이다.  【방미화 약력】 성명: 방미화 소속: 연변대학교 사회학과 전공: 이주사회학, 초국적 이동과 정체성, 초국적 네트워크 학력: 한국 한국학중앙연구원 사회학 박사 연변대학 력사학부 학사, 석사,  주요론저: 《이동과 정착의 경계에서: 재한 조선족의 실천전략과 정체성》(2013, 이담북스) 출처 인민넷  
21    이동의 시대: 일본에 있는 조선족을 보다 댓글:  조회:1656  추천:1  2016-08-02
이동의 시대: 일본에 있는 조선족을 보다 허연화   일본에 있는 조선족인구는 통계가 되여있지 않다. 현재 한국의 경우 조선족만 따로 통계하고있는것에 비하면 일본에 있는 조선족은 보이지 않는 집단으로 불리우기도 한다.    이것은 많은 나라에서 외국인을 통계함에 있어서 려권에 있는 국적란을 기초로 하고있기때문이다. 그러니 한국의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에서 통계자료에 조선족을 별도로 통계해있는것이 오히려 특수한 상황인것이다.   허나 공식적인 통계수자는 없지만 일본에 거주하고있는 조선족인구는 현재 약 7~8만명정도로 추정하고있는것이 일반적이다. (박광성 '2009정부연구팀통계조사'를 참조로 추정). 이것은 2011년 일본의 동북지방 태평양해역지진이후 귀국한 중국인이 많은것을 감안하여 추정되는 인수이다. 줄곧 증가추세이던 일본체류 중국인이 지진직후 2011년 통계에서 1만 2천명이 줄어들었으며 이러한 체류인구의 하강추세는 2013년까지 지속되였다. 지진후 약 2만 5천명이 줄어들었던 체류중국인은 2014에서야 다시 상승추세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이상의 상황으로 보아 조선족의 인구도 감소시기와 입국정체시기를 거친 현재는 2009년의 인구통계와 비슷하거나 조금 적을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의 재류외국인중 중국국적인구가 2007년 65만명을 돌파하여 여태껏 줄곧 1순위를 해왔던 한국/조선 국적 인구를 초과하게 됨으로써 일본국내에서도 화제가 되였다. 중국경제의 의존도가 높아지고 체류중국인이 증가하는 사회적배경하에 일본의 3대 신문중 하나인 아사히신문에서는 2009년2월부터 2010년6월까지 “재일화인(在日華人)”이라는 시리즈특집을 만들기도 했다. 조선족의 이야기도 《조선족 아시아를 련결하려 하다-제10부 “고동조류”(朝鮮族アジア結びたい─第10部〈鼓動潮流〉)》 라는 시리즈의 한편으로 거론된바가 있다(김화분, 2016).   그럼 일본의 조선족은 어떻게 형성되였을가?   1972년 중일국교정상화와 1978년 중일평화우호조약을 맺은 이듬해인 1979년부터 중국은 일본에 연수생의 이름으로 국비류학생을 파견하였다. 주로는 리공학전공의 본과학생과 교원을 중심으로 중국국내에서 1년간의 예비교육을 시킨후 일본에 파견하였다. 당시 주요한 선발기준의 하나가 일본어시험이였는데 일본어교육을 유지해왔던 동북지역출신자 특히 조선족의 일본어성적은 매우 높았다고 한다(2013년 당사자 인터뷰). 1978년부터 1983년까지 중국으로부터 일본에 국비로 파견된 인수는 1972명에 달하였다고 한다(白圡悟, 2006). 조선족의 최초의 일본입국은 중국의 국비파견의 초기부터 있었던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자료가 있는 가장 빠른 일본입국은 1983년(조봉빈2003)으로 되여있지만 실제로 이것보다 더 빠른 시기에 입국한 조선족이 있었을 가능성을 부정할수 없다.   1984년 일본의 “류학생수용 10만인 계획”의 실행으로 중국쪽에서는 상해와 복건의 사비류학생이 일본입국을 하게 된다. 같은해 10월에는 취학생수속이 간이화되여 일본어학교의 취학생 입국률이 증가하였는데 특히 중국인취학생의 증가는 현저하여 1983년에 160명이던 학생수가 1988년에는 28256명으로 늘어났다(田中宏, 1995).    사비류학생이라고 하지만 제한된 주요도시의 지식인에 한정되여있었다. 그후 1986년 실행된 중국의 “중화인민공화국공민출경관리법”에 의하여서야 비로소 특정지역이 아닌 전국의 일반국민이 개인적으로 외국에 갈수 있게 됨으로써 국비류학생에 제한되였던 출국의 문이 법적으로 전국의 사비류학희망생한테도 열리게 되였다.    겉으로는 중국인의 출국과 일본입국 량쪽의 문이 열린것처럼 보이지만 번잡한 일본입국자료준비 특히 일본인보증인을 필요한 상황은 사비류학길앞에 높은 문턱으로 가로막고있었다. 엄격해졌다 완화되였다 하는 비확정적인 일본류입정책의 장단에 맞춰가야 하는 상황이였지만 돈내고 보증인을 부탁하거나 일본체류시경제증명을 가산하여 제출하는 등 여러가지 비정규적인 방식으로 일본에로의 조선족의 이동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1996년12월, 일본입국수속에서 가장 골치거리였던 보증인제도가 페지되여 일본수속이 대폭적적으로 간소화되고 수속하는 사람들의 부담도 많이 줄어들었다. 조선족은 이 시기를 전환점으로 일본에로의 이동이 가속화되고 대규모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때로부터 일본행을 희망하는 조선족은 일본에 있는 친척, 지인 등 조선족자신의 내부네트워크를 리용하는 일본이동이 가능하게 되였다(권향숙, 2011).   한편 내부네트워크의 개방은 많은 일본류학수속브로커를 창출했다. 거액의 수속비를 지불하기 위하여 빚을 지고 입국하는 사람들이 푸술하였다. 그리하여 입국한후의 가장 급선무는 일자리찾기였다.    주로 취학생/류학생으로 체류하는 조선족은 일본의 저출산에 의한 학생부족을 메워줌과 동시에 아르바이트의 형식으로 음식점 등 서비스업의 로동력역활을 하게 된다. 브로커의 수속비와 일본에서의 학비에 기본적인 생활비를 합치면 당시의 중국 년수입의 10배가 되는 액수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조선족을 포함한 “가난한 곳 출신”의 류학생들한테는 학비를 자기절로 벌면서 공부도 할수 있고 또한 동시에 자기만 노력하면 외화수입을 확보할수 있는 일본류학의 길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을것이다.   2000년에 들어서면서 일본은 미국의 IT버블에 자극을 받고 “출입국관리기보계획(제2차)”이라는 고급인재유치의 일환으로 IT기술자를 해외로부터 직접 류입하게 된다. 이것은 일본에 입국함과 동시에 직접 회사원이 되는것이므로 경제적인 면에서 류학생보다 우월한 상황이다. 집단플레이를 중시하는 일본기업의 기업풍으로부터 IT관련의 기술지식을 소유하는것도 중요하지만 일본어리해능력으로 비롯된 커무니케이션능력도 엄격히 요구되였다. 기술력과 일본어능력 두가지를 가지고있는 조선족은 여러 IT중계회사의 쟁탈의 대상이 되였던것도 상상하기 어렵지 않을것이다. 그후의 많은 중계회사에서는 아예 일본어언어능력을 가지고있는 조선족에게 출국전 일정기간의 기초적인 IT관련학습기간을 습득시키고 출국하게 하는 방식을 취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일본에 입국하는 주요한 방식은 학생신분 아니면 IT기술신분 및 이에 비춘 가족체제신분이다.    조선족의 대규모적인 일본입국이 시작된 80년대후반기로부터 지금까지 거의 30년가까운 세월이 지났다. “류학”(2010년 “취학”체류자격이 “류학”체류자격으로 통일화됨), “기술/인문지식국제업무”, “투자경영”, “연구”, “교수”, “영주”, “귀화”로 조선족의 현재 일본체류자격은 매우 다양하다. 그중에는 일본을 발판으로 미국, 유럽, 한국 등 다른 나라로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나라로부터 일본에 오는 사람, 일본을 기점으로 세계적으로 비지니스, 연구의 장을 넘나들고있는 조선족도 적지 않게 출현하고있다.    이동이 조선족한테 약이냐 독이냐를 론하기는 복잡한 문제이다. 하지만 “액체근대”(G.Bauman, 2000), “국제이민의 시대”(S.Castles&M.J.Miller, 2007)라고 불리울 정도로 국경을 넘나드는 인구이동현상은 이미 현대사회의 하나의 큰 특징이다. 여러 이동의 장을 어느새 앞장서서 체험하고있는 조선족의 상황에 대한 리해가 나아가서 세계화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든이에게 실천적인 전망을 제시할수 있는것이 아닌가고 생각해본다.    주:문장중 괄호안의 부분은 출처, 저자와 년도임.   【허연화 략력】   성명: 허연화 (许燕华)  소속: 교토대학 문학부 행동문화학과 사회학 전공: 사회학, 지역연구, 이민연구. 학력: 일본 교토대학 석박사 연변대학교 력사학 학사 주요 론저:  론문 “이동하는 중국조선족”(2015, 21세기동아시아사회학), “이민송출후의 농촌의 사회변화과정”(2015, 소시오로지) 등.   출처: 인민넷(조문판)
20    수연례(寿筵礼)를 통해 보는 전통문화의 현주소 댓글:  조회:1624  추천:1  2016-07-26
           수연례(寿筵礼)를 통해 보는 전통문화의 현주소                                   리화 아이가 태여나서 1년이 지나면 부모가 돌잔치를 열어 자식의 무병장수를 기원한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어느덧 그 부모가 60세가 되는 시점에 이르면 장성한 자식들이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고 건강과 장수를 축원하는 효심을 담아 환갑잔치를 치러드린다.  이른바 환갑이란 사람이 태여나서 60년이 지나면 간지(干支)가 한번 되돌아온다는 의미에서 유래한 말이며 “회갑”(回甲), “화갑”(花甲) 혹은 “주갑”(周甲), “환력”(还历)으로도 불린다. 영조(1694년-1776년) 이래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환갑례는 한 개인이 중년으로부터 로인이라는 새로운 사회적 년령집단으로 신분전환을 이루는 통과의례적 성격뿐만아니라 자식들의 부모에 대한 효 실천의 중요한 장으로 인지되여왔다.  같은 맥락으로부터 만 60세가 지난후 장수를 축원하는 일련의 의례를 수연례라 하는데 여기에는 칠순(70세), 희수(77세), 팔순(80세), 구순(90세), 백수(99세) 등이 포함된다. 이렇듯 부모와 자식 간에 행해지는 일종의 교환의례로서의 환갑례를 선두로 하는 수연례는 돌잔치, 혼례, 상제례와 더불어 수백년의 긴 세월동안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일생의례로 쭉 자리매김해왔다.  그러하다면 이미 100여년의 이주생활을 경험해온 우리 조선족의 수연례는 오늘날 어떠한 문화적 지속과 변용을 보여주고있으며 전통문화의 전승에 있어서 민족구성원으로서의 우리가 짊어져야 할 책임은 무엇인가.  우선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것이 수연례 주기의 연장과 종류의 다양성이다. 의학기술이 상대적으로 락후하고 생활여건이 렬악했던 과거에는 평균수명이 상대적으로 짧았고 60세를 넘기면 장수했다고 간주되였기에 환갑례가 굉장히 중요시되였으며 만 60세 생일에 맞춰 환갑례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였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특히 근래에 들어서서는 그와 정반대로 환갑례를 지내는 집안이 손꼽을 정도로 드물어가고 칠순이나 팔순 심지어 구순, 백수 잔치가 눈에 띄게 많아졌다. 이는 "환갑을 쇠면 빨리 죽는다", "인생 륙십이 청춘" 이라는 표현으로부터도 알수 있듯이 로인에 대한 사회적 기준과 인식에 변화가 생겼음을 의미한다. 즉 평균수명이 늘어남에 따라 환갑례가 갖고있던 로인•장수의 의미가 퇴색했으며 그에 따라 조선족사회에서는 환갑례의 희소화와 더불어 칠순, 팔순 등 다양한 수연례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것이다.  다음으로 수연례 장소의 변화와 그에 따른 역할변화가 주목된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조선족의 환갑례는 보통 집안이거나 집 앞마당에서 행했다. 그러나 1989년에 연길시 성흥혼례청사의 개업을 계기로 혼례를 비롯한 돌잔치, 환갑례 등 의례들이 가정집으로부터 례식장으로 옮겨지기 시작했다.  례식장이 보편화되기전 환갑과 같은 의례는 특히 농촌에 있어서 마을행사로서의 성격을 뚜렷하게 띠고있었으며 여러 집을 빌려서 손님을 맞고 음식상을 차리고 거의 모든 마을녀성들이 일군으로 동원되는 등 주민들의 참여도가 아주 높았다. 그러나 례식장 의례의 보급은 이러한 사람들의 역할을 크게 개변시켰다. 즉 이웃들은 단순한 하객, 구경군으로 역할전환을 하였고 그 참여도가 현저히 떨어졌으며 친척들 역시 례식장에서의 의식 및 식사가 끝나면 바로 그 자리를 뜨는데 이는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오락을 하면서 잔치를 벌이던 예전의 환갑례와 큰 차이를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례식장의 출현은 동시에 의례절차와 내용의 변화를 가져왔다. 수연례 상차림으로부터 시작하여 의례의 진행절차와 세부적인 내용에 이르기까지 이제 더는 가족이 아닌 전문업체와 사회자, 촬영기사 등 전문종사자들에 의해 좌우지되게 되였다.  물론 례식장 수연례에 있어서 기본골격을 이루는 것은 의연히 "효"중심의 문화적의미와 도덕적가치임이 틀림없다. 이는 그러한 전문업체들에 의해 조선족의례의 전통이 상당정도 보존되고 전승되고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례식장 의례는 전통의 인위적인 변용을 가져오기도 하며 더 중요한것은 많은 문제점을 동반하고있다는 점이다. 특히 의례의 진행을 주도하는 관련업체와 전문종사자중 상당수의 사람들이 의례문화에 대한 전문적인 교육을 받았거나 자격증을 소유하지 못한채 단순히 직업적특성을 우세로 림하기때문에 의례가 자칫하면 고유의 문화적의미를 상실한 그냥 “웃기는 쇼”로 전락할 위험성이 많으며 또 그 의례에 참석한 타민족들에게 왜곡 된 “우리 문화”를 보여주는 우를 범하게 되는것이다. 따라서 정부차원에서의 교육과 체계적인 관리도 필요하겠지만 의례전문종사자들 역시 단순한 상업목적의 추구가 아닌 일개 민족문화의 전승자로서의 자각과 사명감을 갖추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부조형식의 변화를 들수 있다. 1980년대까지는 현금이나 옷, 음식으로, 그리고 그뒤로는 현금부조가 우세를 점했다. 그러나 근년에 이르러 환갑례를 치르지 않고 칠순, 팔순잔치를 치르는 풍조가 짙어짐에 따라 예전처럼 하객을 넓은 범위에서 초대하지 않고 친척과 부모님 동년배의 로인들만 청하여 대접하며 부조를 받지 않는 가족들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일반적으로 가족을 단위로 하는 과시는 종종 주위사람들에게 가족원들 사이의 우애와 화목 그리고 효도라는 긍정적인 가치평가를 부여받으면서 “잘난척이 아닌 자랑해도 되는 일”로 비쳐진다. 따라서 부조를 받지 않고 로인들을 정성껏 대접하며 거기에 선물까지 드리는 무부조 수연례는 자식들의 효심을 충분히 표출하는 도덕성 및 사회적인 신분과 성공을 과시하는 장으로서의 성격을 한층 강화하고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오늘날 조선족수연례는 박제 된 전통문화의 표본이 아닌 문화적 지속과 변용이 공존하는 력동적인 모습으로 살아 숨 쉬고있으며 이제는 의례주체이자 소비자로서의 우리들 자신이 전통에 대한 리해를 더 깊이하고 의례의 문화적의미에 대한 인식을 한층 높임으로써 의례의 실천현장에서 일방적으로 끌려다니지 않는 진정한 주체가 되며 또 그속에서 전통의 보존과 전승이라는 민족의 일원으로서의 책임을 짊어져나가야 할 때가 온것이다. 【리화 략력】 성명: 리화 (李华)  소속: 연변대학교 사회학과 전공: 문화인류학, 초국가적 이동과 가족, 조선족 생활문화 학력: 일본 동북대학교 학술박사 연변대학교 정치학 학사 주요 론저: 저서 《조선족사회의 변동과 가족생활》 (2015, 한국학술정보) 외 다수 론문을 국내외학술지에 발표           출처: 인민넷  
19    한국을 통해 조선족녀성들은 어떤 지식을 배웠는가? 댓글:  조회:1830  추천:1  2016-07-20
한국을 통해 조선족녀성들은 어떤 지식을 배웠는가? 김화선 통계에 의하면 2014년 6월말까지 한국에서 생활하고 취업해있는 중국조선족인구는 55만여명이고 그중 남성이 53%, 녀성이 47%를 차지하여 녀성이 남성보다 약 3만명 적게 체류하고있는것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1992년 중한수교를 전후하여 시작된 조선족의 한국 이주력사속에서 조선족녀성들은 어떤 경험을 했으며 어떤 새로운 지식을 얻었을가? 국제이동을 경험한 조선족녀성들의 경험과 지식이 현재 중국조선족사회를 어떠한 방식으로 변화시키고있을가? 이러한 질문은 조선족녀성들이 하나의 론리로 단일화할수 없는 다층적이고 이질적이고 다양한 삶의 경험을 지닌 주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필자는 한국류학에서 “젠더(사회성별)시각”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는 도전적이고 흥미로운 녀성학공부를 한 사람으로서 연변대학 조선족녀성학자들이 언제, 어떻게 “젠더”개념과 리론을 접하게 되고 “녀성연구”와 “녀성운동”연구를 시작하게 되였는지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1993년 하반기 연변대학에서는 녀성학바람이 힘차게 불고있었다. 1993년 4월, 연변대학 정치학부 김동화교수는 한국 리화녀자대학교 한국녀성연구소 소장인 장필화교수와 박진숙연구원을 연변대학에서 개최하는 “동북아 조선민족문화의 계승과 발전”학술대회에 초청하였다. 이어서 리화녀대와 연변대학 간의 교수, 연구원 교환프로그람에 따라 연변대학에 파견된 한국녀성연구소 박혜란연구원은 연변대학의 녀성학강좌 개설을 위한 준비작업으로 정치학, 력사학, 철학, 경제학, 문학 등 다양한 전공분야의 녀성교수 10여명을 대상으로 매주 두세번씩 녀성학강의를 진행하고 친선을 도모했다. 박혜란연구원과의 교류를 통해 녀성문제와 그 해결방안에 대해 가일층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게 된 연변대학의 리복순, 량옥금, 채미화, 림금숙 등 녀성교수들은 1993년 11월 19일에 연변대학 지도부의 강력한 지지를 받아 녀성문제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술기관인 “연변대학 녀성문제연구중심”을 설립했다(2000년 5월 18일에 녀성문제연구중심을 녀성연구중심으로 개칭했다).  1993년 11월 24일, 연변대학 녀성문제연구중심과 리화녀대 한국녀성연구소 간의 “학술협력에 관한 협의서”가 체결되였다. 녀성연구소들간의 자매결연을 바탕으로 해서 1996년 4월 2일에는 두 대학이 학술교류협정을 맺었다. 상호간 존중과 호혜평등을 원칙으로 교수 및 연구원을 상호 교환하고 공동 학술대회를 개최한다는 내용 등이 포함된 학술교류협의서에 연변대학 박문일총장과 리화녀대 윤후정총장이 서명함으로써 이후 두 대학은 본격적인 협력체제를 열어가기 시작했다.  1993년 12월 1일-2일, 한국 리화녀대 한국녀성연구소에서 주최하고 서울시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 팔모정에서 개최된 “제1차 동북아녀성학술대회”는 “한중 녀성의 지위”라는 주제로 진행되였다. 이 대회에서 “중국 동북 3성 조선족녀성의 지위”라는 주제를 가지고 당시 연변조선족자치주 인민대표 상무위원회 부주임 리봉련, 당시 료녕성 무순시 조선족중심소학교 교장 김죽화, 당시 할빈시 소수민족부녀연의회 부회장 최숙진 등이 길림성, 료녕성, 흑룡강성의 녀성상황에 대해 발표했다. 이는 조선족녀성들이 한국에 가서 처음으로 녀성학학술대회에 참석한 사례로 되겠다. 연변대학 녀성문제연구중심과 리화녀대 한국녀성연구소가 공동으로 주최한 “제1차 조선민족녀성학술대회-조선민족 전통문화의 계승과 변형 속의 녀성”은 1994년 7월 12일부터 13일까지 연변대학에서 개최되였다. 량옥금, 채미화 등 8명의 조선족 녀성교수들이 론문발표를 했다. 이번 학술대회는 그동안 서로 다른 체제에서 살아오는 동안 나타난 이질성과 동질성을 확인할수 있었던 의미 있고 유익한 시간이였다고 할수 있다.  제2차 조선민족녀성학술대회는 1995년 11월 3일에 리화녀대에서, 제3차는 1997년 6월 30일에 연변대학에서, 제4차는 1999년 2월 26일과 27일에 연변대학에서 열렸다. 제5차부터 제9차(2015년10월)까지의 조선민족녀성학술대회는 조선 김일성종합대학 녀성교수대표단이 참석하였고 연변대학에서 개최되였다. 론문발표를 통해 상이한 정치경제체제속에 있는 조선민족 녀성학자들은 지구화라는 세계적인 흐름속에서 녀성문제의 공통성과 상이성에 대해 론의하고 친선을 다지는 자리를 만들었다. 그동안 연변대학 녀성문제연구중심과 리화녀대 한국녀성연구원 간의 학술적인 친선관계를 탄탄하게 구축해온 하나의 축이 량쪽 연구소가 공동으로 주최한 “조선민족녀성학술대회” 등의 국제학술대회였다면 다른 하나의 축은 교수 및 연구원들의 교환/연구 프로그람이라 할수 있다. 한국녀성연구소에서 연변대학에 처음으로 파견했던 연구원이 바로 연변대학에 녀성학 붐을 일으켰던 박혜란연구원(체류기간 1993.7-1994.4)이다. 연변대학에서는 1993년 9월에 파견된 조선문제연구소 한옥금연구원을 필두로, 1994년 9월의 리승매교수, 1997년 5월의 채미화교수, 1998년 4월의 량옥금교수, 1999년 11월의 김화선강사, 2001년 3월의 리해응교사, 2002년 4월의 강순화연구원, 2002년 9월의 김향화강사, 2003년 3월의 림금숙교수, 2003년 9월의 지미란교사, 2004년 9월의 조인복교수 등 11명의 중, 청년 연구원들이 리화녀대 한국녀성연구원에 파견되였다.  이들은 대략 6개월에서 1년에 이르는 체류기간 동안 한국녀성연구원과 리화녀대 녀성학의 축적된 성과들을 접하면서 녀성연구의 시야를 넓혀가는 한편, 한국녀성연구원에서 실시하는 다양한 특강 및 세미나에 강사로 참여해 중국녀성, 조선족녀성들의 현황에 대해 발표함으로써 한국쪽 연구자들의 시야를 넓혀주는 역할을 해왔다.  1999년 10월부터 현재까지 지난 17년간 연변대학 녀성연구중심에서는 “직업녀성문화연구반”을 운영하여 연변지역사회 녀성교육에 힘을 쏟아왔다. 대학이 사회와 적극적인 관계를 맺어 대학이 보유하고있는 자원과 시설을 지역사회에 제공하고 또한 사회로부터 새로운 자극과 도전을 받아들이는것이 대학의 임무중 하나라는 신념에서였다. 녀성평생교육리념으로 진행되는 “직업녀성문화연구반”의 프로그람을 통해 연변대학 녀성교수들과 연변지역의 직업녀성들은 서로 친밀한 접촉을 많이 하게 되였고 아름다운 녀성의 인생, 녀성이 바라는 살기 좋은 지역사회를 어떻게 만들어가는지에 대해 소중한 경험을 축적하게 되였다. 우에서 서술한 조선족녀성학자들의 젠더지식 습득 및 이에 기초한 녀성공동체 만들기 및 지역 녀성운동은 중국조선족녀성운동사에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것이 조선족녀성들의 또 하나의 삶의 방식을 구성해갈 새로운 힘, 즉 녀성학지식을 생산하고있고 이런 지식들이 조선족녀성들의 주체성 재구성에 기여하고있으며 조선족사회를 녀성이 살기 좋은 아름다운 사회로 변화시켜가는 초석으로 될것이라는 점만으로도 고무적인 일이라고 할수 있겠다.  [김화선 략력] 김화선, 녀, 1969년 출생, 소속: 현재 연변대학 녀성연구중심 주임, 연변대학 사회학과 부교수 학력: 리화녀자대학교 녀성학과 박사, 연변대학 정치학부 학사 저서: 《조선족마을의 변천연구》(2012년), 연변대학출판사. 출처 인민넷
18    신집거지 조선족사회 커뮤니티 연구와 “사회적련결망” 댓글:  조회:1644  추천:1  2016-07-20
                    리상우 최근 연구프로젝트 수행을 위해 이민 관련 공부를 하다보니 사회적련결망리론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우선, 리론적인 측면에서 사회적련결망리론은 국제이주리론의 전통적인 두 가설인 고전경제학적관점에서 바라본 행위리론(합리적선택리론, 배출-흡인리론)과 세계체제론에 립각한 구조주의적시각(로동시장분절론 등)을 보완할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즉 행위리론과 구조주의적시각이 개인행위자나 구조를 강조하고있고 국제이주에 대한 미시적/거시적 차원의 설명력을 줄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있음에도 이주자 개개인의 구체적인 경험사례에 대한 인과적설명을 완전히 제공하지 못할뿐만아니라 단지 초기이주의 원인에만 주목하다보니 이주 이후 적응 및 후속 이주를 촉발하는 다층적요인을 규명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한계를 보이기때문이다. 행위자와 구조를 통합하는 관계론적시각으로 “네트워크” 또는 “사회적련결망”의 개념에 주목하는것이다.  다음으로, 조선족사회는 신집거지에서 재조합의 모습을 보여주고있는데 다양한 온•오프라인 커뮤니티들이 탄생했고, 이러한 커뮤니티 관련 연구에 있어서 사회적련결망리론이 어떤 리론적함의를 지닐지에 대한 관심에서였다. “사회적련결망”은 1954년 반스(J. A. Barnes)에 의해 최초로 도입된 개념으로서 산업사회에서의 사회적련결망을 사회적상황에서의 사회관계에 관한 은유적진술로 사용하고있다. 또한 부르디외(P. Bourdieu)에 따르면 사회적련결망은 사회적자본이다. 부르디외는 자본을 경제적인 차원에 국한시키지 않고 사회적경쟁의 도구로 사용할수 있는 모든 에너지로 간주한다. 한 개인이 소유한 사회자본의 총량은 그가 동원할수 있는 련결망의 범위와 그 련결망에 련계된 각 사람의 경제, 문화, 상징자본의 총량이 된다. 한편 사회적자본이며 동시에 정보와 쇄신의 전파매체로 중요한 구실을 하는 사회적련결망은 흔히 도시빈민의 생활, 소수민족 이민집단의 적응, 농촌이주자의 도시적응, 비공식부문의 경제활동 등의 한계집단 내지는 주변집단의 사회적응과 생활에 중요한것으로 인식되고있으며, 또한 핵심집단의 사회적련결망은 그 특권적지위를 유지하고 재생산하는데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고있다. 사회적련결망리론을 적용한 본격적인 신집거지 조선족사회 커뮤니티연구를 위해서는 한국인과 중국인의 사회적련결망에 대한 리해가 선행되여야 되지 않을가싶다.  한국인의 사회적련결망의 핵심키워드는 “연고(缘故)주의” 또는 그에 기초한 “연줄”이다. 한국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연고”는 “혈통, 정분, 법률 따위로 맺어진 관계” 혹은 “인연”을 의미하는데, 리훈구는 “연고”를 개인이나 집단이 부당한 리득을 취하는 세태를 묘사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일종의 매스컴 용어로 보고있다(리훈구, 2003, 《연고주의》, 법문사, 20페지). 또한 “연줄”은 “지연이나, 학연, 혈연처럼 특수주의적이고 페쇄적인 관계”이고 연고주의를 바탕으로 도구적효률성을 지향하는 관계이다. “연고주의”에 기초한 “연줄”을 특징으로 하는 한국인의 사회적련결망의 구성에 있어서 가장 대표적인것이 가계 혹은 가문 등 혈통을 중시하는 혈연(血缘, 대표적인것이 종친회(宗亲会), 고향으로 련결된 지연(地缘, 대표적인것이 향우회(乡友会, 즉 老乡会) 그리고 출신학교로 얽히는 학연(学缘, 대표적인것이 동문회(同门会, 즉 校友会)이고 종교 연줄망과 군대 인맥도 중요한 연줄망이다.  한편, 많은 연구자들의 주장처럼 중국인의 사회적련결망의 핵심키워드는 “관계”로 볼수 있다. “관계”를 특징으로 하는 중국인의 사회적련결망의 구성과 관련해 비효통(费孝通)은 “차서구조(差序格局)” 개념을 제시했다. “차서구조”는 동심원구조로 볼수 있는데 “마치 잔잔한 물에 돌을 던질 때 수면이 동심원을 그리며 넘실거리는 한겹한겹의 물결과 같다. 개인은 이러한 관계의 동심원의 원심에 위치하고있으며 관계의 물결이 닿는 개인과 서로 련결을 짓는다”는것이다.  동일한 유교문화권에 속하는 한국인과 중국인의 사회적련결망은 비슷하면서도 구별된다. 혈연을 바탕으로 한 가족관계 및 친족관계가 사회적련결망의 핵심적위치를 차지한다는 점, (내부와 외부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량자 모두 특수주의를 지향하고 강한 페쇄성을 보인다는 점, 량자 모두 정보 및 재화가 류통되는 중요한 경로이며, 각 개인에게는 정서적 및 도구적 기능을 이중적으로 수행한다는 점 등에서 공통적이다.  반면에 아래와 같은 몇가지 차이점도 확인할수 있다. 우선, 한국인은 주로 혈연, 지연, 학연을 중심으로 한 각종 연고집단으로의 가입을 통해 사회적련결망을 전략적으로 구축하고 중국인은 자아를 중심으로 동심원의 사회적련결망을 확정해나간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한국인의 사회적련결망에서 혈연 연줄이 핵심적위치, 중국인의 사회적련결망 구축은 자신의 수요에 따라 혈연관계는 물론 동창관계, 동료관계, 업무관계 등 다양한 관계를 동심원구조에 끌어들인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한국인의 사회적련결망은 일단 형성되면 정착화하는 경향을 보이는 반면, 중국인의 동심원관계망은 핵심관계망이 매우 안정적으로 정착되고 외부 동심원은 외부로 개방되여있어 강한 유연성을 보인다. 요컨대, 한국인과 중국인의 사회적련결망이 상술한 특징을 보여주고있다고 할 때, 과경민족인 조선족의 사회적련결망은 어떤 특징을 보여줄가, 더불어 신집거지에서의 조선족의 사회적련결망은 어떤 새로운 변화를 보여주고있는지, 본격적인 연구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리상우 략력】 성명: 리상우(李翔宇)  성별: 남 출생년월: 1976.7 소속: 중국해양대학 조선어학부 전공: 조선반도문제, 동북아국제관계사 학력: 한국 서강대학 정치학 박사 연변대학 법학 석사 동북사범대학 법학 학사 경력: 한국 서강대학 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 연변대학 사회과학부 강사를 거쳐 현재 중국해양대학 한국연구센터 전임연구원, 중국해양대학 조선어학부 강사. 주요 론저: 《초국적 이주, 중국조선족과 경계설정》(《한국과 국제정치》, 2015) 、《신집거지와 중국조선족의 민족교육 실태 분석: 칭다오 정양학교 사례를 중심으로》(《동아연구》, 2014) 、《개혁기 중국조선족사회의 정체성에 대한 고찰: 구심력과 원심력을 중심으로》(《동아연구》, 2007) 등 다수 론문을 국내외 학술지에 발표. 출처 인민넷
17    조선족축구를 생각하며 댓글:  조회:1680  추천:1  2016-07-04
                          최유학 연변축구가 바로 조선족축구의 대표라는 점은 자명한 일이다. 그것은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중국내 조선족 최대의 집거지로서 현재 조선족 총인구(183만명)의 약 43%를 차지하고있는 80만명이 거주하고있을뿐만아니라 국내 유일의 조선족자치주이기때문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가 력사적으로 우리 조선족을 대표해왔듯이 연변축구도 력사적으로 우리 조선족축구를 대표해왔다. 바로 이런 우리 조선족축구가 지난해에 갑급A 리그 우승과 슈퍼리그 진출이라는 대박을 터뜨렸던것이다. 연변축구의 중국슈퍼리그 복귀는 가뭄의 단비처럼 그 어떤 문화적향수에 목말라있던 중국조선족사회를 시원하게 적셔주었고 개개인의 구성원들 특히 축구팬들에게는 이루 말할수 없는 기쁨을 선사하였다. 15년만의 1부리그 복귀는 특히 도시화와 글로벌화의 격랑속에서 고전분투하면서 방향과 활로를 모색하고있는 조선족사회에 강한 활력소를 불어넣어주었다. 연변축구의 슈퍼리그승격의 력사적인 순간순간들을 지켜보면서 필자도 기쁜 나머지 지인들과 모일 때마다 연변축구승리를 위해 축배를 높이 들었다. 나이가 어지간히 좀 든 축구팬이라면 누구나 십여년전 최은택감독이 이끄는 연변팀의 중국 1부리그 4강신화와 그때의 감격을 기억할것이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난해 2부리그인 갑급A리그에서 우승 및 1부리그 승격이라는 쾌거를 이루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우리 조선족이라면 어디에서 살고있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기쁨에 못이겨 환호하였을것이며 힘차게 아리랑노래를 불렀을것이다. 필자도 지난해 북경의 경기장에서 수차 연변팀과 북경소재 팀들과의 경기를 지켜보면서 무한한 감동과 기쁨을 만끽하였다. 북경에서 연변축구를 지켜보는 마음은 연길에서 연변축구를 보는 마음에 비해 다른 점이 있다면 조선족축구에 대한 사랑외에 향수라는 감정이 짙게 서려있다는 점이다. 그야말로 좋아하는 축구를 볼수 있어 좋고 고향과 민족을 대표하는 축구팀을 볼수 있어 더욱 좋고, 향수를 달래면서 친구들과 만날수 있어 좋은것이다. 필자로서는 국내외의 여러 도시에 흩어져살고있는 조선족들의 마음을 한군데로 모아주는 구심점역할을 할수 있는 연변축구가 다시 궐기했다는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더욱 고무적인것은 연변축구가 이밖에도 더욱 많은 복합적이고 다중적인 적극적인 의미를 분명 우리에게 선사한다는 점이다. 연변축구는 연변지역축구라는 지역적의미 또는 축구경기라는 단순한 스포츠경기로서의 의미뿐만아니라 중국축구에 대한 기여, 민족화합의 장과 계기로서의 의미 등 여러가지 의미가 있다.  중국축구에 대한 기여라면 먼저 외적선수일변도식의 발전모델에 대한 대안을 연변축구가 제시하고있다는 점을 꼽을수 있다. 외적선수를 영입하고 천문학적인 투자로 구단을 경영하는 방식은 슈퍼리그의 다수 구단들의 운영방식이다. 그런데 연변축구는 한국적의 감독과 선수, 감비아(冈比亚)적, 세르비아(塞尔维亚)적 선수가 다수 있긴 하지만 그래도 중국 본토선수 또는 연변지역선수가 주축을 이루고있다. 즉 이는 외적선수 일변도와 타지역일변도, 투자일변도로만 가는 구단과는 분명한 차이점과 거리가 있으므로 중국축구발전의 한가지 다른 대안 모델로서 연변축구가 자리하고있는것이다. 둘째, 중국축구에 대한 기여로 중국과 한국 축구 간의 교류가 연변축구를 통해 활발히 이루어지고있음을 지적할수 있다. 알다싶이 중국축구팀이 꼭 넘어야 할 산으로 한국축구를 꼽고있다. 다른 스포츠경기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중국축구는 운명적으로 반드시 한국축구와 격돌하게 되여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적의 감독과 선수가 다수 영입되여있는 연변축구팀은 중국축구의 발전모색과 활로개척에도 도움이 되기 마련이다.  셋째, 중국축구에 대한 기여로 조선족축구문화의 일부 특수성을 꼽을수 있다. 모든 면에서 다 우수하다고 할수는 없지만 다른 구단의 팬들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질서정연한 응원, 문명한 언어, 팀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 축구에 대한 진정한 사랑, 깨끗하게 승복하기, 경기장쓰레기줍기 등 여러 면에서 연변축구팀과 그 축구팬들은 분명 적극적인 메시지를 중국축구에 전해주고있다.  민족화합의 장과 계기로서의 의미도 조선족-한족 간의 민족화합의 장, 한국인-조선족 간의 민족화합의 장, 세계 여러 민족 간의 민족대화합의 장 등 세가지 면으로 연변축구팀이 우리 조선족에게는 물론 한국인들에게도 긍적적인 민족화합의식을 심어주고있음을 지적할수 있다. 연변축구팀내 조선족선수와 한족선수의 친목을 통해 우리는 연변축구팀이 조선족-한족 간의 민족화합의 장임을 인식할수 있으며, 경기의 안팎에서 벌어지는 한국인선수와 중국내 조선족선수의 친목을 통해 국내 조선족과 한국인 간의 민족화합의 장과 계기가 될수 있다는것을 또한 실감할수 있다. 감비아적, 세르비아적 선수 등이 역할을 잘해주고있고 우리 민족의 선수들과 호흡을 잘 맞춰가는것을 보노라면 연변팀이 국적과 인종을 뛰어넘는 국제 평화와 민족대화합의 장이라는 점을 또한 느낄수 있게 해준다. 이처럼 연변축구팀은 우리에게 여러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주고있다. 필자는 이런 여러가지 의미들중에 조선족과 한국인 간의 화합의 장으로서의 의미에 보다 큰 무게를 두고싶다. 현재 한국에 체류중인 70만명의 조선족은 한국에서 어려운 삶을 영유하고있다. 한국경제에 중요한 기여를 해왔고 지금도 하고있고 앞으로는 더욱 큰 기여를 하게 될 조선족임에도 불구하고 일부 한국인들의 편협된 시각과 일부 언론인들의 오도로 현재 조선족은 중요한 기여에 걸맞지 않는 평가를 받고있다. 현재 중국 국내에는 한국에 가있는 조선족과 마찬가지로 중국 국내에 거주하고있는 약 백만명에 육박하는 한국인들이 살고있다. 그들의 시선도 국내 조선족들 못지 않게 연변팀에 집중되여있다. 따라서 연변팀은 명실공히 조선족들뿐만아니라 한국인들에게도 우리 조선족들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고있다. 이런점에서 박태하감독과 하태균, 윤빛가람, 김승대 등 한국적선수들의 연변팀합류는 조선족과 한국인의 화합의 모델로서 모자람이 없다고 할수 있다.  여러가지로 현재의 박태하감독은 1997년 당시 연변 오동팀을 맡은 최은택감독과 비교가 되고있다. 온 연변의 사랑, 온 조선족의 사랑을 한몸에 안은 최은택감독은 중국축구계에서도 존경을 받는 분이였는데 오늘날 박태하감독과 그가 인솔하는 한국적선수들이 연변축구의 신화를 창조한 최은택감독과 비교가 되면서 슈퍼리그에서의 활약이 더욱더 기대가 되는것이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최근에 연변축구와 관련하여 한국의 일부 조선족 폄하의 불협화음이 생겨난 일이다. 일부 언론에 따르면 모 한국배우가 연변팀에서 활약하고있는 윤빛가람선수에게 욕설을 담은 메시지를 보내면서 윤빛가람선수뿐아니라 조선족 모두를 비하하였다고 한다. 참 아쉬운 일이 아닐수 없다. 윤빛가람은 어떤 선수인가? 윤빛가람은 대한민국의 국가팀선수일뿐아니라 연변팀의 핵심선수로 활약중이며 한국내 축구팬들과 중국내 온 조선족의 사랑을 한 몸에 안고있다. 그런 보배같은 선수에 대해 욕설을 퍼붓다니. 그것도 조선족 모두를 싸잡아서 형편없는 욕설을 퍼붓는다는것은 상식을 뛰여넘는 행위였고 부끄러운 소행이 아닐수 없다. 그 배우의 소속사가 17일 보도자료로 “윤빛가람선수와 본의 아닌 상처를 드리게 된 모든 분께 다시 한번 사과한다”라는 모 배우의 사과문을 전했지만 벌통은 이미 쑤셔놓은것이나 다름 없다. 부정적인 사건이기는 하지만 한국인들은 이 사건에서 자신의 의식속에 숨어있는 어떤 부정적인 인식과 조선족에 대한 편견에 대해 진지하게 반성하고 사고할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라며 조선족들도 이 사건을 통해 현실을 직시하고 더욱 당당하고 용감하게 미래를 개척해나갈수 있는 분발의 힘을 가질수 있기를 기대한다. 물론 이 정도의 역류로는 조선족과 한국인 사이에 이미 형성되고있는 도도한 화합의 흐름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믿는다. 날개야 돋아라. 날자, 한번만 더 날자꾸나. 연변축구여, 다시 한번 비상하라! [최유학 략력] 성명: 최유학(崔有学)  소속: 중앙민족대학교 한국어학과 전공: 한국현대문학 경력:  중앙민족대학교 한국어학과(2007-현재) 중앙민족번역국 조선문번역실(1996-2006) 주요 론저: 저서《박태원의 문학과 번역》과 역서 《내 녀자의 열매(我的植物妻子 )》등 출간, 국내외학술지에 론문 다수 발표 출처 인민넷
16    문학으로 보는 조선족사회의 정착과 리 댓글:  조회:1750  추천:2  2016-07-04
          최학송 해방전, 동북지역에는 근 2백만에 달하는 조선인(조선족이민 1세대)이 살고있었다. 이중에는 적지 않은 문인들도 포함되여 동북조선인들의 삶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였다. 이는 본격적인 조선족문학의 전사(前史)라고도 할수 있는것으로서 흔히 재만조선인문학 또는 조선족이민문학으로 불린다. 이시기 문학을 관통하는 키워드의 하나로 “개척”을 들수 있다. 자의 또는 타의에 의하여 낯설고 물선 동북에 들어와 새로운 삶의 터전을 개척해나가는 과정의 어려움과 보람을 묘사한 작품들이 많기때문이다. 새로운 삶의 터전의 개척은 자연스럽게 새로운 고향의 건설과 련결되여 “북향(北鄕)” 즉 북쪽의 고향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냈으며 널리 사용되였다. 1933년 11월, 룡정에서는 “북향회(北鄕會)”라는 문학동인회가 결성되였으며 이 동인회에서는 또 《북향(北鄕)》이라는 동인지를 발간하였다. “북향회”의 결성과 “북향”지의 발간을 계기로 해방전 중국 조선인문단이 형성되였다고도 말한다. 북향회 회원이였던 안수길은 후날 “간도(현 연변 지역)는 조선사람들의 제2의 고향”으로서 이곳에 “우리의 문학을 이룩해보자는 취지”에서 북향회를 결성하였다고 회억하였다.  이처럼 조선인문단 형성과 함께 사용된 “북향”이라는 단어는 그 이후에도 계속 사용되고있다. “북향”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대표적인 문인으로 안수길을 들수 있다. 안수길은 동북 조선인들의 생활을 반영한 소설들을 묶은 그의 첫 개인창작집 제목을 《북원(北原)》(1944)이라 명하였으며, 조선인들이 동북에서 리상촌을 건설하는 이야기를 다룬 그의 첫 장편소설의 제목을 《북향보(北鄕譜)》(1944)라고 달았다.  안수길의 말처럼 조선의 북쪽, 즉 동북에 제2의 고향을 건설한다는것이야말로 이시기 동북에서 생활한 조선족이민 1세대의 삶에 대한 가장 형상적인 요약이 되겠다. 오늘날 동북에 있는 조선족집거지들은 이런 “북향”건설의 결과물들인것이다.  이렇게 건설한 “북향”이 진정한 “고향”이 된지도 이젠 반세기가 넘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조선족들은 이 “고향”땅에서 우리의 문화를 계승, 발전시켰으며 다양한 문학작품도 창작하였다. 그러나 최근년에 오면서 우리의 문학작품은 어렵게 건설한 “고향”의 위기를 알리고있다. 박옥남의 “둥지”(2005)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둥지”는 벽동툰이라는 한 조선족마을과 그 마을에서 생활하는 한 조선족가정의 이야기를 통하여 조선족공동체의 해체와 몰락을 보여준다. 송화강류역에 위치한 벽동툰은 평안북도 벽동에서 여덟가족이 이주하여 형성된 조선족마을로서 처음에는 팔가자(八家子)라 불렸으나 1954년 소학교를 세우고 그 학교의 이름을 벽동소학교로 명명하면서 마을이름도 아예 벽동툰으로 바꿔버렸다. 벽동소학교는 학생수가 가장 많을 때에는 200여명까지 되였으나 현재는 전교생이 7명이며 끝내는 페교를 맞이한다. 페교된 교사는 이웃 마을의 한족이 사들여 양우리로 사용하며 운동장은 양들이 먹을 사료를 재배하게 된다. 마을이름의 유래에서도 알수 있다시피 벽동소학교의 흥망성쇠는 곧 벽동툰의 흥망성쇠를 반영한다. 소학교의 페교처럼 벽동툰도 현재 몰락을 거듭하고있다. 소학생인 진수는 다니던 학교가 페교되면서 이제부터 외가집에 가 생활하면서 현성의 학교를 다녀야 한다. 한국에 돈벌이를 간 진수의 아버지는 현재 련락이 두절된 상태이다. 진수의 어머니는 농사일에는 관심이 없고 매일 도박판으로만 돌아다니다 촌장과 바람을 피운것이 들통나 마을을 떠나야만 하는 상황이다. 이외에도 오늘날 조선족농촌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문제점들을 우리는 이 작품속에서 찾아볼수 있다.  수업시간에 학생들과 함께 이 작품을 읽고 분석하다가 몇몇 학생이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본적이 있다. 작품속에서 자신의 고향마을을 보았을것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쓰려났다. 필자가 다니던 소학교가 현재 소우리가 되여있고 운동장이 옥수수밭으로 된것을 생각하면 이 작품을 보는 마음이 더욱 무거워진다.  그러면 “또다시 고향을 떠난 사람들”은 어디에 가 어떻게 살아가고있는가? 김혜련의 “아빠트”(2011)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고있다.  “아빠트”는 연변의 한 조선족농촌마을에서 태여난 30살좌우의 네 조선족젊은이의 이야기를 다룬다. 철수는 연길의 한 파출소에 근무하고있는데 연길에 아빠트가 없다는 리유로 사귀던 녀자친구로부터 버림을 받는다. 아일랜드에서 돈을 벌어 부모님에게 연길에 아빠트 한채를 사주겠다던 박연은 불법체류가 들통나 그사이 모은 돈을 모두 날리고 자신보다 7살 어린 당지 남성과 결혼하는것을 통하여 강체출국만은 면한다. 상해에서 박사공부를 하는 미자는 량가 부모님들이 10여년 한국에서 번 돈으로 선불금을 내고 상해에 아빠트를 마련한다. 매달 6천원씩 20년간 은행대출금을 갚아야 하는 부담을 안고있지만 미자는 상해에서 대학 교수가 되여 “떠돌이 삶”을 자신의 세대에서 끝내겠다는 꿈을 안고 이악스레 살아간다. 한국에서 박사공부를 하는 영희는 사귀던 가난한 남자친구와 헤여지고 아빠트를 갖고있는 한국남성과 결혼한다. 작품속의 인물들은 모두 “고향”을 등지고 도시에서 “아빠트”때문에 울고 웃는다. 도시에 아빠트를 가졌다는것은 도시에 정착하였다는것으로 리해할수 있다. 이로보면 작품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조선족젊은이들의 도시지향적인 삶과 도시정착과정에 나타나는 문제점들을 반영한것으로 볼수 있다.  안수길은 “북향”건설을 제2의 고향건설이라고 하였다. “북향”건설을 통하여 우리는“둥지”의 벽동툰처럼 농촌을 중심으로 집거생활을 진행하는 제2의 고향을 건설했으며 벽동소학교와 같은 민족학교의 건립을 통하여 우리의 언어, 문화, 전통을 계승, 발전시켜왔다. 그러나 개혁개방이후, 특히는 중한수교이후 조선족농촌공동체는 “둥지”나 “아빠트”에서처럼 해체의 위기를 맞았으며 한국, 일본, 북경, 청도 등 외국이나 연해도시에 새로운 조선족공동체를 건설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하였다. 이런 새로운 도시조선족공동체의 건설을 우리는 “제3의 고향건설” 또는 “남향”건설이라고도 할수 있겠다.  우리가 그토록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북향”을 건설했던것처럼 비록 당분간은 여러가지 현실적어려움이 많겠지만 “남향”도 또 하나의 “고향”으로 잘 꾸려갈수 있을것이라 믿어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이런 “남향”건설을 반영한 보다 많은 작품이 나타나 우리 조선족문학을 풍성히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최학송 략력】 성명: 최학송(崔鶴松)  소속: 중앙민족대학 조선언어문학부 전공: 조선족문학, 재중조선인문학 학력: 한국 인하대학 문학 박사 연변대학 조문학부 문학 학사 경력: 현재 중앙민족대학 조선언어문학부 부교수 주요 론저:  저서로는《재중 조선인 문학 연구》(2013)、《주요섭 연구》(2014), 역서로《1946년 북조선의 가을》(2006)이 있으며, 이 외에 《‘만주’체험과 강경애문학》(2007) 등 논문 20여편을 국내외 학술지에 발표. 출처: 인민넷  
15    이동은 이동으로 다스려야 한다 댓글:  조회:2409  추천:1  2016-06-14
중국교육개혁의 출로에 대한 고민               예동근 최근 교육에 대한 불만이 적지 않다. 교육자원을 둘러싼 모순이 갈수록 심하여져 각종 사회이슈를 낳고있다. 농민공자녀와 소수민족지역 학생들의 평등한 교육권리 주장, 지역별 교육자원의 불평등배분으로 일어난 일부 지역 학부모들의 불만, 특권취소로 상대적박탈감을 받고있는 일부 북경응시생부모들의 불만 등 갈등들이 곳곳에 존재한다. 교육이 갈수록 사회계층상승의 동아줄이 되면서 희소한 교육자원을 둘러싼 모순이 심화되여 자칫 지역갈등, 민족갈등으로 번져 큰 사회문제를 일으킬수 있다. 특히 북경-상해-광주 등 교육자원이 집중된 지역은 교육이주를 부추기고 부동산가격을 높이는 주범의 하나가 되였고 교육엔클러브(敎育區孤島化,貴族化)가 되면서 새로운 학군계층을 탄생시키고있다.  다른 한편으로 농촌지역의 인구감소로 학교페쇄가 일어나고 농촌교사들의 도시이주, 직업전환으로 교육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강화되고있다. 동-서부의 차이, 도시와 농촌의 차이, 한족-소수민족의 차이, 대도시와 소도시의 차이 이런 차이들이 자칫 ‘차별’로 나타나면서 사회적갈등을 야기시키는 구조적요인으로 될수 있다. 지면의 관계로 원칙적인 주장들은 빼고 사회이동과 교육의 관계에서 합리적교육자원배분방식을 간단히 론의하고자 한다. 첫째, 이동은 이동으로 다스려야 한다(“以移制移”). 중국의 교육자원배분은 급격한 이동으로 심화되였기에 이동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동하는 인구 자원과 정착에 방점을 둔 계획배분방식의 모순에 눈길을 돌려야 한다. 개혁개방 30년 이래 모든것이 자유롭게 이동하고 시장의 역할이 커졌지만 교육자원배분은 여전히 독점적배분방식과 행정체제 등으로 갈등이 심화되고있다는 점이다.  현재 중국은 800만~1000만 학령아동들이 이동하고있다. 광동, 복건, 강소 등 제조업도시들은 수만명의 학령아동들이 모여서 금싸라기같은 땅값에 농민공자녀중심을 위해 공공교육투자를 하는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또한 산아제한과 도시민의 학령아동감소로 기존의 학교도 통페합을 해야 할 시점에 이주민자녀의 교육까지 고려하는 지방정부는 그렇게 많지 않다. 언제 떠날지도 모르는, 제조업의 위기가 갈수록 심화되는 시점에 고학력인재 유치에 생사를 걸기에 “류동아동”의 교육은 잘 해결되지 않으며 다시 원 거주지로 가면 “류수아동”의 교육문제로 남는다. 그래서 해결책은 교사를 이동시키는것이다. 최근 중국교육부, 지방 교육청에서 이런 문제를 발견하고 “교사근무부처교체제(敎師輪崗制)”를 조금씩 강화하여 실시하고있다. 이런 제도는 전에도 있었지만 대부분 아래로부터 우로 상승하는 교사이동이지 실제로 농촌교육문제해결이나 도시의 이동교육에 초점을 맞춘것은 아니다. 그리고 서부지역, 빈곤지역을 돕기 위한 “변경지원(支邊)”정책들은 큰 효력이 없으며 교사들이 교육변방에 배분되는것을 꺼려하는 역효과를 낳고있다. 1, 2년은 가능하지만 그 이상은 체류를 하지 않으며 다시 원단위로 컴백하였을 때 보상을 받기에 가는것이다. 그럼 어떤 방식으로 교사를 이동시킬것인가? 두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기존의 국가중심의 이동을 유도해야 한다. 지역을 넘는 평등한 교사월급시스템을 구축하고 전국적인 이동을 장려해야 한다. 특히 9년 의무교육지역의 학교들에 대한 세밀한 조사를 실시한후, 연해도시 우수학교 교사들의 평균월급보다 많은 교사월급시스템을 구축하여 장기적으로 서부지역, 소수민족지역의 우수교사를 확보하게 해야 한다. 학교의 핵심자원은 우수한 교사들이다. 이런 비용은 중국의 800만 넘는 학령아동의 이동 및 사회적적응, 지방정부의 교육자원 신규투자와 교육관리를 비용으로 환산하여 따져볼 때, 교사들의 이동이 훨씬 효률적이고 경제적일수도 있다. 학생은 우수한 교사들이 집중한 곳으로 이동하며 훌륭한 학생들이 모이면 승학률이 높아지고 지역이 살아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시장중심의 교육자원배분이다. 소학교와 중학교는 의무교육의 범주에 속하므로 최대한 공평하고, 국가중심의 자원배분에 따라야 하지만 대학교는 자률적인 시장중심의 자원배분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 특히 서부지역, 빈곤지역에 질 높은 우수한 사립대학을 설립하도록 국가가 지원해야 하며, 우수한 학자들이 모여 학술실력이 형성되면 공평하게 경쟁하여 시장중심으로 자원배치를 하게 해야 한다. 민국시기에 유명한 대학들은 사립대학들이 많았는데 특히 북경대학, 청화대학과 버금가는 유명한 사립대가 연경대학이였다. 그때의 학술실력이 굉장히 높은 수준에 이르고 국제적인 학술수준에 도달한것은 국립과 사립의 경쟁, 개방되고 자주화한 학교관리, 동서를 불문하고 국제적인 석학들을 모셔올수 있는 학교자립권이 보장되였기때이다.  지금 사회는 개방되고 모든것이 시장중심으로 자원이 배분되는데 아직까지 계획경제중심의 사고로 자원을 배분하는것은 시대에 역행하는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연 9년 의무교육, 그리고 국민성을 키우는 교육커리큘럼에 관여할수 있지만 매년 대학입시명액까지 지정하고 배분하는 계획행정의 교육관리제도는 언젠가 페지될것으로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우리 조선족지성인들도 이제 글로벌조선족대학을 만드는 일을 생각하고 준비해야 하며, 정말 새 시대를 열어갈수 있는 조선족인재를 키울수 있는 대안대학에대하여 고민하고 실천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한다.  [예동근 략력] 성명: 예동근(芮東根)  소속: 한국 부경대학교 국제지역학부 중국학전공 전공: 사회학, 조선족문제 학력: 한국 고려대학 사회학과 문학 박사 중앙민족대학 민족학리론 법학 석사 연변대학 중문학부 문학 학사 경력: 한국 국립대학교 국제지역학부 조교수를 거처 현재 부교수 미국 UCSD 이민비교정책연구소 방문교수(2015.2 - 현재) 한국 고려대학 아세아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009.9-2010.2) 겸직: 한국사회학회, 동북아문화학회, 재외한인학회, 대한중국학회, 국제지역연구학회, 한국공공사회학회, 일본 조선족연구학회등 여러 학회의 국제이사, 편집이사를 겸임. 주요 론저:  공저로는《차이나 핸드북》(2014, 한국, 김영사)、《조선족 3세들의 서울이야기》(2011, 서울, 백산서당)、《조선족의 국제이주와 네트워크》(2006, 일본, 아시아경제문화연구소)등, 역서로는 《마르크스철학에서 유철학으로》(2015, 한국, 백산서당). 《The Cultural Theory of Laurel Forest and Japanese Scholars’ Culture Researching to Southwest China Minority》(2014)、《Will the American Model Be the Future of Ethnic Minority in China?: A Case Study of Korean Chinese Community in Beijing》(2014))、《From rural to urban areas: On the formation of Korean-Chinese enterprises》(2013)、《Acclimation and Multiethnic relationships of chaoxianzu community in the process of urbanization》(2012)、《한국의 지역 다문화공간에 대한 비판적 접근》(2011) 등 다수 론문을 국내외 학술지에 발표.
14    상부상조와 기부문화 댓글:  조회:1520  추천:1  2016-06-13
상부상조와 기부문화                              안성호 오늘날 계(契)하면 흔히 한국에서 전하여온 자금의 호조관계를 말하는 경우가 많다.즉 친한 사람 여럿이 계를 만들어 다달이 일정 액수의 자금을 모아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받음으로 하여 자금난을 해소하게 된다.사실 필자도 류학시절 한국인들이 계모임을 가지는것을 보고 처음 계를 알게 되였다. 한국에서 “전래”되여온 계는 이젠 조선족사회에도 익숙히 알려져있으며 상업이나 무역을 하는분들이 잘 활용하는 수단의 하나로 되였다. 계모임 회원간의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계는 자금난을 해소하고 서로간의 우의를 돈독히 하는 역할을 함으로 하여 이오(义乌) 등 지역에서 무역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족사회에서도 활발히 진행되고있다. 하지만 계는 조선족들에 의하여 한동안 잊혀진 존재였을뿐이다. 계는 1960년대까지 조선족사회에 보편적으로 존재하였으며 조선족마을공동체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었다. 계는 조선반도에서 오래동안 전하여온 애니미즘(신령숭배)를 기초로 하는 상호지원시스템으로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있는 단순한 서로간의 자금지원형식이 아니다. 마을주민들이 상호부조, 친목, 통합, 공동리익 등 부동한 수요에 따라 구성하는 민간협동체였다. 이주초기에 조선족사회에는 농무계 등 다양한 계조직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농업집단화와 더불어 농업영역에서 상부상조를 위한 계조직들이 사라지게 되고 상여계(丧舆契)만이 대표적인 계조직으로 남게 되였다.  상여계는 조선족들의 중국 이주초기부터 1960년대까지 거의 모든 조선족마을들과 조선족들이 집거하는 도시에 광범위하게 존재하고있었다. 상여계는 조선족전통사회에서마을공동체를 중심으로 모아진 자생적생활문화조직으로서 주로 마을에 상사가 났을 때 상사에 필요한 경비와 로동력을 충당할 목적에서 조직되였다. 상여계는 마을과 상여의 규모에 따라 달라지는데 보통 20~30가구 안팎으로 이루어지며 상사시 경비조달외에 도계원간의 방문, 애도의 의무도 가지고있으며 도감의 지휘하에 계원들 모두가 참여하게 된다. 상여계는 특정된 장례를 위한 상부상조조직이지만 가풍을 다스리고, 문풍을 단정히 하고, 민족의 우량한 전통을 대대로 전승하는 역할을 하고있다. 집집마다 참여하고 마을에서 위망이 높은분이 도감을 맡으며 상여를 통한 마을주민들의 상부상조와 해마다 한번씩 모이는 계원들의 모임을 통하여 마을주민들의 응집력을 강화할수 있었다. 각지에서 이주하여온 조선족들은 마을의 상여계를 중심으로 단합되고 마을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할수 있었다. 이로 인하여 조선족마을공동체의 형성과 유지,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현재 상여계의 전통을 이어오고있는 곳으로는 장백조선족현과 이도백하진 내두산촌이있다. 장백조선족현의 경우, 현성에 비교적 큰 상여계가 있으며 산하의 마을들에도 각각 상여계가 있었으나 현재는 많이 위축되여있다. 이도백하진 내두산촌의 경우, 매년 향도(상여계의 별칭)기념일에 총회를 조직하여 한해의 행사를 총화짓고 다음해 계획에 대하여 의논한다. 일년간 행사에서 계원들의 구체적의무 수행에 대한 장려와 징계처분이 이루어진다. 이날 마을사람들은 누구도 외출하여서는 안되며 외출하게 되면 벌금을 내야 한다. 한해는 촌장이 향토기념일에 공무로 이도백하진에 가게 되였지만 리유는 어떠했든지 외출한것은 사실이였기에 마찬가지로 어김없이 벌금을 내였다고 한다. 그만큼 상여계가 마을에서 권위성을 가지고있고 마을 성원들 사이의 상호 관계를 유지시키고 련대를 강화함에 있어서 커다란 역할을 하고있음을 설명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내두산촌로인협회의 경우, 이 협회는 화투치기, 단체무, 마을청결 등 활동들을 조직하고있는바 마을공동체내에서의 두 조직의 위상을 엿볼수 있다. 1960년대 이후 대부분 조선족사회에서 계라는 협동체가 사라졌지만 상부상조를 통한협력정신은 그대로 이어져내려왔다. 도시의 경우, 단위를 중심으로, 농촌의 경우, 농업집단화정책하에 생산대를 단위로 내부성원들의 상부상조의 전통이 이어져왔다. 가정에 대사가 있을 때마다 친한 지인을 중심으로 서로 음식마련, 행사진행, 장소대여등 도움가능한 일들을 서로 도와주었다. 또한 대사에 참가하는 사람들도 생활용품 등을 부조함으로써 가난한 생활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게 하였다.이는 공동체내부 성원들의 상부상조를 기초로 하는 문화형태였다. 이는 공동체내부의 단결을 도모하는 중요한 형식이였다. 조선족사회는 조선반도에서 중국으로 이주하여와 연고 없이 만주의 허허벌판을 개척하면서 중국에서의 생활을 시작하게 되였다. 도시에서 상업을 하더라도 같은 조선인들 사이의 도움이 없이 생존하기 어려웠다. 조선족마을들의 경우, 전근대적인 황무지개척과 농업생산에 있어서 품앗이 등을 포함한 상부상조는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생존방식이였다. 같은 조선사람이라는 동질감이 서로를 의지하게 하고 상부상조하면서 낯선 이국타향에 자리를 붙이고 점차 생활터전을 영위하여나가게 되였다. 글로벌 인구이동과 전통적인 농경사회의 해체, 산업사회의 진입으로 말미암아 조선족사회도 커다란 사회변동을 가져오게 되였다. 과거 공동체내부 성원들의 협력으로 이루어졌던 가정대사들이 서비스업, 상업 발전과 더불어 전문업체에서 대행하게 되였으며 마을성원들의 상부상조도 부조돈문화로 변하게 되였다. 끊이지 않는 모임에서의 부조문화는 새로운 이주지에서 혈연, 지연, 학연 등 네트워크를 유지하고 련대감을 강화한다는데서 긍정적이지만 상부상조의 참뜻을 벗어난 지나친 부조문화는 경계의 대상이기도 하다. 부조금액에 대한 비교, 여러가지 명목의 초청을 통한 부조는 결국 상부상조의 본의와는 거리가 먼 서로에게 부담이 되고있다. 글로벌사회는 과거의 마을과 같은 공동체의 해체를 초래하였으며 개개인을 격렬한 사회경쟁에 직면하게 하고있다. 개개인이 이겨나가야 할 과제는 더욱더 과중하여지고있으며 이로 인한 스트레스, 우울증 등도 보편적인 사회문제로 대두되고있다. 이는 더욱더 상부상조정신을 요구하고있으며 네트워크를 통한 상부상조시스템의 구축을 요구하고있다. 오늘날 조선족사회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있는 다양한 모임들을 친목과 함께 구성원들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상부상조시스템으로 탈바꿈시킬 필요가 있지 않을가 생각한다. 다행히 조선족사회에서 상부상조를 위한 계모임들이 활발하게 진행되고있고 불우어린이, 불우이웃들에 대한 조선족사회의 모금과 기부가 진행되고있어 불행한 가정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있다. 민족성을 기초로 하는 기부가 이루어지고 여러 협회들이 설립되여 조선족사회의 상부상조문화를 발전시키고있다. 조선족사회의 발전은 상부상조를 떠날수 없으며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상부상조정신을 부르고있다. [안성호 략력] 성명: 안성호(安成浩)  소속: 절강대학 한국연구소 전공: 역사학, 문화인류학, 지역문화연구, 조선족사회 학력: 일본 고베대학 학술 박사 하얼빈사범대학 력사학 학사 경력: 현재 절강대학 한국연구소 전임강사 주요 론저:  저서로는《族群社会发展与变迁: 朝鲜族社会调查研究》(2014, 浙江大学出版社)、편저로는 《韩国研究》12辑, 13辑 등이 있으며, 주요 논문으로는 《中日韩海洋文化研究动向与展望》, 《문화적 자각을 통한 조선족문화의 변화양상》등 다수 론문을 국내외 학술지에 발표. 출처 인민넷
13    중국의 대도시 문제점들과 해결방안 댓글:  조회:1721  추천:8  2016-06-03
                      리천국 매번 북경의 파란 하늘을 볼 때마다 깨끗한 공기의 소중함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북경의 대기오염이 얼마나 심하였으면 북경의 시민들이 “APEC블루”, “열병식 블루”라는 단어까지 만들어냈겠는가? 중국의 대기오염문제는 물론 그동안 중국의 경제성장방식이나 산업구조, 환경보호등요인들과 련결되여있으나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중국의 대도시문제이다.   우리 나라 도시화추세가 심화됨에 따라 대도시에서는 여러가지 문제점들이 날로 심각해지고있다. 인구가 대도시에 날로 집중되고 교통체증이 심해지고있으며 공공위생이나 생태환경이 점점 악화되는 현상를 보이고있다.   이런 문제들은 도시의 정상적인 발전을 제약하고 정부의 부담을 가중화시키고있으며 나아가서 많은 사회적인 문제들도 일으키고있다. 특히 대도시에는 시민들의 빈부격차가 심해지고있고 취업경쟁도 더욱 치렬해지고있으며 사회치안에도 영향을 주고있다. 도시가 확장됨에 따라 도시인구의 자원소모도 확대되고있고 자원공급도 점차 병목제약에 부딪치고있다. 유엔의 환경서가 발표한 보고에 따르면 향후에 전 세계 55% 이상의 인구가 물자원난을 겪을것이고 도시의 토지공급부족과 주거환경 악화등 문제들도 심화될것이라고 한다. 지난 30여년 동안 중국은 빠른 경제성장을 이룩하였지만 도시와 자연환경, 시민사이의 균형이 점차 파괴되기 시작하였고 도시의 주거환경에 부정적영향을 미치고있다.     중국은 현재 도시상주인구 기준으로 100만명 이상의 상주인구가 살고있는 도시는 대도시로 분류되고있는데, 그중에서도   500만명 이상에서 1000만명 이하의 도시를 특대형도시로 분류하고있고 도시지역 상주인구가 1000만명 이상은 초대도시로 분류하고있다. 북경, 상해, 천진, 중경, 무한, 광주, 심수 등 도시는 초대형도시로 분류되였고 할빈, 심양, 서안, 남경이나 성도와 같은 도시는 특대형도시로 분류되고있다. 지금도 도시화의 발전과 더불어서 대도시의 인구는 날로 증가되고있고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겨져있다.  그렇다면 대도시의 이런 문제점들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있는것처럼 대도시라면 피하지 못하고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되는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세계 기타 국가의 대도시를 보면 이런 문제점들은 모든 초대형도시에서 나타나는것이 아니라 발전도상의 국가에서 더 흔히 발생한다. 물론 발달국들의 대도시에서도 교통체증문제가 발생하고 환경오염을 겪게 되지만 대도시로 인한 자원집중의 경제적인 효과가 이런 문제점들보다 훨씬 크고 도시발전환경에 대한 대책도 훨씬 완벽화되여있다. 때문에 도시화와 대도시문제는 필연적인 인과관계를 가지고있지는 않다. 현재 북경의 면적과 상주인구를 계산해보면 그 인구밀도는 일본의 수도 도꾜 인구밀도의 5분의 1정도 밖에 안된다. 하지만 북경이 현재 직면하고있는 대도시 문제점들은 도꾜보다 훨씬 심각하다고 평가할수 있다.  그럼 대도시문제는 왜 나타나게 되는걸가?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국가는 흔히 경제성장에 주력하다보니 지역경제와 도시 발전계획을 과학적으로 설계해나가기 어렵다. 대도시의 많은 문제들은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현상으로서 도시의 인프라환경의 개선에 대해 인식이 부족한데서 기인되는것이다. 대도시 인구에 대한 통제나 환경에 대한 보호를 등한시하다보니 “시장의 실패”를 정부가 정책적으로 잘 보완해주지 못하게 된것이다.  사실상 이러한 문제점들을 대도시만 겪게 되는건 아니다. 중국의 소형규모나 중등규모의 도시들도 앞에서 언급했던 이러저러한 문제점들이 속출하고있다. 그러고보면 대도시 특유의 문제라고 하기보다도 도시화진척속에서 도시 거버넌스에 생긴 문제로 볼수 있겠다.  대도시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대도시 내부 공간 구조조정과 자체발전방식도 중요하겠지만 대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주변의 지역에 대한 자원통합과 공간적인 구조조정으로부터 대책을 세울 필요가 있다. 대도시를 둘러싼 도시들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자원을 배분하고 도시역할을 배분하며 도시사이 협력과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 요즘 북경의 환경오염을 다스림에 있어서 북경, 천진과 하북성의 힘을 모아 협력하고 공동으로 발전하는 방향을 모색하는것도 이러한 리념으로부터 출발한것이라고 할수 있다.  이 세 지역의 자원통합과 협동발전은 북경과 주변 지역사이의 발전 격차를 줄이고 하북성의 산업구조를 업그레이드시키며 대기환경을 개선하는데 유리한 조건을 마련할것이다. 도시의 산업구조도 조정하여 가공제조업이나 중화학공업과 같은 산업은 대도시에서 전이시키고 서비스업이나 기술연구나 문화산업을 도시의 중점발전대상으로 정해야 한다.  일본 도꾜의 부중심발전전략을 배워 북경도 현재 통주구에 부중심을 건설하고있다. 북경은 북경시정부를 대표로 하는 행정기관을 통주구로 옮김으로써 북경에 새로운 성장거점을 형성하려 하고있다. 천안문을 중심으로 한 단일중심의 도시체계보다도 그물망과 같은 다중심의 공간구조 및 밀집된 지하철시스템은 북경의 교통체증을 해소하는데 일정한 도움이 될것이다. 하지만 북경의 시내와 시교 철도망은 여전히 영국의 런던이나 미국의 뉴욕, 일본의 동경에 비해 뒤떨어져있다. 따라서 앞으로도 도시공간구조와 교통네트워크건설면에서 여전히 해야 할 일들이 많이 남아있다고 생각한다. [리천국 략력] 성명: 리천국(李天國)  소속: 중국사회과학원 아시아태평양&글로벌전략연구원 전공: 신흥국경제, 한국과 조선 경제, 중국거시경제 등 학력: 한국 서울대학 경제학 박사 연변대학 경제학 석사 연변대학 경제학 학사 경력: 중국사회과학원 아시아태평양&글로벌전략연구원 조리연구원.  주요 론저:  2008 년 《키움과 나눔을 넘어서—한국경제의 미래설계》 (정덕구 저, 21세기북스, 2006년)를 공동 번역, 2005년 《대두만강지역개발》 부주필, 《新兴经济体蓝皮书: 金砖国家发展报告2014》,《印度洋地区蓝皮书: 印度洋地区发展报告2014》 등 집필에 참여.  《经济管理》,《经济地理》,《人口学刊》 등 국내외 학술지에 30여 편의 경제학 논문을 발표. 이 외에 《경제일보》(经济日报), 《상해증권보》(上海证券报) 등 신문에 경제학 관련 문장을 다수 발표. 출처 인민넷
12    문명을 선도하는 지역축제가 연변에서 열린다 댓글:  조회:1594  추천:1  2016-05-25
박광성 오늘날 인류사회는 과잉생산의 덫에 빠져있다. 과도한 욕심으로 생산능력이 무제한적으로 확장됨으로써 인류는 쏟아져나오는 상품속에서 허우적거린다. 과잉생산의 문제에 직면하면서 소비주의가치관은 더욱 기승을 부린다. 산더미처럼 쌓인 생산물을 소비해야만 재생산이 가능하기에, 일체 수단을 동원하여 사람들의 소비욕구를 자극하면서 소비를 권유한다. 눈만 뜨면 쏟아져나오는 광고들때문에 마음이 괴롭다. 이 과정에서 소비주의는 일종의 지배적이데올로기로 등극한다. 그에 의하면, 소비는 미덕이고 능력이고 품위이며, 삶의 가치를 실현하는 길이고, 사람들의 흠모를 받을수 있는 신분이고 권력이다. 즉 소비를 삶의 목적으로 규정해버린것이다. 이로 인하여 소비가 인간을 위하여 존재하는것이 아니라, 인간이 소비를 위하여 존재하게 되였다. 소비주의이데올로기의 문제는 그것이 사람들의 허영심을 자극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실제 수요를 초과하는 과소비를 추구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이에 대하여 독일 프랑크프르트학파 대표인물중 한사람이 마르쿠제는 일찍 대중문화의 탈을 쓴 소비주의이데올로기가 사람들의 허영적욕구를 자극하여 그 포로로 만듦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진정한 자아를 상실하게 만든다고 비판한적 있으며, 일본의 유명한 경영학전문가인 오마에 겐이치도 몇년전에 《저지능사회》란 저서를 통하여 주체적인 사고가 없이 대중문화에 지배당하며 사는 오늘날의 인간모습을 풍자한바 있다. 소비주의이데올로기로 인하여 지구와 인간이 병들고있다. 과소비조장을 통한 과잉생산으로 인하여 앞으로 천대만대가 지속하여 살아가야 할 지구가 란개발에 만신창이 되여가고있다. 자식이 곱다고 쪽쪽 빨면서도 후세가 살아가야 할 세상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쓰지 않은것이 오늘날 인간들의 가증스러운 모습이다. 그렇다면, 그 대가로 인간은 과연 행복을 얻었는가? 전혀 아닌것 같다. 오히려 우울증과 같은 심리질환환자가 많아져 큰 사회적문제로 대두되고있으며, 청년들의 배움터로 생기가 넘쳐야 할 대학교정에서도 늘 자살과 같은 우울한 소식들이 들려온다. 소비주의는 절대로 인간을 “만족”하게 만들어서는 안되기때문에, 늘 사람들의 “허기증”을 조장해야 한다. 상품을 만들어 팔아놓고는 금방 또 신형을 출시하여 사람들을 유혹하며 괴롭힌다. 소비주의이데올로기에 코가 꿰인 인간은 자신의 진실한 수요인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늘 “소유”에 만족 못하며 자신을 학대한다. 또한 “소유욕”에 목메여 모든 아름다운 가치들을 잊고 산다. 이것이 근대 이후 서양문명이 만든 세상이다. 한마디로 말해 한심한 세상을 만들었다.  이제 자연과 사람이 골병드는 서구식의 발전관은 한계에 다달았다. 인류는 더 이상 인위적으로 조장된 허영심에 사로잡혀 천대만대가 지속하여 살아가야 할 지구와 단 한번 밖에 없는 자신의 삶을 괴롭히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자연과 인간이 함께 번성하고, 행복과 건강이라는 사람들의 실제 수요가 충족되는 생태문명”의 기치를 높게 들고 “과도한 물욕”을 자제하면서 후세들의 삶의 기반을 보장하는 지속적발전을 추구하여야 한다.  놀라운것은 이러한 문명적 전환기에 생태문명을 지향하고 그 지혜를 조상이 남겨준 전통문화에서 찾아보려는것을 목적으로 하는 지역축체가 10여년전부터 연길 주변의 한 시골에서 잉태되여 오늘날에 와서는 점차 연변을 대표하는 지역축제로 자리잡아가고있다는 사실이다. 그 축제를 만들어가고있는 주인공이 바로 현재 연변오덕된장술유한회사의 리동춘대표이다. 10여년전 필자가 의란진의 한 시골에서 리동춘대표를 만났을 때, 금방 사업을 시작한터라 조건이 매우 간고함을 엿볼수 있었다. 그 생각이 보였던지, 그는 “저는 돈을 가지고 사업하는것이 아니라 철학을 가지고 사업을 합니다”고 하면서 운을 떼였다.  그때 리대표는 산업문명을 병페를 지적하면서 생태문명의 필요성을 력설하였다. 그는 전통식품산업을 중심으로 생태문명을 구현한 산업기지를 만들 포부를 밝히면서 점차 해체되여가는 조선족농촌을 살리는 길도 생태문명에서 찾아야 한다고 력설하였다. 당시 학생이였던 필자는 어느 시골의 한 허룸한 방에서 그러한 이야기를 들을줄 몰랐고 빈주먹의 농민기업가가 그러한 예지와 포부를 갖고있는데 대하여 크게 놀랄수 밖에 없었다.  리대표의 주장은 빈말에 그치지 않았다. 그후 그는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상황에서 생태문명과 전통문화 속에 함양된 그 지혜를 찾기 위한 목적으로 시골에서 “연변생태문화절 및 된장오덕문화절” 축제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이 돈끼호테식의 발상이, 그 취지가 점차 알려지면서 생태문명과 전통문화에 관심을 가지고있는 인사들이 대거 몰려들기 시작하였고 그로 인하여 규모가 점차 커지더니 12회로 되는 올해 축제는 연길시정부에서 주관하는 축제로 승격되여 6월8일부터 10일까지 3일간 다양한 행사로 진행된다고 한다. 이 축제가 12회로 진행되는 동안에 리대표의 지원하에 “생태가요창작콩클”이 수차례 진행되여 1000여수에 달하는 생태문명을 노래하는 가요가 탄생되기도 하였다.  축제는 한 지역사회의 “꽃”이다. 세계적으로 보면, 인기가 있는 지역일수록 인상적인 지역축제가 많다. 우리 나라의 경우도 최근에 들어오면서 각종 지역축제가 많이 열리고있지만 너무 상업적이고 내용 또한 빈약하다. 이와 달리 “연변생태문화절 및 된장오덕문화절” 의 경우는 상업 일변도가 아닌 문명적전환기에 새로운 문명의 선도하려는 웅심이 숨베여있다. 따라서 “혼”이 있는 축제이고 새로운 “문명”을 선도하는 축제라고 볼수 있다. 비록 아직까지는 그 사회적 인지도와 영향력, 내용 등에 있어 한계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연변에서 우리민족에 의하여 이러한 생태문명의 “꽃망울”이 움트고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환호하지 않을수 없다.  과잉생산과 산업문명의 병페가 날로 심각해지고있는 현시점에서 연변과 같은 지역이 산업문명의 신장을 통하여 지역의 발전을 꾀하려 한다면 남겨진 기회는 거의 없을지도 모른다. 반면에 산업문명의 병페를 치유하는 생태문명의 선도지역으로 거듭난다면 연변의 가치는 무한할것이다. 재빛 하늘에 신물난 산업중심부 지역의 사람들이 푸른 하늘, 맑은 공기, 깨끗한 물, 건강한 식품이 그리워 연변으로 몰려든다고 생각해보면 그속의 리치를 쉽게 리해할수 있을것이다. 조선족도 마찬가지이다. 병세가 완연한 산업문명속에서 생존의 기회를 찾으려고 아득바득하기보다는 새로운 문명을 선도하는 선에서 그 기회를 찾는 다면 휠씬 큰 무대가 우리를 기다릴지도 모른다. 연변의 “생태문화절”이 곧 개최되는 시점에서 연변과 조선족이 전국의 생태문명을 선도하는 지역, 집단으로 거듭나기를 희망해본다.  [박광성 략력] 성명: 박광성(朴光星)  소속: 중앙민족대학 민족학&사회학학원  전공: 사회학리론, 인구이동과 도시화, 경제글로벌화와 초국경 인구이동, 조선족문제. 강의: 서방사회학리론, 서방사회사상사, 사회학개론 등 과목 학력: 한국 서울대학 사회학과 박사 한국 서울대학 사회학과 석사 연변대학 민족연구소 석사 연변대학 력사학 학사 경력: 중앙민족대학 민족학&사회학학원 강사를 거쳐 현재 부교수, 석사생 지도교수.  2012年“教育部新世纪优秀人才”资助项目获得者. 겸직: 중국조선민족사학회 상무리사 겸 부비서장 中国社会学会 环境社会学分会 理事 北京市社会学会 理事 韩国《海外韩人研究》 国外编辑委员 주요 론저:  저서로는《全球化时代中国朝鲜族的劳动力流动及其社会变迁》(2008, 韩国, 学术信息出版社), 공저로는《1990年代中国朝鲜族社会的变迁》(2006, 韩国, 首尔大学出版社) 등. 이외에 국내외 학술지에 30여편 이상의 론문을 발표. 출처 인민넷
11    '한'의 민족 댓글:  조회:1721  추천:7  2016-05-17
"한"의 민족 권진홍 우리 민족은 명칭이 많다. 조선민족(한민족)을 제외하고도 백의민족, 배달민족, 아리랑민족 그리고 또 하나의 이름 “한”의 민족… 우리는 세계속에서 한의 정서가 민족공동의 정서로 자리잡고있는 민족으로 통한다.   “한”은 마음의 욕구, 의지가 좌절되여 원통함, 원망, 억울함 등의 감정이 쌓여 이루어진것이다. 이러한 “한”의 정서는 어제오늘 형성된것이 아니라 수천년이란 긴긴 려정을 걸어오면서 억압당하고, 략탈당하고, 쫓겨나고, 빼앗기고, 처참히 짓밟히는 과정속에서 슬픔, 원한, 비애, 회의, 무기력이 쌓이고쌓여 오늘날의 전 민족의 정서로 되여버린것이다.    력사속의 우리 민족은 강국들속에 끼여 많은 시련을 겪었다. 외래 억압은 민족 전체의 집단무의식속에 한이란것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내부의 계급분쟁, 신분차별 또한 민중들에게 뿌리깊은 한을 남겼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한”의 민족으로 통하고있고 전통예술에서도 그러한 정서가 잘 표현된다. 우리의 전통무용은 통한을 뽑아버리려는듯 온몸을 한껏 밖으로 뻗치면서 손끝으로 탁 떨쳐도 보지만 다시 한껏 움츠리고 끌어안으며 한을 내면으로 주워담아 삭이려는듯한 몸짓으로 아픔과 모순과 갈등을 보여주고 그속에서 해탈하는 해소의 미를 그려준다. 우리 가요는 구성짐과 애절함을 함께 담고있는것이 그 특징이라 할수 있겠다. 석쉼한듯 갈리는듯 꺽꺽한듯, 하지만 그속에 천공을 뚫는듯함을 동반한 목소리로 토해내는 가요를 들을 때면 마음 한구석이 얼얼하게 아려나면서도 친근한 느낌이 들고, 가슴이 텁텁뻐근하면서도 어딘가에서는 말로 표현할수 없는 시원함, 통쾌감, 절절함을 느끼면서 눈물범벅이 된 미소를 짓는다. 이것이 바로 우리 민족이다.    우리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혀있는 정서-“한”, 명실공히 우리민족의 집단무의식으로 자리잡고있다. 융의 리론에 의하면 집단무의식은 개인무의식과는 구별되는것으로 조상으로부터 물려받는다. 집단무의식은 세계를 경험하고 세계에 반응하는 소질 혹은 잠재적가능성이며, 유전되기때문에 새로 학습할 필요가 없는것이다.   우리의 “한”의 정서가 바로 그러한것이다. 누군가에게 소외되고 기시당하고 짓눌리고, 그것을 힘이 없어 복수할수도 없고 소리내여 울분을 토할수도 없어 속으로 삭여야만 하는 과정이 반복되고 또 반복되는 과정에 전 민족의 정서로 “한”이란것이 자리잡게 된것이다. 힘이 없고 자신감이 없고 비운속에서 한탄하기만 무한반복하면서 내안에 “내”가 없이 살아온 결과이다.   민족의 정서는 국경이 없다. 중국으로 이주해와서 한세기 반을 훌쩍 넘겼지만 조상들의 “한”의 정서를 우리는 그대로 이어받았고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력사를 쓰는 과정에 또 새로운 한이 루적되기도 했다.    한이 우리의 보편적인 정서로 되는 과정에는 여러가지 원인들이 많았겠지만 우리의 삶의 태도도 크게 한몫 했다. 약육강식이란 살벌한 세상속에서 우리 선조들은 “생존”이란 기치를 들고 전전긍긍하는 삶을 살아왔다. 우리는 늘 갈대처럼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바람이 부는대로 따라 움직이고있다. 아주 먼 옛날을 운운할 필요도 없이 최근 20여년간의 력사만 되돌아봐도 충분하다. 중한수교이후 한국붐이 일어나니 우리 민족의 청장년들은 너나없이 한국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로인, 아이들만 남겨놓고… 심지어 아이들을 돌볼 사람이 없음에도 그냥 갔다. 한국과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것을 천만다행으로 여기며 한국행을 유일한 동아줄로 생각했었다. 그 유일한 동아줄붐으로 70~ 80년대에 태여난 사람들중 일부는 고아 아닌 고아가 되기도 했다. 부모들이 한국 가면서 아이들을 이집저집에 맡겨놓는 바람에 그때 한창 사춘기였던 아이들은 마음 붙일 곳이 없어 헤매다가 방황하고 그러다가 일찍 사회인의 행렬에 들어섰다. 그들은 안정된 생활을 찾기까지 엄청난 대가를 치렀다.   그렇게 한국바라기로만 살아오던 어느날, 별안간 중국이 갑자기 너무 놀라운 속도로 커져가면서 세계속에서의 영향력이 어마어마해지고 한국은 점점 작아지는듯 했다. 그러자 이젠 왜 꼭 우리말을 배워야 하느냐에 갈등하고 서슴없이 민족을 잊어가고있다. 더군다나 원래의 공동체가 해체되기 시작하면서 우리말을 공부할수 있는 환경도 깨여지고 있던차였다.   이처럼 우리는 늘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없었고 지키려는 신념도 없었으며 그냥 눈앞에 보이는것에만 좌우되는 삶을 살아왔다. 그러다보니 부모들의 손길이 필요할 때 부모사랑을 받지 못한 한, 그리고 한국행의 선두에 섰던 부모들에게는 동포라는 미명하에 받았던 수모의 한이 깊숙이 패여져있다. 그리고 중국의 “하해”붐속에서는 자맥질도 배우지 못하고 무작정 뛰여들어 진정 바다의 격랑속을 헤쳐나온 사람은 너무 소수였고 대부분 부평초마냥 떠돌다가 거센 파도에 저멀리로 뿌리워져나갔다.   늘 잘살아보려고 숨 가쁘게 달려왔던 삶들은 일시 좋아보이는듯한 가상을 만들었을뿐 우리는 고유의 문화를 지키고 새로운 도약을 하지 못한 대가로 점차 자신을 망각하는 자아가 없는 민족으로 되어가고있다.   유태인은 인구가 그리 많은 민족이 아니다. 하지만 경제, 정치, 과학, 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유태인들이 빛을 발하고있으며 세계 사람들은 유태인을 존경스러운 민족이라고 한다. 유태인은 나라를 잃고 2000여년을 떠돌이 생활을 하고 처참한 살육을 당했지만 끈질기게 살아남았고 꿋꿋하게 유태인임을 자랑스러워하면서 자기들만의 문화를 꽃피워왔고 지금은 세계에 그 영향력을 과시하고있다. 한으로 치면 우리보다 더 두텁게 쌓였을수 있지만 그것을 쌓기만 한것이 아니라 수난의 력사를 후대에 가르치면서 수난을 거듭하지 않을 방법을 모색하고 강구하여 전수했던것이다. 가장 어렵고 참혹했던 력사속에서도 유태인은 유태인임을 부정하지 않고 자랑스러워했으며 자기들만의 문화를 창조해냈다.   유태인들의 민족자부심은 멸족의 위기를 모면하게 했고 본민족의 문화계승은 세계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여 세계인들의 존경을 자아냈다. “가장 민족적인것이 가장 세계적인것이다”라는 말을 상기시킨다.    “내”가 서양사람도 아니고 한국인도 아니고 중국의 다른 민족도 아닌 조선족으로 태여난것은 나의 선택이 아니라 자연이 정해준것이다. 대자연의 섭리를 어느 누구도 어길수 없음을 인정하듯이 먼저 나, 우리를 인정하고 나와 우리를 함께 지키고 이어나가는것을 첫자리에 놓는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나“를 지켜서 “우리”를 만들고 “우리”속에서 더 떳떳한 “내”가 될수 있다.   한 민족을 지키는 힘을 얻을수 있는 가장 근본적이면서도 강유력한 무기는 바로 언어, 문자가 아닐가 싶다. 세계에는 문자가 없는 민족이 있는가 하면 있던 문자가 소실되여가는 민족도 있다. 그래서 타민족의 문자를 빌려 기록하는 민족이 있는가 하면 열심히 문자를 만들고있는 민족도 있으며 사라져가는 문자들을 지켜보려고 아둥바둥 노력하는 민족도 있다. 그만큼 문자가 한 민족의 문화발전에 중요함을 증명하는 일환이라 하겠다.   말과 문자 속에 한 민족의 력사가 있고, 문화가 있고 그 민족의 사유방식이 있다. 어느 한 학생의 일기내용이 생각난다. 한국말에는 존경어가 있어서 한국사람들이 그렇게 례절이 밝은 모양이다 라는 내용이다. 겨우 몇달 공부한 학생이 쓴 일기라 말을 매끄럽게 다듬진 못했지만 언어로부터 례의범절까지 이어간 학생의 일기는 나에게도 아주 인상적이였다.    또 요즘 우리 어르신들은 손자손녀들의 우리말 인사말을 한두마디 들으시면 너무나 좋아하신다. “할아버지, 할머니 안녕히 주무세요”, “잘 주무셨어요?” 아주 간단한 인사말이다. 그것도 외국어 하듯이 어수룩하게 한다. 어눌한 이 한마디가 뭐 그리도 좋으시냐고 하겠지만 이건 단순한 문자적인 의미에 지나는것이 아니다. 손자손녀들은 이 말을 할 때만큼은 공손해지고 어르신들은 언어적으로 표현할수 없는 묘한 정감속의 뉴대로 이어질수 있는 순간에 큰 기쁨은 얻는다. 오직 “우리”만이 느낄수 있는 감정이다.    물은 어디서든, 어떤 형태로든 근본이 변하지 않는다. 강에서도 호수에서도 작은 계곡에서도 바다에서도, 수증기로 되여서도, 얼음이 되여서도 주성분은 그대로이며 그래서 만물의 생명의 근원이 된다.   우리가 즐겨 먹는 김치와 된장은 시간이 오래 될수록 깊은 맛이 난다고 한다. 원초적인 맛에 숙성의 맛이 가미된것이 그 매력적인 맛의 원인일것이다.   집단무의식은 천부적 재능을 나타나고 창조성, 깊은 통찰의 원천이 되기도 하며, 동물적본성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한”의 개념은 사전적 뜻으로 보면 “원한”, “한탄”의 의미이지만 수천년간의 삭임속에서 우리 민족 고유의 “정”과 어우러져 긍정적 희망과 가치를 창출해내기도 한다.    새 세대들에게도 우리민족의 “한”의 정서는 류전되여오지만 우리의 말과 글, 력사를 모르는 아이들은 이것이 어떠한 정서인지를 모르며 그것을 누릴줄을 모른다. 그래서 “한”이 승화되여 새로운 창조력을 발휘할수 있는 기회도 재능도 잃어버리게 된다. 뼛속에 베여있는 “한”의 정서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새로운 “한”을 심어주는것이야말로 진정 전 민족의 비애일것이다.   말과 문자를 아는것으로부터 문화를 잇고 부단히 새로운것을 창조하여 더 자랑스런 “우리”가 있게 되고 그 뒤심으로 나는 한결 더 나다운 “내”가 될수 있는 민족으로 거듭나는 날을 그려보고싶다.   【권진홍 략력】   이름: 권진홍(权震红) 소속: 북경련합대학교 전공: 언어학, 조선 학력: 연변대학 문학 박사 연변대학 문학 석사 연변대학 조문학과 학사 주요론저: 저서: 《한국어 비서술성 명사의 논항연구》(역락출판사, 2010) 편저: 《관광한국어》(知识产权出版社,2011) 론문: “윤동주 ‘서시’에 대한 기호론적 분석”, “보조동사 ‘-말다’와 ‘버리다’의 의미차이 분석’ 등 10여편 론문 국내외 학술지 발표. 출처:인민넷  
10    중국조선어교육의 호황과 부진 댓글:  조회:1718  추천:2  2016-05-16
중국조선어교육의 호황과 부진 김청룡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우리 선조가 중국땅에 발을 내디디면서부터 중국에서의 조선어교육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여 오늘날의 한국어교육의 극호황을 보이는 국면에까지 이르렀다. 중한수교이후 한국경제에 힘 입어 각 대학들에서 분분히 “한국어과”를 개설하였는데 중국교육부 등록 공식명칭이 “조선어과”인만큼 조선어교육이란 표현이 적절하다.  해방전의 조선어교육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조선에서 일어난 애국문화계몽운동과 국문운동의 영향으로, 그리고 반일민족해방사업의 인재양성 수요에 인해 두만강, 압록강 일대에 많은 조선인학교들이 설립되였다. 1916년 12월 말까지 두만강, 압록강 일대에 조선인이 경영하는 학교가 무려 176개소에 달했다고 한다. 1906년, 리상설에 의해 세워진 서진서숙을 비롯하여1907년 연길현 와룡동에 세워진 창동학교, 1908년 룡정현 명동촌에 세워진 명동서숙(후에 명동학교로 개칭), 1909년 훈춘현에 세워진 동창학교, 1910년 료녕성 환인현에 세워진 동창학교, 1910년 화룡현에 세워진 덕흥의숙, 1911년 류하현 삼원보에 세워진 신흥학교(신흥강습소), 1911년 연길현 용지향 동구에 세워진 봉명학교 등이 비교적 이르게 설립된 학교들이다. 당시 조선어연구에 조예를 갖춘 교원이 적은 형편에서 명동학교 같은데서는 조선어학자이며 교육자인 장지영선생을 초빙하여 조선어를 가르치게 하였고 윤세복, 윤세용 형제가 가산으로 세운 동창학교에서는 리극로와 같은 조선어학계의 성망있는 학자를 모셔 함께 교육을 진행했다.  대학교육으로서 중국인을 상대로 진행한 조선어교육은 1945년 남경에 설립된 국립동방어문전과학교에서 시작되였다. 1949년 남경이 해방을 맞으면서 국립동방어문전과학교가 북경대학 동방언어학부에 합병되여 북경대학 조선어과를 출범시켰다.  해방후 및 중한수교후의 조선어교육 1945년 일제의 투항과 함께 중국 동북지역이 타지역보다 먼저 해방을 맞이하면서 조선인 집거지역들에는 민족어로 강의하는 민족중소학교들이 우후죽순마냥 설립된다. 흑룡강성 목단강시조선족중학교의 전신이 바로 1945년에 개교한 고려중학이다. 조선어 전문인재 양성을 위해 1949년 연변대학에, 1953년 락양외국어대학에, 1954년 대외경제무역대학에, 1972년 중앙민족대학에 조선어과가 선후로 개설되였다.  1992년 중한수교후, 량국의 교류가 빈번해짐에 따라 조선어 대학교육은 더 큰 호황을 누린다. 2009년을 기점으로 진행한 ‘중국의 한국어교육의 현황조사’를 살펴보면 2,409개 대학가운데 4년제 국립대학교 74개, 3년제 혹은 2년제 국립전문대 42개, 4년제 사립대학교 37개, 3년제 혹은 2년제 사립전문대 17개, 도합 170개의 대학교에 조선어과가 설치되여있다. 2009년이후 현재까지 새로 개설된 대학들을 합치면 무려 200여개 대학에 조선어과가 개설된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중국인 가정의 경제력상승과 함께 한국으로 류학가는 중국류학생이 날로 늘어나는데 현재 재한중국인류학생수는 6-7만명에 달할 정도이다.  타민족을 위한 조선어교육의 호황과 대조적인 우리 민족어교육의 부진 한족 등 타민족을 위한 조선어교육이 전례없는 호황을 보이는것과 대조적으로 우리의 기초민족어교육은 도리에 전례없는 위기에 직면했다고 할수 있다. 연변지역은 아직까지 그나마 괜찮다고 할수 있겠지만 흑룡강, 료녕, 내몽골 등 조선족산재지역의 조선족학생들의 조선어수준이 급격히 하강하는 추세를 보인다. 언어접촉에 의한 대환경의 영향도 크지만 중소학교 조선어문교원의 결핍이 더 큰 문제이다. 예전의 오상사범학교는 흑룡강성의 조선족소학교에 85% 이상의 조선어문교원을 수송했다. 그러나 2005년에 흑룡강민족직업학원으로 합병되면서 소학교 조선어문교원을 양성하는 통로가 차단되였다. 연변대 사범학원이나 연변대 조문학부, 중앙민족대 조문학부 출신의 학생들도 교육계통을 기피하다보니 조선족중소학교의 조선어문교원이 무척 모자라는 실정이다.  그뿐아니라 조선족인구의 마이너스성장과 해외 및 관내지역으로의 대량의 인구류실로 인해 동북지역 조선족중소학교들이 학생원천 부족으로 문을 닫거나 합병하는 경우가 비일비재이다. 일부 학교들은 정원 부족을 대처하는 방법으로 한족반을 모집하여 학교운영을 유지하고있다. 그 대가로 한족교원을 대거 모집하다보니 조선족학생들의 조선어실력은 더욱 떨어질수밖에 없다. 멀지 않은 장래에 조선족중소학교에서 타민족교원이 조선족학생들에게 외국어로서 조선어를 가르치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광경이 펼쳐질가 걱정된다. 중소학교의 기초민족어교육의 부진은 중앙민족대나 연변대 조문학부의 전공자 양성에도 치명타가 된다.  일제시대의 탄압과 피박을 받으면서도 꿋꿋이 진행해온 조선어교육, 중한수교, 중한FTA 체결 등 시대발전의 추세에 힘을 입어 더큰 호황을 누리는 조선어교육, 민족어로서의 조선어기초교육이 부진에서 탈출하고 하루빨리 새로운 도약을 이룩하기 바란다. [김청룡 략력] 소속: 중앙민족대학 조선언어문학부 전공: 언어학, 조선어 학력: 한국 경희대학 국어국문과 언어학 박사 한국 서울대학 국문학과 언어학 석사 중앙민족대학 조선언어문학부 언어학 석사 중앙민족대학 조선언어문학부 언어학 학사 경력:중앙민족대학 조선언어문학부 강사, 석사생 지도교수(2012.9 – 현재) 한국 고려대학 민족문화연구원 연구원(2011.8 - 2012.8) 한국 대진대학 교양학부 외국인 전임교수(2011.3 – 2012.8) 한국 호원대학 국제교육원 강사(2010.3 – 2010.7) 중앙민족어문번역국 조리번역(2002.8 – 2005.3) 주요 론저:  저서로는《韩中待遇词汇对比研究》(2014, 한국, 박문사)、역저로는 《韩国风俗画》(2015, 商务印书馆)등. 《浅析韩餐菜名的结构类型-以显性要素与隐性要素为例》(2015)、《韩中待遇词汇语域关系对比分析》(2014)、《基于语料库翻译学的韩汉有标识被动句的翻译研究小议》(2014)、《韩国语自我待遇词汇语义类型分析》(2014)、《韩国语汉字词与汉语的人称词缀对比分析》(2012)、《刍议中国国内韩国语教育改善方案》(2010)등 10 여편 론문을 국내외 학술지에 발표. 출처: 인민넷
9    우리의 인문자원과 브랜드를 적극 발굴하고 창출하자! 댓글:  조회:1668  추천:8  2016-05-04
우리의 인문자원과 브랜드를 적극 발굴하고 창출하자! 리성일(중국사회과학원 아태글로벌전략연구원) 개혁개방 이래, 중국조선족사회는 격변의 소용돌이속에서 전통근거지였던 동북 3성을 벗어나 북경, 상해, 청도, 광주, 심천 등 대도시에 새로운 집거지를 점차 구축해왔다. 특히 21세기에 들어와서 여러 대도시에 조선족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으며 다양한 친목 행사와 활동들이 활발히 이루어지고있다. 이제는 동북 3성 외의 대도시에서 새로운 조선족사회가 서서히 형성되여가고있다.    다른 한편, 30여년이 지났지만 많은 활동들이 아직까지는 친목단계수준에 머물러있는 것도 현실이다. 문화적인 민족답게 문명한 새로운 집거지사회를 형성하려면 이제는 친목, 동아리, 팬 등 다양한 활동을 바탕으로 보다 높은 문화적수준으로 향상시키기 위한 고민과 노력이 매우 절실하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 자체의 인문 자원과 브랜드를 발굴하고 창출하며 널리 알려야 한다.   우선, 이민 100여년 력사를 뛰어넘어 우리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수립해야 한다.    이제는 아직까지도 가지고있는 이민이라는 사유를 버리고 이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의식을 당당하게 자각해야 할것이다. 이렇게 하려면 우리의 인문과 력사 자료를 발굴하고 널리 알리기 위한 전사회적인 노력이 필요한데 최근 이와 관련하여 많은 움직임이 일어나고있다.   “중국의 피카소”라고 불리우는 혁명화가 한락연(韓樂然)선생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고향인 룡정시는 한락연공원을 세웠고 한락연전시관도 만들어 현지 청소년들에 대한 교육시설로 리용하고있다. 2015년 12월, 신강 키질(克孜尔)석굴에 한락연선생의 동상이 세워진데 이어 최근 북경 민족출판사는 《한락연선생을 추억하여(缅怀韩乐然)》(1998년 1차 출판)를 재간하였다. 또한 한락연선생이 1920년대에 상해에서 다녔던 남경미술전문학원(1949년 이후 남경으로 이사)은 다큐멘타리를 제작할 예정이라고 한다. 참으로 바람직하고 의의가 큰 작업들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문자원이라고 할수 있는 걸출한 력사인물들에 대한 추억은 민족을 뛰어넘어서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오래동안 이어져갈수 있기때문이다.   우리 민족의 인문자원을 발굴하는 작업은 동북 3성에만 국한될것이 아니라 북경, 상해, 광주 등 대도시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    지나온 혁명시기에 리철부(李鐵夫, 본명은 한위건, 1937년 서거시 중국공산당 천진시위 서기), 김산(金山, 본명은 장지락, 님 웨일즈의 소설 《아리랑의 노래》 주인공), 주문빈(周文彬, 본명은 김성호, 1944년 희생시 중국공산당 기동(冀東)지구 서기) 등 많은 조선족출신 혁명가들이 북경에서 활약하였다. 특히 주문빈은 현재 북경 통주구(通州區) 로하(潞河)중학교를 다녔고 1927년에 이 학교에 공산당지부를 처음으로 세웠으며 제1임 당지부 서기를 담임하였다. 이 당지부는 당시 통주구의 첫 공산당조직이였다. 현재 로하중학교는 주문빈렬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학교에 주문빈반, 주문빈거리를 내왔으며 주문빈조각상을 세워 청명때마다 학생들에게 애국주의교육을 진행하고있다. 이뿐만아니라 하북성 당산시(唐山市) 로북구(路北區) 한성진(韓城鎭) 중문장(中門庄)소학교는 주문빈렬사가 희생된 10월마다 학교의 “주문빈광장”에서 “주문빈영웅소선대대” 기념활동을 벌리고있다. 우리 사회나 관련 단체들도 이러한 현지의 활동을 고도로 중시하고 밀접하게 련계하여 공동으로 기념행사를 개최함으로써 우리 자체의 인문자원을 널리 알려야 할것이다.   북경외에도 할빈의 “인민음악가” 정률성(鄭律成, 중국인해방군군가 작곡가) 기념관, 상해 수복원의 “영화황제” 김염(金焰)조각상, 광주렬사릉원의 중조인민혈의정(中朝人民血誼亭) 등은 현지에 있는 우리 민족사회나 단체가 정기적으로 기념행사를 진행해야 할 력사적인 인문자원이라고 할수 있으며 나아가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인다면 보다 많은 인문 자원과 브랜드를 발굴하고 창출할수 있을것이다.   오늘날 연변에서는 진달래축제, 송이버섯축제, 사과배축제 등 다양한 행사가 진행되고있다. 우리 민족의 상징이거나 고향의 특산물을 리용하여 국내외에 널리 홍보하는것은 산업의 문화화라고도 할수 있다. 특히 민속관광, 홍색(紅色)관광 등을 개발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 스토리델링이다. 이를테면 사과배축제시에는 단순하게 맛과 영양만을 강조할것이 아니라 조선의 사과와 중국의 돌배가 어떻게 접목되여 사과배로 되였는가에 관한 력사이야기와 관련 자료들도 같이 홍보한다면 그 의미가 더욱 크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사업을 위해서는 우리 민족의 인문과 력사를 밀접히 결합시켜야 하며 력사적향취와 문화적컨텐츠를 담을수 있는 노력이 매우 필요하다. 이제는 단순한 관광시설이나 전통가옥을 짓고 축제만을 벌릴것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있는 우리의 찬란한 력사전통과 인문자원을 충분히 결합시킨다면 보다 높은 경제적 및 사회적 효익을 창출할수 있을것이다. 출처 인민넷(위챗)
8    "훈민정음"은 문자에 그치지 않는다 댓글:  조회:1628  추천:3  2016-04-26
"훈민정음"은 문자에 그치지 않는다                  정신철 “훈민정음”은 조선시대 제4대왕 세종(1397~1450, 재위 1418~1450)이 집현전의 진보학자들을 인솔하여 창제한 우리문자로 1443년(세종 25년)에 완성되고 1446년에 반포되였다. 훈민정음의 뜻인즉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이다. 훈민정음의 창제목적은 그 서문에서 말한바와 같이 “우리 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바가 있어도 끝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라. 내가 이것을 가엾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익혀서 날마다 쓰는데 편하게 하고자 할따름이니라”고 하였다.  “훈민정음”의 창제와 반포는 우리민족 문화발전에 있어서 하나의 획기적인 거사였다. 봉건시대 통치자인 대왕이 백성들의 편리를 돕자고 문자를 창제한것은 지금에 와서도 아주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물며 기득권층의 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창제한 우리문자임에랴.  이처럼 세계 력사상 나라왕이 백성을 위해 문자를 만든 사례가 없듯이 “훈민정음”은 단순히 문자에 그치지 않았으며 그속에는 우리문화의 독자성, 민주성과 포용성 등이 뚜렷하게 보였다.  첫째, “훈민정음”은 민족자주성의 결실이였다. 세종왕이 “훈민정음”을 창제반포할 시기 조선은 깊은 사대주의경향에 빠져있어 “모화숭화”(慕華崇華)관례에 어긋나는 일을 하기에는 아주 어려웠다. 더우기 당시 집현전 사실상 책임자였던 부제학 최만리는 상소문을 올려 우리 조정은 태조대왕때부터 지성으로 중국을 섬겨 한결같이 중국의 법제를 따라와서 지금도 글자나 풍속이 중국과 한가지인 이때에 백성에게 훈민정음을 익히게 하는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리유로 반대까지 하였다. 이와 같이 세종왕이 참여하고 지시하여 만든 “훈민정음”은 강한 민족자주성의 결실이라고 볼수 있다. 둘째, “훈민정음” 창제와 반포에는 민본주의사상이 깊이 스며져있다. “훈민정음”이전에는 복잡한 한문과 이두(한문으로 우리말을 표기하는 글체)를 사용하였는바 이는 문신들조차 알기 어려운 글이였다. 이토록 어려운 글을 생활난에 시달리는 서민들이 배운다는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였다. 따라서 량반이 아닌 백성들도 쉽게 읽고 쓸수 있도록 창제한 “훈민정음”에서 세종왕의 깊은 민본주의사상을 력력히 읽을수가 있다.  셋째, “훈민정음”은 백성들이 쉽게 익히고 편리하게 쓸수 있는 실용성이 강한 문자로 기층문화보급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 일례로 리조시기의 “서당”과 일본 도꾸가와바꾸후시기의 “데라꼬야”(寺子屋)를 비교해볼수 있다. “서당”이나 “데라꼬야”는 모두 서민교육장소이다. 당시 리조인구 1300만에 서당이 16000여개 있었고 일본은 3000만 인구에 데라꼬야가 11000여개 있었다. 여기서 보다싶이 조선은 평균 800명에 서당이 하나 있은데 비해 일본은 1700명에 데라꼬야가 하나 있었다. 다른 한면 당시 일부 지배층들은 훈민정음을 '언문'(諺文)이라고 부르면서 업신여기고 잘 사용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한다면 “훈민정음”이 서민들의 교육열에 얼마나 큰 역할을 하였는가를 보아낼수 있다. 그리고 유네스코가 문맹퇴치 공로상이름을 “세종대왕상”이라 할 정도로 “훈민정음”은 우리민족의 문맹탈퇴와 기층문화보급에 아주 크게 기여하였다.  “말은 사람의 특징”이라고 하듯이 민족언어는 민족구성의 중요한 요소이며 민족문화의 표상이기도 하다. 민족의 기층문화는 시대가 어떻게 변하든 단절되지 않고 유유히 전승되고있으므로 그 민족문화의 명맥을 이룬다. “훈민정음”은 민족문화의 명맥을 이루는 기층문화보급과 전승에 막대한 기여를 하였는바 단지 문자에 그치지 않고 그속에는 우리의 문화가 스며있다.  민족문화는 민족력사의 결실이고 민족주체성의 뿌리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언어문자는 민족문화를 이어가는 가장 중요한 고리이며 민족존립과도 련결된다. 다문화시대에 사는 우리는 자기 문화와 언어를 잘 살리면서 타문화를 리해하고 포용해야 기타 민족으로부터 존경을 받을수 있고 자아발전에도 더욱 유리할것이다. 하지만 어떤 민족이든 막론하고 자기의 주체성을 상실할 경우에는 뿌리없는 부평초와 같은 운명을 면하지 못한다. 현재 도시화와 더불어 많은 사람들이 주류사회진출을 운운하면서 민족언어를 무시하고 심지어 익숙한 민족문화마저 멀리 또는 포기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만약 이러한 경향이 깊어지면 민족 생존과 발전에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것인지는 자명한 일이다. 【정신철 략력】 직장: 중국사회과학원 민족학&인류학 연구소 전공: 민족리론, 중국민족문제 및 조선민족연구 학력: 연변대학 력사학 박사 중국사회과학원 연구생원 법학석사 연변대학 력사학 학사 경력: 중국사회과학원 민족연구소(현 민족학&인류학 연구소) 조리연구원, 부연구원, 연구원 한국 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객좌교수(2003.8-2004-7) 한국 고려대학교 사회학과 방문교수(2008.11—2009.4) 중앙민족대학 “985”공정 초빙 전문가(2012.1—2014.12) 겸직: 중국조선민족사학회 회장 중국사회과학원 국제이민과 해외화인연구중심 비서장 등. 주요론저: 《民族主义思潮与国族建构》(2014)、《朝鲜族》(2012)、《조선족사회의 현황과 미래》(2010)、《在日朝鲜人历史及其现状研究》(2007)《한반도와 중국 그리고 조선족》(2004)등 저서 《少数民族人口流动与城市民族关系研究》(2002)、《马克思主义的民族平等观及其实现途径》(2008)、《走向多元民族、多元文化社会的韩国现状及对策》(2010)、《辛亥革命对中国统一多民族现代国家构建的贡献》(2011)、《论新时期城市民族关系发展态势》(2013)、《论少数民族流动人口的城市适应与融入》(2014)등 130여편 론문。 출처 인민넷
7    조선족 로후문제에 대한 사색 댓글:  조회:1401  추천:1  2016-04-22
조선족 로후문제에 대한 사색 예동근 요즘 사회의 핫이슈중의 하나가 고령화이다. 중국에서 인구절벽과 인구보너스(紅利)의 소실로 두 자녀 정책의 실시, 고령화에 대비하는 사회보장제도개혁 모두 중요한 주제로 떠오르면서 관심을 받고있다. 2015년 WHO(세계보건기구)에서 발표한 중국의 평균수명은 남성은 74세, 녀성은 77세이다. 실제수명과 달리 사람들이 기대하는 수명도 1990년의 60대 중반에서 2000년에 70대로 높아졌고 2010년에는 평균 80대로 높아지고있다. 2011년에 상해지역의 평균 기대수명은 89.2세로 높이 나타났고 연변조선족들도 평균 기대수명이 80.58세로 높은 수치를 보이고있다. 그럼 우리 조선족의 고령화문제는 중국 다른 민족의 고령화문제와 비교할 때 어떤 특수성을 띠고있는가? 우선 비교적 특수한 1945-1955년에 출생한 세대에 관심을 두고싶다. 이 세대는 조선족인구의 증가에 거대한 공헌을 하였고 또한 조선족 고령사회진입의 속도를 늦추는 중요한 집단이기때문이다. 이 세대는 평균 2자녀 이상을 출산하였고 낮은 영아사망률과 중국의 평균적인 양육환경, 전쟁이 없는 평화적인 환경에서 조선족인구의 증가는 물론 높은 교육열로 조선족의 인구질제고에도 엄청난 공헌을 하였다. 하지만 현재 안타까운것은 이 세대의 높은 사망률이다. 이 세대는 지금 고령화에 진입하는 주축이지만 90년대 산업화-인구이동 과정에서 “산업전쟁”의 가장 큰 피해를 본 집단이다. 우리가 유심히 이 세대집단의 소학교, 중학교 동창모임을 관찰하면 쉽사리 이 세대의 많은 사람들이 다른 세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빠른 속도로 사망하고있다는 아픈 현실을 발견할수 있다. 이 세대의 대다수는 문화대혁명 등 원인으로 높은 학력을 갖추지 못한 반면 농촌을 지키는 파수군으로 전통문화를 가장 많이 보유한 집단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자녀세대들의 활발한 도시진출로 도농격차가 지역을 넘어 세대간의 문화격차로 나타났고 전에 자신이 겪은 고부갈등 등과는 다른 양상의 가족갈등을 겪고있다. 대표적인것이 “손자보다 일을 선택”하는것이다. 조선족의 전통문화에서 손자, 손녀와 함께 있는것을 천륜을 누린다고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돈을 벌어 용돈을 주는것을 낫게 생각하고 자식들과 같이 한집에서 살기 싫어하는쪽으로 의식이 많이 기울어지고있다. 이런 가족관념과 가족의 변화, 로동시장에서 퇴출하고싶지만 로후와 자녀를 위해 계속 일을 하는 이 세대집단은 “초불처럼 자신의 모든것을 태워 자녀에게 주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른다. 이 세대는 도시문화에 아직 익숙하지 않지만 농촌으로 다시 돌아가려 하지 않으며 자녀와 함께 한집안에서 살기도 싫어하지만 가족을 위해 일에 파묻혀있는 집단이다. 이들이 어떻게 로후에 대비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자신들의 건강을 지켜야 하는지? 어떻게 자녀들과 소통을 해야 하는지? 이 모든면에서 새로운 경험과 지식이 필요한 시점에 와있다. 또한 조선족연구자들도 이 세대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갖고 연구해야 하며 조선어 언론과 매체도 깊은 관심을 갖고 심층보도를 통해 사회적관심을 일으켜야 한다. 이 세대에 깊은 관심을 돌려주는것이 조선족사회의 커뮤니티를 다시 활성화시키는 첫 발자국이 아닐가 생각된다. [예동근 략력] 성명: 예동근(芮東根)  소속: 한국 부경대학교 국제지역학부 중국학전공 전공: 사회학, 조선족문제 학력: 한국 고려대학 사회학과 문학 박사 중앙민족대학 민족학리론 법학 석사 연변대학 중문학부 문학 학사 경력: 한국 국립대학교 국제지역학부 조교수를 거처 현재 부교수 미국 UCSD 이민비교정책연구소 방문교수(2015.2 - 현재) 한국 고려대학 아세아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009.9-2010.2) 겸직: 한국사회학회, 동북아문화학회, 재외한인학회, 대한중국학회, 국제지역연구학회, 한국공공사회학회, 일본 조선족연구학회등 여러 학회의 국제이사, 편집이사를 겸임. 주요 론저: 공저로는《차이나 핸드북》(2014, 한국, 김영사)、《조선족 3세들의 서울이야기》(2011, 서울, 백산서당)、《조선족의 국제이주와 네트워크》(2006, 일본, 아시아경제문화연구소)등, 역서로는 《마르크스철학에서 유철학으로》(2015, 한국, 백산서당). 《The Cultural Theory of Laurel Forest and Japanese Scholars’ Culture Researching to Southwest China Minority》(2014)、《Will the American Model Be the Future of Ethnic Minority in China?: A Case Study of Korean Chinese Community in Beijing》(2014))、《From rural to urban areas: On the formation of Korean-Chinese enterprises》(2013)、《Acclimation and Multiethnic relationships of chaoxianzu community in the process of urbanization》(2012)、《한국의 지역 다문화공간에 대한 비판적 접근》(2011) 등 다수 론문을 국내외 학술지에 발표.
대청제국의 근대적 앎은 너무 혹독하고 굴곡적이였습니다. 새로운 식민지를 찾아나섰던 서양렬강부터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저 했던 유럽 자본가, 프레스터 존을 찾아 떠났던 종교인까지, 어느 순간부터 이들은 지구 반대편의 이 거대한 뭍을 거저 먹어도 체하지 않는 떡으로 보기 시작했던것 같았습니다. 심지어 양놈 코스프레라고 비웃음의 대상이였던 섬나라 왜구조차 이곳에 진입하여 빠가야로를 열창하고있었으니 말입니다.    두만강, 압록강, 송화강 등 자연의 경계는 태평양 서안에서의 패권을 위해 극동지역까지 팽창한 제정로씨야, 칙칙한 아시아에서 벗어나 구라파적 삶을 추구하고저 안달이 난 일본, 아무리 비실거려도 굶어 죽은 락타는 말보다 크다고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고저 했던 청, 마냥 고요할수 없어 무언가라도 하고저 했으나 그 소박한 념원마저 요절된 조선 등의 문명적 충돌과 절충의 내용을 고스란히 간직한 대하드라마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드라마의 프롤로그인 장백산에 갈 때마다 온천속의 닭알에게까지 경의를 표하고싶은 충동이 단전부터 인중까지 빛의 속도로 상승하군 합니다.    어찌 되였거나 1800년대말~1900년대 초 전혀 균형적이지 않았던 정치경제질서의 각축구조, 이 구조와의 타협, 충돌 속에서 중국조선족의 “근대성”이 잉태했던것 같습니다. 이 “근대성”은 이후 1900대 전반을 휩쓴 지속적인 이데올로기각축을 통해 때로는 물리적이고 문화적인 폭력을 통해 오늘날의 양태로 재구성을 거듭하고있었던것입니다.    이른바 중국조선족의 “력사적기원”은 설움과 한으로 맺힌 이주와 논농사 중심으로 묘사되는것으로 보여집니다. 동북지역의 주요 하천을 따라 이주한 조선인이 기능적으로 익숙한 농업경제를 구성함으로써 논의 북방한계선을 높이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것이지요. 나아가 이 농업경제에 기반한 계급관계는 이후 사회혁명의 토대가 되여 신중국의 건국력사에 중국조선족의 이름을 당당하게 새겨넣는데 실천적, 론리적 근거를 제공하게 됩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이런 력사적경험 못지 않게 중국조선족의 근대를 설명하는 중요한 척도가 더 있는듯 합니다.   “룡정촌은 빠르게 발전하고있으며, 중국의 조약항보다는 미국 중서부의 프레리거주지 같아 보인다. 건축업자의 비계(脚手架)와 외양이 단조로운 외국건물들이 조선인거주자의 진흙움막 사이로 솟아오르고있다.”   페리 앤더슨이 《현대사상의 스펙트럼》(p531) 말미에서 언급한, 1925년 8월 4일자 부친의 일기중 일부입니다. 하나 더 있습니다.   “1932년에 남편이 카나다에서 돌아왔다. 얼마뒤에는 룡정중앙교회 목사로 부임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룡정에 완전히 뿌리를 내리게 되였다. 룡정에서는 중앙교회와 동산교회가 가장 중심적인 교회였다. 룡정교회가 잘 된 리유중 하나는 상업지대에 있었기때문에 장사를 하는 이들이 많아서 돈도 많았기때문이다.”    문재린과 김신묵 회고록 《기린갑이와 고만녜의 꿈》(p486)의 일부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도시입니다. 물리적인 경계에 근거한 공간적,지리적 령역과 상공업이 결합되였을 때 이를 도시라고 하듯이 도시는 상공업의 장이고 근대사회 그 자체입니다. 도시는 단일한 부류의 사람을 분화시키는 강제력이 있고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살수 있게 하는 포용력이 있습니다.   이주해온 많은 조선인들이 광활한 수전과 한전을 개척할 때, 그들에 의해 생산된 재화는 상업과 공업을 통해 상품이 되였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속에서 이 상품화의 과정을 어떻게 조작하면 리윤을 극대화할수 있을지 생각하는 사람들과 리윤이 극대화되는 과정에 자신의 로동에 대한 보상이 합리적으로 이루어지는지 생각하는 사람들, 그리고 이들을 어떻게 효률적으로 관리할수 있을지 고민하는 사람들이 나뉘기 시작했을것입니다. 왜냐하면 도시의 제도를 결정하는 구조는 너무나 력동적으로 변하고있었기때문에 도시를 구성하고있는 인구가 단일한 수준으로 남아있기 쉽지 않았을것입니다.    더 광활한 동북대지로 가보겠습니다.   유럽의 한복판에 세워진 높이 300메터의 철탑이 여기가 근대 자유주의중심이라고 오만함을 뽐낼 때, 더 무지막지한 규모의 Fe원소는 제정로씨야에 의해 유라시아대륙을 관통하는 철도로 조직됩니다.    제정로씨야는 중동철도의 첫 삽을 1897년 8월 29일, 현재 조선족인구가 약 40%인 흑룡강성 동녕현 삼차구진에서 뜹니다. 1901년 3월 3일까지 할빈에서 수분하 구간의 동부간선 빈수선, 같은 해 11월 3일 할빈부터 만주리까지 서간선 빈주선이 완공되고 1902년 11월 할빈부터 려순까지 남부지선이 완공되였습니다. 그리고 그뒤의 30여년 동안 동북지역에는 거미줄같은 철도망이 구축됩니다. 연변지역에 부설된 철도는 일제가 패망하기 몇해전에 부설되였습니다. 광활한 동북평원의 그윽한 풀내음은 철도의 향연으로 전도되기 시작했습니다.   철도가 부설되면서 연선에는 일련의 도시들이 출현합니다. 제국주의침탈의 구체적 반영이 철도라는 점, 그리고 이 도시는 철도를 통해 근대를 경험했다는 점 등은 부정할수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흔히 표현하는 산재지구의 중국조선족은 바로 이 철도 연선에 출현한 도시와 이 도시의 근교에 분포된 농촌에서 한족, 만족, 몽골족 등 민족과 함께 거주하고있었습니다. 또한 동북 주요 4개 도시의 조선족은 철도역을 중심으로 한 부속지와 상부지에서 여러 민족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증기기관과 《국부론》의 대화가 1900년대 초 중국 동북지역 조선(족)인사회에서도 들리기 시작했던것입니다.    도시문명에 대한 묘사 없이 중국조선족의 근대는 설명 가능할가요. 상업화된 농업, 이식된 공업 등 난해한 낱말은 제쳐두고 중국조선족인구가 내면화한 근대적내용을 도시에 기초하여 생각해볼수는 없을가요.   오늘날 중국조선족의 문화는 벼와, 한복과, 물동이와, 김치와, 장독 등에서만 배태되고 정형화된 “특수한것”만이 아니라 동서양의 문물과 사상의 융합, 변형, 경쟁 속에서 재생산되고 재구성되는 “보편적인것”도 포함합니다. 중국조선족의 “근대성”은 이주, 지주-소작농-자작농의 관계와 함께 장마당(시장), 기업(공장), 금융(은행), 교육(학교), 종교(교회), 의료(병원), 교통(도로), 출판(도서), 정보(우정), 국가(정부), 사법(법원) 등 다양한 제도와 조직이 어우러진 도시에 대한 설명과 묘사를 필요로 합니다.    100년전 중국 동북지역에서 살았던 선인들은 치렬하게 “근대적인간”으로 살고저 했을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랑만이 있었을것입니다. 그들의 노력과 랑만을 재구성하고 재해석할수 있는, 아니, 그렇게 해야 하는 시대가 온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런 시도가 오늘날 중국조선족사회의 변화를 더욱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지도 모릅니다.  【박우 략력】   성명: 박우(朴佑)    소속: 한국 한성대학 교양교직학부 전공: 이민사회학, 정치사회학, 동아시아 이주와 시민권 문제, 한국의 조선족 사회 학력: 한국 서울대학 박사과정 수료         한국 서울대학 사회학 석사         연변대학 식품공학 학사 경력: 한국 한성대학 교양교직학부 전임강사를 거쳐 현재 조교수.  주요 론저: 편저로는《우리가 만난 한국(2012, 한국, 북코리아)、역서로는 《한국과 중국의 사회변동 비교연구》(2013, 한국, 나남), 《중국 동북지역 도시사 연구》(2016, 한국, 진인진)등.
인구고령화의 위기와 그 출로 리천국 요즘 동북지역에 가면 작은 도시나 농촌에서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고있는 모습을 느낄수 있다. 소학교부터 초중, 고중까지 학생수가 현저하게 감소되고있고 농촌의 많은 학교는 이미 문을 닫았거나 페교의 직전까지 다달으고있다.  오래동안 우리 나라는 세계인구대국으로 불리우며 수많은 농촌유휴로동력을 보유하고있다고 자처하였으나 이제 이런 상황에 슬슬 변화가 오기 시작한것이다. 중국이 얼마만큼의 농촌로동력인구를 보유하고있는지에 대하여 정확한 통계는 사실 힘들다. 중국통계년감에 의하면 농업인구가 3억명 정도 된다고 하지만 실제 로동에 참여하고있는 인구는 이보다도 적을것으로 사료된다.  20세기90년대 우리 나라 국유기업개혁과 더불어 로동력시장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고 취업도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더는 국유기업이나 집체기업이 주된 형식이 아닌 규모가 방대한 비정규형태의 취업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농촌로동력이 농업으로부터 해방되면서 비농업부문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1억명이 넘는 농촌인구가 도시로 진출하였다. 이러한 취업방식은 공식적인 통계에 반영되기 어려웠고 학자들은 통계년감의 수치에 근거하여 그 로동력수자에 대하여 추측을 할뿐이였다. 하지만 전국적으로 로동력난현상이 나타나면서 로동력문제의 심각성에 대하여 느끼기 시작하였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루이스는 한 국가가 공업화를 실현하는 과정에 농촌유휴로동력은 비농업부문으로 점차 전이하게 되며 나중에는 로동력의 과잉에서 로동력부족에로 이르는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를 루이스변곡점이라고 불렀다. 루이스변곡점에 도달하게 되면 로동력공급이 적어지면서 로동력의 임금이 상승하게 되고 이로 인하여 경제성장이 둔화되고 국가의 경쟁력이 감퇴하게 된다.  루이스의 리론에 의하면 한 국가가 공업화를 실현하는 과정에 세가지 단계를 거치게 되는데 “고출산, 고사망, 저성장”단계, “고출산, 저사망, 고성장”단계와 “저출산, 저사망과 저성장”단계로 나뉠수 있다고 한다. 현재 많은 발달국들은 이미 인구구조전환을 완성하였고 인구 고령화사회에 진입하였으며 우리 나라도 이제 세번째 단계로 진입하고있다. 인구구조가 가장 생산적이고 효율적일 때에는 충족한 로동력공급과 고저축률은 경제성장에 큰 동력을 제공하여주는데 이를 경제학에서는 인구보너스라고 부른다. 하지만 인구구조가 고령화로 인하여 더는 생산적이지 않을 때에는 인구보너스가 상실되며 이는 경제성장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우리 나라는 1978년 개혁개방을 실시한 뒤로부터 30여년동안 년평균 9% 되는 고성장률을 이룩하였다. 장기간의 고성장으로 하여 사람들은 높은 성장률에 익숙하게 되였고 따라서 최근에 나타난 경제성장속도의 감퇴에 대하여 받아들이기 어려워하고있다. 하지만 경제학적으로 볼 때 이는 중국경제가 루이스변환점을 맞이하면서 인구보너스가 소실되는 시점에 도달하였기에 의아할바가 아니다.  30년간 우리 나라는 세계 최대의 인구를 가진 국가로서 인구증가속도를 줄이기 위해 갖은 방법을 실시하여왔다. 한 가정에서 한명의 아이를 가지는것을 제창하는 산아제한정책은 정부가 항상 강조하여온 기본국책의 하나였다. 하지만 중국사회가 서서히 인구고령화사회에 진입하면서 이젠 더는 예전과 똑같은 산아제한정책을 견지할수가 없게 되였다.  우리 나라의 현재 출산률은 80년대의 23‰로부터 이젠 12.1‰로 하락하여 심지어는 많은 발달국보다도 출산률이 낮은 저출산국가로 변하였다. 세계은행의 통계에 의하면 미국의 출산률은 13‰이고 말레이시아나 윁남의 출산률도 18‰과 16‰에 달한다고 한다. 출산률의 하락은 우리 나라의 15세부터 64세 사이의 인구를 급격히 하락시켰으며 이는 전사회의 로동가능인구수를 줄였다.  사회로동력의 급격한 감소때문에 우리 나라도 일부 발달국이 겪어온 인력난에 시달리게 될수 있고 부족한 로동력으로 인하여 높은 경제성장을 지속적으로 이룩하기 어렵게 될수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우리 나라는 2016년부터 “한 가구 한 자녀” 정책을 페지하고 “한 가구 두 자녀”출산을 허용하게 되였다. 하지만 산아제한정책을 완화한 효과가 얼마나 클지 현재로서는 장담하기 어렵다. 장기간의 엄격한 산아제한정책은 사람들의 관념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높은 양육비용과 교육비용 등은 부모들의 출산의지를 떨어뜨렸다. 이러한 현상은 정부가 이젠 오히려 점차 출산장려정책을 고민해야 할 시기가 되지 않았냐는 의문을 가지게 한다. 물론 산아제한정책에 대한 완화는 여러면에서 사회에 영향을 미칠것으로 사료된다. 이는 우리 나라의 소비시장, 교육시장, 심지어 부동산시장과 주식시장에도 영향을 미치게 될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현재로서는 중국의 로동력감소와 고령화사회로의 진입을 이런 정책으로 피하기는 어려울것이다.  고령화사회에 직면하여 정부가 해야 할 우선 과제는 자본시장 등을 통하여 사회복지자금을 지속적으로 확보할수 있는 선순환의 사회복지제도를 마련하고 의료개혁과 교육제도개혁에 힘을 쓰는것이다. 그리고 퇴직년령을 늦추는것도 또 다른 하나의 방법이라고 할수 있다. 물론 퇴직년령을 연장하기전에 퇴직년령이 다가온 로동자들의 생활수준도 고려해야 할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것은 우리 나라 경제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하여 경제적구조를 변환하고 기술혁신을 권장하며 적은 로동력으로 높은 생산을 이룩할수 있게끔 로동생산성을 높이는것이라고 할수 있겠다. 우리 사회의 매 성원은 현재 사회가 직면한 고령화현상에 대해 바른 인식을 가지고 보다 나은 삶을 위하여 적극적인 대응을 할 때가 되지 않았나싶다. [리천국 략력] 성명: 리천국(李天國)  소속: 중국사회과학원 아시아태평양&글로벌전략연구원 전공: 신흥국경제, 한국과 조선 경제, 중국거시경제 등 학력: 한국 서울대학 경제학 박사 연변대학 경제학 석사 연변대학 경제학 학사 경력: 연변대학 경제관리학원 강사, 한국 서울대학 경제학과 박사후 연구원을 거쳐 현재 중국사회과학원 아시아태평양&글로벌전략연구원 조리연구원. 주요 론저:  2008년 《키움과 나눔을 넘어서—한국경제의 미래설계》 (정덕구 저, 21세기북스, 2006년)를 공동 번역, 2005년 《대두만강지역개발》 부주필, 《新兴经济体蓝皮书: 金砖国家发展报告2014》,《印度洋地区蓝皮书: 印度洋地区发展报告2014》 등 집필에 참여. 《经济管理》, 《经济理论与经济管理》,《经济地理》,《人口学刊》 등 국내외 학술지에 30여 편의 경제학 논문을 발표. 이 외에 《경제일보》(经济日报), 《상해증권보》(上海证券报) 등 신문에 경제학 관려 문장을 다수 발표. 출처 인민넷 2016-3-7
4    경계의 창조력 (박광성 중앙민족대학 민족학&사회학학원) 댓글:  조회:1217  추천:1  2016-04-07
경계의 창조력 박광성 금년 1월 28일, 미국 할리우드의 한 영화제작사가 제작한 영화 “쿵푸팬더3”(功夫熊猫3)이 세계 각국에서 동시 개봉되여 선풍적인기를 불러일으켰다. 중국만 보더라도 개봉 당일의 티캣판매액수만 1.04억원에 달해 그 인기를 실감케 하였다. 쿵푸팬더 영화계렬은 중국적인 문화소재를 미국식 가치관으로 해석한 작품으로 볼수 있다. 이번에 개봉된 3집만 보아도 미국식의 사람을 기죽이는 거대한 장면 스케일과 강대한 악마에 맞서서 공동체를 구원해내는 미국식 영웅주의가치관으로 참대곰, 무술, 기공, 룡, 거북, 만두, 초롱불, 제기차기, 삿갓 등 중국의 문화적소재를 표현해냈다. 이러한 문화적경계를 허문 합성으로 동서양의 관객들로 하여금 문화적익숙함에서 오는 식상함을 잊게 하여 새로운 재미를 제공했을뿐더러 기타 문화권의 관중들에게는 동서양의 문화적요소를 동시에 느낄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줌으로써 한편의 영화가 세계적인 선풍적인 인기를 끌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경계의 창조력”이다. 만약 경계가 “물리적속성”을 띤다면 서로 부딪치여 불꽃을 튕길수 있지만 “화학적속성”을 띤다면 상호작용속에서 “화학반응”이 일어나 새로운 물질을 생성할수 있다. 이러한 물질이 바로 창조의 꽃이고 이것이 우리들의 생활을 날로 풍요롭게 만든다. 따라서 “물리적경계”를 “화학적경계”로 전환해나가는것이 오늘날 인류역사발전의 추세로 되여가고있다. 경계의 창조력은 비단 “쿵푸팬더”에서만 나타난것이 아니다. 2014년 세계를 강타한 한국가수 싸이가 부른 노래 “강남스타일” 또한 그 힘을 증명해준다. 동영상사이트 유트브를 통하여 몇십억의 조회수를 기록하며 세계 방방곡곡에서 울려퍼진 이 노래는 제목부터 결합식이다. “강남”이라는 한국식 표현과 “스타일”이라는 영어식 표현이 결합된것이다. 이 노래는 한국가수가 한국어로 불렀을뿐이지 음악동영상을 보면 춤과 제스처 거의가 서양식이다. 말춤만 보아도 승마운동 등 말과 련관된 문화는 현재 서양이 동양보다 훨씬 발전되여있어 그쪽에서 계발받았을 가능성이 더욱 크다. 이런 의미에서 “강남스타일”은 미국이 “쿵푸팬더”를 통하여 중국의 문화를 표현했듯이 한국인이 재해석한 서양의 문화로 볼수 있다. 이러한 경계를 허문 재해석이 문화적가치를 배가시켜주고있는것이다. 또 하나의 실례를 들면, “라면”은 일본의 대표적인 국민음식이다. 해외에 있는 일본인들이 귀국하면 제일 먹고싶은 음식으로 라면을 찍을 정도로 라면은 일본에서 인기있는 식품이다. 그러나 라면은 전통적인 일본음식이 아니고 도꾸가와막부시기에 중국에서 전해졌으며 메이지유신후에 퍼지기 시작하였다. 중국에서 류입된 라면은 일본의 조미료와 조리법에 의해 일본인들의 구미에 맞는 일본식 라면으로 개조되였으며 현재 이 일본식 라면은 일본뿐만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무수히 복제생산되여 명실공히 세계적인 대중적음식으로 자리를 잡고있다. 미국의 한 인류학자는 일본식 라면이 세계적으로 환영받고있는 원인을 쉽게 다른 나라의 식문화와 결합될수 있는데서 찾고있다.  인류사회의 거대한 성취는 거의가 창조력에서 기인되여왔으며 따라서 오늘날 인류는 창조력에 목말라있다. 그러나 창조력은 하늘에서 떨어지는것이 아니다. 기존에 창조력을 길러내던 메커니즘들이 점차 활기를 소진해가면서 최근에는 그 원천을 각종 경계에서 찾고있는 사조가 일고있다.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일어나는 “화학적반응”의 힘에 주목하고있는것이다. 우에서 지적한 사례들은 바로 그러한 힘을 보여주는것들이다.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그 사이에서 상호 융합되는 콘텐츠가 생산되려면 그 사이에서 매개작용을 할수 있는 력량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쿵푸팬더3”의 감독중 한사람은 동서양의 문화를 두루 섭렵할수 있는 한국계 미국인이며, 가수 싸이는 미국의 버클리음대에서 음악교육을 받은 재원으로 서양음악에 익숙한 한국인이며, 라면은 명나라에서 망명한 중국 유학자밑에서 수학한 일본의 한 다이묘에 의하여 일본에서 퍼지기 시작하였다. 만약에 이러한 문화적경계를 넘나들수 있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세계적인 영향력을 가진 “작품”들이 탄생못하였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경계를 새로운 창조력의 원천으로 보는 오늘날에 있어서 경계사이에 끼인 집단은 매우 소중한 존재로 된다. 경계가 “물리적속성”을 띨 때 그 중간에 끼인 집단은 괴로운 처지에 놓이기 쉽지만 오늘날과 같이 글로벌화로 인해 경계가 무너지면서 “화학적속성”을 띨 때에는 그 집단이 가장 창조적인 집단으로 부상할수 있기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조선족이 바로 이러한 위치에 있다. 그간에 이동을 통하여 조선족은 글로벌환경하에서 다면적인 경계 사이로 포지션을 옮겨왔다. 각종 경계 사이에서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있는 작금의 현실은 조선족에게 그 경계를 넘나들며 새로운 내용물을 합성해낼수 있는 천혜의 기회와 사명을 제공해주고있다. 보석도 그 가치를 알아내지 못하면 주추돌로 쓰일수 있듯이 조선족도 자신의 “보석”과 같은 존재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주추돌”로 쓰여버릴수 있다. 창조력이 곧 재부인 시대이다. “경계의 창조력”–이는 이 시대를 살고있는 조선족에게 더욱 큰 세상과 만나게 할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가져다주는 귀중한 힘의 원천으로 우리는 이를 깊이깊이 자각하면서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활용할 필요가 있다.  [박광성 략력] 성명: 박광성(朴光星)  소속: 중앙민족대학 민족학&사회학학원  전공: 사회학리론, 인구이동과 도시화, 경제글로벌화와 초국경 인구이동, 조선족문제. 강의: 서방사회학리론, 서방사회사상사, 사회학개론 등 과목 학력: 한국 서울대학 사회학과 박사 한국 서울대학 사회학과 석사 연변대학 민족연구소 석사 연변대학 력사학 학사 경력: 중앙민족대학 민족학&사회학학원 강사를 거쳐 현재 부교수, 석사생 지도교수.  2012年“教育部新世纪优秀人才”资助项目获得者. 겸직: 중국조선민족사학회 상무리사 겸 부비서장 中国社会学会 环境社会学分会 理事 北京市社会学会 理事 韩国《海外韩人研究》 国外编辑委员 주요 론저:  저서로는《全球化时代中国朝鲜族的劳动力流动及其社会变迁》(2008, 韩国, 学术信息出版社), 공저로는《1990年代中国朝鲜族社会的变迁》(2006, 韩国, 首尔大学出版社) 등 . 이 외에 국내외 학술지에 10여 편 이상의 론문을 발표. 출처 인민넷
3    된장과 우리의 삶 댓글:  조회:1382  추천:3  2016-04-05
된장과 우리의 삶 권진홍 가끔 학생들에게 한국음식 하면 무엇이 떠오르냐고 물어본다. 그러면 학생들은 거의 모두가 불고기, 떡볶이, 김치 등을 꼽는다. 그뒤에 따르는것은 비빔밥, 김밥, 해물파전... 등등이다. 한류의 영향으로 중국사람들은 한국 드라마, 스타, 오락프로에 열광할뿐만아니라 우리 민족 음식에도 관심이 많아졌다. 허나 정작 제일로 꼽아야 할, 우리 민족의 음식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된장은 생각하지 못한다. 아마도 된장찌개는 먹어봤지만 된장 실체는 불고기나 떡볶이처럼 젓가락으로 집어서 먹어보지 못하여 이미지각인이 되지 않은 탓이리라. 그럴 때마다 나는 우리 민족 음식중에서 으뜸으로 꼽아야 할것은 뭐니뭐니해도 된장이라고 말해준다. 또한 내가 평소 먹는 음식중에서도 된장은 제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기도 한다. 세월이 흐를수록 된장과 김치의 중요함과 소중함을 유독 깊게 느끼고있다. 시장 볼 시간이 없어도 집에 김치와 된장만 있으면 걱정이 없다. 이 두가지를 조합한다든가 아니면 집에 있는 아무 음식에나 된장과 김치만 곁들이면 다 별미가 된다. 보신탕에도, 양고기료리에도, 족발에도 된장은 좋은 양념이 되고 소꼬리곰탕에도, 사골국에도 된장은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조미료작용을 한다. 이처럼 된장은 마술사 같은 료리재료이다.  우리 민족 모두가 하나같이 좋아하는 된장, 이 된장에는 우리 민족의 삶을 대변하는 오덕(五德)이 있다.  첫째는 단심(丹心), 다른 음식과 섞여도 결코 자기 맛을 잃지 않는 덕을 말한다.  둘째는 항심(恒心),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다는것이다. 오히려 더욱 깊은 맛을 낸다.  셋째는 불심(佛心), 된장은 비린 맛과 기름기를 없애준다. 불가(佛家)에서 멀리하는것을 없애주기에 불심이라 한다. 넷째는 선심(善心), 된장은 매운 맛, 독한 맛을 부드럽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맵고 독한 맛을 부드럽게 만들어주는 된장의 덕을 선심이라 한다. 다섯째는 화심(和心), 된장은 어떤 음식과도 조화를 이룰줄 안다. 어떤것과 어울려도 조화를 이루어낼줄 아는 덕을 화심이라 한다. 된장의 오덕을 보면서 우리 민족 자체가 “된장삶”을 살고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오래전에 중국으로 이주하여 온 우리 민족은 벌써 중국이라는 땅에서 150여년을 살아왔다. 이중에는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고 생존을 위하여 건너온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독립운동에 투신하여온 분들도 있고, 또 강제이민으로 끌려와서 정착한 사람들도 많다. 중국에 들어온 리유, 경로는 서로가 다르겠지만 중국에서 우리는 하나의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어 다른 민족과 화합하면서 중화민족대가정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해왔다. 나는 이 과정을 콩을 삶아 메주를 만드는 과정에다 비유해보고싶다. 한알한알의 콩알이 한 가마솥에서 삶아지고 그것이 다시 어우러져 한덩이한덩이의 메주로 되고 메주가 다시 장독에서 어우러져 맛있는 된장을 만들어낸다. 이처럼 우리는 된장의 화심(和心)처럼 다양한 문화속에서 조화를 이루며 살아왔다. 하지만 경제가 발전하고 생활환경이 우월해진 지금, 우리의 원래의 공동체는 해체되고있다. 《례기》에 “만물은 ‘천’에 근본하고 인간은 조상에 근본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조상이 남겨준 우리의 언어, 우리의 관습, 우리의 례의, 우리의 문화를 점점 잊어가고있고 잊혀져가는것에도 무관심하다. 우리가 단심(丹心)을 잃어가면서 우리의 공동체가 완전히 와해되는것은 아닐가 많은 사람들이 염려하고있다. 된장은 숙성시키는 과정에 그속에 무엇을 넣어도 제 맛을 잃지 않는다. 오히려 첨가물들의 비리거나 매운 맛들은 선심으로, 불심으로 제거해주고 부드럽게 해주며 좋은 맛들은 품어서 맛을 한층 돋구어준다. 풋고추를 넣어도, 생선을 넣어도, 오이를 넣어도, 고기를 넣어도 된장은 그것들때문에 맛이 변하기는커녕 본연의 맛을 지키면서 오히려 더 아름다운 맛을 낸다. 이처럼 우리도 화합하여 살면서도 우리만의 특색(언어, 문화 등)을 살려가는 단심(丹心)이 필요하다. 된장의 항심(恒心)은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다는것이다. 오히려 세월이 더할수록 더욱 깊은 맛을 낸다(그래서 3년전부터 나는 해마다 된장을 조금씩 남겨 따로 건사해두는 습관이 생겼다. 10년 후의 맛이 너무 궁금하다). 우리의 원래의 공동체가 해체되는데는 많은 리유가 있겠지만 가장 본질적인것이라면 보다 더 우월한 물질적생활을 추구하는것을 꼽을수 있겠다. 더 풍요롭고 우월한 환경을 추구한것 그 자체는 나무랄것이 없다. 오히려 옛보금터에서 가난속에 웅크리고있지 않고 보다 과감하게 경쟁의 세계에 뛰여든것에 대해 갈채를 보내고싶다. 다만, 무한한 경쟁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리유로, 이겨야 한다는 핑계로 자신을 망각하고 자신을 잃어가고있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것이 가슴아플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점은 완전해체의 위기에서 우리 스스로를 되찾으려는이들이 힘을 모으고있다는것이다.나다와지고 우리다와지는것이 더 경쟁력을 갖춘 사람으로 되는 길이라는것을 발견했던것일가…  된장맛을 결정하는것은 바로 메주이다. 메주를 띄우다보면 그 과정과 정도가 아주 중요한데 늘 좋은 향만 나는것은 아니다. 가끔은 악취같은 냄새를 풍기기도 한다. 그래서 정성껏 손을 봐줘야 한다. 곰팡이가 피지 않을가봐, 또 곰팡이가 너무 많이 필가봐 항상 걱정이다. 오직 메주가 잘 뜨고 된장이 잘 숙성되여야만 고소한 된장맛을 낼 수 있다.  메주도 된장도 숙성과정이 필요하듯이 우리도 숙성과정이 필요하나보다. 알맞춤하게 잘 발효된 메주가 고소한 된장을 만들어내고 잘 숙성된 된장이 깊은 맛을 낼수 있듯이 어려운 환경에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잘 틀어놓은 우리도 정성껏 가꾸면 또 새로운 문화의 꽃을 피우는데서 저력을 발휘할수 있을것이라 믿는다. 된장의 단심, 항심으로 언제 어디서든지 우리를 찾고 아끼는 민족, 된장의 화심(和心)으로 이 땅의 모든 사람, 모든 민족과 화합하고 어우러지는 민족, 된장의 선심(善心)으로 뽀족한 가시를 뽑고 날카로움을 부드러움으로 어루만져주는 민족, 된장의 불심(佛心)으로 비린 맛을 제거해주는 민족으로 거듭나는것, 이것이 된장이 우리의 삶에 주는 계시리라. [권진홍 략력] 소속: 북경련합대학 관광학원 전공: 조선어학 학력: 연변대학 조문학부 문학 학사 연변대학 조문학부 문학 석사 연변대학 조선-한국학원 문학 박사 경력: 북경련합대학 관광학원 부교수 (2007.7 – 현재) 인민넷 2016-2-22  
‹처음  이전 3 4 5 6 7 8 9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