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영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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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소영탄곡
2009년 02월 08일 10시 02분  조회:3606  추천:38  작성자: 채영춘
이 땅 가장 원초적이고 토속적이고 순수한 내음이 머무르는 곳, 그 어떤 치례나 분장도 필요없이 그 자체의 순결함과 청초함으로 끝내주는 곳이 시골이다. 그래서 도시는 얼굴을 갖고 시골은 령혼을 갖는다고 했던가?

그런데 시골의 그 령혼을 떠올릴 때마다 산천, 전답, 농가, 농부와 더불어 단연 뗄래야 뗄수 없는 친숙한 벗이 있으니 그게 바로 소가 아닌가 한다.

삭막과 살벌함이 진동하던 지난 세기 60년대 하순의 연길도회지를 하직하고 새 삶의 터전을 평강벌의 화룡현 룡문공사 연풍 7대(지금의 화룡시 투도진 연풍촌)로 옮겼던 40년전으로 거슬러올라가며는 자연히 기억에 맞춰오면서 언녕 저세상으로 사라진 그 생령들을 지나간 내 삶의 궤적과 더불어 되살려본다.

괘씸한 소

1969년 11월의 어느날, 전날 내린 눈으로 소복단장을 한 마을은 한폭의 아름다운 화폭으로 변신하였다. 하지만 집체호는 비상이 걸렸다. 농가마다에 흩어져 민박하다가 새로 지은 집체호숙소에 입주한지 불과 일주일이 되지 않아 아직 겨울 날 화목을 전혀 장만하지 못한 상황에서 눈내린 뒤의 설경에 도취될 그런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것이다.

하향지식청년이란 월계관을 쓰고 이 시골에 정착한지가 1년하고 한달, 모든게 촌민들의 배려손길이 닿아야 가동이 가능한 집체호의 삶이다. 그런데 이날만은 촌민들의 도움이 없이 지난해 촌민들과 입산하여 땔나무를 했던 그 소꼬리만한 경험을 살려 집체호 겨울을 날 화목을 우리절로 해오고싶은것이 우리의 마음이였다. 우리를 그냥 철딱서니 없는 《시내아이》들로 아니꼽게 펌하해 부르며 사사건건 잔소리만 하는 동네 일부 어른들한테 그 무엇가를 보여주고싶었던것이다. 그리하여 생산대장이 농군 한분을 붙여주려 했으나 끝내 생고집을 부리며 그까짓것 우리끼리 얼마든지 할수 있다고 호언장담하였다.

우리가 정착한 촌은 수전농사를 주로 하는 벌방지대라 화목감을 해오려면 마을에서 수십리 더 떨어진 산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화목 한수레를 해오기 위해 집체호 전원 16명중 13명이 동원된 건영을 보고 내가 촌민들은 수지가 맞지 않는다고 혀를 끌끌찼다.

농촌에 내려온지 1년 남짓, 아직까지 강냉이쌀을 기본으로 하는 정량배급제에 의해 살다보니 입쌀고장에 왔어도 입쌀밥을 배불리 먹을수 없었던 세월이였다. 하지만 이날만은 백사 불구하고 13명 인력이 한번 근사하게 먹을 이밥을 큰 양푼에 푸짐히 해담고 거기에다 아끼던 콩기름도 팍팍 넣어 볶아낸 구수한 배추호국수볶음채까지 곁들인 점심도시락을 한짐해실고 일행은 호호탕탕하게 입산했다. 이처럼 인력이 잘 동원된데는 물론 오랜만에 산에서 이밥을 목이 메게 먹을수 있다는 그 유혹이 어지간히 작용했던것 같다.

두시간 남짓이 걸어 가둑나무가 무성한 심산속에 도착하니 벌써 슬슬 배가 고파왔다. 아니 큰 양푼에 듬뿍 담은 그 이밥이 눈에 자꾸 마쳐온것이다. 다들 그런 눈치다.

우선은 소를 멍에에서 풀어내여 수레채에 잘 동여매놓고 싣고 온 벼짚을 두병쪼각과 함께 소가 마음대로 먹으라고 푸짐히 놓아주었다. 나는 13명 인력을 세개 조로 나누고 곧 땔나무작업에 투입시켰다. 한시간도 채 안돼 도처에서 《배가 고프다》, 《밥을 먹고 계속하는게 어떠냐》 고들 떠들며 난리다. 물론 내색은 내지 않았지만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제 볼이 메게 이밥을 퍼넣고 구수한 볶음채를 씹을 광경을 떠올리며 맥없는줄 모르겠다.

그렇게 두시간가량 지났다. 사처에 흩어져 일하던 일행은 땔나무단을 메고 끌고 하면서 거의 동시에 수레앞에 와 모였다.

이?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수레우에 잘 싸놓았던 점심밥보자기는 다 풀어져있고 큰 양푼안의 이밥과 반찬은 이미 깨끗이 거덜나 있었다. 수레옆에는 온 상판에 밥알을 다닥다닥 단 소가 우리를 빤히 쳐다보며 서있는게 아닌가! 뜻밖의 광경에 우리는 입을 딱 벌린채 할말을 잊고 제자리에 멍청하니 굳어져버렸다.

이게 웬 날벼락이람? 소가 밥을 들춰먹다니?! 어떻게 보자기로 꽁꽁 싸놓은걸 입으로 풀수 있단 말인가? 중학교때 로신의 작품에서 《소는 풀을 먹고 우유를 바친다》는 글을 읽으면서 풀만 먹고 인간에게 우유를 제공하는 소의 고매한 품성에 얼마나 감동했던가?

소는 밥을 못 먹는다고 생각했던것이 화근을 자초한것 같았다.

침묵도 잠시, 그처럼 잔뜩 기대했던 이밥과 반찬을 깡그리 소한테 먹히우자 일행의 울분은 폭발하고야말았다. 누가 먼저라 할것없이 모두는 일제히 소한테 달려들어 마구 차고 때리며 분풀이를 해댔다. 소고삐가 수레채에 꽁꽁매여져있어 소는 선자리에서 고스란히 당할수밖에 없었다. 가끔 처량한 울음소리를 토하기도 하고 애원하는듯한 눈빛으로 우리를 힐끔거리기도 하며 소는 매우 불안해하며 머리를 수그린채 우리의 매를 그대로 받고있었다.

한바탕 소에게 분풀이를 하고난 우리는 지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제자리에 털썩털썩 주저앉고말았다. 인젠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렇다고 무인지경인 이 눈덮인 산속에서 배를 곯고있는 불쌍한 애들에게 누군가 따뜻한 밥을 지어올리는 만무하였다. 그나마 땅바닥에 소가 먹던 두병쪼각들이 널려있어 그것으로 어느 정도 허기를 달랠수 있는것을 고맙게 생각해야 했다. 그러니 소와 우리는 점심밥을 바꿔먹은격이 돼버렸다.

결국 지치고 허기진 몸을 지탱하며 우리는 나무단을 수레에 실었다. 나무단을 실은 소수레를 몰고 울퉁불퉁한 산길을 내려오면서 우리는 계속 소를 괴롭혔다. 소수레가 들썩이면서 나무단이 떨어지면 소에게 호통을 치며 매질을 했고 소가 발을 곱디뎌 비틀거리기라도 하면 또 욕지거리를 하며 매질했다. 나중에는 우리도 지쳐버려 소에 대해 관용을 베풀수밖에 없었다. 후줄군하게 소수레뒤에 따라선 이 패잔병 같은 대오를 보고 가끔 까마귀가 날아지나가며 비웃듯 까욱거린다.

아마 그 소로 말하면 세상에 태여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소는 짚만 먹지 이밥은 먹을줄 모른다》고 여기는 도회지 숙맥들 《덕분》에 뜨끈한 밥 한양푼을 구수한 반찬에 곁들여 뚝딱 맛있게 포식했을것이다. 물론 그 대가도 톡톡히 치리기는 했지만.

《시내아이》들을 얕잡아보는 마을사람들에게 한번 본때를 보여주려던 우리의 작전은 결국 괘씸한 소때문에 실패로 돌아간것은 물론 점심밥을 소에게 빼앗긴 이 사건은 그후 두고두고 촌민들의 웃음거리가 되여 한동안 우리가 머리를 들수 없게 만들었다.

불쌍한 소

1970년 7월의 어느날, 가만히 앉아있어도 땀이 줄줄 흘러내려 움직이기조차 귀찮은 삼복철이건만 나는 집체호의 B와 함께 20리 떨어진 두도(头道)로 행차해야만 했다. 그것도 벼가마니를 박아실은 소수레를 몰고가는 고역이였다.

집체호의 쌀사정이 나빠 오늘안으로 벼를 찧지 않으면 래일부터는 또 농가의 《배려》를 호소할수밖에 없는 상황에 치닿았기때문이였다.

힘깨나 쓸만한 부림소들은 모두 십리평 원경지로 부업을 떠나다보니 차례진 소는 그닥 탐탁치 않았다. 집체호 인력이 대거 동원되여 땀동이나 꽤 흘려 벼 10가마니를 수레에 다 싣고나니 해가 중천에 와있다.

우리가 사는 연풍촌에서 투도로 가는 길은 두갈래이다. 하나는 룡문에서 투도로 통하는 자동차도로이고 다른 하나는 연풍에서 투도까지의 전답사이에 꼬불꼬불 뻗은 수레길이다. 물론 자동차도로가 훨씬 편리하겠지만 많이 에돌아가야 하는 점을 감안하여 결국 수레길을 선택하게 되였다.

날씨는 숨이 콱 막히도록 무덥지만 수레길은 어제 저녁녘에 쏘아진 소나기로 여간 말째지 않았다.깊이 패워있는 수레바퀴홈에 잔뜩 고인 진흙탕물이 바퀴가 굴러떨어질 때마다 흙물을 한반씩 튕기는바람에 얼마 안가 우리 두 사람의 몰골은 형체를 알아볼수 없을 정도였다. 우리는 아예 수레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소에게 자유를 주기로 하였다.

워낙 시원찮은 소에게 고온날씨는 상당한 부담이였다. 거기에다 벼가마니를 실을 때 너무 앞쪽으로 처지게 싣는바람에 소는 그냥 수레멍에 심하게 눌리운 상태에서 대단히 힘든 행보를 하고있었다. 입에서는 느침이 한발이나 흘러내려 드리웠고 발은 내디딜 때마다 심하게 떨렸다. 담박이라도 길바닥에 드러누울 그런 자세였다. 그러나 우리 또한 찌는듯 무더운 한낮의 불볕에 어정쩡하게 겨우 걸음을 옮겨놓다보니 소를 배려할 그런 형편이 못되였다.

바로 이때다. 우리가 방심한 사이 소는 그 무거운 벼가마니를 실은 수레를 끌고 길옆의 물웅뎅이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갈증을 이기지 못한 소의 돌발적인 행보였다. 우리가 급히 달려왔으나 때는 늦었다. 아차 할사이도 없이 소와 수레는 그대로 길옆 웅뎅이속에 빠지고말았다. 웅뎅이속에 발목까지 빠져 뒤척이는 소를 보면서 우리는 그저 망연자실해서 소주위를 맴돌아칠뿐이였다. 눈에서는 노란 불똥이 튀였다.

이때 길가던 촌로 한분이 구세주처럼 나타났다. 아예 우리를 뒤로 확 밀쳐버리더니 우선 소목을 압박하는 멍에를 쳐들면서 심하게 패들어간 목저패를 안깐힘을 써 풀어내였다. 목끈이 풀리자바람으로 소는 물웅뎅이에서 뛰쳐나왔다.

너무나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여서 우리는 그저 엉거주춤하고있는데 촌로의 호통이 추상같이 떨어진다.

《넘, 이렇게 짐을 실으니 소가 어떻게 견뎌낸다든... 쯧쯧!!》

《어휴, 몰골을 보아하니 네놈들은 집체호녀석들이렸다?!》

뭣들 하느냐? 이 벼가마니를 빨리 부리우고 수레를 끌어내지 않구!》

이 시각 촌로의 호통은 조금도 싫지 않았다. 오히려 살살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처럼 개운하기까지 하다. 촌로가 시키는대로 벼 10가마니를 전부 길바닥에 부리우고 수레를 웅뎅이에서 끌어내오고나니 숨이 저절로 나온다.

고마운 로인의 도움으로 벼가마니를 다시 싣고 길을 떠나는 우리의 모양새는 누가 봐도 포복절도할만한 감이였다.  우리 둘은 서로의 몰골을 마주보며 한바탕 웃어제꼈다.

투도 쌀정미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점심시간이여서 모두 식사하러 가고 없었다.  차라리 잘됐다싶었다.  우리는 근처의 강가에 나가 시원히 목욕을 하고 갖고온 도시락을 풀어 점심식사를 하면서 잠시나마 오전에 겪었던 봉변을 여유있게 돌이켜볼수 있었다.

식사를 마친후 부랴부랴 정미소에 달려가 벼를 다 찧어 마대에 담아 수레에 싣고나니 오후 3시가 지났다.

우리는 올 때의 경험을 살려 멀더라도 투도--룡문 자동차도로를 선택하여 돌아가기로 하였다.

투도에서 진화(进化 룡문 가기전의 마을)까지는 그런대로 자동차도로여서 편안하게 갔다.  그런데 진화마을에서 연풍마을로 꺾어들어가는 소수레길이 자꾸 맘이 걸린다.  그 구간은 워낙 길이 잘 정리되지 않은데다가 늘 도랑물의 침습으로 군데군데 습지가 형성되여있어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있었다.  여기를 에돌만한 길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이라 우리는 그냥 그 문제의 구간을 향해 직진했다.

<무시해야 할텐데>하는 생각과 더불어 연풍마을까지 멀지 않았다는 일종의 위안감도 동반시켜 나는 애써 긴장감을 없애고저 했다.

문제의 습지구역까지 와보니 오늘 하루동안의 땡볕으로 땅이 많이 말라있는듯했다.  적어도 수레길표면은 별 위험징후 같은것은 보이지 않았다.  길옆에는 길손들이 놓은 징검돌을 골라 밟으며 소수레를 몰고 나갔다.  사실 마른것처럼 보이는 소수레길밑에는 많은 웅뎅이들이 도사리고있었다.

이것을 알리 없는 우리는 주저없이 수레를 몰고나갔다.  사건은 터지고야말았다.  수레바퀴 한쪽이 수렁이속에 거의 다 빠져들어가 수레는 꼼짝달싹할수 없게 되였다.  소도 수레채에 눌리여 버둥거리며 죽는다고 난리다.  투도로 떠날 때 겪었던 상황이 또다시 재연된것이다.  우리는 썩은 내가 진동하는 웅뎅이에 빠져있는 소수레옆에서 우왕좌왕하며 어쩔바를 몰랐다.  지나가는 길손도 보이지 않아 그 어떤 도움도 바랄수 없었다.  우리 두 사람의 힘으로 도저히 이 국면을 헤쳐나갈 길이 없음을 알자 나는 B를 마을로 구조요청을 가게 하였다.  그동안 나는 근처에서 나무장대기를 구해다가 수레바퀴밑에 꼽아넣어 그런대로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수레를 고정시켰다.  소도 잠시 바쁜대로 그 상태에서 숨을 몰아쉰다.

약 30분 가량 지나 집체호 동무들과 촌민들이 삽과 괭이을 챙겨들고 사고현장으로 달려왔다.  우선 소멍에에서 목저패를 풀어내고 소를 살려내는것이 급선무였다.  그런데 소고삐가 소목에 너무 깊게 조여져들어가 그것을 풀어낸다는것은 어림도 없었다.  손칼을 가지고 팽팽하게 패여들어간 목저패를 겨우 베여버리고 소를 구출해내였지만 역시 소목에 상처를 내고말았다.

수레에서 쌀매대를 부리우고 수레를 진펄에서 끌어냈다.  오전에 했던 동작을 또 반복한것이다.

두번의 죽을 고비를 맞았던 소는  아예 멀지감치 달아나버리더니 경계하는 눈빛으로 우리를 흘겨보면서 근처에 오려 하지 않는다.

두차례의 경난을 겪고나니 나도 심신이 형편없이 지쳤다.  하지만 소에 대한 송구함,  소에 대한 믿음,  소에 대한 련민의 정 같은 감정들이 서로 엇갈리면서 자꾸 소한테 눈이 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탐탁치 못한 체구를 가진 시원찮은 놈이지만 그래도 우리 숙맥들을 믿고 따라나서 함께 환난을 겪으면서 뗄수 없는 인연으로 더없이 가까와졌다는 생각으로 나는 내 얼굴을 소머리에 비벼댔다.  내 뜻을 알기라도 하듯 소는 두 귀를 쫑깃거리고 큰 눈을 슴벅거린다.

아마 그 소로 말하면 세상에 태여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와 B와 같은 형편없는 도회지 숙맥들 《덕분》에 하루동안 두번이나 죽을 고비를 맞았을것이다.

하루동안 똑같은 징크스를 두번이나 반복하게 된 연유,  그리고 두번의 소수레 구조작업이 모두 남들에 의해 진행됐음을 되새기는 순간 우리를 홱 밀치면서 웅뎅이속에 뛰여들어 민첩하게 소를 구출해내고 소에 대한 우리의 경솔함을 무자비하게 질책하던 그 촌로의 강개한 기품이 클로즈업되여 나의 마음을 무겁게 하였다.

촌로와 나의 근본적인 구별은 소에 대한 태도에서 비롯된것이였다. 만약 내가 촌로처럼 소에 대한 진지한 감정을 갖고있었다면 두차례의 징크스는 결코 나한테서 생기지 않았을것이고 또 일이 생겼다 하더라도 나와 B의 노력으로 소수레구조작업은 완전히 가능할수 있지 않았을가?

40년 세월이 흘렀으나 《괘씸한 소》,  《불쌍한 소》  그리고 이 글에 미처 오르지 못한 《억울한 소》,  《무던한 소》를 망라한 각양각색 소들과 뒤엉킨 희로애락의 다큐멘터리들은 그냥 내 가슴을 설레이게 한다.  그 소들이 그립다.

시골에서 소와 더불어 흘러보낸 수년 세월을 거쳐 나는 소에 대한 나의 감정,  소에 대한 나의 믿음과 신뢰, 소에 대한 나의 격정이 진지하게 승화하였다고 자부한다.

세월은 흐르고 시대는 변하여 부림소로서의 소의 기능이 변화를 가져와도 지금까지 우리 민족과 더불어 이 강토를 개간하고 건설하는 력사행정에서 가장 충직한 파트너로 우리켵을 지켜주고 모든 고통과 아픔,  슬픔을 감내하며 말없이 보여준 소의 미덕은 영구불멸의 위대한 상징물로 자리매김하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연변일보 2009-2-5 13:5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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