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열살때였다. 어머님은 늘 찹쌀떡이랑 열콩밥이랑 한짐 가득 해들고 모아산으로 가군 하셨다. 거기는 《우파분자》 아버님께서 많은 《우파》들과 더불어 강제로동 같은 것을 하고 계시는 집중영 비슷한 곳이 있었는데 모두들 《부식품기지》라고 하였다.
그런데 거기에 갈 때마다 높은 간부인듯한 사람이 늘 어머님께 눈을 부라리며 호통을 쳐대 나는 정말 무서웠다. 하건만 어머님은 그 사람이야 뭐라 지껄이던 그저 담담히 웃으시며 갖고간 음식을 아버님께 대접하시는 데만 마음을 쓰셨다.
어머님의 그 담담한 웃음을 보는 때면 어쩐지 무서움이 가뭇없이 사라지군 하였다. 어느날 나도 가만히 어머님처럼 웃어보았다. 그랬더니 그 우락부락한 간부가 전혀 겁나지 않는게 아닌가.
아마 그때부터였을가 나는 그 어떤 곤경에 처할때면 배포유하게 슬그머니 한번 웃어보는 버릇이 생겼다. 좁은 세상이 넓게 보이는 순간이기도 하였다.
어머님의 마음은 자식의 공부방이라 했던가. 50년대 후반에 《우파》 감투가 아버님께 내려져서 80년대 초반 명예회복을 맞기까지 우리집 수난사의 주역이셨던 어머님은 《우파분자의 마누라》라는 딱지를 달고 장장 30년의 고독, 희한, 비통, 인고를 담담한 웃음으로 흔연히 묵살하며 남편과 자식사랑으로 넉넉한 마음에 기대여 인간비극을 디딤돌처럼 밟고 대범하고 여유있게 살아오셨다. (사진18)
한 여름 찜통더위속의 강변모래자갈치기, 심산밀림에 들어가 약초캐기, 매탄장 석탄리어커 끌기 등 소갈데 말갈데를 가리시지 않으면서 남편과 자식을 위한 처절한 혈전을 벌려온 오랜 세월 나는 어머님한테서 낯을 찡그리며 한숨 짓는것을 한번도 본적이 없다.
어머님은 수십년간 그 담담한 웃음으로 인고의 눈물을 삭이면서 나에게 가난에 기죽지 않고 역경을 헤쳐나아가는 용기, 부모에 대한 효심과 인간에 대한 애심을 키우고 인내와 끈질김으로 인생에 도전하는 삶의 자세와 방법을 가르켜 주셨다.
지금도 모아산비탈의 송림속에 외로히 나있는 그 흙길을 떠올리기만 하면 어머님께서 그 특유의 담담한 웃음을 짓고 수걱수걱 걸어오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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