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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작가 모순과 진덕군의 사랑일화
2009년 09월 11일 10시 46분  조회:3984  추천:0  작성자: 人和

 

      젊은 시절의 모순과 진덕군

 

 

 

사진속의 남자는 20세기 중국의 걸출한 문학가 모순(茅盾)이고 녀자는 모순의 부인이 아니라 그의 정부인 진덕군(秦德君)이다. 이 전기적인 색채를 띤 녀자는 생전에 전국정치협상위원회 위원이였다. 진덕군이 돌아가자 신화사에서는 그녀를 “저명한 애국민주인사”라고 보도했다.

 

진덕군은 사천성 충현(지금은 중경시에 소속됨)사람이다. 1905, 진덕군은 한 진사( 士)가정에서 태여났다. 진덕군은 14살때에 성도에서 “5.4”운동에 참가했다. 후에 북경에 가서 리대소(李大 )의 직접적인 령도하에 지하활동에 참가했다.

1922, 17살인 진덕군은 리대소를 따라 상해로 가서 리달(李 )이 세운 상해평민녀자학교 학공부( 工部) 부장직을 맡았다. 이곳에서 진덕군은 처음으로 자기보다 10살 많은 모순을 알게 되였다. 당시 모순은 심안빙이라 했으며 문학부에서 교편을 잡고있었다.

1927, 상해에서 “4.12”사변이 폭발하면서 제1차 국공합작이 철저히 깨여졌다. 상해에 온 진덕군은 당조직을 찾지 못하고 당시 녀자평민학교 교원이였던 진망도선생을 찾아갔다. 짐망도선생은 진덕군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지금 국세가 어지러우니 동문 일본류학을 가는것이 좋을것 같소. 일본에도 중국공산당조직이 있으니 그곳에서 당조직을 찾소. 그리고 모순도 곧 일본으로 떠날것이요. 두 사람은 동료이니 서로 도움이 될것 같은데…”

1928 7월의 어느날, 진덕군과 모순은 함께 황포강에서 일본으로 떠나는 배에 올랐다. 하여 두 사람의 이야기가 시작되였다.

려행중에 모순은 자주 진덕군을 불러 갑판에서 산책을 하면서 자신의 경력을 이야기했다. 모순은 자신의 작품과 대혁명고조시에 《국민일보》 편집으로 있을 때의 일들을 이야기하며 아주 격동되였지만 자신의 사생활을 말할 때는 울적했다.

모순은 부모들의 강박으로 18살때에 한 녀자와 결혼했지만 성격차이로 여직껏 관계가 좋지 않았다고 했다.

여러날 되는 해상려행에서 모순과 진덕군의 관계가 점점 밀접해졌다.

일본에 도착한후 두 사람의 감정이 점점 가까와졌다. 모순은 국내에 있는 진덕군의 어머니에게 편지를 했다. 모순은 편지에서 부모의 독단혼인으로 자신의 혼인은 괴롭고 고통스러우니 견결히 안해와 리혼하고 진덕군과 함께 있겠다고 표했다.

그후 모순과 진덕군은 교또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훼멸》, 《동요》, 《추구》 등 모순의 작품이 상해문예계의 비평을 받았다. 하여 모순은 교또에서 새로운 작품을 내놓아 그들을 반박하려 했지만 좋은 글감을 찾지 못했다. 이때 진덕군이 모순을 찾아와 자신의 친구인 호란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호란휴는 “5.4”운동에서 배출된 녀청년이다. 반항정신을 가진 그녀는 낡은 혼인풍속을 반대하며 집을 뛰쳐나와 혁명에 참가했다. 모순은 호란휴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듣고 그녀를 주인공으로 한 새로운 장편소설 즉 《무지개》를 세상에 내놓았다.

1930 4, 진덕군과 모순은 일본에서의 망명생활을 마치고 귀국했다. 두 사람은 귀국한후 정부(情人)의 관계를 공개하고 함께 모순의 어머니를 보러 갔다. 두 사람은 또 로신의 소개로 “좌련(左 )”에 가입했다. 이때 모순의 안해 공덕지가 모순을 찾아와 울며불며 리혼하지 않겠다고 소란을 피웠다. 모순의 어머니도 아들이 리혼하는것을 동의하지 않았다. 일찍 아버지를 여읜 모순은 어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하여 어머니에게 효성이 지극한 모순은 무엇이든 어머니의 뜻을 따라주었다. 그는 진덕군을 몹시 사랑했지만 어머니의 뜻을 어길수가 없어서 자아모순에 빠졌다.

후에 진덕군은 모순의 몸에서 미묘한 변화를 보아냈다. 이전에는 아주 결단성이 있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말해도 어쩐지 얼버무리면서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어느 한번 모순이 집을 나갈 때 진덕군이 그를 미행했다. 진덕군은 모순이 자기 안해 공덕지를 만나러 집에 가는것을 발견했다.

진덕군은 감정이 없는 생활에 대해 싫증을 느끼고 헤여지자고 했다. 생각밖에 모순은 견결히 동의하지 않았다. 하여 두 사람은 잠시 헤여져 생활하며 4년후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4년동안 모순은 정력을 다해 많은 글을 썼으며 원고료로 리혼비용을 지불했다.

 

모순과 진덕군은 4년후의 만남을 약속하고 사진관에 가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기념사진을 찍은후 진덕군은 모순과 함께 살던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모순이 없는 집안은 초라하고 쓸쓸해보였다. 그는 이런저런 생각으로 고민하다가 밤에 수면제 200여알을 먹고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누군가에 의해 병원에 호송되여 7일만에 깨여났다.

그후 진덕군은 살길을 찾아 헤매다가 12년전에 떠났던 고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적화분자(赤化分子)로 몰리워 다시 고향을 떠나야 했다. 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중경으로 향했다.

진덕군은 중경에서 여러번 모순에게 편지를 보냈다. 모순도 자주 회신을 했는데 회신할 때마다 4년후에 만나자고 한 약속을 끄집어냈다. 모순의 회신이 다소 그녀에게 위로로 되였다. 하지만 후에 모순이 어느 한번의 회신에서 이사한다고 전했으나 집주소까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이로하여 진덕군은 모순과의 모든 련계가 끊어졌다. 진덕군은 그동안 모순과 함께 보내던 시간을 생각하니 너무도 화가 났다. 그녀는 모순의 모든 편지를 태워버리고 또 상해에서 모순과 함께 남긴 리별의 기념사진을 찢어버렸다.

리별사진은 모두 두장 있었는데 한사람이 각각 한장씩 가지고있었다. 모순은 공덕지와 화해한후 그 사진을 집에 가지고 못갔다. 하지만 그 사진을 버리자니 어쩐지 아쉬워 자기가 제일 믿는 친구 호풍더러 잘 보관해달라고 부탁했다. 호풍은 당시 28살이였다.

1949, 새중국이 창건되였다. 모순의 앞길은 순풍에 돛을 단듯 아주 잘 풀려 나중에 문화부 부장으로 승진했다. 하지만 호풍은 반혁명집단우두머리로 몰리워 하마트면 총살까지 당할번했다.  호풍은 아무리 어려운 세월이라도 모든것을 참아내고 친구의 부탁을 꼭 명심하고 그 사진을 잘 보관해두었다. 1966, 호풍은 사천으로 압송되여가기 직전에 진덕군을 찾아가 그 사진을 넘겨주었다. 호풍은 친구의 부탁대로 그 사진을 장장 36년동안 보관하였던것이다.

진덕군은 오래동안 모순의 소식을 받지 못했다. 당시 4년후에 다시 만나자던 약속도 자연히 깨지고말았다. 그후 두 사람은 여러번 만난적이 있지만 서로 본체만체하면서 외면했다. 진덕군도 지난 일을 잊어버리고 주은래의 충실한 조수로 되였다. 진덕군은 후에 정무원(지금의 국무원)  부비서장 겸 전국정치협상회 부비서장인 곽춘도와 결혼했다. 결혼후 두 사람의 감정은 아주 좋았으며 늘 행복하게 보냈다.

 

 

                   중년시절의 진덕군

 

1981년에 모순이 서거됐다. 장례위원회에서는 진덕군에게 모순이 서거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진덕군은 지나온 50년세월을 회상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는 재삼 고려끝에 모순을 추도하는 모든 활동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는 고별식에서 모순의 눈길과 마주치는것이 두렵다면서 모순의 장례식에 참가하지 않았다.

1999 2, 진덕군은 아주 조용하게 이 세상을 떠났다. 《인민일보》  등 국내 여러 보도매체에서 진덕군이 서거됐다는 부고를 발표했다. 전국정치협상회의에서는 진덕군의 추도식을 엄숙히 거행했으며 그의 유골을 팔보산묘지에 안장했다. 한동안 진덕군과 사이좋게 보내던 모순의 골회도 이곳에 안장되여있다.                       

 

《지음》/연변라지오TV신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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