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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동의 첫사랑 도사영
2009년 03월 21일 13시 53분  조회:6904  추천:2  작성자: 人和

 

실제사진 도사영

 

 

중앙TV 1채널에서 방송한 모택동, 채화삼 등 초기 혁명가들의 청년시대를 그린 련속극 “흡동학소년(恰同少年)”에서 모택동과 도사영(陶斯咏)의 사랑이야기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모택동의 첫사랑녀성의 이름은 도의(陶毅),  자는 사영(斯咏)이며 호남성 상담(湘潭)사람이다. 당시 도씨집안은 모두 장사로 이사를 갔었다. 도사영은 부유한 상인집안의 아가씨로서 주남녀자중학교(周南女中)를 졸업했으며 당시 “장강이남제일재녀(江以南第一才女)”라는 칭호를 가지고있었다. 그녀는 1920년대 장사학계의 풍운인물이였다. 호남학생련합회 회장이며 호남각계련합회 회장직을 맡았다.

 

소자승(萧子升)과 이례용() 등의 기억에 의하면 도사영은 키도 크고 재주도 뛰여났으며 성격도 아주 강한 장사의 유명한 미녀라고 한다.

 

도사영은 1896년에 태여났다. 그녀는 주남녀자학교의 수재이고 전형적인 새시대 녀성이며 사상이 진보적이고 교육구국을 주장해왔다. 도사영은 신민학회활동에 참가하면서 모택동을 알게 되였고 또 모택동을 애모했으며 모택동을 사랑했다. 모택동도 지식이 있고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현대적인 도사영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모두 개성이 강한 까닭에 결국 합치지 못하고 나중에 헤여지고말았다. 도사영에게는 이 사랑이 평생 유일한 사랑이였으며 이후 다시 련애를 하지도 않았고 결혼도 하지 않았다.

 

1919년부터 1920년까지 두 사람은 장사에서 함께 “문화서점(文化)”을 꾸리였고 열렬한 사랑에 빠지였다. 그러나 한 사람은 중국의 운명을 개변시키려는 원대한 포부를 품고있었으나 다른 한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하여 두 사람은 좋아하다가도 헤여지고 헤여졌다가도 다시 화해할 때가 많았다.

 

도사영아가씨가 바로 신민학회 “통신집(通信集)”중에서 나오는 도의이다. 도사영은 향경여(向警予), 임배도(任培道)와 함께 “삼자매”로 불리웠으며 동시에 양창제()선생의 추천으로 신민학회에 가입했다. 도사영은 미녀이며 재녀일뿐만이니라 담도 크고 일처리도 깔끔하게 하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모택동과 도사영은 사상과 신념이 서로 달라 결국 헤여지게 되였다.

 

  (앞줄 왼쪽 두번째가 도사영,뒤줄 왼쪽 네번째가 모택동)

 

1921, 중국공산당 제1차대표대회가 결속된후 회의에 참석한 대표들은 활동경비로 돈 50냥을 받아가지고 돌아갔다. 모택동은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항주, 남경 등지를 돌아보았다. 당시 모택동은 남경에서 첫사랑이였던 도사영을 만나 옛정을 나누었다.

 

모택동의 첫째부인인 양개혜는 모택동이 도사영과 헤여진후 북경으로 가서 모택동을 만났으며 후에 결혼을 했다.

 

결혼후에도 모택동은 도사영과의 첫사랑을 잊지 못했다. 모택동의 사랑시 《하신랑.별우(郎。别友》는 1922년에 도사영을 그리워 쓴것이였다. 당시 모택동은 양개혜와 결혼한지 1년이 더 되였다. 이 일때문에 양개혜는 모택동과 크게 다투기도 했다. 후에 양개혜는 모택동의 심정을 리해해주었으며 서로 오해를 풀었다.

 

도사영은 평생을 녀성교육발전에 기여했다. 도사영은 상해, 장사 등지에서 녀자학교를 세우고 정령(丁玲) 등 적지 않은 제자들을 양성해냈다.

 

주남녀자학교에서는 도사영, 향경여, 채창을 “주남삼걸(周南三杰)”이라고 불렀다. 향경여는 졸업후 고향인 서포에서 학교를 세웠고 도사영은 모교에 남아서 기숙사 사감으로 있었다. 두 사람은 친분이 있어 아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향경여는 일이 있어 장사로 올 때면 늘 친구인 도사영을 찾아왔다. 1918 9, 채창은 향경여에게 장사로 와서 함께 녀자프랑스류학준비학교를 세우자고 제의했다. 향경여는 좋은 생각이라면서 바로 동의하고 고향 서포를 떠나 장사로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향경여는 도사영과 함께 신민학회에 가입하고 이 학회의 첫번째 녀회원으로 됐다.

 

 영화속의 청년 모택동

                                                         

                                                          

 영화속의 도사영

 

모택동과 도사영은 한고향사람이지만 집안환경은 너무 차이가 났다. 도씨집안은 상담일대의 부자집안이였다. 도씨집안에서는 도사영이 모택동과 사귀는것을 견결히 반대했다. 또한 두 사람의 리상도 서로 달라 더이상 관계를 발전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헤여진후에도 우정은 여전히 지속되였다. 1920 7, 모택동이 “문화서점”을 꾸리고있을 때 도사영은 주요한 투자자의 한사람이였다. 즉 당시 은원 10원을 낸 3명중의 한사람이였다. 그해 10, 모택동이 호남혁명정부의 명의로 호남인민헌법회의를 열고 호남헌법을 제정할것을 제의할 때에도 도사영은 모택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주었다.

 

모택동이 도사영과 헤여진후 호남성학생련합회의 주석인 팽황(彭璜)이 도사영을 열렬히 추구했지만 도사영은 견결히 거절했다. 도사영은 1931 35살 나이에 병으로 장사에서 돌아갔다.(중국경제넷)

 

제공: 연변라지오TV신문 태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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