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옛날과 지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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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선회와 청나라의 멸망
2009년 04월 20일 13시 29분  조회:5520  추천:0  작성자: 人和

한 제국의 멸망을 두고 많은 사람들은 정치가와 군인들에게서 원인을 찾는다. 그러나 우리가 력사의 세부적인 사항들을 깊이있게 살펴보면 놀랍게도 200여년간 존속했던 청나라제국은 철도국유화의 과정에서 순식간에 붕괴되여버렸다는것을 알수 있다.


1911년 1월, 성선회는 우전부상서로 임명되였다. 이때는 사회갈등이 극단적으로 격화되고있을 때였다. 혁명당이 곳곳에서 폭동을 일으키고 각 성의 군벌들은 모두 딴마음을 품고있었다. 대청제국은 마치 일촉즉발의 화약통과 같았다. 력사의 역설에는 이 화약통에 불을 붙인 사람이 바로 과거 40년간 조정을 위해 실업의 기초를 쌓고 이를 통해서 이름을 후대에 남기고싶어했던 성선회로 밝혀져있다.


갑오청일전쟁이후 철도를 부설하는것이 열기를 띠였다. 조정은 이를 국책으로 삼았고 민간에서도 거대한 리익을 보고 뛰여들었으며 외국에서도  기회를 놓치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철도는 각측이 서로 쟁탈하고 싸우는 최대의 관심사로 되였다.


성선회는 철도는 국가의 명맥에 관련되는 경제사업이기에 반드시 국유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투자형식에서 국고에 돈이 있으면 나라에서 투자해야 하지만 만일 국고에 돈이 없으면 외부자금을 끌어들여야 한다.

 


1897년, 영국공사는 광주에서 한구에 이르는 월한철도의 부설을 제안했다. 성선회는 이 철도는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만일 철도부설권을 영국인이 가지게 되면 “중화민족은 독립할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성선회에게는 철도를 부설할 돈이 없었다. 그리하여 성선회는 미국기금에서 차관을 도입하여 철도를 부설하고자 생각했다. 성선회가 이끄는 중국철도총공사는 미국합흥회사와 “월한철도자차관계약”을 체결하여 400만파운드를 빌리였다. 당시 철도재산을 담보로 하였고 상환기한은 30년으로 정했다. 1899년 합흥회사의 대표는 중국으로 와서 계약을 체결하고 항주, 소주 등지에서 탄광을 개발할수 있도록 요구했다. 이리하여 호북, 호남, 광동의 3개 성에서는 불만이 많았다. 미국의 주중공사인 Conger가 나서서 간섭하였다. 그는 월한철도는 “미국이 반드시 해야 하며 다른 사람에게 양보할수 없다”고 큰소리쳤다. 그리하여 1900년 7월, 성선회는 다시 “월한철도차관보충계약”을 체결하여 차관금액을 4000만딸라로 증가시켰다.


민간에서는 성선회의 이 결정을 “국가리익을 팔어먹는것”으로 취급했다. 그러나 그는 죽을 때까지도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경한(북경-한구), 호녕(상해-남경)철도 등 간선철도를 만들 때 그가 계속하여 시도한것은 미국, 영국 등 국제기금으로부터 외채의 도입이였다. 그의 생각은 먼저 외채를 받아서 철도를 하루빨리 부설하고나서 외채를 갚으려는것이며 그 과정이 30년이면 충족할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형식으로 철도부설이 성공되면 국가에서 철도의 소유권을 완전히 장악할수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가 생각한것처럼 진행되지 않았다. 국내 민족주의정서가 팽배해지면서 철도권을 회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끊이지를 않았다. 민간자본과 국유자본이 철도사업을 놓고 심하게 대립됐다. 성선회의 국영독점리념은 심각한 도전을 받았다.


1903년 사천총독인 석량은 외채를 빌리지 말고 민간자본에 의지하여 천한(사전-한구)철도를 부설하자고 제안했다. 전국에 철도운영의 붐이 일어났다. 1904년부터 1907년까지 각 성에는 모두 18개의 철도회사가 생겨났다.


중국의 백년기업사상 에네르기(탄광, 철광 및 나중의 전력, 석유)와 자원성기업(철도, 은행 및 나중의 항공, 전신업)은 리익이 가장 집중되는 분야였다. 이에 대한 쟁탈과 리익분배는 국가경제정책의 중요한 표지이다. 이 특징은 청나라말기에 이미 아주 분명히 드러났다. 양무운동이후에 다국적기업이 가장 먼저 이 분야에 투입했고 국영자본이 그 뒤를 이었다. 1904년이후 새로운 법령이 반포된후 기업운영과 지분권리가 상대적으로 명확해졌다. 특히 주식회사제도의 출현은 민간자본이 대담하게 에네르기와 자원성산업에 뛰여들게 해주었다.


호북, 호남, 사천 등 성에서는 전 인민이 자본참여하여 철도회사를 세우는것이 열기를 띄였다. 심지어 “거지들까지도 앞다투어 지분투자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처럼 거지들까지도 지분참여하여 철도를 부설하는 현상은 성선회가 보기에 좋은 일만은 아니였다. 그는 철도를 부설하려면 대량의 자본이 투입되고 투자회수기간이 아주 길며 또 자본이 분산되여 해내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결국 상황은 그의 생각처럼 돌아갔다. 제대로 된 경영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철도부설기술이 부족함에 따라 많은 철도건설속도가 늦어졌다. 이 단계에 철도가 민영이든 국영이든 민간자본을 쓰든 외국자본을 빌려오든 이미 민감한 정치문제와 민족감정문제로 변했다. 1909년 장지동이 호광철도를 건설할 때 성선회의 유세하에 4년전에 민간자본으로 철도를 부설하는것을 지지하는 립장에서 상인들에게서 자금을 모으려고 했다. 하지만 자금을 모으기가 어려워 그는 독일, 영국, 프랑스의 3국은행과 “호광철도차관계약”을 체결하여 550만파운드를 빌리였다. 이 일이 공개된후 즉시 대규모의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한때 명성을 날렸던 장지동은 이 풍파에 휘말려 피를 토하고 죽었다.


성선회는 장지동과 달리 철도국유화를 주장했다. 바로 이 문제에서 타협하지 않았기때문에 민간의 기업가집단과 조정이 철저히 결렬되였다.


1911년 5월, 우전부상서에 오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성선회는 주청을 올려 이미 민영화된 “월한”, “천하” 철도를 국영으로 수용하자고 주장했다. 조정은 그 주청을 허락하고 직예총독을 지낸바있는 양무파의 대신 단방을 내려보내 이 일을 처리하게 했다. 성선회는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 4개 나라와 긴밀하게 차관건을 협의하고있었다.


력사를 돌이켜보면 성선회는 철도사업에 있어서 국유리념에 있어서 민간과 중대한 의견차이가 있었던 외에 두가지 심각한 잘못을 저질렀다. 하나는 민영자본과 솔직하게 의사소통을 하지 않았다는것이다. 둘째는 지분회수에 있어서 확실히 민영지분에 야박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철도권회수령이 반포된후 각 성의 상인과 백성들이 집단적으로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1911년 5월 14일, 장사에서 만인군중집회가 개최되였다. 이어서 장사에서 주주(株洲)까지 만여명의 철도로동자가 길거리로 나와서 시위를 했다. 사천에서는 보로동지회를 조직하여 포전준과 라륜을 회장으로 선거하여 “죽기를 각오하고 철도를 지키겠다”고 선언했다.


9월 7일, 사천총독 조이풍은 라륜과 포전준 등을 체포하고 수백명의 항의군중을 학살했으며 보로동지회를 해산하라는 령을 내리였다. 격노한 사천민중들은 각지의 전선을 파괴하고 도로에 장애물을 설치하여 정부간의 문서왕래를 중단시켰다. 청나라조정은 긴급히 호북의 신군을 사천으로 지원보냈다. 10월 10일, 수백명에 달하는 신군병사들이 무한이 비여있는 기회를 리용하여 봉기를 일으켰다.


조정에서는 성선회의 모든 직위를 삭탈하고 영원히 다시 기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성선회는 황급히 독일화물선에 올라 일본으로 도망쳤다. “청사고”에서 마지막에 내린 결론은 “성선회는 권리를 침해하여 법에 어긋났고 황제를 속히고 정책을 마음대로 집행하여 란리를 불러왔으니 나라를 망친 첫번째 원흉이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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