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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소기 부인 왕광미의 인생
2009년 05월 11일 14시 51분  조회:5090  추천:2  작성자: 人和

 

2006 10 13일 새벽, 전임 국가주석 류소기의 부인 왕광미녀사는 85세를 일기로 평온한 모습으로 이 세상과 고별했다.

 

왕광미는 1921년에 북경 서단 구형부거리 32번지에서 출생했다. 26세되던 해에 왕광미는 연안으로 가서 혁명생애를 시작했다. 1949년에 왕광미는 령수부인의 신분으로 북평으로 내려와 중남해에 들어갔다. 46세되던 해에는 투옥생활을 시작했고 2006년에는 중남해에서 몇발작도 되지 않은 병원에서 인생의 최후를 마쳤다.

 

미국행을 거절한 왕광미

 

왕광미가 류소기를 배행하여 인도네시아를 방문할 때의 고귀하고 아름다운 자태, “문화혁명”기간에 핍박에 못이겨 치포를 입고 탁구채를 목에 걸고 투쟁을 맞던 그 처참한 모습 그리고 배에 올라 류소기의 유골을 바다에 뿌릴 때의 그 비통한 표정… 등등 력사적인 장면들은 중국인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있다.

 

기복적인 왕광미의 인생은 시종 류소기와 련계되여있다. 허나 그녀의 일생에서 두단계는 독립적으로 인생을 영위하였는데 하나는 학생시절이고 다른 하나는 만년의 생활이다. 그만이 소유한 이 두단계의 력사는 뭇사람들이 그닥 잘 알지 못하고있다.

 

왕광미는 1921년에 한 옛관리가정에서 태여났다. 당시 부친은 워싱톤에서 열린 9개국 회의에 참가하는 등 명성있는 유지인사였다. 부친 왕지창은 일찍 일본 와세다대학 상업학과를 전공했으며 북양정부 농업상업부 공상부 사장으로 임직했었다. 모친 동결여는 한 부유한 소금장사군가정에서 태여났고 천진북양녀자사범학교출신이였는데 “문화혁명”기간에 감옥에서 세상을 떴다.

 

왕광미는 11명남매가운데서 일곱째인데 아래로는 녀동생 넷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있는 여섯째오빠 왕광영은 후에 “홍색자본가”로 명성이 자자했으며 광대은행을 창설했다.

 

고중시절에 왕광미는 “수학왕”이란 애명을 얻을만큼 명성이 있었고 후에는 포인대학 수리학부에 입학하여 연구생공부도 했었다. 이같은 경력으로 하여 이 혁명적인 령수부인은 만년에도 “광학을 리용하여 거리를 측정할데 대하여”란 론문을 또렷이 기억하고있었다.

 

왕광미는 만년에 “나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공부하는’ 리론의 영향하에 워낙 항전승리후 미국류학을 가서 원자물리를 전공하고 돌아와 나라의 건설에 이바지하려 했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자기를 큐리부인과 같은 사람에 비유했다.

 

1946년에 국공합작으로 한 군대배치부를 설립할데 대해 의론하고있을 때 왕광미는 출중한 영어실력으로 지하당번역원으로 됐다. 허나 국공합작이 실패하자 조직에선 그더러 연안으로 갈것을 요구했다. 이때 왕광미는 이미전에 류학을 신청했던 두 학교에서 입학통지서를 받았다. 그 하나는 미국 스탄프드대학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원자물리학부였다.

 

“허나 당시는 군대배치부에서 근무할 때여서 갈수가 없었죠.” 왕광미는 만년에 당시를 떠올리며 말했다.

 

하지만 20년후 그가 “어디로 갈것인가”하는 인생선택에서의 자그마한 “망설임”이 그만 죄로 되고말았다. 왕광미의 장녀 류정정은 중앙텔레비죤방송국 양란의 취재를 접수할 때 “문화혁명”대자보를 떠올리면서 “어머니는 일찍 연안과 미국사이의 선택을 두고 망설이였죠. 당시로는 원칙적인 문제였죠. 나는 집으로 와서 어머니한테 질문했어요. 어머니는 솔직하게 망설이였다고 하면서 정부장학금으로 공부할수 있고 또한 최고학교에서 박사공부를 하는것이 꿈이였다고 하더군요.”라고 말했다.

 

1946 8월에 한 작은 비행기가 왕광미를 싣고 연안으로 향했다. 그번의 연안행으로 인해 왕광미는 학수고대했던 “큐리부인”의 꿈을 영영 가슴속에 묻어야 했고 다른 인생길을 걸어야 했다. 이 길은 그도 생각지 못했던 기복으로 얼룩진 한 령수부인의 길이였던것이다.

 

류소기에 대한 3가지 기억

 

1963 11월에 왕광미는 류소기를 배행하여 인도네시아를 방문했다. 이는 중국지도자가 처음 부인과 함께 외국을 방문한것이여서 지금도 표징적인 의의를 띠고있다. 당시 흰색의 치포를 입은 왕광미는 중-인 두 나라 인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왕광미로 말하면 그번 방문은 휘황과 두려움이 뒤섞인 정치임무였다. 그는 출국전에 전문 복장과 례절문제로 송경령을 찾아 자문까지 받았었다. 허나 4년후에는 이 아름다운 형상을 추악하게 묘사한 연극이 청화대학에서 공연되였다.

 

그번 인도네시아방문을 두고 외계에서는 왕광미와 류소기의 20여년 결혼생활중 주석의 부인으로는 제일 눈부신 순간이였다고 평했다. 출신과 수양으로 하여 당시 중국지도자 부인들가운데서 왕광미의 형상은 제일 돋보였다.

 

1948년에 27세되던 왕광미는 50세 되는 류소기와 결혼했다. 자기가 제일 존경하던 최고지도자와 결혼한후 이 지식형녀성은 일상가사를 전담하는 가정주부로 되였다. 왕광미의 그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격으로 인해 당시의 생활은 류소기의 생명가운데서 제일 안정된 가정생활로 남아있었다.

 

왕광미는 만년에 시시로 인정이 따분히 담겼던 3가지 장면을 회상하군 했는데 첫째는 첫애를 출산했을 때 류소기가 그의 볼에 가볍게 키스해주던 장면이고 둘째는 “문화혁명”기간 투쟁받을 때에 류소기가 그를 도와 옷견지들을 정리해주었는데 이는 그들의 마지막 대면이였다. 그리고 투쟁받던 기간에 그는 하도 남편의 모습이 애처로와서 물 한컵 떠드렸는데 남편이 받아마시던 그 작은 일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추억으로 가슴속에 남아있었던것이다.

 

1967 4월부터 청화대학의 투쟁비판문헌자료들을 보면 왕광미는 시종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매 한마디 답변마다 반항과 보류, 지혜와 믿음으로 자기의 남편을 보호했었다. “문화혁명”초기에 왕광미는 류소기를 보고 “우린 왜 그처럼 추악하게 묘사되지만 서로간에 원망이 없나요?”라고 묻자 류소기는 “호상 신임하기때문이지.”라고 대답했다.

 

1967년에 왕광미는 “미국중앙정보국 장기침입 고급전략적특무”라는 “죄”명을 쓰고 진성감옥에 투옥되여 장장 12년간 은페된 투옥생활을 했다.

 

1972 8 17일에 왕광미는 리별한지 5년이나 되는 자식들과 만날수 있게 되였다. 이날에 그는 비로소 류소기가 사망된지 3년이 된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웃음으로 은혜와 원한을 묵새기다

 

1979년에 왕광미는 감옥에서 나왔다.

 

사람들이 왕광미의 모습을 재차 볼수 있었던것은 왕광미가 하남성 성장한테서 류소기의 골회함을 받을 때부터였다. 왕광미가 한참이나 남편의 골회함에 얼굴을 묻고있는 모습은 당년의 그 한 력사를 경험해온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감동에 젖게 했다. 명예를 회복한후 왕광미는 전국정협위원과 상무위원회 위원직을 력임했었으나 정치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지 않았다. 그는 만년의 대부분시간을 빈곤한 어머니들을 돕는 사업에 투신했는데 기금회자금이 부족할 때면 어머니가 남긴 골동품을 팔아 보태였다.

 

만년에도 왕광미는 산책하고 수영하는 취미를 잊지 않았다. 그는 매일 《인민일보》를 구독하였고 중앙텔레비죤뉴스를 시청하였다. 83세되던 해에 그는 모택동과 류소기 두 가정의 대규모의 모임을 조직하였다. “웃음으로 은혜와 원한”을 대하는 그의 처사는 많은 매체의 주의를 불러일으켰다.

 

왕광미와 류소기사이에는 1 3녀가 있다. 아들 류원은 군사과학원 정위로 있고 큰딸 류평평은 미국영양학박사로 일찍 국내무역부 과학사 사장으로 임직했었으며 둘째딸 류정정은 하버드공상학원을 졸업한후 현재 상업에 종사하고있고 셋째딸 류숙숙은 해외에 거주하고있다.

1979년에 왕광미와 아들딸들은 인민대회당에서 있은 음력설야회에 참가했었다. 그는 회억록에서 “이는 10년래 내가 처음 공개적인 장소에서 모습을 드러낸것이였는데 사람들은 나를 알아보고 악수도 청하고 포옹도 해주었고 또한 어떤 동지들은 나의 손을 잡고 흐느껴 울었는데 나도 눈물을 머금고 사람들을 향하여 허리굽혀 인사했다. 그때 나는 기쁨에 겨워 ‘내가 또 이처럼 동지들과 함께 있게 됐네요. 인민이 나를 해방시켰습니다’고 말했다”며 감동의 장면을 생동하게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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