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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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언수상록 (27)모른다는것의 지혜
2015년 01월 08일 08시 38분  조회:5847  추천:0  작성자: 최균선
                                  모른다는것의 지혜
 
                                             진 언
 
   고대 희랍에 찌노라는 대철학가가 있었다. 어느 날 한 제자가 물었다.“스승님은 그렇게 지식이 연박하고 문제를 분석함도 투철하여 해답을 분명하게 하시면서도 어찌하여 의혹을 보류합니까?”
   찌노는 아무말없이 큰 원을 그리고 그안에 다시 작은 원을 그린 다음 차분하게 말했다.“이 큰 원안에 면적은 내가 장악한 지식이고 작은 원안에 지식은 너희들이 알고있는 지식이다. 이 두개의 원밖의것은 너희들이나 내가 모르는 지식부분이다. 큰 원의 둘레의 길이가 작은 원의 둘레의 길이보다 더 길므로 내가 접촉한 무지의 범 위가 너희들보다 더 큰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늘 자신을 의심하는 까닭이다. 이 제는 곧 알겠느냐?”라고 대답했다. 찌노야말로 얼마나 겸손한가?
   고대과학문화가 고봉에 오른 아테네에서는 철학가 소크라테스를 가장 지헤로운 사람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이 철학가는 영예앞에서 랭랭하게 대답하였다.“나는 다만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것을 알고있을뿐이다. 만약 나의 지혜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점이 있다면 자신이 무지하다는것을 알고있다는 그 점일것이다.”
   역시 대철학가다운 겸허였다.그런데 다른 사람들도 그와같이 무지하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자기가 무지하다는것을 모르고있다는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이런 지혜를 “자기의 무지를 아는 지혜”라고 이름하자. 소크라테스는 한평생 만나는 사람에게 끝없이 묻군했는데 결과 도처에서 알고있다는것의 화려한 외투속에 무지가 숨어있다는것을 간파하였다. 그가 한평생 구지(求知)활동을 한것은 마치 인간의 인식능력은 제한되여있고 얻은 지식도 왕왕 믿을수 없다는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인듯싶다.
   허위와 성실이 한곳에서 살수 없듯이 교오와 실력도 한사람의 몸에서 살수 없는것이다. 무지는 자부심의 문을 여는 열쇠이고 겸손은 자기를 알도록 이끌어주는 지혜선생이다. 찌노나 소크라테스같은 지자는 다른 사람의 그림자속에 숨어서 살지만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의 두뇌를 다른 사람의 사상의 활무대로 만든다.
   인간은 자기의 지식은 영원히 알고있지만 자기의 무지는 영원히 모르고 있다고 해야 할것이다.  학문을 이루고 나면 책이 필요 없다는 말이 있지만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이 박식하다고 생각한다면 실상은 그가 더없이 무지하기때문이다. 물론 이런 심오한 도리는 현자들만이 터득할수 있는 학문이라 할수 있겠다.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것을 알고있을뿐이다.》라는 소크라테스의 격언은 유식한체 하는자의 경솔한 오만성을 비웃고 인간의 인식을 합당한 자리에 올려놓은 극히 겸손하고도 슬기로운 지혜가 아니겠는가? 하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가 아무것도 모른다는것을 알고있는가 의문스럽기는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지식이 연박하고 경륜이 풍부하기에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했을것이다. 없는것과 있는 것간에 충돌이 생길수 없듯이 아는것과 모르는것간에 충돌이 구성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서 가끔씩 제일인자연하고 권위자연하며 남의 생각을 제생각의 틀에 맞추려고 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제혼자 총명한체, 잘난체하는 자들은 속물근성이 짙기때문이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경우에도 안하무인격으로 돌아가며 남을 나무라고 훈계하기 좋아하는 사람을 보게 되면 왼고개가 탈린다.
   가령 어떤 사람이 누구보다 박식하다고 자긍한다면 실상 그가 더없이 무지하기 때문이다. 가령 좌석에서 력사를 담론하게 되였을 때 공을기가《회(回)자를 쓰는데 네가지가 있는데 너 아니?》하는 식으로《중국에 4대발명이 있는데 제지술은 동한 때에, 인쇄술은 수조때에, 지남침은 전국시대에, 화약은 당조말기에 발명되였단 말 이요. 알았소?》라고 낡은 력사교재를 들춰낸다면 듣는 사람이 어떨가?
   혹여 입바른 청자가 말바르게《당신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 지금은 더욱 일찍 발명했다는것을 고증하는 경향이라네. 발명사가 새롭게 씌여지구있지, 례컨대 지남침은 기원전 2700년 헌원(軒轅)황제가 발명했고 지남침은 기원전 200년 좌우에 발명됐고 지남침은 기원전 100년좌우에 발명되였고 화약은 3국시대라고도 하고 서한때라고도 하고…당조이전이라고도 하지, 아무튼 당신의 말만이 영원한 진리라고 하는건 무모한 짓거리라구…》
 《그게 어디서 난 사이비지식이요? 사유에 혼란이 생긴 사람이 쓴게 분명해…》
 《자기가 모르는것은 죄다 사이비하다는것은 경박에 가까운 무리야, 중국이 세계제일 백가지를 보게나. 아니라구? 에라, 당신이 다 맞다구치세. 그러나 강물은 이미 아득히 흘러갔네. 이제 그 물로 방아를 돌릴수 있나? 하하하…》
   우리는 어떤 경우에 이런 사람들을 드문히 본다. 그리고 그들의 오만한 자태에 코방귀를 뀔수밖에 없다. 물론 당사자는 제멋에 떠서 남들이 비웃는지 찬탄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이것도 틀리오, 저것도 맞지 않소 하면서 그냥 장훈을 부른다. 모르면서도 노상 다 아는체하는 사람은 기실 귀자랑밖에 없는 당나귀와 같다.
   두 눈을 싸매고 성마돌을 돌리는 당나귀가 천리를 가는줄로 알고 쉼없이 가고가다가 결국 자기가 제자리를 뱅뱅 돌았다는것을 알았을 때 얼마나 맹랑하랴! 빈통이 굴러가면 소리만 요란스럽다. 물은 흐를때 소리난다. 그러나 정녕 깊은 물은 흘러도 고요히 흐른다. 당신은 그래 보지 못하였는가? 조밭에 잘 여물어 알찬 이삭들은 고개 를 숙이고 있는데 꼿꼿이 서있는것은 언제나 가라지들이란것을.
   산꽃중에 녀왕이라 할수 있는 나리꽃을 본적이 있는가? 나리꽃은 손수 짜지도 꿰매지도 않은 옷을 입는다. 그러나 그 청순함과 순박함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 교만은 무지의 별명이요 무지한자의 통행증이기도 하다. 스스로 자기가 총명하다고 자랑하는 사람은 마치 자기가 갇힌 감방이 널직하다고 자랑하는 죄수와 같다는 명언은 얼마나 유모아적인가? 가장 향기로운 향수는 왜 일매지게 작은병에 담겨있을가? 한번 사색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가싶다.
   검푸른 바다물은 무시무시하다. 그러나 바위에 부딪쳐 산산히 부서질 때 하얗게 창백한것을 당신은 보았는가? 자기를 낮추었다해서 손해될것이 없고 자기를 잔뜩 높였다해서 리득될것 하나 없다. 소크라테스의 기본관념은《우리들의 무지를 승인함…》으로써 지혜를 낳는 모체라는것을 가르치고있다. 인류의 지식은 “분립된 개인의 지식”의 형식으로 존재하는것이 결코 일종“정체적지식”으로 존재하는것이 아니다.
   아무도 전 인류의 정체적인 지식체계를 완전히 장악할수 없으며 아무도 인류의 지식의 정화를 완전히 장악할수 없다. 그만큼 우리가 알고있는것은 단순하고 천박하 다. 매개인은 자기만의 생활경력과 심령체험, 인격특징, 지식결구와 사회지위가 있기 에 우주의 오묘함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인식과 감정에 자기의 국한성이 있게 된다.
   그리하여 “무지”의 지혜를 가진 지자들은 부단히 자기를 반성하며 수시로 자기의 원유의 견해와 신념을 포기하고 새로운 지식과 견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여 있다. 자기가 무지하다는것을 아는것은 겸손이 아니라 성실이다. 스스로를 잘 안다는것이 자연스럽게 표출되는것은 한 사람의 미덕이 아니라 최저의 교양이다. 인류의 지식령역이 날로 넓어지고 사회생활이 날로 다양해지는 현시대 혼자서 무불통지한듯이 으시대는것은 자기가 무지하다는것을 표백하는것과 같다. 대화에서 혼자 모든 얘기를 도맡아 하려는것은 실례만이 아니라 무분별한 행동이다. 늘 겸손하자!

                                   2006년 1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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