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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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탈》의 외투를 벗으며
2015년 04월 07일 21시 00분  조회:4959  추천:0  작성자: 최균선
                           《초탈》의 외투를 벗으며
 
   근간에 흔히 초탈이니 마음을 싹 비우고 사느니 하는 멋스러운 말들이 류행되고 있는데 나는 아무리 마음을 크게 먹어도 어째서인지 가볍게 받아들일수 없고 초탈을 하기란 더구나 어렵다.
   초탈이란 무엇인가? 세속적인것이나 일반적인 한계를 벗어남을 이르는것이라는 사전식해석은 아둔한 내 머리에도 인차 인상되지만 그 깊은 뜻은 그냥 납득되지 않으니 내 흉금이 너무 옹졸해서일가? 모든것에 자족하여 만복의 배를 슬슬 문지르는자들 에게는 묻지 않아도 귀등으로 흘려버릴 허황한 잡설일것이다. 그런 비실혜적인 사치스러운 상념이 자리잡을 빈구석이 마음속에 전혀 없을것인데 황차 아무 가진것없이 이 속세에서도 말단에 사는 나같은 미미한 인간이 과연 무엇을 넘어서고 무엇을 벗어날수 있으며 또 초탈해서 이르는 경지가 어디쯤이란 말인가?
    사회행정에서 무슨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그것을 소기의 목적에로 바싹 접 근시키려고 시도할 때 선전구호가 요란스레 제기되고있음을 보게 되는데 우리는 땅짚 고 재주넘기를 하는 어리광대를 볼 때의 그런 슴슴한 심정으로 대하게 된다.
    불교교리에 이른바 물계,색계, 무색계가 론의되고있다. 석가모니 여래불이나 이 3계를 벗어났는지는 모르겠으나 칠정륙욕을 가진 이 지구촌 족속들가운데서 실제로 3계를 벗어난 사람이 과연 누구런가. 말은 무척 귀맛좋으나 나중엔 인간의 자아풍자 에 불과한것이다.
    고서에 이르기를 빈 마음이란 공심(空心) 이고 무심(无心)인데 공심이라 하여 아무 진취심도 없이 되여가는대로 산다는것과는 또 다른 문제라고 했다. 그리고 사물에 구애되지 않고 옳은 일에도 욕심이 없으며 성내징 아니하고 어리석지 않게 사는것이 진정 공심인데 마음을 굳게 정함은 안심하느니보다 못하고 안심은 무심보다 못하다고 하였다.
    헌데 유감스럽게도 이 대천세계에 물질이 무한정한만큼 끝까지 자사적인 인간의 물욕도 무한대요, 인간의 본성의 하나가 곧 자아타협일진대 공자어른이 가르친대로 실로 망아(忘我),무사(无事), 무욕(无欲)이 가능할것이냐? 성인이였던 공자님도 속으로는 공리공다민줄 안쓰럽게 여겼을줄 안다. 그렇지 않으면 어이 렬국을 두루 돌아다니며 뜻을 이루지 못한것에 길이 탄식했겠는가?
    곰곰히 따져보지 않아도 아무리 모지름을 써봤대야 해탈할수 없는 유혹많은 이 속세에서의 불만족스러운 자기 인생에 그만 역증이 나서 몸부림치며 자탄해본 소리가 소위《초탈》,《빈 마음》이렷다. 그것뿐이다. 그렇지 않은가? 물욕때문에 기뻐하지도 않고 또 스스로 슬퍼하지도 않는다는 범중엄씨의 천고절창을 후세사람들이 노래처럼 입에 올려왔지만 진적 세속에 혹하지 아니한이가 몇몇이며 그런 성인 현자가 누구누 구던가?
    복창증이 올만큼 무엇을 가득 챙겨넣은 무리들도 흑사심이 무지경이여서 더 가지지 못해 앙탈하는 이 현실사회에서 기껏 맡은 사회배역이라야 범부속자밖에 안되는 포의한사 (布衣寒士)로서 벗어버릴것도 없는데 욕념속에서 초탈을 외우는것은《여기 은전 삼백냥이 없소》라는 말고 무엇이 다르랴.
    지금 한창 득의한자는 자기의 행운과 떼복에 양양자득해 있고 실의한자는 자기의 불행과 박복함에 앙앙불락해 있을진대 기실 득의자나 다 우연의 손아귀안에서 그리된것이라고 셈평좋게 생각하면 환득환실의 인생에 대해 가슴치며 애를 끓이지 않을수 있건만 전자는 필연의 왕국에서 은총을 하사받았다고 어깨힘을 팍팍 살리며 거들먹거리고 후자는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기는 매일반이라 너나없이 초로인생인데는 객기를 부릴게 뭐냐?
   얻은게 있어야 잃는것이 있을터인즉 욕심을 부려봐야 허무한 노릇이니 느끼는 인생비극에 열물을 토할것도 없이 초탈을 추구하지도 말고 그로써 자기를 억지로 위안할 필요도 없다고 본다.
   두팔굽으로 붐비는 인파속을 아득바득 헤집고 나가야 하고 또 다른 사람의 팔굽에 떠밀리우며 살아야 하는 삶의 현장에서 약자의 숙명을 저주하며 풀풀거릴 때 그 성냄을 우리는《분노》락 이름지어서 정감사전에 올렸지만 마음약해서 분노가 끓어번져도 감히 쏟아내지 못하고 삼키기만 한다. 대바르고 강직한 선각자는 한번 분노하면 또 다른 일로 분노를 터뜨리지만 종당에는 아주 처참해질뿐이다. 그러나 양가죽을 얻어 쓴 승냥이가 양을 잡아먹을 때 양에게는 비애가 있을뿐 분노란 가당치 않은 법이여서 양의 어쩔수 없는 숙명일수밖에, 그래서 인간에게는 체념이 필요한것이다.
   진정 맑은 바람처럼 가진것 없이 왔다가 가진것 없이 가는 삶의 자세로 세상살이에 초연한 사람이 있다면 날로 탐욕으로 얼크러지는 인간사회를 위해서는 천만다행이겠으나 인간이 구상해낸 천사라면 가능할는지…
   우리가 보는 세상은 얼마나 황당하고 우습게 번져가는 연극마당인가.가진자의 눈동이처럼 커가는 부의 횡행이나 이미 조금 가졌던것마저 지켜내지 못하는 못가진자의 상실은 다 동시적인 사회비리여서 똑같이 절실한 인간비극인데 오직 한쪽만 차디차게 외면당하지 않는가? 벼락축재자들이나 배꼽이 깊이 패인 탐관오리들은 술과 고기로 만포식한후 이발을 쑤시며 소매치기군의 비행에 노발대발하고 호화별장에 미인과 육욕의 향연을 누리면서 세기말의 도덕을 운운하니 말이다.
    살진 큰 손이 백성의 피땀으로 채워진 국고를 허물어도 감히 도적질이라고 맞대놓고 질타하지 못하는 형편에 손은 싹싹 빌고 정신만은 올똘해서《초탈했소》,《마음 비웠소》한다면 초탈을 비상처럼 여기는 그네들이 흰소리 잠꼬대도 아닌 비틀린 소리 라고 얼마나 기분나빠 하겠는가.
   소위 용속한자가 용속하다는것은 결코 욕망의 포로가 된데 있는것이 아니라 정신경계가 령점이하로 처져버린데 있으며 반대로 초탈한자가 초탈했다는것은 금욕해서가 아니라 보통사람들보다 정신경계가 좀 높은데 있는것이 아닐가, 현대어로 이것이 정신문명의 골자이건만 다 쌀에 뉘만큼이나 희귀한 성자나 현자들이 담론할 일이다.
    하긴 예로부터 철인들이 인간속세의 초탈방식에 대해 훈계한바 있다. 초탈의 첫째 방식으로 제목숨을 끊어버리는것인데 한번 저승행차에 모든 영욕이 깨끗이 끝난다는것이다. 이런 초탈은 구곡간장에 맺힌 한으로 바꾼 처절한 초탈이라 할것이다. 초탈의 두번째 방식으로는 어지러운 속세의 밑창을 꿰뚫어보고 환멸을 느낀나머지 심산속의 절에 들어가 삭발중이 되여 의식의 흐름을 두절하는것인데 결국은 귀막고 방울 훔치는격의 자기속임이다. 셋째방법으로 만권책을 독파하고 자유산천을 두루 편답하며 인생의 도리를 깨우치고 마침내 도덕가로 부상되는것인데 리기심에 찌들리고 자아중심권에서 으르렁거리는 현대인들로서는 도저히 도달하기 어려운 선경이라 할것이다.
   공자는《식, 색은 본성이라》고 했거늘 천층만층 구만층의 인간사회라 해도 식, 색의 본성은 개변할수 없는것이요, 초탈의 외투를 걸친다해서 본성을 감출수는 없을것이다. 더구나 정신적으로 모종 신념이 없고 인격상에서 자존, 량심이 없는 사람은 더구나 식사후의 한담으로나마도 초탈을 운운할수 없다.
   로자는《있는것에 만족을 모르는 일보다 더 큰 화가 없고 더 많이 가지려고 욕심을 부리는것보다 더 큰 허물이 없으니 언제나 스스로 만족을 느끼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리라》고 하였다.
   《영원한 도는 억지로 행하지 않으며 모든 일을 가볍게 해내는것이다. 정치를 하는 왕공제후들이 이런 도를 지키면 만물과 백성이 스스로 감화하리라. 이 소박한 덕성은 온갖 욕망을 없애며 욕망이 없어지면 민중이 진정되고 천하는 스스로 평온 해질것이리라. 아, 누가 이 풍요로운 천하에 이바지할것인가? 일을 성취하고도 보수를 바라지 않고 공이 이루어져도 그 자리에 남아있지 않으며 그 어진성품은 나타내려 하지 않는것이거늘…》  
    허영심의 비극인《목걸이》이에 모파쌍이《인생행로란 기괴하고 변덕스러운것이 거늘 사람의 흥망성쇠란 어쩌면 그렇게 사소한 일에서 갈라지는가?》고 개탄하였는데 이에서 더 류추한다면 인생의 희로애락은 만족과 불만족의 계선에서 갈라진다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욕망은 굴뚝같은데 별수가 없다고 한탄하는 모습이 더 진솔한 우리다운 모습인줄로 안다. 그러니 마음을 애써 비우려 할 까닭도 없는것이요, 더구나 너무《초탈》하여 자기훼멸의 구렁텅이에 빠지지도 말아야 하겠다.
    이것이 초탈하는 학문이라면 학문이라 할것이다.
 
                     2000년 1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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