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http://www.zoglo.net/blog/cuijunshan 블로그홈 | 로그인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조글로카테고리 : 문학 -> 발표된 작품 -> 수필

나의카테고리 : 칼럼/단상/수필/기행

(잡문) 당신은 수치심을 아는가?
2015년 10월 21일 19시 27분  조회:4458  추천:0  작성자: 최균선
                              당신은 수치심을 아는가?
 
 
   고대희랍의 3대비극시인의 한사람인 에우리피데스는 수치라는게 있는가? 생각이 그렇게 느끼도록 만들뿐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마크 트웬은 인간은 얼굴을 붉히는 혹은 붉힐 필요가 있는 유일한 동물이라고 하였다. 물론 생명자체에는 부끄러움이 필요없다. 부끄러움이 숨결이 되는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인간은 부끄러움을 알기에 동물과 구별되는것이 아니랴!
   한국텔레비화면에서 덜미를 잡힌 범죄혐의자들이 거개 웃옷으로 골을 감싸거나 사타구니에 구겨박고 무엇이라 변명하는 모습들을 볼 때 족제비에게도 낯짝이 있다더니 속담 그른데 없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떠오르면서 허구픈 웃음이 새여나 오는것을 말릴수 없다. 저들도 공중들앞에서 낯반대기를 드러내는것이 체면깎이는 일이라고 여기는 모양일가? 저절로 왼고개가 탈린다.
   이른바 체면을 깎지 않으려는것은 손바닥만한 낯짝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본능적인 심리반응이다. 천하에 악착한 죄범들에게 부끄러움이란게 남아있다는것은 사이비한 일이 아닐수 없다. 수치심이 없는 사람은 원래 량심도 없다 그런데 저들이 낯짝을 가리는것은 수치심이 있다는 표현이자 곧 량심이 있다는 암시가 되는것이 아닌가?
   부끄러움이란 항상 타방을 의식함으로써 감각되는 자아의식으로서 부끄러워 한다는것은 타방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스스로 부끄러워 한다는것은 아무도 없는 숲속에 홀로앉아도 몰래 얼굴이 붉어지는 그런 의식, 그런 감각이다. 이런 의식, 이런 감각이 그 사람의 말과 행위와 몸짓에 제약의 고삐가 되여져 수시로 절제를 촉구한다. 바로 그것이 인간미이고 덕이며 인격을 윤택하게 하는 습기이기도 하다. 
   이처럼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것은 량심의 작동인것이고 량심은 곧바로 그 자신의 도덕궁전의 금빛기둥이다. 흉악범들이 살인하고 입실강간하고 어린애마저 랍치, 살해할 때 량심은 이미 개를 베여준 다음일것이다. 어둠속에서 야차같이 끔찍한 행위 를 저지를 때는 수치심이 무엇인지 아랑곳않던 천하 악한들이 렌즈앞에서는 더러운 낯짝을 가리우니 그야야말로 인간들만이 창출할수 있는 회색유모아라고 해야 하리라.
   그런데 그런 가증스러운 작태(作态)를 허용하는것은 치죄만할뿐 인권은 존중한다는것인지 아니면 돌아온 인간본성인 잘난 수치심을 보호해주는 인도주의인지 알수 없으나 남의 제상에 배놔라 감놔라 할수는 없고하니 일축해버리고…
   수치심은 인류문명의 첫표지로서 야만인으로부터 부단히 개화하고 진보하는 과정에 자애와 자중의식이 더욱 돌출해지면서 심령의 깊은 골짜기에 몰래 피여난 한떨기 아름다운 문명의 꽃이라 할수 있고 조물주가 인간에게만 하사한 첫선물이라 할수 있다.
   금과를 훔쳐먹은 이브가 자기의 라체에서 느낀 첫수치심은 성적인 수치심이였지만 그 시각부터 인류문명의 진전과 더불어 수치심의 내용이 세분화되고 그 함의도 더욱 오묘해졌다. 수치심은 그렇게 자손만대에 유전되여 일종 불가마멸의 천성으로 되였던것이다.
   사람은 어릴 때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때나 혹 무안을 당했을 때,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설 때 부끄러움이 선행하면서 얼굴에 막무가내한 홍조를 피워준다. 그것을 우리는“부끄러운빛 ”이라 칭한다. 부끄러운 빛은 일종 심령미이다. 도덕감정상의 이런 부끄러운 빛은 적어도 기편이나 분식, 허장성세나 아부심리, 교활성이나 표리 부동… 등등의 렬근성보다는 비할바없이 고귀한 심리품질이다. 
   대저 한 사람이 영욕을 안다는것은 사악과 옳은것에 밝다는것이고 수치를 안다는것은 인간의 미덕을 간직하고 있다는 표징으로서  인간의 미덕에서 가장 가치있는 내핵이다. 가령 한 사람이 완전히 렴치를 잃었다면 못하는 짓이 없을것이고 가질것 못가질것 가리지 않고 횡령하려들것이다. 그래서 수치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자를 철면피한이라거나 파렴치한라고 하는것이다.
   고대중국의 사상가인 순자는 일찍 제자들에게《수치를 모르면 사람으로 될수 없느니라》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그래서 옛날 마을어른들이 누가 잘못하고서도 그냥 뻔뻔스럽게 나오면《에끼눔, 부끄러운줄도 모르는 눔이 사람새끼 될가부냐? 》하고 꾸짖었는지 모른다.
   사람은 어섯눈을 뜨게 되고 차차 시비계선이 똑똑해지면 영욕관념이 강해진다. 이를테면 시험성적이 발표되였을 때 남보다 많이 낮다거나 혹은 지각하여 주밋거리며 교실에 들어설 때나 무슨 잘못을 저질러 선생님에게 공개비평을 받을 때나 저도 모르게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기에 자연히 머리를 숙이고 얼굴을 붉히게 되는것이다. 환언하면 사람은 지각이 들수록  영욕관념도 그에 정비례된다는 말이다.
   수치심이라는 이 심령의 꽃은 많이는 각자 마음밭의 비옥도에 달린것같다. 이 세상에서 후안무치의 지경에 이른 인간만큼  슬프고 가련해보이는 인간은 없으리라. 수치감은 한 개체생명만이 아니라 나아가서 전 민족의 시비관념, 선악관념, 미와 추에 대한 관념 등의 종합적심리품질의 체현이다. 그래서 국치(国耻)에는 매개 국민 마다 절치부심하는것이다.
   한 사람이 수치감을 느낀다는것은 바로 일종의 자아승화로서 일종의 진실하고 순박한 정감의 굴절반사이며 옳바른 시비관념과 선량한 심리상태의 자연적인 로출이다. 그래서 수치심은 한 사람의 령혼과 품격을 투시할수 있는한 부분이라고 하는것 이다.
   모종 경우 부끄러운 일을 한 자에게 수치감을 안기는것은 사회가 그 개인에 대한 일종의 도덕적징벌이다. 그에게 수치심을 알게 하고 통절히 후회하게 하는 목적은 그로 하여금 자기 성찰을 하게하고 자책속에서 보다 더 인간다운 인간으로 되도록 하는데 있다.
   수치심은 단순히 체면을 지키려는 심리에나 손바닥만한 얼굴을 가리우는 본능적인 거동에 있는것이 아니라 맑은 량심에 근원을 두고있다. 만약 한 사람이 수치심마저 깡그리 말아먹었다면, 얼굴 한번 붉히지도, 가슴 한번 두근거리지도 않고 기탄없이 살인, 강탈, 도적질 등 죄악을 저지를것이다. 수치를 모르는 이런 패류들은 마음이 이미 죽은것이다. 인간에게서 마음이 죽는것만큼 불행한 일은 없건만 당사자들은 그것을 잘 모른다.
   만군중앞에서 공개재판을 할 때 어떤 범죄자들이 무슨 장한 일을 해서 공중앞에 나선듯 대가리를 잔뜩 쳐들고있는 아닌꼴을 종종 보게 되는데 그런자들은 벌써 인간이기를 단념한 쓰레기들이라 쓰디쓴 랭소나 던지면 그만이겠지만 다시 한번 인간의 원초적비애를 절감하지 않을수 없다. 
   하다면 사회정영의 외투를 걸치고 음으로 양으로 사리사욕만 채우는 허울좋은 위정자들은 도대체 수치심을 알가? 물론이다. 다만 려산진면모가 드러나 재판정에 나섰을 때에야 비로소 고귀하신 체면이 가려워서 고개를 떨굴뿐이다. 그것은 진정으로 수치심을 찾은것이 아니라 역시 끝까지 사심에서 나온 자기보호의식이다.
   수치심은 륜리와 도덕에 직결된 인간심사이다. 이 사회에서 어떤자들이 수치를 모르는가? 엉터리선서를 하고 엉터리로 한자리 차지하고 엉터리로 부정축재를 하는 자들이다. 현시대 이런 허위적인간들이 부지기수인것은 체제와 법제관리에 틈서리 탓이기도 하겠지만 태생병처럼 본래 수치심이 결여하거나 수치심이란 심리품질을 숫제 지니지 않기로 체념해버리고 탐욕의 탁류속에서 올챙이 까나듯 무지 많이도 까나고있기때문이다.
   그러면서도 흔히 법정에서나 기자들의 채방에서 진정으로 자신을 반성하는것이 아니라 무슨 사상개조를 잘 하지 않아서라거니 자산계급사상의 영향을 받았다거니 법을 잘 몰랐기때문이라거니 하는것이 공통어인데 그 기량이 유치하고 가소롭기 그지 없다. 중국에서 자산계급씨를 말린지 언젠데 누구에게서 언제 어떻게 나쁜 영향을 받았다는것인가? 차라리 인간이 인간으로 되는 내핵이고 량심의 표현인 수치심이란 진정 어떤것인가를 몰랐다거나 아예 수치심을 내버렸다고 하는것이 오히려 사개가 맞는 말일것이다. 
   도덕률의 시점에서 보면 모든 부도덕한 행위들은 모두 근원이 곧 수치심의 사멸이나 결핍에 있는것이다. 법률의 징계가 무서워 자기를 단속한다는것은 너무나 비량심적이고 저속한 심리품질이다. 7정 6욕을 가진 사람으로서 어찌 유혹앞에 흔들리지 않으랴만 진실한 사람은 영원한 치욕의 기둥에 못박히지 않으려고 도덕적량심과 자률정신을 기둥으로 마음의 대청을 떠받들고 나가기에 무너지지 않고있는것이다.
   자고로 식(食)에 수치가 없고 성(性)에 수치가 없고 금전에 수치가 없다고 하더니 그말이 딱 들어맞는것같다. 이를테면 녀자들의  수치심은 남자들보다 더 뿌리깊은 천성이요 일종의 미덕이건만 육체교역장에서 제노라하는 매음녀들은 첫시작부터 수치심을 시궁창에 던져버리고 나선것이다. 돈냄새에 취하여 수치심을 브래지어로 덮어놓고 생명부지의 남자앞에서 라체를 드러내기를 주저하지 않는  녀자라면 이미 녀자이기를 그만둔 구제불능의 생령들이 아니겠는가?
   브라질 원산인 미모사(mimaosi)라는 한해살이 풀이 있는데 살짝 건드려도 보드라운 잎이 닫히며 아래로 늘어진다. 그 모습이 마치 부끄럼을 잘 타는 소녀같아서 우리 말로 함수초라 부른다. 함수초가 다치면 인차 잎과 가지가 늘어지는것은 기실 바람과 모래 등 외계의 침습과 파괴를 피면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수치심을 헌발싸개처럼 내던지고 있는 녀자들은 함수초를 한번 건드려볼 필요가 있다. 리성도 사유도 없는 한갖 한해살이 풀의 그 미쁜 본능을 한번 흔상해 보는것도 과히 나쁘지는 않을테니까. 아주 부끄러움을 외면한 녀자라면 이미 악녀가 되였다는 것이다. 
   세상엔 또 “수사조(羞死鸟)”라는 아주 재미있는 새도 있다고 한다. 전하는바에는 높은산 깊은숲속에서 서식하는데 일반적으로  온종일《수사료(羞死了) 수사료…》라는 새울음소리만 들을수 있을뿐 그 모습은 좀해서는 볼수 없단다. 사람들이 깊이 잠든후에야 살며시 접근하는데 사람의 몸에 융화될줄도 알고 령혼에 스며들줄도 안다고 한다. 그러다가 사람들에게 발각되면 황공해서 대가리를 푹 떨구고 삽시에 붉은 빛이 물결치듯 온몸에 퍼지는데 일단 대가리를 떨구면 다시 쳐들지 못한단다. 너무 부끄러워 죽어버린것이다.
   미물도 수치심에 죽는다는데 민중앞에 용납못할 죄를 짓고도 제손바닥만한 낯짝때문에《수치》를 느끼는 사람들에 비하면 이 얄망궂은 새의 죽음은 얼마나 감동적일가? 사람이 수치심을 안다는것은 자각과 진보의 향도가 생긴것이고 수치심을 잃었다는것은 타락의 징표이며 만악을 감행하겠다는 무언의 선언이기도 한것이다.
   시인 윤동주의“하늘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는…”라는 유명한 시구가 있다. 사람이 한생을 살면서 어찌 한점 부끄럼없는 완미한 삶을 살수 있으랴만 뒤에서는 남에게 알릴수 없는 짓거리들을 하고도 연단에서는 렴결봉공을 거론하면서 낯간지러운줄 모르고 아닌보살하는 그런 허위만은 없어야 할것이요 최저로 자기 량심에는 부끄럽지 않게 살려는 마음가짐과 그것을 올곧게 실천해 나갈수 있는 담보인 자률만은 있어야 할것이다. 
   만약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수치심을 앞세우고 그 모든 유혹과 대결한다면 기로에 적게 빠질것이고 후회없는 사람다운 인생을 여유롭게 영위하련만…어렵도다. 늘 수치심을 의식하며 자률정신을 기둥으로 자중한다는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로다.
 
 
 
                                   2005. 8. 18 일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820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740 (진언수상록 61)성명과 운명 2017-08-04 0 2655
739 [수필] 늙음에 부치는 편지 2017-07-28 0 3235
738 (진언수상록 60) 이른바 “체면”을 말해본다 2017-07-24 0 2997
737 (진언수상록 59) 무어나 보기나름 2017-07-13 0 2808
736 (진언수상록 58)허상(虛像)에 매달린 허상(虛想)들 2017-07-13 1 3078
735 (진언수상록 57) 명인광고의 효응 2017-07-13 0 2904
734 산가불러 끝없어라 2017-07-11 0 2651
733 “죄”가 영광이 되도다 2017-07-02 0 3190
732 동정심을 말해보다 2017-07-01 0 2740
731 (진언수상록 56) 위험한 망각 2017-06-26 0 3247
730 눈내리는 날에 2017-06-17 0 2583
729 (진언수상록 55)“금전미학” 서론 2017-06-14 0 3025
728 언제나 빛을 건지는 단풍잎처럼 2017-06-05 0 2765
727 (시) 겨울풀을 읊다 2017-06-02 0 3117
726 (시) 그래 바로 그거였어 2017-06-02 0 2975
725 (시) 조화가 2017-06-02 0 2852
724 (진언수상록 54) 량지와 시비감 2017-06-01 0 3206
723 (펌글)위안부로 끌려간 열일곱살 박영심의 기록 2017-05-27 0 4359
722 (진언수상록 52) 썩은 사과배와 광주리 2017-05-23 0 3220
721 (중편소설) 어긋난 연분 2017-05-16 0 3948
‹처음  이전 1 2 3 4 5 6 7 8 9 10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