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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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조선족문화예술 60년 산책 3
2013년 05월 21일 13시 37분  조회:2404  추천:0  작성자: 김희관
 
연변조선족문화예술 60년 산책 3
---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60돐을 맞이하여
 
 
머리말
 
1976년 가을, 연변조선족의 문화예술은 <문화대혁명>이라는 엄동설한을 끝내 이겨냈다. 그러나10년의 엄동설한이 꽁꽁 얼구어 놓은 민족문화예술의 터전은 황페해졌고 인재는 흟어지고 시설은 낙후하고 창작은 침체상태에서 허한 숨을 몰아쉬고 무대는 텅 비여있었다.
 
1978년4월, 조남기동지가 중공길림성위 서기 왕은무동지의  위탁을 받고 3번째로 연변으로 오시여 중공연변주위 서기에 부임하면서 연변의 모든 사업은 <문화대혁명>의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력사를 펼쳐가는 대장정을 시작하였다.
 
1978년6월20일, 중공길림성위의 비준을 받고 연변에서는 <주덕해동지 명예회복 대회>를 열어 <문화대혁명>에서 억울한 루명을 쓰고 서거하신 연변조선족자치주 제1임  주장 주덕해동지의 명예를 회복하였다. 1984년5월, 중공중앙 총서기 호요방동지께서 조선을 방문하고 귀국하여 연변을 시찰하실 때 특별히 주덕해동지에 대한 명예회복상황과 효과에 대해 상세한 보고를 들으시고 가족들을 보살핀상황을 자세히 물으셨다. 호요방동지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주덕해동지는 우리당의 훌륭한 동지이다. 주덕해동지가 서거한후 모주석과 주총리께서 주덕해동지는 좋은 동지라고 하시였다.> 그리고 호요방동지는 길림성위와 연변주위의 령도동지들에게 주덕해동지의 기념비를 세울것을 건의함과 아울러 <주덕해동지 기념기>라는 제사를 써주시였다.
 
1978년 7월,  길림성위의 배려하에 원 중공연변주위 서기처 서기 김문보동지의 명예를 회복하였다. 그는 일찍 1948년 할빈에서 부터 주덕해동지의 비서를 시작으로 줄곧 주덕해 동지의 신변에서 충실히 근무해왔다. <문화대혁명>기간에 <4인방>이 연변에 파견한 검은무리들의 박해속에서도 <주덕해서기는 혁명간부이며 우리당의 훌륭한 민족간부시다. 그는 절대로 반역자가 아니다.>라는 일념하에 끝까지 반항하다가 최후에는 죽음으로 항거 했다. 그는 60년대 연변의 문화예술, 신문방송출판, 과학기술, 위생체육분야를 령도하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후로부터 연변의 문화예술계는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문화대혁명>기간에 비판과 멸시, 억울과 박대를 받은 모든 작가,예술가,문화인들의 명예를 회복해 드리고 그들의 문화예술사업의 권리를 회복해 주고 그들의 작품들을 재인정해 주었다.
 
우리의 문화예술사업은 이러한 시대배경속에서 황야에 새파란 새움이 트듯이 새봄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조선족문예의  새봄
 
1982년9월3일, 우리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30돐을 맞이하게 되였다. 중공연변주위 서기 조남기동지는 문화예술분야에 <가장좋은 작품과 가장좋은 가무프로, 가장좋은 문화행사를 마련하여 자치주 창립 30돐을 경축하자.>고 지시하셨다.
 
1980년부터 중공연변주위와 자치주정부에서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30돐 기념 준비사업으로 연변예술극장, 연길시체육장, 연변도서관, 연변박물관 등 문화시설을 건설하는 등 웅대한 계회을 세우고 실천에 들어갔다. 당시 주,시직속단체의  간부들은 모두 연변예술극장 등 건설현장의 터전닫기작업 등 의무로동에 참가하였다. 그 때 모두들 <일제시대 연길감옥자리를 송두리채 파헤치고 예술극장을 짇게 되였으니 참말로 세상이 바뀌였다.>고 기뻐했다. 이러한 건축공사과정에 조남기서기께서는 낮에는 사무에 바쁘시기에 시간을 짜낼수 없어서 경상적으로 밤중에 시공현장을 일일히 찾아다니면서 문제를 해결해 주고 독려해 주셨다.
 
1980년 봄부터 각 문화예술단체들에서는 자치주 창립 30돐 경축을 위해 여러가지 문화예술행사들을 분주히 준비하기 시작했다. 연변가무단에서는 명절맞이 새프로를 창작하고 연습하느라고 여념이 없었고 연변박물관에서는 <연변인민혁명투쟁사>전람과 <연변조선족민속>전람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연변도서관은 소장한 도서들을 새청사에 진렬할 준비를 다그쳤다. 연변연극단에서는 장춘영화촬영소와 손잡고 영화<새봄>을 창작하고 촬영준비를 다그쳤다. 연변영화발행공사에서는 도시와 영화방영사업과 농촌영화방영대의 복구를 위해 많은 심혈을 기울여 향진은 영화관이 기본상 회복되고 촌마다 방영대가 정기적으로 순회방영하는 질서를 다시 잡았다.
 
조남기서기의 지시하에 중공연변주위 선전부에서는 중앙기록영화촬영소와 합작하여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30돐 맞이 대형기록영화 <연변의 봄>을 촬영하였다. 필자는 당시 중공연변주위 문화신문과에서 근무중이여서 당연히 기록영화<연변의 봄>의 연변측 감독을 맡아 배우와 스탭들의 모든 사항을 돌봐주느라 여념이 없었다. 연길시체육장 시공현장이 정리됨과 동시에 연길시에서는 시민들과 중소학교 학생들이 참가하는 대형 매스껨과 가무행렬을 준비하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1982년 9월3일,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30돐 경축대회가 마침내 새로지은 연길시체육장에서 성대히 거행되였다. 국가민족사무위원회와 길림성정부의 축하속에, 전국에서 찾아오신 역사상 연변에서 항일투쟁과 해방전쟁에 참가했던 로일대 대표들의 축하속에  9.3경축대회는 기쁨과 환희의 도가니속에서 괭장히 치러졌다. 그날 중소학교 학생들은 산뜻한 교복을, 조선족시민들은 정말 오래간만에 화려한 한복을, 군부대 열병식 장병들은 새 군복장을, 주,시당정기관과 사업단위의 간부들은 조남기서기의 지시하에 사상 처음으로 모두 양복을 입었다. 그러데 대부분 간부들이 평생에 처음 입는 양복이라 넥타이를 맬줄을 몰라서 많은  웃음거리를 남겼다. 당시 필자는 그날 기념행사에서 전국각지에서 구름처럼 몰려온 기자들을 가이드하는 임무를 맡았기에 몇일전부터 넥타이 매는 연습을하면서 많이 웃었다. 그러한 웃음도 <9.3의  웃음>으로 기록해 두자.
 
9월5일, <9.3절> 오후부터 개막한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30돐 맞이 민족체육대회>가 고조에 올랐다. 조선족민속씨름경기에서 최후 우승자가 탄생하자 조남기서기는 <연변씨름장사>를 연변황소 잔등에 태우고 운동장을 한바퀴 돌면서 축하해 주셨다. 자치주 창립 30돐 경축행사가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순간이였다. 호랑나비떼 처럼 날아든 사진기자들이 풍년을 맞아 분주히 뛰여다는던 광경이 눈에 선하다.
 
자치주창립30돐 경축기간에 연변예술극장에서는 연변가무단의 정채로운 가무공연이 <새로운 가무, 새로운 민족예술>이라는 찬사속에 성황리에 공연되였으며 연변박물관의 <연변인민혁명투쟁사>전람과 <조선족민속>전람도 수많은 관중들의 관심속에 펼쳐졌다. 연변도서관은 명절을 계기로 새청사에서 독자들을 맞이하면서 즐거움에 겨워있었다. 영화관에서는 연변연극단과 장춘영화촬영소 합작으로 제작된 예술영화 <새봄>과 중공연변주위와 중앙기록영화촬영소에서 합작으로 제자된 기록영화 <연변의 봄>이 상영되여 관중들의 절찬을 받았다. 룡정현, 화룡현, 도문시,훈춘현,왕청현,안도현 등지의 조선족문공단, 문화관들에서도 자치주 창립 30돐을 경축하기 위해 모두 동원되여 새로운 가무프로를 창작,공연하고 가두와 농촌을 찾아 군중문화활돌을 벌렸으며 영화를 방영했다.
 
자치주 창립 30돐 경축활동은 <문화대혁명>이라는 엄동설한을 이겨내고 새봄을 맞은 연변의 문화예술을 검열하는 대축제였다. 9.3경축활동을 도리켜 보면 1952년 9월3일, 연길시 서광장(연길시 복무청사 자리)에서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대회가 있었고 1962년 9월3일, 연길시인민공원 운동장에서 자치주창립 10돐 경축대회가 열려서 자치주 제1임 주장 주덕해 동지가 친히 씨름장사에게 연변황소의 고삐를 넘겨주시고 운동장의 관중들과 함께 춤을 추시였다. 그 사진을 볼 때마다 주덕해주장님이 그립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이라는 엄동설한이 10년간 지속되면서 1972년의 자치주 창립 20돐 경축행사는 말살되고 말았다. <민족문화혈통론>이라는 흑풍이 몰아치면서 우리는 민족의 명절마저 잃게 된것이다. 1982년 9월3일에 치러진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30돐 경축행사는 중국조선족이 중화민족대가정의 일원으로 떳떳히 살아있음을, 유구한 조선족문화와 예술이 아름답고 저력이 있음을 ,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앞으로 번영할것이라는 신념을 세상에 과시했다.  
 
조선족문예의 새로운 도약을 위하여
 
<문예의 새봄>을 맞으면서 특히는 자치주 창립 30주년 기념 문예창작활동을 벌리는 과정에 주위선전부, 주문화국, 주문련, 주작가협회 등 기관과 단체들에서는 문예창작인재의 결핍과 문예작품의 <가물>을 절실히 느끼였다. 하여 주위선전부에서는 주내문예대오와 창작활동에 대한 조사를 여러차례 진행한 기초상에서 중공연변주위와 주정부에 <연변대학에 작가양성반과 신문기자양성반을 꾸릴데 관한 조사보고>를 올렸다. 당시 중공연변주위 조남기 서기는 상기 <보고>에 지대한 관심을 돌리시고 주위선전부에 즉시 착수하여 준비하라는 지시를 내리시였다.
 
1982년 초봄부터 필자는 주위와 선전부의 지시를 받고 우선 길림성위 선전부에 달려가서 <<연변대학에 작가양성반과 신문기자양성반을 꾸릴데 관한 청시>를 올렸다. 그후로는 일주일이 멀다하게 그 <청시>를 결재받으려고 장춘행 렬차를 몇십번 왕복했다. 1983년 양력설날에는 집에 오지않고 성위초대소에 머물렀는데 <설날에 모두 쉬니까 나가라.>는 수모를 당하며 거리에 나가 돌아다니던 때가 기억난다.
 
그런와중에 <길림일보>의 친구가 새로출판된 <길림성사회과학 총서> 한권을 주길래 밤새도록 뒤졌는데 그중에 엄명복(阎明复)이 쓴 <할아버지 엄보항(严宝航)을 회고하여>라는 회고록에 <한락연(韩乐然)은 조선족혁명가이며 연변 룡정태생이다. 그는 저희 할아버지의 계몽도사였다. 그는 일찍히 소련으로 가서 10월사회주의혁명의 영향을 받았고 상해로 가서는 손중산을 만났다. 결국에는 1923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는 동북의 첫 중국공당산 지부의 창시자이시다. 그는 프랑스유학을 한 저명한 미술가이며 우리당의 비밀전선의 중요한 인물의 한사람으로서  통일전선사업에서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라고  종래로 듣어본적이 없는 로일대 조선족혁명가를 소개하였다. 필자는 너무나 기뻐서 낮에는 성위선전부에 다니고 밤이면 그 회고록을 번역을 해서 나중에 <연변문예>잡지에 발표했는데 그것이 우리가 한락연선생을 알게된 첫 계기였다.
 
1983년 3월, 드디여 연변대학 <작가양성반><신문기자양성반><항일간부 자녀 보습반>이 개학했다. 그때 필자는 개학식에서 <앞으로 여러분들이 조선족문단의 중견작가, 신문기자가 되기를 바란다.>는 짤막한 축사를 드렸다. 과연 몇년후 작가반을 졸업한 김경련 우광훈 김철호 리선희 등 대부분이 우리문단의 중견작가가 되였다. 신문기자양성반 졸업생들도 대부분 전주 신문전선의 중견기자편집으로 발돋음했다. 흑룡강성, 료녕성에서 유학 온 졸업생들도 대부분 당지의 중견작가와 기자편집이 되였다.
 
1984년 9월, 원 연변문련 박영일주석의 발의와 주문화국의 적극적인 협조하에 중앙희극학원 <조선족연극배우양성반>이 개학했다. 당시 주문화국 국장인 필자는 학생의 선발과 보도교사 파견, 중앙희극학원 지도부와의 소통과정에서 당의 민족정책의 배려를 심히 느꼈고 우리후대들의 학습열의에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 중앙희극학원 조선족반 졸업생들은 모두 연변으로 귀환하여 몇년간 조선족의 연극무대를 빛내였다. 또한 그들은 연변대학 연극학과의 개강과 학생양성에도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그리하여  이제는 상당한 학술수준을 갖춘 연극학과로 발돋음 하였다.
 
1984년초, 주문화국에서는 전주 문화예술단체에 대한 조사연구를 거쳐 문예단체와 지도부 그리고 연직원대오에 대한 정돈사업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하여 <전주 문화예술단체에 대한 정돈방안>을 제정하여 연변가무단, 연변평극단, 연변박물관, 연변도서관 등 단위에서 시범정돈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실천중에서 그러한 정돈사업은 여러가지 커다란 장애에 부딪치게 되였다. 첫째는 력사상에 여러차례 정치운동과 문예비평중에서 남겨놓은 억울한 사건과 잘못처리된 사건이 너무나도 많아서 단순하게 어느 개인의 명예를 회복한다고 선포해서는 근본상에서 앙금이 풀리지 않는 숙제가 너무나 많았다. 특히 10년이라는 <문화대혁명>이 우리의 문화예술인들의 령혼에 칼로 에이듯이 남겨놓은 상처는 참으로 같이 울어줘도 잘 치유되지 않는것이 많았다. 또한 그러한 암흑의 세월속에 예술의 청춘을 잃은 예술가들은 한의 눈물을 흘리면서 <나의 예술청춘을 돌려달라!>고 호소하는데 참으로 징하게 전율을 느꼈다. 특히 필자의 부친인 원 중공연변주위 서기처 문교서기 김문보동지가 60년대에 많이 관심해 주고 배양했던 로일대 예술가들이 주문화국에 필자를 찾아와 하소연을 할 때는 참으로 참기 어려웠다.
 
그러나 세월은 흘렀고 문화예술은 참신한 인재와 창작사상, 새로운 문예기능과 문예구성을 요구하고 있었다. 당시 주문화국은 우선 <문예사업에 30년이상 종사한 문예일군들에 대한 예우에 관한 결정>을 내리고 해당 로일대 문예일군들의 좌담회를 여러차례 열고 그들의 화끈한 말씀들을 경청했고 많은 억울한 사안에 대해서는 꼭 해결해 드릴것을 약속드리고 <30년 문예사업 종사 영예증서>와 기념품을 증정했다. 또한 그들에게 지난날의 문예성과들을 잘 총화하고 후배양성에 힘써주실것을 부탁드렸다. 그런데 일부 로일대 문예일군들은 1-2년이 모자라서 그러한 대접을 못받아 못내 아쉬워했다. 그래서 그런분들에게는 육속 영예증서가 발급되였다.
 
문예대오 정돈사업의 중요한 내용의 하나는 바로 <업무자질검증(业务考核)>이였다. 당시 주문화국에서는 주내 문화단체와 예술단체의 특성에 맞게 <업무자질검증>에 관한 세부조항을 마련하여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는데 역시 많은 어려움에 부딪쳤다. 그것은 우선 오래동안 이러한 업무에 경험이 부족했고 또한 문화예술단체 자신들도 오래동안 문화예술 업무일군들에 대한 업무교양사업이 중단되여 있었기에 내용이 결핍하고 객관적인 검증기준이 모호했고 또한 로,중,청 3대 연직원들이 모두 같은 기준으로 업무자질을 검증받는데는 문제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결국에는 로일대와 중년세대에 대한 업무검증기준과 청년세대에 대한 업무검증기준을 적당히 조절하여 로일대와 중년세대에 대해서는 목전의 업무수준도 중요하지만 각자 력사상 업무자질 고봉시기의 성과를 참조하기로 했고 청년세대에 대해서는 목전의 업무실력을 엄격히 검증하도록 했다. 문화예술일군들의 업무자질검증사업이 어느정도 마무리 되면서 주문화국에서는 주와 각현시문화예술단체의 지도부와 단체의 구성 및 편제에 대한 정돈사업을 진행하여 소기의 성과를 거었다.
 
당시 우리가 기획한데 의하면 앞으로 몇년간에 <연변문예창작기지>를 건설하여 우리의 문예창작일군들이 별장에서 창작과 문예모임을 할수 있도록 마련하려했다. 연변가무단은 연변가무극원으로 발전시켜 가무프로 위주에서 가극, 무극, 연극, 뮤지컬을 위주로하는 예술의 전당으로 키우자는 구상이였다. 그런데 그러한 꿈은 지금도 실현되지 못하고 있어 참 아쉽다. 당시 연길시에는 연길시구연단과 창극단이 합류한 연길시조선족실험극단이 있었는데 우리가 볼 때 실험극단은 상업연출에서 크게 뒤지는 경향이 있어서 자연자생에 어려움이 있음을 인지하고  아예 그 명칭을 <연길시조선족예술단>으로 개칭했다.
 
그 당시 주문화국에서는 중국조선족의 영화촬영소를 마련하기 위해 <아리랑영화촬영소> 주비사업을 벌리였다. 하여 한편으로는 축구에 얽힌 스토리를 담은 시나리오 <11패11호>와 칼라영화필림을 사들였다. 또한 국가문화부 영화국을 방문하여 영화촬영소 영업집조를 신청했는데 대답은 <국가에서는 기존한 장춘영화촬영소, 상해영화촬영소 등 몇개 국영영화촬영소밖에는 허락할수 없다.>는 싸늘한 답을 주었다. 지금은 세상이 바뀌여 영화촬영사업이 시장경제원리속에서 운영되고 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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