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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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미술관 박물관의 흥기 댓글:  조회:3815  추천:1  2015-11-26
11월 6일, 연변천지조선족민속문화연구원에서는 이도백하장백산관리국 소속 문화방송출판국의 적극적인 지지하에 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장백산미술, 민속예술품전시회를 열었다. 전시회에는 연변의 주요 미술, 서예, 민예품 유관 민간단체 책임자들과 예술가들이 대거 참석했다. 연변민속악단이 조선족민요와 을 불러 장내의 흥겨운 기분을 한층 고조시켰고 이도백하 조선족로인회 로인들도 함께 흥을 돋구었다. 또한 전시장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랑랑이 일전에 피아노를 연주한 장소였고 그가 연주했던 세계적인 명품 그랜드피아노 Steingraeber & Sons가 장백산미술작품, 조선족민예품들과 함께 어울려 전시장내의 문화예술적인 분위기를 한결 고조시켰다. 이번 전시회는 장백산문화를 더욱 생동하게 재현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장백산은 겨레들의 마음속의“성산”이다. 몇천년이래 장백산문화는 수많은 민족들의 의식주행, 관혼상제, 금기서화, 민요무용, 종교신앙 등 전통문화와 민간예술의 성취를 토대로 전승되여 왔다. 개혁개방이래 흥기해온 국내외 의 미술작품들은 주로 장백산의 자연풍경을 위주로하는 미술작품들이다. 이번에 전시한 장백산풍경화 미술작품들도 그러한 전통을 이어받아 장백산풍경화 정품들을 전시하기 위해 많은 심혈을 기울였다. 동시에 전시회 주최측인 천지조선족민속문화연구원에서는 장백산을 우러러 살아온 백의동포의 전통문화와 민간예술을 발굴하고 전승하는 견지에서 우리의 민예품 례하면 물동이 등 생활토기와 고려청자, 분천자기, 이조백자, 해주백자, 오지도기공예품, 청동화로, 국보급자개십장생문양반닫이 등 민예품을 동시에 전시함으로서 장백산전통문화의 내함과 고미술적인 가치를 함께 보여주었다. 10월하순, 천지조선족민속문화연구원에서는 이번 전시회를 더욱 고품격으로 준비하고저 북경의 저명한 조선족화가 김태홍박사를 초청했다. 그는 국가문화부 소속 무대미술평심위원이며 중국의 경전유화가 반열에 오른 미술가이다. 그가 설계하고 제작한 연변가무단의 무극 , 무용서사시 , 가무서사시 의 무대배경은 모두 국가금상을 받았다. 김태홍화백은 기자초대회에서 목전 국내외 미술작품들을 보면서 느낀 감상과 견해를 아래와같이 피력했다. 우선, 화가들은 우리문화와 중화문화의 내함과 전통을 습득하여 옳바른 문화예술적인 관념을 가져야할것이다. 우리 화가들이 백의동포의 전통문화에 대한 일가견이 없이 맹목적으로 붓을 든다면 좋은 미술작품을 기대할수 없다. 둘째, 화가들은 장백산, 두만강, 압록강, 송화강 일대의 산간오지까지 찾아다니면서 산천경개와 백성들의 삶의 참모습을 손수 사생함으로서 소재를 많이 취득하고 를 느끼고 령감을 얻는 원초적인 창작과정을 반복해야 할것이다. 셋째, 도자기, 반닫이 등 유물들은 미술가에게는 아주 좋은 전통문화와 고미술의 본보기이다. 넷째, 중국의 수묵화는 동양화의 뿌리이기에 그 전통을 전승하고 발전시켜야 할것이며 유화에서는 로씨아 등 나라의 현실주의 유화의 전통을 전승하고 발전시키는것이 기본이다. 일부 청년세대 미술학도중에서 맹목적으로 자신도 알수없는 그림에 열중하는데 대해서는 일깨워줘야할것이다. 목전 중국의 문화예술분야에서 톱뉴스는 미술관, 박물관의 흥기이다. 그 주된 원인은 백성들의 의식주행이 기본상 해결된 상황에서, 또한 주식시장이 자주 출렁이고 부동산시장도 상대적인 포화단계에 진입한 현실속에서 백성들은 문화예술품 저장에 관심을 보이게 되였으며 따라서 미술관, 박물관이 새로운 흥분점으로 떠오르고 있으며 미술, 민예품 수집도 중요한 저장수단으로 떠오르고 있다. 국가에서도 이러한 백성들의 욕구에 발맞추어 앞으로 민간에서 운용하는 미술관, 박물관 등 사업을 종용할 뿐만아니라 일정한 수준과 조건에 도달한 미술관, 박물관 등 민간문화예술시설과 단체에 재정적 지원을 해주는 정책도 점차 시달되고 있다. 이러한 형세는 바로 우리 사회가 점차 생계형사회에서 문화예술형사회로 진화하고 있음을 알리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우리가 오래동안 흠모해오던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선진국들의 대중문화현황이 아니겠는가. 천지조선족민속문화연구원 김인국원장이 말한다. “ 본원은 우리의 장백산문화를 전승, 발전시키는데 힘을 보태기위해 장백산관광단지에서 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저희의 바램은 연변각지에 많은 미술관, 박물관이 우후죽순처럼 자라나 새로운 르네상스시대를 맞이했으면 좋겠습니다.”  연변일보 2015-11-25
49    민간예술품 박람회 단상 댓글:  조회:3802  추천:4  2015-09-22
지난 8월14일부터 18일까지 연길시진달래광장 국제회의전람중심에서는 가 열렸다. 필자는 국가에서 각 도시를 순회하면서 진행하는 이번 민간예술품박람회를 견학하면서 많은것을 배우고 느꼈다. 이번 박람회에서 연변천지조선족민속문화연구원은 비록 개원한지 두달밖에 안되지만 경사를 맞았다.  8월16일 저녁, 이번 국가민간예술품박람회의 최고예술품감정사, 북경 CCTV 의 서예, 미술품감정대사(大师)이며 고궁박물관 고급전문가인 선국강(单国强)선생,중국수장가협회비서장이며 도자기감정대사인 형치중(荆治中)선생이 천지민속문화연구원에 광림하였다. 그들은 매우 겸손한 자세로 조선족의 문화예술을 높히 평가하면서 이번 박람회에서는 천지민속문화연구원의 민속예술품들이 단연 제일 주목할만했고 그중에서도 자개로 화려하게 장식된 반닫이는 소수민족민속예술품에서는 보물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또한 1000여년전의  고려청자, 조선왕조시대의 청화백자, 1 9세기의 해주백자, 3천년전부터 대물림해온 물동이 등 민속예술품도 좋다고 평가하면서 금년 11월 북경에서 열리는 전국도자기박람회 초청장을 내놓았다. 더욱 고마운것은 선국강선생이 흥분된 심정으로 기꺼히 붓을 들어
48    랭면옥 추억 댓글:  조회:4350  추천:1  2015-08-21
  1950년 4월의 어느날, 어머님은 우리 형제들을 이끌고 흑룡강성 상지현에서 아버지가 계시는 연길로 이사와 연변지위초대소에 짐을 풀었다. 그날 점심을 먹는데 얼마나 매운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음식은 면발이 질기고 고명은 매웠지만 소고기 편육과 꿩고기 완자는 너무나 맛있었다. 또한 얼음을 띄운 육수는 너무 시원해서 켜도켜도 더 켜고싶었다. 그 점심이 바로 랭면이였다. 중앙소학교에 입학한 필자는 친구들이 많이 생겼다. 그중에 한 학생이 자기네 집에가 놀자고 해서 따라갔다. 그의 집은 바로 서시장 남문 동쪽켠에 자리잡은 “인천랭면옥”이였다. 그때는 점심시간이였는데 손님들이 뜨끈뜨끈한 구들에 길게 놓은 식탁에 마주앉아 랭면을 먹고있었다. 그시절 “삼천리랭면옥”도 유명했다. 50년대 중반에 “인천랭면옥” 맞은켠에 “렬군속랭면옥”이 개업했다. 그래서 연길시에는 한동안 “랭면옥삼국지” 시절이 있었다. 그러다가 50년대말 “인천랭면옥”이 평양으로 이사가면서 “렬군속랭면옥”이 문전성시를 이루기 시작했다. 특히 60년대초, 배고픈 시절에는 “렬군속랭면옥”이 더욱 인기여서 맨날 줄을 길게 늘어서야 했다. 얼마후 “렬군속랭면옥”은 지금의 우전청사자리에 벽돌집을 동서로 길게 짓고 영업을 시작했다. 그때부터 십자거리 맞은켠에 있는 “복무청사랭면관”과 80년대 중반까지 맞대결을 벌렸다. 그후 “렬군속랭면옥” 집터가 허물리고 우전청사가 들어서면서 맞대결은 끝났고 “렬군속랭면옥”의 “사부님”들은 연변과 북경 심지어는 서울까지 “잠행”하면서 그들의 랭면솜씨를 과시했다. 몇년전 복무청사가 사라지면서 “복무청사랭면관”의 “사부님”들도 지금은 각지에서 잠행한다고 한다. 60년대 중반, “렬군속랭면옥”이 이사간후 그 집에서는 새로운 국수가 생산되기 시작되였으니 그것이 바로 조선에서 배워온 “옥수수국수”였다. 민속자료를 공부하다 보면 옛날옛적에 랭면은 한해 농사를 다 짓고 동지섣달을 맞아서야 따뜻한 구들에 앉아 맛볼수 있는 겨울음식이였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랭면은 점차 무더운 여름철의 피서음식이 되였다. 그리고 우리가 연변랭면을 “함흥랭면”으로 알고있던 상식은 오식인것 같다. 왜냐하면 “함흥랭면”의 원체는 해물비빔랭면이라고 하니까 연변랭면이 물랭면인것을 감안하면 맞지 않다. 아무튼 예로부터 무더운 삼복철 음식에는 허한 몸을 보하려고 먹는 삼계탕이나 보신탕도 있지만 그래도 랭면이야말로 수시로 찾아 먹을수 있는 피서음식이여서 지금도 대중에게 인기가 높다. 50년대 초반까지 랭면옥마다 배달을 아주 잘해주었다. 길이가 1메터 넘는 식판에 랭면그릇 10여개를 두줄로 올려놓고 커다란 주전자에는 육수를 담았다. 물론 식초, 고추냉이, 참기름, 일회용저가락도 챙겼다. 배달부 아저씨는 진짜 솜씨가 좋아서 그 무거운 랭면식판을 한쪽 어깨에 메고 자그마한 자전거에 두다리를 일단 걸치기만 하면 그 어떤 골목길이라도 유유히 찾아가군 했다. 그때 육수는 소뼈를 푹 끓이고 다시 여러가지 한약재를 넣어 더 끓여 식힌 구수한 국물이였다. 또한 겨울에 김치움에 벼겨를 가득 넣고 그속에 파묻어놓았던 얼음덩이를 여름에 잘게 깨서 육수에 띄운것도 참 신기했다. 고명은 물론 여러가지가 다 있지만 그중에서 고기완자는 반드시 깨끗히 손질한 꿩을 통채로 뼈쪼시해 삶은것이였고 닭알은 곱게 지져 썰어올린 지단이였다. 그 시절 어른들은 저녁에 쓰딸린극장에서 영화를 구경하고 귀가길에 랭면옥에 들려 소주 한잔 하고 밤참으로 랭면을 먹는 풍속이 있었다. 그래서 랭면옥들이 밤중까지 불을 훤히 밝혔고 고풍기는 쉴새 없이 윙윙 소리내며 돌아가고 가마에는 국수발이 룡트림을 치면서 익어가고 사부들은 다 익은 면발을 수도물에 헹구느라고 여념이 없고 아주머니사부는 국수그릇에 고명을 얹느라고 눈코 뜰 새 없고 뜨거운 방에서는 영화얘기를 하면서 랭면을 기다리는 손님들로 북적거렸는데 참으로 보기 좋았다. 지금은 “순희랭면”, “봉황랭면”, “일품랭면” 등 수많은 랭면옥들이 우후죽순처럼 일떠서면서 참말로 “춘추전국”시대를 맞이했다. 면발도 가지가지고 육수도 가지가지요 고명도 가지가지이다. “순이랭면” 총경리 조광호씨는 이런 말을 했다. “저희 “순희랭면”본점은 연변 각지에 분점을 늘여가면서 순조롭게 경영을 하고있다. 그러나 랭면의 새 맛을 개발하는데는 더욱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랭면의 새 맛을 열심히 개발하는 그의 로고에 박수를 보낸다. 랭면은 무더위와 바쁜 일상에 달아오른 우리들의 몸과 마음을 식혀주는 전통적인 피서음식이다. 랭면의 새 맛이 짙어질수록 우리의 삶도 더 좋아질것이다.  연변일보 2015-8-19
47    민화의 매력 댓글:  조회:4190  추천:0  2015-07-09
  "민화는 우리의 생동한 민속사이다. 필자는 민화의 매력을 점점 더 느끼면서 중소학교학생들의 미술시간에 민화를 보여주고 그리게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민속품 유산들을 정리하던중 병풍에 그려진 여덟폭의 민화를 보면서 너무나 감동을 받아 저도 모르게 필을 들었다. 첫번째 민화의 장면이다. 이른봄, 나으리네 집 앞마당에서는 올해 농사에 쓸 농기구를 만들고 있는 농부들의 다망한 모습이다. 식모가 물동이를 이고 담장 대문을 들어서는데 검은 갓을 쓰고 파란 두루마기를 입은 나으리는 기와집 터마루에 한가히 앉아 부채질을 하고 처녀노비가 소반에 차물을 받쳐들고 조심히 올린다. 두번째 민화에는 농부들이 벼농사를 앞두고 먼저 한전을 가꾸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각시는 물동이에 물을 길어 나르고 신랑은 바가지로 물동이의 물을 퍼서 담배모에 준다. 뒤편에서는 아버님이 이라낄낄 소를 몰아 밭갈이를 한다. 어머님이 새벽부터 밭에 나와 일을 하는 집식구들에게 차려주려고 밥상에 새참을 이고 걸어오고 있다. 저 뒤산 오솔길에는 지게에 땔나무를 가득히 지고 장거리로 가는 농부들의 모습이 생동하다. 세번째 민화에는 농부들이 소를 몰아 논갈이를 하고 괭이로 논판을 고르는 장면이 펼쳐져 있다. 저 뒤편 소나무아래에는 갓을 쓰고 파란색 두루마기를 입은 나으리가 곰방대를 들었다. 빨간옷을 입은 아이는 아마 나으리의 아들인가 보다. 소나무 뒤편에서 머슴이 토기주병을 지고 다가오는데 막걸리의 그윽한 향기가 느껴진다. 네번째 민화는 아마 부처님이 오신날을 그린것같다. 음력 사월초파일, 동자승이 사찰아래 길가에서 시주들을 맞이하고 장옷을 쓴 녀인들도 사찰로 모여드는데 스님은 법고를 신나게 두드려댄다. 오늘따라 저 멀리 수행을 떠났던 스님들도 부처님 오신날을 맞아 사찰로 돌아오고 있다. 다섰번째 민화에는 논에서 김을 매는 농부들과 논을 돌아보는 나으리, 새참을 머리에 인 아낙네와 막걸리주병을 짊어진 머슴이 다리를 건너는 모습이 보이는가하면 저 멀리서 낚시질을 하는 사나이도 있으니 그녀석은 팔자가 꽤나 좋은가보다. 여섰번째 민화에는 음력 오월단오날의 민속이 그려져있다. 단오날, 규슈가 장옷을 쓴채 황소를 타고 조용히 들놀이를 가는데 등짐을 진 머슴이 뒤를 따른다. 저 뒤편에는 비단모자를 쓰고 파란 두루마기를 입은 어린 유생이 부채로 낯을 가리고 말을 탓는데아마도 들놀이가는 규슈를 쫒아가는것이 분명하다. 저멀리 강가에서는 아낙네들이 빨래를 하거나 미역을 감고있다. 일곱번째 민화는 백중을 맞은 마을의 풍경을 그렸다. 이제는 여름철 농사가 다 끝났으니 한가한 백중을 맞았다. 담장으로 둘러쌓인 정원에서 유생들은 정자에 모여 공자왈맹자왈 학문을 나누고 있고 농부들은 저 뒤편 느티나무아래서 장기를 두면서 피서를 하고 저멀리 참외밭 오두막에서는 농부가 졸고 있는데 참외향이 물씬 풍긴다. 여덥번째 민화는 가을타작 장면을 그렸다. 갓을 쓰고 천수목지팡이에 몸을 기댄 나으리가 느티나무밑에 서서 농부들의 타작을 지켜보고 있다. 머슴들이 벼단을 통나무에 내려치면서 타작을 한다. 그 옆에서는 두머슴이 벼짚을 정히 묶는데 아마도 오지독을 굽는 도공이 유약을 만들려고 벼단을 주문한것이리라. 머슴들의 초가집 뒤뜰악에는 장독대가 보이고 저 뒤편 나으리집의 열어놓은 창문으로는 집안의 빨간 옷장이 보인다. 방금 뜰악에 들어선 스님이 나으리에게 인사를 드린다… 상기 민화들은 농경시대에 조상들이 벼농사를 지으면서 유교와 불교를 숭상하며 살아온 민속의 정을 생동하게 그렸다. 민화는 백성들의 생활공간의 장식을 위해 정통회화를 모방하여 민속을 주제로 그린 실용화를 말한다. 조선후기 서민층에서 많이 류행하였으며 속화라고도 불렀다. 민화는 병풍,족자, 벽화로 그려졌다. 민화는 대부분이 정식그림교육을 받지못한 무명화가나 떠돌이 화가들이 그렸으며 서민들의 일상 생활양식과 민속을 그렸기때문에 창의성보다는 되풀이하여 그린것이 많았다. 따라서 민화는 정통회화에 비해 수준이 많이 낮았다.하기에 민화에는 화가의 서명이나 락인이 없다. 민화는 장식장소와 용도에 따라 종류를 달리하는데 대략화조도(花鸟图),어해도(鱼蟹图),작호도(鵲虎图),십장생도(十长生图),산수도(山水图),풍속도 (风俗图),고사도(故事图),문자도(文字图),책가도(冊架图),무속도(巫俗图) 등이 있다. 20세기 60년대초까지만해도 농촌에 가면 여러가지 민화를 볼수 있었는데 지금은 대부분 사라져 희귀품이 되였다. 민화는 우리의 생동한 민속사이다.필자는 민화의 매력을 점점 더 느끼면서 중소학교학생들의 미술시간에 민화를 보여주고 그리게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연변일보 2015-7-8
46    민족의 혼 민속의 정 댓글:  조회:4087  추천:1  2015-06-25
민족의 혼 민속의 정 -김희관 "청소년들에게 민속문화를 전수하는것은 시급한 과제이다. 천지조선족민속연구원이 민족의 혼을 선양하고 민속의 정을 전승하는 길에서 많은 업적을 쌓을것을 기대한다." “지난20년간 저희는 산간벽지와 향진을 돌아다니면서 할아버지 할머님, 아버지 어머님들의 땀방울이 스며들었고 손때가 묻은 민속품을 수집하는데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저희는 오랜 세월의 풍상을 겪은 민속품들을 만날때마다 얼굴이 확끈해나고 가슴이 벅찼으며 어떤때에는 뜨거운 눈물이 울컥할때도 많았습니다. 저희는 이렇게 소중한 민속품들을 여러분들 앞에 전시하면서 여생을 다바쳐 조상들의 민속문화를 잘 지킬것을 다짐합니다.” 단오절, 연변천지조선족민속문화연구원 원장 김인국씨가 연구원 개원식에서 격양된 목소리로 뿜어낸 진담이다.   그가 수집해 놓은 민속품들은 정말 가관이다. 물동이, 매돌, 떡시루, 놋그릇, 떡살, 오지독, 받다디, 주병, 화로, 점적, 고려청자다완, 백자항아라, 분청주병… 아무튼 옛날에 쓰던 민속품들이 죄다 “환생”해 보라는듯이 전시장에 도열해있다. 그러한 민속품들은 멀리는 몇백년전부터 가까이는 30여년전 석탄불을 피워 밥을 지을때까지 집집마다 썼던 부억의 물건들이 모두 있다. 그러한 민속품들을 자세히 보고있느라면 자연스럽게 민속품은 민족의 혼과 민속의 정을 담은 결정체이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어떤 인간들은 민속품을 홀대한다. 속된 말로 민속품은 아무리 많아도 “돈이 안되고” 골동품은 하나라도 잘 굴리면 “큰 돈이 된다”는 속설에 젖어있다. 그런데 김인국씨는 우직하게도 매달의 로임을 다 퍼주면서 앞으로 “돈이 안되는” 민속품만을 모아왔으니 진짜 “현대우공”이라 하겠다. 천지조선족민속연구원의 개원식도 남달랐다. 김인국원장의 개원사가 끝나자 연변시조창단의 선창으로 래빈 모두가 을 목청껏 불렀다. 또한 귀빈들의 축사가 끝나자 중국의 저명한 음악가 동희철선생의 지휘하에 모두들 를 합창하면서 내고향을 지키고 겨레의 넔을 지키고 민속문화를 지킬것을 다졌다.   개원식이 끝나고 이어진 소박한 오찬은 더욱 가관이다. 모두들 그가 수집해온 “개다리소반”에 쑥떡, 설기떡을 받아놓고 막걸리를 곁들어 점심을 드는데 너나없이 “단오절의 진수성찬” 이라고 호평했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민속문화는 아직도 조선반도 민속문화의 락인이 여전히 뚜렸하다. 그리고 우리가 150여년간 이 땅에서 살아오면서 쌓아온 중국특색도 선명하다. 또한 여러 형제민족의 우량한 민속을 따라 배운 흔적도 찾아볼수 있다. 개혁개방의 세파속에서 중국조선족은 커다란 시련을 격고 있다. 현재 200만명 조선족중에서 70여만명은 한국에 나가 있다. 거기에 미국, 일본과 기타 몇십개 나라에서 살아가는 동포들을 다하면100만명은 “해외동포”가 되여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동북3성과 내몽골지역에서 살아오던 몇십만의 조선족동포들이 북경, 산동반도, 상해, 광주등지에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개척하여 살아가고 있다. 하기에 연변과 동북3성 각지에서 고향을 지키고 살아가는 동포들 앞에는 어떻게 민족의 혼을 계속 지켜나갈것이며 어떻게 민속문화를 대물림할것인가하는 과제가 뚜렸하게 제기되고 있다. 천지민속문화연구원은 여러분들에게 만남의 장소가 되여주겠다고 약속했다. 앞으로 민속품을 전시하여 사회를 위해 봉사할것이며 특히는 어린이들에게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들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보여줄것이라고 한다. 또한 민속학자들과 민속문화에 관심이 있는 여러분들을 모시고 겨레의 민속문화를 발굴하고 연구하고 보존할것이며, 민속인재를 양성할것이고문화예술인들의창작활동에도움을 줄것이라고 한다. 청소년들에게 민속문화를 전수하는것은 시급한 과제이다. 지금 적지않는 조선족소학생들이 선생님의 강의를 들을때는 우리말을 쓰지만 저들끼리 놀때는 서로가 한어를 한다고 한다.그뿐만아니라 그들은 물동이가 무었인지, 매돌이 무었인지 모르고 쇠가마로 지은 이밥이 제일 맛있다것은 더욱 모른다.하기에 후대들에게 겨레의 민속문화를 전수해 주어 민족의 혼을 지키는데 도움이 되게해야 할것이다. 천지조선족민속연구원이 민족의 혼을 선양하고 민속의 정을 전승하는 길에서 많은 업적을 쌓을것을 기대한다. 연변일보 6월 24일자  
45    만남 댓글:  조회:3717  추천:3  2015-01-21
며칠전 YBTV로인회모임에서 올해 TV음력설 야회가 31돐을 맞이 한다고 해서 관심을 보였다. 필자는 옛날의 인연 때문인지 매년 설날이 다가 오면 괜히 긴장한다. 올해 TV음력설야회도 흥미진진하게 잘 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TV음력설야회는 남녀로소 시청자 모두를 상대로 제작되는 프로그램인만큼 시청자들의 흥취를 다 만족시키기는 어렵다. 하기에 만점을 받기는 아예 틀린 TV프로그램이다. 옛날에 필자는 TV시청자들이 우리가 방송하는 TV음력설야회에  60점만 주시면 큰절을 올릴 심정이였다.   그래도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누구든지 TV음력설야회를 시청하는데는 모름직이 공동한 기준이 있다는것이다. 그것은 바로 “만남”이다.   첫째, 음력설은 가족식구들의 만남의 명절이다. 음력설은 한해동안 흩어져 바삐 살아오던 부모형제자매들이 고향에 찾아와 부모에게 세배를 올리고 서로 부둥켜안고 반가워하는 대단원의 명절이다. 특히 개혁개방이래 우리의 가정마다 흩어져 살아가는것이 이미 새로운 “생활양식”이 되여버렸다. 부모들은 한국에서 일하시고 아들딸들은 외국에서 유학을 하거나 국내외 어디에서 고달픈 직장생활을 한다. 하기에 음력설의 만남이 더욱 그립다. 그런즉슨 우리의 TV음력설야회는 우선 이러한 동포들의 만남을 축하하고 향수를 달래주는 프로를 잘 놀아줘야 할것이다.   둘째, 전통문예와 현대문예의 만남이다. 시청자들은 고풍스러운 설맞이 세배와 민속놀이, 민요와 현대가요, 아름다운 전통춤과 절주감히 확실하고 현란한 현대무를 함께 보기를 원한다. 또한 과거와 현대를 넘나드는 전대미문의 소품스토리를 잘 엮어내여 시청자들의 값비싼 웃음보를 터트려줄것을 바란다. 필자는 지금도 옛날 TV총감독시절에 방송된 소품 “사촌언니”, 청년호에서 벌린 가야금과 농악대합주 “노들강변” 등 프로그램을 그린다.   셋째, 또 한가지 만남은 력사와 현실의 만남이다. 력사는 겨레의 거울이다. 우리가 살고있는 연변과 동북3성의 여러 집거지는 조상들이 150여년전부터 “피와 땀으로 가꾼 고향”이다.  건국전 우리의 조상들은 중국혁명을 위해 헌신하였고 중국 북방의 수전개발의 선구자였다. 건국후에도 우리는 엮시 떳떳히 살아왔으며 지금은 전국과 전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시청자들은 이러한 력사와 현실속에서 전기적인 스토리를 잘 다듬어 보여주기를 원한다. 이러한 프로그램은 시청자들에게는 재충전의 기회가 될것이며 특히 청소년들에게는 민족사 교양의 기회가 될것이다.   지금은 TV프로그램이 지상파방송, 위성방송, 인터넷방송, 모바일을 타고 있어서 국내외 어디에서든지 우리의 TV음력설야회를 시청할수 있는 세월이 되였다. 하기에 우리의 TV음력설야회는 고향의 된장맛을 그대로 전달하는것도 중요하지만 또 한방면으로는 프로그램의 디자인이 세계의 조류에 어느정도는 발맞춤을 해야할것이다.  2010년말, 미국 워싱톤 국가기자클럽이 주최한 워싱톤주재 전세계기자들의 송년모임에서 길림성 백산시 출신의 조선족 황서(黄西)박사가 영어 코미디연설을 표연해 미국 부통령 바이든과 가자들들이 앙천대소를 연발하게 한 개그프로그램은 바로 우리의 본보기이다.   옛날에는 그믐날 저녁이면 길가의 행인들이 모두 일찍감치 귀가해서 TV음력설야회 시청을 기다렸다. 그 때면 필자도 집식구들과의 만남을 위해  지친 몸을 이끌고 텅빈 거리를 터벅터벅 걸어가던 기억이 생생하다. 
44    장안의 종소리 댓글:  조회:4321  추천:2  2014-09-11
7월26일 아침 6시,  장안에 종소리가 울려퍼진다. 어제 북경에서 서안으로 날아온 필자는 창밖의 종루에서 울려펴지는 종소리가 너무나 반가웠다. 10년전에도 장안의 종소리를 들었으니 말이다. 장안의 종소리는 5천년의 력사를 알리는 종소리이다.  옛날부터 라는 전설이 있다. 서안은 중국력사상 적어도 13대 왕조의 도읍지였다. 그중에서 진나라(秦)는 177년, 서한(西汉)은214年년, 당(唐) 은 272년간 도읍지였다. 장안성(长安城)은 서한시대부터 쌓기 시작했다. 하기에 서안에는 력사유적지와 문물이 너무나 많아서 라는 속담이 있다. 40년전인 1974년 3월29일, 진시황릉에서 동쪽으로 1키로메터 남짓이 떨어진 마을에서 양씨 형제 농민들이 우물을 파다가 갑자기 우물밑바닦이 허물어 지면서 지하의 거대한 함정을 발견했다. 유관당국에서 농민들의 보고를 받고 그 함정을 조사한 결과 또 하나의 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유적을 발견했다.  지금까지 1호,2호,3호,4호 병마용 유적지를 발견하였는데 4호 함정은 앞의 몇 함정의 병마용을 발굴하면서 얻은 이라는 교훈을 거울로 삼아 병마용은 아직 완전히 노출하지 않고 있다. 10년전 필자가 병마용박물관을 찾았을 때는 지금처럼 이렇게 관람자들이 많지 않았고 병마용도 다소 색채가 있어서 립체감과 생동감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색채가 너무 바랬다. 몇년전에는 독일청년 한명이 병마용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워 자신이 병마용이 입은 갑옥과 똑같은 옷을 지어입고 가만히 병마용 갱도에 뛰여들어가 병마용과 함께 서있다가 보안일군에게 들려나오는 웃기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덕에 병마용촌의 농민들은 새로운 전원식 아빠트에 자가용은 물론이고 돈주머니도 두둑하다고 자랑 한다. 오늘도 몇만명의 관광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사진 한장 올바로 찍기 어렵다. 화청지(华清池)는 려산(骊山) 북쪽 기슭에서 용솟음 치는 온천으로써  6천년전부터 온천을 이용한 전설이 있고 3000년전터 황궁의 온천으로 이용된 전설이 있으며 2200년전 진시황이 성지를 내려 화청지온천을 개발한 그때의 목재들이 전시되여 있다. 화청지가 더욱 아름답게 보이는데는 당나라 때 당현종과 양귀비와의 사랑의 비극이야기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가 볼봐에  화청지는  10년전보다 더욱 웅장하고 화려하게 복원되여 참 좋았고 500년전과 300년전에 심었다는 석류나무에 주먹만한 석류들이 주렁주렁 달려있어 참으로 탐스러웠다. 화청지 온천은 1900년 8개 제국주의 나라 군대들이 북경을 쳐들어 올때 자희태후가  피신한곳이기도 하다. 어디 그뿐이랴, 1936년 12월12일 한 밤중, 화청지에 갑자기 총소리가 울리면서 을 주장하는 애국 장령 장학량, 양호성이 을 일으킨 현장이여서 더욱 유명하다. 이번에 필자는 장개석이 총소리를 듣고 급한김에 잠옷에 끌신바람으로 뒤창문을 차고 달아나 불과 15분만에 려산에 올라 절벽 암벽틈사이에 피신했던 현장까지 다 둘러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피식 쓴 웃음을 지었다. 당시 주은래가 중공중앙을 대표하여 장개석과 담판 끝에 공동 항일의 길을 개쳑한것은  위대한 업적으로 남았다. 서안은 또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유석도(儒释道)의 유적지이며 국학(国学)의 보고이다. 대안탑(大雁塔)은 기원652년 현장(玄奘)스님이 간난고초를 이겨내면서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을 보관하기 위해 지은 불탑으로서 지금도 끄떡 없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현장스님의 경력은 후세에 여러가 이야기책으로 전해오다가 명나라 때에는 오승은이 라는 소설을 남김으로서 영원한 옛말이 되였다. 려산(骊山)은 도교의 성지로서 유명하며 종남산(终南山)은 유학자, 스님, 도관들이 은거한 력사가 3천여년이나 되는 성지이며 지금도 산중은사(山中隐士)들이 무려 5천여명이나 된다고 한다. 서안에서 연안으로 가는 도중에는 황제릉(黄帝陵)이 있어 5천년의 력사가 더욱 실감이 난다. 항일의 세월, 서안은 연안과 함께 항일의 후방으로서 항일전선을 지원하기 위해 많은 공헌을 하였다. 당시 연안에서는 무정,김산, 음악가 정륭성,주덕해 등 조선족혁명가들이 분투했다. 10년전 필자가 연안을 방문했을 때 그들의 업적을 기리면서 보탑산(宝塔山)에 묵도를 드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서안에서는 동방의 피카소라고 불리는 조선족 화가 한락연이 국공통일전선에서 활약하였다. 또한 광복군 제2지대가 주둔하는 기간에는 가극 을 공연하여 서안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얼마전에는 광복군 제2지대 기념비가 락성되였다. 장안의 종소리는 개혁개방의 새시대를  알리는 종소리이다. 서안은 서한 때부터 동방과 중앙아시아, 중동, 유럽을 잊는 실크로드(丝绸之路)의 시발점이였다. 개혁개방시대에 들어선 서안은 다시한번 중국 서부개발의 전초지로서  실크로로드의 새로운 시발점이 되기 위해 용트림을 하고 있다. 몇년전부터 세계적인 기업 삼성그룹이 서안에 진출하면서 서안은 일약 세계가 주목하는 21세기 산업도시로 탈바꿈했다. 신라의 문인 최치원이 장안에 유학을 와서 고독한 심정을 한시 에 담아 자신을 달래였는데 이제는 서안 시가지 어디에 가나 삼성전자광고와  드라마 포스터, 지어는 이라는 광고까지 즐비해 참으로 야륵한 느낌이다. 장안의 종소리는 의 종소리이다. 2007년부터 화청지에서는  려산을 실제 배경으로 하고 화청지를 실제 무대로 한 대형무극 를 공연하고 있다.  는 기원 806년, 당나라 시인 백거의가 양귀비와 당현종의 사랑의 비극을 쓴 장편서사시 에 근거하여 창작한 대형무극이다. 매년4월부터 10월까지 공연을 해 왔는데 이미 1500여차례 공연에 근 200만명 관중이 관람했다. 필자는 지난세월 국내외에서 수많은 공연을 봐왔는데 이렇게 려산이라는 대자연을 배경으로 하고 그것도 당나라 때 양귀비와 당현종이 실제 사랑에 빠졌던 화청지에서 무극 를 공연한다는것은 참으로 무대예술사에서 새로운 창거가 아닐수 없다는 느낌이다. 처음에는 관객이 뜨음했다는데 이제는 국내외 관광객들이 그 비싼 표 한장 구하기가 라고 아우성이다. 력사상의 을 그 력사의 현장에서 예술로  승화시키는것, 그 감탄과 매력은 글로서는 다 전할수 없다.  장안의 종소리는 그렇게 필자의 심금을 파고 든다.  
43    내두산촌의 겨레들 댓글:  조회:3255  추천:1  2014-09-04
  7월 4일, 우리 일행은 백두산아래 첫동네라고 불리는 안도현 이도백하진 내두산촌을 방문했다.   내두산촌(奶头山村) 입구에 도착하자 이미 텅 비운지 오래된 너와집이 눈에 확 띄였다. 우리 일행은 너도나도 핸드폰과 카메라를 꺼내들고 파란 이끼가 두텁게 자란 너와집을 이리저리 찍어댔다. 자세히 보니 그 너와집은 우선 당지 백두산 원시림에서 찍어낸 소나무로 귀틀집을 짓고 그위에 너와(나무기와)를 얹은 농가였는데 이미 버려진지 오래다. 이제는 이런 너와집을 더는 찾아볼수 없는으니 이것만으로도 다행이다.   내두산촌 로인협회 김종국회장께서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시였다. 김회장님의 말씀에 의하면 옛날에 여기는 인기척이 전혀 없는 원시림지대였다. 1920년초부터 조선의 삼수갑산사람들이 살곳을 찾아 이곳 원시림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여 이 산골 저 골짜기에 숨어들어 황무지를 개간하고 농사를 지었다. 1936년경에 왜놈들은 백두산원시림에 근거지를 개척한 항일유격대를 소탕하기 위해 화룡에서 100여명 규모의 자위단을 조직해 대두산촌에 주둔시키고 부근 산속에 흩어져사는 농가들을 모두 내두산촌집단부락으로 집중시켰다. 그 때부터 내두산촌은 점차 큰부락으로 변모했다. 그후 내두촌의 겨레들은 세월과 더블어 살아오면서 그 어떠한 역경에서도 겨레의 혼불을 지키면서 살아왔다. 김회장님의 말씀이 우리의 회심의 웃음을 자아냈다.   오후에 백두산에 올라 저 멀리 보이는 내두산을 바라보니 진짜 같아 놀라웠다   우리가 김회장님에께 현재 내두산촌 겨레들의 삶에 대해 물었다. 김회장님께서는 숙연해지면서 잠깐 말머리를 찾더니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개혁개방은 이 산골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동네사람들 특히는 젊은이들이 도시로, 외국으로 떠나면서 농가호가 줄고 인구가 줄어 마을이 많이 조용해 졌다. 그래도 우리는 30여년전 중공연변주위 조남기서기님께서 내두산촌을 시찰하실 때 하신 말씀  라는 지시를 우리는 지금도 지키고 있다. 우리는 외지사람들이 아무리 몰려와도 내두산촌 본마을에는 못들어온다고 딱 금을 긋고 지키고 있다. 김회장의 말씀을 듣는순간 우리들의 가슴이 물클했다. 필자는 북바치는 열기를 참으면서 김회장님의 두손을 꼭 잡아드렸다.   김회장님은 우리를 내두산촌회관으로 안내했다. 깨끗하게 차려진 회관내에 들어서자  무대에는 장고, 북, 물동이, 가대기 등 전통가무 소품들이 즐비하게 차려져있고  벽에는 몇년간 전통문예활동 성과를 담은 사진과 상장들이 정연하게 걸려있다. 100여석의 관중석 뒤면에 줄지어 서있는 책장에는 여러가지 도서가 빼곡히 차있어 참으로 훌륭한 이라 감탄했다.   김회장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었는가? 첫째는 향토애이다. 김회장님의 고향을 사수라려는 굳은 결심과 실천은 참으로 경의롭다. 그와 반면에 주내 많은 전통적인 겨레의 마을들이 텅비거나 이 주인행세를 하는것이 현실이다. 둘째, 할아버지께서 개쳑하여 대물리한 논과 밭을 내놓았다. 몇년전 필자가 만난 연길시교의 농민들이 고 하소연하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세째, 겨레의 전통문화의 터전을 잃었으니 농악놀이는 어느 마당에서 놀아야 하나요! 그러니 허전할수 밖에야. 내두산촌 김회장님의 말씀이 우리게 주는 교훈은 참으로 심각하다. 우리는 이땅에서 살아가면서 앞으로 의 열두고개길을 심사숙고해야 할것이다.  
42    청백리는 부자 댓글:  조회:4363  추천:3  2014-08-30
요즘 신화통신 뉴스에는 련속 거물급 가 잡혔다는 소식이 실리고 있다. 백성들은 그런 뉴스를 보면서 한편으로는 쾌재를 부르면서도 한편으로는 진작 그래야 했었다고 평을 단다. 공무원과 사회상의 공인들은 청백리가 되여야 한다. 청백리는 권력을 백성들을 위해 행사하는것은 물론이고 또한 청렴(淸廉)• 근검(勤儉)• 도덕(道德)• 경효(敬孝)• 인의(仁義) 등의 덕목을 겸비해야 한다. 권력은 백성들이 부여한 정치,경제,문화,인문적인 파워이다. 하기에 권력을 올바르게 쓰려면 늘쌍 백성들의 소원을 명기하고 권력을 지혜롭고 절도있게 행사해야 할것이다. 만약에 권력행사 와중에 추호의 사심이라도 발동한다면 권력은 곧바로 독즙을 산출하게 될것이며 어느 때 가서든지 그 후과는 독버섯으로 돋아나 세상에 드러날것이다. 지금은 옛날의 독버섯도 청산하는 세월이라 그리알고 수중의 권력을 행사해야 할것이다. 청렴은 청백리의 인간성의 본질이다. 백성의 공복이 청렴하려면 공과 사를 엄격히 분별할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할것이며 또한 고도의 자각성이 있어야 할것이다. 금전과 부화타락 앞에서 눈앞이 흐려지고 군침을 간수할수 없어 또한 을 으로 오판하고 게춤에 꿰찬다면 결국은 쇠고랑을 면치못할것이다. 근검은 청백리의 생활습관이다. 백성의 공복은 의식주행, 공익사업, 사회교제 과정에 항상 근검절약을 창도하고 자신부터 그렇게 처사해야 할것이다. 아무리 경제가 번영하고 살 맛이 나는 사회라고 해도 근검절약은 청백리들의 미덕이 되야할것이며 사회적으로도 근검절약의 풍조를 양산해야 할것이다. 도덕은 청백리의 기본소질이다. 백성의 공복이 사회에서 공인하는 미덕을 두루 갗추지 못하고 는 평을 받는다면 청백리가 될수 없다. 청백리는 백성이 자신을 으로 뫼셔야 한다는 심리는 아예 없고 내가 는 미풍양속을 가슴깊이 아로 새겨야 도덕이 있는 청백리가 될것이다. 경효는 청백리의 례의이다. 청백리는 백성을 부모로 뫼시고 그들을 위해 공손히 몸과 마음을 다 바치며 설명절,단오,로인절,추석 등 민속명절 때에는 자신이 대접을 받느라 야단법석을 떨것이 아니라 백성들을 찾아가 절을 올리고 다과를 같이 하면서 고충을 귀담아 듣고 적절한 해답을 드려야할것이다. 인의는 청백리의 신조이다. 개혁개방에 대한 신념, 조화사회건설에 대한 신념, 백성들이 바라는 태평성대을 이룰수 있다는 신념이 바록 그것이다. 인의가 있는 청백리는 항상 백성들에게 새로운 전망을 펼쳐주기위해 열심히 두발로 뛸것이다. 청백리가 상기의 모든것을 갗춘다면 그는 부자이다. 백성들의 민심을 얻은 부자, 백성들이 위해 좋은 일을 많이한 부자, 어떠한 세파속에서도 발편잠을 잘수 있는 부자이다. 1962년 6월, 경애하는 주은래총리께서는 연변에 오시여 우리겨레들을 따뜻하게 위문해주시였다. 특히 주은래총리께서는 신풍대대 최죽송농민의 집을 찾아 구들에 앉으시여 최죽송과 벼풍산경험을 담론하면서 라고 최죽송농민을 높이 칭찬하시였다. 어찌 그뿐이랴. 주은래총리께서는 주덕해주장의 사업보고 석상에서 자신은 여러번 기운 와이셔츠를 입고계시면서 오히려 연변의 간부들이 젊고 옷도 깨끗히 잘 입었다고 칭찬하시였다. 또한 연변가무단의 가무공연을 보실때에는 자신이 입장권을 사는 청렴을 보여주셨다. 주은래총리는 바로 백성들이 우러러보는 청백리이시며 역시 50년지기 로당원인 필자가 가장 흠모하는 위대한 청백리이시다.
41    우리 말 우리 글 댓글:  조회:5513  추천:4  2014-06-12
그때는 우리 연변자치주 창립 60돐을 맞아 경축행사가 많을 때였다. 도문에서 장고축제가 열린다고 하여 아침 일찍 친구들과 함께 비를 무릅쓰고 도문강변으로 달려 갔다. 한손에는 우선을 추켜들고 한손으로는 카메라를 받들고 어서 진행되기를 학수고대하며 기다리던 중 드디여 개막식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대회의 사회자가 사회는 물론 시정부 지도자의 축사마저 한어로 하는 것이다. 연변조선민족자치주 창립 60돐 기념행사인데 이렇게 해서야… 다운 된 기분을 눅잦히고 이튿날 그래도 희망을 품고 왕청현의 상모축제를 보러 달려갔다. 역시 그 모양이다. 사회자는 힘차게 한어로 사회하고 현정부 지도자의 축하연설도 한어였다. 그래서 또 한번 섭섭했다.    1995년 8월, 필자는 서울에서 귀한 손님을 만났다. 쿠바에서 오신 헤로니모 임(임은조)씨이다. 임선생의 조부모는 1905년 멕시코로 이주하였는데 그들이 바로 1903년부터 인천항에서 하와이와 아메리카 여러나라들의 사탕수수농장으로 팔려간 조선인 로동자들의 후예인 것이다. 1926년 쿠바에서 태어난 그는 피델 카스트로, 체 게바라 등과 함께 쿠바혁명에 참가한 인물이며 카스트로와는 동갑내기이자 아바나대 법대 동기동창이다. 쿠바혁명에 이바지한 공로와 능력을 인정받아 쿠바혁명정부의 농림부 차관을 지낸 그에게  필자는 반갑게 인사를 드리고 질문을 했다. “우리말 우리글을 아십니까?” 임선생의 통역이 스페인어로 통역을 했다. 그랬더니 임선생은 그야말로 똑똑한 발음으로  “엄마, 김치, 아리랑”를 연발했다. 훗날, 그는 몇 백명밖에 안되는 동포들에게 우리말 우리글 우리민족의 전통문화을 보급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이고있다고 전해왔다.    우리는 우리말 우리글에 대한 자부감을 잃지 말아야 한다. 세계적으로 수천가지에 달하는 언어문자들 중 우리 말과 글은 13번째로 그 사용자 수가 많은 언어문자이다. 또한 국내 외에서 찬란한 문화와 기적을 창조하고 전파하고 기록하는데에 있어서도 위대한 업적을 쌓아온 언어문자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말 우리글은 본 민족언어일 뿐만아니라 “외국어”의 역할도 하고 있으니 일거 양득인 셈이다. 필자는 지난 세월 조선, 한국, 일본, 미국,호주, 홍콩 등 나라와 지역을 방문하면서 그 어떤 곳에서든 우리말 우리글로 상대방과 자유롭게 소통을 할수 있다는 것을 느꼈는데 너무 자랑스러웠고 무한한 긍지감과 자호감을 느꼈다.   우리는 우리말 우리글을 자녀와 후배들에게 라고 가르쳐 대대손손 이어가게 해야할 것이다. 만족의 경우를 보자. 역사 속에서 한 획을 굵게 그은 그 거대한 대청제국을 호령하던 만족, 그들은 현재 자신들의 언어와 문자를 모두 잃어버리고 결국 한어와 한자에 동화되고 말았다. 그러니 민족의 문화도 대가 끊어지는 지경에 처해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주지하다 싶이 료녕성 한 일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유전자는 분명 조선족임이 틀림이 없는데 우리언어와 문자를 전혀 모르니 제구실을 못할 수밖에 없는것 이다. 그러니 우리말 우리글을 잊으면 다 잃는것이 아닌가?   특히 조선족 공무원들은 앞장서서 우리말 우리글을 굳게 지키고 잘 사용하여야 할 것이다. 요즘도 여러 행사에 참석해 보면 조선족 공무원들이 무엇이 두려운지 조선말로 사회하고 발언하기를 꺼려하는 기색이 역역하다. 참 안됐다. 중국에서 가장 큰 조선족집거지이고 중국조선족문화의 고장인 연변에서 조선족공무원들이 우리말 우리글을 멀리하면 과연 누가 우리말 우리글을 지킬 수 있다는 말인가? 다행이도 2014년 3월25일자로 주 인대에서는 “조선어문자의 날”을 설정할데 관한 결정을 내렸다. 조선족공무원들은 이러한 법규을 잘 인지하고 떳떳이 우리말 우리글을 잘 하는 전제 하에서 한어의 사용도 잘 하기를 바란다.   얼마전 국제뉴스에서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매일 우리글로 일기를 쓴다는 소식을 접하고 참으로 뭉클한 감동을 받았다. 우리도 그래야 할 것이다. 해란강닷컴  
40    연변조선족문화예술 60년 산책 5 댓글:  조회:5980  추천:2  2013-08-09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60돐을 맞으며     머리말   TV, 영화,사진 등 영상문화의 본질은 새로운 영상을 창조하여 시청자들을 새로운 비전을 주는것이다. 그러자면 PD와 제작진은 우선 새로운 정치,경제,문화,사회환경을 제때에 포착하는 안광이 있어야 할것이며 그솟에서 새로운 영상을 창조해내야 할것이다. 우리는 사진,영화,TV, 컴퓨터영상,애니메이션,모바일,게임 등 영상문화에서 아직 약세다.  21세기는 영상문화의 시대이며 앞으로 인류의 문화형태는 점점 더 영상문화에 기대고 영상문화로 표연하고 영상문화로 기록하게 된다. 하기에 우리는 앞으로 더욱 우수한 영상문화인재를 키우고 더욱 참신한 아이디어를 발굴하면서 영상문화의 새시대를 열어가야 할것이다.   TV영상문화의 초등생이 되여   1986년 4월부터 필자는 연변TV방송국 국장에 발령이 나서 이제부터는 영상문화를 전공해야 했다. 필자는 부임하기전에 우선 어머님을 모시고 어머님의 고향 한국 경상북도 대구부근에 있는 청송을 방문하기 위해 출국방문길에 올랐다. 그때 중국조선족 공무원으로는 한국방문이 필자가 첫사람이였다. 그 때는 한국을 가자면 반드시 홍콩을 거쳐 가야 하는데 당시 홍콩은 아직 귀환되지않았기에 우선 북경에 들려 영국대사관에서 홍콩방문비자를 받아야 했다. 홍콩에서는 화국호텔에 몇일을 투숙해서 유람을 하면서 대기하다가 4월16일 대한항공편으로 서울에 도착했다. 어머님께서 48년만에 고향을 방문하기에 감격하시것은 당연한 일이였다. 동행한 필자도 많은것을 보고 감동했다. 또한 KBS에서 약 2개월간의 연수를 받을수 있어서 귀국해서 연변의 TV방송사업을 발전시키는데 커다란 도움이 되였다.   7월초 귀국전야 한국올림픽운동위원회 제17차 아세아운동회(亚运会)준비위원회  문화식전국장의 요청으로 서로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 김국장은 나는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자신있게 그렇게 해드리겠다고 흔쾌히 대답했다. 나는 그러한 홍보물을 북경에 가지고 와서 중앙정부에 실수없이 교부하고 연변으로 귀가했다. 약 한달후 어느날 아침 중앙인민방송국의 에서 는 뉴스가 터져나왔다. 그순간 나는 머리가 썽해나는 감각을 느끼면서 중국을 위해, 어머님의 고향을 위해 내가 민간사자 역할을 했다는 생각에 감격했다.   7월14일 , 나는 연변TV방송국 국장에 부임하여 영상문화사업의 새여정을 시작했다. 지난 70년대 중반부터 연변TV방송국의 창업자들은 몇년간의 간난신고를 거쳐 중국조선족의 TV방송국을 창설했다. 그들의 로고는 중국조선족 문화예술사에 길이 빛날것이다.   나는 연변TV방송국에 부임한후 한동안 조사연구사업을 벌렸다. 결과 우리의 TV방송설비가 아날로그인것은 물론이고 설비가 전업수준에서 거리가 멀고도 낙후하며 게다가 노화가 심하고 더우기 많은 시설들이 부족했다. TV프로그램을 보면 아이디어,동영상,색채,구성 등 여러면에서 아직은 걸음마 단계에 있어서 시청자들의 영상문화에 대한 요구를 만족시키기에는 거리가 멀었다. 가장 중요한것은 기자,편집,TV기술대오가 아직은 TV전업지식이 부족하고 주요하게는 실천에서 더듬으며 배우는 체험단계에 처해 있었다. 그 당시 내가 미국,일본,한국을 방문하면서 TV영상문화를 주의깊게 고찰하고 연수를 받은 지식과 정보는 상술한 과제들을 풀어가는데 다소 추동력이 되였다.   1977년과 1988년 TV음력설야회는 커다란 시험대였다. 당시 내가 생각하는 의 아이디어는 음악,무용,소품 3대 지주프로에서 을 체현하는것이다. 나는 은 인간의 감동을 최대한 담아낼수 있는 커다란 이라고 생각했다. 엄동설한과 따스한 봄날의 만남, 오래동안 헤엊졌던 부모형제들지간의 만남, 전통문예와 현대문예의 만남 등이다. 이러한 이라는  아이디어는 TV음력설야회로 하여금 영상으로 할말이 많게 해주었다. 그리고 TV음력설야회가 반드시 TV스튜디오에서만 제작되는것이 아니라 TV카메라를 봄부터 겨울까지 야외에 돌려 좋은 풍경,좋은 야외프로를 미리 축척하는 내공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안도현 신흥촌의 , 청년호에서 전주의 300여명 가무배우들을 동원해서 찍은 김성삼의 가야금독주 등 프로들은 좋은 반응을 보였다. , 기타합주와 노래 등 음악프로도 이여서 좋은 효과를 보았다. 무용프로는 되도록 민속무용에 중점을 두었고 순수 무용프로도 좋지만 되도록 백댄서식으로 무용의 출연기회를 넓혔다. 그리고 소품프로는 시대의 맥박을 잘 짚어 시청자들의 웃음을 자아내는 과정에 동감을 하는 프로그램으로 자리매김을 했다. 그때 소품을 통해 만들어진 신조어가 바로 등 이다. 1988년 TV음력설야회이 중앙 CCTV전국TV음력설야회 스페셜방송에서 첫프로로 방송이 되였다. 얼마후 CCTV에서 이 내려와서 연변TV방송국에는 경사가 났다.   뉴스프로는 TV방송의 눈동자이다. 1987년5월말의 어느날 오후, 당시 연길비행장에서 발생한 을 정찰하던 공안일군들이 급히 저희들을 찾아와서 범죄자가 도주하고 있는데 그의 사진을 TV방송에 방송해 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나는 그 공안일군더러 우리는 저녁6시반30분 방송개시을 약 40분을 앞두고 공안일군이 직접방송하는 특보뉴스를 긴장하게 제작하여 제시간에 방송을 했다. 3일후 그 범인이 잡혔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그 TV방송을 본 하남가두의 할머니들이 거리를 순찰하다가 굶어서 밥을 먹으려고 손목시계를 파는 범죄자를 즉각 알아보고 잡았다는것이다. 6월말,연변예술극장에서 국가 공안부와 길림성정부에서 개최한  가 성대히 열렸다. 그 공안일군들은 이 되였다. 당시 국가 공안부 령도동지가 이번 파안과정은 라고 선포했다. 참, 그렇게까지 될줄은 정말 몰랐다. 기막힌 일이다. 그날 오후 대회에 참석했던 길림성 성장 왕충우(王忠禹 후날에는 국무원 비서장, 전국정협 부주석 역임)동지께서 친히  연변TV방송국을 찾아 우리를 격려해 주시였다.   1991년1월, 강택민주석이 연변을 시찰할 때였다. 엄동설한에 강주석일행이 훈춘방천을 시찰하면서 높은 관망탑에 올랐다. 그런데 중앙뉴스매체 기자들만 관망탑까지 따라 올라가고 지방의 기자들은 소외되였다. 연변TV의 홍길남기자(현재 길림신문사 사장)은 울분을 참고 관망탑아래 눈판에 기여들어가 손가락에 동상을 입으면서 TV카메라를 추켜들고 강주석의 시찰장면을 잘 촬영했다. 결과 CCTV에서는 자기네 기자의 TV뉴스화면을 못쓰고 우리의 뉴스화면을 쓰게 되였다.   1992년6월, 나는 연변의 중러변경의 개방과 변경무역이 흑룡강성에 뒤지는것을 감지하고 홍길남,윤상룡기자를 인솔해 수분하,흑하와 러시아 아무르시 등 지역을 취재하여 특별뉴스를 두주일간 방송함으로써 시청자들에게 참신한 소식과 정보를 제공했고  의  뉴스효과를 보았다. 그때부터 연변의 뻐스가 보따리장수들을 싣고 수분하를 왕복했다.   TV문화의 국제협력시대를 열어   TV영상사업은 국제협력이 아주 필요한 문화령역이다. 1987년 여름, 우리가 일본NHK방송사 제쟉진을 초청하여 다큐프로를 공동제작하던 때만해도 국제협력사업은 아주 어려운 일이였다. 그 때 NHK방송사는 벌써 위성방송을 시작하느라고 분주했고 우리와 함께 제작한 프로를 위성방송으로 방송했다. 그후 그들의 초청으로 필자는 NHK방송사를 방문하여 많은것을 보고 배웠다.   그해 겨울 우리는 한국의 유명한 한복디자이너 이영희여사를 초청하여 처음으로 을 진행하고 그 TV실황을 방송 했는데 그야말로 연변의 한복들에게 한복디자이너로 발전하는 계몽의 계기가 되였다. 지금 이영희여사는 프랑스 빠리에서 유명한 한복디자이너가 되였다.   1991년9월 17일, 연변TV방송국은 제작진은 밤 12시반에 연변예술극장에서 한국 MBC문화방송국 연변방문예술단의 공연프로를 영상록화하는 전대미문의 작업을 했다. 그당시 한국의 톱가수들인 주현미 최진희 김미애 김완선 이상은 등이 무대에 올랐고 국민MC 리덕화가 사회를 했다. 사실 이번 공연행사는 그 전해 여름 필자가 서울에서 MBC방송국을 방문할 당시 협의한 TV문화교류사업인데 당시 중한수교가 아직 이루에 지지 않았고 중한문화는 꿈도 못꾸는 시기여서 무대공연과 영상록화 허가를 받는데 많은 난항을 겪었다. 지금보면 그 때 진행된 연변TV방송과 한국MBC문화방송의 TV문화교류행사는 가 중국대지를 휩쓰는 첫신호탄이였다. 몇년후 MBC문화방송이 제작한 TV드라마 가 처음으로 중국관중들에게서 커다란 히트를 쳤다. 그 드리마 시나리오의 중국어대본도 중앙CCTV의 부탁으로 연변TV방송의 김련란 등이 번역한것이다.   또한 우리는 평양과 서울에 아나운서들을 파견하여 견학과 연수를 받게 하였을 뿐만아니라 기타 여러TV프로의 국제협력을 펼쳐나갔다.   위성방송시대를 맞으면서   1997년 필자는 연구에 참여하여 을 집필하면서 는 취지의 제안을 했다. 그때가 어제 같은데 연변위성TV방송이 벌써 6년이 되였다.   연변위성방송은 당과 국가의 민족정책의 혜택이다. 2003년6월, 중앙의 유관 지도자가 연변을 시찰할 때 연변의 조선어 라디오TV방송사업의 새로운 국면을 열어갈데 관한 지시를 내리면서 연변위성방송사업은 국가의 의 일환으로 되였했다. 2006년8월10일, 연변위성방송은 정식으로 동북아의 하늘에 전파를 발사하면서 조선어 위성방송의 새시대를 열었다. 사실 위성방송은 성,시,자치구급이상에서만이 할수 있는 방송인데 우리는 지구급이면서도 위성방송을 할수 있어서 특혜를 누리는것이다.   연변위성TV방송은 중국조선족의 위성방송이다. 연변위성TV방송은 연변이라는 지리적인 지역을 넘어 국내 각지에 살고 있는 조선족을 대상으로 하는 위성방송이다. 하기에 연변위성방송 뉴스프로는 중국조선족의 새로운 기상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고, 두만강지역개발과 장길도선도구건설 실황, 우리의 력사와 전통문화를 실은 TV매거진, 우리생활의 이모저모를 보여주는 등 프로는 중국조선족의 정치,경제,문화,청소년,사회 등 각방면의 새기상을 생동하게 전해주고 있다. 또한 등 문예프로는 우리의 전통문화와 문화유산을 배경으로 21세기 중국조선족문화의 진수를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연변위성방송은 중국의 뉴스와 문화를 조선어TV방송으로 전파하는 창구이다. 연변위성방송은 CCTV방송의 뉴스와 사회교양프로, 다큐, 드라마 등 우수한 프로들을 조선어로 역제하여 방송함으로서 국내조선족들에게는 물론이고 동북아의 조선어 TV프로  시청자들에게 중국의 소식과 문화를 전파하는 사명도 수행하고 있다. 그 와중에 해외에서 유학,사업,노무를 하고 있는 조선족동포들에게 고향의 소식을 전해주는 메신저역할도 잘 하고 있다.   위성방송의 핵심적인 기능은 와이드앵글(넓을 시각)에 있다. 위성방송은 보다 넓은 세상을 취재대상으로 하고 있고 보다 넓은 세상에 새소식과 참신한 문화를 전파하기 위해 하는 방송이다. 하기에 연변위성방송은 앞으로 중국조선족 동포들이 살아가고 있는곳이라면 국내외 그 어디라도 찾아가서 카메라로 대화를 할것이다.   위성방송은 하늘에서 대지를 내려바 보는 방송인만큼 21세기를 살아가는 중국조선족동포들의 이야기를 더욱 심각하게 내려다 보고 그중에서 참신하고  다이나믹한 뉴스들를 제때에 전파해주어야 할것이다. 또한 중국조선족문화의 새기상을 제때에 파악하여 그것을 다 같이 향수할수 있도록 배려해야 할것이다.   위성방송은 국내외에 시청자들을 두고 있다는것을 잊지말아야 할것이다. 국내에서 조선족동포들은 물론이고 조선어를 배우는 형제민족시청자들도 있다. 또한 동북아지역의 조선어시청자들이 우리의 위성방송을 지켜보고 있음을 명기해야 할것이다. 그러한 시청자들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서는 위성방송을 위성안테나, 인터넷, 케이블방송을 통해 다 시청할수 있도록 더욱 많은 노력을 기울려야 할것이다.   연변은 중국조선족문화의 이다. 또한 TV사업의 본질은 영상문화이다. 하기에 우리는 중국조선족동포들을 위해 뉴스와 참신한 조선족문화를 TV영상으로 전파해드려야할 사명을 지니고 있다. 35년전 연변TV방송국이 개국하면서 전국의 지구급에서는 처음으로 이러한 역할을 시작했었는데 지금은 연변위성방송도 지구급에서 선참이라니 참 뿌듯하다. 자고로 이라 했다. 연변위성방송이 중국조선족문화 의 특색이 짙은 TV프로를 많이 개발하고 제작하여 국내외 광대한 시청자들 마음속의 샛별이 되기를 바라는바이다.   영상으로 기록하는 우리의 100년사   TV다큐프로는 TV방송의 허브이다. 1992년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40돐을 맞아 필자가 기획하고 연변력사연구소 소장 권립교수가 집필한 연변조선족백년사 다큐멘타리 는 우리의 백년사를 영상으로 제작하는 첫시작이였다. 이러한 영상작업은 필자가 과 을 기획하고 주필을 맡아 출판하는 용기를 주었다. 또한 1999년11월에는 그러한 성과작들을 기반으로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을 열어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중국조선족 100년사 영상작업은 두만강일대 연변조선족 고촌락고찰사업(古村落考察事业)으로 이어지면서 150여년전부터 두만강북안으로 이주하여 살아온 우리 조상들의 발자취를 몇년간 현지답사하였다. 우리는 훈춘시 경신진 회령봉에서 화룡시 숭선까지 무릇 두만강가의 마을이면 모두 현지답사를 하고 그중에서 오래된 기와집이면 더우기 자세하게 영상과 문자기록을 하였다. 그중에서 옛날의 화룡욕 명동촌(지금의 룡정시 명동촌)을 몇차례 자세히 고찰하면서 반일 저항시인 윤동주의 옛생가를 다시 고증하는 작업을 집중적으로 벌렸다. 결과 1958년 윤동주생가가 허물리여 기와는 누구네가 벗겨가고 목재는 누구네가 사갔는가를 파악하고 그 막새기와를 찾는데 주력하여 끝내 무궁화, 십자가, 태극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진 막새기와를 찾아냈다. 이 막새기와는 전문가들의 고증을 커쳐 윤동주생가의  막새기와 진품으로 확정 받았다.  2002년 5월, 필자는 연변TV방송국 최선화PD의 제작진과 함께 TV다큐 을 제작하여 국제대상을 받았다.   2011년 4월,우리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창시자이신 주덕해주장님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했다. 필자는 2010년초부터  대하다큐멘타리 프로의 고문을 맡아 동분서주했다. 당시 전국정치협상회의 부주석 조남기장군님께서 우리에게 라고 하시면서 우리의 초청에 기꺼히 응하시여 북경에서 주덕해주장님에 대한 추모의 정을 담은 TV화면을 제작하여 제작진에 보내주시였다. 2011년 1월중순 제작진은 외지 취재에 났다. 필자는 제작진과 함께 장춘에 들려 주덕해주장님의 자녀들을 만났다. 필자의 아버지는 1948년 봄부터 할빈에서 주덕해동지의 비서로 발탁되여 그의를 따라 연변에 와서 당위사업을 했다. 하기에 필자는 주덕해의 자녀들과 함께 주위관사에서 가까히 살았다. 이라는 대동란은 우리들을 모두 뿔뿔히 흩어지게 했다. 이번 장춘에서의 만남은 40여년만의 만남이여서 20세좌우에서 흩어진 우리들이 모두 60여세의 로인들의 만남이 되였다.   올해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60돐을 맞이하게 된다. 1952년 9월3일 오후, 필자는 중앙소학교 3학년 학생이여서 동창들과 함께 연길시 서광장에서 3만여명의 시민들이 모여 성대하게 열린 에(1955년 8월 길림성정부에서 연변조선민족자치구를 연변조선조선족자치주로 변경한다는 지시를 하달했다.) 합류했고 저녁에는 초롱불시가행진을 하면서 즐거웠다. 요즘은 그러한 옛날을 회고하며서 주정부에서 지시한 제작에 참여하고 있다.   문화는 민족의 혈맥이고 령혼이며 정신의 터전이다. 우리가 경제를 부흥시키면서 을 잊을수 없다. 인간이 경제를 부흥하는 최종적 목표는 문화로 쌓아올린 문명한 생활터전이기 때문이다. 영상문화는 우리의 문화를 더욱 윤택하게 해 주고 있다.   고희를 맞으면서 필자는 농사를 배운것이 후회없고 신문기자 생활이 재미있었고  문화행정과 TV방송에서 열심히 봉사한 나날이 그립다. 작년 여름부터는 연변인물연구회에서 문화예술인물편 주필을 맡아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60돐을 맞아 출판할 과 앞으로 출판예정인 을 위해 열심히 뛰고 있다. 문화예술인물들을 많이 만나고 그들의 업적들을 정리하면서 연변조선족문화예술의 앞날이 밝을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39    연변조선족문예 60년 산책 4 댓글:  조회:4923  추천:3  2013-08-05
----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60돐을 맞으며   머리말   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은 새싹을 티우기 시작했다. 당시 주내의 작가협회, 문련의 각 협회, 신문사, 출판사, 라디오TV방송국, 주와 8개현시의 가무단,예술단,문화관 등 문예창작단체와 문예표연단체들에서는 창작열이 들끓기 시작하여 창작모임, 새작품 발표회 등 모임이 여기저기서 열리는 새국면이 조성되였다. 당시 주문화국에서는 이 무르익어가고 있는 좋은 력사적 기회를 잘 파악하고 사회주의문예의 의 새국면을 조성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기울려 문예계를 위해 봉사하였다.     잊을수 없는  제1차   1984년 4월중순, 주문화국에서는 룡정시영화발행공사 구락부에서 를 일주일간 열었다. 당시 주문화국 직속 문예단체의 창작일군들은 문론이고 각현시의 문예창작일군들도 모두 초청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그도 그럴것이, 이게 몇년만에 열리는 큰잔치인데. 당시 우리는 문예창작좌담회을 열게된 취지를 말씀드리면서 고 선언했다.   지금 기억 나는 필자의 한단락의 발언을 적는다. “ 은 우리의 을  페허로 전락시켰다. 저희는 존경하는 아버지를 잃었고 여러분은 당신들과 고락을 함께 하면서 연변조선족의 문예사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전 중공연변주위 김문보서기를 잃었다. 저명한 작곡가 최삼명선생께서 저를 데리고 밤을 새면서 강가에서 고기잡이를 하면서 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문화행정은 당의 문예방침을 어김없이 관철하여 여러분들의 문예창작의 불씨를 활활타오르게 도와드리고 여러분들을 위해 봉사하는 의무밖에는 아무것도 바라는것이 없다.>   는 서서히 열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낮에는 회의장에서 앞다투어 얘기를 주고받고 저녁에는 모두들 침실에서 밤중까지 열변을 토하는데 좌담회 후근조에서는 여러분들에게 밤참에 를 섬기느라 꽤나 바빴다.   총화모임에서 필자는 주문화국을 대표하여 을 선포하면서 여러분들이 이번의 열기를 문예창작의 에네르기로 바꾸어 좋은 문예작품을 선보일것을 주문했다.   후날에 당시 문예창작좌담회에 참석했던 여러 문예창작일군들은
38    김태홍화백의 향수 댓글:  조회:4439  추천:3  2012-10-08
《여러분! 오늘 고향에서 저의 미술작품전을 가지게 되여 매우 기쁩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말로 답사를 드리겠습니다.》   김태홍화백의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인사말이다. 9월 29일, 《중국조선족의 저명한 화가, 무대미술설계사, 김태홍선생 무대미술설계도, 유화, 속사 작품전》이 중공연변주위 선전부, 연변주문화국 주관, 연변가무단, 연변박물관의 주최하에 성대히 열렸다. 김태홍화백은 영예의 금상과 눈부신 광환이 너무나 많은 예술가이다. 미술학박사, 국가 1급무대미술설계사,중앙발레무단 무대미술설계사,유화가,국가문화부 《문화상》평심위원 등이다. 그는 무릇 국내 동서남북에서 중대한 발레극, 무극, 가무극이 기획되고있다면 그중 태반의 무대설계는 모두 김태홍화백의 몫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그는 항상 《남정북전》하느라 바쁘다. 그러면서도 이번에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60돐을 맞이하여 그는 만사를 제쳐놓고 부인과 함께 작년 6월부터 고향에 와 지금까지 눌러앉아 고향을 그리고 또 그렸다. 김태홍화백은 연변조선족자치주창립 60돐 기념대회에서 2만 5000명 청년학생들이 공연한 광장무 《연변찬가》의 배경미술 총설계사를 담당했다. 김태홍화백은 일찍 국외에 명성을 날렸다. 80년대 초, 영국의 발레무용단이 중국무대에 발레무극 《실비아》를 올리게 되였는데 그 어마어마한 무대배경을 운송하기 어려워 중국에서 제작할수 있는가고 문의를 했다. 그래서 젊은 김태홍화백이 나섰다. 그의 무대미술작품은 영국사람들을 놀래웠고 공연도 성공을 거두었다. 영국사람들은 김태홍화백의 무대미술설계도를 가장 귀중한 선물로 받아갔다. 그후 김태홍은 인민대회당 무대의 만리장성을 설계제작했고 인민대회당에 거폭의 《황토고원》을 헌정하는 등 무수한 명작들을 내놓았다. 김태홍화백은 무대미술의 거장이다. 전국 방방곡곡의 풍경과 문화를 소재로 창작된 무대미술설계도를 보면 화폭은 크지 않지만 그 내함이 심오하다는것은 금방 느낄수 있다. 바로 그 자그마한 설계도 한장한장이 진짜 무대배경으로 그려질 때는 수십필의 화포(画布)가 이어지면서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실경같은 배경으로 다시 태여난다. 하기에 이번에 전시된 200여폭의 무대미술설계도를 실제 제작하는데는 수천필의 화폭을 그려내야 했다. 그 거대한 무대의 실경을 상상해보라. 김태홍화백은 중국조선족무대예술의 한복판에 서있다. 1990년 일본류학을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연변가무단의 무극 《춘향전》의 무대미술설계를 성공적으로 완성한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무용서사시 《장백의 정》, 무용서사시 《들끓는 장백산》, 대형가무《노래하노라, 장백산》 등 가무예술 경전작들의 무대미술설계를 모두 성취함으로써 그의 천재적인 예술성과들은 모두 나라에서 수여하는 금상, 대상을 받아안았다. 또한 1990년 연변TV방송국의 음력설야회를 위해 제작했던 거폭의 배경화 《장백림해》도 불후의 명작이다. 그중에서 필자가 무릎을 치며 감탄한 작품은 《장백의 정》의 배경화 《뿌리》이다. 땅속에 백년천년 묻혀있는 뿌리는 언제나 흑속에서 빛을 보지 못하고 묵묵히 고목을 떠받들고있것만 김화백은 그 뿌리에 강렬한 빛을 조명해줌으로써 민족문화의 뿌리를 위해 찬가를 불렀다. 김태홍화백은 항상 향수(乡愁)에 푹 젖어있다. 김태홍화백은 흑룡강성 녕안현 태생이며 중소학교시절은 연길에서 지냈다. 당시 그와 필자는 연변주위 관사에 같이 살면서 공부도 같이 하고 딱지 치기도 같이 하던 송아지친구이다. 1958년 그는 맏형님의 부름을 받아 북경으로 공부하러 가서 중앙미술학원부속중학교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미술공부를 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밑거름이 되여 중앙희극학원 무대미술설계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후날에 그는 일본 도꾜로 건너가 일본대학 예술부 희극연구소에서 미술학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 그는 7남매를 모두 훌륭한 인재로 키워주신 부모님을 항상 그린다. 그의 아버지는 해방후 처음으로 연변행정지도를 그린 엘리트였고 그의 어머님은 매우 자애로운분이시였다. 김화백은 향수를 달래기 위해 10년전 룡정시 석정 종성골에 초가집을 마련하고 마을의 농민들과 형제처럼 지낸다. 처음에 농민형제들이 외따른 골짜기에서 TV방송을 시청하지 못하는 고초를 헤아려 1만원을 들여 TV케이블을 끌어다주기도 했다. 이번 미술전 개막식에도 그는 종성골의 촌주임과 농민형제들을 귀빈으로 초청해 같이 향수를 달랬다. 이번에 전시한 유화작품들중에서 연변농촌을 반영한 미술작품들은 바로 종성마을을 배경으로 그려낸 화폭들이다. 또한 그가 여러차례 신강에 가서 무대미술창작을 하는 과정에 체험한 위글족형제들의 농촌생활상을 그토록 생동하게 그려낸 미술작품들도 매우 인상적이다. 그는 지금도 북경에 사는것이 민족문화예술적으로 몹시 고독하다고 한다. 향수는 그의 미술생애의 원천이다. 김태홍화백의 왕성한 미술창작활동은 스케치(소묘)라는 아주 기초적인 작업을 기본태로 하고있다. 그는 어디를 가나 스케치북을 가지고 다니면서 인물속사와 배경스케취를 꾸준히 함으로써 그의 마음은 그냥 흥분해있고 손은 그냥 움직이고있다. 그의 말인즉 《매일 그리면 손이 익는다》는것이다. 김태홍화백은 고희를 맞으면서 미술생애에 대한 체험담을 이렇게 쓰고있다. 《흥취로 시작한 미술이 60년 갑자를 맞이하면서 머리에 남는것이라면 미술은 시대적 정신의 표상이고 인간의 개인적, 집단적 의식과 행위가 미술작품에 반영되여 완성되지 않나 고민해봅니다.》 그는 이미 애니메이션 미술가로 두각을 나타내고있는 사랑하는 딸 미연이를 대견하게 바라보면서 말한다. 《미술가는 입으로 말할것이 아니라 미술작품으로 말해야 한다.》 필자는 김태홍화백의 빛나는 성취에 어떻게 찬사를 보낼가 고민했다. 《김태홍화백, 당신은 겨레의 미술가이다!》  
37    조상들의 숨소리를 들려주는 민속화책 댓글:  조회:4706  추천:6  2012-09-12
    조상들의 숨소리를 들려주는 《중국조선족민속》화책이 자치주 창립 60돐을 맞이하여 연변중국조선족생태문화발전회의 성과작으로 출판됐다. 민속화책은 중국조선족의 애환의 력사를 민속의 시각으로 재현한 민속문화의 대집성이여서 독자들에게 “그래, 우리가 그렇게 살아왔지…” 하면서 감동을 주고있다.  민속화책은 중국조선족의 150여년의 력사를 배경으로 우리의 민속문화를 정연하게 펼쳐내고있다. 서문에 이어 생산풍속, 주거습속, 식생활습속, 복식습속, 인생의례, 명절놀이, 민간신앙, 민속가무 등 8장으로 구성되였다. 서문을 장식한 진귀한 력사사진들은 상투를 한 조상들이 쪽배를 타고 두만강을 위태롭게 건너와 피와 땀으로 이 땅을 개간하고 지키고 건설한 력사가 생동하게 담겨있다. 생산풍속편에서는 겨레의 농민영웅 김시룡이 랭상모판을 가꾸는 사진을 포함해 농부네 온 가족이 씨 뿌리고 김매고 타작하는 장면들이 아주 생동하게 실려있다. 주거편에서는 편안하고 깨끗한 한옥을, 식생활편에서는 소박하면서도 정성껏 깔끔하게 조리된 우리 민족의 전통음식을, 복식편에서는 정갈하고 운치가 넘치는 한복을 소개하였다. 그외 인생의례, 명절놀이, 민간신앙, 민속가 등은 우리의 민족정신과 전통민족문화의 진수를 잘 보여주고있어 문화인으로서 재충전을 받는 느낌이다.  민속이란, 겨레들이 기나긴 세월속에 함께 농사를 짓고 의식주행관혼상제와 마당놀이를 함께 하면서 굳힌 풍속습관이다. 하기에 민속은 민족의 형성, 번영발전과 동행하면서 부단히 보충되고 발전하면서 한개 민족의 유전자를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으로 된다. 때문에 우리 민족의 민속은 우리 선조들의 삶의 지혜의 대집성이며 우리 말, 우리 글과 함께 민족문화의 디딤돌로 된다.  “에루와 어절씨구 좋구나 좋네. 장백산도 환호하고 해란강도 노래하네. 에루와 두둥실 장고를 울리세. 연변조선족자치구 세웠네.” 60년전 연길시 서광장에서 울려 퍼진 연변조선족자치구 창립대회 축가이다. 1952년 9월 3일 오후, 필자는 중앙소학교 동창생들과 함께 연길시 서광장에서 열린 연변조선족자치구 창립대회에 초롱불을 들고 참가해 이 축가를 목청껏 부르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데 벌써 60년 세월이 흘러 우리 함께 자치주 창립 60돐 환갑잔치를 화려하게 치렀다. 이 또한 거대한 민속행사가 아니겠는가.  민속은 세월의 흐름속에서 부단히 진화한다. 농경시대에 대다수 민중의 의식주가 넉넉하지 않던 기나긴 세월에는 지극히 소박하면서도 진솔한 민속이 전부였다. 일제통치하에서는 그러한 민속마저 짓밟혀 행해지지 못하고 심지어 금기로 봉해졌었다. 해방후, 더우기 자치주 창립후 우리의 의식주가 넉넉해지면서 우리의 민속은 새 시대에 걸맞는 양상으로 발전해오면서 우리의 새 생활에 동반자가 되였다.  지금 우리는 개혁개방의 혜택으로 중국과 세계 방방곡곡에서 살아가고있다. 이러한 현실속에서 우리의 생활이 국내외의 새 문명, 새 생활의 충격을 받는것도 사실이다. 그 와중에 가장 취약한것 또한 민속문화이다. 얼마전 필자는 어느 결혼식에 초대되여 새로운 민속현상을 볼수 있었다. 결혼식이 다 끝나갈무렵, 사돈 량가의 방자들이 서로 만나 무엇인가 수군수군하더니 례식장 저 뒤편에 새로 음식상 2개가 차려지기 시작한다. 잠시후 두집 사돈들이 음식상에 다가가서 서로 인사를 하고 대좌를 한다. 그러더니 신랑편의 큰 사돈이 운을 뗀다. “사돈어르신 여러분, 모두들 반갑습니다. 오늘 결혼식이 잘 치러지고 해서 참 기쁩니다. 그리고 이 바쁜 세월에 우리의 례식도 간소화하는것이 어떻겠는가 해서 건의합니다. 우리 새 며느리가 3일만에 친정을 찾는 행사를 간소화해서 이 자리에서 사돈 서로가 인사를 하는것으로 매듭을 짓는것이 어떻겠는가 해서 이렇게 새로 음식상을 보았습니다…” 인사말씀이 끝나자 상대 사돈들도 별 반문이 없이 “좋습니다. 그렇게 합시다”라고 하면서 서로 술잔을 마주친다. 참 희한한 일이다. 필자는 그 광경을 보면서 가타부타를 떠나 우선 충격을 받았다. 《중국조선족민속》화책은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는 교과서이다. 앞으로 우리가 국내외 그 어디에서 살아가든지 우리의 말과 글, 우리의 민속문화를 지키면서 살아감으로써 민족문화의 자각성과 자신감을 확보하고 소프트파워를 부단히 키워 민족의 정체성을 다지고 민족정신을 고양하는데 실질적인 도움이 되기를 기원한다.
36    장인정신 댓글:  조회:4430  추천:0  2012-05-30
봄을 맞아 룡정시 명동촌일대를 려행하면서 아쉬운 마음을 금할수 없었다. 왜냐하면 백년을 자랑하던 옛날 기와집들이 대부분 사라져서 고풍스러운 전통부락의 진면모를 다시는 볼수 없게 되였기때문이다. 그래도 기와집을 사랑하고 기와집을 손수 짓는 장인이 있어서 다행이다. 그는 연길시 의란진 춘흥촌 춘광마을에 살고있는 대목장(大木匠) 황호림이다. 그가 손수 지은 기와집과 정원을 둘러보자. 우선 정원의 대문은 돌각담을 두르고 “호림석고헌(浩林石古轩)”이라는 액자를 머리에 이고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푸르른 록음이 깃든 정원에 고풍스러운 기와집이 백년 묵은 거부기처럼 버티고있다. 기와집을 한바퀴 둘러보니 기둥과 대들보 등 목재들의 사괘맞춤이 모두 잘되여 쇠못 하나 쓰지 않았다. 지붕의 검은 기와는 물론이고 막새기와까지 가쯘하게 맞춰져서 참으로 보기 좋다. 기와집에 들어서면 여기저기 방들이 있어서 열두칸 기와집이 부럽지 않다. 정지방에 들어서면 놀랍게도 샘물터가 나타난다. 샘물터에는 산에서 에워왔다는 맑은 샘물이 흐르고있는데 그 샘물에는 금붕어와 민물고기들이 놀고있다. 샘물터 주변에는 바위돌이 우뚝 서있고 푸르른 넝쿨들이 물가에 드리워졌다. 방안을 둘러보니 온돌주변에는 나무조각품,돌조각품.종이공예품들이 즐비하고 또한 옛날 재봉침 등 수많은 골동품을 전시해 민속박물관을 련상케 한다. 샘물터옆에는 멀리서 수집해왔다는 오석(乌石)들을 배렬해놓았는데 그 무거운 오석들을 양성한다고 잣기름을 잘 발라서 먹음직할 정도로 탐스럽다. 앞뜨락에는 나무가 무성하고 화초가 만발해서 봄부터 꽃이 피기 시작하면 가을까지 꽃이 지지 않는다. 필자가 작년 봄 진황도에 부탁해 선물한 무궁화꽃이 피기 시작해서 역시 보기좋다. 작은 돌다리를 넘어 남쪽뜨락으로 가면 우선 장인의 공방이 나타난다. 그 공방에는 나무조각, 석조각, 금속조각과 목수, 석장, 야장에 쓰는 모든 도구가 갖추어져있다. 공방 한쪽에는 황목장이 알심들여 제작한 꽃가마가 시집갈 새각시를 기다린지 오래다. 공방앞에는 이제 막 불을 지펴도 될듯한 토기가마가 누워있는데 그것을 잘 짓기 위해서 강서성 경덕진의 도공을 초청해 배웠다고 하니 참 놀랍다. 필자가 황목장에게 이러한 재간들을 어떻게 배웠는가 물었다. 황목장은 할아버지가 옛날에 목수,석수,야장을 하시면서 많은 기술을 소유했고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그러한 재간들을 물려받아 목장, 석장, 야장을 하면서 한옥을 짓고 소수레를 메우고 가장집물을 짰다고 한다. 지난 세기 70년대부터 어린 황목장은 아버지의 일손을 도우면서 어깨너머로 목수, 석수, 야장 기술을 익혔다. 후날에 황목장은 과수원에서 일하면서 과일나무재배는 물론이고 용접과 선반 기술까지 익혀서 다면수 장인으로 자라났다. 몇년전 그는 여기저기에서 한옥짓기, 소수레메우기 등 목장,석장,야장 일을 하면서 품바꿈으로 모아놓은 목재와 석재가 많아지자 옛날 할아버지, 할머님이 사시던 기와집이 생각나서 그 기와집 흑백사진을 보고 또 보면서 “이제는 나도 기와집을 지어야지…” 하고 마음먹었다. 황목장은 그렇게 자신의 꿈을 이루기 시작했다. 일년의 악전고투끝에 황목장의 초가집은 기와집으로 탈바꿈했고 뜨락이 정리되면서 아름다운 한옥정원풍경을 이루었다. 그 소문이 퍼지면서 이제는 결혼하는 청춘남녀들의 웨딩촬영정원이 되였다. 장인은 농경시대에서 자라난 명장들이다. 공업화시대가 열리기전에 장인들은 농촌과 향진에서 대접받은 기술자들이였다. 그들은 한옥을 짓고 물레방아를 걸고 소수레를 메우고 소철을 신기고 통나무를 파서 함지를 만들고 흙을 빚어서 토기와 오지독을 구워내고 길쌈을 매서 베를 짜고 누에를 쳐서 비단을 짜고 싹바늘질로 한복을 짓고했다. 지금은 공업화 지어는 후공업화시대라고 하지만 장인들은 물론이고 그들의 장인정신은 더욱 필요하다. 현재 미국, 독일, 프랑스, 이딸리아, 스위스, 일본 등 선진국들에는 아직도 “백년가게”가 많아 수작업으로 명품브랜드 양복, 가방, 구두, 시계, 악기, 와인, 바비인형 등을 생산하는것이 바로 그 반증이다. 장인정신이란 장인들이 기술을 정통하려는 철저한 직업정신을 말한다. 예로부터 우리는 일정한 직업에 전념하거나 한가지 기술을 전공하여 그 일에 정통한 사람을 “장인”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정신속에 녹아있는 철저한 장인정신과 직업륜리의 표현이다. 이러한 장인정신은 지금도 계승해야 할 정신적재부이다. 1800여년전부터 도자기장인들이 창조한 경덕진도자기는 중국을 차이나(CHINA)로 부르게 했고 미국 벤실바니아주의 독일 이민자 장인 마틴이 창업한 마틴기타는 179년을 진화하면서 세계적인 명품기타가 되였다. 현재 우리는 많은 장인들의 대가 끊겼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60돐을 맞으면서 “장인축제”를 열어 장인정신을 고취하고 여러 분야의 장인들을 장려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문화평론가)
35    문화영극원을 지날 때마다 댓글:  조회:4343  추천:3  2012-04-23
풍향계 문화영극원 앞을 지날 때마다       봄바람이 훈훈히 불어오니 영화관이나 극장에 구경을 가고 싶은데 하남대교부근의 문화영극원을 지날 때마다 그 건물은 컴컴하게 서 있어서 섭섭하다.   문화영극원은 유래가 깊다. 필자는 소시절 바로 그 극장앞에 있는 주위관사에 살았기에 그런 기억이 생생하다. 1952년 봄, 옛날의 성결교회당 건물을 허물고 를 건설하기 시작하여 이듬해 가을 가 준공되였다. 그때부터   앞은 밤마다 전등불이 환하게 밝았고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주말이면 당정기관간부들이 사교무을 추었고 평시에는 영화상영과 가무공연이 끝기지 않았다. 당시 조선의 창극단, 예술단의 공연이 자주 있었다. 특히 연변가무단의 대합창가 문화영극원에서 공연되였는데 필자는 그렇게 성대한 대합창을 감상한것이 평생 잊혀지지 않는다.   1954년 겨울, 서장참관단을 환영하는 행사가 문화구락부(후날에 문화영극원으로 개칭)에서 있었다. 필자는 담장넘어로 농노들이 라마와 농노주들을 업고 붉은 주단위를 걸어 극장으로 모시는 광경을 보았다. 그 이틑날, 서장대표단이 중앙소학교를 참관한다고 해서 학교에서는 수업을 잠시 중지하고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눈싸움을 하면서 놀게해서 즐거웠던 기억이 생생하다. 1985년 여름, 서장자치구에서 오신 귀빈을 영접해 두만강을 유람하면서 그 얘기를 했더니 그분은  깔깔 웃으면서 고 했다.   1980년대 초부터 이 다시 찾아 오면서 이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1984년 여름,  제1차 예술절이 문화영극원과 예술극장에서 막을 올렸다. 그중에서 문화영극원 무대에서 공연한 리광수 작 연극은 절찬을 받았다.      지금 생각해봐도 작가가 그때      벌써     문제를 다루어 연극을 무대에 올렸다는 자체가 대단한 발견이였다. 그러나 그 연극에 대상을 주는데는 여러가지 평론이 있었다. 당시 예술절의 주관인 필자는 이렇게 새로운 주제, 새로운 스토리, 새로운 연기수법이야말로 예술절을 빚내는 작품이라고 주장하면서 대상을 건의했다. 지금봐도 그 판단은 옳은것이였다.   영화관 극장은 대중적인 이다. 이전에 시민들은 경상적으로 영화관, 극장에서 반갑게 만나 서로 례의를 갖추고 우정을 쌓았으며 함께 영화나 연극, 가무공연을 감상하고 사진,미술,공예전시회를 보면서 문화예술의 향기를 향수했으며 공공질서의식도 키웠다. 지금은 옛날의 쓰딸린극장(인민영화관), 영신극장(동방홍극장,동방극장) 문화영극원이 다 페업하고 연변예술극장은 로동자문화궁이라는 간판을 덛붙혀는데도 저녁에 영화나 공연이 있는 날짜는 별로 없다. 하기에  사람마다 집에서 TV나 컴퓨터를 마주하고 있으니 대중적인 은 썰렁하다. 세상은 개혁개방의 시대이고 열린사회여서 대중적인 문화의식, 공공질서의식, 공공도덕의식이 필수적인 세상인데 이렇게 세월을 지내서 되는지 모르겠다.   지난 세월 필자가 뉴욕의 브로드웨이, 시드니의 오페라하우스, 서울의 예술의 전당 등 극장가에서 경험한데 의하면 모두 그렇게 바쁜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저녁이면 만사를 제치고 물밀듯이 찾아와 뮤지컬,교향악,음악콘서트,연극을 감상하면서 스트레스를 풀고 예술의 향연을 마시는 광경을 보면서 참 감탄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러한 극장들은 일년 365일 하루도 문을 닫지 않는다는 것이다. 얼마전 미국의 뮤지컬가 상해 등지에서 6개월간 200회 공연을 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놀랐다. 역시 CCTV의 유명한 사회자 백암송이 한 말이 옳다. 국내에는 아직은 같은 뮤지컬과 같은 경전적 영화가 없다. 하기에 아무리 극장을 화려하게 건축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요즘은 영화이 10여년만에 다시 3D영화로 부활해 더욱 인기라는데 영화관에서 커다란 스크린으로 봤으면 좋겠다..   문화는 민족령혼의 터전이다. 몇년래 나라에서 추진하고 있는 문화체제개혁의  목적은 대중의 문화적 소질을 향상시키고 문화예술에 대한 흠상수준을 향상시켜  대중의 령혼과 정감을 더욱 고상한 경계에로 이끌어 주기 위한것이다.   앞으로 문화사업에서 국영 가무단,극단과 영화관은 물론이고 민간 문화산업들이 많이 창업하여 영화관,극장,민속공연장 등 문화예술시설들이 잘 운영됨으로써 에 새로운 문화예술의 봄바람이 불기를 바란다. (문화평론가)
34    우리 문화의 발자취 댓글:  조회:4816  추천:2  2012-03-14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60돐을 맞이하면서 지난 60여년간 우리 문화의 발자취를 한번 돌이켜보는것이 앞날을 헤쳐나가는데 도움이 될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필을 들었다.  1945년 8월 중순, 연변은 일제의 통치하에서 해방을 맞았다. 9월, “간도예문협회”가 창립되여 문예활동을 시작하였다. 10월 15일, “이스크라가극단”이 창립되여 연극“에밀레종”, 바라이데“해방의 종소리”를 공연하기 시작하여 순회공연까지 했다. 그때부터 연길시의 쓰딸린극장은 가무와 연극 공연, 영화상영으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1949년 2월, 주덕해동지가 중공연변지위 서기로 부임해서 4월 1일에 동북조선인민대학 즉 후날의 연변대학을 창립하고 문화예술단체들을 정돈하면서 민족 교육과 문화예술 사업의 기반을 닦았다.  1950년 1월, 중공연변지위 선전부장 최채동지의 창의하에 연변문예연구회가 설립되였고 그 토대에서 1953년 7월, 연변문학예술계련합회(문련)를 창립하였다. 1959년부터 1961년 기간 연변의 각 현, 시에서도 문련을 출범시켜 문예대오를 이끌기 시작했다. 1956년 8월, 국내 소수민족지구의 첫 작가협회인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가 창립되면서 기관지 《아리랑》을 출판하기 시작했다. 1946년 3월, 길동보안군 정치부 문예공작대대로 출발한 연변문공단은 1956년 4월에 연변가무단으로 자리 잡았다. 1956년1월 연변가무단의 연극대는 연길현문공대와 합병하여 연변연극단으로 다시 태여났다. 지난 세월 연변가무단과 연변연극단은 “가무의 고향”연변을 국내외에 알리는데 공로가 매우 크다. 1951년 3월, 연변사범학교에서는 예능사범반을 꾸려 음악반,무용반,미술반에서 도합 90여명 학생을 양성하였다. 동년 8월 연변대학에서는 미술반을 꾸리여 20여명 학생을 키웠다. 1957년 10월 5일,  연변예술학교가 개학하여 음악, 무용, 미술 등 전문학과를 개강함으로써 민족예술인재의 요람이 탄생했다. 1957년 4월, 주정부 “연변문물관리위원회”의 설립은 연변박물관의 서막이였고 초창기부터 문물조사와 증집사업을 활발히 벌려 많은 혁명문물을 수집하였고 또한 고대문물발굴작업도 시작했다. 1955년, 연변도서관은 길림성정부로부터 연변조선족자치주도서관으로 명명받아 공공도서관의 역할을 시작했다. 1952년부터 각 현, 시 영화관들에서는 조선족관중들이 영화를 잘 알아보게 하기 위하여 “동성연사”를 두었고 1953년부터는 우리 주에도 연변영화발행소가 설립되여 영화발행사업을 총괄하였다. 1960년 7월, 연변군중예술관이 설립되면서 전 주 각 현, 시의 문화관과 손잡고 대중문예의 보급사업을 더욱 힘차게 벌렸다. 해방직후부터 연변일보사,  연변인민방송국,  연변인민출판사,  연변교육출판사를 비롯한 우리의 신문방송출판사업도 새로운 대장정을 시작하였다. 또한 1977년 연변TV방송국이 중앙의 인준을 받으면서 우리의 영상문화시대를 열었다. 2006년 여름부터는 연변위성방송도 국내외시청자를 위한 TV위성방송을 시작했다. 1982년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30돐을 맞이하여 우리의 문화사업은 “10년 동란”의 상처를 깨끗이 씻고 새봄을 맞았다. 그해 중공연변주위 조남기서기의 주지하에 성황리에 열린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경축대회”와 중앙기록영화촬영소에서 제작한 대형기록영화 “연변의 봄”, 장춘영화촬영소에서 제작한 예술영화 “새봄” 그리고 1984년 여름에 열린 제1차 “연변의 여름”예술절, 1985년 11월에 있은 연변예술학교예술단의 미국방문공연 등 대형문화예술행사들은 연변의 “문예부흥”을 만방에 알리는데 큰 몫을 했다.  또한 1983년 3월에 개학한 연변대학 작가양성반과 기자양성반, 1984년 9월에 개학한 중앙희극학원 조선족배우양성반은 우리의 새세대 문화예술인재를 양성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90년대부터 사회주의시장체제가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우리의 문화예술사업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그런 와중에 우리는 민족문화예술발전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면서 발전해왔다. 연변가무단의 무극 “춘향전”,  가극 “아리랑”, 무용서사시 “장백의 정”,  연변연극단의 연극 “사랑의 품”, 연길시조선족예술단의 음악무용서사시 “사계절의 노래”,  연변TV방송국에서 제작한 TV대형다큐멘타리,  “연변아리랑”,  장춘영화촬영소와 공동 제작한 예술영화 “정률성” 등 우수한  대형작품들과  세계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농악무” 국가무형문화재에 등재된 “아리랑” 등은 우리 문화의 무궁무진한 에네르기를 과시했다.  필자는 이러한 우리 문화의 빛나는 발자취를 뒤돌아보면서 감탄한다.“문화는 민족의 령혼이요, 민족이 살아있어 문화가 살아있고 문화가 살아있어 민족이 살아있구나!” (작자 문화평론가)
33    영상문화의 파워 댓글:  조회:5145  추천:2  2012-02-16
영상문화가 우리를 새로운 문명의 시대로 이끌어 가고 있다. 영상문화의 파워(힘)가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옛날부터 이라고 했다. 우리가 지금 볼수 있는 고대의 암석화와 수많은 민속화 영정화(초상화) 등은 모두 조상들이 의 꿈을 담은 미술작품이였으며 지금은 아주 소중한 문화유산이 되였다. 인간은 자신들의 인생사를 의 작품으로 남기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 왔다. 미술이라는 고전예술이 1839년부터는 사진문화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인간은 미술과 사진이라는 두가지 예술로 인간의 의 꿈을 실현하기 시작했다. 1895년부터는 사진예술이 으로 진보하면서 영화예술이 관중들을 영화관으로 불려들여 를 열었다.  1925부터 미국에서 TV기술이 개발되고 1928년 5월부터 뉴욕에서 일주일에 세번씩 매번 3분간의 TV방송을 시작하면서 라는 TV방송시대가 열었다. 당시의 기세로는 TV방송이 이미 흥행하고 있는 미술 사진 영화산업을 통채로 삼켜버릴 기세였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보면 미술 사진, 영화, TV방송은 누구가 누구를 삼켜버리지 못하고 오히려 경쟁적적으로 발전해 왔다. 그 근본적인 원인은 각자가 모두 자신의 문화예술적 매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1985년 11월, 필자는 미국방문을 방문할 때 처음 라는 단어를 배웠다. 하루는 어느 기업체를 참관하는데 100여명의 박사들이 커다란 칸막이 사무실에 앉아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내가 너무 신기해서 가이드에게 물었더니 지금  박사들이 새로운 컴퓨터프로그램 소프트를 개발중이라고 했다. 몇일후 할리우드와  디지랜드공원에서 360도 영사막 영화를 통해 여러가지 영상들을 보는데 그런것들이 모두 컴퓨터에서 발생하는 영상이라고 했다. 참으로 신기한 세상이였다. 사실 그때 이미 TV영상문화를 앞지른 컴퓨터영상시대가 시작된것이였다. 10년후 우리도 점차 컴퓨터를 배우게 되였고 이제는 없어서는 안되는 정보,업무,영상,오락을 겸비한 가 되였다. 몇년전부터 한국의 K-POP이라는 청소년들의 연예프로영상이 인터넷 유튜브를 타고 전세계에 퍼지면서 한류의 새고조를 불러왔다. 20세기 90년대부터 TV드라마로부터 시작한 한류는 K-POP이 인터넷을 타고 전세계에 퍼지면서 아세아와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중동은 물론 선진국인 미국,영국,프랑스 등 나라의 청소년들도K-POP에 감동하며 열광하는 너무나 신기한 사태가 벌어지고있다. 이러한 열파의 첫 공로자는 바로 인터넷영상문화의 파워가 아니겠는가.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여러가지 영상문화는 이미 청소년들과 불가분리의 동반자가 되였다. 그래서 필자는 청소년들에게 아래 몇가지를 제안하고싶다. 하나는 영상문화를 배우고 연구하는것이다. 영상문화를 배움에 있어서 기술적인것을 배우는것은 당연한 일이다. 더욱 중요한것은 영상문화에서의 도덕적이고, 건전하며, 창조적인 사유를 배우고 연구하는것이다. 둘째는 영상물의 령혼은 상상력에 있다. 자신이 앞날에 어떠한 직업에 종사하든지 상관없이 자신의 업무에서는 모두 일정한 영상파일을 생산하게 된다. 문제는 그러한 영상을 어떻게하면 상상력이 풍부하고 형상화되여 더 재미있게 편성되는가 하는것이다. 그러자면 을 많이 꿔야 한다. 셋째는 영상산업을 개발하는것이다. 영상산업은 앞으로 점점 더 그 매력을 발산할것이며 엄청난 경제적인 부를 창출할것이다. 몇년전부터는 디지탈 카메라와 핸드폰으로 영화와 드라마를 촬영하는 기술이 개발되여 누구나 도전할수 있는 시대가 열였다. 또한 영상의 3D시대도 열였다. 앞으로 애니메이션, 영화, 드라마 광고 게임 등 영역에서 계속 새로운 기술이 창출될것으로 예상된다. 하기에 기술적인 요구는 얼마든지 만족시킬수 있는것이다. 문제는 더욱 재미있는 영상물을 생산하는것이다. 영상산품이 성공하는 관건은 참신하고 매력있는 가 있어야 한다.  좋은 스토리가 없으면 좋은 영상을 생산할수 없어 흥미진진한 영화,드라마,애니메이션,광고,게임 등 영상프로가 있을수 없다. 지금 중국의 영화와 드라마는 총적으로 산량은 많은데 아직은 에 처해있어서 에 오르자면 아직 갈길이 멀다. 국내 최상의 영화감독들의 영화스트리도 수준에 불과하다는 평이다. 미국영화 같은 대작들이 성공한 비결이 바로 무궁무진한 매력을 발산하는 스토리가 3D 영상기술으로 포장되였기때문이다. 영상문화의 파워는 민족문화의 파워를 키울수 있다. 영상산업분야에서 우리는 아직 걸음마단계에 처해있다. 영상산업을 발절시켜 민족문화의 기둥이 되게하는 력사적 사명은 청소년들에게 있다. 멀지 않는 장래에 우리의 후대들의 영상문화 걸작들이 국내외에서 명성을 떨치기를 기대한다. (작자 연변TV방송국 전임 국장)  
32    가문의 문화유산 댓글:  조회:4960  추천:1  2012-02-08
가문의 문화유산이란 테마를 구상하면서 몽롱한 기분에 많이 고민했다. 그러다가 설 련휴에 서재에 보관하고있는 어머님의 60년이 된 유물인 재봉침(일명 손마선)을 보살피면서 문뜩 필을 들 용기를 얻었다.  1952년 봄, 나라에서는 당정기관간부들에게 실시되던 공급제(供给制)를 공신제(工薪制)로 전환하면서 처음 현금으로 월급을 지불했다. 그때 어머니께서는 아버지의 월급을 받아들고는 바느질이 가장 어렵다면서 재봉침을 사야겠다고 아버지에게 청을 들었다. 당시 주덕해서기의 비서인 아버지는 남들이 아직은 잘 못사는데 몇년 지나서 사자고 해서 의견이 생겼다. 어머님의 “눈물”은 아버지를 정복했다. 어머님은 그 재봉침으로 우리 다섯 남매에게 옷을 지어입히고 구멍이 뻥 뚫린 바지무릎을 봉해주면서 키웠다. 지금도 어머님의 재봉침소리가 들리는듯하다. 아버지의 앨범에서 길이 1메터나 되는 사진말이를 다시 펼쳐보았다. 1956년 1월,  주은래총리께서 “전국고급지식분자사업회의”를 주최하셨다. 그 회의에는 전국의 대학과 국가급 연구기관의 당위서기들이 모두 참석한 중요한 회의였다. 아버지는 연변대학 당위를 대표하여 회의에 참석하였다. 중남해에서 찍은 그 집체사진 앞줄에는 모택동, 주덕, 류소기, 주은래,  등소평 등 당시 중앙지도동지들이 모두 계셨다.  아버지가 북경에서 귀가해서 하시는 말씀이 “앞으로 나라에서는 우주에 날아오르고 땅을 뚫고 들어가는 기술(上天入地的技术)을 발전시키기 위해 많은 인재를 양성한다.”고 하셨다. 만약 그 때부터 굴곡없이 과학기술을 발전시켰더라면 지금 중국은 더욱 발전했을것이다. 지난 70년대 필자는 《연변일보》에서 농촌보도 기자생활을 하면서 하향을 자주 했다. 농가에 들릴 때마다 주인이 기자를 안방에 안내하는데 그때면 안방벽에 정성스럽게 걸어놓은 사진액자를 보게 된다. 그때마다 필자는 마치도 “사진전시회”를 보는듯이 재미 있었다. 그 “사진전시회”에는 그 농가의 가족사가 아주 선명한 영상으로 전시돼있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령전은 물론이고 항일투쟁, 국내혁명전쟁, 항미원조의 영웅들과 애국풍산모범, 민간예인수상자 등 “가문의 영광”을 과시하는 사진과 상장들이 걸려있어어 숙연해지기도 했다. 그때 주인들께서 들려준 가족사는 모두 우리 민족의 이민사, 개척사, 혁명투쟁사, 문화예술사였다. 몇년전부터 “국제빈곤농가후원”사업을 하느라 다시 농촌에 다녀보니 마을의 농가들이 도시로, 내지로 해외로, 이사를 가면서 꽤나 줄었고 그냥 살고있는 농가들에도 그러한 옛날의 사진액자가 많이 사라졌고 이제는 대부분이 후대들의 패션사진들이여서 “력사적 무게”가 많이 가벼워졌다.   그래도 현재 도시와 농촌을 막론하고 집집마다 옛날에 할아버지가 보시던 《천자문》이나 《삼국지》, 또한 사연이 깊은 물동이, 재봉침, 축음기, 레코드판, 라디오, 사진기 등 골동품과 어머님들이 정성들여 뜬 문발이거나 수놓이 베개머리 등 공예품들이 종종 보인다. 이러한 골동품과 공예품들은  모두 가문과 세월을 같이 하면서 희로애락을 엮어왔다. 그보다 더욱 값진것은 옛날부터 써내려온 “가승(家乘 가문의 계보를 적은 옛문서)”, “족보”, “이민사”, “가족사”, “렬사전”, “전방과 후방에서 주고받은 련애편지”, “일기장” 등이다. 이상의 모든것들은 가문의 문화유산으로 손색이 없으며 아주 값진 민속유산이다.  문화유산이라는 개념은 영국에서 18세기 후반부터 산업혁명이 흥기하면서 천연자원의 개발이 활기를 띠는 사회환경속에서 자연의 파괴와 력사적 문화유적의 훼손을 예방하기 위하여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발기된 문화보호운동에서 유래한다. 2006년부터 중국에서는 매년 6월 두번째 토요일을 “중국문화유산일”로 정하고 기념활동을 한다. 문화유산은 물질문화유산과 비물질문화유산을 포함한다. 물질문화유산은 유형문화재이라고도 하는데 력사와 예술적, 과학적 가치가 있는 문물을 말하는것이며 비물질문화유산은 무형문화재라고도 부르는데 여러가지 비물질형태로 존재하는, 인간의 생활과 밀접히 상관되여 대대손손 대물림하는 전통문화의 표현형태이다. 례하면 농사수렵, 의식주행, 관혼상제, 민속놀이, 민요민무, 민속공예 등을 말한다.  연변의 “농악무”가 세계비물질문화유산의 영예를 안아왔고 “아리랑”이 중국의 비물질문화유산으로 등재된것은 우리들의 커다란 자랑이다. 민족의 문화유산은  사회와 가문의 문화유산을 토대로 한다. 또한 민족의 문화유산은 민족사의 중요한 토대이기도 하다. 하기에 우리는 가문의 문화유산에 대해 긴급구조신호를 울리고 긴급구조를 해서 보물처럼 소중히 간수하고 대물림해야 할것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60돐을 맞으면서 “중국조선족박물관”이 개관한다고 한다. 우리 가문들의 문화유산중에서 아주 값진것들을 더 많이 발굴하고 선발해서 전시하고 영구 보존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31    해맞이 달맞이 60년 댓글:  조회:5261  추천:0  2012-01-05
해맞이 달맞이 60년, 연변조선족자치주는 룡띠 환갑을 맞는다. 밝아오는 강산을 두루 바라보면서 60년전 9월 3일, 연길시 서광장에서 연변조선민족자치구의 창립을 선포하시던 주덕해동지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리는듯하다. 《연변대사기》 1952년 기록중에서 중요한 사건을 적어본다. 1월에는 “3반운동(탐오,랑비,관료주의를 반대하는 운동)” 행사가 많았다. 2월달에는 지난해까지 연변 각지에서 소학교교육이 보급되였다는 희보가 있었다. 3월달에는 중앙인민정부 농업부에서 1951년 애국풍산모범을 표창하였는데 연변의 김시룡농업생산합작사와 최죽송농업호조조가 애국풍산상을 받았다. 4월에는 중국인민지원군 귀국방문단이 연변에 와서 보고대회를 가졌다. 5월에는 연변의 19개 사립조선족중학교가 공립중학교로 전환하였다. 6월에는 연변의 농업합작사와 농업호조조 책임자대회를 열어 애국풍산경험을 교류했다. 7월에는 팽택민을 단장으로 하는 중앙방문단일행 50명이 연변을 방문하여 중앙정부의 배려를 전달했다. 8월 29일부터 9월 2일까지 “연변조선민족자치구 제1기 각족각계인민대표대회”를 열었다. 9월 3일 오후, 연길시 서광장에서 3만여명의 시민들이 참가한 “연변조선민족자치구” 창립대회가 성황리에 열렸다. 주덕해동지께서 연변민족자치구의 창립을 선포했다. 필자는 그날 중앙소학교 동창들과 함께 경축대회에 참가했을뿐만아니라 초롱불시가행진을 하면서 즐기던 때가 그립다. (1955년 8월, 길림성정부에서 연변조선민족자치구를 연변조선족자치주로 개칭할데 관한 통지를 하달했다.) 10월에는 주덕해주장님이 당정기관과 각족인민들에게 당의 민족정책을 학습하자고 호소했다. 11월에는 장백산 림해설원에 비행기로 투하된 미국무장간첩들을 숙청했다. 12월에는 연길현 14구 태흥촌(현재의 화룡시 동성진 태흥촌)이 전국제2차위생공작회의에서 전국1등위생모범상을 받았다. 상기한 1952년 대사기중에서 필자가 특히 주목하는 한 사건은 3월에 중앙인민정부 농업부에서 연변의 김시룡농업생산합작사와 최죽송농업호조조에 1951년 애국풍산상을 수여했다는것이다. 그래서 옛날에 전국에서 명성을 떨치던 김시룡, 최죽송, 리옥금, 려근택, 황순옥, 류창은 등 조선족농민영웅들이 생각난다. 그들이야말로 “개천에서 날아오른 룡”들이였다. 중국조선족농업발전사를 연구하다보면 청나라말기부터 동북3성과 내몽골지역을 포함한 중국 북방의 벼농사는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이주해온 조선족농부들이 첫 보습을 박았다는 사실에 감동된다. 특히 연변의 벼농사는 줄곧 중국 북방지역 벼농사에서 선줄군역할을 해왔다는 사실이다. 1956년 7월 10일, 《인민일보》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벼풍산경험”을 보도하면서 “북방에서 벼농사를 대대적으로 할수 있는가?”라는 사론을 발표하였다. 사론은 “오늘 본보에 보도된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벼풍산경험’은 우리 나라에서 적당한 조치만 따라간다면 그 어디에서나 벼농사를 할수 있다는 답을 주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농민들의 벼풍산경험은 북방농민들의 신심을 보편적으로 높여주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농민들의 완강한 정신을 착실히 따라배우면 반드시 그들처럼 승리를 거둘수 있을것이다.”라고 피력했다. 1964년 11월 16일, 《인민일보》는“풍산경험에 대한 과학적인 총결”이라는 사론을 발표하여 최죽송의 풍산경험을 극찬하였다. 사론은 “오늘 본보는 중국농업과학원 공작조가 총결한 최죽송의 벼풍산경험조사보고를 보도했다. 이 조사보고는 농업과학공작자들이 농촌에 심입하여 군중의 증산경헙을 착실히 총결지은것으로서 농업생산과 농업과학의 발전에 중대한 의의가 있다.” “길림성농업과학원이 총결한 최죽송의 벼풍산경험은 중국농업과학원 강소성분원이 진영강(陈永康)의 경험을 총결한후 우리 나라 농업과학연구에서 얻은 또 하나의 중요한 새로운 수확이다.” 그때부터 중국의 벼풍산경험은 “남진북최(南陈北崔)”로 응결됐다. 최죽송의 뒤를 이은 류창은이 안도현 만보 고한지역에서 만보21호 등 풍산벼품종을 육성해내여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해맞이 달맞이 60년 세월이 흘렀다. 지난 60년 동안 우리는 중국 북방의 벼농사뿐만아니라 민족교육과 문화예술, 축구와 스케트, 해외류학과 해외로무 등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쌓아왔다. 향후 60년에도 개천에서 더 많은 룡들이 날아올라 새로운 업적을 쌓기를 기원한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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