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산골동네의 노래였지만 연변과 기타 조선족산재지구는 물론 전국을 상대로 인기를 누리던 연변조선족들의 노래가 많았다. 필자의 어린시절만 해도 “제비”, “병아리”, “새봄”, “고개길” 등 아이들의 심경에 맞는 연변에서 창작된 동요들을 배워서 부르며 동심을 키웠고 따라서 이런 동요를 통해 우리 말과 글을 더욱 새기게 되였고 민족심도 키웠다. 성인가요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연변의 작곡가들이 처음부터 우리 민족의 정서에 맞는 노래를 창작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였겠는가? 물론 연변이 이렇게 할수 있는것은 나라의 민족정책 좋아 민족자치를 실시하기때문이지만 민족예술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하는 지도자나 예술가들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 아니였을가?
물질생활이 가난하다 하여 정신생활마저 가난할수는 없었다. 돌이켜보면 지지리 가난한 속에서도 우리 민족이 이 땅에서 락천적으로 살아올수 있었던 리유중의 하나는 음악 즉 대중가요를 꼽을수 있는데 그런 가요의 창작과 공급이 바로 연변으로부터 왔기에 나는 연변의 노래가 음악이라는 이 예술형식을 통해 중국조선족들의 정체성과 동질성을 보존하고 살려나가는데 아주 큰 역할을 한 고마운 음악이였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같은 성과는 한때 민족음악을 고집한탓에 온갖 고초와 억울함을 겪으면서도 오로지 민족음악을 살리려는 끈질긴 의지와 열정을 가지고 분발해온 연변의 수많은 조선족음악인들로 하여 이루어낸 성과임을 더욱 긍정하고싶다.
연변 하면 민족자치주로도 그렇겠지만 노래와 춤으로 이름난데는 텔레비죤이 보급되지 않은 세월 방송매체를 통해 대중들이 쉽게 우리 민족 노래를 접촉할수 있은데 있다. 노래로 말할 때 연변은 집단적거주지를 형성하면서부터 음악을 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 자연 그들속에서 그들만의 음악이 존재하게 되였는데 해방후 새로운 조건하에서 그들은 서둘러 자신의 음악을 발전시킨것이다. 하여 남들은 아직 음악에 대해 생각도 못할 때 연변에서는 벌써 자신의 음악체계를 갖추고있었다. 연변에서는 이러한 지방적특성때문에 각종 음악단체들이 일찍부터 성립되였는데 특히 연변가무단의 조기건립은 연변음악의 급성장에 있어서 결정적인 요소가 아니였는가싶다. 연변가무단은 당지의 예술공연은 물론 산재지구로 다니며 민족예술의 씨앗을 뿌려 민족의 문화를 자래우는 좋은 터밭이 되였다. 그래서 흑룡강내지에서는 연변가무단이 한번 온다 하면 그렇게 반가와 몇십리 먼길도 서슴없이 걸어가서 관람하군하였다. 그리고 그네들은 한번 왔다간후면 그곳에 곧 새로운 노래들이 보급되면서 대중문화생활이 활기를 띠군 하였다.
특히 새로운 력사시기에 들어서면서 전에 이룩한 기초상에서 연변의 음악은 더욱 발전하여 참으로 대중들이 즐겨부르는 좋은 가요들이 많이 창작되여 전례없는 호황을 이루었는데 80년대초에 창작되고 불리워진 많은 노래들은 연변노래의 황금기를 이루지 않았나싶다. 그동안 이런저런 제약으로 구속받고 갇혀있던 예술혼이 해방된 기쁨과 함께 터져나오면서 “내 고향 오솔길”, “장백의 새아리랑”, “산간의 봄은 좋아”, “오래오래 앉으세요”, “선생님 들창가 지날 때마다”, “고향길”, “장백의 새 아리랑” 등 대중들의 귀맛을 돋구는 좋은 노래들이 라지오방송을 통해 혹은 전문예술단체의 공연을 통해 조선족들이 사는 곳으로 급속히 퍼져나갔는데 이런 노래들은 새로운 시기를 맞아 새로운 희망을 바라보며 자신있게 사는 조선족들에게 생활의 기쁨과 함께 삶의 활기를 보태주었다. 그중에서도 가요 “오래오래 앉으세요”는 흑룡강조선족으로 말할 때 환갑날이면 어김없이 부르는 지정곡으로 되였다. 가요 “선생님의 들창가 지날 때마다”는 “4인무리”에 의해 고린내 나는 아홉째로 기시받던 많은 교원들이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자신의 성스러운 로동가치를 이렇게 음악으로 인정받음으로 하여 눈물을 흘리며 경청하는 명곡의 하나로 되였던것이다. 이밖에 참으로 많은 가요들이 대중들의 입에 올라 한때 연변의 노래는 흑룡강조선족들의 삶에 없어서는 안될 엔도르핀이였음을 부정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코리아드림이 시작되면서 연변의 노래가 충격을 받지 않았나싶다. 요즘 들어 연변위성TV방송을 흑룡강 각지에서도 시청할수 있어 여려가지 프로중에서도 특히 음악프로를 즐겨보는데 음악프로그람에 나오는 매주일가를 비롯하여 다른 가요들이 웬 일인지 전처럼 광범한 대중들의 호감을 얻지 못하는것 같다. 물론 음악에 대한 평가기준이 사람마다 다를수 있고 사람마다 자기가 즐기는 기호의 노래가 있기때문일수도 있고 전과 달리 지금은 대중들의 음악에 대한 체험이 다양한데다 많고많은 영상매체들의 충격때문에 가요 한가지에만 사람들의 심미적추구가 쏠리지 않은 때문일수도 있겠다. 그리고 워낙 한류 말하자면 한국의 대중가요들이 대중의 마음을 붙잡는 예술적묘미(특히 가사에서)가 있는 등 여러가지 요소가 있을수 있겠지만 주관적인 요소에서 문제를 찾는다면 연변노래의 예술적특성과 그 질이 전만 못해진때문은 아닐가?전에 창작된 연변의 노래들은 조선, 한국과 달리 다같은 민족의 피줄이면서도 특정된 연변나름의 향토적 미와 정서가 특색이 있어서 어디에 가도 구분할수가 있고 또한 그 노래들의 울림이 중국조선족들의 정서와 매우 어울려 연변나름의 독특한 브랜드를 갖추고있지만 요즈음 연변에서 창작되는 노래들은 국적불명, 지방불확실의 선률들이 많지 않는가싶다. 얼핏 들으면 조선노래 같기도 하고 한국대중가요 같기도 하고 지어 한족노래 같기도 하여 자신의 독특한 개성과 매력을 잃어가고있는듯 싶다. 물론 근래에 창작된 노래중에 좋은 노래가 없는것은 아니다. “고향의 봄”, “타향의 달밤”같은 노래들은 현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서적욕구와 맞기때문에 곧잘 부르며 공감하는것이다. 그리고 이미 지난 노래지만 “내 고향 오솔길”이며 “수양버들”같은 서정가요와 우에서도 말했지만 “오래오래 앉으세요”와 같은 전통도덕을 찬양한 가요들의 생명력은 지금도 의연한것이다.
노래가 보급되는데는 자신의 특정미 있다. 어찌 보면 사람들이 좋다기보다 시골의 이름없는 녀인이 시내가에서 빨래를 하면서 흥얼거리는 노래가 명곡일수도 있다. “도라지”, “아리랑” 등 우리 민족의 우수한 민요가 바로 이렇게 서민들의 입과 입을 통해 지금까지 류전되여 내려오면서 그 독특한 생명력을 과시하는것은 아닐가.
물론 대중들의 노래에 대한 심미표준도 많이 달라져 공적인것에서 개성적인것으로 다양화되면서 전처럼 어느 한가지 풍격의 노래에 치중하지 않는다. 필자도 이제 로년기에 들어서 지난 시대를 살아오며 쌓이고 구축된 감정세계가 낡아서 새것을 받아들이기 어렵기때문에 이런 판단을 할수도 있다. 하지만 누가 부르든 누가 듣든 좋은 노래는 어디까지나 좋은 노래이다.
50년대 중기에 연변에서 창작된 “안해의 노래”는 연변의 혁명성이 너무 강해 그런지 몰라도 흑룡강조선족들은 그것이 “독초”로 지적받고있다는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즐겨불렀다. 그것은 대중의 감정세계에 그 노래가 어울렸기 때문이다.
창작은 자유지만 불리고 못 불리고는 강박할수 없다. 대중이 스스로 호감을 가지고 불러야 한다. 이제 대중은 정치적인 설교나 그 어떤 리념적인것을 들씌우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진 노래보다 진실한 감정이 배인 생활적인 노래들을 더 즐긴다. 가사로부터 곡에 이르기까지 대중의 희로애락을 대신할수 있는 노래들을 즐겨 선택한다.
중국조선족의 음악이 존재하고 발전하자면 연변의 음악이 발전해야 하는데 원인이 무엇일가를 이런 기회를 통해 한번쯤 곰곰히 생각해보는것도 나쁘지는 않을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족음악의 한 토양으로서의 연변음악이 력사와 현실에 존재하는 그 가치와 의의에 대한 절실한 진단과 뼈아픈 반성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가. 연변음악의 발전을 위하여 노래에 대한 투자를 늘여야 한다. 연변축구와 함께 음악을 부흥시켜 연변을 세계에 알리는 밑거름이 되게 하자. 그리고 진정 연변의 음악발전을 위해 헌신하고 분투할 결의를 가진 음악인의 능력과 지혜를 최대한 발휘시키며 고무해야만 연변은 물론 중국조선족 더 나아가서 세계 우리 민족속에서도 당당하게 내놓을수 있는 중국조선족의 명곡이 나오게 되지 않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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