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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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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회 무한에서의 조선인 혁명활동
2007년 07월 30일 15시 18분  조회:4841  추천:77  작성자: 김성룡

   1926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북벌전쟁은 불과 반년도 안되는 사이에 커다란 성과를 이룩하였다. 두려움 모르는 북벌군 장병들은 파죽지세로 호남, 강서 전선을 휩쓸었고 가는 곳마다 수많은 로동자와 농민이 일떠나 북벌군을 도와 나섰다. 그리하여 이해 년말까지 북벌군은 수배나 더 많은 군벌부대를 전승하고 광서, 광동으로부터 호남, 호북, 강서 전역을 통제하게 되었다.

  중국혁명에 몸담고 싸웠던 수많은 조선혁명가들은 북벌전쟁에 적극 참가하는 한편 유망한 청년들을 더욱 많이 단합시킴으로써 새로운 발전의 길을 적극 모색하였다.

   광주 황포군관학교에 남아있던 의렬단 단장 김원봉은 더욱 많은 조선청년들을 휘하에 집결시키기에 노력하였다. 북벌군이 무한을 점령하자 그는 기타 의렬단 간부들과 함께 황포군교 무한분교에 와서 활동하였다. 그들은 일찍부터 무한에 거주하고있던 조선교민들속에서 유능한 사람들을 찾았으며 무한의 여러 혁명단체들과 적극 접촉하면서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때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국민당 군내에 있던 많은 조선혁명자들도 무한에 모여왔다.

  무한의 중남재경대학(中南财经大学) 원계성(袁继成) 교수는 당시 무한에서의 조선혁명가들의 상황을 이렇게 소개해주었다.

 (원계성) 황포군관학교가 가장 일찍 무한에 정치과를 설치하려할 때 한쪽으로는 정치과 5기 학생들을 무한에 전이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한에서 전국을 상대로 학생들을 모집하였습니다. 특히 당시 무한에 조선혁명청년회가 있었는데 청년회를 주도로 각지에서 많은 우수한 한국 청년들이 무한에 오게 되었습니다. 후에 무한군교, 무한분교, 중앙군사정치학교로 명칭을 바꾸어 온 중앙군관학교 무한분교에는 많은 조선청년들이 있었습니다.

   무한에는 일찍부터 소수 조선교민들이 중약과 인삼장사를 하면서 살고있었다. 20년대에 들어와 조선교민들이 점차 많아지기 시작하였고 혁명자들도 이곳에 모여왔다. 북벌전쟁이 시작되자 중국 군관으로 있던 많은 조선인들이 한구에 왔고 화북과 상해를 비롯한 각지에 있던 조선청년과 학생들이 이곳에 많이 모여왔다. 혁명정부가 광주로부터 무한에 옮겨온후 진보적인 조선혁명가들은 조선청년들과 군관들을 단합시켜 무한에서 류악혁명청년회(留鄂革命青年会)를 비롯한 진보적인 단체를 조직하였다.

  무한의 조선혁명청년회에는 근 50명에 달하는 회원이 포함되였다. 이 가운데서 백득림(白得林), 권준, 홍의표(洪义杓), 리검운(李检云), 오세진(吴世振), 리우각(李愚悫), 로세방(劳世芳) 등은 황포군관학교 출신이거나 쏘련에서 국민혁명군내에 파견한 군관들이였다. 그리고 중앙군사정치학교(中央军事政治学校) 무한분교 재학생들인 진공목(陈公木), 진갑수(陈甲秀), 사검인(史剑仁), 안동만(安东晚), 류광세(刘光世), 박우균(朴禹均) 24명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무창중산대학(武昌中山大学)과 남호학병단(南湖学兵团), 항공국(航空局)의 학생들 그리고 네명의 교민대표가 청년회에 참가하였다

  류악혁명청년회는 민족독립혁명과 사회혁명에 종사하며 세계혁명대중과 련합하여 세계혁명 완수에 기여한다는 기본강령을 제기하였다. 청년회는 상무집행위원으로 사무부에 권준, 재무부에 안동만, 선전부에 홍의표, 조직부에 진갑수, 조사부에 진공목을 선정하고 후보위원으로 사검인과 로세방을 선출하였다.

  청년회가 조직되자 청년회 비서 권준은 1927년 류악혁명청년회의 설립을 중국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에 통보하고 청년회 승인과 지원을 받아냈다.

  1925년부터 26년까지 중국 국공합작이 고조를 이루고 북벌군의 승전에 따라 중국혁명은 사람들을 크게 고무시켜 주었다. 특히 중국에 망명되여 온 조선혁명자들과 수많은 조선청년들은 이에 감화되여 중국혁명에 적극 참여하는 동시에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략을 확정지어갔다.

  김원봉을 단장으로하는 의렬단은 이시기 조직세를 확장시켰을뿐만 아니라 비교적 성숙된 운동리념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일본관헌의 자료를 분석할 때 의렬단은 대체로 1926 20개조의 강령을 제정하여 단의 리념적 지표를 더욱 구체화, 명료화, 체계화시키면서 발전적 면모를 보였다.

  의렬단의 강령을 보면 첫째, 조선민족 생존의 적인 일본제국주의의 통치를 근본적으로 타도하고 조선민족의 자유독립을 완성한다고 하였고 둘째, 봉건제도 및 일체 반혁명세력을 제거하고 진정한 민주국을 건립함이라 하였으며 셋째, 소수인이 다수인을 박삭(剥削)하는 경제제도를 소멸시키고 조선인 각개의 생활상 평등의 경제조직을 건립한다고 하였다.

  의렬단의 이와 같은 주장은 20년대초의 투쟁강령이였던 <조선혁명선언>의 계승과 발전으로 판단할 수 있다. 일본제국주의 타도는 당시 모든 조선혁명가들의 공동의 리념이였다. 그리고 이시기 의렬단은 공산주의의 영향하에 계급적 의식에 눈을 뜨게 되었고 대중운동에 관여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중국공산당은 각지에 공회조직과 농회조직을 설치함으로써 수많은 로동자와 농민들을 혁명에로 이끌고있었다. 하여 조선혁명자들은 이때에 와서 국민당과 북벌군이 승승장구로 전진할수있은 가장 주요한 요인의 하나가 대중운동에 기반을 두었다는 것을 보아냈기 때문이다.  

  한편 이시기에 와서 조선독립운동에서 간과할 수 없는 유일당촉성운동이 각지에서 활발히 전개되여 일정한 성과를 보기도 하였다.

  일찍 상해림시정부가 수립될 때 려운형과 리회영을 비롯한 진보인사들이 독립운동의 통일적 지도기관으로서 당 조직론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당시 정부수립이 급급했던 탓으로 이 문제가 중시를 불러일으키기 못했다.

  1923 6월 독립운동의 분렬과 림시정부내 파벌투쟁이 심각한 상황에서 김규식, 신숙(申肃), 리청천(李青天) 등은 로씨야 극동의 리동휘, 한명세(韩明世)와 회합하여민족운동의 통일적 혁명전선을 구축하기 위해한국독립당 조직안을 작성하였다.

  1924년 상해에서 안창호를 중심으로 대동단결론이 제기되였고 이들의 영향하에 1926 10 16일에 대독립당(大独立党)조직 북경 촉성회(促成会)가 결성되였다. 북경촉성회는 조성환(■成焕), 장건상, 강구우(姜九禹)를 비롯해 40여명 회원을 확보하였다. 그뒤 1927 3 21일에는 상해촉성회가 창립되고 150명 회원을 확보하였다.

  당시 김성숙, 오성륜, 장지락(张之乐--김산)을 비롯해 광주에 약 3백명에 달하는 조선혁명자들이 있었는데 이?/textarea> 관련링크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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