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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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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광동에서의 의렬단투쟁
2007년 07월 16일 19시 14분  조회:4249  추천:54  작성자: 김성룡

  1920년대말, 광주에 모여온 수많은 조선 혁명가들은 황포군관학교나 중산대학에서 공부하는 한편 자체의 조직체계를 형성하여 활발한 혁명활동을 전개하였다. 려월한인동지회, 조선혁명청년련맹, 조선독립당을 비롯하여 공개적인 활동과 비밀적인 활동이 전개됨과 동시에 더욱 많은 혁명자들이 광주에 모여왔다.

  김산은 <아리랑>에서 이렇게 회억한다.

“광동에 온 가장 우수한 조선인 혁명가의 전형적인 인물은 박진(朴镇) 부부와 그의 두 동생이었다....그들은 북방인 답게 모두 풍채가 좋고 몸이 떡 벌어졌다. 그들은 동토지대에서 불어오는 씨베리아 바람처럼 위력적이고 활기찬 분위기를 실내에 가득 뿌렸다.”

  김산이 회억하고있는 박진(朴镇)이 바로 중국에서 박영(朴英1887--1927)으로 알려진 유명한 조선족 혁명가이다.

  박영은 1887년 조선함경북도 경흥군(庆兴郡) 아오지(阿吾地)의 한 농민가정에서 맏아들로 태여났다. 그의 원명은 박근성(朴根星)이였고 선후로 박응서(朴应瑞), 박영(朴泳), 박진(朴镇)등 여러 가지 이름을 사용하면서 로씨야로부터 중국 동북, 광주 등 광활한 지역에 력력한 발자욱을 남기며 혁명했었다.

  1906년 고향에서 일본침략자들을 반대하는 “사포대(私炮队)”가 조직되자 그는 19살 젊은 나이에 학업을 그만두고 반일무장투쟁 대렬에 들어섰다. 1908년 박영은 백여명 전사들과 함께 경흥군의 일본수비대 두 거점을 습격하여 많은 적들을 소멸하였다. 이에 격분한 일제는 많은 보병대대를 동원하여 토벌해 왔다.

  1910년 조선내에서 활동할수없게 된 박영은 일가를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너 길림성 화룡현으로 이사왔다. 세계와 담을 쌓고 시골에만 파묻혀 있을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다시 일본 도꾜에 갔다. 그곳에서 중국 신해혁명 승리의 소식을 접한 그는 다시 중국 화룡에 가서 적극적인 반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는 학교를 꾸리고 계몽운동을 시작하였다.

박영은 화룡에서 1919년 《3.13》반일운동에 참가하였고 이해 6월 최명록(崔明录)을 도와 반일무장단체인 독군부(督军府)를 창설하였다. 박영은 독군부 반일대오의 참모장을 맡았다.

 1920년 박영은 반일무장대오를 거느리고 여덟차례 두만강을 건너 조선내 온성, 무산을 비롯한 각지 일본경찰소를 습격하였다. 그리고 6월에는 홍범도(洪范图)가 이끄는 독립군과 함께 봉오동(凤梧洞)전투의 대첩을 이룩하였다. 그해 청산리 전투가 있은후 박영은 독립군 주력부대와 함께 로씨야쪽으로 철수하였다.

  로씨야에서 박영은 쏘련홍군에 참가하였고 또 쏘련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는 쏘련홍군부대와 함께 울라지보스또크를 공략하는 7차례 전투에 참가하여 용감히 싸웠고 또 여러차례 부상했다. 

  1924년 그는 중국 광동성 산두(汕头)의 혁명군포병대 대장을 맡고있던 친구 리영(李瑛)의 편지를 받았다. 리영은 편지에서 중국 광동혁명을 소개해 주면서 속히 중국 대혁명에 참가할 것을 바란다고 했다. 이에 큰 고무를 받은 박영은 1926년 말, 가족과 두 동생을 데리고 광주에 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리영의 소개로 황포군관학교 교도대에서 사업하였고 두 동생은 황포군교 보병과에 입학하였다.

  광주에서 박영 형제는 조선민족독립당에 가입하여 김산, 김규광 등과 함께 토요일 밤이면 늘 한곳에 모여 밤새도록 혁명을 론하군 하였다. 김산은 ?씨베리아에서 온 선구자들‚인 이 박씨 형제와 매우 친숙해 졌다.

  “당신네 네 사람은 모두 너무 행복해 보이는군요. 지금까지 그렇게 많이 싸워왔는데, 이제는 평화로운 생활이 그리워지지 않습니까?”

  “조선혁명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내게는 평화가 단지 고통일 뿐이야. 투쟁은 삶이지. 소극성은 죽음이고, 나는 싸우는 것을 더 좋아해.”

   박영은 김산의 물음에 늘 이렇게 대답하군 하였다.

   김산이 회억한데 의하면 이시기 유명한 의렬단 단원이였던 오성륜도 광주에 와서 김산, 김규광, 김약산 등과 함께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김산은 <아리랑>에서 이렇게 오성륜을 회억하고있다.

   “오성륜은 비밀형의 조용한 사나이였으며 고개적인 사람이 아니였다. 그는 전생애를 비밀속에서 살았다. 심지어 그와 함께 여러차례 죽음에 직면하였던 나마저도 그의 개인 경력을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그는 절대로 말을 믿지 않고 오직 행동만을 믿었다. 또 사람을 쉽게 믿지 않았고 오랫동안 사귄 뒤에야 믿었다. 한번 마음을 정하면 쉽사리 그것을 바꾸지 않았다. 오성륜은 중간 정도의 키에 잘생긴 편이였으나 미남은 아니였다. 광대뼈가 튀어나왔고 드넓은 이마에 짙은 머리카락을 갖고있었다. 그는 힘이 세고 건강하였으며 미술과 문학을 좋아하였다. 고향마을에서 학교 선생을 한적도 있는 그는 로씨야의 허무주의와 무정부주의에 영향을 받아 의렬단에 가입하였다.”

  황포탄 의거로 널리 알려진 오성륜은 의렬단 주요 성원이였고 공산주의자 였으며 줄곧 신비의 그늘에 가려진 인물이다. 그의 진실한 행적에 관련해 서는 아직도 정확한 파악이 되지 않은 부분이 너무 많은 것이 아쉽다.

  상해 황포탄에서 다나까 저격이 실패한후 오성륜은 체포되여 일본 령사관 3층 감방에 갇혔다. 그곳에서 기타 일본인 수감자들의 도움을 받아 그는 자물쇠를 마스고 도주하였다. 오성륜은 미국인 친구집에 며칠 숨어있다가 독일을 거쳐 모스크바로 갔다. 1925년 그는 공산주의 교양을 받았고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후 1926년 경에 그는 광주에 도착해 황포군관 교관으로 있으면서 혁명활동에 종사하였던 것이다.

  나이가 많고 경력도 풍부한 그는 함성(咸声)이라는 필명으로 많은 리론저서를 쓰기도 하였다.

  광주에서 오성륜은 대부분 김산과 한조가 되어 일하였다. 강인한 성격을 가진 그는 훌륭한 지도자였다. 그는 빌밀리에 지도하였고 김산은 공개적인 지도사업을 맡아 보았던 것이다.

  광주 답사에서 빼놓지 못할 유적지가 있다. 조선인 혁명가들이 자주 기념행사를 진행하였던 혜주회관(惠州会馆)이다. 단순한 책의 기재를 가지고 혜주회관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광주에서 가장 일찍 활동하였던 조선인들이 혜주회관에서 류월한인회를 조직하였다는 기재가 있다. 상해림시정부의 신규식의 부탁을 받고 박태하가 광주에서 조직한 힌인회가 바로 류월한인회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기재로서는 혜주회관을 찾을 방법이 없었다. 광주에서 중앙당사연구실의 여러 전문가들과 이야기하던 끝에 <피압박 민족 련합회>를 촉성하기 위한 중요한 행사가 혜주회관에서 진행되였다는 단서가 나왔다. 광동성 당사연구실의 조직 선생은, 단서가 틀리지 않다면 혜주회관이 바로 지금의 중화전국총공회 기념관 건물이라고 알려 주었다.

  답사팀이 광주시 월수남로(越秀南路) 93번지를 찾아왔을 때 귤색 2층 양식 건물이 나타났다. 건물에는 검은 현판에 흰 글로 <중화전국총공회(中华全国总工会)>라고 씌여져 있었다. 글은 력사 그대로 번체자로 되어 있었다. 역시 귤색으로 된 낮은 담이 건물을 둘러싸고 있었는데 아치형 정문은 철문으로 되여 있었다. 철문에는 중화전국총공회 옛터라고 밝혀있었다. 현재 사용하고있는 공식명칭인 것이다.

  1925년 5월 1일 국제로동절을 맞으며 이곳에서 제2차 전국로동대회(全国劳动大会)가 소집되고 대회에서 중화전국총공회를 설립했기 때문에 중국력사에서 이곳은 중화전국총공회 유적지로 널리 알려졌고 원 건물이 혜주회관이였다는 사실은 도리여 아는 사람이 적었다.

  사실 혜주회관은 청나라 말기에서 민국초기에 축조된 유럽식 2층 건물이다. 지금 우리가 보는 건물은 1959년에 중화전국총공회 유적지로 확정하고 수건을 거친 기념관 건물이다.

  1924년 손중산에 의해 개조된 국민당은 중앙당부 사무기구를 이곳에 설치했다. 그리하여 국공합작이후 국민당과 공산당의 많은 지도자들이 이곳에 발자욱을 남겼다. 특히 국민당의 좌파인 료중개가 이곳에서 피살됨으로 해서 더욱 유명해 졌다.

  손중산이 서거한후 국민당은 분렬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당시 국민당의 주석은 왕정위였지만 실제 사무는 좌파 수령인 료중개가 맡아 보았고 당내 군권을 장악한 실력자는 장개석이였다.

  국민당 우파들은 손중산이 서거하자 공산당과 쏘련에 대한 배척 심리를 보이기 시작하였고 손중산의 신삼민주의를 계승하고 이를 실천해 나가는 료중개를 눈에 든 가시처럼 미워하였다. 여러차례의 위협, 공갈을 했지만 료중개를 말리수 없게 되자 우파들은 드디어 암살을 계획하였던 것이다.

  1925년 8월 20일, 국민당 중앙집행회의가 중앙당부 소재지인 혜주회관에서 소집되였다. 9시 15분, 회의에 참가하러 혜주회관에 도착한 료중개가 승용차에서 내리자 사람들 틈에 미리 매복해 있던 5,6명 흉수들이 나타나 그에게 총격을 가했다.

  혜주회관 돌계단에 쓰러진 료중개를 급급히 병원에 호송했지만 총 네발을 맞은 그는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던 것이다.

  혜주회관 철문을 들어서면 건물 앞에 세워놓은 두 화강암 기념비를 보게 된다. 하나는 로농운동 렬사기념비였고 다른 하나는 료중개 선생 기념비였다.

  돌계단을 따라 1층에 들어가니 강당과 사무실이 있었는데 지금 강당은 진렬관으로 사용하고있었다. 조선혁명가들은 바로 이 건물 강당에서 기념행사를 자주 가졌던 것이다.

  1925년 7월 9일, 의렬단의 강세우를 비롯한 조선 혁명자들과 중국, 윁남, 인디아 등 여러나라 혁명자들이 광주에서 <피압박민족 련합회>를 창립하였고 피압박민족 련합회 조선인 지부를 설립하게 되었다. 이때는 상해 《5.30참안》이 빚어진 뒤였기 때문에 일본와 영국 제국주의에 대한 중국인민의 비분이 극도에 달한 시기였다. 따라서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전반 아시아 피압박 민족의 정의적인 요구가 중국인민의 반제투쟁 요구와 일치되였던 것이다. 

  조선혁명가들은 극력 중국인민을 포함한 여러 피압박민족과 호흡을 같이 하기에 노력하였다. 1926년 국민당 제2차 전국대표대회에 초청된 조선인 혁명가 려운형은 대회에서 “중국국민혁명의 전세계적 사명”이라는 주제로 연설하였다. 그는, 제국주의가 타도될 때 약소민족이 모두 해방될것이며 약소민족은 전력을 다하여 중국의 혁명을 도와야 하고 중국혁명이 성공하면 약소민족도 모두 해방된다고 피력하였다.

  중국인민들도 일제식민지하에 허덕이는 조선인민을 동정하였으며 조선혁명가들의 활동을 적극 도와주었다.

  1926년 3월 1일, 려월한인회의 전원 36명이 혜주회관에 모였다. 그들은 박문곤의 사회하에 독립운동 기념식을 진행하였다. 황포군관학교와 항공국(航空局), 중산대학 동자군(童子军), 청년군인련합회, 성항파업(省港罢工)위원회, 전국총공회를 비롯한 각계 대표들과 료중개의 미망인 하향응(何香凝), 윁남 동지회 회원 13명, 하여 도합 백여명이 기념식에 참석하였다.

  대회에서는 대회 취지를 확정하고 독립선언을 랑독하였다. 각계 대표들도 용약 연설하였다. 하향응은 전세계 피압박 약소민족은 일치협력하여 모든 제국주의를 타도해야한다고 연설했고 대회 참석자들은 조선혁명과 중국혁명, 세계혁명의 성공을 소리높이 웨쳤다. 

  기념회가 있은 후 5월 2일, 광주화교협회의 주최로 제국주의를 반대하고 제국주의에 항의하는 대회가 혜주회관에서 소집되였다. 대회에는 화교단체 대표외에 조선과 인도, 윁남 세 민족대표도 참석하였다. 대회는 “각 식민지 약소민족과 련합하여 반제운동을 준행(遵行)할 것”을 결의하였다.

국공합작과 아울러 아시아 각국 피압박 민족들의 반제국주의 련합전선이 초보적으로 형성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아시아 약소민족 혁명가들이 중국혁명에 용약 참가하였으며 중국인민과 조선인민은 제국주의를 반대하고 봉건주의를 반대하는 길에서 공동의 력사 사명을 짊어지고 피어린 항쟁을 시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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