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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초점을 바꾸어라
--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을 읽고
저자: 장 지오노, 김경온 옮김
출판: 두례, 2005. 06. 10 발간
우리의 삶은 그 자체가 사람들에게 실증을 자주 느끼게 하고 이는 또 변덕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냈다. 꾸준히, 처음처럼, 늘, 항상 등 변덕과 대조되는 단어들이 신변에 있지만 그것을 몸으로 터득하고 익히기에는 현대인들은 아주 멀리 와버렸다. 그래서 과거에 묻혀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로지 미래만 바라보고 가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과거와 미래의 사이에 현재가 있다는 것을 가끔은 망각한다. 수많은 현재가 과거를 이루어왔고 또 수많은 현재가 미래를 만들어갈 것이라는 사실을 깜빡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이 이런 사실을 말해주고 있지 않나 나름 생각을 해 본다.
이야기의 줄거리를 잠깐 보자.
1913년 ‘내’가 여행간 곳은 프로방스의 며칠을 걸어도 물조차 보이지 않을뿐더러 거센 바람에 야생 라벤더만 자라고 있는 황산이었다. 해발 1300미터가 되는 고산지대이다. 물을 찾아 헤매던 ‘나’는 겨우 양치기 노인을 만나는데 하룻밤을 묵으면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노인은 3년 전부터 그 황무지에 나무를 심어 이미 십만 그루를 심었다고 한다. 그 중 프로방스 특유의 환경 때문에 오직 2만 그루만 살 수 있는 와중에 만 그루는 또 다람쥐 때문에 죽게 될 것이고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만 그루 밖에 없다고 한다.
노인은 매일 밤 백 알의 도토리를 고르고 또 골라 이튿날에는 정성들여 심고 또 심었다. 지팡이로 구멍을 파고 도토리를 넣고 잘 다져주고 또 다른 구멍을 파고... 노인은 말이 없었고 그의 이름은 엘제아르 부피에였다.
5년을 전쟁터에서 보내고 다시 부피에를 찾았을 땐 이미 자그마한 숲이 이루어졌고 부피에는 살아 있었으며 그 뒤로 20년 동안 ‘나’는 매년 거르지 않고 부피에를 찾았다. 그러면서 서서히 아주 서서히 변해가는 땅의 모습을 봐왔고 부피에는 지칠 줄도 모르고 꾸준히 나무만을 심을 따름이다.
그러나 종내는 숲이 이루어졌고 또 한 차례의 전쟁이 지나가고 이러저러한 위험 속에서도 숲은 잘 보존되었다. 숲이 이루어지자 시내가 흐르기 시작하였고 갖가지 꽃들이 피어났다. 1945년 ‘내’가 마지막으로 부피에를 만나러 갔을 땐 전쟁이 지나간 숲은 다시 활기를 띄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8년 후 산은 완전히 원기를 회복했다. 곳곳에 마을들이 천천히 일어서기 시작했으며 1913년 처음 갔을 때 3명만이 살고 있던 마을의 황량한 모습은 흔적조차 없었고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부피에의 덕분에 행복을 되찾은 모습이었다. 엘제아르 부피에는 1947년 조용히 눈을 감았다.
본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특징적인 말들을 찾아볼 수 있다.
노인의 입장을 밝힌 말:
<나무가 없어 땅이 죽어간다고 말했다. 그리고 달리 할 일도 없어 자신이 이 땅을 살려보기로 했다고 했다.>
<앞으로 30년을 더 산다면 만 그루는 바다에 떨어뜨린 물 한 방울에 지나지 않는 더 많은 나무를 심을 것이다.>
<양들이 나무에 피해를 줘 팔았다.>
<오로지 나무만을 심을 따름이다. 전쟁도 그를 막지 못했다.>
‘내’가 본 것:
<노인은 말이 없었다. 그러나 자신감에 차 있었다.>
<또한 집다운 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의 노력을 알 수 있다. 또한 면도도 말끔히 하고 옷은 단추하나 달랑거리지 않았을 뿐더러 집안은 아주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그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평화로웠다.>
<20대 젊은이가 보기엔 50대란 할 일이란 죽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
<하느님만큼이나 능률적으로 일할 줄 아는 사람이다.>
<하느님은 그에게 천국을 보여준 게 틀림없다.>
<수없이 절망감과 싸웠던 것이다.>
<우리는 그가 완벽한 고독 속에서 살아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너무나도 철저히 고독해서 말을 잃었다.>
마을의 변화:
<처참한 마을의 상황, 황폐화된 마을>
그러나 숲이 이루어진 뒤로는
<시내가 흐르고 있었고 버드나무가 자라고 있었으며 마을들이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사람들이 시골로 모여들었고 숲은 진귀한 선물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노인은 그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오로지 나무만을 심을 따름이다.
이 소설을 본 뒤 무릇 ‘나’의 입장이든 주인공인 노인의 입장이든 모두 인내와 끈기에 존경심을 보이면서 그것을 거울로 현실속의 나 자신을 비춰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글귀의 저편에 우리에게 독특한 뭔가를 암시해주고 있는 듯싶다.
소설의 전반을 다시 떠올린다면 노인은 오로지 나무만을 심었을 따름이다. 그는 처음부터 원대한 꿈, 이상 같은 것은 없었다. 다만 달리 할 일도 없고 또한 나무가 없이 땅이 메말라 있고 그래서 땅을 살려보기로 한 것이 전부이다. 그는 나무를 심어서 얼마가 살 수 있고 어디에 어떤 나무를 심으면 대개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나무를 심는 행위 그 자체가 전부이다. 사람들이 그가 심은 나무를 베어가도, 전쟁이 기승을 부려도 그는 그런 데 전혀 관심이 없다. 그는 온갖 정성과 열정 그리고 모든 삶을 오로지 한그루 또 한그루의 나무를 심는 데만 쏟아 부었다. 그의 초점은 오로지 나무를 심는 행위 그 자체에 있었다.
하지만 이런 노인의 행위로 인해 노인이 상상도 못했던 결과를 살펴보자. 나무를 심기 시작해서 10년이 지난 뒤에는 숲이 이루어졌고 숲은 비와 눈을 잘 저장하여 시내가 생겨났으며 시내 주변에는 버들과 갖가지 꽃들이 자라나고 또 십여 년이 지난 뒤에는 노인의 나무들은 이미 울창한 삼림을 이루고 있었으며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고 또 십여 년 뒤에는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숲이 내린 선물들을 만끽하며 행복을 찾았다.
그러나 노인은 오로지 나무만을 심었다. 굳이 그의 꿈을 언급한다면 나무를 심어 숲을 이루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노인이 얻은 것은 숲뿐만이 아니라 시내, 꽃을 비롯한 숲의 식물들, 마을, 마을 사람들의 행복 등 많은 보너스를 얻었다. 이것은 노인이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을 보자. 요즘의 사람들은 초점을 어디에 맞추고 있을까?
고등학생들은 물론 수능에 초점을 맞출 것이고 대학교 학생들은 학점과 취업에 초점을 맞출 것이고 사회인들은 돈벌이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모두가 미래지향적이고 목표를 향해 허겁지겁 달려가는, 그리고 결과만을 바라보는 모습들이 안쓰럽다. 먼 훗날은 현재 이 시각, 그리고 하나 또 하나의 오늘이 모여져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나의 수능, 학점, 취업, 재부 역시 지금, 현재, 오늘의 매 한순간을 차곡차곡 쌓아간다면 얻어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초점을 결과, 목표, 꿈, 먼 훗날에 두지 말고 현재, 지금 이 시각에 두어 그것을 충실히 하는데 주력하면 원하던 결과에 도달할 수 있을뿐더러 많은 생각지 못했던 보너스도 가지게 되지 않을까? 저 나무를 심는 노인처럼 말이다. 오로지 나무를 심었을 뿐인데 오로지 나무 심는 일에만 충실했을 뿐인데 노인은 단 한그루의 나무도 또 단 하루도 빠짐없이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열정으로 그 일을 해 나갔으며 그러한 보기 드문 기적을 이루어냈던 것이다.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 대신에 초점만 살짝 바꾸어보자.
다음으로 “나”라는 주인공은 노인이 철저한 고독 속에서 일을 했음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너무도 철저히 혼자여서 말을 하는 것마저 잃을 정도로 노인은 외로움과 절망과 싸워야 했다고 했다. 그건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최소한 처음에는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나무를 심는 일에 대한 행복을 느끼고 그것을 즐기고 한그루 또 한그루의 나무심기에 충실한 노인은 사실 외로움과 절망과 만날 겨를이 거의 없었다고 본다. 그 증거로는 노인은 자신감에 차있었다고 했고 집다운 집에서 살고 있었고 집안은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으며 단추하나 달랑거리지 않는 옷을 입고 있었다고 했다. 외롭거나 절망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에게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싶다.
나는 내가 노인의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유학생활의 하루 중 수면의 6~7시간을 빼고 나머지 16~18시간을 연구실에서 혼자 보내는 나에게 많은 사람들이 외롭지 않냐고 가족이 보고 싶어 어떻게 사냐고 물어왔었다. 하지만 난 그들에게 대답해준 말과 같이 사실 정말 외로움을 느낀 적이 별로 없다. 왜? 그것은 난 내가 하는 일에 푹 빠져 있었고 그것을 즐기며 행복한 마음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외로움을 느낄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나무를 심는 노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저녁이면 도토리를 고르고 그것을 즐기면서 행복을 느끼고 낮이면 골라놓은 도토리를 하나하나 심어나가면서 행복한 마음을 스스로 즐기고 조금씩 그리고 아주 서서히 이루어지는 성과들을 보면서 또 행복하고 그것을 즐기고 이러는 과정에 30년이 넘는 세월은 어느새 흘러갔을 것이다. ‘나’의 친구가 한 말이 아주 일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노인은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다. 인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말이다.”
결국 우리는 무슨 일을 하던, 어떤 결과를 얻으려고 하던 그 초점을 현재, 이 시각에 두어 하고 있는 하나하나의 모든 것에 최선을 다 한다면 원하던 결과, 꿈이 어느새 조용히 내 곁에 와 있을 것이며 꾸준히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하는 일에 즐거움을 가져야 할 것이다.
삶의 초점을 바꾸어 현재에 충실하고 즐기되 최선을 다 하라! 그리고 변덕을 부리지 말라!
--제주특별자치도 제주도서관 독후감 공모전 가작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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