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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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 선생님 댓글:  조회:576  추천:0  2010-05-07
8    스티브 잡스 연설문 (애플 회사 CEO) 댓글:  조회:565  추천:0  2010-03-31
7    나무를 심은 사람(동영상)-장 지오노 댓글:  조회:541  추천:0  2010-03-30
6    랜디포시 [Last Lacture 마지막 강의] 댓글:  조회:510  추천:0  2010-03-30
5    "김예슬 선언" 무엇을 의미하나 댓글:  조회:1089  추천:0  2010-03-28
      지난 3월 10일 한국 명문대 SKY 중 하나인 고려대 경영학과 3학년 김예슬 양이 자퇴 선언을 했다. 이 충격적인 사건으로 한국 교육계는 뜨거워졌다. '작은 혁명', '김예슬 선언', 회원이 2000명을 육박하는 카페, 신문마다 쏟아져 나오는 칼럼과 시사, 심지어 '김예슬 사태'라고까지 표현하는 등등 터진 봇물마냥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도대체 김예슬 양이 무엇을 어떻게 선언을 했기에 이럴까? 하는 의문때문만이라도 그가 고려대에 붙였던 대자보 전문을 읽어보게 될 것이다.      우선 그 대자보 전문을 보자!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 둔다. G세대로 '빛나거나' 88만원 세대로 '빚내거나', 그 양극화의 틈새에서 불안한 줄타기를 하는 20대. 그저 무언가 잘못된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는 불안과 좌절감에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20대. 그 20대의 한 가운데에서 다른 길은 이것밖에 없다는 마지막 남은 믿음으로.   이제 나의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이지만 나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나는 25년 동안 경주마처럼 길고 긴 트랙을 질주해왔다. 우수한 경주마로, 함께 트랙을 질주하는 무수한 친구들을 제치고 넘어뜨린 것을 기뻐하면서. 나를 앞질러 달려가는 친구들 때문에 불안해하면서. 그렇게 소위 '명문대 입학'이라는 첫 관문을 통과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더 거세게 나를 채찍질해봐도 다리 힘이 빠지고 심장이 뛰지 않는다. 지금 나는 멈춰 서서 이 경주 트랙을 바라보고 있다. 저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취업'이라는 두 번째 관문을 통과시켜 줄 자격증 꾸러미가 보인다. 너의 자격증 앞에 나의 자격증이 우월하고 또 다른 너의 자격증 앞에 나의 자격증이 무력하고, 그리하여 새로운 자격증을 향한 경쟁 질주가 다시 시작될 것이다. 이제서야 나는 알아차렸다. 내가 달리고 있는 곳이 끝이 없는 트랙임을. 앞서 간다 해도 영원히 초원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트랙임을.   이제 나의 적들의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이 또한 나의 적이지만 나만의 적은 아닐 것이다. 이름만 남은 '자격증 장사 브로커'가 된 대학, 그것이 이 시대 대학의 진실임을 마주하고 있다. 대학은 글로벌 자본과 대기업에 가장 효율적으로 '부품'을 공급하는 하청업체가 되어 내 이마에 바코드를 새긴다. 국가는 다시 대학의 하청업체가 되어, 의무교육이라는 이름으로 12년간 규격화된 인간제품을 만들어 올려 보낸다.   기업은 더 비싼 가격표를 가진 자만이 피라미드 위쪽에 접근할 수 있도록 온갖 새로운 자격증을 요구한다. 이 변화 빠른 시대에 10년을 채 써먹을 수 없어 낡아 버려지는 우리들은 또 대학원에, 유학에, 전문과정에 돌입한다. 고비용 저수익의 악순환은 영영 끝나지 않는다. '세계를 무대로 너의 능력만큼 자유하리라'는 세계화, 민주화, 개인화의 넘치는 자유의 시대는 곧 자격증의 시대가 되어버렸다.   졸업장도 없는 인생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자격증도 없는 인생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학습된 두려움과 불안은 다시 우리를 그 앞에 무릎 꿇린다. 생각할 틈도, 돌아볼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이 또 다른 거짓 희망이 날아든다. 교육이 문제다, 대학이 문제다라고 말하는 생각 있는 이들조차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성공해서 세상을 바꾸는 '룰러'가 되어라",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 나는 너를 응원한다", "너희의 권리를 주장해. 짱돌이라도 들고 나서!" 그리고 칼날처럼 덧붙여지는 한 줄, "그래도 대학은 나와야지".   그 결과가 무엇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도. 큰 배움도 큰 물음도 없는 '대학大學'없는 대학에서, 나는 누구인지, 왜 사는지, 무엇이 진리인지 물을 수 없었다. 우정도 낭만도 사제간의 믿음도 찾을 수 없었다. 가장 순수한 시절 불의에 대한 저항도 꿈꿀 수 없었다. 아니, 이런 건 잊은 지 오래여도 좋다.   그런데 이 모두를 포기하고 바쳐 돌아온 결과는 정말 무엇이었는가. 우리들 20대는 끝없는 투자 대비 수익이 나오지 않는 '적자세대'가 되어 부모 앞에 죄송하다.   젊은 놈이 제 손으로 자기 밥을 벌지 못해 무력하다. 스무 살이 되어서도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모르고 꿈을 찾는 게 꿈이어서 억울하다. 이대로 언제까지 쫓아가야 하는지 불안하기만 한 우리 젊음이 서글프다. 나는 대학과 기업과 국가, 그리고 대학에서 답을 찾으라는 그들의 큰 탓을 묻는다. 깊은 분노로. 그러나 동시에 그들의 유지자가 되었던 내 작은 탓을 묻는다. 깊은 슬픔으로.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것을 용서받고, 경쟁에서 이기는 능력만을 키우며 나를 값비싼 상품으로 가공해온 내가 체제를 떠받치고 있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이 시대에 가장 위악한 것 중에 하나가 졸업장 인생인 나, 나 자신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더 많이 쌓기만 하다가 내 삶이 한번 다 꽃피지도 못하고 시들어 버리기 전에. 쓸모 있는 상품으로 '간택'되지 않고 쓸모 없는 인간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 이제 나에게는 이것들을 가질 자유보다는 이것들로부터의 자유가 더 필요하다. 자유의 대가로 나는 길을 잃을 것이고 도전에 부딪힐 것이고 상처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삶이기에, 삶의 목적인 삶 그 자체를 지금 바로 살기 위해 나는 탈주하고 저항하련다.   생각한 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행동하고, 행동한 대로 살아내겠다는 용기를 내련다. 학비 마련을 위해 고된 노동을 하고 계신 부모님이 눈 앞을 가린다. '죄송합니다, 이 때를 잃어버리면 평생 나를 찾지 못하고 살 것만 같습니다.' 많은 말들을 눈물로 삼키며 봄이 오는 하늘을 향해 깊고 크게 숨을 쉰다.   이제 대학과 자본의 이 거대한 탑에서 내 몫의 돌멩이 하나가 빠진다. 탑은 끄덕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작지만 균열은 시작되었다. 동시에 대학을 버리고 진정한 大學生의 첫발을 내딛는 한 인간이 태어난다. 이제 내가 거부한 것들과의 다음 싸움을 앞에 두고 나는 말한다.   그래, "누가 더 강한지는 두고 볼 일이다".   2010년 3월 10일 김예슬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자퇴하며 출처 :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 오마이뉴스  
4    코칭에 눈을 뜨다 댓글:  조회:356  추천:0  2010-03-27
코칭수업 후기 김해영 나는 원래 호기심이 별로 없는 사람이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일에도 별로 관심이 많지 못하다. 길을 가다가 사람들이 몰려 있어도 그런가보다 하고 지나치고 만다. 또한 화장실 문을 따고 들어갈 때 마침 나오는 사람과 부딪칠 뻔해도 난 놀라거나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그래서 매번 그런 일이 생길 때마다 모르는 사람은 다 내 잘못이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것은 대부분 사람들의 초점이 ‘어머 깜짝이야’하고 놀랐다는 내색을 하는 상대방에게 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난 이성적이고 냉정한 것이 과도하다. 바늘로 찔러도 피한방울 안날 것이라는 소리를 곧잘 듣곤 한다. 그래서 웬만해서는 감동을 할 줄 모르고 감동을 줄줄도 모르는 아주 냉혈이다. 내가 지금까지 마음을 진정으로 움직여본 사람은 오직 두 사람 즉 나의 어머니와 남편이다. 그래서 아는 선생님이 나보고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크게 충격 받았냐고 하시면서 그 충격을 본인은 인정하지 않지만 컸을 거 같다고 하신다. 그런 충격이 남편을 만나면서 저도 몰래 다소 완화될 수 있었고 그 두 사람에 마음을 닫고 열었으니 심장이 움직였을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럴지도 모르지 아버지도 난 한번도 보고 싶은 적이 없고 내 속으로 낳은 자식도 솔직히 마음 죄이고 아파하면서 이렇게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무치게 그리워한 적이 없다.   어릴 적 부모님의 꾸준한 전쟁과 곧 이어지는 냉전은 항상 나를 불안 속에서 떨게 했고 아버지가 술 마시거나 외출을 하는 날이면 난 집에 있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그러는 걸 쭉 지켜본 내가 생전 병원을 모르시던 엄마가 입원 사흘 만에 돌아가시자 모든 원망과 회의가 무의식속에 스며들었나보다. 마음이 얼어붙은 느낌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말이다. 그러한 가정환경 때문이었는지 난 겉으론 항상 밝은 모습이었지만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기 시작한 것이 혼자 기숙사 생활을 하기 시작한 중학교 1학년 때부터였다. 뭐가 그리도 슬프고 괴로웠던지. 그래서 그때부터 써온 글들을 지금 읽어보니 두터운 어둠이 쫙 깔린 것이 마치 생면부지 다른 사람이 남긴 글 같았다. 이러한 상황이 남편을 만나고도 2년간 지속되었고 줄곧 괴로웠다. 자기모순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그런 깊숙한 수렁 속에 빠져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내 마음 속의 얼음이 녹기 시작을 한 것은 더없이 화목한 남편의 가족들의 관심과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나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남편, 뭔가 강요하지 않고 자기가 솔선수범하는 데 내가 물들어 자연히 따라 마음을 열게 된 것 같았다. 이제 불과 5년쯤 된 것 같다. 내가 자꾸 비뚤어져 가고 또 얼려고 하는 자신의 마음을 노력하여 추스르기 시작한 것이 말이다. 한국에 와서 좀 더 나아졌지만 솔직히 난 한국에 와서도 바다한가운데 섬마냥 자기스스로를 고립시켰다.   다행히 고칭수업은 그동안도 많이 노력해왔던 나 자신에게 더없는 힘이 된 것 같았다. 우선 난 경청을 하는 성격이 못되었다. 불안한 마음 때문에 사람을 만나게 되면 자꾸 대화가 끊어질까봐 우려가 되어 내가 주절주절 없는 말도 만들어가려고 한다. 그러한 습관이 코칭을 공부하기 시작한 뒤로는 브레이크를 걸 수가 있게 되었다. 조용히 다른 사람이 말할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력과 그 사이의 어색함을 참을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아직은 상당히 부자연스럽지만 내가 내 스스로의 문제점을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노력을 통해 개선하고자 함이 뚜렷해졌다. 또한 전에는 자신의 주관 속에 빠져 한번 생긴 관념이나 견해, 주장 따위가 반드시 그리고 추호의 잘못도 없이 꼭 맞을 거라는 집착을 했었다. 그러나 코칭수업은 나로 하여금 상대방의 입장에서 제3자의 입장에서, 그리고 나의 입장에서 등등 다 각도의 생각을 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상과 같이 그동안 내 몸에 배였던 여러 자비심을 없애고 배려하는 마음을 키우기 위해 줄곧 노력하는 자신에게 더없는 밑거름이 되어서 좋았다.   나에게 이제 남은 것은 코칭에서 배운 여러 가지 스킬들을 내 몸에 배이도록 습관 시키는 것이고 내가 아팠던 것처럼 나와 동병상련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최대한의 도움을 주고 싶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끔씩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도 갖게 되었다. 학생들을 가르침에 있어서도 학생들의 마음을 읽고 그들의 말들을 하나하나 경청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겨서 더욱 알찬 수업을 만들 수 있었던 거 같았다. 타인을 잘 코칭하려면 우선 자신을 잘 코칭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도 아울러 해보았다. 그런데 영어단어가 너무 많아서 어려운 점도 있었고 이해를 잘 못한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코칭수업을 통해 인생을 보는 안목이 달라진 것이 핵심이 아닌가 싶다.
3    5일간의 체험이 남긴 여운 댓글:  조회:360  추천:0  2010-03-27
5일간의 체험이 남긴 여운 --재외동포재단 제10회 문학상 대상 수상작 (출처: 코리안넷 재외동포재단 홈페이지) 대상│김해영     중국 조선족 사회는 타국에서 사는 일개 소수 민족사회인 만큼 문제가 많다. 여러 가지 문제가 많은 가운데 우리는 그것을 뭐 그렇거니 하고 살아왔고 거기에 대해 별달리 생각을 가져본 적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대학입시 채점은 나로 하여금 중국 조선족에 대하여 차분히 생각하도록 하였고 또한 기형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조선족 사회의 심각성을 깨닫게 하였다.       한 장 한 장의 입시 답안지를 채점하면서 느낀 민족의 이주와 정착과 그 속에서 살면서 겪은 기쁨과 슬픔, 쓰고 단맛을 체험하는 우리 민족, 그렇게 힘들고 어려우면서도 민족의 중심을 잃지 아니하고 자녀들의 교육을 중히 여기는 민족의 전통을 지켜온 우리 민족, 이주 사회의 타민족과 경쟁하면서도 민족의 얼과 넋을 고수하여 온 우리 민족, 이 월경의 민족은 중국 이주민 사회에서 진정 힘겹게 버텨왔다. 백여 년의 타향살이에 타향이 아니라 고향이 되어버린, 세대가 바뀌어도 여러 세대가 바뀌었을 터 그런데도 뭐가 그리 서러운지 생각만 하면 가슴이 울렁거려지고 민족의 느낌이 가슴에 와 닿는다. 그러면서 요즘 들어 부쩍 커지는 조선족 사회의 문제들, 잘못되어 가고 있는 조선족 사회의 현실들이 나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후배들의 정성과 땀과 희망의 열매가 담겨진 이 한 장 한 장의 시험 답안지를 보면서 나는 나의 체험을 통하여 보고 느끼고 경험했던 이야기, 우리 민족에 대한 나만의 견해와 느낌을 적으려고 한다. 뿐만 아니라 5일간의 채점은 나로 하여금 또 다른 색다르고 쓰고 단 긴 여행을 하게했다.       그럼 이제부터 5일간의 체험을 독자들께 소개해 드리고 그 뒤에 이어지는 나 자신의 보고 듣고 느낀 소감들을 쓰도록 하겠다.       첫날 묘한 느낌       2007년 6월 나는 석사졸업 논문심사를 마치고 한 달만 있으면 졸업 예정인 대학원생이었다. 이제는 석사논문도 다 통과되었고 시간적 여유도 있는지라 나는 외국어학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날도 수업이 끝나고 퇴근하려던 참인데 갑자기 학교에서 전화가 와서 밑도 끝도 없이 나더러 장춘에 있는 동북사범대학에 대학입시 채점을 가라는 것이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나는 부랴부랴 달려갔더니 거기 선생님이 이미 기다리고 계셨다. 선생님은 전부터 안면이 있는 분이었다. 논문 심사 통과하던 날 축하 파티에서 얼굴을 뵌 적이 있었다.       주의사항을 듣고 학교를 나오는데 지인 선생님을 만났다. 그 선생님은 어떻게 내가 채점을 가게 된 것을 알고 계셨다. 그러면서 자기도 여러 번 채점을 다녀왔었는데 채점장에서는 뭐니 뭐니 해도 민족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의미심장하게 얘기하면서 중국에서는 민족의 대결이 심하기에 잘하는 애일수록 점수를 잘 고려해서 한껏 주어라고 당부하시는 것이었다. 난 시간이 없었기에 일단 간단한 인사 뒤에 곧장 나와서 짐정리를 하고 기차역으로 가서 같이 가는 일행을 만나 기차에 몸을 실었을 때는 내 몸은 이미 땀벌창이 되어 있었다.       그때서야 나는 비로소 그날 오후 4시부터 8시까지의 4시간 사이에 일어난 일들을 돌이켜 볼 겨를이 있었다. 학원에서 학교로 부랴부랴, 학교에서 집으로 부랴부랴, 짐정리 부랴부랴, 대충 식사하고 기차역으로 부랴부랴 참 뒤꽁무니에 불이 난 것 같이 뛰어다녔다. 채점? 참 생각지도 못한 희사인 것 같았다. 별로 큰 벼슬을 하러 가는 느낌이 들기도 하면서 또한 한편으로는 가서 5일 동안 갇혀서 사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생각만 하다가 갑자기 입가의 미소가 사라지면서 얼굴과 마음이 좀 굳어졌다. 그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이 났던 것이다. 왜 민족을 생각하고 또 왜 답안을 잘 쓴 애들을 각별히 신경 쓰라고 했지? 그래 혹시 조선족 애들이 타민족 애들에게 질까봐 걱정이 되어서 그러는 걸지도 몰라. 요즘은 한족 애들이 공부 아니 시험공부를 너무 잘 해서 조선족 애들이 어지간히 해서는 걔네들을 이기기 어렵긴 하지. 다른 건 아무 것도 신경 안 쓰고 오로지 입시만을 위해 공부하는 애들을, 조선족도 그렇게 열심히 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여러 가지 객관적인 여건 때문에 똑같이 노력을 함에도 불구하고 조건에서만 보아도 한족 애들한테 한풀 꺾이는 셈이다. 그런데 조선족 애들한테는 이런 조선족이 채점을 한다는 특권이 있다. 아무튼 난 이런 저런 묘한 기분에 잡혀 있었다. 하지만 너무 피곤했던 지라 이내 골아 떨어졌고 기차는 온 밤을 달려 새벽에 서서히 장춘 지역에 들어섰다.       6월의 아침 공기는 그래도 청신하고 냉장고에 넣어둔 냉수처럼 시원하였다. 새벽 5시에 깨어나 세수를 하고 나니까 내가 몸이 장춘에 와 있구나 하는 실감이 들었다. 마치 내가 시험 보러 온 것 같이 마음이 설레는 것을 나는 느낄 수가 있었다. 지난번 갔다 온 사람들한테나 혹은 다른 사람들한테 그 내막을 듣기라도 했으면 어떻다는 것을 알 텐데 전혀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다 보니 막막하였다. 내가 지금까지 채점에 대해 전혀 몰랐다는 것은 대학 채점 인원의 비밀 보장이 잘 되었다는 것으로 설명할 수도 있는 것 같다. 비록 지금 많은 사람들이 같이 가고 있지만 거의 모르는 사람들이고 하니까 자신이 지금 지옥으로 가는지 아니면 천당으로 가는지 채점을 가는지 막 헷갈릴 지경이다.       내가 이런 저런 잡생각을 하는데 열차는 장춘 역에 도착했고 우리는 내려서 동북사범대학교를 달리는 전용 버스에 몸을 실었다. 지금껏 처음 동북사범대학교에 가는데 캠퍼스가 너무나도 크고 아름다웠다. 전국 각지의 대학교 교사들을 여기서 양성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부럽고 또 존경스러워졌다. 우리가 묵어야 할 곳은 유학생 회관이었다. 의외로 일인 일실이었고 너무 좋았다. 난 들어가서부터 우리를 어떻게 감금할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전혀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휴대폰도 조용히 내 곁에 있고 달라진 것이 없었다.       팀장님이 오후에 채점에 대해 회의를 하니까 한 시에 회의실에서 모이라는 것이다. 그 뒤로 난 온 오전을 잡생각으로 보냈다.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난 조선족 애들의 운명을 좌우지하는 대학입시 채점을 위해 왔다. 나는 곧 5천여 명의 조선족 애들의 시험지를 맞이할 것이다. 참 그 순간의 심정과 느낌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뭐랄까 뿌듯함, 민족적 긍지감 이렇게 표현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기분은 참으로 이렇다 말할 수 없이 묘하였다. 그러면서 나는 자연히 내가 대학입학 시험 볼 때가 생각났다.       나는 연변 여덟 현 중에서도 조선족이 제일 적고 또 조선족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가 하나씩 있을 뿐더러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통합인 돈화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연변 여덟 현 중 다른 도시에는 조선족들이 반수 이상을 차지하지만 돈화에서 만큼은 조선족의 적음을 확연히 감지할 수 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그나마 애들이 많아 초등은 한 학년에 5~6학급, 중학교는 3~4학급으로 되어 있지만 고등부는 문과와 이과 두 학급뿐이며 그것도 돈화시의 애들과 기타 7개 도시에서 모여온 애들이 합쳐서 이루어진 것이다. 한 학급에 35명 좌․우 두 학급을 합쳐서 도합 70명이 고작이다. 사실 학생 내원도 다 애들 자신이 원해서 온 것이 아니고 연변1중이나 용정2중과 같은 연변에서 유명한 중점고등학교에 지망했는데 못 붙었거나 아니면 진학 시험은 봤는데 아무데도 못 붙었거나 하는 애들이 주로 오는 것이다. 나도 용정2중에 몇 점 차이로 아쉽게 못 붙어 오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규모도 작고 애들도 적고 또한 교사도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를 했고 선생님들도 열심히 가르쳤다. 사실 돈화는 연변에서 경제적으로 비교적 부유한 도시라서 교사들을 남겨 둘 능력이 있었다. 그래서 예전부터 오랫동안 비교적 좋은 선생님들이 많이 계셨다. 비록 연세 드신 분들이지만 그들은 오랜 시간 쌓아온 경험으로 정성을 들여 우리를 가르쳤고 대학입시 전까지도 지극 정성으로 가르쳤다.       나는 문과 반을 다녔는데 우리 담임선생님은 특히나 민족애가 강하신 분이다. 그때 우리의 조선어문 교과서는 권 마다 한 단원의 조선 문학이 실려 있었는데 거기에는 고전문학, 시 등등이 있다. 지금 생각나는 것을 대충 적어본다면 “탈출기”, “허생전”, “양반전” 등과 같은 문학 소설이 있는가 하면 또한 “진달래꽃” 등과 같은 시도 있었다. 번마다 조선어문 수업시간이 되면 민족적 긍지에 젖어 감개무량해 하시는 선생님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 나의 내면세계가 민족적 긍지로 풍부해지게 된 것도 역시나 그분, 예순이 되시는 담임선생님의 영향이 컸으리라 믿는다.       이렇게 우리 민족의 아이들에게 심혈을 쏟으며 가르치시던 선생님께서 대학입시의 전날 우리에게 너무나도 놀라운 말씀을 하셨다. 선생님은 우리더러 내일이 곧 대학입시를 보게 되는 날인데 내일 만큼은 시험장에서 무슨 수를 쓰더라도 시험지를 꼭 빈틈없이 채우고 모르면 베껴서라도 쓰라고 하시면서 최선을 다해 응시할 것을 부탁하셨다. 그렇게 엄격하시고 평소에 조금도 흐트러짐을 용서하지 않으셨던 선생님이신데 대학입시를 앞두고 커닝까지 권하시면서 입시에 최선을 다하라고 하시는 이유가 뭐였을까? 그때 우리는 별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다만 선생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니까 좀 생각 밖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하지만 시험이 끝나고 전 돈화시 5백 명의 문과 수험생 중에서 유일한 조선족 학교인 우리 학교 35명의 수험생이 거의 앞자리를 차지하자 선생님의 얼굴에서는 보기 드문 만족스러운 표정을 볼 수가 있었다. 나는 그때 5백 명 중에서 39등을 했던 것이다. 그때 우리가 느낀 것은 단지 선생님께서 우리더러 대학에 많이 붙으라고 또한 전 시의 순위에서 앞자리에 가라고 그런 말씀을 하신 줄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8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 보면 민족의식이 그렇게 강하셨던 선생님께서 그렇게 단순한 목적으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은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5백 명 중에서 다만 35명의 우리 민족의 아이들이 나머지 450명의 타민족 애들과의 경쟁에서 나아가 전국 수만의 입시생들과의 경쟁에서 이기도록 하기 위한 너무나도 소박하고 간절한 바람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들을 사랑하는 담임선생님의 그 정성과 그 마음을 또 한 번 되뇌고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나 엄정하시고 정직하시고 또한 빈틈이 없으셨는데 자기 자식과도 같은 민족의 학생들이 타민족과 대결한다고 하니까 내면속의 소박한 그 소망까지 표출하시는 선생님, 아마도 조선어문 선생님이라서 더욱 그러셨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도 우리 민족이 간도 땅에서 조선어문이라는 교과가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벌써 정오가 되었다. 나는 얼른 준비하고 멤버들과 같이 식사하고 회의 장소에 갔다. 회의 장소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연변에서 간 우리 채점 팀은 수학 팀, 문과종합 팀, 조선어문 팀으로 조성되었는데 각 팀의 조성 인원 또한 다양하였다. 나는 전공이 역사니까 문과종합 팀이었고 우리 팀은 연변대학에서 총 9명, 그 중 정치학과 3명, 지리학과 3명, 역사학과 3명으로 구성되었다. 연변1중에서 2명의 교사가 파견되어 연변에서 간 우리 문과종합 팀은 도합 11명이었다. 그런데 채점은 단순 우리 혼자 하는 것이 아니고 동북사범대학 채점위원회에서 선발한 장춘 각 대학의 대학원생들과 함께 파트너가 되어 채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연변에서 간 팀원과 장춘의 팀원이 각각 1명씩 파트너가 되어 연변 팀원이 팀장이 되어 다시 팀을 묶고 같은 문제를 채점하는 것이다. 그 외 수학 팀과 조선어문 팀의 상황은 나는 잘 모른다. 왜냐하면 누가 말해 주는 사람도 없거니와 서로 부탁 같은 것을 거래할까봐 거의 정보를 비밀에 붙이고 있고 또 나 자신도 거기에 대해 알고 싶지도 않았거니와 알려고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회의실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각 팀이 다 와 있었고 또한 이번 채점을 담임한 총 책임자도 와 계셨다. 총 위원회에서 이번 채점에 대한 결의 및 공정한 채점을 선서한 뒤에 각 채점 팀은 따로따로 장소를 정해 각기 회의를 했다.       우리 팀을 책임진 동북사범대학교 채점위원회 위원께서는 우리한테 채점 모범답안지를 나누어주고 거기에 대해 설명을 자세히 해 주셨다. 그런데 뜻밖에도 모범 답안지는 중국어로 되어 있었다. 문과종합 시험은 객관식 문제와 주관식 문제로 나뉘어졌는데 객관식 문제는 이미 컴퓨터로 채점이 다 되어 있어 우리는 주관식 문제만 채점을 하면 된다. 주관식 문제의 시험 답안지들은 이미 15개 부분으로 나뉘어 컴퓨터에 스캔되어 저장되어 있고 이제 우리 연변의 11명과 장춘의 11명이 둘씩 파트너가 되어 11팀으로 묶은 뒤 각 소조가 맡을 부분을 택해서 거기에 해당하는 비밀번호를 입력하면 채점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우선 각기 파트너를 찾았다. 나는 동북사범대학 대학원생과 파트너가 되었고 우리는 모범답안지를 보면서 채점 원칙과 요점들을 정하기 시작했다. 비록 총체적인 채점 원칙과 규정은 있지만 그에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는 채점자들이 자율적으로 자기들만의 채점 원칙과 요점을 정할 수 있다. 특히 우리가 받은 모범 답안지는 중국어로 되어 있기 때문에 우선 나름대로의 채점 원칙을 정하고 거기에 두 사람이 호흡을 맞추어야 채점할 때도 애로가 없다. 회의 장소에서 거의 다 정돈이 된 뒤 우리는 도서관에 설치되어 있는 채점 장소로 이동했다. 오후에는 시험 채점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채점장에 들어가기 전에 위원장님께서 출입증을 발급하고 날마다 출입증을 지참하고 입장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채점장은 도서관의 전자 도서실에 설치되어 있으므로 거기는 이미 다른 학생들이 출입을 못하도록 봉쇄되어 있었다. 채점장은 컴퓨터 몇백 대가 들어 있는 아주 대형의 전자 도서실이었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최소 사흘을 컴퓨터 앞에서 채점을 해야 했다. 채점의 과정을 말로는 거의 들었지만 아직 직접 자기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순간까지도 신기하고 마음은 참으로 뭐라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싱숭생숭하였다.       우리는 각자의 파트너와 옆자리로 컴퓨터 앞에 앉았고 컴퓨터를 켜고 채점 프로그램에 들어갔는데 비밀 번호 입력창이 떴다. 그리고 아까 받은 비밀 번호를 입력하였더니 학생들의 시험지가 떴다. 시험지는 보기 좋게 확대되어 우리가 채점할 부분만 스캔이 되어 있었고 그 옆에는 점수를 입력하는 공란이 있는데 거기에 해당 문제의 점수를 쳐 넣고 Enter 건반을 치면 다음 시험지로 넘어간다. 그런데 이미 채점한 시험지는 다시 보거나 점수를 고칠 수 없다. 그리고 파트너와 똑같은 부수의 시험지를 매기지만 각 컴퓨터에 저장된 시험지를 모두 뒤섞어 놓아서 두 사람이 채점할 때 뜨는 시험지는 같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두 사람이 채점을 할 때 채점 요령을 잘 장악해서 극력 매치를 얻어야만 채점이 원만해 질 수 있다. 그리고 점수를 입력하는 공란을 마우스로 클릭하면 이미 입력된 점수가 있는데 거기서 선택해서 점수를 줘도 된다.       나와 파트너가 맡은 부분은 역사자료 분석문제의 1.2.3 작은 문제였는데 총 14점이다. 1번 4점이고 2번과 3번이 각각 5점이다. 모범 답안지는 중국어고 애들은 조선어로 답안을 썼기 때문에 우리는 우선 그 모범 답안을 분석하고 채점에 필요한 중심 단어들을 뽑아내야 했다. 그런데 중국어 한 단어가 조선어로 번역을 하면 아주 많은 단어가 나오는 것은 물론이고 또한 그와 뜻이 비슷한 말을 써도 정확하다고 해 줘야 하기 때문에 채점의 난이도가 확 높아졌다. 우리는 일단 모범 답안지에 있는 중심 단어들을 체크해 놓고 그대로 채점을 해 보기로 했다.        그런데 시험으로 약 20~30부를 채점해 보았더니 모범 답안과 다소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하면 안 되겠다 싶어서 다시 그 요령을 모색하였다. 관건은 우리 손의 답안지는 중국말이고 원본 시험 문제지 역시 중국말이며 애들은 조선어로 된 시험문제를 보면서 조선말로 답안을 썼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서 이럴 때는 중국어로 된 모범 답안지대로 애들 점수를 다 깎아 버리면 애들은 시험을 완전히 망치고 말게 되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시험으로 채점을 한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몰랐다. 이러한 전산화 채점도 폐단이 없는 것은 아닌 듯하다. 수동 채점을 한다면 한 뭉치의 시험 답안지를 두루 살펴보고 다시 모범 답안과 대조하면서 채점자의 요령을 정할 수 있겠지만 이것은 단 자신이 현재 채점하는 애의 시험지만 볼 수 있기에 한 100부를 채점하기 전까지는 도저히 감을 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뒤에 서서히 감을 잡기 시작하면 앞에 100부속의 애들은 자연히 피해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채점은 생각보다 쉽지가 않았다. 또한 애들은 조선어로 된 시험문제를 보면서 쓴 답안에는 그 번역본이 없다면 아무리 우리가 번역한 것과 비슷하다고 하더라도 혹시 가다가 중심 단어가 다른 경우도 있었다. 특히 자료 분석 문제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참 여러 가지로 쉽지가 않았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정식 채점이 아니고 아직은 시험 단계니까 우리는 나름대로 한가로이 해결책을 찾았다. 나와 파트너는 우선 모범 답안지를 분석하면서 중심 단어를 잘 체크하고 조선어로 표현될 수 있는 단어들을 확보함과 동시에 원문 시험 문제 중의 자료를 검토하여 모범 답안의 정확도를 다시 한 번 확인하였다. 우리는 학생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시험지만 놓고 모범 답안대로 막 점수를 매길 수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같은 민족의 앞날에 달려 있는 중요한 문제인 만큼 우리의 어깨도 무거웠다. 자칫하다가 우리의 소홀함으로 인해 대학갈 애들이 대학 못가고 인생이 뒤바뀌는 일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50부를 시험으로 채점을 해 보았다. 그 결과 어느 정도 감은 잡혔으나 두 사람의 매치가 어느 정도인지는 전혀 모르는 상황이었다. 우리 두 사람이 한 사람당 50부를 매겼다고 해도 그것은 어쩌면 100명 아이의 시험지를 매긴 셈이 되기 때문이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두 컴퓨터에 저장된 시험지의 부수는 똑같지만 순서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이 정도까지 되어 우리는 뭐 다른 방법을 강구할 수가 없었다. 그냥 내일부터 시작되는 정식 채점에서 진일보 매치를 얻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저렇게 시간은 오후가 다 가고 저녁 시간이 되었다. 시험 단계의 채점이라서 그런지 아직은 실감이 나지 않고 오히려 이렇게 채점을 하는 것이 재미있기도 하고 또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민족적 사명감에 마음이 두근거리기도 하였다. 아무튼 참 기분은 어떻다 말할 수 없을 만큼 묘하고 돌아가는 모든 일들이 신기하기만 했다. 그 전날 집에서 떠나서 장춘에 도착하여 이 시간까지 불과 하루이지만 난 마치 일주일 열흘이 지난 듯 길어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지루해서 길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이 24시간 동안 너무나 많은 느낌들이 내 머릿속을 왔다 갔다 하여 오는 감각인 것 같다.       지금 나는 이미 1년이 지난 뒤에 이 글을 쓰기 때문에 아무렴 그때그때의 마음을 완연히 드러내기는 어렵지만 솔직히 시험 채점을 하는 그날 오후까지도 나의 채점이 그렇게 중요하고 우리 민족의 애들의 운명이 나의 손에 잡혀있다는 것을 실감을 하지 못한 상태였던 것이다. 다만 내가 우리 조선족 애들의 시험지를 매기고 있구나, 그리고 열심히 해야지 하는 그러한 것들만 생각했을 뿐이고 마음 또한 내가 대학입시라도 본 것처럼 긴장되어 있어 초보 채점자임을 숨김없이 나타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우리 민족 아이들은 그나마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험지를 자기 민족의 선배님들께 맡기니까 말이다. 이러한 때는 민족애와 민족적 자존심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것 같다. 아무튼 채점행의 첫날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또 위와 같은 경험을 하면서 하루를 마무리했고 저녁에는 같이 동행한 선생님들과 장춘의 채점 인원들과의 만찬이 있었고 그 뒤 숙소에 돌아가 아무 생각 없이 곯아 떨어졌다.       이튿날 어려운 채점       타지라서 그런지 아침에 생각 밖에 일찍 깨어났다. 혼자 독실이어서 좋다는 생각도 했고 아직은 내가 채점하러 왔다는 생각이 별로 안 들었다. 갑자기 학교에서 만났던 선생님의 부탁이 떠올랐다. 무엇을 암시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중국에서는 민족의 대결이 심하다. 그게 과연 뭐였을까? 그런데 그때 같이 간 멤버가 이따가 아침 먹기 전에 팀장님 실에서 회의를 한다는 것이다. 뭘 말하려고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난 그냥 내가 하던 생각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중국의 일개 소수 민족으로서 타민족과의 대결에서 이기고 성공하려면 아무 생각 없이 노력만 해서는 안 된다. 민족이 합쳐야 한다. 그 선생님도 나에게 이런 것을 내비치려고 한 말씀이 아닐까 싶다.       여기서 잠시 내가 아는 중국의 시험 제도와 채점 방식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겠다.   중국은 워낙 나라가 크다보니 각 지역마다 대학입시제도가 다소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중국의 대학입시는 34개 성, 자치구, 직할시 및 특별시에서 대체적으로 통일 시험을 본다. 일부 시범 시험제도에 해당되는 지역은 특수 경우일 때도 있지만 거의 통일로 된 시험을 보게 되어 있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입시 제도는 대개 그 대략이며 주로는 동북의 길림성과 흑룡강성에 한한 것이다.       시험은 해마다 6월 7일에서 8일까지 이틀 보게 되어 있고(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2000년까지만 해도 조선족은 시험기간이 사흘이었다.) 시험과목은 이과와 문과를 나누어 이과는 수학, 어문, 영어와 화학, 물리, 생물을 합친 종합 시험을 보고, 문과는 수학, 어문, 영어와 역사, 정치, 지리를 합친 종합 시험을 본다. 여기서 수학은 이과와 문과의 시험 내용이 다를 수 있고, 일부 지역에서는 외국어를 영어 대신에 일본어나 러시아어를 시험보기도 한다. 총 점수는 750점인데 수학, 어문, 영어가 각각 150점씩이고 종합이 300점이다. 언어가 있고 학교가 있는 각 소수 민족은 한문으로 된 수학, 종합 두 과목은 번역을 해서 시험을 보게 되어 있으며 내가 고등학교 졸업할 때쯤만 해도 어문은 한문과 그 민족 어문으로 두 과목 시험을 본 뒤 그것을 각기 50%씩 봐서 성적으로 했었다. 즉 조선족과 같이 언어가 있고 학교가 있는 소수민족은 어문을 두 과목 봐야 하며 조선족은 한어문과 조선어문을 봐야 했다. 그런데 2002년께부터는 한어를 회시처럼 졸업 시험으로 대체하여 먼저 보고 정식 대학입시 때는 다만 조선어문 시험만 보게 되었다. 그래서 애들도 부담을 적지 않게 덜었고 성적 또한 예전보다 좀 더 향상된 감이 들었다.           그리고 학생들의 대학 지원은 각 성마다 조금씩 틀리는데 길림성과 흑룡강성의 경우를 본다면 길림성에서는 시험 전에 지원을 먼저 하고 흑룡강성에서는 시험을 본 뒤 표준 답안과 대조해 본 자신의 점수에 의해서 지원을 한다. 지금 중국은 한창 교육개혁을 진행하는 때인지라 이 역시 해마다 정책이 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미 몇해 째 이리 변하고 저리 변하고 하면서 최선의 정책을 모색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매년 4월이면 중국에서는 대학 입학지남이라는 대입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하여 입시지원 도우미 책을 출간한다. 거기에는 전국에서 학생을 모집하는 대학이 모두 들어있고 각 대학의 근년 상황과 모집 정원, 그 전해 점수표, 그리고 중점대학교와 일반대학교 등 대학을 지원함에 있어서의 참고할 모든 것들이 나열되어 있다. 하지만 중국의 대학교 지원은 한국처럼 여러 학교를 동시에 지원할 수 없고 또 동시에 여러 학교의 합격 또한 받을 수 없다. 중국에서 동시에 여러 학교를 지원한다는 개념은 단지 계단식으로 한 단계씩 내려오면서 많은 학교를 지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제1단계는 주로 각 성의 초생사무실에서 제일 먼저 심사하는 학교들인데 이를테면 군사학교라든가 사범류 학교라든가 아니면 중앙에서 정한 특수한 학교 – 서부개발지역의 학교 혹은 편벽한 지역의 학교들이 포함되어 그 중 세 개 내지 네 개 학교를 지원할 수 있고 제2단계에서는 중점대학교이고 제3단계에서는 보통대학교이며 제4단계는 전문대학 혹은 사립대학들인데 모두 세 곳을 지망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도 사실은 각 단계의 학교 역시 동등한 것이 아니고 계단식이다. 이것이 종으로의 순서라면 횡으로도 역시 계단식이다.       그러니까 각 학교를 선택한 뒤 그 학교의 전공 선택 역시 계단식인 것이다. 그러니까 학생들은 마땅히 각 단계별로 학교와 전공을 쓰되 자기가 제일가고 싶고 또한 실력에 비춰 갈수 있는 학교와 전공부터 차례대로 써야 한다. 중국은 한국과 달리 지원 서류가 여러 학교에 동시에 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위로부터 아래까지 서류가 각 학교에 들어갔다 성적이 되면 남고 안 되면 다시 아래 학교로 넘어가고 하다가 성적이 되는 학교에 합격이 되면 다른 학교에 못가고 그 학교에 갈 수 밖에 없어진다.       그러니까 한 학생이 한 학교에 의해서 입학허가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국처럼 각 학교마다 모집요강과 서류전형이 있는 것이 아니고 중국은 성(省) 초생사무실로부터 통일로 서류를 작성하여 학생들의 지원을 받기 때문에 각 학교의 서류와 모집 요강 및 점수표는 모두 성 초생판공실로 제출하고 초생 사무실에서 학생들의 지원에 따라 서류를 심사하고 각 학교에 다시 배부하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학교 같은 과를 지원한다고 해도 각 성의 점수 선은 다르다. 그것은 각 성의 대학입시 참가수와 각 대학교들에서 각 성에서 요구하는 학생 수가 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채점 방식을 보면 조선족의 경우 주로 동북에 거주하고 있기에 시험을 본 뒤 각 성마다 한 곳에 집중시켜 채점을 한다. 3년 전까지만 해도 흑룡강성, 길림성, 요령성에서 각기 채점을 했었는데 3년 전 흑룡강 한족들이 갑자기 조선족의 채점에 문제가 있다고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부득이 흑룡강 시험지를 길림성에 가져다 매기게 되면서 동북에는 길림성과 요령성 두 채점 장소가 생겨났고 길림성에서는 길림성 외 흑룡강성, 내몽골 자치구 조선족학교들의 채점을 맡았다. 사실 연변은 조선족 집거구이기 때문에 모든 조선족의 시험지를 다 연변대학에 모아 채점을 해도 되지만 그렇게 되면 부정행위가 너무 많이 생긴다는 우려 때문에 몇 십 명이 되는 우리 채점 인원들은 번번이 이렇게 먼 길을 걸어야 했고 또 연변에서 채점을 한다면 한족을 비롯한 타민족이 절대적인 불만을 가지기 때문에 우리는 부득불 장춘까지 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조선족이 연변에 비해 퍽 적은 흑룡강에서도 한족들의 불만이 심해 길림성에 가져다가 매기는데 하물며 연변에서 채점을 하면 어떨까? 생각만 해도 알 노릇이다. 아무튼 이 세 성의 시험지를 장춘에 있는 동북사범대학에 모아 채점하는 것이다.           식사 시간이 가까워지자 나는 옆방 멤버와 함께 팀장님 방에 갔다. 거기는 벌써 멤버들이 다 와 계셨다. 회의가 시작되자 이 이틀간 줄곧 농담으로 우리를 웃기던 팀장님답지 않게 아주 정색한 표정으로 엄숙하고 의미심장하게 얘기하는 것이다. 근 년래 우리 조선족들의 성적은 너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매번 채점하러 오면 우리 조선족이 한족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여기서는 우리는 조선족 수험생들을 ‘우리 아이들’이라고 친절히 부르면서 이 자리에서는 우리가 그 아이들의 부모가 되고 또한 선생님이 되고 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의 어깨가 무겁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채점할 때 잘 쓴 아이들에게는 점수를 아끼지 말고 주라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 조선족이 우리의 최강적인 한족과의 대결에서 대학에 더 많이 붙고 길림성 최고성적이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대놓고 점수를 팍팍 주는 게 아니라 우리가 줄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규율을 어긋나는 일은 삼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경험이 없는 나는 무슨 말인지 실감이 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일리가 있는 말인 것 같았다. 팀장님의 그 뜻을 알 것 같았다. 그러면서 싸울 때는 싸우더라도 관건적 시각에는 뭉치는 것이 민족이 아닌가 싶었다. 전란과 굶주림을 피해 도망하다시피 해서 이주해 온 조선족이, 중국에서 일개 소수민족으로 어려운 100년을 숨 가쁘게 달려온 조선족이 또 그렇지 아니한가 싶다. 팀장님은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이 올 때 부탁을 하더라는 것이다. 하지만 스캔이 되어 있는 시험지를 어떻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부모님들은 그냥 옛날 방식대로 채점을 하는 줄로 알고 부탁을 한 모양이다.       그런데 멤버들의 말을 들어보니 참 특징적인 것이 부탁을 받은 애들의 평소 성적이 다 뛰어날 정도로 좋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성적이 우수한 애들이 왜 구태여 이런 부탁을 해야 했을까? 여기에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원인이 있는 것 같다. 그것은 바로 다민족 국가에서만 표출되는 민족의 자격지심인 것이다. 공부를 못하는 애들은 붙어도 좋고 안 붙어도 좋고 혹은 아무학교든 붙으면 된다는 태도인 반면에 공부를 잘하는 애들은 내가 원하는 학교에 꼭 가고 싶다는 마음이 생김과 동시에 그들의 적수는 다름 아닌 타민족인 것이다. 이때는 본인이 이러한 부탁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학교와 학부모 심지어는 해당 지역에서 더욱 신경을 쓰고 적극 도와주는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뭔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이상야릇했다. 아무튼 우리는 그 말들을 다 머릿속에 기억해 두고 밥을 먹고 정식으로 채점하러 갔다.       채점은 생각보다 퍽 어려웠다. 시범으로 채점할 때는 여유 있게 하니까 재미있다고 생각했는데 정식으로 하니까 모든 사람들이 다 열심히 하고 또 5천부를 다 같이 매기면서 거의 같은 시간에 끝나야 하므로 혼자 너무 처질 수도 없거니와 파트너와도 호흡을 맞추어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몸에 있는 눈과 두뇌와 손이 매치가 되어야 한다. 빠른 속도로 봐서 중심단어를 척척 찾아내고 그에 상응한 점수를 암산하여 쳐 넣어야 한다. 처음에는 한 장의 시험지를 매기는데 대략 3~5분 정도 걸렸는데 화장실 한번 가지 않고 부지런히 해도 다른 이에 비해 뒤처지는 감을 느낄 수가 있었다. 사척에서 건반 두드리는 소리가 장난이 아니었다. 오전 고작 6백 부를 매겼는데 참으로 기계가 따로 없었다.       지금 독자 여러분께서는 한 번 상상하면서 시범을 해봅시다. 컴퓨터 앞에 앉아 오른 손을 키보드의 오른쪽 숫자판에 놓고 시선은 모니터에 박고 식지와 중지로 점수를 쳐 넣고 Enter를 치면 또 다른 시험답안지에 생각 같아서는 아주 쉬운 것 같아서 “치~”하시는 독자들도 많을 거다. 처음 10분은 신기하고 신선한 멋에 괜찮았는데 1시간이고 2시간이고 움직이지 않으면서 또한 옆자리의 다른 선생님들과 비교하면 내가 처지지나 않을까 걱정도 하면서 오전, 오후를 그렇게 앉아있어 보면 빌려온 보릿자루 같은 느낌이 든다. 엉덩이며 다리며 손이며 눈이며 마치 멈춘 것 같고 기계와 로봇이 따로 없다. 거기에다 다른 사람들이 하나 둘씩 “난 천부를 매겼어”, “난 천오백 부”하고 하나 둘씩 외칠 때면 괜히 괘씸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나도 빨리 해야지 하는 조바심에 식은땀이 나기도 한다.       내가 아마도 처음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참 이런 때만큼 손이 말을 잘 안 들을 때도 드문 것 같다. 급하면 급해할수록 더 한 것 같다. 그리고 두 사람이 매기는 과정에 한 치의 오차도 없어야 하다 보니 대충 막 했다가는 자칫하면 모든 시험지를 다시 매기는 수가 있어 막 할 수도 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가 한 천오백 부 매겼을 쯤에 팀장선생님이 찾아와 오차가 천삼백 부가 나왔다는 것이다. 참 너무 허무했다. “참! 그 많은 걸 언제 다시 해”하는 마음이었다. 그나마 이번 오차시험지 천삼백 부는 팀장님이 해 주시겠다고 하셨고 우리 보고 이제부터는 어떻게 답안 기준을 잘 맞춰서 오차시험지가 적게 나오게 하라고 당부하셨다. 오차 시험지는 두 채점자의 점수를 기준으로 한사람이 다시 점수를 주기만 하면 되므로 괜찮은데 오차가 너무 많으면 채점 질이 나쁘다는 것을 설명하므로 소홀히 해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나와 나의 파트너는 다시 한 번 답안을 검토하고 채점 표준을 정하여 앞으로는 서로 결정하기 어려운 부분이 생기면 토론하면서 좀 속도가 늦더라도 오차가 적게 나오는 방향으로 합의를 봤다.       하지만 이렇게 기준을 다시 정하고 또 앞의 천오백 부를 채점하는 과정에서 경험을 쌓았는지 두 사람은 점차 매치를 이루었고 나머지 이천여 부의 시험지에서는 오차가 아주 적었다.   아무튼 그날은 어렵게 하루를 마쳤고 성적 또한 다른 사람에게 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소감이라면 채점만큼 따분한 일이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녁 식사 때 여러 선생님들은 시험지에 대해 얘기했다. 사실 정작 채점을 하고 나니까 민족이라는 두 글자가 선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차마 점수를 팍팍 깎아 치우지 못하겠다는 것이 많은 선생님들의 공감이다.           온 하루 피곤하게 지낸 몸이라 샤워하면서 물이 막 뿜어 나오자 난 갑자기 처음으로 내가 민족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을 많이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 조선족은 한민족의 줄기가 그 옛날 눈물 젖은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 뿌리 내리고 척박한 땅에 땀동이를 쏟아 기름 넘치게 한 보람 차고도 멋진 민족이다. 쪽지게에 쪽 바가지만 가지고 왔지만 버젓이 민족의 삶의 터전을 마련하여 부럽잖게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나도 대견스럽다. 하지만 그 속에 담겨진 희로애락을 어떻게 표현을 할까? 한 민족이 자기 민족의 나라에서 살지 못하고 타국에서 일개 소수민족으로 살면서도 자기 민족의 언어와 교육과 전통을 포기하지 않고 100년을 이어왔다는 사실이 참 놀랍지 않은가? 그 옛날 자기들 손으로 친히 척박한 땅을 개척한 탓일까?       여러 학부모들의 부탁, 참 너무 뭐라고 나무랄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민족의 대결이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나는 샤워를 끝내고 자리에 누워서도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하루 종일 그렇게 피곤했는데도 말이다. 뭔가가 자꾸 머릿속에서 뇌리를 치는 느낌이 들었다.           사흗날 뜻밖의 일           아침 일찍이 채점을 시작했다. 오늘 중으로 길림성의 3천 6백부를 완성해야 하는데 아직 태반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생각 같아서는 야근이라도 하면서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빨리 끝내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불같았기 때문이다. 지루하고 따분했지만 화장실 한번 가지 않고 열심히 매겼다. 한창 맥이 떨어져 생각 없이 건반을 두드리고 있는데 갑자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수고하십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습니다.” 그 선생님이 읽는 소리에 우리는 폭소가 터졌다. 참 한창 따분하던 채점장이 갑자기 활기가 띄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잠시 쉼터가 되었다. 그런데 한참 있더니 그 선생님께서 또 읽으시는 것이다.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 수고스럽게 채점을 하시는 선생님, 너무 수고가 많으신 걸 잘 압니다.       하지만 전 잘 모르겠습니다. 점수를 좀 살살 깎아 주십시오.” 선생님들은 아주 즐겁게 에피소드로 즐기면서 넘어가셨다. 하지만 나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그런 애매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따라서 웃었지만 웃고 난 뒤에는 어딘가 모르게 씁쓸한 느낌이 드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아무렴 어느 나라의 시험 채점장에서 든 다 발생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렇지 않아도 중국에서 적은 우리 민족의 대학입시생들이 입시의 중요한 입장에서 이렇게 스스럼없이 대해도 된단 말인가 하는 괘씸한 생각도 들었다. 아무튼 단일 민족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이러한 정상적인 일들이 민족의 대결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는 그게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계속 채점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연이어 몇 장씩 중국어로 된 답안지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난 뭔가 잘못 된 줄 알고 즉시 옆자리 선생님께 중국어로 쓴 것도 점수를 주냐고 묻자 당연하다고 하면서 대학입시 때는 중국어로 쓴 답안지를 자주 본다고 말해 주는 것이다. 하지만 난 여간 놀라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까지 매겨온 시험지들은 연변의 시험지였을 것이다. 연변에서는 중국어로 답안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연변 시험지가 끝나자 길림성의 기타 지구 시험지들이 나오면서 중국어로 된 답안지들이 나오는 것이었다. 이런 시험지를 본 순간 나는 많이 당황했다.       그런데 시험지를 번질수록 나는 아연실색해지고 말았다. 거의 많은 학생들이 중국어로 답안을 썼고 어떤 애들은 중국어와 조선어를 마구 섞어서 썼으며 중국어가 한글자도 안 들어간 시험지가 거의 없었다. 몇 년간 채점 경험이 있는 다른 선생님께 물어 봤더니 이미 오래전부터 이런 상황이 발생해 이젠 오히려 익숙해 졌다면서 이제 몇 번 더 채점 경험이 생기면 별 느낌이 없어질 거라고 날 위안해 주셨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았더니 한자는 틀린 글자가 적지 않았고 조선어는 맞춤법과 단어 사용이 적합하지 못하여 문장은 참으로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하였다. 암담하고 참담하기로 전쟁터를 연상하게 하였으며 거기에 글자체가 좀만 난잡하면 진정 폭격 맞은 전쟁터가 따로 없다. 이러한 답안지들은 나의 채점 길에서의 “쉼터”가 되었다. 도저히 어떻게 점수를 줘야 할지 막막하였기에 생각도 하고 들여다보기도 하고 손 놓고 멍하니 앉아 있어보기도 하고 한심한 웃음을 짓기도 하면서 좀처럼 다음 장에 넘어가기가 힘들었다.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는 두 언어 실력, 참으로 애들이 불쌍하다.       그런데 문제는 애들이 중국말로 답안을 적으면 채점 선생님들이 마음 놓고 점수를 주지 못하는 것이다. 다른 민족들과 진학률을 경쟁하고 더 많은 조선족 애들이 대학에 가게끔 선생님들은 최대한으로 점수를 주기 위해 애쓰고 있으며 1점이라도 더 주고 싶은 현실 앞에서 이런 중국말로 된 시험지를 맞대고 나니 한심하고 맥이 빠져 머라고 할 말이 없어진다. 길 가는 아무런 한족이 봐도 다 이해할 수 있는 시험지에 마음대로 점수를 줬다가 발견되는 날에는 머리가 날아난다.        너무나도 많은 눈들이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고 또한 중국어는 한국어나 조선어처럼 뜻풀이를 해서 쓰기가 어려워서 단어가 틀리거나 글자가 좀 틀려도 내용이 확 바뀌기 십상이기에 점수를 1점이라도 주고 싶어도 주기 어렵거나 줄 방법이 없어지게 된다. 반면 조선어로 쓰면 뜻만 대개 나와도 점수 주기가 훨씬 편하고 설사 1~2점 더 줬더라도 표준 답안이 중국어로 되어 있어 우려가 별로 없다. 왜냐하면 가끔씩 아는 얘는 잘 써서 1점이라도 더 주고 싶구나 하는 시험지가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때는 애들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원망스럽다. 평소에 중국말로 된 참고 서적을 본다고 치자, 시험 전에 애들한테 이런 것쯤은 상식적으로 일러두는 게 원칙이 아닌가? 이건 뭐 선생님이 일러두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애들 모두가 하나같이 선생님의 말씀을 잊은 건지 뭐라고 할 말이 없다.           최소한 내가 채점한 부분에서 양심적으로 만점을 줄만한 애는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난 나대로 애들의 점수를 푼푼히 주었고 또 그렇게 하려고 노력을 했다. 하지만 중국어와 조선어가 뒤죽박죽, 들쭉날쭉한 이런 광경을 두고 어찌할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을 뿐더러 버스를 놓쳐 앞서가는 버스의 뒤꽁무니를 쳐다보며 안타까워하는 심정보다 더 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솟구쳤다. 마치 내가 시험을 본 학생인양 느닷없이 심장이 쿵쿵 뛰었다. 휴 ~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눈도 마음만큼 피곤했다. 한족이 대다수이고 극소수가 조선족인 장춘지구와 통화지구에서 이 정도라도 만족해야 하지 않을까? 언어는 간신이 유지되었지만 학교가 없어서 못 다니는 다른 곳 조선족보다는 행운이라는 생각이 갑자기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또 한편으로 이런 학교와 교사와 학생들이 원망스럽고 안타깝기도 했다. 학교가 없어서 우리 민족의 언어를 못 배웠다고 치자. 이건 학교도 있고 교사도 있고 여건이 다 갖추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조선어와 문화의 이수가 잘 되지 않고 있으니 이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그 옛날 우리 민족이 갓 이주했을 때는 학교도 없고 교사도 변변치 않았지만 조선어와 민족의 문화만큼을 잘 가르쳐 지금의 조선족 교육이 형성되지 않았는가?           내가 엄청 충격 받은 표정을 짓자 옆의 선생님께서 위로해 주시면서 처음이라서 이해도 안가고 충격도 받을 법 한데 좀 지나면 그게 예사로운 일로 여겨지면서 그런가 할 거라고 하셨다. 하지만 난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무언가가 크게 잘못 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점점 채점에 맥이 빠지기 시작하는 느낌이 들었다.       점심을 먹고도 별로 쉬지 못하고 우리는 이내 또 컴퓨터 앞에 달라붙었다. 오늘 중으로 길림성의 채점을 마쳐야 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컴퓨터만 봐도 눈앞이 아물아물 아지랑이가 피어올라 손과 눈은 조건 반사로 점수 란에 점수만 적어 넣고 다음 페이지로 넘어간다. 꼬박 이틀을 달려 이제 3천 6백장이 넘는 길림성의 시험지 채점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로봇도 이런 로봇이 없었다. 사상과 생각이 없는 로봇이라면 힘들지도 지겹지도 않지 그런데 이건 펀펀한 사람이 로봇 노릇을 하려니까 진정 미칠 것 같았다. 내 마음속에는 빨리 빨리 하면서 이제 남은 300개미만의 시험지를 다 매기려고 바동거리고 있었다. 사람은 아마도 무슨 일을 하던 거의 마무리하고 끝날 무렵에 제일 힘겹고 아득바득 하는 것 같다. 체력이 바닥이 날거라는 생각이 들고 이제 막 산 정상에 다다를 무렵에 갑자기 우리 조장 선생님께서 느닷없이 스톱하시면서 저녁에 행사가 있으니 오늘은 여기서 끝마치고 거처로 돌아가 정리하고 정문 앞에 모이라는 것이다. 궁금해서 몇 번 오신 선생님께 여쭤 보았더니 가보면 알거라면서 모르쇠를 놓는 것이었다. 분명히 알고 계시는 눈치였는데 얘기를 안 해 주시는 것이다. 너무 피곤한지라 나는 그리 중요한 장소가 아니면 안 가고 숙소에서 휴식하려고 생각했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니 갈 수 밖에 없어 준비하고 정문으로 나갔다. 거기에는 이미 대여섯 명의 중년 남성분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곧이어 택시에 우리를 앉혀 어디론가 갔다.           가고 보니 “평양관”이라고 불리는 북한 식당이었다. 종업원들은 모두 북한에서 온 아가씨들이었고 들어가 보니 북한의 분위기가 다분하였다. 이때에서야 나는 감이 좀 잡히는 것 같았다. 팀장님한테 이미 내일부터는 흑룡강성 시험지를 매길 거라는 얘기를 들은지라 이 분들이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흑룡강성 조선족학교 선생님들이었다. 내일부터 흑룡강 시험지를 매길 거라는 확실한 정보를 파악하고 모여서 왔는데 하얼빈에서 떠나 방금 전에 도착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이 온 이유는 묻지 않아도 뻔할 것이다. 구태여 말한다면 흑룡강 애들의 시험지를 매길 때 좀 적당히 봐달라는 것이다.       원래 흑룡강 시험도 흑룡강의 교육국에서 조선족들을 파견하여 매겼었는데 3년 전부터 흑룡강의 한족들이 갑자기 조선족 아이들의 시험에 문제가 있다고 의견을 제출하였다. 그것은 조선족 애들이 연속 3년 한족 아이들과의 경쟁에서 이겨 대학 입학률이 한족 애들보다 좋았던 것이었다. 그러자 한족학교들에서는 채점에 무조건 문제가 있다고 들고 일어났고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흑룡강성 교육국에서는 3년 전부터 시험지를 길림성에 가져다 채점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2년 동안 줄곧 한족 애들과의 경쟁에서 이겼으며 한족들은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찍 소리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은 작년의 고마움을 표시하고 또 올해도 잘 부탁한다는 뜻에서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민족교육에 대해 이야기가 나왔고 우리 민족의 교육에서 현존하는 문제들도 제기가 되면서 술상에 앉은 사람들은 어느 정도 라포가 형성되었다. 그 교장 선생님들 중에는 참 반갑게도 내가 다니던 모교의 선생님도 계셨다. 모교의 선생님으로 부임한지 2년 되셨는데 참 애들의 입학률 문제 때문에 머리를 많이 쓰고 있다고 하셨다.           이러한 상황을 난생 처음 접하는 나인지라 색다른 느낌도 없지 않았지만 마음에서 피어오르는 다른 어떤 말할 수 없는 강한 느낌이 나를 확 감쌌다. 내 머릿속은 갑자기 착잡해졌다. 민족과 민족의 대결 그것은 과연 무엇인가? 이 선생님들의 조선족 애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랑이 과연 바람직한 사랑인가? 한족들과의 대결에서 이기고 더욱 많은 애들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우리의 선생님들은 참으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또한 그것이 현실로 되면서 민족적 긍지감과 자신감을 얻어 이제는 이러한 행사를 아주 예사로운 일이요 민족의 후대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요 우리 애들을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한다. 하지만 난 애들을 위하는 마음보다 변질해가는 우리 민족의 이러한 문화가 참으로 안타깝고 슬프다. 세상에는 이러저러한 사랑이 많다. 부모가 자식에게 대한 사랑, 형제간의 사랑, 연인들 사이의 사랑, 선생님이 학생에 대한 사랑 등등이다. 대개 사랑이라고 하면 올바른 사랑과 빗나가고 그릇된 사랑으로 나눌 수 있는데 내가 오늘 말하고자 하는 사랑은 참으로 옳다고 해야 할지 그르다고 해야 할지 나로서도 갈피를 잡을 수 없다. 독자 여러분께서도 그 정의를 어떻게 내려야 할지 생각을 해 보면 좋을 것 같다.       여러분은 가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평양관의 어느 아늑하고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방에서 우리 채점 인원 8명과 선생님 7분이 아주 큰 테이블에 빙 둘러 사이사이에 앉아 고급스러운 요리와 술로 아주 조심스럽고 또 친절하게 접대하는 그 광경을. 마치 우리가 무슨 큰 벼슬이라도 된 것 같았다. 잔이 비어 있으면 공손하게 따라주고 요리를 집어 주랴. 참 나는 오금이 저려서 앉자 있기가 너무 불편했다. 거기에 온갖 좋은 말 듣기 좋은 말을 다 하니까 진짜 부담 백배였다. 문득 이러한 광경이 너무 익숙해 보였다. 마치 내가 언제 똑같은 경험을 해본 것 같은 느낌이 갑자기 기습해 왔다. 아! 맞다 부모님들이 자식을 선생님께 부탁할 때, 대학생들이 교수님께 자신을 부탁할 때 비슷한 상황이 아닌가? 다만 지금과 그때의 나의 역할이 달라졌을 뿐이다. 참 묘했다. 뭐라고 표현을 하기보다 이러한 것은 독자들께서 눈을 감고 한번 상상해보는 것이 그 무슨 묘사보다 좋을 듯싶다. 그렇다. 여기에는 선생님들의 자신들 학교에 대한 그리고 또 학생들에 대한 애틋한 정과 사랑이 배어 있을 거라고 독자 여러분은 생각이 들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민족이라는 두 글자다. 민족이라는 두 글자 때문에 이 선생님들께서 천리를 마다하고 밤을 도와 여기까지 와서 자신들의 그 옛날 제자들한테 온갖 좋은 말을 하면서 학생들을 부탁해야 하지 않는가? 그것도 사실 구태여 그렇게 부탁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을 가지고 말이다. 하지만 그 가장 핵심적인 것은 우리 민족을 도와 한족을 비롯한 다른 민족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고 이 사회에서 더욱 빛내 보려는 그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한국이나 북한과 같은 우리 한민족의 나라에서 혹은 일본과 같은 단일 민족의 나라에서는 도저히 상상도 못하는 일이다. 그리고 유태인이라면 몰랐을까 타국의 국민이 되어서 자기 민족을 이처럼 아끼고 민족교육을 이처럼 중시하는 민족은 우리 조선족을 제외하고 또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든다. 이 역시 우리 민족이 중국에서 100년이라는 찬란한 교육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 중국 사회에서 동화되지 않고 우리 민족으로서 조선족으로서 지켜올 수 있었던 데로부터 계기되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이 과연 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진정 애들에게 도움이 될까? 의심스럽다. 물론 당면한 과제 – 대학입시라는 관에서는 애들한테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이는 우리 전체 민족 학생들의 공부에 대한 욕망과 진정 힘써보고 노력해보겠다는 의욕을 상실하게 하는 기형적인 현상이 아닐까? 사람의 입은 바늘로도 꿰맬 수 없다. 사람의 기억 또한 잠글 수 없다. 이러한 현상은 이제 곧 우리 이 많은 채점 인원들을 통해 모든 조선인 사회에 알려질 것이다. 글쎄 어느 사회나 한국이든 일본이든 물론하고 이러한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중국과는 성격상의 차이가 존재한다. 중국에서의 이러한 현상은 단순 대학입시인 것이 아니라 타민족과의 대결을 의미하고 민족의 자존심을 의미하며 우리 민족이 영원할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우리 애들을 살려야 한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사회적 경험이 처음이어서 그런지 마음이 종내 다잡지 못하였다. 지금 나의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도 별 걸 가지고 다 그런다고 얘기할지 모르겠지만 난 기숙사에 와서도 나의 의미심장한 얼굴은 펼 줄을 몰랐고 두뇌는 줄곧 뭔가를 생각하며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1860년대부터 이주를 시작하여 척박한 땅을 개척하면서 중국이라는 타국에서 자기들의 삶의 공간을 마련하고 “배우는 것이 곧 힘”이라면서 교육을 생계 버금으로 중히 여겨온 중국 조선족의 교육사는 100년을 자랑할 만큼 역사가 유구하다. 그동안 빛나는 교육사는 수많은 인재를 길러 냈으며 우리 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교량 역할을 충실히 잘 해냈다. 배움에 남다른 깨우침을 가지고 있는 우리 민족은 이주초기부터 자식교육에 힘 다하였고 그것이 계속 이어져 오늘날의 중국 조선족 교육의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나도 그 혜택으로 조선족으로서 언어와 문화와 전통을 잊지 않고 그 속에서 배우고 느끼면서 자랐다.   중국 조선족 학교를 보면 주로 조선족이 집거 또는 잡거해 있는 동북에 집중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연변 조선족 자치주는 조선족 학교가 제일 많고 또 조선족의 문화와 전통이 제일 잘 전해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다음으로 흑룡강성과 요령성인데 문득 고등학교 때 조선어문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한인들의 만주 이주는 한반도를 뒤집어 엎어놓은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고 하시면서 만주와 가까운 함경북도와 평안도 사람들이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가까운 곳을 차지했고 점차 한반도 남단으로 가면서 이주한 사람들은 중국 동북의 내지로 점점 깊이 들어가 정착을 했다고 하셨다. 그것은 지금 동북에 분포되어 있는 조선족의 한반도에서의 옛 고향과 말투를 보더라도 알 수 있는 듯 일리가 있는 말이다.           내가 태어난 곳은 흑룡강 하얼빈 부근인데 우리 마을 주민들의 한반도에서의 고향은 거의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 등지로서 지금의 한국이다. 우리 외할아버지는 고향이 전라도인데 5살 무렵인 1940년쯤에 일가족을 따라 중국에 건너왔다고 하셨고 외할머니는 중국에서 태어나셨지만 조상들의 고향은 강원도라고 하셨다.       내가 태어난 흑룡강은 조선족이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내가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닐 때까지만 해도 나름대로 그 전통과 교육을 잘 계승해 나갔었다. 흑룡강은 인구에 비해 지역이 넓어 한 개 시의 면적이 상당히 컸으며 초등학교는 애들이 아직 어리기에 학생이 비교적 적어도 조선족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기만 하면 한 개 학교씩 있었는데 중학교는 각종 인소의 제약을 받아 한 시에 하나씩 있을뿐더러 중․고등학교 통합이었다.       나도 초등학교는 규모가 아주 작은 산간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전교생이 40명 좌우였고 교실이 7칸짜리 학교청사에 교원이 교장까지 도합 9명인 벽촌 학교이다. 교과서는 다 연길에 있는 동북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 책들로 했는데 반드시 그전 학기말에 주문을 해야 그 다음 학기가 되어야 받을까 말까 하는 그런 방식이었고 허다한 때가 학기가 시작한지 이슥해서야 교과서를 받곤 하였다. 교과서 말고 참고서나 과외독서는 아예 생각지도 말아야 하는 처지였다. 그나마 마을에서 연변에 친척이 있는 우리 집 때문에 아버지가 연변에 다녀온다고만 하면 교장선생님은 무조건 과외서적을 부탁하곤 해서 나중에 내가 3학년 무렵에는 학교에 조그마한 도서관이 생겼는데 듣기 좋게 말하면 도서관이지 사실은 책이 고작 100여 권에 불과한 서재였다. 이것이 1990년대 초반이었다.       하지만 일제시대 때부터 이미 유지해 온 학교라 교사님들은 아주 열심히 가르쳤고 간혹 드문 인재들이 나오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민족이 민족의 글과 문화를 잊지 않고 계승하여 이어나간다는 점이다. 이것이야말로 학교의 규모가 어떠하든 제일 빛나는 자랑거리이다. 그때 우리는 한어문을 제외한 모든 과목을 다 조선어로 배웠고 또한 중학교 고등학교도 그랬었다. 그 시기에는 시험을 볼 때 혹시 한자라도 들어가면 틀린 것으로 쳤기 때문에 시험지에 한자로 적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중학교는 20리 밖에 있는 진에 가서 기차를 타고 한 시간쯤 가야 하는 시에 있는 유일한 조선족 중학교에 다녀야 했으며 기숙사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학교가 너무 멀다 보니 학비 내기도 어려워 겨우 초등학교까지 다니던 애들은 기숙사비와 생활비가 엄청나다고 학교를 그만두거나 가까운 한족학교에 들어가는 애들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그때 중학교를 다니는 애들이면 마을의 후배들 눈에는 진짜 큰 벼슬과도 같았으며 그 애들이 올 때마다 뒤를 졸졸 따르는 애들이 있는가 하면 부러워서 물음이 끝이 없는 애들도 많았다. 나도 그때는 내 바로 위의 선배들이 얼마나 부러웠던지, 그리고 중학교 입학하러 가는 기차에서 마음이 얼마나 설렜던지 참 지금 생각해도 막 가슴이 벅차다.       중학교 1학년을 마친 뒤 나는 연변으로 전학을 왔다. 연변은 참으로 조선족 집거 구였다. 뭐든 조선족을 위주로 하였고 조선족학교도 훨씬 많았다. 조선족 마을도 2~3리에 하나씩 있고 진까지의 거리도 불과 5리(2,500미터)좌우였다. 진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있고 고등학교는 대부분이 중학교와 분리되어 있으며 한 도시에 여러 고등학교가 있었다. 학생 수 또한 아주 많았다. 진정 조선족의 공동체에 온 감을 확연히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 공동체에서는 중국어가 막 외국어로 되다시피 하였다. 교과서는 물론 참고서라든가 과외서적은 참으로 손쉽게 구할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신기로운지 몰랐다. 그렇게 행복하게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이 있을 줄은 참 몰랐었다. 그래서 공부를 참으로 행복하고 맛깔스럽게 할 정도라고 표현을 해도 될 듯했다.       이렇게 나는 조선족이 집거하는 연변에서 중학교, 고등학교를 마치고 우리 민족의 최고학부인 연변대학을 졸업하고 또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칠 때까지의 13년이라는 시간을 거의 외계와 단절한 상태로 오로지 연변에서만 살았다. 그러는 과정에 나는 내가 전에 공부하던 흑룡강을 비롯한 다른 지방의 조선족 교육에 전혀 몰랐으며 언제 관심가질 기회도 없었다. 그러던 중 이번 채점은 나에게 아주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연변 이외의 다른 지방의 조선족교육을 접촉할 기회를 마련해 주었는데 참으로 그 느낌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미묘하고 인생의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해도 될 정도로 나에게 큰 여운을 남겼다.       아무튼 그 덕분에 나는 무사히 우리 민족의 학교를 졸업해 지금 우리 민족의 글로써 무언가를 쓸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나의 지금 우러나는 이런 민족애도 아마 그때부터 뿌리내린 것 같다. 내가 대학 졸업 후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왜 연길을 떠나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아주 견정하게 내 아들을 조선족 학교에 보내기 위해 떠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이렇게 사흗날은 의외의 일도 많았고 충격 또한 적지 않았다. 연변 애들 시험지를 매길 때는 아무런 생각도 없었는데 연변을 제외한 기타 지구의 시험지를 보는 순간 난 참으로 많이 놀랐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길림성의 장춘지구와 통화지구는 그나마 괜찮았는데 흑룡강은 완전히 입을 딱 벌리게 만들었다. 지금도 눈을 감고 떠올려 보면 스캔되어 컴퓨터에 저장된 답안지들이 주마등마냥 두뇌를 스쳐지나간다.       휴 ~ 조선민족의 교육, 중국 조선족, 민족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난 그냥 잠이 들었다.       나흗날 어이없음, 그리고 한숨       오전 일찍 사흗날 흑룡강 선생님들을 만나느라 채 하지 못한 부분을 마무리하고 또한 오차시험지부분도 마저 끝낸 뒤 우리는 새로운 비밀번호로 흑룡강 채점 코너에 들어갔다. 흑룡강 시험지는 길림 시험지와 따로 저장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흑룡강 시험지를 보는 순간 나의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답안지를 번질 때마다 풀풀거리며 한숨이 뒤를 이었고 채점은 점점 어려워졌다. 전날 매겼던 장춘, 통화지구 애들의 시험지에는 비록 3분의 2의 시험지에서 중국어 단어를 찾아볼 수 있었으나 그나마 적지 않은 부분이 조선어였고 완전히 중국어로 답안을 쓴 애들은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그런데 흑룡강 애들의 시험지를 매기면서 난 도무지 내가 지금 우리 민족 아이들의 시험지를 매기고 있는 것이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다만 간간히 보이는 조선어 때문에 그나마 조선족 애들이 맞구나 하는 생각이 들뿐이다. 하지만 위에서도 말했다시피 중국어로 쓰면 점수는 어떻게 준단 말인가? 표준답안이 중국어인데 원칙대로 한다면 그 중국어의 중심단어가 나오지 않으면 아무리 만장같이 쓴다고 해도 점수를 거의 줄 수가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조선어로 쓴다면 다르다. 어느 정도 말이 통하게 쓰면 점수를 주는 편이다. 그런데 지금은 이런 상황이니 참 우왕좌왕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몰라 멍하니 컴퓨터만 바라고 한참 있었다. 그렇다고 혼자 점수를 주었다가는 자칫하면 모든 시험지들이 다 오차로 되어 다시 매기는 수가 있다. 할 수 없이 나는 파트너와 다시 상의하여 중심단어를 체크했고 또한 애들의 시험지를 한 30부 매긴 뒤 그 애들이 자주 쓰는 말로 다시 채점 표준을 정했다. 그래서 이제 흑룡강 채점은 표준답안지를 모범으로 했다기보다는 그에 근접하는 애들의 답안모음으로 채점을 했다.       시험지를 보면 볼수록 도대체 이 애들은 왜 이렇게 완벽하게 잘 하지도 못하는 중국어에 집착을 하는가하는 의문이 솟구쳐 난 뛰쳐나와 흑룡강에 살고 있고 이번에 대학입시를 본 사촌 동생한테 전화를 걸어 궁금증을 물었다. 그랬더니 그 애가 하는 소리, 흑룡강은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조선어문을 제외한 기타 과목은 다 중국어로 강의했고 교과서도 이제는 중국어로 된 교과서에 때로는 교사마저도 한족이라고 하면서 참고서적은 물론이고 시험장에서 그나마 명색이 조선족학교니까 시험지를 두벌로 주더라는 것이다. 하나는 번역본 하나는 원본, 심지어 어떤 애들은 조선어로 된 번역본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게 말이나 되는가? 조선족 학교를 12년씩 다니고 조선어로 된 문장이 이해가 안 된다니? 참 난 할 말을 잃었다. 도무지 너무 충격을 받아서 뭐라고 말을 했으면 좋을지 몰랐다. 그러면서도 그동안 나는 왜 동생들이 어떻게 공부를 했고 내가 다니던 모교도 있건만 거기에 대해 10년을 한 번도 관심 가져 본적이 없었을까 하는 생각에 참 나 자신도 무심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뒤이어 나의 자책을 덮어쓰며 떠오르는 생각, 도대체 이러한 추세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우리 민족이 동화의 길을 가고 있단 말인가? 이러한 추세로 볼 때 참 “동화”, 이 무서운 단어가 우리 민족에게도 닥쳐올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왜 모르고 그렇게 방심해 있었을까? 아니지 많은 사람들이 지금 그것을 막기 위해 노력은 하고 있겠지. 다만 내가 지금껏 아무 생각 없이 그래도 민족애가 강하다고 떠들면서 살아왔겠지.       휴 ~ 동생과 전화를 끊고 난 점심 먹을 생각마저도 없었다. 여러분은 아마 내가 너무 호들갑을 떤다고 말씀하시겠지만 사실 나는 지금도 내 주변의 친구들이 한족과 결혼한다거나 한족학교에 간다거나 심지어는 일본이나 한국에 시집간다고 하면 얼마나 놀랍고 의아하고 또한 이해가 안 되는지 모른다. 이는 아마 초등학교 때부터 키워온 나의 민족애 덕분일 거고 조선인들의 한국행으로 인해 조선족 사회에 남겨진 상처와 후유증 때문에 생겨난 선입견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중국의 만족을 생각하면 참으로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일개 소수민족으로서 전 중국을 몇백 년 동안 통치했었다는 찬란한 역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만족의 중국 통치는 오히려 만족의 한화를 촉진하고 초래하였으며 점차 민족의 쇠퇴를 가져올 것이라는 것을 청나라의 어느 황제가 예견했으랴? 지금 만족은 90% 이상이 동화되어 그 언어와 문자를 아는 사람이 극히 드물게 되었으며 혹간 누가 알기라도 하면 그 사람은 민족문화 발굴의 중요한 인재로 등용되어 한평생을 직업 근심 없이 살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다 보면 갑자기 두려움이 앞서기도 한다. 우리 민족은?       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나보고 “넌 다른 애들처럼 남방에 취직하러 안 가니?”하고 물은 적이 있다. 나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결국 나는 별 큰 고민 없이 포기했고 연길에 남기로 결정했다. 그것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연길에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만 뭐니 뭐니 해도 그 썩 이전부터도 난 내 자식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조선족학교에 보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남방에는 조선족학교가 없다. 애가 아직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애가 앞으로 다녀야 할 학교를 사사로이 결정한 것은 어찌 보면 애한테는 불공평할지 모르지만 난 세상 엄마들의 본능으로 애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뼛속으로부터 그러한 결정을 해버렸다. 이러한 것은 내가 민족애가 강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우리 민족에 대한 사명감이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다만 난 내 자신을 비롯한 내 주변의 조선족들이 한족학교에 가는 것이 이해가 안 가고 또 조선족은 무조건 조선족학교를 다녀야 한다는 그러한 느낌과 관념이 내 주위를 떠나지 않아 전에 다른 사람들이 자식을 한족학교에 보내려고 하는 것이 눈에 띠면 그것을 만류해보려고 나름대로 그 부모님들을 설득하는 부질없는 일까지 한 적이 있고 또 “자식을 조선학교에 보내야 한다.”와 “그래도 중국에서는 한족학교에 보내야 한다.”는 관점을 가지고 다른 사람과 논쟁을 한 적도 한 두 번이 아니다. 거기 곁들여 나는 조선족들이 한족들과 결혼하는 것도 동의가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이 나보고 봉건적이다 보수적이다 하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난 제일 걱정이 되는 것은 그 집 애가 나중에 한족이 되고 더 나중에 그 집에서는 우리 집의 혈통에는 조선족이 있었구나 하는 일마저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 안타까워서이다. 이러한 사례는 우리 주변에 많고도 많다. 참 이런 말들을 하면서 내가 자신을 다시 돌이켜 보니 난 참으로 완벽한 민족주의자인 것 같다.   오후에도 내내 그 중국어로 된 시험지와 씨름을 하고 또 생각도 하면서 끝내 천오백 부의 흑룡강 시험지를 다 매겼다. 이제 남은 것은 내몽골자치구 조선족 학교의 40부, 수동으로 매겨야 하는 시험지이다. 수동이다보니 파트너 두 사람 중 한명만 채점하면 되고 또 많은 사람이 동시에 할 수 없다. 그래서 그게 오히려 한참동안 시간을 잡아먹었다. 그런데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내몽골 조선족 애들은 그래도 다 조선어로 답안을 쓴 것이다.           사흘을 힘겹게 달려 끝내 채점이 마무리 되었다. 참 처음 올 때 마음이랑, 채점 시작할 때 마음이랑, 채점 중도에 생긴 일들이랑, 채점 마감의 마음이랑 왜 이렇게 다른지 끝나고 나니까 “휴 ~”하고 시름이 놓이긴 하지만 마음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이 한쪽 구석이 개운치가 못했다. 처음으로 민족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 보고 또 처음으로 채점을 하고 또 처음으로 민족에 대한 부탁도 받아보고 참 이번 채점은 처음 하는 일도 많았다. 그러면서 우리 민족에 대한 근심을 하게 되었고 그것은 앞으로 나의 생활과 인생에 아주 큰 영향을 주었다. 그날은 역시나 별로 잠을 자지 못한 하루가 되었다.       마지막 날 돌아오는 길에           장춘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저녁 9시 열차로 예약을 한 터라 하루 종일 자유의 시간이 있었다. 다른 선생님들은 장춘시내도 한번 구경하고 쇼핑도 한다면서 다들 나갔는데 나 홀로 별로 생각이 없어 그냥 숙소에 남아 있었다. 요 며칠간 계속 이어지는 개운치 못한 심정 때문에 까딱 움직이기 싫었던 것이다. 난 그냥 침대에 누워 천정을 바라보면서 퀭하니 있었다.       내가 옛날 살던 흑룡강의 마을에는 한반도에서 태어나서 이주하신 분들이 많이 계셨다. 우리 외할아버지도 그러셨겠지만 많은 분들이 심지어는 14~15세에 이주하셨다. 어릴 때는 가끔씩 그분들께서 이주 이야기를 옛이야기삼아 들었다. 심지어는 이주 뒤 지금의 마을에 정착하기까지 40여 차례의 이사를 해야 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이사하는 것은 그 당시에는 아주 예사로운 일이라고 한다. 하긴 우리 아버지, 정확히 말하면 우리 친할아버지께서도 아버지가 어렸을 때 이사를 10번쯤 했다고 하니, 그때는 이미 해방이 된지가 이슥하건만 이주민들은 여기저기 적성이 맞지 않아 자기의 안온한 보금자리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헤매고 이사를 다녔던 것이다.       이주 초기의 교육은 그야말로 간고하였다. 해방 전은 말할 것도 없고 해방 후라고 해도 조선족이 집거해 있는 연변은 그나마 많은 사람들이 민족교육에 몸을 바쳐 교육 자치를 하려고 노력을 많이 하면서 한글로 된 책들을 많이 편찬하기 시작하였다. 연변교육출판사에서 출판한 뭐 “한글”이요, “지리”요, “역사”요 하는 것들은 해방 전부터 나오기 시작했고 해방 후에는 그 외에도 많은 책들을 지어 민족의 얼을 지켜가려고 하는 노력들을 보였다. 하지만 나라의 재정상, 연변의 재정실정과 흑룡강의 재정실정에 따라 이러한 책들의 대량 인쇄는 참으로 힘든 일이고 또한 주문을 받아야만 출판이 가능한 상태라 흑룡강은 항상 교과서가 모자랐고 참고서적은 더 말할 것도 없었던 것이다. 이는 위에서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기를 얘기하면서 말한바 있다. 이처럼 우리는 초등학교뿐만 아니라 중학교, 고등학교에 가서도 교과서 난을 겪어야 했다. 이렇게 중국 조선족의 교육에는 교과서부족, 참고서부족이라는 두 가지 참으로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내가 공부할 때까지 교사들의 노력으로 이러저러한 방법이 제기 되면서 그럭저럭 맥을 유지해 나갔는데 나라의 재정상 학생 수가 적은 학교를 그냥 유지할 수는 없는 터라 학교의 통폐합 현상이 잦았다. 그래서 지금 내가 지금 다니던 학교도 종적을 찾을 수가 없다.       교과서의 부족이 중요한 문제라면 다른 한 가지 중요한 문제는 교사다. 학교의 성패는 교사에 달려있고 학교의 질은 최종 교사의 질을 능가할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족학교의 유지는 교원에 달려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며 교원이 부족하거나 하면 학교가 점차 쇠락되거나 전환되거나 아니면 통폐합이 되어 버린다. 중국에서 이러한 일은 아주 쉽게 일어나는 것이며 조선족이 50% 차지하고 있다는 연변의 소재지-연길에서도 자주 일어나는 일인데 하물며 조선족 인구가 퍽 적은 흑룡강과 같은 지역은 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다가 조선족사회에 사람이 마르고 있다. 제2차 민족이동이 시작 된듯하다. 1860년대부터 한반도의 인민들이 부단히 중국으로 이주하여 정착하고 한인 사회를 꾸려갔던 것이 역사적인 1차 이주였다면 현시대에서는 중국 조선인 사회에서 한국으로의 이주, 북한사회에서 중국 조선인 사회 내지는 한국 사회로 이주하는 조선민족의 제2차 이주시기가 시작한지 이슥한 것 같다. 이것이 현재 조선족 사회의 주요 이동 맥락이고 그 외에도 여러 곳으로 이동 및 이주가 되고 있다.       조선족의 현재의 이주상황을 보면 다음과 같은 특징들이 있다. 첫 번째로 한국으로의 이주이다. 이는 장기적인 이주 다시 말하면 영주인 경우도 있겠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중국의 국적을 포기하지 않은 상태에서 돈을 벌려고 가는 사람들이다 그러면서도 출국하는 방식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는데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기미를 보이는 이러한 이주는 맨 처음 보따리장사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무렵 한국과 중국의 국가관계가 예전에 비해 많이 좋아지자 중국 조선말 라디오 방송에서는 한국의 가족들이 의뢰한 친척 찾기 프로그램을 내왔고 많은 한국인들이 가족을 찾으려고 의뢰를 시작하면서 각 조선족 마을들에서 하나 둘씩 한국의 형제요, 부모요, 찾았다고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초청장들이 눈송이처럼 날아들기 시작하였다. 그때는 초청할 수 있는 범위가 아직은 초청하는 사람들의 가장 친한 형제나 자식들이었고 이미 이주한 지가 이슥한지라 전부 다 나이 드신 분이였다. 이 분들은 보통 한 달에서 석 달 기간으로 한국에 가 있곤 하였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진짜로 그리운 가족을 찾아보는 게 우선이면서 보따리에 한국에 가서 팔 물건들을 챙겨 이를테면 각종 약재 등을 가져다 팔아서 여비도 하고 조금 벌기도 하였다. 이것이 초기의 한국보따리장사 형태였던 것 같았다. 이 사람들이 한 두 번씩 다녀오고 나니까 그 자식들이 하나 둘씩 초청이 되었고 이들은 단순 보따리 장사에 만족하지 않고 노동력이 부족하고 임금이 높은 한국사회에 남아 돈을 벌게 되었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인 1990년 무렵에 우리 반 전체 학생 6명중에 2명의 부모님이 선후로 한국에 나갔고 또 2년쯤 뒤부터는 또 2명의 부모님이 한국에 나가서 우리가 졸업할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 기억으로 이 사람들은 한국에서 3년 동안 중국돈 100만원을 벌 수 있다고 하였는데 그 돈으로 당시에 중국에서 한국 평으로 약 30평 되는 아파트를 10채를 산다고 하였다. 물론 요즘은 어림도 없지만 말이다. 여하튼 그 시기 한국은 진정 우리 중국 조선족의 금고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듯싶다. 친척이 없는 조선족들은 그저 안타까워서 죄 없는 무릎만 치면서 한탄할 뿐이다.       이러한 조선족의 한국 갈망에 비추어 많은 브로커들이 출범했다. 브로커들은 친척이 없어도 한국을 갈 수 있다고 홍보했고 이런 홍보는 한국행에 목말라있던 조선족들의 구세주가 된 듯 인기를 모았으며 수많은 조선족들이 브로커에게 모든 재산에 빚을 내서 한국 수속을 의뢰했다. 역시나 돈에 눈이 어두운 브로커들이라 초창기에는 그나마 합법적으로 한국 수속을 대행해 주면서 돈을 벌었지만 거기에 재미를 붙이자 법을 고려할 새가 없었다. 가짜 초청장, 가짜 결혼 등 사기행위가 연달아 나왔고 사기와 불법 수속들이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브로커들에게 사기를 당해 재산 다 날리고 빚더미에 앉은 사람들이 그 브로커를 찾으려고 산지사방 뛰어다니는 일들을 자주 본다. 불쌍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 얼빠진 사람, 한심한 사람들이라고 욕보기도 한다. 왜 그렇게 다들 한국에 못나가서 안달이냐고 말이다. 그렇게 먹고살기가 힘들어서 한국에 가지 않으면 못살 정도였을까?       시간이 얼마 지나자 이런 브로커들도 믿는 사람들이 적어졌다. 그러자 국제결혼이 출국의 좋은 수단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 조선족 사회에서 처음으로 딸들이 인정을 받기 시작하고 아들보다 낫다는 소리를 듣게 해 주었다. 왜냐 딸이 있는 집에서 딸을 시집보냄으로써 부모가 따라 갈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속비가 거의 안 들었으니까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기가 아닌가? 딸을 시집보내는 한국행 방법은 딸들이야 가서 어떻게 살든 상관없이 일단 시집을 가게 되면 부모가 초청을 받게 되었고 딸이 국적을 얻는 대로 직계친척은 초청이 되어서 딸 하나 시집보내면 그야말로 온 가족이 살고 나는 것이다. 이러한 한국행 방법은 브로커들에게 또 한 번의 거금을 모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한국 시집이 성행하면서 가짜이혼, 가짜결혼, 위장결혼 등과 같은 단어들이 새로 생겨났고 전봇대마다, 게시판마다, 신문마다 ‘혼인소개’ 또는 ‘국제결혼’ 이라는 홍보 문이 참 많이 나와 있어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어디 그뿐인가? 처녀들이 한국 시집을 가는가하면 아줌마들도 서슴없이 가짜 이혼을 하고 위장결혼으로 한국행을 택한다.       그 옛날 우리 민족이 한반도로부터 간도로 이주하여 왔을 때 한반도에서는 “북간도행가”가 아주 유행이었었다.       “1. 마을 앞 논밭에 신작로 나더니 칼 찬 나리 마슬(마을)에 새다 감나고 퉁퉁 고개 십리고개 자동차 넘더니 김 서방 이 서방 북간도 가네.   2. 앞거리 골목에 양철통 달리니 담배는 마음대로 심을 수 없고 이 골목 저 골목 물지게 나더니 최 서방 박 서방 북간도 가네(후렴) 에헤야 데헤이야 우리의 마슬 말썽도 많네.” 이렇게 당시 이주하는 조선인들을 표현하였는데 지금 연변을 보면 “이쁜이 고쁜이 한국 시집가네, 아저씨 아줌마 한국 돈벌이 나가네. 에헤야 데헤야 말썽 많던 우리 마을 언제면 또다시 말썽 생길라나.” 라고 텅텅 비어 있는 마을이 오히려 말썽이 좀 생겼으면 하는 마음도 생길 지경으로 적막하다. 친척방문에 취업비자에 한국은 진짜 못 갔다 온 집이면 서러워서 어디 살겠냐 하는 식으로 한국행바람이 불었고 지금도 내처 불고 있다. 또한 총각들은 처녀들의 한국 시집 바람으로 너도나도 홀아비 신세 되어 시집가는 처녀 뒷모습만 침 흘리며 바라보고 이주 사회에서 근근 득식 100년을 견지해 빛나게 살아왔던 우리 민족이 대가 끊기고 마을들이 하나 둘씩 없어진다.       한국행이 이렇게 걸어왔다면 조선족의 러시아행과 일본행 또한 만만치 않다. 일본은 중국과 수교 된지 퍽 오래되어서 한국행이 뜨기 전에도 아마 조선족들이 일본에 다녀온 경험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일반 조선인들이 일본에 돈을 벌려고 가기 시작한 것은 한국행이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서 바로이다. 시작은 일찍 했지만 초창기 조선족들은 그래도 한국행을 우선으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한국은 언어와 생활습관이 적절하고 또 수속이 일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쉬웠으며 수속비용이 적게 들었다. 하지만 월급이 한국의 거의 3배에 달하는 일본행을 누가 마다하랴. 참 이런 것을 보면 중국 조선족들은 재간둥이들이다. 어디서 어떻게 알고 다들 잘 나가기도 한다. 이렇게 서서히 한국보다 일본이 더 인기를 모으게 되었고 한국에서 3년씩 벌어서 귀국한 사람들도 이제는 일본 수속을 밟아 일본행을 택한다. 그런가 하면 21세기에 들어와서는 조선족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는 어디든 안 가는 데라곤 없다. 뭐 미국, 캐나다, 영국, 호주, 프랑스, 독일, 이태리 등 발달한 나라에 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리비아, 베트남, 태국 등 비교적 낙후한 지역에 가는 사람도 있고 여하튼 출국은 조선족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조선족은 또 가까운 러시아를 제집 나들듯 들락거린다. 연변에서는 러시아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을 ‘소련 장사’라고 하는데 거기서 돈을 번 사람도 많지만 망해서 빈털터리 되어 집에 오지도 못하고 거지처럼 하루살이 하는 사람 또한 그렇게 많다고 한다. 남편 친구가 소련 장사로 돈을 벌어 잘 살고 있는 걸 보면 거기도 수입은 짭짤한 듯싶다. 하지만 ‘소련 장사’의 내막에는 불법행위가 그렇게 많다고 한다.   어디 그뿐인가? 조선족들은 이렇게 외국으로 돈 벌러 가는 가하면 1990년대 중기 이후로는 중국의 내지, 이를 테면 심천, 상해, 광주, 북경, 청도, 위해, 대련 등지로 돈을 벌려고 떠나는 사람들이 부쩍 는다. 당시 이런 사람들은 대개 다음과 같은 부류였다. 첫째, 출국 수속을 했는데 가지 못한 사람 혹은 출국 기회가 없어 들어가는 사람; 둘째, 학력이 낮은 사람들, 예하면 중학교나 고등학교 졸업생들이다. 연변은 작고 취업자리가 제한되어 있으므로 이 부류의 사람들은 더 많은 취업기회를 바라고 대도시 진출을 택하는 것이며 제일 중요한 것은 중한 수교로 하여 대량의 한국 기업 중국 진출로 하여 중국어와 한국어에 능란한 조선족 인재들이 급격히 수요된 것이 계기가 된 것이다.       이렇게 두 부류의 사람들의 대도시 진출은 그들의 가족도 함께 따라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대도시라고 해서 취업자리가 남아도는 것도 아니고 가만히 앉아서도 돈이 척척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보수가 높은 만큼 일 강도 또한 만만하지 않았다. 내 친구 몇이 중학교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청도, 상해, 심천 등지에 들어가서 한국회사나 일본회사에 취직을 했는데 다행이 그들은 고역 노동자는 아니었고 사무실에서 일을 봤다. 하지만 그들의 일일 평균 근무시간은 11시간에 달했으며 날마다 거의 밤 12시가 되어서야 퇴근을 했다. 내가 졸업논문을 쓰느라 늦은 밤에 온라인 해 있으면 몇몇의 그 시간에도 근무하는 애들이 줄곧 온라인 상태에 있는 것이다. 아직 퇴근을 안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날마다 이어지는 야근이지만 야근 때문에 나오는 추가보수는 전혀 없단다. 그뿐이 아니다. 주말은 쉬어야 하지만 주말시간 마저도 빼앗긴다고 한다. 내가 너무 이해가 안 돼서 ‘왜 그렇게 힘들게 하면서 그 일을 계속 하니?’하고 물었더니 ‘먹고 살아야지’하면서 웃는 것이었다. 참으로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불쌍하기는 한데 문제는 이러한 사람들의 대도시 진출은 조선족의 이미지를 한껏 흐려놓아 조선족에 대한 평판이 아주 떨어지게 만들었다. 특히 연변조선족에 대한 평판은 최악이었다. 한국 문이 열려서부터 많은 한국인들이 중국에 투자하여 회사를 꾸리고 사업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중국인과의 교류를 원활히 하기 위해서는 통역들이 급히 수요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태어나면서 두 가지 언어에 능란한 조건을 가진 조선족은 학력, 나이에 상관없이 무작정 채용이 되었고 중국에서 한류가 더 한층 부각되면서 이러한 일자리가 부쩍 늘어나자 조선족들은 이미 취직하고 있지만 마음을 안착하지 못하고 보수나 대우가 더 우월한 곳이 없는지 수시로 살피고 알아본다. 그러다가 일단 있다면 아무 생각 없이 직장을 옮겨버리는 경향이 늘었다. 그러면서 조선족에 대한 신용도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특히 연변사람이면 더욱 싫어해 면접할 때 신분증을 보는데 연변사람이면 아예 접대를 안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연변사람들에 대한 거부반응은 중국의 내지에서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러시아에서도 한국에서도 나나타나기 시작했고 그것은 중국 조선족에 대한 부정적 평가로 표현되었다.           물론 내지에 나가서 외국에 가서 잘 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보수가 높아 가족들의 자랑거리가 되는 사람들도 적지 않고 대도시에 집도 사고 차도 사 놓고 잘 산다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그래도 극소수에 속한다.       하지만 저학력 계층에 이어 고학력 계층의 진출은 연변으로 하여금 인재가 메마르게 하였다. 대학 졸업생들도 너도나도 대도시 진출을 원했고 연변에 남으려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이들 역시 보수가 높고 대우가 좋은 대도시를 동경하였다. 고향의 교사와 같은 직업에는 아예 관심조차도 없었다. 초등, 중등, 고등학교들에서는 새로운 교사를 받아들여 새로운 에너지를 보충해야 하고 또 교사라면 후대 양성의 차원에서 최고 우수한 사람들을 뽑아야 하는데 조선족사회의 경우 교사직을 원하는 사람이 점점 적어지고 진정 원하는 사람은 그 요구조건에 부합되지 않는 사람들이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가끔씩 가다가 그나마 괜찮은 사람들이 생기기도 하지만 이들은 다만 다른 더 좋은 기회를 잡으려고 잠시 교직에 머물러 있다가 일단 기회만 생기면 아무리 좋은 대우라도 마다하고 떠나버린다. 참 우리의 교직이 그렇게 매력이 없었던가 싶다. 연변사회도 이런데 조선족이 적은 흑룡강이나 요령성은 더욱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교사부족은 우리 민족의 후대를 양성함에 있어서 가장 시급한 문제로 대두되는 듯싶다.       이렇게 중국 조선족 사회에서는 오로지 돈을 중심으로 흘러갔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뭐든 다 하는 그러한 느낌이 들 정도로 돈에 집착을 심하게 보였다. 대학을 졸업해도 돈을 못 벌면 ‘공부를 해서 뭐 하냐 돈 잘 벌면 되지’라는 말까지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말을 하니까 생각이 나는데 한번은 고향에 갔다가 오는 길에 오랫동안 못 봤던 중학교 동창을 만났다. 그 애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내지에 들어가 돈을 벌었고 난 그때 대학생이었다. 이러한 입장에서 만난 두 사람은 못내 어색해 했다. 난 내가 공부한다는 이유로 아주 당당해야 하는데 지금은 집에 전혀 보탬이 안 된다는 이유로 아무 말 못하게 되었고 그 아이는 비록 공부는 못 했지만 집에 엄청 보탬이 되어서 내 앞에서 오히려 아주 당당하였다. 이 말 저 말 하던 중 내가 공부하는 게 피곤하다고 했더니 그 애가 하는 소리가 ‘공부한 게 후회되지?’하고 뒤통수를 치는 한마디를 던지는 바람에 난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거기에다 뭐라고 대답할까 하다가 난 그냥 침묵으로 넘겨버렸다. 하지만 얼마 안가서 그 애는 한국으로 시집을 갔고 한국에서 또 다른 그 애를 만났었다는 동창이 나에게 전해 준 데 의하면 그 애의 한국 남편은 장애자였고 그 애는 그냥 한국에 가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아무 사람이든 고려를 하지 않고 시집을 갔었는데 며칠 살고 보니 마음에 내키지 않아 시집간 지 얼마 안 되어 그 집에서 도망 나왔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타락에 빠진 듯 애가 좀 이상해 졌다고 하는 것이다. 담배 피우고 자기보다 20살도 더 많은 남자들을 그것도 유부남들을 만나고 다닌다는 것이다. 나는 또 한 번 마음이 쓰렸다. 왜 그런 길을 택해서 자기 자신을 망치는지 하는 생각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내 앞에서 그렇게 돈을 잘 번다고 도도하던 애가 아니었던가?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혹시라도 그 애를 만나면 ‘공부 안 한 게 후회되지?’하고 지난 날 나에게 했던 그 말을 되갚아 주고 싶다는 생각도 했지만 휴~ 내가 무슨 수로 그 애들을 설득하랴?       이렇게 안타까운 일들은 조선족사회에서 이젠 너무 자주 듣고 보아 와서 많은 사람들이 전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아주 정상이라고 생각하지만 난 아직도 듣고 보고 할 때마다 마음이 이상하다. 그날도 난 버스를 타고 강의하러 가는데 앞에 한 50대쯤 되어 보이는 아줌마 한분이 요염하게 화장을 하고 옷 또한 화려하게 차려입고 한창 전화를 받고 있었다. 처음엔 난 그냥 멋 내기 좋아하는 아줌마인가 보다 하고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대충 들은 그녀의 전화내용은 나를 놀라게 하였다.       “그렇게 싸운 다더냐?”, “그래 어찌겠니. 이때까지 참은 거 조금만 더 참으라고 네가 잘 얼려라. 이제 국적만 나오면 이혼하면 되잖니?”, “안 그래도 전번에 니 오빠한테서 전화가 왔었다. 눈이 퍼래서 찾아 왔더라며”, “그래도 어쩌겠니? 여기서 물러나면 국적도 못 가지고 그저 산 게 되잖니?”, “그래, 그래 네가 잘 알아서 타일러라.”       엄마인가 보다. 딸을 한국인지 어딘지로 시집보낸 모양이다. 나는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옆모습을 흘겨보고 있었다. 참 세상에 이런 엄마도 다 있다니? 시집 간 딸이 부부싸움이 심해서 폭력까지 나오는 모양인데 참으라고 달래는 엄마, 국적이 나올 때까지만 참으라고 달래는 엄마, 너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요염한 화장 하고 화려한 옷 입고 딸 팔아 잘 한다.’ 갑자기 난 구역질이 났다. 이러한 일들은 진정 조선족사회에서는 많고도 많다.       그런데 조선족사회의 빠져나간 사람들을 대신하여 들어오는 이가 또 있다. 바로 한국을 동경하는 북한사람들이다.       북한 사람들의 한국에 대한 동경은 38선의 높은 장벽 때문에 직접 한국으로 가지 못하고 거개가 중국을 통해서 먼저 중국에 가서 머물다가 기회를 봐서 한국으로 넘어간다. 갑자기 교수님의 시가 떠오른다. “그들이 국경을 넘었을 때 – 중국 국경과 지척인 함경도 무산군에서/ 국경수비대에게 뇌물을 건네주고/ 국경을 넘나드는 중개인들은/ 조선돼지장사라는 인신매매를 한다는데/ 오늘밤도 그들 손에 이끌려/ 수명의 여자가 정처 없이 강을 건넌다./ 중국 남자에게 시집을 보낸다고 하지만/ 굶주린 그들의 몸값은 우리 돈 50만원 정도/ 중국 내륙으로 들어가 직접 넘기면/ 그보다 두 배는 받는다는데….” 참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참으로 처참하지만 이것은 현실이다. 이렇게 팔려서 오는 북한인들이 있는가 하면 또한 몰래 도망을 쳐서 오는 북한인 또한 수도 없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인정해야 하는 사실이다. 사실 50만원이라는 돈은 북한에서는 꽤 큰돈이다. 중국의 조선족들이나 한국인들은 이런 것을 보고 의아해하면서 “세상에 이런 일이 다 있어” 라고 할 수 있는데 조금도 그럴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 주변에서도 너무나 자주 발생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한국으로 시집가는 중국 조선족 처녀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해서 가는 것인가? 천만에. 그들 역시 한국 신랑이 돈을 1전 한 푼 안 내밀고는 데려갈 수 없지. 한국 총각들에게 물어봐라. 중국에 있는 여자 쪽 부모님께 적지 않은 돈을 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한때 딸을 한국으로 시집보내려는 부모들을 우리는 딸을 팔아먹는다고 하기까지 했고 한국에서도 신부쇼핑이라는 말이 있는 줄로 알고 있다.       내가 중국에서 한국어를 가르친 적이 있는데 그때 내가 가르치는 반의 90%가 한국에 시집가기 위해 언어를 배우는 처녀 혹은 이혼한 아줌마들이었으며 이제 중국에서는 조선족뿐만 아니라 한족들도 한국으로 시집을 가지 못해 안달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 중 한 여자애는 이제 22살 꽃 다운 나이다. 한창 대학에서 배움을 만끽해야 할 나이에 엄마의 손에 끌려 한국에 시집가려고 한국어 학원에 등록하였으며 국제 혼인소개소를 통해 한국의 45세의 남자를 만났고 얼마 전에 비자까지 받아 좋아하는 것을 목격한 나는 뭐라고 할 말을 잊었다. 그래서 내가 던진 한마디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냐?”는 물음에 그 애는 무표정으로 덤덤해 있었다. 마치 오래된 소원이 이루어 졌는데 그러게 무슨 대수냐 하는 생각인 듯싶다.   아무튼 이러한 이주의 결과는 과연 좋은 점이 얼마고 나쁜 점이 얼마일까? 왠지 나는 나쁜 점만 떠오른다. 우선 조선인 사회에 주는 악성 영향을 보자. 처녀들의 국제결혼으로 총각들은 짝을 짓지 못하고 늙어가서 현재 연변을 비롯한 조선인 사회의 농촌에는 노인과 노총각이 전부다. 심지어 친구에게서 들은 우스갯말을 전하면 한 총각은 전후로 세 여자와 연애를 했었는데 모두다 총각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시집가 이 총각은 나중에 출국인원양성전문가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참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다음으로 이혼율의 상승이다. 농촌의 아줌마들이 처음에야 돈을 벌어 와서 행복하게 살아보자는 마음으로 남편과 가짜이혼을 하고 한국남자와 위장 결혼을 해서 한국에 가서 돈을 번다. 하지만 법적으로 이미 도장을 찍어 부부가 아닌 두 사람은 구두에서 아무리 가짜 이혼이라고 해도 해가 가고 달이 가면 영영 이혼이 되어버려 아줌마는 남편이고 새끼고 저버리고 소식을 끊고 자취를 감추기가 일쑤이다. 설사 돈을 벌고 돌아왔다고 치자. 그렇다고 해도 부부는 오랜 시기 같이 있지 않았고 또한 의식의 차이가 완연히 변하여 옥신각신 하다가 그만 이혼하는 것이 아주 예사롭다. 그래서 연변의 이혼율은 아마 중국에서도 랭킹순위에 오르지 않으면 서러워할 지경일 것이다.       제일 불쌍한 건 뭐니 뭐니 해도 우리의 아이들이다. 학교에 가 봐라. 부모가 없거나 한국, 일본 등 외국에 가 있거나 이혼했거나 온전한 가정 속에서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는 아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사실 그 수치를 조사하기조차 두렵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킬까봐 두렵다. 요즘 다음 홈페이지에서 뜨는 사진 한 장에 나는 참 속상했다. 교실이고 50명쯤의 초등학생들이 앉아 있는데 거의 다 손을 들고 있다. 부모가 한국에 간 아이들인 것이다. 이렇게 많은 부모님들이 아이 옆에 있지 못하고 있으며 아이들 옆에 있는 것은 오로지 감정도, 느낌도, 체온도 없는 돈 뿐이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사는 애들이 수없이 많고 심지어는 애를 봐 줄 사람이 없어 선생님 댁이나 전문교육기관에 전탁해 두고 가는 부모님도 적지 않아 요즘은 이런 전탁원이 새로운 산업으로 등장할 정도로 인기를 모은다고 하였다. 내가 보기엔 이런 시설은 듣기 좋게 말하면 전탁원이지 사실은 고아원과 별 다를 바 없는 듯하다. 우리 아이들은 참 너무 가슴 아프게 “고아”가 된 셈이다. 태어난 지 한 두 달 되는 갓난쟁이 젖먹이를 떼어놓고 간 이가 있는가 하면 당장 대학입시를 앞두고 있는 자식을 두고도 서슴없이 떠나는 냉혹한 부모도 있고 심지어는 애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안돌아오는 독한 부모도 있다. 도대체 누가 우리 애들을 귀여워하고 부모님의 따뜻한 감정을 느끼게 할까? 돈이? 천만에….       돌아오는 기차에서도 나는 줄곧 생각을 피할 수 없었다. 내가 우리 민족에 대해 생각을 왜 이제야 하게 되었을까 하는 자책감도 그 뒤를 이었다. 솔직히 위에서는 내가 민족애니 하면서 자신이 민족주의자라고 했지만 사실 이때까지 나는 민족의 모든 것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했고 일부러 피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대학교를 지원할 때도 연변대학만은 피하려고 애를 썼고 학부선택도 조문학과만은 피하려 했을 뿐만 아니라 역사과에 입학해서도 한국사를 하면서도 우리 민족사는 피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동안 나 자신이 왜 이렇게 방심하고 있었을까 하는 생각에 참 얼굴이 뜨거워 난다.                 후기   사람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소리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애기가 엄마에게 젖 달라는 소리, 뭔가를 해 냈다는 성공에 젖은 소리, 산의 정상에 올라 정복의 행운을 만끽하면서 울려 퍼지는 소리 많고도 많다. 하지만 당신은 이러한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가? 자기 민족의 언어, 문화, 역사를 배우고 싶어 몸부림치는 구학의 소리를. 이번 채점기간은 나에게 우리 민족의 소리를 듣게 하였고 5일간의 체험은 나에게 민족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긴 여운을 남겨 지금도 쉬이 진정하지 못하고 있다.   대학입시 채점을 다녀오고 난 뒤부터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기도 했다. 내가 지금 관심을 가지는 것은 한국 시집간 예쁜이 고쁜이도 아니요, 돈 벌러 가서 돌아오지 않은 아줌마 아저씨도 아니다. 가엾고 불쌍하게 고아가 아닌 “고아”가 된 우리 아이들이다. 깨끗한 옷 입고 돈 마음대로 쓰고 하면서도 마음이 아프고 사랑 못 받는 것보다 헌옷입고 돈 없더라도 부모님의 따뜻한 손길을 그리워하는 애들일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마음은 피눈물이 흐르도록 아프고 눈가는 벌써 젖어든다. 우리 아이들의 요구는 높지 않다. 그냥 배우고 싶은 거 맘껏 배우고 냉랭한 돈보다 따뜻한 선생님의 손길, 부모님의 손길이 그리운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점점 조선어를 모르는 타민족의 애들로 되고 있다. 위기를 느껴야 할 것 같다.   그동안 나는 중국의 다른 민족은 몰라도 우리 조선족만큼은 떵떵거리며 자랑할 수 있을 만큼 민족의 교육을 잘 계승해 왔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시점에서 초등학교로부터 고등학교까지 우리 아이들이 겪고 있는 그들마저도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 민족의 교육의 위기, 나아가 우리 민족의 위기가 닥쳐오는 듯하다. 만족과 같이 동화된 다른 민족을 불쌍하다고 하지 말라. 우선 우리 민족을 고민해 보는 것이 바람직 할 듯하다.   나는 문학을 모른다. 그냥 내 마음에서 우러나는 소리를, 나의 목소리를 냈을 뿐이다. 조선어 대신 중국어로 하는 강의, 교사의 부족, 조선족사회의 민족문화의 연속성문제 등등 참으로 현재 조선족 사회는 문제가 많다. 하지만 100년을 꿋꿋이 지켜온 넋이 아닌가? 시험지마다에서 굴러 나오는 중국어들을 보면서, 중국어로 강의할 학교의 모습들을 상상하면서 가슴 아프고 안타까웠지만 지금도 늦지 않다. 우리 조선족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계속 중국에서 다름 아닌 조선족으로서 그 대를 이어나가야 한다. 민족을 위한 목소리는 계속 커질 것이다.
2    삶의 초점을 바꾸어라(독후감) 댓글:  조회:435  추천:0  2010-03-27
삶의 초점을 바꾸어라 --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을 읽고 저자: 장 지오노, 김경온 옮김 출판: 두례, 2005. 06. 10 발간     우리의 삶은 그 자체가 사람들에게 실증을 자주 느끼게 하고 이는 또 변덕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냈다. 꾸준히, 처음처럼, 늘, 항상 등 변덕과 대조되는 단어들이 신변에 있지만 그것을 몸으로 터득하고 익히기에는 현대인들은 아주 멀리 와버렸다. 그래서 과거에 묻혀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로지 미래만 바라보고 가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과거와 미래의 사이에 현재가 있다는 것을 가끔은 망각한다. 수많은 현재가 과거를 이루어왔고 또 수많은 현재가 미래를 만들어갈 것이라는 사실을 깜빡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이 이런 사실을 말해주고 있지 않나 나름 생각을 해 본다.   이야기의 줄거리를 잠깐 보자.   1913년 ‘내’가 여행간 곳은 프로방스의 며칠을 걸어도 물조차 보이지 않을뿐더러 거센 바람에 야생 라벤더만 자라고 있는 황산이었다. 해발 1300미터가 되는 고산지대이다. 물을 찾아 헤매던 ‘나’는 겨우 양치기 노인을 만나는데 하룻밤을 묵으면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노인은 3년 전부터 그 황무지에 나무를 심어 이미 십만 그루를 심었다고 한다. 그 중 프로방스 특유의 환경 때문에 오직 2만 그루만 살 수 있는 와중에 만 그루는 또 다람쥐 때문에 죽게 될 것이고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만 그루 밖에 없다고 한다. 노인은 매일 밤 백 알의 도토리를 고르고 또 골라 이튿날에는 정성들여 심고 또 심었다. 지팡이로 구멍을 파고 도토리를 넣고 잘 다져주고 또 다른 구멍을 파고... 노인은 말이 없었고 그의 이름은 엘제아르 부피에였다. 5년을 전쟁터에서 보내고 다시 부피에를 찾았을 땐 이미 자그마한 숲이 이루어졌고 부피에는 살아 있었으며 그 뒤로 20년 동안 ‘나’는 매년 거르지 않고 부피에를 찾았다. 그러면서 서서히 아주 서서히 변해가는 땅의 모습을 봐왔고 부피에는 지칠 줄도 모르고 꾸준히 나무만을 심을 따름이다. 그러나 종내는 숲이 이루어졌고 또 한 차례의 전쟁이 지나가고 이러저러한 위험 속에서도 숲은 잘 보존되었다. 숲이 이루어지자 시내가 흐르기 시작하였고 갖가지 꽃들이 피어났다. 1945년 ‘내’가 마지막으로 부피에를 만나러 갔을 땐 전쟁이 지나간 숲은 다시 활기를 띄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8년 후 산은 완전히 원기를 회복했다. 곳곳에 마을들이 천천히 일어서기 시작했으며 1913년 처음 갔을 때 3명만이 살고 있던 마을의 황량한 모습은 흔적조차 없었고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부피에의 덕분에 행복을 되찾은 모습이었다. 엘제아르 부피에는 1947년 조용히 눈을 감았다.   본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특징적인 말들을 찾아볼 수 있다.   노인의 입장을 밝힌 말: <나무가 없어 땅이 죽어간다고 말했다. 그리고 달리 할 일도 없어 자신이 이 땅을 살려보기로 했다고 했다.> <앞으로 30년을 더 산다면 만 그루는 바다에 떨어뜨린 물 한 방울에 지나지 않는 더 많은 나무를 심을 것이다.> <양들이 나무에 피해를 줘 팔았다.> <오로지 나무만을 심을 따름이다. 전쟁도 그를 막지 못했다.>   ‘내’가 본 것: <노인은 말이 없었다. 그러나 자신감에 차 있었다.> <또한 집다운 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의 노력을 알 수 있다. 또한 면도도 말끔히 하고 옷은 단추하나 달랑거리지 않았을 뿐더러 집안은 아주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그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평화로웠다.> <20대 젊은이가 보기엔 50대란 할 일이란 죽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 <하느님만큼이나 능률적으로 일할 줄 아는 사람이다.> <하느님은 그에게 천국을 보여준 게 틀림없다.> <수없이 절망감과 싸웠던 것이다.> <우리는 그가 완벽한 고독 속에서 살아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너무나도 철저히 고독해서 말을 잃었다.>   마을의 변화: <처참한 마을의 상황, 황폐화된 마을> 그러나 숲이 이루어진 뒤로는 <시내가 흐르고 있었고 버드나무가 자라고 있었으며 마을들이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사람들이 시골로 모여들었고 숲은 진귀한 선물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노인은 그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오로지 나무만을 심을 따름이다.   이 소설을 본 뒤 무릇 ‘나’의 입장이든 주인공인 노인의 입장이든 모두 인내와 끈기에 존경심을 보이면서 그것을 거울로 현실속의 나 자신을 비춰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글귀의 저편에 우리에게 독특한 뭔가를 암시해주고 있는 듯싶다.   소설의 전반을 다시 떠올린다면 노인은 오로지 나무만을 심었을 따름이다. 그는 처음부터 원대한 꿈, 이상 같은 것은 없었다. 다만 달리 할 일도 없고 또한 나무가 없이 땅이 메말라 있고 그래서 땅을 살려보기로 한 것이 전부이다. 그는 나무를 심어서 얼마가 살 수 있고 어디에 어떤 나무를 심으면 대개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나무를 심는 행위 그 자체가 전부이다. 사람들이 그가 심은 나무를 베어가도, 전쟁이 기승을 부려도 그는 그런 데 전혀 관심이 없다. 그는 온갖 정성과 열정 그리고 모든 삶을 오로지 한그루 또 한그루의 나무를 심는 데만 쏟아 부었다. 그의 초점은 오로지 나무를 심는 행위 그 자체에 있었다.   하지만 이런 노인의 행위로 인해 노인이 상상도 못했던 결과를 살펴보자. 나무를 심기 시작해서 10년이 지난 뒤에는 숲이 이루어졌고 숲은 비와 눈을 잘 저장하여 시내가 생겨났으며 시내 주변에는 버들과 갖가지 꽃들이 자라나고 또 십여 년이 지난 뒤에는 노인의 나무들은 이미 울창한 삼림을 이루고 있었으며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고 또 십여 년 뒤에는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숲이 내린 선물들을 만끽하며 행복을 찾았다.     그러나 노인은 오로지 나무만을 심었다. 굳이 그의 꿈을 언급한다면 나무를 심어 숲을 이루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노인이 얻은 것은 숲뿐만이 아니라 시내, 꽃을 비롯한 숲의 식물들, 마을, 마을 사람들의 행복 등 많은 보너스를 얻었다. 이것은 노인이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을 보자. 요즘의 사람들은 초점을 어디에 맞추고 있을까? 고등학생들은 물론 수능에 초점을 맞출 것이고 대학교 학생들은 학점과 취업에 초점을 맞출 것이고 사회인들은 돈벌이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모두가 미래지향적이고 목표를 향해 허겁지겁 달려가는, 그리고 결과만을 바라보는 모습들이 안쓰럽다. 먼 훗날은 현재 이 시각, 그리고 하나 또 하나의 오늘이 모여져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나의 수능, 학점, 취업, 재부 역시 지금, 현재, 오늘의 매 한순간을 차곡차곡 쌓아간다면 얻어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초점을 결과, 목표, 꿈, 먼 훗날에 두지 말고 현재, 지금 이 시각에 두어 그것을 충실히 하는데 주력하면 원하던 결과에 도달할 수 있을뿐더러 많은 생각지 못했던 보너스도 가지게 되지 않을까? 저 나무를 심는 노인처럼 말이다. 오로지 나무를 심었을 뿐인데 오로지 나무 심는 일에만 충실했을 뿐인데 노인은 단 한그루의 나무도 또 단 하루도 빠짐없이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열정으로 그 일을 해 나갔으며 그러한 보기 드문 기적을 이루어냈던 것이다.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 대신에 초점만 살짝 바꾸어보자.   다음으로 “나”라는 주인공은 노인이 철저한 고독 속에서 일을 했음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너무도 철저히 혼자여서 말을 하는 것마저 잃을 정도로 노인은 외로움과 절망과 싸워야 했다고 했다. 그건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최소한 처음에는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나무를 심는 일에 대한 행복을 느끼고 그것을 즐기고 한그루 또 한그루의 나무심기에 충실한 노인은 사실 외로움과 절망과 만날 겨를이 거의 없었다고 본다. 그 증거로는 노인은 자신감에 차있었다고 했고 집다운 집에서 살고 있었고 집안은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으며 단추하나 달랑거리지 않는 옷을 입고 있었다고 했다. 외롭거나 절망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에게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싶다.   나는 내가 노인의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유학생활의 하루 중 수면의 6~7시간을 빼고 나머지 16~18시간을 연구실에서 혼자 보내는 나에게 많은 사람들이 외롭지 않냐고 가족이 보고 싶어 어떻게 사냐고 물어왔었다. 하지만 난 그들에게 대답해준 말과 같이 사실 정말 외로움을 느낀 적이 별로 없다. 왜? 그것은 난 내가 하는 일에 푹 빠져 있었고 그것을 즐기며 행복한 마음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외로움을 느낄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나무를 심는 노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저녁이면 도토리를 고르고 그것을 즐기면서 행복을 느끼고 낮이면 골라놓은 도토리를 하나하나 심어나가면서 행복한 마음을 스스로 즐기고 조금씩 그리고 아주 서서히 이루어지는 성과들을 보면서 또 행복하고 그것을 즐기고 이러는 과정에 30년이 넘는 세월은 어느새 흘러갔을 것이다. ‘나’의 친구가 한 말이 아주 일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노인은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다. 인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말이다.”   결국 우리는 무슨 일을 하던, 어떤 결과를 얻으려고 하던 그 초점을 현재, 이 시각에 두어 하고 있는 하나하나의 모든 것에 최선을 다 한다면 원하던 결과, 꿈이 어느새 조용히 내 곁에 와 있을 것이며 꾸준히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하는 일에 즐거움을 가져야 할 것이다. 삶의 초점을 바꾸어 현재에 충실하고 즐기되 최선을 다 하라! 그리고 변덕을 부리지 말라!   --제주특별자치도 제주도서관 독후감 공모전 가작상 수상작  
1    흔적을 남기자(나의 포트폴리오) 댓글:  조회:530  추천:0  2010-03-27
학력 1981년 흑룡강 오상시 산하툰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출생 1988년 흑룡강 아성시  평산진(전 상지시 소속) 기풍촌 소학교 입학 1994년 소학교 졸업 및 아성시 조선족 중학교 입학 1995년 8월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동불사진 중학교로 전학 1997년 돈화시 제2중학교(고등학교) 입학 2000년 고중 졸업 및 9월 연변대학교 역사학부 입학 국제문화 전공 2004년 연변대학 역사학부 국제문화전공 학사학위 취득              "东西文比较之我见" 2004년 세계사학과 석사과정 입학 조선사(한국사)전공 2007년 역사학 석사 학위 취득               논문명: "试析殖民地近代化论" 2008년 3월 한국 제주대학교 교육학과 박사과정 입학 교육사 및 교육철학 전공   경력 2003년 7월~2008년 1월 연길에서 한국어 강사(아르바이트) 2008년 9월~현재 한국 제주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학과 시간강사   수상 2008년 8월 한국재외동포재단 재외동포문학공모사업 응모 ‘5일간의 체험이 남긴 여운’ 대상 수상   2008년 10월 제주대학교 평화연구소 ‘외국인이 보는 남북한통일의 인식’ 응모 ‘한반도 통일에 관한 약간의 소견’ 가작 수상   2009년 6월 제주도서관 전도민 독후감 공모에 응모 ‘삶의 초점을 바꾸어라’ 가작 수상   2009년 12월 16일 교수법 연구회 우수상 수상 제주대학교 교수학습지원센터   논문 및 발표 ‘만주사변 이전 북간도 학생들의 교육운동’--김해영 교육사상연구회 교육사상연구 제22권 제2호 pp. 77~95 2008.8   ‘연변조선족자치주 민족사교육과 디지털 스토리텔링의 적용’--김해영 김성봉 비교교육연구 제19권 제3호 2009.9 pp.227-247   '조선조 제주교육사 형성의 동인(動因)으로서 표류에 관한 연구'--김해영 양진건 교육사상연구회 교육사상연구 제23권 제3호 2009.12 pp.173-189   포스터 발표: ‘코칭 포트폴리오 시스템을 활용한 교수능력 향상’ --문창배 전경애 김해영 박정환 2009 한국교육학회 추계학술대회, 2009.10.23-24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법 연구회 2008학년도 2학기 교수법 연구회 참여--서비스러닝 --이순미 김학준 김해영 김성봉 제주대학교 교수학습지원센터   2009학년도 교수법 연구회 참여--‘코칭포트폴리오 시스템을 활용한 교수능력 향상’ --문창배 전경애 김해영 박정환 2009년 9월 7일-12월 16일 제주대학교 교수학습지원센터   2010학년도 교수법 연구회 참여-‘교육주체의 자기주도력 함양을 위한 교수학습모형 개발’ --김해영 전경애 문창배 박정환 2010년 4월 2일-8월 24일 제주대학교 교수학습지원센터   교수법 관련 워크숍 2009년 12월 17-19일 Action Learning 교수법 워크숍 참석 2010년 2월 24일 몰입과 학습 워크숍 참석 2010년 2월 25일 외국인 유학생을 위한 특강-국제교류센터 2010년 3월 13일 한국문화예술교육학회 참석-서귀포시 제주대 연수원   관심분야 --동, 서양 교육사 및 교육철학 --민족교육(조선족, 조선족교육, 조선족 사회, 조선족 문화 등) --스토리 텔링 --Action Learning (액션 러닝) --Coaching(코칭) --교수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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