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룡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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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의 남영전의 문화현상
2009년 09월 02일 18시 18분  조회:1712  추천:40  작성자: 김룡운

중국에서의 남영전의 문화현상


김룡운



1.남영전의 인생그라프

남영전은 1948년  3월 3일, 길림성 휘남현(輝南縣) 소의산(小椅山)이라는 한 벽촌마을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남영전의 아버지와 삼촌은 모두 중국의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에서 희생되었다. 남영전의  모친도 모진 정신타격을 받고 남영전이 세 살 때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남영전은 어린 시절부터 모성애와 부성애를 모르고 할머니품에서 자랐다.
남영전의 할머니는 다감다정 하시면서도  보기 드믄 강의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에서 두 아들을 잃었건만 모든 슬픔을 속으로 삭이고 손자를 데리고 굳세게 살았다. 연약한 여인의 어깨에 가정의 모든 중임을 떠메고 이악스레 험난한 삶의 길을 헤쳐나갔다. 할머니는 여가가 있으면 어린 손자에게 아버지와 삼촌이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용맹히 싸우다가 희생된 영웅적 사적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하여 남영전의 가슴속에는 어린 시절부터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버지와 삼촌의 형상이 산처럼 틀고 앉았다.
남영전이 가슴을 울려주는 사실주의 가작 - <아버지>,<스물네살의 영혼> 등 시편들을 써낼수 있었던 것은 어릴 적 할머니 한테서 들은 이야기가 큰 작용을 했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모든 희망을 어린 손자에게 기탁하고 남영전을 장중보옥처럼 애지중지하고 태양처럼 믿고 살았다. 할머니에게 있어서 손자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합친 것 보다 더 큰 귀중한 존재였다.
 어린 손자에게 보다 훌륭한 교육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 1955년 남영전이 8세 나던 해에 소의산(小椅山)에서 백 여리 떨어진 휘남(辉南)현성에 가서 남의 집 북쪽 구들을 세 맡고 모든 정력을 손자의 공부에 몰부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남의 집의 보모로 일하였고 일요일이면 산에 가서 등짐으로 나무를 해 왔다. 병약한 몸이라 산길에서 나무짐을  진채 몇 번이나 넘어졌는지 모른다. 이러한 눈물겨운 사실들이 그후 남영전의 시  「휘여듬한 그림자」,「할머니」,「가지 마세요」에 생생히 묘사되고 있다.
 할머니는 유정 하시면서도 성격이 대쪽 같아 아무리 살기가 어려워도 절대로 구원을 바라는 일이 없었다. 두 아들이 혁명열사이므로 어려울 때  나라에 손을 내 미는 것은 너무나 당당한 일이었 것만 할머니는 그 허려운 환경에서도 정부를 향해 그 어떤 요구도 제출하지 않고 자기의 두 손으로  익척스레 일하면서 두 사람의 생게를 이어 나갔다. 
   할머니의 생각은 오로지 한가지, 어린 손자를 잘 키워 출세를 시키는 것이었다. 남영전은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 할머니의 사랑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신체 건강히 공부를 잘 하는 것만이 할머니의 사랑에  대한 보답이라고 여기고 짬짬이 할머니를 도와 집안 일을 하는 한편 부지런히 공부하였다. 그의 성적은 학교에서 언제나 첫  자리를 차지하였다.
  고중 2학년 때  북경에 가서 대학공부를 하게 될 기회가 있었지만 느닺없이『문화대혁명』이라는  폭풍이 불어와 그의 아름다운 꿈은 꽃봉오리도 맺지 못한 채 무참히 찬 서리를 맞고 말았다.
  1967년에 류하현《柳河縣》제1고중을 졸업한 남영전은 지식청년으로 농촌에 내려갔다. 남영전은 농촌에서 최하층 인간의 쓴 맛을 다 겪으면서 결연히 필을 들고 시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책 구하기가 힘들어 여기 저기 뛰여다니며 책을 구해 열심히 읽고 필기를 하였다,
  1971년에 처녀작이 발표되었다.  농촌에서 일을 잘 한 덕으로 휘남 현성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시내에 와서도 무슨 일이나 착실히 하여 성과를 올렸으므로 상급의 중시를 받았고 간부로 발탁되었다. 이 때로부터 남영전의 고난에 찬 비운의 역사는 종지부를 찍고 청운의 새 역사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남영전은 일을 열심히 하는 한편 수많은 고금중외의 명작들을 탐독하였다. 그는 실천 속에서 창작하고 실천 속에서 제고를 가져와 아주 빠른 시일 내에 시창작의 법칙을 장악하고 문학원리를 파악하였다. 오래지 않아 길림성 시단의 싱싱한 싹으로 두각을 내밀어  중국 시단에서도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모두 한어로 창작한 것들이다. 남영전은 중국조선족시단에서 한어와 조선으로 창작하는 몇몇 안 되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다. 남영전이 상을 탄 작품들은 모두가 한어로 창작한 작품들이다. 이 것은 남영전의 큰 우세이다. 가령 남영전이 조선어로만 창작하고 한어로 창작하지 않았더라면 오늘 중국에서 남영전 문화화현상이 나타날 수 있었겠는지 장담하기 바쁘다.
남영전은 민족심이 아주 강한 사람이다. 1980년 중국에서 개혁개방이 이미 시작 되었지만 남영전이 살고 있는 길림성 통화(通化)지구에는 그때까지도 조선문 잡지가 없었다. 인구가 12만이 넘는 지구에 조선문 잡지가 없다는 것은 불행한 문화현상이라고 생각하 많은 조선족 지성인들이 거듭되는 토론 끝에 상급에다 조선문 잡지를 꾸리겠다는 청구서를 올렸다.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은 비교적 너그러운 편이다. 정부에서는 통화지구 조선족 인사들의 청구를 흔쾌히 수락하였다. 당시 남영전은 통화현의 선전부에서 사업하면서 많은 시작품을 발표하여 문단의 이목을 끌고 있었다.
 1980년 통화지구 문련(文聯)에서는 조선족 문학조직을 세우고 조선문 잡지를 꾸릴 중임을 남영전에게 맡겼다. 그 때 남영전의 나이 바야흐로 32세였다. 남영전은 선뜻이 임무를 맡았다. 어찌 보면 그 때가 남영전의 운명을 돌려세우는  전환점이었는지도 모른다. 남영전은 우선 조선어로 창작하는 작가들을 두리에 뭉치게 하고 서로 의견을 나누면서 제때에 통화지구 작가들의 글을 신문과 잡지에 나가도록 힘썼기에 통화지구의 문학조직이 날따라 장대해졌다. 
몇 달간의  긴장한 준비과정을 거쳐 1980년5월, 마침내 『장백산』잡지가 고고성을 울렸다. 186페지의 부피에 30여 만자의 용량, 미구하여 『장백산』으로 사면팔방에서 원고가 날아들었다. 잡지가 잘 꾸려지니 찍자마자 부리나케 팔려버렸다. 이렇게 되자 중국의 저명한 작가들의 중시도 받게 되었다. 정령(丁令),애청(艾青),공목(公木목),왕몽(王夢),마라친부(馬羅沁夫) 등 중국의 저명한 작가들이 «장백산»으로 축하신을 보내 왔고 국내의 여러 매체들에서도 소식을 실어 «장백산» 잡지의 특유의 의미를 충분히 긍정해 주었다. «장백산»은  잛디짧은 몇 년 사이에 초창기의 미숙한 단계를 벗어나 정부에서 승인하는 당당한 정식잡지로 되었고 남영전이 주필로  임명받았다.
  남영전은 잡지의 편리와 위상을 고려하여 잡지사를 장춘으로 옮기려고 작심하였다. 잡지를 성급잡지로 승격시키고 잡지사를 장춘으로 옮기기 위해 남영전이 얼마나 많은 불면의 밤을 지새웠고 얼마나 많은 길을 뛰어 다녔는지  모른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5년 후인 1985년 7월 마침내 잡지사가 통화로부터 장춘으로 옮겨왔다.
남영전의 인생궤적은 어렸을 때는 고난에 찬 기구한 길이였지만  『문화대혁명』후부터는 성공한 시인의 길이었고 성공한 편집인의 길이었다. 남영전은 시인이고 편집인라는 이중신분으로 인생의 길을 걸어온 사람이다. 그는 잡지도 잘 꾸리는 한편 시 창작에서도 풍만한 결실을 안아 왔다. 그는 선후로 시집    <상사집>(1987년),<푸른 꿈>(1988년>,<산혼>(1990년),<백학>((1990년),<남영전시선집>(1994년),<하늘과 땅과 사람>(1997년),<원융>(2003년), <꽃이 없는 이 봄날에>(2003년) 등 무려 무려 13권의 시집을 펴냈다.
 남영전은 시 창작에서 처음에는 사실주의 시로 성취를 거두었고 후에 와서는 토템시로 큰 성취를 따 내여  전반 중국문단의  중시와 관심을 받았다. 남영전은 80년대 중기부터 90년대 말까지 도합 42수의  토템시를 창작하였다. 시의 수량은 얼마 안 되지만 토템시의 특수한 존재의미로 하여 중국문단에 신선하고도 큰 충격파를 주었다.
 2003년6월22일 ,무한대학에서  『남영전토템문화재구축』세미나가  거행되었고 2006년3월 28일, 북경사범대학에서 『남영전시가창작세미나』열렸다. 두 번의 회의에서  토템 시에 대해 일부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도 없은 것은 아니었지만 대부분의 평자들이 남영전의 토템시와 남영전의 토템미학관을 긍정하고 찬양하였다. 중국당대 문학에서 한 소수민족시인에 대해 이렇듯 규모가 큰 학술회의를 가진 사례는 전대미문이다.
   남영전의 시 창작성과가 중국시단의 보편적인 긍정과 승인을 받아  1985년에 서정장시 「할머니」로, 1999년 시집『그리움』으로 각기 「전국소수민족상」을 받았고 서정장시「아버지」와「휘우듬한 그림자」 전설시집『천지의 전설』로 길림성 최고문학상인 「장백산문예상」과 중국작가협회「민족문학우수상」을 수여받았으며「사스」와의 투쟁을 반영한 시집『꽃이 없는 이 봄날에』와 토템시집 『원융』으로 「장백산문학상」을 수상했다.
    남영전은 지금 중국민간협회 회원, 중국작가협회 회원, 중국소수민족작가협회  부 비서장, 중국소수민족문화교류위원회 위원장, 북경대학 조선문화 연구소 겸직 연구원,국제고려학회 연구원, 세계시인대회 종신회원으로 있으며 영국 캠브리지 「국제명인전기중심영예상」을 수여 받았다. 그리고 그의 이름이「중국신세기문학사전」,「중국소수민족작가략전」등 8개 사전에 올라 있다. 남영전이 꾸리고 있는「장백산」잡지의 위상도 크게 높아졌다. 「장백산」잡지는 선후하여 「전국소수민족문학연구 원예상」,「조선족출판대상」을 받았고 길림성 10대우수간행물로 평서되었으며  국가출판총서로부터 『쌍효』(雙効) 간행물로 평의 받았다. 남영전은 지금『장백산』잡지 사장 겸 주필로, 2004 년부터는 길림조선신문사 사장직까지  맡고 눈코뜰새 없이 분망히 보내고 있다.
  남영전은 벼슬보다는 문학과 문화를 더 사랑한다. 일찍 1980년대에 남영전이 시창작에서 거둔 성과와 사업에서 발휘한 출중한 사업능력을 보고 길림성 조직부에서  그를 발탁시켜 벼슬자리를 주려고 하였고 90년대에 북경의 모 부분에서 남영전을 북경으로 전근시켜 중임을 맡기려 하였으나 남영전은 개인의 벼슬길을 단연히 포기하고 시인의 길, 편집인의 길을 고집하면서 인생을 엮어가고 있다.
  가령 남영전이 80년대에 성 조직부에 갔거나 90년대에 북경에 가서 벼슬을 했더라면  가능하게 지금보다는 더 풍요로운 삶을 살아갔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코 오늘과 같이 이름이 있는 시인으로, 중국을 떠들썩 하게 한 토템시인으로 ,토템연구가로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며 따라서 중국에서 남영전의 문화현상이 나타나지 않았을 수도  있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남영전은 자기 자신과 우리 민족과 인류를 위해 명지한 선택을 한 것이다.

2. 남영전의 사실주의 시 

  오늘 중국문단에서 남영전의 토템시가 화두에 올라 평론계가 달아 오르고 있다. 짧디 짧은  3 년 사이에 규모가 큰 남영전시가연구 세미나가 두 차례 열렸고 남영전연구론문집이 7권이나 출판되었다. 필자는 이런 현상을 일괄하여 중국에서의 남영전의 문화현상이라고 말한다. 남영전의 문화현상은 중국당대문학에서 나타난 중요한 문화흐름으로서 전반 중국시단에다 신선하고 충격적인 바람을 몰고 왔다.
  하지만 중국에서의 남영전의 문화현상은   일조일석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석자 얼음이 하루 아침에 언 것이 아닌 듯이 어떤 사물의 형성은 일정한 역사과정이 있게 된다.
  우에서도 언급한바 있거니와 7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까지에 창작된 남영전의  사실주의 가작들은 중국문단의 충분한 긍정과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할머니>, <아버지>,<휘우둠한 그림자> <천지의 전설> 등은 모두 굵직굵직한 상을 받았고 평론가들의 붓 끝에 올랐다. 2003년에 창작한 시집<꽃이 피지 않는 이 봄날에>는 특수한 연대에 특수한 노래로 인류애를 고창한 특수한 작품으로 높이 평가 받아 『길림성소수민족문학상』을 수상했다. 남영전의 사실주의 시는 중국에서의 남영전의 문화현상의 형성에서 튼튼한 초석이 된다. 중국에서 남영전의 사실주의 시가 한창 인정을 받을 때 남영전의 토템시가 토템의 기치를 들고 중국문단에 뛰어들자 인차 강렬한 반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가령 남영전의 사실주의 시가 중국문단에서 발을 붙이지 못한 상태에서 혹은 사실주의시의 기반이 공허한 상태에서 토템시가 문득 선을 보였더라면 가능하게 오늘과 같이 빠른 시일 내에 중국에서 남영전의 문화현상이 일어나기에는 시기상조 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중국에서의 남영전의 문화현상의 형성에 있어서 남영전의 사실주의 시는 초석으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남영전의 사실주의 시는 대개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하나는 비운의 가정사를 소재로 한 사실주의시, 다른 하나는  역사에 묻힌 민족혼을 파내고 고양하는 사실주의시, 세번째는 특수한 연대의 특수한 노래를 토템의 미학사상으로 체현한 시대의 사시『꽃이 피지 않는 이 봄날에』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인성의 발굴에 초점을 두고 쓴 시대의 사시는 남영전의 이전의 사실주의 시와는 색다른 사실주의시므로  별도로 취급하고자 한다.
ㄱ. 비운의 가정사로서의 사실주의시
   남영전의 아버지와 삼촌은 모두 중국의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에서 희생되었다. 남영전은  유복자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 남영전의 어머니는 심한 정신 타격으로 일찍 돌아가고  남영전은 할머니 품에서 자랐다. 할머니는 짬만 있으면 어린 손자에게 비참한 가정사를 들려주었다. 하여 어린 남영전의 가슴속에는 어릴 적부터 보지는 못했어도 아버지와 삼촌의 형상이 깊히 아로 새겨져 있었다. 또 어린 시절부터 할머니 손에서 자랐기에 할머니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특별하였다.
   이런 특수한 가정 배경이 남영전으로 하여금 가족사를 가지고 시를 쓰지 않으면 안 되게 하였다. 가장 깊은 감동과 견딜 수 없는 충동에 의해 쓴 시들이기에 가족사를 다룬 남영전의 시들은 티없이 깨끗하고 진실하고 뜨겁고 감격적이다.  이 것은 필자 혼자의 평가일 뿐만 아니라 한족 문단의 평자들의 공통한 견해이기도 하다.
가족을 소재로 하여 쓴 시들은 결국은 가정의 생명시에 다름아니다. 그러나 단순히  하나의 가족사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그 것은 한 가족의 가족사, 가족 생명시이면서 또한 우리 민족의 비운의 민족사이고 민족생명시이다. 여기서 남영전의 사실주의 시들은 민족적인 공감대를  갖게 된다. 우리 민족뿐 아니라 한족을 포함한 기타 민족들 한테서도 공감대를 얻게 된다. 왜냐하면 항일투쟁사와  해방투쟁사는 어느 한 민족에게만 연관 되는 일이  아니고  전 중화민족의 공통한 역사로 되고 있기 때문이다.

천천히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
 중략……
길고 긴 이야기를 등에 지고
해도해도 못다할 전설을 이고
천천히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다
말없이 말없이 걸어 나오고 있다.
-「휘우듬한 그림자」일부

 「휘우듬한 그림자」는 시화된 곡선으로서 그 것은 역사에 눌리워 굽어든 곡선이며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힘차게 앞으로 전전하는 불굴의 형상으로서의 곡선이다. 할머니는 귀중한 아들을 잃고 문화혁명시기에는 억을한 재난을 당하기도 했지만 손자에게 모든 희망을 기탁하고  앞날을 바라보며 억척스레 살았다.「휘우듬한 그림자」에는 우리 민족의 슬프고도 견강힌 모습도 함께 담겨져 있다. 이 시를 읽노하면  백두산의 사스레나무를 연상하게 된다. 누루천연 (屢屢千年) 광풍폭우를 맞아 휘여든 사스레 나무, 하지만 오늘까지도 넘어지지 않고 급은 몸체를 바위틈에 뿌리 박고 억세게 살아가고 있다. 그 끈질기고 강인한 생명력이야말로 얼마나 위대한가? 시인은 비희고락으로 얽힌 하많은 사연들을 <길고 긴 전설>과 <기나  긴 이야기>에  다져 놓고 있다. 시인은 <휘우둠한 그림자>가 <길고 긴 전설을 등에 지고> < 기나긴 이야기를 이고> <천천히>,<말없이> 걸어가고 있다면서 긴 여운을 울려준다. <휘우둠한 그림자>가 정지상테에 있지 않고 시종 움직이도록 동적인 처리를 함으로써 강한 생명력이 현시되게 한다. 또 <움직이고 있다>, <걸어가고 있다>가 반복 됨으로써 불요불굴의 의지와 강한 생명력이 두드러지며 그리고 여기서 민족의 밝은 미래가 제시된다.

어려운 배움의 소용돌이 속에서
푸른 언덕 향해 용감히 노 젓다가도
암초에 부딪치고
폭풍에 휘말려
고달픈 배머리 돌리려 했건만
그 때마다
그이는 배고물에 오르시여
조용히 엄한 눈길로
키 잡아 주셨더라
-「아버지」 일부
 위에서도  잠간 언급했지만 시인은 유복자다. 아버지의 모습을 단지 열사증(烈死證)에 박힌  흑백사진 한 장으로만 보아왔던 시적 주인공이기에 아버지에 대한 그림움이 그 누구보다 강렬하다. 시인의 가슴 속에는 아버지의 거룩한 형상이 언제나 또렷이 자리잡고 있었다. 시에 묘사된 아버지의 형상 역시 시적 주인공의 아버지이면서도 조선족 모든 혁명열사들의 군상(群像)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이 시도 가족사이면서도 가족 생명시고 민족사이면서도 민족 생명시로 되며 따라서 민족적 공감대를 갖게 된다.
   시인은 시에서「아버지」를 단순한 아버지로서가 아니라 참되 인간으로 되게 하는 이정표(里程標), 바른 길로 인도하는 스승으로 승화시킨다. <암초에 부딪치고 /폭풍에 휘말려/ 고달픈 배머리 돌리려 했건만/그 때마다 그이는 배고물에 오르시여/ 조용히 엄한 눈길로/ 키 잡아 주셨더라 >」
   보다싶히 남영전의 사실주의 시들은 뜨겁고 진실하고 격정으로 넘친다.
ㄴ.민족 얼을 고양한 사실주의 시들
   남영전이 가슴속에서 뜨거운 격정이 폭발하여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가족생명시를 쓰던 당시 시인은 또한 눈길을 민족사와 민족의 얼과 민족의 운명을 관조하는 데로 돌리게  된다. 그는 가족사로부터 가족사와 면면히 이어진 민족사를 내다 보았던 것이다.
  우리 조선족 문단에서 민족의 운명을 두고 쓴 시인들이 많이 창출되었다. 남영전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남영전은 70년대 말, 90년대 초까지 역사에 파묻힌 우리 민족의 심령의 비석을 파내는 작업을 목표로「장군묘」,「호태왕비」,「국내성」,「고구려고분벽화」등 시들과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사랑의 전설을 구가한「천지의 전설」을 창작하였고 조선을 방문한 후 분단을 통탄하는 시「판문점」,「끊어진 다리」등을 썼고 한국을 방문하고「경복궁」,「왕릉」등 시들을 창작하였다.
 일월의 성스런 빛발
하백의 영험한 서기
은장도 날카론 서리
활궁의 강인한 탄력
피타는 부르짖음과
지성의 향불들이 모며모여
웅위로운 비석으로 우뚝 솟았다
-「호태왕비」일부

  민족학의 각도에서 보면 민족이란 민족의 자아의식을 갖고 있으며 기타 유사한 공동체와 구별되는 문화공동체이다. 민족문화전통,가치관념, 심미의식이 시인의 정신세계에 침투되면 시인은 어쩔 수 없이 민족의식의 기둥으로 된다. <선지선각한 일부 소수민족시인들은 공생공존(共生共存)하는 문학의 시대에 한바탕 번뇌와 고통의 시련을 맛본 후 단연히 자기가 이전에 갖고 있었거나 혹은 존재를 잃어 버리지 않았던 민족정신의 뿌리에로 회귀한다.1)
 「호태왕비」는 위와 같은 맥락으로  살펴볼 시이다.「호태왕비」라는 비석은 흘러간 역사에 있었던 민족정신의 일종의 상징이다. 시인은「호태왕비」로 파란만장한 세월의 장하에서 갖은 풍상고초를 겪었으나 쇠망하지 않고 꿋꿋이 솟아 있는 위대하고도 고귀한 민족정신의 기둥을 상기시키고 있다. 한편 또 새로운 우람한 비석을 세워 자기의 민족을 부강창성에로 불러일으키고 있다.
우뚝 솟아 세상을 굽어 보고
우뚝 솟아 세상을 깨우치며
우뚝 솟아 불멸의 넋을 기른다
-[호태왕비] 결미
가슴을 장쾌하게 하는묘사이다. 한 민족의 정신적 풍격과 이미지가 생생히, 풋풋이 머리 들고 창망한 우주를 당당히 굽어본다. 시인은 평범한 목소리로 옛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장쾌한 재생의 노래, 불멸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이러한 사례를 「장군묘」에서도 넉넉히 찾아볼 수 있다.

끌날 같은 장수들의 힘쓰기로다
하늘 땅 뒤흔드는 입장단 소리
밀어라 어영차 당겨라 어영차
얼음길 깔며 영(嶺)넘어 골 지나
서기 어린 명당자리 찾아서
믿음과 소망으로
의지와담량으로
한층 또 한층 쌓아 올리자
불사혼의 높이를 쌓아올리자
-「장군묘」일부

  읽으면 무한한 용기와 신심, 뿌듯한 자호감과 긍지를 주는 시원한 시다. 우리 민족에게는 지난 날에 끌날 같은 장수들이 있었거니와 오늘 날에도 결코 없는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읽힌다. 문제는 각성과 자각이다. 오늘과 같이 다재다난한 세상, 강자약육의 세상 ,경제경쟁, 문화경쟁, 과학경쟁이 치렬한 시대에 강자는 생존하고 약자는 먹히운다. 한마디로 강해야 살아남는다. 우리 민족도 자기의 생존을 위해 정신을 바싹 차리고 가장 명지한 선택을 하여야 한다. 이제 우리가 <서기 어린 명당 자리를 찾아/ 믿음과 소망으로/의지와 담략으로> 이 세상을 향해  용감히 도전하면서 <한층 또 한층> 민족의 슬기와 재주를 쌓아 가기만 한다면  기필코 민족의 찬란한 내일이 활짝 웃어줄 것이다.
남영전은 한반도의 운명에 대해서도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1987년 조선을 방문한 후 「판문점」,「끊어진 다리」등 통일갈망의 시편들을 썼다.
 
그때에 그만 이 금이 그어졌다
썩어빠진 모든 걸 토해내고
상하였던 원기를 되살려야 하는 때
짓밟혔던 그 몸이 상모 돌리고
집집마다 훈기로 넘쳐나야 하는 때
바로 그 꿈과 같은 시절에
그만 이 금이 그어졌다 」
-「판문점」(1) 일부

  모두 5연으로 된 이시는 첫 구절마다 「그때에 그만 이 금이 그어졌다」를 반복하여 [6.25]의 한을 강조하고 슬픔과 아픔의 무게를 증강시키면서 동강난 한반도의 현실을 통탄하고 있다.
 한반도의 동강 이유를 구태어 찾자면 스탈린에게도 있고 처칠에게도 있고 루즈벨트에게도  있다. 1945년 3월에 [얄타]회의에서  이미 3.8선이 그어졌던 것이다. 지금은 모든 것이 행차 뒤의 나발로 되었지만 이유가 어떻게 되였든지간에 억울하게 불행을  당하는 것은 우리 민족 뿐이다. 그리고 아직도 그 금이 언제면 없어질지 누구도 모른다. 이 것이 더욱 큰 불행이다.
남영전은 우리 민족의 순결하고 아름다운 정서를 전 중국에다 알리는 데서도 공로자로서의 몫을 담당한다. 1979-1980년에 「4.4」체 민요체로 창작한 장편서정시「천지의 전설」은 조선민족의 아름다운 정서를 훌륭히 시화했다는 평가를 받고 길림성 최고 문학상인 「장백산」문학상을 수상했다. 옥황상제의 딸 일곱이 백두산 호수가에 내려와 목욕을 했는데 그중 막내인 천녀가 백두산의 나무꾼 지용이를 만나 가정을 이루게 된다. 이에 대노한 옥황상제가 천장들을 파견하여 지용이를 죽이니 천녀도 낭군의 시체를 끌어안고 호수에 뛰여들어 죽어서도 부부가 된다. 후세 사람들이 천녀와 지용의 변함없는 순결한 사랑을  기리고자 <천녀>에서 [천]자를 따 오고 <지용>에서 [지]자를 따서 백두산 호수를 <천지>라고  불렀다.
슬피 울던 하늘 선녀
호수 속에 뛰어 둘어
낭군 시체 끌어 안고
곱게 곱게 눈 감았다

이때부터 세인들이
천녀지용 이름 따내
이 호수를 천지라고
세세대대 불렀더라
-[천지의 전설] 일부

 [천지의전설]은 사랑 이야기를 주선으로  다루었지만 백두산이 조선민족의 성산이라는 의미도 간접적으로 체현되어 있다.
  남영전의 사실주의 시편들에서는 토템시의 정신과 기법들이 두루 엿보인다. 이 것은 남영전의 토템시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고 남영전의 토템시가 민족전통 의식과 민족 심미의식에서 돋아났음을 시사해준다. 원래 있던 남영전의 초보적인 문화현상 열기에 남영전 토템시가 갑자기 기세를 올리니 급기야  물의를 일으키는  문화현상으로 떠오른 것이다. 

3. 인성의 증명-『꽃이 없는 이 봄날에』

  중국에서의 남영전의 문화현상에서 남영전의 사실주의시가 근간(根杆)이 되고 남영전의 토템시가 열매가 된다면 『꽃이 없는 이 봄날에』은 토템시의 정신과 사상을 더 구채화, 세밀화 하여 인성을 고도로  체현한 현시대의 특수한 사시(史詩)라고 볼 수 있겠다. 『꽃이 없는 이 봄날에』의 탄생으로 하여 남영전의 토템시는 더욱 각광을 받고 금상첨화(錦上添花)격이 되었다.
  중문으로 씌여진 『꽃이 피지 않는 이 봄날에 』는 한 시대를 반영한 특수한 의미를 띠고 있었기에 세상에 나오자마자 중국시단에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 중국당대문학에서 하나의  작은 시집이 문단에 크고도 신선한 충격파를 가져다 준 사례는 아마 없을 것이다. 
  오늘 중국의 많은 시인들이 자아의 왕국에 갇혀 스스로 “냉혹한 철리파기”에 열중하고 있으며 자아팽창증(自我膨脹症)에 걸려 근근히 자기만 알 수 있는 시 혹은 자기조차  아리숭한 시 쓰기에 집착하면서 세상과는 담을 쌓고 있다. 그들은 이 땅위에서 사람들이 굶어 죽고 얼어 죽어도 관계치 않으며 지구의 곳곳에서 총포소리 요란해도 눈 한 번 까딱하지 않는다.
  2003년 중국에 불행하게도 『사스』라는 악마가 덮쳐들어 중국대륙에 대 재난이 일어났을 때 많은 문인들이 시선을 외면하였고 일부 문인들이 관심을 보였지만 신문에「사스」에 관한 한 두 편의 글을 쓴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남영전은 2003년 5월 16일부터 6월 19일 사이에 시집 한 권을 펴냈다. 그만큼 남영전은 시인으로서의 사명감이 강했고 인류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였다. 가령 남영전이 아니었다면 가뜩이나 백성들로부터 시대를 외면한다는 질책을 받아 왔던 문인들의 체면이 무슨 꼴이었겠는가. “이 시집은 특수한 년대에 백의전사들이 헌신적으로 병마와 싸우고 전국 인민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일치 단결하여 병마와의 싸움에서 위대한 승리를 취득한 사실을 구가한 기록성적인 문학작품이라는 데서 더욱 고귀하다.”2)
 “ 이 작품은 시인의 진정한 사랑과 인도주의 정신, 강렬한 사회책임감을 보여준다.”3)
“ 가령『꽃이 없는 이 봄날에』라는 시집이 없었더라면 가령 우리의 친애하는 조선족 형제 남영전이 필을 들어 『사스』와 진행한 생사판결의 영웅적 사적을 쓰지 않았더라면 중국의 시인들이야말로 얼마나 부끄럽고 유감스러웠겠는가! 남영전이 있었기에 중국의 시인들이 더는 부끄럽지 않게 되었고 체면이 서게 되었다. ” 4)
  이상의 글을 통해서도  우리는 「꽃이 없는 이 봄날에」라는 시집 한권이 중국에서의 남영전의 문화현상의 구축에 얼마나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남영전의 민족토템시와 「꽃이 없는 이 봄날에」는 서로 연관이 없는 것이 아니다. 양자침(扬子枕)의 말을 빌면 남영전의 토템시와 「꽃이 없는 이 봄날에」는 유기적으로 안과관계를 맺고 있으며 상보상승(相補相承)의 관계를 갖고 있다. 남영전의 토템시는 인류의 원초, 인류의 진실로의 회귀이며 그 목적은 삭막한 오늘의 세상에다 진선미를 살리고 자연과 인간이 화합하며 나아가 전 인류가 융합하는 것이다. 그  실질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꽃이 없는 이 봄날에」는 토템시의 재현과 승화이다… 바로 시대가 남영전을 수요할 때 그가 나타났고 시가 그를 수요할 때 그의 시가 나타났다. 사실 남영전 자체가 곧 한 수의 시다.”5)
  이 시집을 간단히 두가지 방면에서 고찰해 보기로 한다.
1). 《나》-인성의 대표자
이 시집에는「나」가 자주 등장한다. 설사「나」가 정면으로 노출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시 내면에는 곳곳에「나」가 숨어있다. 「나」는 개인이면서 추상적인 군체의 의미를 갖기도 한다.  특수한 상징적 의미를 띠고 시대의 대변인으로 대표의 기능을 하며 최종적으로는 인성의 상징으로 된다. 시집의 표제로 되고 있는「꽃이 없는 이 봄날에」와「나의 고백」은 인성에 대한 시인의 진지한 추구와 인류에 대한 사랑이 거룩한 참회와 함께 흐르면서 수많은 사색을 세워준다. 시인은 사상을 강렬하게 울리기 위해 연속반복의 수법을 채용해 특수한 부호로서의 「나」의 상징적 의미를 강조한다.「꽃이 없는 이 봄날에」는「나」가 열 번 나오고 「나의 고백」에서는 무려 열두 번의「나」가 등장한다.

사람들은 모두 나를 시인이라 부르지만
나는 좋은 시를 쓰지 못해 부끄럽노라
…중략…
.피에 젖었던 그 날을 어떻게 쓸 것인가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들을 어떻게 쓸 것인가
내 끝없이 끝없이 생각하지만
내 밤을 지새우며 구상하지만
나의 언어가 너무나 창백하구나
나의 필이 너무나 무디구나

사람들은 나를 시인이라 부르지만
종래로 있어 본 적 없던
생과 사의 갈등을
제대로 쓰지 못해
내 부끄러워 하노라
-「꽃이 없는 이 봄날에」마지막 연
너무나 겸허한 「고백」이고 너무나 사랑스러운 「고백」이다. 왜냐하면 그 겸허한 「고백」속에서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 넘쳐흐르고 있는 까닭이다. 무한한 사랑을 미처 다 주지 못하는 것이 시인의 고민이고 안타까움이다. 시인은 「사스」와의 투쟁에서 자기의 목숨을 바치면서 타인을 구하는 사람들한테서 인성의 광망을 보았고 그 광망속에서 받은 깊은 감동을 사랑의 힘으로 전환시켜 세상에 대고 외치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자기 시가 창백하고 자기의 필이 무디다고 역설한다. 눈물 나는  인간의 자각이고 산처럼 무거운 이 시대 지성인의 사명감이다.

꽃이 없는 이 봄날에
가령 나의 시가
한 떨기 꽃으로 될 수 있다면
가령 나의 시가
사랑의 입김이 될 수 있다면
가령 나의 시가
심령의 안식처로 될 수 있다면
가령 나의 시가
펄펄 휘날리는 기발이 될 수 있다면
내 기꺼이 낮에 밤을 이어
수많은 아름다운 꽃을 피워
그 꽃이 가장 친애하는 사람들과 함께
꽃 피는 봄날에 웃게 하리라

꽃이 없는 이 봄날에
가령 나의 심장이
한 떨기 꽃으로 될 수 있다면
가령 나의 눈이
한 떨기  꽃으로 될 수 있다면
가령 나의 손가락이
한 떨기 꽃으로 될 수 있다면
내 기꺼이 그들을 꺾어
순결하고 아름다운 꽃다발을 만들어
극 꽃다발과 쓰러진 친인들이
해빛 아래서 미소 짓게 하리라
-<꽃이 없는 이 봄날에> 일부
「나의 고백」이 인성의 광망(光芒)을 다 주지 못하는데서 비롯된 비장한 자각의 발로라면  「꽃이 없는 이 봄날에」는 인류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깡그리 바치겠다는 숭고하고 갸륵한 선언이고 다짐이다. 가장 깨끝한 심령을 지니고 가장 높은 자각을 지니고  인간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만이 흘러나올 수 있는, 심혼을 뒤흔드는 희생의 메아리이다.
  두 수의 시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나」는 「소아」(小我)로부터 「대아」 (大我)로 승화하면서 평화와 사랑의 메시지를 울리고 인성의 의미를 최대화 한다.
2.) 백의천사-사랑의 상징
이 시집에서 찬미의 대상으로 되고 있는 것이 대부분 호사이다. <엽흔(葉欣))의출정>,<이효화(李曉華)의 기탁 >, <정수란(丁秀蘭)의 순백의 두 얼굴>, <웃고 말하기를 좋아하는 여자> 등 시편들은 모두 호사를 찬미한 시편들이다. 시인이 선택한 주인공은 모두 실재한 인물들이다. 사실 <사스>와의 투쟁에서 제일 헌신적으로 싸운 사람들 중에 호사들이 제일 많았다.  그들의 자아희생적인 정신은 사람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고 눈굽을 촉촉이 적시게 하였다.
그녀는 감염되었다
동료들이 그의 페를 검사 하자 했지만
가래를 토하게 하려 했지만
그녀는 동료들이 자기 곁으로
오지 못하게 했다
원장과 동료들이 그녀를 보러 왔건만
그녀는 그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같은 날
그녀에 의해 구원된 환자는 출원했건만
그녀는 고요히 인간 세상을 떠났다
-《염흔의 출정》일부

이 것이 「사스」와 의 투쟁에서 발휘한 중국호사들의 비장한 헌신정신이다. 자기가 구한 환자가 퇴원하던 날 <엽흔>은 죽는다.  환자를 구하기 위해 자기의 입으로 환자의 노폐물을 뽑아내고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사랑, 그 사랑의 크기를 가늠할만한 자대가 과연 있을 수 있을 것인가.

그녀는 쓰러졌다
손에는 아직도
한 쌍의 작은 신이 쥐여져 있었다
어린 딸을 위해 산 한 쌍의 예쁜 신
하나의 벽이
어린 딸의 달콤한
미소를 막았다
하나의 벽이
모녀의 면면한 정을 막았다
손에는 아직도
한 쌍의 작은 신이 쥐여져 있었다
어린  딸에게 하고픈
수많은  말이 쥐여져 있었다
-<이효홍의 기탁> 일부
또 한 사람, 젊은 호사이고 젊은 어머니인 이효홍(李曉紅), 그녀도 역시  환자를 구한 후 희생된다.  어린 딸에게 주려던 꽃신도 미처 못준 채, 딸에게  하고 싶던 그 많은 말도 미처 못한 채 그녀는 꽃신을 손에 꼭 쥔 채 조용히 조용히 인간 세상을 떠난다. 이들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가장 위대하고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들이다. 이 시집에서 「호사」는 한 개인을 의미할 뿐 아니라 인간을 보호하고 수호하고 감싸주는 모든 사람들의 대표로서 군체적 의미를 띤다. 여기에 바로  「꽃이 없는 이 봄날에」의 거대한 숨결이 있다.
  남영전은 백의전사들에게 숭고한 감정을 지니고 그들의 영생불멸의 혼을 만고에 전하기 위해  「백의영웅비」를 세운다.
 
가장 결백하고 우람한 비석
초연 없는  전쟁에서 우뚝 솟은 비석
 이하 략…
그 것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불멸의 비석
유구한 문명을 가진 중국에서 일떠선 비석
결백하고 우람한 비석
위험이 살판 치는 비상 시기에
천백만의 마음속에서
서서히 일떠선 비석
새로운 비석-백의 영웅비
-《백의영웅비》마지막 연

‟남영전의 토템시의 핵심은 인간의 원초적인 진선미를 발굴하여 오늘 날의 삭막한 인성을 치유하는 것이며 종국적으로는 전 인류의 화목과 융합을 도모하려는데 있다. 이러한 사상을 전제로 한 남영전의 토템시가 안간의 사랑에 대한 선언이라면『꽃이 없는 이 봄날에』는 “민족토템시의 재현이고 승화라고 볼 수 있다.”6) “남영전은 자기의 시에서 문화초월을 하고 있다. 문화초월이란 바로 서정적주체가 표현하는 인류애이며 서정적 주체가 표현하는 민족과 개채를 초월한 문화관심과 문화운명감이다.”7)
《꽃이 없는 이 봄날에》는 남영전 토템사상의 구체화이고 재현으로서 중국에서의 남영전의 문화현상의 형성에서  커다란 구실을 하고  있다.

 4. 남영전토템시의 미학-화해와 융합과 사랑

  남영전의 사실주의 시들은 80년대 중기부터 이미 초보적으로 중국시단의 인정과 긍정을  받기 시작했다. 따라서 사실상 80년대에 이미  미약하나마 남영전문화현상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남영전의 토템시가 중국문단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 와 신선한 충격을  주자 남영전의 문화열기가 일시에 왕성하게 피어올랐다. 거기다가 토템의 미학사상을 구체적으로 재현하고 승화시킨 특수한 시대의 사시 <꽃이 없는 이 봄날에>의 탄생으로 하여 남영전에 대한  관심과 주목이 광범성을 띠게 되었고 토템시의 가치와 위상이 더 높아졌다. 돌이켜 보면 중국에서의 남영전의 문화현상은 일조일석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20여 년이라는 시간의 고험과 검중을 거쳐  객관적으로 순리에 따라 형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토템시를 창작하던 초기 남영전은 민족의 뿌리 찾기로부터 착수하였다. 다 알다싶히 토템은 한 씨족의 표지이고 상징이다.  토템이라는 신생어는 일찍 18세기 말 요한 랑그의 ‟번역원 겸 상인인 한 인디안인의 항해와 여행„에서 연유되었다. 그 책에 이런 기재가 있다. ‟토템은 야만인들의 종교성적인 미신의 하나로서 그들 매개인에게는 자기가 사랑하는 정령(精灵)이 있었다. 그들은 그런 정령이 자기제들을 지켜준다고 믿고 있었다.” 결국 토템이란 인디안이들의 방언으로서 한마디로 형제, 친척 등 혈육관계를 의미한다.
토템시 창작 초기에 남영전은 민족의 뿌리 찾기로부터 착수하다가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된다. 그는 인류는 원래 한 뿌리에서 돋아 났다는  것을 발견하고 점차 의식적으로 창작시각을 민족과 시공을 초월하여 전 세계적인 범위로 확대시켰다. 이를 두고  북경대학의 사면(謝免)교수는 남영전은 토템의 이념으로부터 출발하여 연구 범위를 민족사,인류문화사, 심미예술사의 광대한 영역에로 밀고 나갔다고 말하고 있다.8)
  우리가 남영전 문학현상이라고 말하지 않고 굳이 남영전 문화현상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남영전의 토템시가 순수문학의 범주를 벗어나 인문, 인류사, 민족사,심미예술사  등과도 관계가 있는 까닭이다.
  남영전은 18년간의 끈질긴 추구와 각고 끝에 토템을 통해 민족혼을 발굴하고 재주조하여 역사와 현실을 점목 시키고 참된 인성을 되찾으며 인류의 영원한 정신고향을 찾는다.9)
   인류의 영원한 정신고향을 찾는다는 여기에 남영전 토템시의 무게가 있고 가치가 있다. 하기에 어떤 평자들은 “남영전의 토템시는 과거로 갔다가 현재로 돌아오지만 그것은 단순한 원시복제거나 원형복귀가 아니라 오늘의 인류를 위한 고층차로서의 회귀이며 나선식승화라고 보고 있으며”10) 어떤 평자들은  남영전의 토템시는 원시문화와 현대예술의 교묘한 결합이기에 일반적인 신화와 전설을 초과하여 참신한 창작을 하고 있다고 찬양하고 있으며 ”11)어떤 평자들은 “남영전의 토템시의 핵심은 조선족의 것이면서도 중화민족의 것이며 음양의 통일이고 천지인(天地人)의 합일로서 인류적인 것이며 원시적인 것이며 현대적이 것이라고  보고 있다.”12)
 이러한 견해들은 남영전의미학주장과 거의 일치하다. 남영전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18년 간의 시간을ㄹ 들여 42수의 민족토템시를 창작한 후 조선족의토템물과 중화민족의 토템물이 불가분리의 혈연관계를 맺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세계 기타 민족의 토템물과도  혈견관계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놀랍고도 기쁘게 발견하였다. 이런 연고로 나는 아래와 같은 결론을 도출해 내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쓰고 있는 토템시는 비단 조선민족에게 속할 뿐 아니라 중화민족에게도 속하며 나아가 기타 세계민족에게도 속한다. 일축하면 토템은 하나의 기치이고 일종의 정신이고 거대한 응집력이고 형제와 같은 뜨거운 정이며 전 인류가 함께 안고 있는 아름다운 이싱이다.”13)
  남영전에게는 민족과 개체를 초월한 문화관심과 문화운명감이 강하다. 그는 항상 이런 초월감을 가지고 토템시를 써 왔다. 그의 창작 주장이 공허한 외침이 아니고 토템시 창작에서 사상적 예술적으로 나타나고 있기에 국내외 문학계가 큰 중시를 돌리고 있다. 한족 문단의 적지 않은 평자들이 남영전을 일컬어 조선족 시인이자 중화민족의 시인이며 나아가서는 전 인류에게도 속하는 시인이라고   높은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남영전은 자기가 거둔 풍성한 문학 성취로 하여 문학의 영예를 따낸 사람이다. 남영전은 전반 중국 문단에서 첫 번째로 손꼽히는 토템연구가이며 첫 번째로 토템계렬의 시를 가지고 중국시단을 놀래운 시인이다. “남영전처럼 의식적으로 계통적으로 민족토템을 묘사하고 구가한 것은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일이다.”14)
토템에 대한 남영전의 시각은 누구보다 예리하고 투철하며 누구보다 멀리 보고 정확하게 본다. 어떤 면에서는 인간 단계를 벗어나 영인(灵人)단계의   지성인처럼 역사와 현실을 접목시키고 현실 속에서 미래를 제시하려고 한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민족에게 기껏 해야 토템물이 한 두 개 정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이 우리가 여지껏 알고 있던  통념이었다. 이를테면 조선족에게는 곰토템만 있고 한족에게는 용(龙)토템만 있다고 생각해 왔듯이 말이다. 그러나 남영전은 <역사의 각도에서 보면 조선족의 토템물은 하나인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인 것이다.》고 하면서 우리가 진리처럼 여겨왔던 굳어진 통념에 반기를 든다.  또 남영전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토템물이 한 민족에게 특정된 것이 아니고 여러 개의 민족이 공동으로 가질 수 있다는 견해다. 필자는 이런 견해를 처음으로「토템공유설」라고 명명한다. 우리는 중국의 전설속에서도 토템공유설의 근거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고대 중국의 전설을 보면 동방의 이족(彛族)들은 뱀이나 용(龍)을 토템으로 삼았고 중부의 염제족(炎帝族)들은 소를 토템으로 삼았고 남방의 만족(蠻族)들은 맹수를 토템으로 삼았으며 서방의 견륭족(犬隆族)은 개를 토템으로 삼았다.  중국의 소수민족의 하나인  나시족(那施族)에게는 천 이백년 전에 쓰던 『뚱바고서』가 지금까지 현존해 있다.『뚱바고서』란 나시족의 원시종교인 뚱바고의 집사관이 사용하는 종교전적(宗敎全籍)을 일컬으는 책으로서 일명 뚱바문이라고도 한다. 상형부호로 그린 뚱바고서에는 여러 가지 도안이 있는데 그 중에는 하늘로 날아오르는 룡도 있고 날개를 퍼덕이는 학도 있다. 이로부터 우리는 나시족과 한족은 가능하게 용(龙)을 하나의 토템물로 공유했을 수도 있었다는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다.
   필자가 요해한데 의하면 로씨아 원동지구를 상징하는 기발에는 중간에 곰이고 양켠에 각각 독수리가 그려져 있다고 한다.  이로부터 로씨야의 일부 원시씨족들의 토템숭배물과 조선족의 토템숭배물이 같다는 결론이 나온다.
  상기한 예로부터 판단하면 한 민족에게 다만 토템이 한 두개인 것이 아니라 여러 개가 있을 수 있으며 서로 다른 민족이 하나 혹은 그 이상의 토템을 공유할 수 있다는 <토템공유설>은 설 자리가 있게 된다.
   토템공유설에 의하여 남영전이 주장하는 민족문화론이 나오게 된다. 이 문제는 새로운 제기법이고 자못 심각한 문제이다.  이리하여 남영전의 토템미학관과 토템시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다. 가장 공성을 띠고 있는  보편적인 반론은 “한 민족에게 여러 개의 토템숭배물이 있을 수 없다는 견해다.”15)
  어떤 사람들은 남영전의 토템시창작을 두고“자연숭배와 토템숭배를 혼동하고 씨족 혹은 부락토템과 민족토템을 혼동하고 조선민족과 타민족 토템을 혼동하고 원시이미지(혹은 원형,문화이미지)와 원시토템을 혼동한 인식적 오류를 범했다” 16)고 반론을 제기 하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토템해석은 역사학자나 문화학자들이 문화심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해야 할 일이지 시인이 해야 할 몫이거나 마땅히 해야 할 몫이 아니라고말한다.”17)
  여기서 가장 큰 분기점은 한민족에게 여러 개의 토템이 있을 수 있는가? 서로 다른 민족이 하나 혹은 여러 개의 토템을 공유할 수 있는가이다. 여기에 대한 가장 확정적이고 유력한 해답은 인류의 기원설에 있을 것 같다. 만약 과연 인류가 초기에 한 뿌리에서 돋아났다면 문제는 그리 어려울 것이 없을 것이다.
  남영전은 토템공유설과 민족문화론의 근거를 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설에서 찾고 있는데 이유가 충족한 것 같다. 문화인류학자들에 의하면 인류는 약 5만 년전에 아프리카에서 탄생하였다. 이 선민들이 초기에 아프리카에서 생활하다가  인구의 급장성과 식물의 결핍으로 하여 무리를 지어 대 이동을 하였다. 인접대륙인 아세아와 구라파로 천이하였고 베링해협을 건너 북 아메리카에 가서 일부는 인디안인으로 정착하였고 일부는 남아메리카로 가서 인디오족으로 정착하였다. 후에 항해업이 발전함에 따라  전 지구적으로 인구의 대 유동이 진행되었다. 오늘까지도 고고학자들은 아프리카 이외의 지역에서 인류가 탄생하였다는 중명을 찾지 못하고 있어 아프리카가 인류의 시원이라는데 대하여 인류학자들은 모두가 공동한 인식을 갖고 있다.
   필자는 토템연구가거나 인류학자가 아니어서 토템을 놓고 감히 시비를 할 수가 없다. 다만 세계 학계에서 공인하는 인류기원설을 따를 뿐이다. 인류기원설에 바탕을 둔다면 남영전의 다(多) 토템설, 토템공유설, 민족문화론은 설 자리가 튼튼하게 된다.    한 마디로 남영전이 토템시 연구와 창작에서 거둔 가장 큰 성과와 발견, 핵심은 전 인류의 화해와 융합, 사랑에 있다. 이런 까닭에 오늘 중국문단에서 남영전문화현상이 일어나고 있으며 남영전의 토템시는 조선족의 것이며 중화민족의 것이며 나아가서는 전 인류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5.  남영전의 토템시- 생명시학

 1). 오늘의 삶을 위한 생명의 노래
한 사회가 미증유의 거창한 변혁기에 이르자 금전이  폭군으로 군림하여 횡포를 부리면서 삶의 풍경을  살벌하게 한다. 이런 풍경 속에서 살고 있는 인류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 반갑지 않는 폭풍의 [세례]를 받지 않으면 안 되며 곤욕으 치르지 않으면 안 된다.
전통질서가 파괴되고 인문정신의 가치가 혼란에 빠지고 인성본연의 진.선미가 붕궤의 변두리에 다달으고 있는 이 시대, 생명의 존재는 길 잃고 갈팡질팡 하고 생명의 장력(张力)은 점점 약해지고 인간들의 사상은 빈혈로 헐떡거린다. 이런 시대를 맞으면서 숭고함과 성스러움을 자랑하던 시도 전도된 가치의 광환(狂歡)에 압살되어 나날이 초췌해지고 창백해 가고 있으며 헌 걸레조각처럼 소박을 받고 있다.
   이런 상황에 직면하여 적지 않은 민족지성인들이 시대의 앞장에 서서 우리는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가? 어떻게 가야 하는가? 우리 민족의 미래는 과연 어떤 것인가? 하는 무거운 물음을 던지면서 민족의 진로를 탐색하고 있다.
   그 중에 시인 남영전도 서있다. 위에서도 살펴보았지만 남영전은 이제껏 누구보다도 못지 않게 우리 민족의 운명에 관심을 돌려 왔으며 누구보다도 못지 않게 민족의식이 짙은 시를 많이 써왔다. 그는 피눈물 나는 가족사를 제재로 <할머니>,<<아버지>,<휘우듬한 그림자>,<스물네살의 영혼> 등 가족의 생명시를 썼고 민족의 역사를 파 헤치면서 <호태왕비>,<장군묘>,<판문점> 등 비장한  민족의 생명시를 썼다 .그는 민족의 어제를 쓰면서 민족의 오늘을 썼다. 그는 죽은 넋에서 새 생명을 부활시키는 민족생명시를 썼다.
  이러한 시인이 어찌 민족과 인류가 겪고 있는 정신위기를  수수방관할 수 있겠는가? 우리에게 시들어가는 정신을 살리는 노래가 필요할 때, 오늘을 참답게 살고 내일을 위해 억센 투지로 용왕매진하게 하는 노래가 필요할 때 남영전이 「토템」을 안고 온다. 남영전은 인간의 모든 비극이 「정신고향」을 잃은 데서 온다는 것을 알고 저 아득히 먼 역사의 수림 속에서 토템을 불러 재주조하여 인성을 되찾고 인류의 영원한 정신고향을 찾으려 한다. 시인은 토템숭배로부터 영원한 현실의의와 생명존재의의를 발굴하고 치유할 「정신고향」을 데리고 현대인 한테로 온다.
  18년의 각고 끝에 산출된 42수의 토템시는 역사를 통해 오늘을 살리려는 시인의 거창한 작업의 귀중한 응결물이다. 민족정신, 인류정신의 상징으로서의 42수의 토템물은 42 개의 목소리로 민족의 어제와 오늘의 비희고락을 읊조리면서 미래를 제시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남영전의 토템시는 역사생명에 대한 단순한 추억으로서가 아니라 오늘의 삶을 위한 생명의 노래로 불리운다.

 우람한 그림자
    엉기적
       엉기적
태고의 전설을 읊조리며
 백의의 넋 빛내이며
머언 길을 헤쳐 왔노라」-「곰」 마지막 연
 시의가 무겁고 진폭이 크며 시풍이 호방하다. 우리 선조들의 끈질긴 생명의식, 개척정신이 슴배여 있으며 오늘의 삶, 미래의 삶을 위한 완강한 의지도 함께 번뜩인다. 오늘의 우리도 이렇게 살아야 할 것이 아닌가. 태산이 앞을 막더라도 그 것을 <엉기적 엉기적> 용감히 끌고 가야 할 것이 아닌가. 이러한 결심만 있다면 우리도 우리의 시조모 <곰>처럼 <탄식하지도 않고 /구걸하지도 않고/ 첩첩산중의 천험을 뚫고 나갈 것>이며 종당에 <일월을 휘어잡는 자유의 넋>이 되어 <신단수 아래서 장고 치며 춤 추며> 행복한  삶을 영위할 것이다.

창천을 조각조각 받쳐들고
대지를 갈래가래 거머쥐고
씨비리 돌개바람 안고 회오리쳤네
……..
잎새마다 넓은 마당
가지마다 넓은 공간 .
무연한 녹음이 우거지고
장수의 힘뻗치었더라.
……..
드팀없이 무궁토록
창천을 받쳐들고
대지를 거머쥐고
거연히,
거연히 솟으리라 -「신단수」일부
  
「신단수」는 무궁한 힘의 상징이고 영원한 생명의 표징이다. 오, 저토록 큰 창창한 하늘을 받쳐들고 저토록 망망한 대지를 거머쥔 그 무궁무진한 신력(神力), 하기에 그 작은 잎새마다 가지마다 생명이 뛰노는 넓은 마당으로, 드넓은 공간으로 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신단수>와 같은 무궁한 힘과 영원한 생명을 가진다면 칼바람도 불벼락도 물사태도 겁날 것이 없을 것이며 <드팀없이 무궁토록/ 창천을 받쳐들고/대지를 거머쥐고 /거연히/ 거연히> 이 세상 우뚝 솟아 있을 것이다. 오늘의 우리에게는 바로 「신단수」와 같은 그런 용기와 담략과 기백이 필요하다.
  「두루미」에서는 생명산생의 간고함과 환희, 심령의 순결, 불요불굴의 정신, 찬란한 미래가 예시되고 있다.

억겁의 지하에 묻혀
곰팡내 피 비린내에 절고
검붉은  질식속에 몸부림치다
층암 뚫고 나온 두루미
까만 삿갓 ,까만 두루미,까만 적삼
모조리 태워버리고
천지간에 흰색으로 엉기어
맺힌 백의 혼이여-「두루미」일부

얼마나 간고한 탄생인가. 얼마나 위대한 탄생인가. 억겁의 지하에서 층암을 뚫고  세상에 나온 두루미, 더욱 더 자호할만한 것은 모든 검은 것들을 다 태워버리고 하얀 혼으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일체의 더러움이 깨끗이 배제되고 여과된 심령, 「두루미」는 진,선,미의 화신이다. 세상에 영원히 살아남는 것은 오직 진,선,미밖에 없다. 따라서 진,선,미는 시간과 공간과 우주와 함께 영원한  생명을 갖는다. 시인은 우리 조선민족의 정신을 이렇듯 고도로 찬양하고 있다. 시에서 열 번이나 반복되는 민족의 혼 -<백의 혼>은 때 묻지 않은 순결한 혼이며 강의하고 도고하고 불요불굴한 혼이며 대를 이어 생명이 자라나는 영생의 혼이며 희망찬 미래가 기다리고 잇는 혼이다.
설령 결백속에 선지피 떨어져
백두의 얼음 속에 스며든대도
가슴치며 통곡하지는 않으리

더욱더 많고많은
백의혼이 자라나기에
백의혼이 일떠서기에

백의혼은
강자를 약자로 보고
약자를 강자로 본다
비바람 속에 덤불길험악해도
높은 영마루 바다에 잠긴대도
갈망을 향해 메운 활시위
다시 접을 수는 없다
창천이 부른다
강산이 부른다
백의혼이여
       백의혼이여
          백의혼이여 -《두루미》일부

  우리는 절망에 물앉는 약자가 아니라 갈망을 향해 메운 화살이 되어 우주를 가르며 나아가야 할 것이다. 창천이 부르고 있는 한, 백의 혼의 앞날은 기필코 밝을 것이며 그 속에서 민족의 생명은 영생을 획득할 것이다.

2). 생명의 제 양상

  남영전의 42수의 토템시는 42개의 상징물이며 42수의 노래이다. 그 노래는 한 민족의 노래이면서 전 인류의 노래이고 우주의 노래이며 생명예찬이다. 남영전의 시는 토템시에 이르러 비약을 가져와 기교가 보다 성숙되고 시의가 깊고 함축되고 철리성이 풍부해진다. “시의 문제는 곧 생명에 관한 문제이며 생활체험을 통해 획득한 생명가치초월의 문제이다.”(딜타이) 필자는 이런 관점을 가지고 남영전의 시들을 살펴본다.
  남영전의 42수의 토템시들은 42명이 부르는 인생 대합창이지만 소란스러운 불협화음이 아니라 잘 조화된 장엄한 교향곡이다. 그 곡의 주제는 인류구원이고 생명예찬이다. 이리하여 남영전의 시들은 휴머니즘의 대열에 들어서며 남영전은 휴머니스트로 된다.   우중충한 상징의 숲에서 들려오는 우렁찬 노래소리, 남영전이 지휘하는 토템합창은 소박하면서도 우아하고 명랑하면서도 장중하고 낭만적이면서도 비극적이어서 생명현상의 모든 양상을 포섭한다.
ㄱ). 영생불멸로서의 생명이미지
  우리 선조들은 토템물을 생명의 영원성으로 이해했으며 그리하여 자연과의 화친을 도모하려 했다. 자연과의 화친은 인간과 자연이 동격(同格)이라는 불교의 화엄(華嚴)사상에도 부합되고 동양철학의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사상과도 통한다.
   시인은 토템이라는 이 특수한 문을 통해 인류라는 보편적 세계에 들어선다. 토템시는 상상을 떠날 수 없다. 시인은 예수처럼 포도주를 물로 변하게 하는 기적을 베푼다. 시적 상상력을 종교적 상상력이라고  하지만 남영전의 경우는 종교적 상상보다는 신화적 상상이다. 처음으로 살펴볼 것이 신화적 상상속에서  태어나는 영생불멸의 생명이다. 이 부류에 줄을 세울 수 있는 시들로는 「달」》,「신단수」,「곰」,「해」,「돌」,「불」등이다.

풍요로움의 원리는 그래서 밀물이고
모성의 원리는 그래서 윤회(輪回)이고
생명의  원리는 그래서 연장되노라
- 「달」의 일부
 
  시인은 이즈러졌다 둥글어지고 둥글어졌다 이지러지는 달의 윤회를 섭리로  받아들이고 거기로부터 영생에로 나아가는 한 갈래의 길을 발견한다.「달」은 아름답고 풍만한 모성으로서 끊임없이 생명을 낳기에 생명의 원리는 길어질 수 밖에 없고 영원한 생명이 얻어질 수 밖에 없다.
   「곰」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은 태고적에도  <우람한 산그림자 끄을고 /엉기적/엉기적 > 끈질기게 걸어왔을 뿐 아니라 <일월을 휘여 잡아 자유의 넋으로> 되어 오늘도 의연히 완강한 의력으로 삶을 끌고 전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람한 산그림자 끄을고
엉기적
엉기적
엉기적
태고의 전설 읊조리며
 백의의 넋 빛내이며
머언 길을 헤쳐왔노라
-「곰」일부««»

<신단수>가 영생할 수 있는 것은 불요불굴의 정신을 가지고 <광대무변한 우주에서/오성을 부르며/지혜를 부르며>, <잎새마다 넓은 마당/가지마다 높은 공간/무연한 녹음이 우거지고/장수힘 뻗치여/ 무수한 혼 부르며/생의 영원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특히는 아래와 같은 형상으로 이 세상에 우뚝 서있기 때문이다.

드팀없이 무궁토록
창천을 받쳐들고
대지를 거머쥐고
거연히,거연히 솟으리
-「신단수」일부
 「돌」이 영원한 생명을 획득 할 수 있는 것은 거룩한 신력으로 광대무변한 우주에서, 세월의 장하에서 불멸의 영혼으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끌어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힘은 끝없이 뻗쳐
방대한 영체(靈體)를 움직이네
돌은 분신쇄골이 되어도
알알의 모래로 대천세계 끌어안네
-「돌」의 일부

위대한 영혼을 지녔기에 온몸이 가루가 되어도 알알이 모두 거대한 힘이 되어 대천세계를 끌어안는다. 한 알의 모래를 한 인간의 정신이라고 할 때 그런 정신이야말로 얼마나 거창하고 숭고하고 위대한 것인가. 그리하여 시인은 모든 인류에게 호소한다.

돌과 함께 살자
돌같은 뼈대를 가지자
정녕 돌과 운명을 같이 하면
죽지 않는 인생을 살 수 있으리
-「돌」일부

  휘청거리고 있는 오늘의 우리의 민족정신이 「돌」과 같은 영혼으로 살아간다면 과연 이 세상에 두려울 것이 무엇이랴. 보잘것 없는 「돌」한테마저 영생을 부여하는 시인의 갸륵한 심성, 실로 시인이야말로 기적을 만드는 사람이며 생명을  만드는 사람이다.
「해」는 시인의 붓끝에서 민족영혼의 화신으로, 생명체의 화신으로, 어머니의 상징으로 묘사된다. 시인은 특히 백의민족의 혼을 돌출히 하기 위해 「흰」을 강조한다. 「조상의 흰 영광(靈光)」,「조상의 흰 은정」,「조상의 흰 대문」,「조상의 흰 자애」등 등. 생명의 영원성은 <조상과 자손을 이은 흰자리/언제나 눈부신 빛을 뿌린다>에서 집약적으로 나타난다.「흰 다리」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민족정신이며 가장 숭고한 인류정신이다. 연속과 이음을 상징하는 그 다리-「해」가 있는 한 인류의 생명은 영원히 빛 뿌릴 것이며 자손만대 복 받을 것이다

아득히 먼 해궁전에
  조상의 흰대문이 열려있다
  영원히 닫기지 않는 그 문은
  자손만대 복 받는 근원이여라
-「해」일부
 
민족정신의 항구성 내지 인류정신의 항구성을 지칭하는 <조상의 대문이 열려 있다>라는 시구는 격절탄상할만한 기발한 착상으로서 아주 무거운 시 함량을 안고 있다.
ㄴ).자아희생으로서의 생명이미지
  자아희생은 인류에게 고유한 가장 아름답고 숭고한 심성이다. 사랑도 자아희생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자아희생 속에는 진,선,미가 체현되어 있다. 오늘과 같이  인정이 삭막한 시대에 남을 위하는 정신이야말로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
   남영전의 토템시에는 자아희생을 다룬 시들이 아주 많아 현실적 의의가 크다. 이 부류에 속하는 시들로  「흙」,「양」,「황소」,「두꺼비」,「고래」,「산」등 여러 수가 있지만 몇 수만 보기로 한다.

만물을 안아 키우는
흙은 신령이런가
… …
생명을 배태하며
만물을 낳아키운다
사람들에게 꿈을 주고
푸른 향토를 가꿔 준다
-<흙> 일부
 
자기의 피와 살로 만물을 키워주는 「흙」의 고통인들 얼마나 클소며 또 그 공로는 얼마나 클 것인가. 그러나「흙」은 종래로 자기의 괴로움이나 공로를 말 하지 않고 혼자 묵묵히 속으로 삼킬 뿐이다. <생령에 대해 /만물에 대해/ 흙은 언제나 침묵한다/소리없이 잠잠하다/ 듣기만 한다> 어찌 그 뿐이랴.

산악에 짓눌려도
흙은 너그럽게 용서한다
약한자를 내 쫓지 않고
독균이라도 버리지 않으며
나중엔 자기 품안에 끌어 안는다
 -「흙」의 일부
 악한 자, 독균마저도 가슴에 품어주는 흉금과 관용, 너무나 큰 너그러움에 머리가 숙여진다.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이 이러하다면 갈등이  있을소며 싸움이 있을건가. 「흙」의 겸손과 인내, 침묵과  너그러움, 그리고 관용은 어지럽고 소란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시사해주는바가  크다.
 <두꺼비>는 남을 도와주었건만 보상을 받을 대신 되려 멸시와 학대를 받는다. 인과보응이 뒤바뀌고  있다. 가치판단이 혼란에 빠진 이 시대에 와서 많은 경우 인과보응은 통하지 않는다. <두꺼비>의 삶이 그러하다.

어질고 불쌍한 약자 만나면
자신을 도와준 은인 만나면
제한몸 내붙이더라도
 있는 힘껏 도와나섰다
대대손손 억룰렸어도
악착스레 뻗쳐왔다
 생명의 먼 발치에서
보름달을 안아왔다
-<두꺼비>일부

  「두꺼비」는 인고를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인간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였다. 인류에게 빛을 주는 「보름달」까지 안아왔다. 그러나 여기에 따르는 것은 찬양이 아니라 멸시와 학대 뿐이다. 이유는 단 하나,외모가 추하다는데서이다.여기서 우리는 가치판단의 혼란을 다시 한 번 반추(反芻)해 보게 된다.「두꺼비」는 억울한 상항에 직면해서도 원망도 하지 않고 침묵속에서 이 세상을 담담히 쳐다볼 뿐이다. 그러나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두꺼비」는 무명영웅으로 인격이 우뚝 솟고 그의 생명은 찬란한 불꽃으로 반짝이는 것이다.

억겁의 삶에
오해받고도 원망치 않았고
욕먹고도 성내지 않았다
고인 물처럼 담담하게
창상지변 지켜보았다
-「두꺼비」일부

  이제「양」을 보자. 전통관념에서「양」은 순결의 대명사요 제물로서의 대명사다.「양」은 슬프게도 자신을 남한테 희생시키는 것을 숙명으로 안고 태어났다. 시에서 보면「양」은 태어날 때부터 영적인 힘을 빌어 즉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향불연기와 /뭉게뭉게 흐르는 흰 구름이/경건한 기도와 더불어/하아얀 마음으로 차림새로> 태어난 것이다. 내적미와 외적미를 모두 갖춘 이 영물(靈物)은 하늘 밖의 저 먼 곳에서 이삭 하나 물어다가 이 땅에 신록이 무르익게 하며 굶주린 자들이 밥을 먹게 한다. 어찌 그 뿐이랴. 자기의 옷 마저 벗어 헐벗은 자들을 구제한다.

눈보라는 발가벗은 등허리 후려치고
얼음은 바싹 마른 몸뚱이 묻어버리는데
너는 제몸의 다스한 털옷을 바치어
헐벗은 자 떨리는 몸 감싸주고
쓰러진 자 다시 일어나 걷게 하누나
 -「양」일부

「양」은 신이나 하느님만이 할 수 있는 헌신적인 일을 한다. 그러나 자기의 모든 것을 바쳤지만 차례진 대가는 죽음이다. <기도하는 아침나절에/거룩한 제단 앞에 쓰러졌다> 남의  제물로 충당된 희생양, 「양」의 희생은 자아희생에다 강박희생이 더 가첨되기에 「흙」이나 「두꺼비」의 희생에 비해 참혹성을 띤다.「매,매,매」하는 양의 처량한 울음소리는 소복차림을 한 「양」의 혼이 스스로를 위해 부르는 초혼이다. 우리에게 사색을 던져주는 것은  선량하고 순결한 생명에 대한 인간의 무자비한 학살이다.

ㄷ).용사, 투사로서의 생명이미지
  남영전의 토템시에는 용사와 투사의 기질을 부여한 시들도 있다. 이런 시들은 시풍이 호방하고 진폭이 크며 도약공간이 넓고 흐름이 장쾌하다. 남영전의 토템시는 생명에 대한 환희와 약동으로 넘치기에 동원된 시어들이 동작성이 아주 강하다. 이는 남영전의 시가  여타의 시들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점이다. 동작성이 강한 시어들은 용사와 투사의 형상으로 묘사되고 있는 「범」,「백마」,「사자」,「매」,「우뢰」등 시에서 돌출하게 보여지고 있다.
밝은 대낮에
어두운 밤중에
속세의 음양 샅샅히 살핀다
불의가 얄미워
사악이 역겨워
따웅- 표효한다
어지럽고 어리석음이 꼴사나와
뒤쫓고 덮치고 물어뜯는다
잔뼈 하나 남기지 않고
통째로 삼켜버린다
-《범》일부
  사악과 불의가 파지처럼 지저분하게 널려있는 이 지구촌, 우리에게는「범」과 같은 진리의 대변인이 참으로 필요하다. 시에서 언급되고 있는 속세는 우리가 지금 숨 쉬고 있는 삶의 현장에 다름아니다. 탐오, 회뢰, 강간,강탈, 살인 폭행... 이런 것에 대해 「뒤쫓고 덮치고 물어뜯」으며 「잔뼈 하나 남기지 않고 /통채로 삼켜버리는」「범」과 같은 정의를 지키는 용사가 참으로 필요하다. 여기서 우리는 애증이 분명한 시인의 사상을 읽게 된다. 시인은 이 세상을 향해  외치고 싶은 말 을「범」의 형상을 통해 말하고 있다.
 《사자》와 《백마》는 내용상에서는 《범》과 비슷하나 기교에서는 《범》보다 더 다듬어졌다.《범》에서는 시의가 좀 드러나는 감이 있지만 《사자》와 《범》에 와서는 시의가 많이 함축되어 있다.《범》에서 싸우는 방식이 뒤쫓고 덮치고 물어뜯고 삼켜버리는 것이라면 《사자》와 《백마》에 이르러서는 싸우는 대방이 어둠과 악마,요귀이고 싸우는 방식은 질주하면서 빛으로 죽여버리는 것이다.

태양이 허허벌판을 질주한다
사자의 표효소리
천둥치듯 팔방에 울려퍼지고
우뢰치듯 눈사태를 무너뜨린다
해가 빙빙 돌고
별똥들이 쏟아져
어둠이 멀리로 쫓겨났다
악마는 바다 끝에 박히고
요귀는 18충 지옥에 갇혔다
-「사자」

번개불 번쩍이고
하얀 서기를 휘몰아
쏜살같이 달려온다
칡넝쿨 뻗은 숲을 지나
흑풍 백풍 몰아내고
야밤의 검은 장막  열어 젖히며
해빛안고
달빛안고
발길 닿는 곳
흰빛이 깨어난다
-「백마」
  시에 언급되는 「해빛」,「달빛」,「별똥」은 정의와 진리일 것이며 악마나, 요귀, 어두움은 정의와 진리에 배리되는 일체의 사악일 것이다. 모든 더러움을 없애야 한다는 용사, 투사, 진리의 목소리가 《광막한 창천에/망망한 광야에/ 메아리친다》. 시인의 삶의 자세는 사뭇 낭만적이고 미래지향적이다. 시인은 이  세계가 밝아지리라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그의 시에는 비관정서가 없다. 심지어 비극적인 운명을 다룬 시에도 비관이나 절망이 없다. 이것 또한 남영전 토템시의 특점의 하나이기도 하다.
ㄹ).비극으로서의 생명이미지
   고금중외를 물론하고 인간의 삶은 기쁨과 슬픔, 웃음과 울음, 즉 비희고락이 덩어리었다. 그러므로 인류의 역사를 비희고락의 역사라고 하여도 크게 엇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인류의 화해와 융합, 인류의 구원을 궁극적인 목표로 하고 있는 남영전의 시들은 구체적으로는 여러 가지 양상을 띠고 있는데 그 중에는 비극적인 삶을 주제로 한 시들도 적지 않다. 이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가령 한 시인이 기쁨만 쓰고 고통을 외면 한다면 그는  적어도 진정한 시인은 아니다. 비극은 자체로서의 특수한 미를 지닌다. 비극성의 폭로는 오히려 세계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자아를 강인하게 하는 기제가 된다. 니체의 경우 비극은 비관이 아니라 비관주의를 극복하는데 있다. 남영전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가 토템으로 생명의 비극을 쓰는 것은  비극을 보이려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비극을 치유하려는데 있다. 비극적인 생명을 다룬 대표적인 시들로는「백조」,「뻐꾹새」,「개구리」,「까치」등을 들 수 있겠다.
애오라지 북극에
눈보라 사납게 휘몰아쳐
보금자리를 빼앗아갔기에
욕질하고 매질하고 내 쫓기어
하는 수 없이
단꿈 꾸던 요람을 떠났디
살던 고향에 눈물 떨구며
 -《백조》

어떻게 보면 우리 겨레의 운명이 아닐가. 작자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많은 사색을 하여야 할 것 이다. 우리는 「백조」에서 억울하게 생명의 가치를 상실당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눈물이 글썽해서
처량한 몸 이끌고 떠나는
신세 억울해라
끊엄없이 자리를 옮기며
쉬임없이 간다.
가도 가도 끝이 없으니
영우너한 안식처는 어디?
한 몸 붙힐 곳 찾지 못해
안절부절 못한다
강팡질팡 헤맨다
-<백조> 일부
 남영전은 현실 삶을 직시하는 사람이며 자기의 민족과 전 인류의 운명을 직시하는 사람이다. 오늘 이 지구촌에서  보금자리를 잃고 갈팡질팡 하는 사람들이 어찌 한 둘이랴. 서러운 생명, 상처 입은 생명, 시인은 그런 것을 가슴 아파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시인이란 정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위에서도 잠간 내 비친  적이 있지만 인생을 바라보는 남영전의 시각은 궁극적으로는 낭만적이고 미래 지향적이다. 그리하여 비극적인 생명을 쓰면서도 희망의 빛을 주는 것을 잊지 않고 있다.

그러나 어찌하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두 날개 퍼덕일 수 있는 한
보금자리 찾아
떠날 수 밖에
영원한 따사로움 찾아/
따스한 영혼 지키려고 /
떠난다/
떠난다/
떠난다 」
-「백조」일부

「개구리」에서는 자연과 인간의 학대로부터 오는 비극을 시화하면서 서러운 생명을 노래부르고 있다. 

북풍에 묻히고.
빙설에 묵히고
동토에 묻히고
세상의 가장 잔인한 무게에
인간의 가장 잔인한 질식에
묻히고 눌리어 울고 있다
-「개구리」일부
 시인은 잔인한 인간과 잔인한 세상을 질타한다. 캄캄한 영어(囹圄)속에서 외로운 삶을 사는「개구리」인즉 인간세상의 최하층애서 버림받고 사는 민초들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 비극적인 생명에다 한 가닥의 빛을 선사함으로써 구원의 사제가 된다.
  이 외  「까치」는 민족의 역사의 비극을 노래 부르고  「뻐꾹새」는 전 인류의  공통한 비극을 읊조리고 있는데 해석을 약한다.
  이제까지 우리는 상징의 숲에서 울리는 42개의 토템생명들이 부르는 노래 소리를 감상하였다.  기본상 잘 조화된 화음이어서 가슴이 사뭇 상쾌하다.
  남영전은 우리 조선족시단은 물론이려니와 한족시단에도 없는 유일무이한 토테시인다. 그의 시의 고귀한 점은 토템으로 민족정신을 부활시키고 궁극적으로 인류의 화해와 융합과 사랑를 도모하고 전 인류를 구원하려는데 있다.
   남영전은 토템시로 한 시대를 찬란히 수놓은 시인이 되기에 손색이 없다,

 6. 남영전 문화현상에 대한 자료적 고찰

하나의 문화현상은 문화위기를 전제로 한다. 그리고 초기에는 언제나 찬반론(贊反論)이 병행하고 시비가 동반한다. 하지만 결국 문화위기가 초극되고 새 지평이 열린다. 중국의 문화사와 세계 문화사 경우 대부분 그러하였다. 남영전은 인간의 원초적인 진,선,미를 살려 잃었던 정신 고향을 되찾고 인류의 정신 위기를 극복 하고자 한다. 이리하여 남영전은 인간의 화해와 융함, 사랑의 선언문인 토템시를 추켜들고 나온다.
토템에 대한 깊은 연구와 토텝시 창작에서 거둔휘황한 성취가 마침내 중국문단에서 남영전의 문화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부분에서는 남영전의 문화현상이 우연이 아니고 필연성의 산물이며 지극히 객관적이고 그 것이 순리에 따르고 있음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남영전의 문화현상은 주로 아래와 같은 사실로 충분한 이유를 획득하게 된다.
 첫째: 남영전의 문화현상은 어떤 관계망이나 인맥을 통해 형성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피타는 노력과 그에 따른 성취로 하여 얻어진 것이다. 본문의 첫 부분에서 남영전이 거둔 문학성취를 자상히 소개했으므로 더 반복하지 않는다.
 둘째: 남영전의 문화현상은 많은 학자, 평론가 , 시인들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남영전의 글을 평한 국내외의 학자,평론가들의 글이 160여 편을 웃돈다. 중국의 당대 문학사에서 소수민족시인은 물론  한족시인까지 포함하여 이렇게 한 시인이 많은 평가를 받은 사례는 극히 적다. 이 부분이 상당히 중요하므로 골자를 골라 일부 소개한다.
 1). 이것이야말로 하나의 기이한 현상이 아닐가!  근근히 24수의 시가 수록된 한권의 시집이  중,한,영 혹은 중한 혹은 한중 대역본으로 연속 3차나 출간 되었으니말이다. 18)
2).남영전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계관시인이다. 그는 민족정신의 신념과 개체생명의 신앙, 거기다 넓고도 깊은 인류의식을 기둥으로 하여 견인불발하게 끊임없이 전진한다. 그는 오늘 중국시단의 앞장에서 걷고 있으며 세계시단을 향해 걸어가고있다.19)
3).어떤 사람은 이렇게 본 민족의 토템을 시화하고 계렬화 한 것을 일컬어 세계 시가상에서 전대미문이며 아주 기이한 현상이라고 말하고 있다.20)
4). 시가 역사에서 보면 신화를 시에 인입하여 명시를 창작하여다. 롱싸(龙莎),가드(歌得),엽지(叶芝) 등은 신화를 시에 인입하여 명시를 창작하였다. 그러니 민족 민족토템숭배를 시로 쓰고 그 것을 계렬화 한 것으로는 남영전이 시 역사에서 첫 자리를 치지한다.21)
5).토템시는 다만 그윽한 정서만을 토로하는 것이 아니라 미약한  외침을 통해 시인의 진정한 감정과 세ㅔ계의식을 표달한다.(22)
6). 42수의 토템계렬시들은 오색이 찬연하고 강렬한 신비감과 유혹력이 충만한 화랑(花廊)이다. 우리를 역사의 어제로 되돌아가 고인들의 목소리를 듣게 하고 고인들의 혈맥과 문화를 보게 하며 민족의 문화원천과 영혼의 외침을 찾게 하며 이로써 새로운 시대에 참신한 문화성격을 구축한다.23)
7). 남영전은 피계몽자와 계몽자의 이중 신분을 갖고 있다. 남영전이 구축한 토템의 심태에는 전형적인 지식분자의 특징이 있다. 그는 알종의 공통한 시의 원소로 보편주의의 시학정신을 희망하고 있다.24)
8).남영전은 소수민족 시인읭 대표이다.그는 다원문화의 어경(语境) 중에서 시창작으로 충만한 활력을 하면서 시에 대한 책임감을 안고 새로운 미학 공간과  문화 공헌을 하고 있다.25)
9).시인은 현실 생존 환경에 대한 관심을 유기적으로 토템 계렬시에 융합시켜 민족 문화에 대한 지식분자의 경이(敬异)와 양지(良知)를 체현시켜다. 공업어경(工业语境)에 대한 남영전의 질의와 인류의 생존위기에 대한 걱정과 근심은 의심할바 없이 상당한 계시성 의의를 갖는다.26)
10).남영전은 제일 처음으로 의식적으로 준비 있고 목표 있게 그리고 끈질기게 토템시를 창작한 사람이고 토템시를 탐색한 사람이다. 남영전의 토템시는 중국의 시단을 심미정도(审美正道)에로 오라고 부르는 초혼이다. 27)
11). 남영전은 토템문화의 이론으로부터 출발하여 연구의 범위를 민족사, 인류문화사, 심미예술사의 더둑 광대한 층면에까지 확대시켰다. 그는 민족은  혈통의 개념이 아니고 문화의 개념이라고인정한다.(28)
셋째: 남영전의 문화현상의 형성에 열기를 가해준 두 차례 세미나
2003년6월 22일 중남민족대학교에서「남영전토템시와 토템문화재구축세미나」가  열렸다. 이 세미나에 중남민족대학교,무한대학교, 등5개 대학의 30여 명의 학자, 교수,평론가들이 모여 남영전의 토템시에 대해 전면적인 분석을 하고 객관적인 가치판단을 하였다. 회의에서 일부 부정적인 견해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남영전의 토템시를 높이 평가하였다.
 2006년 3월 28일  북경사범대학에서「남영전시가창작세미나」가 열렸다. 북경대학교 교수이며 저명한 평론가인 사면(谢免)을 비롯하여 북경지구의 학자, 평론가, 시인 40여 명이 회의에 참석하였다. 그외 [시간],[민족문학],[중국문화보] 등에서 10여 명의 기자들이 참석하여다. 저명한 평론가 오사경(吴 思敬)이 세미나를 사회하고 중국작가협회 서기처 서기 지지아카가 축전을 보내왔다. 그는 축전에서 남영전은 소수 민족 시인의 대표이며 새로운 미학 공헌과 문화 공헌을 하였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중국당대 문학사에서 한 소수민족 시인에 대해 규모가 큰 두 차례의 학술 세미나를 조직한 것은 전무후무한 일로서 중국문단에 거대한 파문을 일으켰다.
 넷째: 남영전의 토템시에 심취되어 2005년에 중국에서 기이한 문화현상이 생겼다. 남영전의 토템시와 서법,미술이 악수하였던 것이다. 중국서부문예통감위원회(中國西部文藝統監委員會),사천대학 문학과인류학 연구소, 서남민족대학 예술학원, 사천사범대학 현대미술학원, 성도시 서법가 협회, 사천성 정부선전처의 연합주최로「남영전토템시명가서화연합작품초청전람회」(南永前土騰名家書畵聯合作品招請展覽會)가 열렸다. 전국 각지의 저명한 서법가, 미술가들이 남영전의 토템시를 미학대상으로 하여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그중 태반이 넘는 작품들이 잡지 <미술계>, <성성>(星星),《서부관광특간> 에 실렸다. 그리고 선택된 작품들을 모아 [주강문예출판사]에서 <시서화의 시대공진>(诗书画的时代共振 )이라는 이름으로 화책을 출간했다.
  이 특이한 문화 현상에 대하여 서남민족대학교 의 허회영(许会英) 교수가 <시가 전파의 수단을 확대하고 서화예술품위를 제고하자> 라는 평론을 썼고 사천사범대학교  문학원 부 원장 당소림(汤少林)이 <시와 서화의 토템: 당대 시가의 한 차례 만구운동> 이라는 글을 썼다. 모르긴 하지만 시와 서법과 그림이 혼연일체가 되어 책으로 나온 것이 아직 이 세상에 없는 것  같다. 이 특이하고 신선한 문화현상은 시 문학의 한 현상으로 될 뿐 아니라 서법과 회화에서도 독특한 현상으로 된다.
다섯째: 남영전의 토템시와 중국의 고대상형문자가 포옹하여 남영전 문화현상이 더 확대되었다. 조선족의 저명한 촬영가이며 조선족의 유일한 전각가(篆刻家)인 신승우(申承祐)가 남영전의 토템시에서 감동과 계발을 받고 전체(篆體:중국의 고대갑골문의 한 종류,중국의 고대 여섯가지 상형문자 중의 하나)로 남영전의 토템시를 가지고 인장(印章)을 조각하여「남영전토템시자구인」(南永前土騰字句印)이라는특수한 책을 펴냈다.
여섯째: 중국당대 문학사의 인정을 받고 있다. 중국조선족 시인들 중 중국문학사에서 다루는 시인은 고작 한 두 명인줄로 알고 있다. 오개진(吳開晉)의 『당대신시론』에서 남영전의 시에 대하여 이렇게 쓰고 있다.“ 남영전은  교모한 수법으로 소박한 민족신화를 승화시켜 감동적인 시경(詩境)과 선경(仙境)을 만들고 있다. 남영전의 시는 원고(遠古) 의 신화를 발굴하고 시화할 뿐만 아니라 하나의 풍부한 창조성적인 현대의식을 만들고 있다…원고의 예술정령(精靈)을 부활시킬 뿐 아니라 작자의 현대사유와 가치판단을 융합시킨다. ” 29)
『중국당대문학사』에서는 남영전시의 가장 큰 성취가 토템시의 연구와 창작에 있다고 쓰고 있다. “남영전은 민족시인으로서 자기 민족의 토템숭배물을 시화하고 계렬화하였는데 이는 세계시가 역사에서는 전대미문의 일이다. 남영전의 시가창작의 성공은 중국국내 뿐 아니라 세계에로 알려지고 있으며 세계시가 예술의 보귀한 정신재부로 되고 있다.” 30)
 이외에 양려는 중국의 당대 소수민족의 4명시인으로 이족 지지마카, 바이족 률원소적, 장족 반과 ,조선족 남영전을 꼽고 있으며 포풍은 중국의 당대 3명의 대표적 민족시인으로 바이족 률원소적과 장족 이단파이랑 ,조선족 남영전을 꼽고 있다.
일곱째: 몇 년이 안 되는 사이에 중국평단에서 전문 남영전의 문학을 다룬 평론집6권, 해설집 한 권이 출간되었다. 예하면 <원시토템과 민족문화>(추건군), <남영전토템시학>(마명규), <남영전토템시연구>(장순부), 등등. 이런 현상  역시 중국문단에서는 보기 드믄 일이라 하겠다                         
 ※       ※         ※         ※            
   이상으로  남영전은 확실히 문화현상을 일으킬만한  시인이며 따라서  중국에서의 남영전의 문화현상은 긍정적이고 객관적이고 필연성을 동반하며 현실의 순리에  따르고 있음을 입증하였다.
  물론 지금  남영전의 토템미학관과 토템시에 대하여 이의(異意)와 반론(反論)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다. 이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문화현상을 포함한 모든 사회현상은 찬반론(贊反論)을 동반하며  그 와중에 문화의 위기가 극복되고 문화의 새 지평이 열린다. 이제 세월이 흐르면 남영전의 토템미학관과 토템시의 진가(眞假)가 더 확연히 드러날 것이다.
  남영전의 토템시는 완전무결한 것이  아니다. 토템의 미학사상은 투철하고 심오한 반면에 토템시의 창작에서는 일부 허점, 주제의 반복과 기교의 반복이라는 약점이 두루 보인다. 남영전이 금후 극복할 난관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13억이 사는 대국에서 한 조선족 시인이 거창한 문화현상을 일으켰다는 것은 너무나 기꺼운 일로서 우리는 우리에게 남영전과 같은 민족시인이 있다는 것으로 하여 자랑과 긍지를 가져야 할 것이다.

주해:
1.양려(楊麗),「당대소수민족4인창작편론」『원시토템과민족문화』 시대문예출판사 2003년 1호
2. 오개진(吳開晉), 「특수한 년대의 특수한 노래」 『남영전의 꽃이 없는 이 봄날에』를 읽고 시대문예출판사 2003년 8월
3. 양자침(楊子忱) 「시와 시인 -남영전의 신작『꽃이 없는 이 봄날에』를 읽고 시대문예출판사 2003년 8월
4.사면 (謝免) 북경대학 교수,「남영전의 시가추구」『토템시탐론』2007년 4월 시대문예출판사
 5.양자침(楊子忱),시와 시인 『꽃이 없는이 봄날에』를 평함, 시대문예출판사2003년 8월
 6.동상
 7.포풍(鮑風),「생명의 시작과 문화근성의 여정」『서남민족학원학보』2003년1호)
 8. 사면(謝免)「남영전의 시가추구」,『남영전토템시탐론』 2003년 시대문예출판사
 9. 남영전 「세계융합에 대한 외침」『원융』2004년 시대문예출판사
 10. 강악(江岳),『민족문학연구』》2003년 1호
 11. 추건군(鄒建軍) 『원시토템과 민족문화 』시대문예출판사 2003년 2월
 12. 사지민(謝志民), 「 남영전 토템시의 가치취향」『원시토템과 민족문화 』시대문예출판사 2003년 2월
 13.양자침(楊子忱)「역사의 조각 시인의 궐기」『원시토템과 민족문화』시대문예출판사 2003년
 14.허련화(许连花) [토템과민족문화」『민족문학연구』2003년 1호
15.유보창(劉保昌),「토템과민족문화」『민족문학연구』2003년
 16.김관웅(金官雄) 「남영전씨의 토템시를 평함」『문학과예술』2007년 6
17.유보창(劉保昌),「토템과민족문화」『민족문학연구』2003년
18.양자침(楊子忱) <24수의 시로  세상을 들썽하다> 장춘일보 1998.4.15
19.률원소적(栗原小狄) :바이족, 서부 예술전파 연구소 소장
20.이홍연  평론가, 하남대학 교수
21.곽지우 평론가 길림성 작가협회 이론연구실 주임
22.장립군 여녕대학 강사, 문학 박사
23.장동오 중국시가협회 비서장, 시평가
24.유효취 북경사범대학 석사연구생
25.지지마카,이족 , 청해성 부 성장  시인
26.사면(榭免)「남영전의시가탐구」『남영전토템시탐론』,시대문예출판사2004년 4월)
27.률원소적(栗原小狄) .「남영전은 신화가 아니다」장강일보 ,1998년 4월15일.
28.사면(榭免)「남영전의시가탐구」『남영전토템시탐론』,시대문예출판사2004년 4월)
29. 오개진(吳開晉),<당대신시론> [산동문예출판사]1999년  30.[중국당대문학사] 特。萨音巴雅尔 편저, [민족출판사]1999년
내용제시: 오늘 중국에서 남영전문화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이 글은 남영전의 문화현상을 고찰하고 검증하려는 취지에서 씌어 진다. 제 1부분에서는 남영전의 인생궤적을 추적하면서 문학성취와 사업성취를  개괄하였고 제 2부분에서는 남영전의 사실주의 시들을 살펴보았고 제3부분에서는 토템미학사상을 특수한 연대의 특수한 노래로 엮은 《꽃이 없는 봄날에》를 투시하여 보았고 제 4부분에서는 남영전의 토템시에 투사된 토템미학관과 토템사상을 거시적으로 밝혀보았고 제5부분에서는 토템시를 구체적으로 분석하면서 남영전의 토템사기 결국 인류의 생명시라는 것을 제시하였으며  제6부분 에서는 여러 가지 신빙싱 있는 자료를 가지고 중국에서의 남영전의 문화현상이 객관성을 띠고 있고 필연적이고 순리(順理)에 따르고 있음을 증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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