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룡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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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와 융합,사랑의 기치를 추켜든 시인- 남영전
2009년 11월 09일 21시 35분  조회:1201  추천:37  작성자: 김룡운

[대담]
화해와 융합,사랑의 기치를 추켜든 시인 –남영전


대담자:
남영전 장백산잡지사, 길림조선신문사 사장, 주필,시인
김룡운 문학평론가,동북아연구문화원  비교문학연구소 소장
일시: 2009년 9월 11일 오전 9시
장소: 길림조선문신문사 사장사무실

현재 장백산 잡지사 사장, 길림조선신문사 사장이며 주필이며 시인인  남영전은 근래에 중국시단에서 인기가 높아 중국문단에서 남영전 연구 붐이 일어나고 있다. 이를 일컬어 필자는 «[중국에서의 남영전의 문화현상»이라고 명명한다. 남영전 시인은  잡지와 신문을 잘 꾸리는 한편 시창작에서도 풍만한 결실을 따내 지금까지 도합 15권의 시집을 펴냈다. 남영전 시인은 80년대 중기까지는 사실주의 시로 명성을 얻었고 그 후로는 토템시인으로 토템연구가로 자리를 굳혔다. 남영전 토템시의 핵심은 화해와 융합과 사랑이다. 남영전 시인은 중국에서 독특한 견해를 가진 토템연구가이고 처음으로 토템계렬의 시를 창작한 사람이다. 2003년에 42수의 토템시를 묶은 시집 «원융»을 내놓아 중국 시단에 이채를 가미했고 그 해에 또 특수한 시대의 특수한 노래 «꽃이 없는 이 봄날에»를 펴냈다. 화해와 융합과 사랑을 주창하는 토템미학사상을 시적행위로 증명한 이 시집은 또 한번 중국시단을 놀래웠다.
 중국문단에서는 남영전의 토템시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2003년, 2006, 2008년에 무한과 북경과 장춘에서 각각 규모가 큰 «남영전토템시연구세미나»를 개최하였다. 한 소수민족 시인의 작품을 가지고 세 차례나 륭중한 세미나를 개최한 사례는   중국문단에서는 전무후무한 일이다.
남영전 시인은 풍성한 창작성과로 하여 큼직큼직한 문학상도 여러차례 수상했다. 남영전 시인은 지금 중국작가협회 소수민족 문학위원회 위원, 중국소수민족 작가학회 부 회장, 중국소수민족 당대문학연구회 부회장이고  시계시인대회 영국캠브리지 종신회원이며  영국과 미국의  셰계명인센터로부터 네개의 성과상 메달을 받았다. 남영전시인의 이름이 [중국신세기문학사전],[중국당대문예가명인록], [중국문학사전] 등 40여부의 사전에 올라있다. 필자는 남영전 시인을 더 자세히 알기 위해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룡운: 잡지사, 신문사의 일로 무척 다망하심에도 불구하시고 대담에 응해 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선생님을 만나 할 말이  많은데 우선 선생님의 가정사로부터 말꼭지르 떼 봅시다. 제가 알기로서는 선생님은 혁명렬사의 자식이고 유복자이시고 어린 시절을 아주 기구한 환경에서 지내셨지요? 죄송합니다. 혹시 아픈 상처를 건드리지 않았는지..
남영전: 예, 저의 어린 시절은 불행했습니다. 가정의 함의는 사실 부모인데 아버지는 제가 어머니 배속에서 다섯달 되었을 때 전쟁에서 돌아가시고 어머니도 잇달아 세상을 뜨다 보니 저는 부모의 얼굴도 모르고 자랐습니다. 불행아이지요. 다른 애들이 아버지라고 부를 때, 아버지에게 막 매 달리며 무엇을 사 달라고 조를  때 그런 때가  나에게는 너무 부럽고 슬픈 때였습니다. 철부지  시절에는 가정을 원망하기도 했지만 차차 철이 들면서 아버지가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알고는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나도 아비지와 같은 사람이  되겠다고 다졌습니다.

김룡운: 부모의 사랑을 모르고 크다보니  선생님께서는 할머니에 대한  사랑이 각별 하시더군요. 할머니를  소재로 시도 많이  쓰셨고… 선생님의 .할머니는  어떤 분이였습니까?
남영전: 저의 할머니는 저의 인생에 큰 영향을 주신 분입니다..저는 할머니의 크나큰 사랑과 인도 밑에서 자랐습니다. 할머니는 평범하면서도 또 평범하지 않은 분이였습니다. 광복후에 마을에 쥐병이 만연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당시 제가 살던 소이산 마을에 털없는 쥐들이 우글우글 했다고 합니다. 일본놈들의 세균전과 관계가 있다고 하더군요. 그 때 쥐병으로 사흘 사이에 우리 할아비지와 두 고모가 돌아갔습니다. 45년도에 삼촌이 참군하였다가  47년도에 전사했고 저의 아버지는 47년도에 참군하였다가 잇달아 희생되었습니다. 얼미후 저의 어머니도 돌아가셨습니다. 결국 남은 것이란 할머니와 저 뿐이었습니다. 그때 할머니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할머니께서는 몇번이고 자살을 기도하시다가 손자 때문에 단념하군 했습니다. 그때 할머니의 연세가 45세였습니다.. 저의 할머니가 손자를 제대로 키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가는 실로 일구난설입니다. 다 말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그저 이쯤 알아두시지요..  할머니는 흉금이 넚고 낙관적인 분이였으며 이웃들과 늘 화목하게 지내셨습니다. 저 보고는 늘 너는 부모 없는 애니깐 부모 있는 애들보다 공부를 더 잘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할머니는 비록 지식은 없어도 이야기를 굉장히 구수하게 잘했습니다. 아마도 할머니의 이야기가 저의 문학세포를 키워준 듯 합니다. 저에게 있어서 할머니는 부오와  같고 인생의 스승과 같고 문학세포를 심어준 계몽스승과도 같습니다. 1984년도에 길림일보사 기자가 우리 집에 왔다가 할머니를 만나 보고 저에게 하는 말이 당신의 할머니는 평범하면서도 위대하다. 만약 당신이 손자로서 할머니에 대한 글을 쓰지 않는다면 당신은 작가 자격이 없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할머니»란  수필을 썼는데 반향이 좋았었지요.. 1994년도에 그 수필을 서정시로 고쳐서 발표했고 상까지 탔습니다.
김룡운: 듣고 보니 선생님의 할머니는 할머니이자  부모이고 스승이였군요. 참 위대한 분입니다. 대화의 방향을 장백산 잡지로 옮겨봅시다 선생님은 장백산의 창시자이지시요? 장백산 잡지에서 많은 작가들을  키워냈습니다.. 오늘 장백산은  번영과 창성의 일로를 달리면서 조선족문단에 거대한 기여를 하고 있지만 장백산의 초창기에는 아주 힘들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장백산의 역사에 대해서  원로 문인들은 대개 알고 있지만 젊은이들은 잘 모르고 있습니다. 한 번장백산 잡지의 흘러간 어제에 대해 간단히 추억해 주시지요.
남영전: 돌이켜 보니 세월이 참 빠릅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이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다고 했겠지요. 장백  잡지가 태어나던 때가 어제 같은데 벌써 거의 30년이 돼 오는군요. 1980연대 통화지구에 조선족이 12만이 넘었지만 조선문 잡지가 없었습니다. 문학을 사랑하는 통화지구의 지성인들이 모여 수많은 토론을 한 뒤에 상급에다 조선문잡지를 꾸리겠다고 신청을 했지요.. 당시 저는 류화현의 선전부에서 사업하고 있었는데  통화지구문련에서 잡지를  꾸릴 중임을 저에게 맡겼습니다. 그 때 제 나이 바아흐로 32세였지요. 저는 선뜻이 임무를 맡았습니다. 몇 달간의 긴장한 준비과정을 거쳐 1980년 5월에 장백산 잡지가 마침내 고고성을 울리게 되었습니다. 잡지가 잘 꾸려지니 중국의 저명한 작가들의 관심과 지지도 받게 되었습니다. 중국의 저명한 작가들인 정령, 애청, 왕몽, 공목, 마라친부 등이 장백산에 축하신을 보내왔습니다. 그런데 잡지사가 통화에 있으니 여러모로 불편하였습니다. 저는 집지를 성급으로 승격시키고 잡지사를 장춘으로 옮기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쉽지 않았습니다. 잡지를 성급으로 올리고 잡지사를 성 소재지에 옮기려고 저와  저의 동료들이 얼마나 뛰어 다녔는지 모르고 얼마나 속을 태웠는지 모릅니다. 장장 5년 , 장장 5년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1985년 7월 마침내 잡지가 성급으로 승격하고 잡지사도 장춘으로 이사했습니다.
김룡운: 듣고 보니 참 선생님께서 큰 일을 하셨군요. 이제부터 중심화제로 들어갑시다. 지금 중국문단에서는 선생님의 토템시를 놓고 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평자들은 42수의 시로 세상을 들썽했다고 하면서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저는 이것을 하나의 문화현상이라고 봅니다. 한 소수민족 시인이 이 엄청난 대국에서 하나의 문화현상을 일으켰다는 자체가 실로 대서특필할만한 장거가 아니겠습니까? 오늘 선생님을  모시고 할 말이 참 많습니다만  먼저 선생님의 초기창작에서 성과를 올린 사실주의 시들에 렌즈를 돌려보려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할머니», «휘우듬한 그림자»,«아버지», «스믈네살의 영혼» 등의 사실주의 가작들로 상을 타셨는데 창작경위거나 혹은 당시의 중국문단의 반향 같은것들을 듣고 싶습니다.
남영전: 위에서도 잠간 말씀을 롤렸습니다만은 84녀도에 길림신문 기자가 저의 집에 왔을 때 저의 할머니의 인생사를 듣고 나서 손자로서 저런 훌륭한 할머니를 쓰지 않으면 당신은 작가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 한 마디가  큰 충격이었습니다. 저는 저의 할머니는 단순히 한 사람의 할머니가 아니고 전 인류의 할머니라는 것을 깨닫고 «[할머니», «휘우듬한 그림자», «가지 마세요,가지 마세요»,를 창작했습니다. «[할머니» 로 제2기 전국소수민족문학상 1등상을 받았고«[휘우듬한 그림자»로 중국작가협회 민족문학상을 받았고 «아버지»로 제1기 길림성정부 최고문학상인 [장백산문예상]을 탔습니다. «아버지»를 쓰게 된 동기는 할머니에게서 들은 아버지의 영웅적 전투사적에 감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한족 문단에서는 상술한 시들에 대해 평판이 좋았습니다. 주로 진실성으로 감동의 세계를  만든다는 평가가 많았습니다.
김룡운: 선생님께서는 우리 글과 한어 두가지 언어로 구사하고 창작을 하고있어 다른 조선족작가들에 비해 우세를 차지합니다. 우리 조선족작가들 중에 한어로 창작하는 작가들이 극 소수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약세에 처하게 됩니다.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 할지라도 2백만만을 상대로 하는 글이다보니 울타리가 너무 좁아 중국문단이라는 큰 세계에 알려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중국조선족문학의 장래가 걱정됩니다. 이 문제에 대해 남시인께서는 어떻게 생가하고 계십니까?
남영전: 예, 저는 다행스럽게 조선어와 한어로 창작합니다. 한 민족이 자기의 모국어로 창작하해야만 자기 문화를 지켜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 알리려면 부득불 다른 민족의 문자로 창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외 번역을 하는 방법이 있구요. 조건이 허락된다면 된다면 구가지 언어, 혹은 그 이상의 언어로 창작하는 것이 아주 바람직 하지요. 21세기는 문화의 겨룸이고 경제는 글로벌입니다. 오늘의 중국의 상황에서  우리 민족의  문화를 널리 알리려면 한어로 창작하든가 영어로 창작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그 것이 지금 어렵거든요. 이전에 이근전 선생이 한어로  «범바위»를 썼고 이욱선생이 한어로 시를 썼습니다. 지금 우리 문단에서 전용선, 김용호,김인순 등이 한어로 창작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우리 글을 모르고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를 잘 모릅니다.  그래서 이들의 글을 읽어보면  민족 냄새가 풍기지 않아 한족이 쓴 것같은 감을 줍니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타민적의 문자로 쓰더라도 민족정신이 반영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 하나 해 드리지요. 위글족 시인 테이프. 아리예브는 위글족 언어로 수천 수의 시를 창작한 사람으로서 위글족들한테 우상으로 받들립니다. 그가 사망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통곡하였습니다. 그의 시를 왕일지 선생이 한어로 번역하였습니다. 왕일지 선생은 우리 나라에서 위글족 언어를 한어로 옮기는 데서는 절대적인 권위입니다. 그러니깐 물론 번역도 잘 되였지요. 그런데 한족문단에서는 이게 다 시인가 하면서 아리예브의 시를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번역은 아주 잘 했지만 민족혼이 체현되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자기 민족의  문화,풍습, 역사 등을 잘 알고 다른 민족의 언어로 창작하는 사람은 성공할 수 있습니다. 저명한 몽골작가 마라친부가 바로 그러하지요. 지금 우리가 당장 이렇게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노력은 해야지요. 당면의 시급한 과제는 우선  번역을 통해 우리 문학을 세싱에 알리는 것입니다. 번역대오를 증강시켜야 되겠지요. 그리고 금후 우리의 젊은 세대들은 우리 글 뿐 아니라 한어 혹은 기타 언어로도 창작할 수 있는  기량을 닦아야 합니다.
김룡운: 지당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재가 생각하건대  선생님께서는 민족과 개체를 초월한 문화관심과 문화운명감을 가지고 토템시를 창작합니다. 그러니깐 바로 여기에서 이른바 세계의 모든 민족, 전 인류적인 공감대가 형성됩니다. 그래서 한족문단의 일부  평자들이 남영전 시인을 일컬어 조선족 시인이자 중화민족의 시인이며 나아가서는 전 인류에게 속하는 시인이라고 말하고 있는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토템미학관이  아직 널리 알려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인것 같은데 선생님께서 한번 자신의   .미학주장을 말씀해주시지요.
남영전: 민족은 역사발전의 산생물이라고 봅니다. 모든 사물이 산생과 사멸의 일로를 걷는 것처럼 민족도 산생, 발전의 과정을 겪다가 종국에는 사멸합니다. 지금의 세계는 여러 개의 민족으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모든 민족이 공동으로 발전해야 세계의 모습이 아름다워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민족마다 고유의 우수한 전통을 갖고 있기 때문에 부단이 서로 교류하고 장점을 섭취하는 중에서 본 민족의 문화를  발전시키고 풍부하게 해야 합니다. 교류와 소통이 계속 되면 민족지간의 거리가 가까와지고 최종적으로 통일에로 나아가게 됩니다..그 때 가면 민족이 없어집니다. 이 것이 곧 인류원초의 문화에로의 회귀지요. 민족과 민족 사이에는 뛰여넘지 못할 장벽이 없습니다. 자기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민족도 사랑해야 합니다. 이래서 나의 미학주장은 전 인류의 화해와 융합이고 사랑입니다.
김룡운: 선생님의 말씀을 듣노라니 금시 세상이 따스해 지는 것만  같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한 민족에게 기껏해야 토템물이 한두개 정도 있다고 생각하고있었으며. 이런 생각이 통념으로 되여왔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한 민족에게 토템이 하나인 것이 아니라 여러개라고 주장 하시는데 그 이론적  근거가  무엇입니까?
남영전:토템산생과정을  보게 되면 지금 사람들의 모든 성씨는 토템과 관계가 있습니다. 보통 한개 성씨마다 자기의 고유한 토템을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단군의 성이 왕(王)씨므로  왕씨성을 가진 사람들은 단군과 관계가 있습니다. 역사를 보면 고려시조 왕검(王剑) 때 왕씨 성이 흥성했습니다. 그러다가 이조(李朝)가 서자 왕씨네는 사라질 위험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부득불 자기들의 성 王 씨를 全-田-玉-申-车 등으로 바꾸었습니다. 우리 민족 중에 왕씨 성이 적은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신라왕 박혁거세의 시조는 밀양박씨의 시조로서 단군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또 신라 경순왕의 후예는 투후 김알지로서 역시 단군과 관계가 없습니다.사실 매개 성씨마다 자기의 토템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토템은 자기 시조의 탄생신화에서 찾아야 합니다. 중국 광주에  중화토템박불관과 중화성명박물관이 섰습니다. 토템박물관에는 화하토템기원, 성씨토템, 가족토템, 띠토템과 상품토템 천여건이 진렬되어 있습니다.백개 토템에 백개성씨를 전시한 한족은 적어도 백개 이상의  토템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 민족도 여러 씨족, 부족들로 이루어졌으므로 결코 토템이 하나일 수는 없습니다. 가령 우리 민족이 토템이 하나라면 언녕 이 지구상에서 사라졌을 것입니다. 한개 민족의 토템의 풍부함과 빈약함은 그 민족성원들이  가지고 있는 신화에 의해 결정됩니다. 일반적으로 풍부한  신화를 보존하고 있는 민족은 토템물도 풍부하지만 신화가 없는 민족은 토템물도 빈약합니다.
김룡운: 참 신선한 이야기입니다. 매 성씨마다 토템이 있을 수 있다니 정말 놀랍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의 경우 도대체 토템이 얼마나 될가요?
남영전: 한개 민족을 하나의 그릇으로 본다면 이 그릇 안의 성원들은 모두 부동한 성씨로 조성되여 있습니다. 실상 매개 성씨마다 시조탄생신화로서의 토템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 후대들이 그 것을  모르고 있을 뿐 이지요. 지금 한족들은 성씨를 적게 잡아 만개가 넘는 걸로 계산하고 있습니다. 이렇다고 할 때 그 토템수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우리 민족도 280 여개의 성씨를 갖고 있습니다. 각 성씨의 시조탄생신화를 찾을 수만 있다면 많은 수자의 토템물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발굴과 연구 작업이 필요합니다마는  자료가 없어서 아주 어렵습니다.
김룡운: 선생님은 또 민족은 혈통으로  구분된다는 «민족혈통론»에 반기를 들고  민족은  문화에 의해 구분된다는 ”민족문화론»을 주장하고 계시는데 이 문제 상에서도 반발하는 분들이 적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요.
남영전: 이 세상에는 원래 민족이란 개념이 없었습니다. 민족이란 인류발전의 산생물입니다 인류사를 보면 원시공동체사회로부터 가족사회, 씨족사회와 부족사회가 나타났으며 또 여러 씨족, 부족들의 끊임없는 융합과정에서 공동한 지역, 공동한 경제생활, 공동한 언어, 공동한 심리소질 이 네가지 요서가 상호 작용하여 민족을 산생시켰습니다. 민족은 단일혈통의 집합체가 아니라 부동한 혈통의 집합체로서 민족의 본질은 공유한 문화의 공유입니다. 민족을 문화의 개념으로 보느 것은 민족개념의 본질, 핵심을 꿔뚫은 논리이지만 민족을 혈통으로 논의 한다면 정체성 확보에 페단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실상 매 개인의  민족신분은 자신이 어느 민족의 문화를 고수하는가 하는 문제에 의해 결정됩니다. 우리 민족의 후예라고 할지라도 우리 민족의 말을 모르고 풍속습관과 예의범절 등 문화를 잃어버린다면 그는 타민족이  되는 것이고 반대로 원래는 타민족 성원이지만 그가 우리 민족문화를 받아들이고 고수한다면 그는 우리 민족 성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민족성원은 고정불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김룡운: 예, 잘 들었습니다. 이야기 핸들을 시집쪽에 돌려봅시다. 남시인께서는 2003년 5월 16일부터 6월 19일 사이에 [사스]와의 투쟁을 묘사힌 시집 «꽃이 없는 이 봄날에»를 펴내어 중국시단에 강렬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산동대학의 오개진(吴凯秦) 교수는 «이 작품은 시인의 진정한 사랑과 인도주의 정신, 강렬한 사회 책임감을 보여준다»고 높이 평가하였고 북경대학의 사면(谢免)교수는 «가령( 꽃이 없는 이 봄날에)라는 시집이 없었더라면, 가령 우리의 친애하는 조선족 형제 남영전이 <사스>와 진행한 생사판갈의 영웅적 사적을 쓰지 않았더라면 중국의 시인들이야말로 얼마나 부끄럽고 유감스러웠겠는가! 남영전이 있었기에 중국의 시인들이 더는 부끄럽지 않게 되었고 체면이 서게 되었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중국당대문학사에서 한권의 작은 시집이 이와 같이 문단에 신선한 충격파를 던져준 사례는 매우 드믑니다. 선생님께서 어떻게 되어 «꽃이 없는 이 봄날에»를 창작하시게 되었는지 궁금하군요. 그 창작 배경이나 계기 같은 걸  좀 이야기해 보시지요.
남영전: 인간은 자연에서 왔습니다. 자연은 인간의 진정한 어머니입니다. 자연이 인간을 탄생시키고 키워주었는데 배은망덕한 인간이 군주로 자처하고 무자비하게 자연을 학대하고 있습니다. 그 자작지얼( 自作之孽)의 대가로 인간은 사스-즉 자연의 보복을 당한 것이지요.그리고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어 앞으로 더 심각한 마찰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이런 것들을 념두에 두면서 시집 «꽃이 없는 이 봄날에»다 중국의 전통문화의  정수인  천인합일의 사상을 체현시키려 했지요. 꽃이 없으면 봄이 있을 수 없고 봄이 없으면 인간이 살 수 없습니다. 이 시집에서 저는 저의 반성을 통해 인간의 반성을 촉구했고 가령 금후에도 인간들이 계속 깨닫지 못하고 반성하지 않는다면 더 큰 재앙이 있을 수도 있다는 심각한 메시지를 던져주었습니다. 겸하여 인간에 대한 위대한 사랑을 노래했습니다. 이 시집에 대한 한족문단의 평가가 너무 높아 송구스럽습니다. 선생님도 위에서 말씀했지만 사면 교수가 이 시집을 보고 «남영전이 있었기에 중국의 시인들이 더는 부끄럽지 않게 되었고 체면이 서게 되었다»고 평가했는데 과분한 것 같아 오히려 몸 들바를 모르겠습니다.
김룡운: 제가  한족문단에서 발표한 평론가들의 글을 퍼그나 봤는데 확실히 남영전 선생님의 토템시에 대한 평가가 높습니다. 일례로 곽지우 선생은 «민족토템시를 쓰고 그 것을 계렬화 한 것으로는 남영전이 시 역사에서 첫 자리를 차자한다»고 말했고 바이족 시인이고 평론가인 률원소적(栗原小狄)은 «남영전은 재일 처음으로 의식적이고 준비 있고 목표 있게 그리고 끈질기게 토템시를 창작한 사람이다…남영전의 토템시는 중국의 시단을 심미정도(審美正道))에로 오라고 부르는 초혼이다» 고 말한바 있는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런 평가들이 중국시단의 지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켜 2003년  6월과 2006년 3월,2008년에 무한과 북경,장춘에서 각각  남영전토템시 세미나가 열리게 되었지요. 그런 회의들에서 어떤 평가를 했는지 요약해서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왜냐 하면 우리 조선족 문단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퍼그나 많습니다.
남영전: 확실히 중국문단에서 저의 토템시에 대해 주목하고 관심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저의 토템시를 가지고 지금까지 모두 다섯 차례의 세미나가 있었습니다. 두번은 중국조선족문단에서 조직했고 두번은 중국문단에서 조직했고 한번은 한국의 대학과 중국의 대학이 공동으로 국제세미나를 조직했댔습니다. 무한에서 열린 회의에는 제가 의식적으로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좀 더 객관적인 평가를 듣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본인이 회의장소에 앉아 있으면 어떤 발언자들은 눈치를 볼 수 있고 속말을 제대로 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깐요. 결과적으로 대부분 평자들이 토템시에 대해  긍정해주고 높이 평가해 주었습니다. 물론 토템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었구요. 수도사범대학에서 세미나를 할 때 중국시평계의 권위 인사들인 사면, 장오동, 양관한, 주천숙, 유사걸 등이 참석했습니다. 회의에서 어떤 학자들은 남영전은 토템시의 실천자이고 토템시의 명명자라고 평가 했고 어떤 평자들은 남영전은 새로운 시의 쟝르를 개척하여 미진한 중국문단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 놓었다고 평가했습니다. 과분한 칭찬이어서 부끄러웠습니다. 기타 회의에서도 부동한 견해들을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주로는 모두 좋은 말들을 많이 했습니다.
김룡운:  지금까지 선생님의 토템시에 관한 전문저서, 이를테면 평론집, 감상집, 시서화집 전각집 등 11권의 단행본이 출간 됐고 그중에 두권은  우리 말 번역집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이런 책들을 저술한 작자들과 어떤 관계인지 그 것이 궁금하군요. 한번 말씀해 주십시요.
남영전: 추건군 선생이 제일 처음으로, 그러니깐 2003년 11월이지요. «원시토템과민족문화» 라는 평론집을 내 놓았습니다. 추건군은 이족인데 중남민족대학 문학원 연구생지도교수이고 중국소수민족문학연구가입니다. 1987년에 중국에서 최초로 «중국신시사전»>을 출판한 사람이기도 하지요. 2002년도에 그가 장춘에 회의를 왔다가 저를 만나자고 하여 두시간 가량 이야기를 나누었고....주로 소수민족의 문학을 두고 말을 했는데 의기상투했지요. 그 때가 첫 대면이었습니다. 그가 저의 작품에 흥치를  가지기에 저의 토템시집을 주었습니다. 2003년도 7월에 그가 무한에서 «남영전토템시연구세미나»를 조직했습니다. «남영전토템시감상»을 쓴 률원소적은 바이족고 사천의 유명한 시인이고 평론가입니다. 2003년도에 토템시집 «원융‟»이 나간 후 일년만에 그가 «남영전토템시감상»을 썼고 2005년에는 «시서화의시대공진» 전시회를 열고 화첩까지 출간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 번도 대면하지 못했습니다. 단지 서신과 전화로 연락하고 있을 뿐입니다. 마명규는 절강성 호주 사범학원 인문학과  교수입니다. 2003년도에  저한테  편지가 왔었습니다. 그는 률원소적을 통해 «남영전토템시감상‟을 봤다고 하면서 유관 자료를 요구하였습니다. 2006년도에 «남영존토템시론정수»를 편찬했고 2007년도에 «남영전토템시학»을 저술였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아직 그 분을 한번도 만나 보지 못했습니다.
2006년도에 «남영전토템시탐론»을 편찬한 오사경은 수도사범대학의 교수이고 중국의 저명한 평론가입니다. 언젠가 장춘에 회의를 왔을 때 잠간 만나 본 적이 있습니다. 돌아갈 때 저의 시집을 갖고 갔습니다. 얼마 후에 그가 수도사법범대학에서 <남영전토템시연구세미나>를 조직하였습니다. 북경대학의 저명한 교수 사면 선생도 장춘에서 잠간 만난 알면지교의 관계구요. 그외 저의 시를 평해주신 양광한, 주선수, 류사경, 등 유명한 평론가들은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분들입니다.
김룡운: 예, 참 잘 들었습니다. 알고 보니 결국 선생님의 토템시가 뉴대가  되어  평글을 쓴 분들이군요. 또 하나의 기이한 문화현상이 일어났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말하자면 토템시와 서법,회화의  포옹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토템시와 서법, 미술이 결합한 화책이 나왔다고 하더군요. 이 것 역시 아주 신선한 문화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것은 시문학의 한 현상으로 될 뿐 아니라 서법과 회화에서도 독특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여기에 대해서도 아시는 대로 이야기 해 주십시요.
남영전: 요컨대 토템시는 어디까지나 신화적이고 역사적이고 현실적이고 미래지향적입니다. 아마 화가 ,서예가들이 토템시에 눈길을 돌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가 생각합니다. 이 방면에서 또 률원소적이 대단히 흥치가 있는 사람이지요. 그는 비단 유명한 시인이고 평론가일 뿐 아니라 이름있는 서예가이고 화가입니다. 2005년도에 이 분이 발 벗고 나서서 활동을 조직했습니다. 중국서부문예통감위원회,사천대학교문학과 인류학 연구소, 서남민족대학교 예술학원, 사천사범대학교 현대미술학원, 성도시 서법가협회의 연함주최로 «남영전토템시명가서화연합작품초청전람회»(南永前图腾诗名家书画联合招请展缆会)가 열렸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온 저명한 서법가, 미술가들이 남영전의 토템시를 미학대상으로 하여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전람회의에 내 놓은 작품이 40여 점이 었는데 그중 태반이 넘게 선택된 작품들이 잡지 «미술계»,«성성»,«서부려유특간»에 실렸으며 선택된 작품들을 모아 주강문예출파사에서 «시서화의 공진시대»(诗书画的共振时代)라는 화책을 출간하였습니다.
김룡운: 그리고 또 하나, 중국에서 조선족의 유일한 전각가(篆刻家)인 신승우(申承佑) 선생이 전체(篆体)로 토템시를 가지고 인장(印章)을 조각하여 «남영전토템시자구인 »(南永前图腾诗字句印)이라는 특수힌 책을 만들었더군요. 전체란 중국 고대의 6가지 상형문자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신승우 선생이 고대의 상형문자를 알고 있다니 참 대단합니다.
주정(周青)이라는 전각 전문가가 그 책에 대하여 «남영전 토템시자구인»을 보고 찬탄을 금하지 못했다…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는 전각과 토템시의 모체정신의 이미지가 십분 조화를 이룬다.»고 절찬했는데 어떻게 되어 «남영전토템시자구인 »이 나오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말씀해 주십시요.
남영전: 승우선생은  길림신문사의 고금촬영가이고 중국조선석의 유일한 전각가입니다. 2003년에 북경에서 «남영전토템시연구세미나»가 열렸을 때 그도 참가하였습니다. 회의가 끝난 후 그는 토템시 몇수를 가지고 «토템시자구인»(图腾诗字句印) 몇개를 만들었습니다. 시대문예출판사 부주필인 장홍라(张弘罗)가 그 것을 보고 «이 전각이 아주 수준이 있다. 42수를 몽땅 전각자구인으로 만들라. 책은 내가 찍어주마» 라고 했습니다. 결구 이렇게 되어 «남영전 토템시자구인»이 세상에 나오게 된 겁니다. 승우선생 본인은 창작동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 나는 촬영 애호가이고 전각 애호가이다. 직업상의 원인으로 근 심여 년간 촬영에만 몰두하고 전각에선 손을 떼었다. 그러던 중 남영전의 토템시에 매료되어 전각 충동이 다시 일어 났다. 어쩐지 시화된 원시토템과 유구한 전각예술이 불가분리의 혈연관계를 맺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책이 나간 공로는  신승우선생한테 있습니다.
김룡운: 토템시의 감화력이  확실히 크군요. 잠 자고 있던 전각가도 깨어나고… 또 하나 궁금증이 있습니다. 최근에 중국학계나  외국학계에서 선생님의 토템문화에 대해 어떤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남영전: 지금 중국사회과학원, 중국작가협회, 국가민족사무위원회의 학자들은 남영전의 토템문화와 토템시는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지간의 조화관계를 호소하는 것으로 인류의 생존위기를 극복하는데서 문화적 가치가 크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토템연구를 국제에로 확대시키는 것이 절실하다고 봅니다. 금년 년말에 중국작가협회와 한국의 부경대학이 연합으로 남영전토템시연구세미나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최종목적은 중국과 한국간의 혈연관계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일부 대학과 학술단체에서 남영전토템문화연구세미나를 추진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최근에 들려온 소식입니다마는 인류학자 진자복이 »남영전토템시와 인류학시학»이라는 저서를 이미 탈고 했고 선박이라는 교수는 «신화, 토템, 원융»이라는 저서를 집필중에 있다고 합니다. 또 하나 말씀 드리자면 절강성 호주(湖洲)사범대학 인문학원에서 «남영전토템시연구»를  대학의 공공선택과목으로 선정하였고 학생들이 흥치를 가지기에 앞으로도 계속 설치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대학원에서 교수들이 공동으로 토템시교수안을 만들고 학생들은 토템논문집을 만들고 있다고 합니다. 이 학교에 서예에 조예가 깊은 멍디신(孟狄锌)이라는 학생이 있는데 52수의 토템시를 그림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김룡운: 들어 보니 대단히 기쁜 소식이군요. 토템의 영향력이 이렇게 클 줄은 정말 상상밖입니다. 지금까지 선생님은 42수의 토템시를 썼는데 최근에 쓴 것은 없습니까?
남영전: 예.새로 쓴 것이 있습니다. 발표는 아직 하지 않았지만 2007년8,9월에 토템시 «들소»를 창작하였고 금년 1,2월에 «물고기»를 비롯하여 아홉수를 창작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도합 10수를 새로 창작한 셈이지요. 길림성작가협회에서는 국경 60주년을 맞으면서 국경경축기념으로 성과가 있는 부분적인 작가들의 작품집을  내 주게 되는데 저도 운수좋게 그 중에 들었습니다. 원래의 42수에다 10수를 첨가해서 «남영전토템시집»이라는 표제로 북경작가출판사에서 찍게 됩니다. 이 책은 매 수의 토템시에 해설문, 그림, 전각이 함께 들어가서 아마 좀 새로운 맛이 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룡운: 들어만 봐도 아주 독특하고 신선한 느낌을 주는 책일 것 같군요. 그 책이 하루 빨리 세상에 나오기를기원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읍니다. 선생님의 금후의 구상이나 타산 혹은 계획을 간단히 이야기 해 주십시요.
남영전: 한 마디로 말씀 올리면 요컨대 토템문화연구와 토템시 창작은 금후 내 후반생의 전부를 차지할 것입니다. 모든 정력을 오직 토템문화연구와 토템시 창작에 몰부을 것입니다. 국내외에서의 토템문화연구와 토템시 창작을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 올리고 교류를 활발하게 진행하려는 취지에서 토템문화연구원을 세우려고 합니다. 지금 한창 추진 중에 있습니다.
김룡운: 선생님의 꿈이 조속히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잡지와 신문 일로 눈코 뜰새 없이 돌아치면서도 이렇게 만나 주셔 고맙고 더구나 우리 조선족 문화발전에 도움이 될 귀중한 말씀을 해 주셔서 너무 고맙습니다. 금후 장백산 잡지와 길림조선문이 우리 민족의 문화창달에 더 큰 기여를 하고 선생님께서 토템문화 연구와 토템시 창작에서  더 일친 수확을 따낼 것을 미리 축원하며 선생님께서 화해와 융합과 사랑의 기치를 높이 들고 계속 줄기차게 전진할 것을 기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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