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룡운
http://www.zoglo.net/blog/jinlongyun 블로그홈 | 로그인

※ 댓글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나의카테고리 : ¼나는야 인생 감독 -> - 나누고 싶은 것들

2010년의 - 시 교향곡
2011년 03월 07일 15시 30분  조회:1410  추천:20  작성자: 김룡운

 1. 서장. 들어가면서


2010
년의 마지막 해의  뒤모습이 아스란히 사라져가는 이즈막, 지난 1년간 연변문학 올랐던 시들과 마주낮아 대화를 나누려고 하니 생각이 사뭇 길어진다. 충족치 못한 에네지를 갖고잇는 필자로서는 실로 감당하기 어려운 초부하작업이라 하겠으나 한편 왈가불가의 평자의 위치에서 벗어나 성실한 독자의 신분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시를 읽으리라 생각하니 무거운 마음의 탕개가 한결 느슨해지는것 같다.


이 시대는 시인에 대해 그렇게 너그럽고 상냥한것만은 아니여서 소외와 랭대를
  받을 때가 많다. 시에 대한 찬사나 추파 따위같은덴 너무나 린색하다, 그리고 그 어느때보다 문학의 위기설을 두고 말씀들이 무성한것이  오늘의 풍조가 아닌가 싶다.


위기설의 바탕으로 되는것이 인터넷
, 전자매체, 사이버공간의 확대로 현실공간이 좁아졌다는것, 이로하여 시의 독자가 줄어들고 시집이 잘 팔리지 않느다는것 등이며  물론 여기에 민족공동체의 해체로 인한 각종 현상들도 까닭이 된다. 하긴 상술한 리유들이 충분히 까닭이 될만도 하다. 하지만 랭정히 사고해보면 좀 지나친 엄살인것 같고 지나찬 공포증이 아닌가 싶다.시 위기가 존재하는것만은 사실이나 우리가 떠드는것처럼 너무 한심한 정도에까지는 이른것 같지는 않으니 말이다. 금년의 시 작황만 보아도 시 현황이  우리가 놀라고 떠드는것처럼 그렇게 험악한 상태에까지는 이르지 않았다는것을 알게 된다. 시문학이 이런 저런 문제점들을 안고있긴 하지만 여전히 제멋대로 제궤도를 따라 전진하고있다. 원로시인들이 의연히 로익장의 자세로 시창작에 매진하고있고 기성 중견시인들이 맹활약하고있고 신인들이 뒤를 이어 나타나고있으며 새 시집들이 륙속 줄지어  머리를 내밀고있다.


알고 보면 우리 시가 홀대를 받게 된데는 우에서 렬거한 객관적 리유에서 비롯되였다는것음을 부인할수는 없지만 주요하게는
  시력사의 발전궤적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 시가 찬란한 면류관을 쓰고 영웅으로 추대되던 시기도 있었다. 랑만주의가 권위로 군림하던 시기, 랑만주의 리론가들은 시인을 계몽을 위해 하늘에서 강림한 존귀무비한 영웅으로 높이 받들었다.[워즈워스] 랑만주의 대표자인 쉴러는 시인은 사이비한 령혼의 사제이며 <미래> <현재>에 투사하여 반영하는 거대한 거울이다…. 전가(战歌)를 부르면서도 그것이 호르래기인줄을 모르는 사람이며 움직이면서 움직이지 않는 힘이며 이 세상에서 종래로 있어 본적이 없었던  립법자이다([시를 위한 변호])고 시인을 찬양했다.


그러나 시리론이 모방론으로부터 실용론
, 표현론, 최후에 객관론으로 발전함에 따라 시인은 본채에서 행랑방으로 쫓기는 신세가  되였다. 작품 객관론의 취향이 랑만주의 중심론을 대체하게 되였던것이다. 특히 니체가 하느님이 죽었다고 했듯이 로랑.바터가 독자의 탄생은 어떤 작가의 죽음을 대가로 한다 는 도전을 하여 작가를 절대적인 궁지에로 몰아넣었다. 객관론, 독자중심론은 사실상 작자를 죽인것이 아니라 작자가 혼자 독점했던 권력을 작자, 택스트,독자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려는데 있었다. 이리하여 작자의 종래의 권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진행중이다.(아직 연변문단에는 영향이 그렇기 크게는 미치지 않았음) 허나 시인들은 계속 제 갈길을 지금도 걸어가고있다.

지난해의 《연변문학》의 시들만 보아도 이런 상황이 립증된다. 비록 이런저런 허점들이 두루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총적으로 우리의 시들은 기본상 제구실을 하면서 꽤나 들을만한 시교향곡을 엮어냈다고 보아진다.


첫째
,부동한 년령층이 동원되여 손을 잡고 하나의 원을 이루면서 흥겨운 강강수월래를 연출했다. 원로시인들은 로익장의 자세를 보였고 기성시인들이 활보했고 신인들이 생기를 불어넣었다.


둘째
, 부동한 부류의 시들이 한자리에 모여 화목한 공생공존의 분위기가 형성되였다.


셋째
, 특집란이라는 명목으로 각 지방 문학단체들이 골고루 등장함으로써 산재지구 문인들이 작품을 발표할수 있는 기회가 늘어났고《연변문학》을 통해 중국조선족문학을 료해할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였다.


넷째
,시조문학과 아동문학 특집이 마련되여 시조문학과 아동문학에 대한 중시를 불러일으켰다.


다섯째
, <이달의 시> <이달의시인>란으로 기성시인들의 창작욕구를 자극했다.


여섯째
,<신작릴레이>란으로 시인발굴과 새로운 시의 대량산출을 유도했다.


한마디로 개괄하면
2010년의《연변문학》의 시들은 여러가지 요소들이 서로 어울려 그렇게 화려하고 웅장하지는 못할지라도 꽤나 흔상할만한 시의 교향곡을 연출하였다고 보아진다.


본고는 필자의 단순한 인상착의에 근거하여  몇가지 류형으로 나누어 고찰을 하게 된다
. 많은 시들을 일일이 체크, 분류, 해석할수 없어 그중 일부만을 간추려 선택적고찰을 할수밖에 없었음을 미안스레 생각한다.


2
. 향수와 망향, 실향의 소야곡


이주민으로 락인된 민족에게는 어쩔수없이 망향의식이나 실향의식이 돋아나게 마련이고 그것이 승화하면 민족우환의식이 된다
. 본고에서 굳이 따로 <향수와 망향,실향의 소야곡>이라는 장을 마련한것은 향수나 망향, 실향이 근년에 민족공동체에 일어난  변활로  말미암아 중국족선족에게서 떼여낼수없는 삶의 한갈래로 되고있기  때문이고 그것이 문학으로 반영되여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느던 그때부터 이미 망향과 실향을 등에 지고 다녔다
. 하여 그 어느민족보다 망향의식과 실향의식이 농후하다. 일제치하 만주국 시기에 애향, 실향의 문학작품이 대량 산출되였고 건국후부터 개혁개방중기까지는 잠잠하다가 근년에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국과 연해지구에로의 대이동, 농촌의 피페 등이 그 주요원인이였다.이러한 시대적변화가  새로운 <망향가>,<실향가>, <애향가>의 탄생계기가 되였고 그  진두에 선 이들이  지성인들과 작가, 시인들이였다.


우선 강효삼의 시가 눈에 들어왔다
. 강효삼시인은 일생을  고생스럽게 농촌에서 살면서 시종일관하게 농민과 농촌을 노래불러온 <북방의 제일 푸닥거라군>이다. 농민과 농촌을 껴안고 하는 그의 푸닥거리는 그렇듯 진지하고 뜨겁고 구슬프다.


    조촐한 벽돌집 앞마당엔 하얀 빨래 대신

알락달락 빨래들이 두루두루 걸리고

이사군이 먹이는 검정개는 오히려 흰옷입은   마을사람들

낯설다고 왕왕 짖어대네

 

<어느 산간마을에서>

(
연변문학 9)

 

<하얀 빨래> <알락달락한 빨래>,<검정개> <흰옷>들이 강렬한 대립적구조를 이루면서 몰락당한 조선족마을의 황페상이 고발되고있다. <왕왕>짖어다는 개소리가 섬찍할 정도의 이질감을 유발시킨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는 판국, 주객이 바뀐 아픈 풍경이다. 고향에 대한 아픔과 애틋함과 서러움이 추호의 주춤이 없이 그대로 펑펑 솟아나온다. 이제 멀지 않아 더는 흰빨래가 보이지 않을것이며 대신 알락달락한 빨래만 온 마을에 가득 널릴것이며 검정개의 사나운 울음소리만 더 높아질것이다


시인이 가슴 아파하고 서러워 하는 까닭은
  단순히 모두가 떠나서가 아니라 떠난 후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데 있다. <슬프다 떠나서 슬픈것이 아니라 /잃고 잊고 버리고 가서 슬프다>. 따지고보면  누구의 탓이 아니라 스스로의 탓이다. 힘들게 키운 나무와 금싸락같은 농토를 제손으로  팔고 갔으니 누구를 원망하랴. 돌을 들어 제발들을 깐 신세, 자작지얼의 보응일진대 조선족마을의 몰락상은 심각성을 유발시키며 참여의식같은 시를 써야할 당위성을 요청하게 된다.


<
노오란 참새 두마리>(리상각, 연변문학 제5>는 락엽과 참새라는 판이한 두가지 이질적인 대상을 동질이미지로 전환시키면서 시를 구축하고있다. 락엽은 필경 떨어지기 마련이고 떨어져서는 날려가기 마련이다. 시인은 마가을 찬 바람속 나무초리에 앉은  두마리 참새를 락엽으로 상상하고 텅빈 마을의 삭막한 몰골을 그려내고있다. 락엽의 신세가 바로 황페해가는 우리 조선족농촌마을의 신세에 다름아니다. <아담한 마을은 빈집 빈 뜨락/ 바라보니 눈물겨웁고/ 목메여 울지 못하는 두마리 참새도 /어차피 떠나야 하리 락엽이 되여…>


<
실향>(연변문학 9)은 상술한 두수의 시와 한족속에 드는 시다. 시인의 맘속에 안주하고있던 고향은 <따끈한 가마목에 엉덩짝을 지지면서/군감자 홀홀 불며 먹던> 그런 곳이였지만 오늘의 고향은 <페교된 학교운동장에서/시름없는 삽살개 뒤마리/번갈아 짖어대는>곳이다.


우의 시들이 실향시라면
<북경왕부징의 밤>(전병칠,연변문학 9)은 망향시라 하겠다. 오늘의 우리의 망향시는 산업혁명의 산물로 이 시대가 준 반갑지 않는 [선물]이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그 선물을 뿌리칠 능력이 없다. 그리하여 좋으나 궂으나 망향가를 부르지 않을수 없다. 산데리아 불빛이 휘황한 밤 고향의 그리움에 허기진 사람들이《갈색의 향수를 차곡차곡/술잔에 부오넣고》 한껏 취해본다.

《꼬깃꼬깃 마음에 얹어놓았던
/그리움과 한을/ 세월의 길목에 /오종종 내려놓고》노랴가락으로 즈려밟아본다. 그것도 성차지 않아 급기야는 《또 하나 타향의 望竿 》 세워놓고 거기에 기여올라가 먼 하늘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린다.


《내가 살던 고향과 내가 사는 이곳에 비가 내린다》
(김미화, 연변문학 7)도 망향시다. 그리움의 힘에 의해 시공이 하나로 이어져 내가 《비가 되여 고향의 창문을 두드리고》 현현된 나의 그리움을 어머니가 창가에서 보듬어주신다.


 
망향이나 실향을 읊조린 시들은 대채로 의미전달의 목적에서는 성공하고있으나 시적발효에서는 미흡한 시들이 두루 보였다. 감정이 겉으로 흘러나와 오희려 감정이 약화된 시들,  장황한 설교로 함축미를 상실한 시들이 그러하다. 라체보다 적당히 가려진 몸체가 더 신묘하고 유혹적임을 상기시키고싶다.


3. 형의상학적류형의 시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현대파는 여러 류형의 서구문학사조를
  통털어 일컬으른 말인데 그 공통한 특점이 형이상학에 기대고있다는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을 부추키고 키워온것이 영미신비평이다. 한때 우리 조선족문단에서는 현대파사조를 놓고 전통문학과 현대파문학사이에 론쟁이 많았다. 여러 류형의 시들이 공존공생하는  오늘의 시점에서도 일부 과격한 사람들은 흑백론리로 시의 우렬을 가리려  하며 구미에 맞지 않는 시들을 무조건 구축하려 하는데 이는 바람직한 행위가 아닌것 같다. 상호보완의 태도로 부동한 시들을 포섭하는것이 가장 바람직할것이다.


현대파시들일 경우 의미의 전달
, 전달의 가능성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거나 회피하면서 굴절과 해체작업에 열중하다보니 독자들과의 괴리나 소외현상이 나타나며 따라서 난해와 몽롱의 혐의에서 결코 자유로울수 없다. 심지어는 언어의 테로리스트로 몰리울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분명 존재자유와 존재가치가 있다. 전위성, 과감성, 시의 자률성과 언어의 창조성 내포과 외연의 불가분리성, 함축미탐구 등에서는  긍정할바가 있다. 그러나 극단적인 파괴나 난해는 언어유희 그 자체에 머물고 말므로 제창할바가 못되는줄로 안다. 금년에 강효삼, 김동진, 리문호 세 시인이 시에 대한 소감을 말할때 현대파시에 대해서도 솔직한 견해를 피력하였는대 참고가치가 크다고 본다.


문제는 어떤 류형의 시를 쓰는가에 있는것이 아니라 어떻게 쓰느냐에 있을것이다
. 현대파시의 효시로 불리우는 파운드의 <지하철>, 블레이크의 <장미>, 워즈워드의 <저녁소네트>와 같은 명시를 쓴다면 그 누가  감히  이렇쿵저렇궁 하겠는가.


2010
년도에 《 연변문학》편집부는 형이상학적인 시에 신경을 쓰는 시인들에게도 넉넉한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60대에는 현대파 로장들인 한춘과 김파, 최룡관이 등장했고 40대에는 조광명, 김영건, 김창희, 전춘매, 박초란, 허옥진, 리범수 등이  있었다.


한춘은《
21세기 신심우도》를 들고나왔다. 《뒤를 돌아보지 않기로 한다/흐트러진 발자국우에/은방울꽃이 스들어가고있다/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못질하지 않기로 했다/ 깨여진 거울이 잠들면 /홀로선 내 적막이 /속빈 강대로 무너질것이니.(연변문학 2) 자아의 부단한 탈피,갱신,자성, 부활의 의지가 아닐가. 이런 풀이를 뒷바침해주는것이  21세기신심우도.1》 이다.《지난 밤 꿈이야기는 /지나치는 빛발에 맞아 /지친듯 얼음판에 쓰러졌다/ 아무렇게나 던져진 꿈쪼각아래/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


<
흐트러진 발자국>,<시들어진 은방울>,<홀로선 적막>,<속빈 갈대> 등이 불만족을 유발시키는 어제날의 자신의 시나 어떤 삶이 아닐가. 하다면 이 시는 새로운 희망,갈망, 목표 등 새로운 지평의 열림에 대한 갈구가 아닐가. 이렇게 풀이하면 아리숭하던 시의 기표에 미약하나마 한가닥의 등불이 켜지게 된다.


최룡관은《
S가 사전속으로》와 《 빤질빤질한 달이 뜬 밤》(연변문학 7)에서 초현실주의수법을 실험하고있다. 전자에서는 지식의 무궁한 힘을 괴상하게 노래하고있다. 사전이 광할한 운동장으로, 주렁진 포도원으로, 강물로 산으로 벌판으로 되며 그속에  《 천년을 숨쉬고 만년을 걸어다니고 억년을 뛰여다니는  》제우스가 있고 석가모니가 있고 꽃뱀이 있고 히드라가 있다. 그 신묘하고 무궁한 지혜에 취해 시의 주인공이 드디어 취해버린다. 후자에선 《쪼각달이 모자를 달고/ 견장을  쓰고/수갑을 신고/신을 낀다  . 시비가 뒤죽박죽이 된 이 세상의 어떤 부조리현상에 초점을 둔듯 한데 두수의 시는 심한 해체를 전제로 한다. 개별언어의  복수 혹은 주관성이 객관성에 대한 복수다. 이런 시에서 구태여 미학을 찾으라고 한다면 해체의 미학 산만성의 미학 혹은 무질서의 미학이라고 말할수밖에 없다.


김파는 《 지도를 보면서》
(연변문학 1)는 폭군의 야먕과 야망의 괴멸을 예고한 정치폭로시로 보여진다.


 
《품은 새끼들이 야금야금/어미거미를 잠식하면서/아침해를 키우고있다/새끼들이 흩어지던 날/ 지도를 다시 보니 /어느덧 어미거미는 존재하지 않는다》어미거미가 폭군으로,야먕으 괴멸과정이 <잠식>으로, 야먕의 종말이 <존재하지 않는다>로 처리되고있다.


조광명은 은유와 역설의
  구축에 신경을 쓰는 시인인것처럼 보인다. 은유와 역설은 신비평이 주장하는 유기체설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부룩스는 《 은유론》에서 《현대시의 기교를 은유의 발견과 은유에의 완전한 귀의로 요약할수 있다 》고 말했다. 조광명의 《 어둠의 역설》을 살펴보면 어둠이 단단한 알이 되고 돌멩이가 신음한다. 어둠에서 맥박소리 들리고 그러다가 갑자기 조약, 승화하여 어둠이 닭알로 태양으로 탈바꿈한다. 《 견고한 알속에 잉태된 /도고한 신앙을 믿어/그렇게 따스한 껍질속에 노란 태양을 /우리는 마음의 눈으로 볼수 있다》시인은 어둠속에서 탄생하는 장엄무비한 창조의 거대한 힘에 희열을 금치 못해 《 손의 기억에 느낌표를 적어준다 》


김영건도 형이상학적취향에 경도하는 시인으로 보인다
. 김영건의 조시《 상실의 시대, 사람의 숲에서》(연변문학 6)에서 시인은 앓고있는 인간세상을 진단하고 고치려 한다. 시인이 인지하고잇는 이 세상은 《사람의 탈을 쓰고 /온갖 짐승이 활보하는 세상이며 》(사자바위에 앉아)《 태양도 앓고있는 세상이며》,《우왕좌왕 짐승들이 숲에서 날뛰는  》세상이다. 시인은  건강한 세상의 도래를 믿어마지 않기에《빛으로 태여날 아름다운 /역설이 지금 목메여/찬란한 전설을 부른다》고 웨친다.


김창희는 시창작의 초기부터 삶의
  한 모퉁에서 묵묵히 제나름대로의 시만들기에 혼신을 쏟아온 시인이다. 그의 시는 아픔이 묻어나는 시다. 그러면서도 넌짓이 엉뚱하게 아이니컬한 세계를 빚고있는 시인이다. 따라서 그의 시는 흔히 회색빛을 띠는 경우가 많다.《세월의 울너머 》(연변문학 9)에서도 그런 모습이 엿보인다. 시인의 삶의 편린들은《몽환으로 만나는 허상의 그림자 》들이고 그 허상의 실체는 《흐르는 물에 손을 베이고/날리는 눈꽃에 피멍이 들고 》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아이니컬하게도 그것이 바로 《 나의 살이 되고 피가 되고 고름이 되고 웃음이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을 향해 눈을 흘기는것이 아니라  삶을 확신하고 희망의 향불을 태운다.《 오늘을 꼬집으며 /깊어가느 산자락에 들꽃의 향을 산발합니다》


이상 현대파시로 유표하다고 보아지는 일부 시들을 총망하게 읽어보았다
. 이들  외에도 인간의 간사한 이중심리를  재치있게 펴보인 전춘매의 《 자유와 복종》(연변문예 9), 풍자의 묘미를 보인 리범수의 《 추운 날의 우화》(연변문예 9), 부재속에서 실재를 확인하고있는 《박초란의 세월의 겁질》(연변문예9), 무의식의 빛에 의거하여 인간의 소외와 이질성을 그려낸 허옥진의 《 사라지는 물》(연변문에 9) 등등도 충분히 론의의 대상에 올릴만한 시들이였으나 편폭의 제한으로 응당 해야 할 말을 못하여 아쉽다.


이상으로 형이상학적취향의 시들이라고 생각되는 일부 시들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읽어보기를 했지만 필자로서도 제대로 파악했는지가 심히 의심스럽다
. 일일이 지적하진 않겠지만 일부 시들이 지나치게 난해하여 솔직히 말해서 부득불 시읽기에서 상상을 통한 어림짐작에 기대일수밖에 없었다. 언어의 폭력조합도 한계가 있어야 하고  정도가 있어야 한다. 무분별한 파괴는 장난에 머무르고 말수도 있다. 현대파시를 좀 연구한다는 필자조차 알송달송한것이 있을진대 일반 독자들이 그런 너무 난해한 시를 과연 포용할수 있겠는가가 심의 걱정스럽다. 까딱하면 김동진 시인의 말처럼  《 귀신이 씨나락 까먹는 소리》,《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 》,《 도깨비 기와장 넘기는 소리》라는 비난을 받을 소지가 충분하다. 금후 언어의   굴절, 언어의 폭력조합에서 현대파시를 쓰는 시인들이 좀더 고민해야 하지 않을가고 생각해본다.


4
. 전통의 맥 잇기


《연변문학
7호 》에 《 민족의  서정, 겨레의 혼불》이라는 테마로 연변시조사의 시조특짐을 실어 2010년의 시의  교향곡에 구수한 가락 하나를 더 보탰다.


분량으로 보면 얼마 안되는 시조들을 특별히 본고의 론의에 넣은 목적은 민족의 혼불로서의 시조의 위상과 가치가 떨어지고 있는 현황을 감안하여 시조에 대한 중시를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욕망의 충동을 받았기때문이다
. 시조는 분명 우리 민족의 귀중한 정신재부요 문화재부이지만 지금 명분에 걸맞는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어떤 사람들은 시조를 문학권에서 배제하여 음악쪽으로 넘기자고 주장하고 있다. 조선에서는 심지어 시조가 귀족들의 향락거리라고 치부하여 이미 문학에서 추방한지 오래다.. 이런 시점에서 볼 때 시조의 부흥과 발전을 위한 우리들의 노력이 필요적실할 때가 아닐가고 생각한다.


다 알다싶히 전통이란 고금을 통털어 련결되는 뚜렷한 동일성을 전제로 한다
. 시조는 오랜 력사속에서 다듬어진 민족적 생리에 맞는 심층구조이다. 필자는 시조에 대한 지식이 박약하므로 이 원고의 집필을 위해 특히 리영지의《 한국시조문학론》을 열독하고 참조하였다.


시조가 초장
, 중장, 종장의 3구분이 되는데 이 자그마한 문학형식에 놀랍게도 3구분의 동서방의 철학이 녹아있다는것을 발견하였다. “성경에서의 성부, 성자, 성신은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도 우주의 질서를 3계층으로 설정했고 단테는 신곡에서  기독교 세계관의 축도로서 지옥,련옥,천국편으로 론하여 신화체계를 형성시켰다. 성서   창세기의 기록에도 3계층으로 나누며 불교사상에서도 3계가 있어서 중생들이 생사왕래하는 세계가 된다. 대우주로 섬기는 동양의 천..인인 세계와 인간의 몸체에서 다시 우주를 찾는 동양사상은 문학성으로 3재지도인   천지문(天之文),지지문(地之文),인지문(人之文)의 구분을 갖는다. 이러한 구조적 3구분은 독립된것일수 없어서 유기적 관계를 갖고있고 어느 문학작품에서 겉으로 드러나든 숨어있든간에 이 원리를 함유하고있다.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고있는것은 한국문학쟝르상의 시조로 볼수 있고 이는 세계문학상의  론리를 표면구조화한 뚜렷한 한국 고유의 문학적의미로 확대되게 된다.(리영지, 한국시조문학론)


한마디로 시조는 단순한 노래형식이 아니라  깊은 철학적원리가
   깔려있는것이다.


시조특집에 오른 시조들은 모두 다듬어지고 소박하고 쉽게 안겨들었다
. 그리고 거의 모든 시조가 <>,<구름>,<진달래>,<수석>등과 같이  풍물을 노래하고있어 우리의 시조들이 일게 모르게 고대시조의 풍격을 그대로 이어가고있음을 알수 있었다. 선보인 모든 시조들이 짧은 형식속에다 인생의  도리를  다져넣고있었으며 짜임새에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리상각은《 섬》에서 고독과 그리움을 세우고《해돋이 》에서는 탄생의 장려함을 구가하고 조룡남은《 버려전 꽃》으로 공즉득(空即得)의 불교적철리를 노리고 《구름 》에서는 이 세상에 무려무우(无虑无忧)의 인간이 없음을 말한다. 김경석은 《백발 》에서 인생의 무상함을 넉두리하고 김해룡은 《단풍송 》과《공훈메달에서  》값진 희생정신을 읊조리고있다. 안병렬은 《내고향 범우리 》고향애를, 김동진은《 천지꽃》에서 혁명의 선구자를, 최문섭은《수석 》을 통해 하찮은것의 위대함을 노래하며 한동해는《 아내의 코 고는 소리》에서 부지런한 아내를 자랑하고 김철학은 《 고무풍선》에서 인간의 출세욕을 빈정거리고 최기자는《낚시터에서 》를 통해 인생의 허무한 기다림을 한탄하고 최옥란은 《 백지》에서 님에 대한 그리움을 그려내고있다.


하지만 거의다가 평시조뿐이여서 단일감과 단순감
, 평이감을 주는것이  아쉬웠다. 그리고 어떤 시조들은 철리가 빈약하였다. 사실 철리가 없는 시조는 이미 시조가 아니다. 제한된 짧은 형식속에 철리를 다져넣기가 결코 쉽지는 않을것이므로 깊은 탐구가 있어야 될것 같다. 우선 시조에 대한  기본공부터 착실히 닦아야 하지 않을가고 생각해본다. 다음으로 시조의 다양화가 요청되는 시점인것 같다. 평시조외 엇시조, 사설시조, 파격적인, 현대시조 등도 가끔씩 생산되였으면 좋겠다. 그래야만 시조의 무한한 가능성이 알려질수 있다. 자칫하면 후학들에게 시조란 큰 연구가 없어도 쉽게 쓸수 있다는 착각이나  인상을 줄수도 있다. 아니, 사실 지금 그렇게 여기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평시조처럼 3 6구격식이 확연히 구분되기도 하지만 그런 구분이 숨어있을수도 있다는데에 관심을 돌리고 고민해볼 필요가 있을것 같다.


시조에서
3 6구의  구조가 숨어있음을 립증한 리영지의 해석을 보기로 하자. 리영지는  김소월의《진달래 》와 《 산유화》, 리륙사의 《 광야》와《청포도 》를 시조의 특징으로 풀이하고있다. 편폭상 김소월의  《 진달래꽃》과 리륙사의《청포도 》만 보기로 한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때에는

말없이  고히 보내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

아름따다 가실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쁜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진달래꽃>

 

이 시에서 1련을 초장으로, 2련을 중장으로, 3련을 종장으로 보며 첫련과 중복되는 4련은 생략해도 무관한 허구의 리듬으로 본다.

 

내 고장 7월은

청포도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절주절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빛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돛 단 배가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수건 마련해 두렴

<청포도>

 

《 청포도》에서 1련을 초장으로2련을 초.중장으로 3련을 초.중장으로 4련을 초.중장으로 5련을 초.중장으로 6련을 종장으로 본다. 끝련의 《 아이야》는 음위률이나 감탄사로서도 고시조에서 흔히 볼수 있는 구조이다. 고시조의 신화적기호와 동일한 《아이야 》하나만으로도 《청포도 》가 시조의 원형을 갖춘 시로 해석된다. 오늘날 많은 현대시에서 자유시의 작품이 극치에 달하면 그것은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시조의 원형적본질이 들어이있다.(조창환, 소월시의 구조)


이러한 평가가 정답일지는 미지수라하겠지만 시조가 그렇게 쉽게 씌여지는  쟝르가 아님은 알수 있고
  무한한 연구가치가있는 문학의 한 형태임을 새삼스레 느끼게 된다. 우리의 시조문학이 더 엄숙해지고 더 진지해지고 더 분발할 때가 아닌가고 생각해본다.


5
. 아픔과 슬픔 그리고 해탈의 몸짓


기쁨과 행복이 삶의 한 부분인것처럼 아픔과 슬픔도 역시 삶의 한 부분이다
.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가 하이데거는 진정한 행복은 아픔에서 온다고 말한바 있다. 사실 인류력사를 되돌아보면 보면 기쁨과 행복보다 아픔과 비애가 더 많았다. 하기에 고금중외를 물론하고 문학에서 고통이나 슬픔이 시종 취급되여왔다, 세계명작치고 인간의 고통이나 비애를 다루지 않은 작품이 거의 없다. 그런데 2010년의 시들을 보니 이상하게도 아픔이나 고민 고통을 다룬 시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본장에서는 아픔과 슬픔을 다룬 시들을 골라 시대적아픔과 개인적아픔으로 나누어 살피고자 한다
.


강효삼과 리상각
, 박룡길, 김영건 등 시인들이 시대의 아픔내지 민족군체의 아픔을 썼다. 그중 <이달의 시인>에 올랐던 두 시인의 시를 살펴보려고 한다.


강효삼의《어느 산간마을에서 》의 통증은 떠남에서 비롯된다
. 《남쪽에서 불어온 회오리바람에 사람들 모두 떠나 》《 낡고 헌 지붕에 기와쪼각 부셔져내리고/ 텅빈 집들은 금세 떠밀어도 넘어질듯 》하기때문에 아프며 《하얀 빨래  》대신 《 알락달락한 빨래들이》널렸기때문이며 이사온《 검정개》기 오히려 《흰옷입은 사람들 》을 보고《낯설다고 왕왕 》짖어대기때문에 아프다. 땅까지 남의것이 되여 《 조상의 무덤마저 파옮겨야 할》처지니 그 아픔이 오죽하랴. 시인은 해탈의 출구를 돌아옴에서 찾지만 그것이 결국 불가능으로 남아 아픔과 슬픔 해소될 가망이   묘연하다 


김영건은 《상실의
  시대, 사람의 숲에서 》인성을 상실한 시대적고민을 읊조리고있다. 시인이 가슴 아파하고 괴로와 하는 리유는 《 사람의 탈을 쓴》《 온갖 짐승들이 거리로 활보》하고있기때문이다. 시인은 그 치유방책을 《사자(使者》의 힘에 기탁하고있다.《상실의 시대 사람의 숯에서/사람 건질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 사자바위를 저기/십자로 중심에 높이 세우는일이다 》


우의 시들이 시대나 민족의 아픔을 쓴 시들이라면 아래의
  시들은 개채의 아픔과 슬픔을 다룬 시들이라 하겠다.


《 세월의 울너머》
(김창희)에서 시적주인공의 아픔은 허상을 실상으로 착각한데서 비롯된다. 《몽환으로만 만나는 허상의  그림자들이 /오늘을 저어가는 노래인줄 진작 알았더라면/래일을 위한 돛을 깁느라/밤샘을 한 흰머리를 /세월을 낚는 닻줄로 마구 허비하지는 않았을것입니다》구체적으로는ㄴ 《흐르는 물에 손을 베이고/날리는 눈꽃에 피멍이 들고 》이다. 그러나 아픔으로부터의 탈출은 랑만적인 제스처로 해결된다.《오늘을 꼬집으며 /깊어가는 산자락에 들꽃의 향을 산발해봅니다.


한영남은
2010년에 이달의 시인란에 두번 뛰여오른 시인이다. 그의 시는 활달하고 호방하고 시원하며 내면세계에 깊히 천착한다. 시의 샘구멍이 깊고 터져나오는 서정의 량이 충족하다. 또 그의 시는  흔히 긴 제목으로 너스레를 떠는데 그것도 이 시인이 특점의 하나로 된다. 그는 이전부터 심령에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으로서 시인의 삶의 쪼각들에는 상처자국이 루루하다. 이 시인에게 있어서 죽을만큼 아픈 사랑이 진정한 행복으로 되는듯 싶다. 헌데 이 시인은 그것을 여유롭게, 넉살좋게, 엉뚱하게 해학으로 풀어버린다. 서정서사시《굳이 네가 불러주지 않아도 수선화는 꽃으로 아름답다 》는 시인의 일생에서 가장 괴로왔던 파멸된 사랑을 소재로 한 시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사랑파멸의 주인공이였던  두 사람이 [늙은이]가 되여 만나는데 그 장면이 자못 눈물겹도록 슬프고 아름답다. 《 너의 빠진 이로는 씹어낼수 없는 낙지와/나의 젖은 간으로는 마셔낼수 없는 배갈을/ 가운데 놓고 마주앉아/우리는 걸레처럼 웃어보자》.시의 마지막에 가서는 《 자 그러면/ 굿바이 이 문드러진 계집아/굿바이 이 늙어빠진 시인아》라고 웨친다. 아픔과 슬픔을 자학과 유머와 해학으로 안위하기에 오히려 아픔과 슬픔의 농도를 더 해준다. 장시《저 계절더러 이 마음을 가져가라 하십시요 》는 우의 시의 연장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사랑을 비롯해 잃어버렸던 지난날들의 모든 소중함을  푸닥거리한 시다. 그것이 소제목《삼월에 》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아마도 어느해 삼월에 입었던 상처가 가장 컸던 모양이다.《 누가 만일 내게서 삼월을 사가신다면 /나는 내 젊음의 한토막까지 서슴없이 덤으로 얹어드리겠습니다 》이 시인의 아픔으로부터의 탈출은 자학적인 해학과 유모 그리고 통쾌한 스트레스이다.


이상으로
2010년 《연변문학 》시읽기를 마무리 지으면서  제법 모양새를 갖춘, 꽤나 들어볼만한 시의 교향곡이였다는 결론을 내려본다. 허나 그렇게 만족스러운것은 아니였다. 응당 끼여들지 말았어야할  조잡한 불협화음들이 적지 않았다. 겉은 익었으나 속까지 익지 못한 시들, 단순히 묘사에만 치중하는 시들, 글장난을 하는 시들이 두루 보였다. 그리고 우리의 시들은 너무 쉽게 씌여지는것 같다. 파운드는  “독자가 시작품을 대한다는것은 곧 어떤 신과 대화하는 순간처럼 엄숙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시인의 분신인 제2의 생명을 감수하는 작업이다.”고 하면서 시가 간고하게 탄생하며  신적인 성스러운 존재임을 말하고있다. 우리 시인들이 좀더 깊은 사고를 가지고 엄숙하고 신중한 자세로  시창작을 해야 하지 않을가고 생각해본다.


본고는 시의 우렬을 보고 례문에 올린것이 아니고
  주제의 론증에 적중한 시들만을  골라 론의의 대상으로 삼았기에 례문에 올랐다고 하여 다 좋은 시인것만은  아니고 론의에서 제외되였다 하여  다 나쁜 시가 아님을 분명히 해둔다. 그리고 어디끼지나 한 평범한 독자의 나름대로의 시읽기였음을 덧붙히는마이다.


새해에 여러 시인들이 더 곱고 건강한 시들을 많이 낳기를 충심으로 기원한다
.

 

2010 12월 마지막 날에 마무리지음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5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5 조명희 시의 양상고찰 2011-06-22 7 1407
4 2010년의 - 시 교향곡 2011-03-07 20 1410
3 시 갱신의 길에서 몸부림치는 시인 최룡관 2009-11-09 51 1413
2 중국에서의 남영전의 문화현상 2009-09-02 40 1713
1 심련수 후기 시 고찰 2009-08-17 58 1353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