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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전, 개혁개방의 거세찬 물결을 타고 나는 연변에서 제일 처음으로 체육관 실내에 로라스케트장을 운영하게 되였다.
“하루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남들이 그토록 부러워하는 좋은 직장을 잠시 그만두고 모험을 강행하며 상업계에 몸을 훌쩍 던져버렸다.
어벌이 크게 안정된 직장마저 뿌리치고 로라스케트장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우연한 기회에 한국을 방문하면서부터였다.
한국에 가서 쇼핑을 빼놓으면 서운하다기에 하루는 롯데백화점을 찾게 되였고 지하에 설치된 로라스케트장에서 음악에 몸을 맡기고 신나게 로라스케트를 즐기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게 되였다. 그야말로 새로운 세상에 눈을 번쩍 뜬 기분이였고 신선한 충격이였다.
‘우리 고장에서도 로라스케트장을 운영하면 어떨가?’ 하는 생각이 불현듯 뇌리를 스치고 지났다. 그 당시만 해도 연변에는 아이들이 여가시간을 즐길 수 있는 문화공간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돈도 돈이였겠지만 무엇보다 우리 고향 아이들에게도 건전하고 추억이 될 만한 공간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한달 동안 깊은 고민에 빠져있다가 나는 결국 로라스케트장을 오픈하기로 마음 먹었다. 물론 남편과 합의 속에 이뤄진 용단이였다.
그러나 자금이 문제였다. 단시일내에 어디 가서 그 많은 돈을 얻어온단 말인가? 며칠 밤잠을 설쳐가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끝에 나는 친척, 친구들을 불러놓고 나의 사업구상을 털어놓았다. 듣자마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손사래를 치며 뒤로 빠지는 이가 있는가 하면 오죽 고민을 많이 했을가 하며 무조건 믿는다면서 장농 속에 깊숙이 보관해두었던 돈을 싹싹 털어주는 고마운 이도 있었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그렇게 모아진 돈도 적은 액수가 아니였다. 그래도 사업을 하기엔 태부족이였다. 나머지 부족한 15만원은 은행에서 대출을 받게 되였다. 1993년도에 15만원이면 고급 아빠트 두채는 거뜬히 살 수 있는 거금이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처음 사업을 벌려본 내가 무슨 자신감으로 남들한테서 퍼그나 꾸고도 겁나는 게 없이 은행대출까지 받았는지 모르겠다.
돈이 모아지자 나는 그 숱한 현찰을 들고 미리 봐두었던 복건성 하문에 있는 한 대만기업을 찾아 떠났다. 요즘에는 휴대폰만 있으면 국내는 물론 세계 각국에 가서도 마음대로 금융거래를 가질 수 있지만 그 때는 예상도 못할 사치였다. 나는 돈을 빨간 돈가방에 넣고 두겹, 세겹으로 허리춤에 찼다.
행여 나쁜 사람들의 눈에 띄워 큰 변을 당할가 봐 일부러 십년 전 궤 밑에 보관해두었던 엄마 옷을 찾아입고 화장기도 없이 머리도 부수수한 채로 집을 나섰다. 거울을 비춰보니 몰골이 말이 아니였다. 적어도 돈이 있는 사람 같게는 안 보였다. 한푼이라도 아끼느라 침대렬차는 생각도 않고 일반석렬차에서 꼬박 사흘밤을 지새웠다. 잠자는 동안에 행여 털릴가 봐 전전긍긍하며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
아닌게 아니라 군복외투 같은 걸 걸친 한 무리 도적떼들이 깊은 잠에 곯아떨어진 려객들을 골라가며 호주머니를 들추어 푼돈을 챙기느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사업일군들은 뭐 하는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사실 잠들지 않은 려객들도 더러 있었지만 자기한테 화가 떨어질가 봐 그자들이 대놓고 절도하는 데도 못 본 척하고 있었다. 범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나는 몰려오는 잠과 사투하며 정신을 가다듬고 사흘낮 사흘밤을 버텼다. 녀자 혼자서 렬차에 몸을 실은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현금까지 묵직하게 차고 있었으니 참으로 소름 끼치게 아찔하고 무시무시한 시련이였다.
그렇게 내내 마음을 졸이면서 사흘 만에 목적지인 하문에 도착했다. 로라스케트 신발 100컬레를 구입하면서 10여만원의 현찰을 지불하고 나니 볼록했던 배가 홀쪽하게 들어가고 머리카락이 곤두서게 긴장했던 마음의 탕개도 풀리였다. 당시 무슨 용기로 녀자 혼자서 겁도 없이 십여만원을 몸에 지니고 한어도 변변히 못하면서 생전 가보지도 못한 그 먼곳까지 달려갔는지 모르겠다.
물류회사를 통해 구매한 신발들을 부치자마자 곧장 돌아와서는 체육관에 여러가지 필요한 설비들을 설치하고 또 사소한 부분까지 일일이 체크하느라 밤낮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돌아쳤다. 그 때는 말 그대로 일에 대한 열정이 하늘을 찌를 기세였다.
그런데 로라스케트신발을 부친 지 20여일이 되도록 도착하지 않았다. 지금 같으면 택배회사에 확인하면 물건이 어디 쯤에 도착했는지 바로 알 수 있으련만 당시로서는 그런 여건이 안되였다. 미리 정해놓은 개업날자(5월 28일)가 눈앞에 다가오고 청첩도 다 돌렸는데 26일까지도 제일 중요한 로라스케트신발이 감감무소식이니 속이 바질바질 타들어갔다. 도착하는 시간을 미처 꼼꼼히 체크하지도 않고 마음만 들떠 개업날자를 미리 정해놓았으니 모든 게 내 과실이였다. 망신도 이런 망신이 어데 있겠는가?
그렇게 애간장을 태우고 있는데 27일 오후에 오매에도 그리던 물건이 장춘에 도착하였다는 기별을 받게 되였다. 우리는 서로 전화를 바꿔가며 급한 사정을 루루이 얘기했다. 운송료를 곱으로 더 줄 테니 밤 사이에 꼭 도착하게 해달라고 손이야 발이야 하고 사정하였다. 딱한 사정을 헤아려 물류회사에서 밤샘작업까지 해가면서 돌아친 덕에 드디여 이튿날 새벽 2시까지 물건이 모두 이르게 되였다.
그렇게 한바탕 전쟁 아닌 전쟁을 치르고 1993년 5월 28일 오전 9시 58분에 드디여 ‘금마로라스케트장’을 개업하였다. 시누이, 올케, 언니, 시골에 있던 조카들까지 모두 우리 로라스케스장에 취직하게 되였다. 나는 일약 가문의 직업해결사로 떠올랐다.
연변에서 최초였을 만큼 주변의 걱정과 달리 수입이 짭짤하였다. 나는 우선 은행대출부터 갚았고 친척들한테서 꿨던 돈들도 리자까지 푼푼히 얹어주며 하나둘 갚아나갔다. 신발도 400컬레 더 늘여 스케트장 규모를 넓혀가는 동시에 경영에 더 신경을 기울여가며 사업을 확장해갔다.
고생 끝에 락이 온다고 모든 것이 자리를 잡았으니 이젠 앉아서 지켜만 보면 된다고 생각하던중 예상치도 못했던 시련이 닥쳐왔다. 로라스케트라는 운동이 워낙에 생소한 데다가 영업을 시작하자마자 큰 히트를 치는 바람에 깡패들이 각지에서 소문을 듣고 모여들어 괴롭혔다. 무리를 지어 우르르 입장해서는 표를 사기는커녕 직원들까지 협박하면서 란리를 피웠다. 어느 날에는 서로 다른 지방의 깡패들끼리 무리싸움을 하는 일까지 벌어졌는데 정말이지 핍진한 무협드라마가 울고 갈 만치 아짜아짜하였다.
어디 그 뿐이랴. 여기저기서 돈 냄새를 맡고 심지어 낯선 사람들까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로반, 돈 좀 꿔주오.”, “로반, 협찬 좀 해주오.” 하며 귀찮게 굴었다.
그 무렵에 관리업체에서까지 찾아와 규정에 어긋나는 부분을 짚어가며 피대를 세우니 정말이지 애들처럼 엉엉 울고 싶은 날이 하루이틀이 아니였다.
성실하게 맡은 바 사업을 이끌어가려고 한 것 뿐인데 이상한 류언비어들까지 도니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모든 걸 그대로 포기하고 싶었지만 내 인생과 내 가족의 신용을 걸고 시작한 첫 스타트를 그렇게 무의미하게 접고 싶지 않았다.
나는 정신을 추스르고 다시 움직여나갔다. 머리를 짜던 끝에 그래도 해당 부문에 문제를 반영하고 함께 치안 관리와 대책을 강구하는 게 가장 적합한 대안이겠다는 판단에 해당 구역 파출소를 찾아갔다. 파출소에서 적시적으로 나서 도와주었다. 매일 두명의 민경을 파견하여 영업장소를 지켜주었다. 연길시보안회사에서도 5명의 보안인원을 보내주었다.
그 뒤로 로라스케트장은 서서히 질서가 잡혀지기 시작하였다. 온갖 비바람에 풍상고초를 겪고 점차적으로 치안도 안정되고 운영도 잘되면서 기업으로서의 전성기를 한껏 누리게 되였다.
로라스케트장은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낮에는 중소학교 학생들의 체육시간으로 탈바꿈되였고 밤에는 가족과 련인들의 힐링장소로 되였다. 황홀한 불빛이 명멸하는 로라스케트장에서 쌍쌍의 련인들은 손에 손 잡고 은은한 노래소리에 맞추어 예술과 스포츠의 미묘한 조화를 한껏 즐겼다. 또래 친구들과 함께 로라스케트장에서 생일이벤트를 즐기는 장면,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웃고 떠들며 행복을 만긱하는 화면들이 한장 또 한장의 사진이 되여 추억의 앨범을 채워갔다.
그러고 보면 나는 참 행운스러운 사람인 것 같다. 그 때의 성공을 발판으로 모든 일에서 자신감을 얻게 되였고 딸애도 남부럽지 않게 영국 명문대학에 류학을 보낼 수 있게 되였다.
뱅글뱅글 로라스케트 바퀴가 돌고도는 것처럼 내 인생의 수레바퀴도 멈출 줄을 몰랐던 것 같다. 세월이 흘러흘러 어느덧 25년이 지났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25년이 지난 오늘 그제날 로라스케트장은 가뭇없이 자취를 감추고 도망 가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던 지난날의 시련도 이젠 웃으며 마주할 수 있는 추억으로 가슴 속 어디엔가 고스란히 자리 잡고 있다.
로라스케트장과 함께 했던 나의 청춘, 나의 꿈은 땅속깊이 뻗어나간 그루터기마냥 나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나의 40대를 고스란히 바쳐온 로라스케트장. 가끔씩 그 때의 행복했던 추억을 떠올리며 내 삶을 돌이켜보는 시간을 가져본다…
《연변녀성》 2018년 제8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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