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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조선족녀성발전촉진회는 우리 민족 녀성들이 민족문화와 전통을 전승하고 꿈과 사랑을 나누는 꿈터로서 전체 회원들은 자아발전을 도모하고저 언제나 새로운 것에 도전하면서 멋진 인생을 수놓아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일찍 연변텔레비죤방송국 소년아동프로 전직 사회를 담당했었고 연변가무단 화극부 배우로 활약하면서 해마다 음력설야회 소품으로 대중들에게 웃음과 기쁨을 선사했던 연변조선족녀성발전촉진회 차세대 교육담당 최미화 부회장의 '애심녀성컵' 제6회 생활수기 응모 수상작품을 올립니다. |
아버지라는 울바자
최미화
시골에 가면 집집마다 울바자를 친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높든 낮든 단단하든 허술하든 울타리를 치고 모든 것을 보호해주는 의미의 존재一울바자! 나에게도 그런 울바자 같은 존재의 아버지가 계신다.
나의 아버지는 성격이 불같고 호랑이 같이 엄한 분이다.
철 없던 사춘기시절, 귀한 자식 매로 키운다는 아버지의 깊은 뜻을 알 리 만무했던 나는 아버지한테 매를 맞고 욕을 얻어맞은 날이면 일기책에 "커서 복수할 사람 1위" 에 아버지이름을 써넣으면서 종종 아버지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군 하였다.
한번은 아침밥을 먹고 있는데 남장을 하기 즐기는 녀자애가 “미화야, 학교 가자!” 라고 웨치면서 불쑥 우리 집에 들어왔다. 그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아버지의 넉가래 같은 손이 날아와 내 귀쌈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영문도 모른 채 얼얼하게 얻어맞은 나는 억울하기 그지없었다.
“계집애가 행실을 어떻게 하고 다녔기에 애비가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데 벌써부터 사내녀석들이 집에 들락거려?”
이미 얻어맞아 귀의 달팽이관이 파열 직전에 이른 마당에 해석을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으랴?!
나는 억울하고 분한 나머지 아예 등교를 포기하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곡소리를 내면서 꼬박 하루 동안 드러누워있었다. 엄마한테서 친구가 녀자라는 설명을 듣고 나서야 아버지는 화가 누그러들었고 ‘과실죄’를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내 머리맡에 동전을 한뼘 높이로 쌓아놓았다. 엄마의 조해와 금전의 힘으로 그번 ‘사건’은 그렇게 두리뭉실하게 ‘합의’가 되였다.
또 한번은 우리 집앞에서 휘파람 소리가 났다. 저녁에 남자애들이 녀자애네 집앞에서 휘파람을 불면 녀자애더러 나오라는 신호이고 그럴 때 나가면 십중팔구 사랑고백을 받는다는 것을 주어들은 적이 있는지라 나는 도대체 어떤 녀석이 나한테 호감이 있는지 궁금해서 살짝 들뜬 마음으로 엉덩이를 들었다. 그 순간, 바람이 휙 불더니 아버지가 어느새 번개같이 뛰여나가 집앞에 무져놓은 장작 가운데서 제일 굵은 몽둥이를 찾아들고 호통쳤다.
“이마에 피도 안 마른 놈들이 어디서 얼쩡거려? 죽고 싶어?”
아버지의 불호령에 남자애는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줄행랑을 놓았다. 그 이후로 우리 동네 남학생들은 등교길에 거쳐야 할 길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집을 빙 에둘러 다른 길로 학교를 다녔다.
그 사건 이후로 대머리인 아버지한테는 ‘고르바쵸브’라는 별명이 붙었다. ‘고르바쵸브’가 떴다 하면 마음 약한 남자애들은 대낮에 길거리에 나온 쥐새끼마냥 갈팡질팡했다.
그토록 엄한 아버지 밑에서 죽은듯이 얌전히 살다가 한번은 목숨을 내걸고 아버지 허락도 없이 영화구경을 간 적이 있다. 남들이 다 다니는 영화관에 왜 나만 못 가는가 하는 오기로 간덩이가 부어서 들어갔는데 관람을 마치고 나오니 도저히 집에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어떻게 나오실지 무서워 집 주위에서 머뭇거리는데 인기척이 들리길래 얼른 몸을 숨겼다.
아닌 게 아니라 아버지가 황소숨을 몰아쉬며 동네를 참빗질하듯이 샅샅이 훑고 그 뒤로 엄마가 울면서 따라다녔다. 밖에서 둬시간 숨어있자니 춥고 배고픈지라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제발로 집에 들어갔다.
'고르바쵸브'가 구들 한복판에 앉아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며 강술을 마시고 계셨다.
“영화구경 했슴다. 죽여주쇼.”
는 털썩 무릎부터 꿇었다. 그 와중에도 머리핀을 꽂은 채로 머리를 맞으면 아플 것 같아 머리핀을 빼면서 말했다. 죄행이 엄중하여 손길이 아닌 발길이 날아올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아버지가
“살아 돌아왔으니 고맙다. 쉬거라.”
라고 온화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였다. 평소에 맞을 때에도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던 내가 아버지의 그 말에 오히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데 대한 안도의 눈물이였는지 모르겠다.
“불량배들한테 랍치라도 당했을가 봐 아버지가 얼마나 걱정하셨는지 모른다.”
내 걱정으로 아버지가 십년은 감수했을 거라는 엄마의 말에 나는 ‘이 딸이 불량배들이 랍치해갈 만큼 이쁜 얼굴이 아닌데요.’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했다.
후에 내 또래 녀자애들이 저녁에 늦게까지 놀러 다니다가 건달들한테 잡혀 수모를 당한 일이 있었다는 얘기를 듣고서야 그 날 아버지가 괜한 걱정을 한 것이 아니였음을 어렴풋이 알게 되였다.
'고르바쵸브' 아버지의 엄한 교육과 매는 귀한 아들에게도 례외는 아니였다. 손녀만 줄줄이 9명이나 되는 최씨 가문의 장남으로 태여난 남동생은 가문에서 ‘황태자’로 받들렸으나 잘못을 저지르면 여전히 아버지의 엄벌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동생이 사춘기시절 호기심에 몰래 담배를 피우다가 들켰다. 아버지는 대뜸 소가죽 혁띠를 빼들고 사정없이 동생을 후려쳤다. 말리고 싶었으나 괜히 그 불똥이 나한테 튈가 봐 나는 옆에서 비렬하게 구경만 하였다. 아무튼 그 때 크게 혼나서였는지 동생은 평생 담배와 인연을 끊고 산다.
엄격한 아버지 앞에서 주눅이 들 만도 할 텐데 나는 늘 아버지 말씀에 토를 달거나 눈을 동그랗게 뜨고 또박또박 말대꾸를 하여 매를 벌군 했다. 얼마나 한심했으면 자기 딸임에도 아버지가 이런 말을 했으랴.
“내 장담컨대 너 그 따위 성격과 말 대답질에 손 안 올라갈 남자 없다. 너 앞으로 남편한테 매 맞고 살지 않으면 내가 손바닥에 장을 지진다.”
“걱정 마세요. 부처님처럼 성격 좋고 착한 순둥이를 만나서 맞는게 아니라 내가 때리면서 살테니, 아버지 손바닥에 지진 장맛 꼭 봅시다요!”
“너를 안 때리고 살만치 참을성 있는 놈 있으면, 내가 사위한테 매일 절을 하겠다.”
이것이 우리 집에서 삼시 세끼 식사 다음으로 주로 나누는 대화였다.
내가 커서 어른이 되자 아버지는 남자는 같은 남자가 봐야 안다면서 남자가 생기면 애비한테 먼저 보여줘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였다.
아버지가 반대하는 결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에 나는 둬번 만나본 남자를 아버지 앞에 데리고 가서 검사를 맞혔다. 긴장한 마음으로 평가를 기다리는데
“니 임자 맞는 거 같더라. 거절당하지 않도록 잘해보거라. 에헴.”라고 하더니 아버지만의 특유한 헛기침을 하며 뒤짐을 지고 쥉쥉 걸어갔다.
행여 아버지가 마음에 안 들어하면 어떡하나 마음을 졸이고 있었는데 잘해보라고 하니 그 날부터 나는 ‘퇴짜’를 안 맞으려고 온갖 아양과 내숭을 다 떨어 끝내는 남자친구를 내 편으로 만들어내고야 말았다.
앉은 자리에서 기름개구리를 10마리씩 거뜬히 먹어치우면서도 “어우~ 그 징그러운 기름개구리를 무서워서 여자가 어떻게 먹어요?” 라고 하며 손사래를 쳤고 주량이 웬만한 남자보다 세면서도 “술곁에만 갔다와도 취해요! 아직 술 못배워서~” 라고 하면서 한손으로 입을 조심스레 막고 고개를 다소곳이 숙였다.
그럭저럭 2년이라는 련애 끝에 결혼식을 올리게 되였는데 신랑이 어찌나 싱글벙글 입이 귀에 걸려있는지 민망하여
“넘 좋아하니 바보스러워요. 자제하세요!”라고 핀잔을 주었더니
“별소릴 다하오. 내 결혼에 주인공인 내가 좋아하지 않고 누가 좋아하겠소?” 라며 발걸음도 가볍게 씨엉씨엉 례식장으로 걸어들어갔다.
부모님에게 큰절을 올리자 덕담을 해주라고 사회자가 아버지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그런데 아버지가
“바르고 건강하게 자라줘서 고맙다. 남들보다 잘해주지 못해서…” 라고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한채 끝내 사회자한테 마이크를 도로 넘겨준다. 동네 크고작은 행사에서 사회를 도맡아할 정도로 언변이 뛰여난 아버지가 정작 이 딸의 결혼식에서 말을 잇지 못하다니! 여기에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내 동생이 13살에 갑자기 백혈병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고 병석에 누워 힘든 투병생활을 하게 되였다. “남산 호랑이는 총소리에 늙고 부모는 자식의 앓음소리에 늙는다.”고 아버지는 심신이 극도로 지쳐있었다.
게다가 엄청난 치료비 때문에 어마어마한 빚을 진 상태라 친정에서는 시집 가는 나에게 옷 한벌, 이불 한채, 지어 숟가락 하나 사주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나와 신랑의 월급은 손에 들어오기 바쁘게 동생의 치료비에 꼬박꼬박 보태졌고 우리의 신혼생활은 빚을 안고 시작되였다.
그런 딸자식을 바라보며 안스럽고 미안한 마음에 아버지가 어찌 편한 덕담을 할수 있었으랴?!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듯이 아들을 살리려고 딸을 고생시킨 것이 가슴 아파 결혼식을 앞두고 아버지가 매일 술을 마시고 눈물을 흘렸다는 것을 나중에 동네 분들한테서 전해들어서야 알게 되였다.
최선을 다해 자식에게 무엇이든 최고로 잘해주고 싶은 부모의 심정을 딸자식을 둔 지금에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
죽고 못살아 한 결혼이라지만 입안의 혀도 깨물 때가 있다고 우리 부부도 가끔 다툴 때가 있었다.
한번은 남편과 다투고 집에서 뛰쳐나와 무작정 아버지의 ‘동정표’를 얻으려고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 오서방이요, 날 괴롭혀요. 어찌된 일인가 하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버지가 내 말을 가로챘다.
“시끄럽다. 안 봐도 비디오다. 니 잘못이 뻔해! 내 물건 내가 누구보다 잘 알지. 우리 집에서는 불량품 반납이 안된다. 페품으로 처리할 테니 알아서 해라!”
헉! 알심들여 준비한 내 씨나리오가 무산되는 순간, 너무 허무했다.
울면서 하소연하여 모든 죄와 잘못을 오서방한테 덮어씌우며 눈물연기까지 곁들이면 아버지가 “귀한 내새끼 눈에서 눈물을 빼? 그놈 혼내야겠다. 앞서거라!” 하면서 맨발로 달려나와 전치 8주 나올 정도로 속시원히 두들겨 패주는걸로 극본이 탄탄하게 구성되여 있었는데, 그리고 후속작으로는 오서방이 아버지네집에 날 데리러 와서 손이야 발이야 싹싹 빌면 마지못해 따라나서는 척하며 집에 자연스레 컴백하는것으로 원만한 에필로그까지 다 짜놓았는데 대사도 채 하지 못한채 오디션에서 처참하게 탈락을 하다니…
합작을 안해주시는 아버지가 야속하기 그지없었다. 덕분에 그 이후로 내 인생사전에서 ‘가출’이라는 단어는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그런데 나중에야 이 두 남자사이에 나를 두고 엄청난 뒤거래가 이루어졌음을 알게 되였다. 아버지는 사위한테 딸을 허락하는 대신 해마다 신문, 잡지 등을 주문하는 비용을 사위가 부담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즉 아버지는 딸을 팔아 문학에 투자하였고 남편은 사람에 투자한 셈이다.
그러고보니 삶도 역시 주식과 비슷한것 같다. 신문이나 잡지 주문은 1년에 몇백원이면 해결되지만, 남편은 선견지명이 있어 ‘투자’를 제대로 한 덕분에 아버지와의 ‘불평등조약’ 체결로 리익을 톡톡히 본 것이다. 461원의 월급으로 남편한테 시집왔던 나는 비교적 강한 경쟁력과 돈벌이 재주로 나날이 주가가 치솟고 증권그라프에서 별다른 하락세 없이 줄곧 상승선을 긋고 있으며 그 보답으로 가끔 남편에게 통큰 선물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아버지는 늘 우리집 판사님의 현명한 안목을 칭찬하며 “이래서 사람은 역시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는 말씀을 입에 달고 사신다.
10년전, 아버지 환갑잔치에 어쩌다 가족들이 노래방에 가게 되였고 그 날 아버지의 노래도 들어보았다. 아버지의 십팔번은〈남자라는 리유로〉라는 노래였다.
“누구나 웃으면서 세상을 살면서도
말 못할 사연 숨기고 살아도
나 역시 그런저런 슬픔을 간직하고
당신 앞에 멍하니 서있네
언제 한번 가슴을 열고
소리 내여, 소리 내여 울어볼 날이
남자라는 리유로 묻어두고 지낸
그 세월이 너무 길었어…”
아버지의 온갖 애환과 삶의 무게를 담은 가사를 한마디씩 소화하는 모습이 애처롭게 느껴져 나도 몰래 가슴이 짠해났다.
아버지는 한때 당뇨병합병증으로 썩어가는 발가락을 절단해야 한다는 선고를 받았다. 그래서 내가 보름간 아버지를 간병해드린 적이 있는데 말이 간병이지 아버지는 나더러 아무 것도 못하게 하였다. 상처가 흉하다고 날 손도 못 대게 하고 근처에 오지도 못하게 하였으며 신음소리 한마디 내지 않고 새벽이면 먼저 일어나 밥까지 다해놓고 나를 깨웠다.
몇달 후 아버지네 집에 들렸더니 객실 한복판에 아버지가 직접 쓴 문구가 유표하게 눈에 띄였다.
“나는 날마다 모든 면에서 좋아지고 있다!”
글자마다, 마디마디 가슴을 파고들었다. 수면제 없이는 잠 못 이루던 아버지가 인생은 결국 자기와의 싸움이라며 삶의 치렬한 현장에서 자신과 사투를 벌인 가슴 아픈 흔적이였다.
젊었을 적에는 벽을 뚫고 나갈 정도로 기백이 넘치던 아버지가 년세가 들면서 차츰 연약해져가는 모습에 마음이 아릿할 때가 많다.
한번은 밖에서 점심식사를 대접하고 갈라졌는데 한참 길을 가다가 뒤돌아보니 아버지가 그 자리에 꼼짝도 하지 않고 서서 내 뒤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서 가라고 손짓을 했더니 연신 엄지손가락을 내보이며 발걸음을 떼시는데 다리를 심하게 절뚝거려서 마음이 한없이 서글펐다.
그제야 아버지가 왜 갈라진 후 인차 걸음을 옮기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내가 혹시 뒤돌아서 당신의 절뚝거리는 초라한 모습을 보게 될가 봐 그게 싫었던 것이였다.
요즘은 통화할 때마다 “고맙다” 는 말과 “미안하다” 는 말만 곱씹는 아버지, 뭐가 그렇게 고맙고 미안한지 그저 안스럽기만 하다.
건강한 몸, 남부럽지 않은 말재주, 웬만한 글솜씨, 활발한 교제능력, 락천적인 성격과 긍정적인 사고방식 심지어 주량까지 하나에서 열까지 전부 아버지를 신통히 쏙 빼닮았으니 이토록 위대하고 찬란한 유산을 물려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송구해하시는 아버지…
사실 ‘고르바쵸브’의 패기가 점점 사라져가게 아버지의 기를 죽이는 데는 내가 한몫을 했었다.
젊은이는 희망에 살고 늙은이는 추억에 산다고 아버지가 술상에만 마주앉으면 “옛날에 내가…” 하고 서두를 떼는데 그 때마다 나는 대뜸
“네, 알 만합니다. 개산툰 산의 범은 다 아버지가 때려잡으셨죠? 그래서 지금 산에 호랑이가 멸종되고 고양이만 남은 거 맞죠?”라고 중둥무이해버렸다.
그리고 아버지가 “그 한다하는 깡패두목 아무개 말이야, 나만 보면 형님, 형님 하고 그랬다!”라고 하시면
“아버지 나이가 한참 이상이니 그래 형님이라 하지 동생이라 하겠습니까?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라고 까밝혀놓아 아버지가 괜히 게면쩍어 입을 쩝쩝 다시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철없이 놀아 뒤늦은 후회가 갈마든다.
요새는 가끔 아버지한테 데이트를 신청하여 함께 등산하고는 아버지가 즐기는 회집에 들린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나 죽거든 절대 울지 말라. 세상에 너 만큼한 딸 없다. 현대 심청이야.”라고 하며 엄지를 내미신다.
사람들은 흔히 아버지의 사랑을 바다와 산에 비한다. 그만큼 깊고 무게가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든든한 울바자에 비하고 싶다. 아버지의 울바자 같이 소박한 사랑은 변함없이 나를 지켜주신다. 어제도, 오늘도, 래일도…
《연변녀성》 2020년 12월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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