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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생애에서의 마지막 렬차
최정옥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집체호에서도, 대대위생소에서도, 농촌당지부에서도 일을 했었지만 진정 직업생애의 시점을 꼽으라면 대학을 졸업한 후 나라의 통일배치에 따라 중학교의 화학교원을 할 때부터라고 생각한다. 그 후 나는 조동으로 다른 업에 종사했다. 그럼에도 직업생애에 종지부를 찍을 때는 평생 종사했던 일에 유감없이 원만한 마침표를 찍으려 생각했다.
나는 2010년 4월에 정년퇴직하고 시름시름 앓음자랑을 하며 가끔 병원신세를 지기도 하고 드문드문 내 전업과 련관된 일을 하는 회사에 불리워가 기술지도도 해주면서 보냈다. 그 해 11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는 아들의 대학입시 뒤바라지를 하느라고 눈코 뜰 새 없이 보냈다. 아들의 대학입시 뒤바라지를 끝내고 한숨 돌리려고 하던 차에 마침 한 광천수회사로부터 기술지도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매주 두세번씩 회사에 가 기술지도를 했다.
이듬해 3월, 연변금강산식품주식회사에서 품질관리공정사를 모집한다는 초빙광고를 보자 바람으로 나는 련락을 취했다. 그런데 초빙 년령을 35세 이하로 제한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래 나이 때문에 평생 종사했던 일도 할 수 없단 말인가?’ 하고 속으로 피식 웃었다. 내가 아무리 외면하려고 해도 그 때 내 나이 58세라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였다. 하지만 난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연길시수도집단에서 전시 시민들에게 안전하고 위생적인 물을 공급하자는 사명을 받들고 몇십년을 하루와 같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열을 불태웠었다. 하지만 그처럼 끓어번지는 열정도 오랜 세월 앞에서 서서히 식어가 따분하게 느껴질 때 나는 ‘내부퇴직’을 결심했다.
“최주임은 고급공정사인데 어째 내부퇴직하는가요?”
대학후배인 총경리가 물었다.
“인젠 나 또래 동료들이 다 나가고 젊은이들만 남았는데 자리를 내줘야지. 그리고 나도 제2의 인생설계도가 있는데.”
나는 빙그레 웃었다. 이제는 새로운 나로 탈바꿈하여 인생을 보다 령롱하게 살고 싶었다.
내부 퇴직한 이튿날, 나는 내가 가고 싶은 회사에 면접 보러 다녔고 이내 출근하게 되였다. 1977년급 대학졸업생, 교수급 화학분석 고급공정사, 수십년간 쌓아올린 전업기술실력은 나의 리력서를 묵직하게 만들어주었다. 하여 35세 이하 제한조건도 무색해지게 가는 곳마다 쉽사리 통과되였다.
다년간 고신기술개발구에 자리 잡은 공업회사들을 주름 잡으며 책임감과 열정으로 가는 곳마다 회사 령도의 한결같은 절찬을 받아왔던 나인지라 스스로 대단한 자신감과 자부감을 안고 면접에 응했던 것 같다.
이런 나인지라 스스럼없이 “년령이 문제라지만 회사에 얼마나 필요한지는 이제 지내보면 알게 될 겁니다.” 하고 당돌하게 말하였다. 그러자 “그럼 고려해보겠습니다. 기다려주세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니나 다를가 이틀후 면접에 응하라는 통지가 왔다.
그 회사의 리주임은 나를 곧장 리사장실로 안내하였다. 나를 보던 리사장은 일순 흠칫하는 눈치였다. 어디서 이렇게 나이 든, 게다가 겨릅대처럼 바싹 마른 할머니가 문을 잘못 찾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속셈이 꿰뚫어보였다. 나는 속으로 ‘이제 좀 지나 나한테 정복되지 않으면 내 최씨성을 고치겠어.’라고 다짐하고 리사장이 가리키는 걸상에 다소곳이 앉았다.
내가 자신감 있게 자신의 기본정황과 관점을 청산류수 같이 피력하였더니 차차 리사장의 눈길이 달라졌다. 나에 대한 태도가 눈길로도 체감할 수 있을 정도로 변하더니 “우리 회사에 오셔서 수고해주세요.” 하면서 대뜸 면접에 통과시켰다. 그리고 즉시 리주임더러 나를 교외에 자리 잡은 생산현장에로 안내하게 하였다.
정작 공장에 가보니 공장과 실험실이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나도 어수선하였다. 원래 하던 일군이 인계인수도 없이 떠났기에 령부터 시작해야 하겠으니 막연하기 그지없었다.
“잘 고려해보고 답복하겠으니 나한테 일단 10일간의 시간을 주세요.” 하고는 실망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내 나이 쉰여덟에 신체도 허약한데 그런 작업환경에서 어떻게 해야 될지 전혀 궁리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솔직히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쌓은 경험과 전업적 우세를 리용하여 그 면모를 개변시켜볼 수 있지 않을가?’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직업생애에서의 마지막 렬차를 타고 한번 도전해보자!”
불현듯 이런 오기가 분수처럼 뿜겨나오면서 나를 흥분시켰다. 이런 흥분이 생기면 무궁한 에너지가 샘 솟듯 하며 최선을 다하는 내가 아닌가! 나는 확신을 가지고 제2의 인생을 보람 있게 살아보기 위해 남은 열정을 다하리라고 속다짐하였다.
마음의 방선을 허물자 돌파구가 생겼다. 그 즉시로 문건과 자료들을 정리수집하고 일일이 체크하며 방안을 구상하고 계획을 세우고 나니 일정한 파악이 있게 되였다. 긴박감을 안고 밤낮을 이어가며 품질관리수칙과 감정에 관계되는 국가표준과 기업표준 등 문건들을 열심히 탐독하였다. 된감기에 걸려 말도 못하고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하면서도 밤낮없이 문건 속에 파묻혀 살았다.
10일 기한을 한주 더 연장하고 이 난제를 돌파해나가려고 전력을 다했다. 출근 날이 다가오니 위구심이 스멀스멀 엄습해왔다.
‘출근하여 어디로부터 어떻게 착수할 것인가?’
실험실엔 여기저기 자료들이 지저분하게 널려있어 어수선하기 그지없었다.
우선 실험실에 널려있는 물건과 자료들을 차곡차곡 정리하고 유리의기들과 화학약품들을 전부 등록한 후 정연하게 진렬하였다. 반드시 해야 할 감정항목과 표준을 정하고 그에 따르는 조작절차를 명확히 하였다. 생산작업장을 찾아다니며 직접 청소하고 정리하면서 시범을 보였고 작업장의 위생환경과 관리규칙 및 각 환절에서의 조작규범을 제정하고 해결책을 내놓았다.
불과 한달도 안되는 사이 실험실 검사항목을 제정하고 20여종에 달하는 원본기록표를 설계한 후 그대로 실시시켰다. 수십여종에 달하는 제품 품질을 점검하였으며 새롭게 조작 규정과 절차를 제정하고 존재하는 문제점을 찾아내 대책을 연구하여 리사장한테 회보하였다.
어느 날, 리사장은 일부러 공장에 내려와 나의 부서를 찾았다.
“최공정사님, 여태껏 전문가들이 여러명이 왔었지만 종래로 이처럼 실질적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조사보고서를 써낸 적이 없었습니다. 최공정사님만 믿겠습니다.”
그 한달 동안 화장실 가는 시간마저 아꼈고 퇴근후에도 수두룩한 문건과 자료들을 보느라 저녁 10시가 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어떤 때는 너무도 피곤하여 들고 간 자료를 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쪽잠을 자군 했다. 한달 새에 이렇게 많은 일들을 해낸 나를 보고 남편은 은근히 근심하면서도 “내가 리사장이라면 당신한테 몇배 되는 월급을 줘도 아깝지 않겠소.”라고 탄복했다.
아니나 다를가 원래 신체가 허약한 나는 겨우겨우 지탱하다가도 몰래 신음소리를 내군 했다. 온몸에 열이 나고 해나른해나며 삼복철 해볕에 시든 풀처럼 축 늘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불과 몇개월 만에 품질관리 서류들을 정리한 후 체계를 세우고 순서대로 배렬하였다. 하여 관련 부문 령도들의 높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기업의 효률은 생명과 같기에 그 곳의 빠른 절주는 사람을 분발시키고 성장시키는 매력이 있었다. 내가 일인다역으로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있는지 상상도 안된다.
회사에서는 퇴근후에 회의를 소집하거나 PPT로 강연도 조직하였다. 나의 년령을 고려하여 령도측에서는 나에게 PPT를 강요하지 않았으나 젊은이들과 어깨 겯고 일할 바에는 뒤떨어지지 말아야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나는 스스로 컴퓨터를 자습했다. 하여 젊은이들 못지 않게 컴퓨터로 업무를 숙련되게 처리하는 능력을 갖추었다. 이 또한 령도층의 높은 평가와 신임을 사게 되였다.
물론 시초에 적지 않은 애로도 있었다.
검사항목을 증가하다 나니 필요한 화학약품 품종도 증가되였는데 “무슨 화학약품을 그리 많이 사는가?” 하는 오해를 받을 때가 제일 난감했다. 나는 비슷한 상황에 처할 때마다 랭정하게 마음을 다잡았다. 나를 전승하고 고험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니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견뎌낼 수 있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적으로 사람들의 리해를 받게 되였다. 내가 진정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료해한 후로부터는 많은 사람들이 존경해주었다. 하여 나는 보다 당당해지게 되였으며 나이의 제한을 넘어 젊은이들과 어깨 겯고 일하면서 사이 좋게 지낼 수 있었다.
나는 연변신흥개발구에 자리 잡은 새 공장 실험실 설계도 하였다.
회사에 출근하여 눈코 뜰 새 없이 돌아치며 자신의 열정을 불태우는 가운데서 어언간 5년이란 시간이 흘러갔다. 이 5년 동안 사회와 회사에 한몫을 감당했다는 데에 뿌듯하여 성취감과 행복감에 찬 시간을 보냈다.
나는 매일 아침 일찍 출근하고 저녁 늦게 퇴근하면서 휴식일이 없을 정도로 팽이처럼 바삐 돌아쳤지만 마음은 항상 충실하였다. 한해 두해 쌓여만 가는 년륜으로 단숨에 모든 일을 다하고픈 심정이였다. 열정을 불태우며 일하는 지금 시간이 그렇게도 소중하고 보람차다.
오빠가 중병으로 병원에 입원하여 저녁이면 한밤중까지 병시중을 들고 출근하면서 몇달 동안이나 버티였다. 남편까지 병원에 입원하였을 때에도 계속 끓어넘치는 열정과 책임감으로 사업을 견지하였다.
리사장은 늘쌍 나의 정신년령이 40대에 상당하다며 본 기업에 절박하게수요되는 인재이니 움직일 수만 있다면 70세 될 때까지도 계속 일해달라고 입버릇처럼 외우군 했다.
내가 한창 출근할 때 북경의 외손녀를 보살펴주어야 했다. 부득불 내 사정을 리사장에게 알렸더니 흔쾌히 다녀오라고 했다.
나는 생산용수의 품질안전을 담보하기 위하여 반복적으로 실험하고 물의 품질을 확보한 후에야 시름 놓고 떠났다.
딸애네 집에 가있으면서 보니 기약한 시간보다 더 있어야 할 상황이여서 나는 과감히 사직서를 냈다.
리사장은 아무때건 여건이 허락되면 돌아오는 걸 두 손 들어 환영한다며 아쉬움을 금치 못하였다. 나는 정든 회사에 석별의 정을 금치 못하며 내 직업생애에서의 마지막 렬차를 타고 종착역에서 하차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이 나를 아쉬워하는 걸 보면 직업생애의 종착역에 도착했어도 조금의 유감도 없이 사람들의 꽃보라 배웅을 받으며 떠날 수 있었다.
이제는 새로 다가올 황금빛 황혼렬차를 탈 기대에 어느덧 입가에는 행복한 미소가 지어진다…
《연변녀성》 2022년 제11호에서
수상소감
안녕하세요!
우선 제8회 애심녀성컵 수기공모 시상식과 《꿈이 있는 녀성은 늙지 않는다》출간식의 원만한 진행을 축하드립니다.
우리 녀성들에게 삶의 터전을 가꾸어간 인생을 글로 적어갈수 있는 플랫폼을 마련해주신 전국녀성애심포럼과 저에게 분에 넘치는 상까지 선사해주신 남복실위원장님과 심사위원 선생님들에게 심심한 사의를 표시합니다.
저는 남을 감동시키는 녀성강자도, 그렇다할만한 관리자도 아니고 평생 눈에 띄지 않는 한 모퉁이에서 흰 실험복을 입고 한 과학기술일군으로서 조용하고 잔잔하게 마음속의 신조를 지키며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당과 나라에서 전업일군으로 양성한 그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일편단심 충성스럽게 일해오면서 직업생애에 후회없는 종지부를 찍고 인생의 석양을 맞이하려고 작심했습니다.
이것을 좌우명으로 삼고 퇴직 후에도 연길고신개발구에서 60고개를 넘은 나이임에도 전업우세를 리용하여 충직하게 일하는 것으로 여열을 발휘하는 과정에 이제 막 늘어만가는 년륜으로 긴박감을 가지고 그 시간을 쪼개 쓰면서 보다 많은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이것으로 나라에서 무상으로 양성한 은혜에 보답하고 싶었습니다. 이런 심정으로 일하니 모든 난관을 물리치고 직업생애의 마지막 렬차에서 홀가분하게 하차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황혼렬차에 환승한 후 《나의 삶, 나의 길》이라는 책을 펴낼 수 있었습니다.
비록 저는 이제 막 고래희를 바라보는 나이이지만 한 녀성으로서 지나온 삶을 더듬어가며 더 보람차고 충실한 여생을 걸어가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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