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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작을 하고나면 흘러간 동년이 생각힌다. 내 아이적에는 친구들과 같이 어떤 놀이를 했던가? 연변의 겨울은 춥고도 길기에 눈쌓인 산등성이에서 썰매를 타던가 얼음판에서 <<애도>>를 탄든가 손을 홀홀 불며 딱찌치기 한다든가를 내놓고도 실내놀이도 많이 했었다.
실내놀이로서 첫번째로 기억나는 놀이는 이야기놀이다. 집구석에 주렁주렁 모여앉아 애들끼리 돌아가며 이야기를 하는 놀이인데 책도 얼마 읽지를 못했고 세상구경도 얼마 못했으니 한다는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였을가? 거의가 애들이 쥐꼬리만한 상상력을 리용하여 꾸며낸 이야기로서 고향말로 <<주겁에 들지 못하는 >> 그런것들이였다. 지금까지 기억나는 이야기인데. 내용은 애들이 개미굴을 파보니 구멍이 점점 커지더라는걸, 그래서 밤이고 낮이고 가리지않고 수십메터 파고들어가니 끝내는 특무들이 우글우글하는 지하궁전 하나를 발견했고 해방군들과 민병들이 특무굴을 크게 소탕해버렸다는. 누가 꾸면낸 이야기인지는 기억이 안나지만 또 어느 정도 재미있기도 했지만 이 이야기 때문에 내 또래들이 좀 골탕을 먹었었다. 다음해 봄에 우리보다 큰 애들이 우리를 이끌고 산비탈에 방공호를 파기 시작했는데 그 이야기 힌트를 받아 동굴을 크게 만들어서 마을의 전기가지 끌어들여 큰 지하왕국을 건설한다 했었다. 그래서 우리 열몇명이 이틀간 크게 고생하면서 거의 3메터 깊이의 작업을 완성했느데 산비탈 우에 있는 달구지길이 무너진다고 생산대원들의 큰 야단을 당했다. 그리고 또 지하궁전공정이란 사실 우리의 힘에 너무 부치는 일이여서 우리는 그 위대한 공정을 중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두번째로 기억나는 실내놀이는 윷놀이였다. 열콩으로 만든 윷은 모와 슝이 잘 나오지 못하고 뒤똘만 나오는지라 아예 싸리나무 가지를 절반 쪼개여서 윷을 만들면 가마목 부근의 공골에서 모와 슝이 제법 잘 나왔다. 허지만 아무런 내기도 걸지 않으면 너무 재미없기에 한판 끝나면 어른들한테서 당한 <<똥 먹이기>>를 했다 .이긴 편이 진 편을 상대로 주먹을 등위에 감추고 윷의 개수를 선택하여(빈타지도 포함) 내놓고는 몇개 있냐 물으면 대방이 알아마추면 끝나고 알아맞추지 못하면 알아맞출 때까지 개똥에 사람똥에 피똥에 하고 수두룩한 똥을 먹이고는 나중에는 장싸재 피똥이라는것까지 먹였다. 후에 알고보니 장싸재란 동네에 살던 한족사람 张瞎子가 무슨 일로 불타죽었는데 그 주검이 까맣게 타버려서 아주 흉했던지 동네에서는 죽은 사람까지 끌어넣으면서 윷놀이를 했던것이였다. 진짜 똥은 먹어보지도 먹이지도 못했지만 운수가 사납고 기술이 약하면 너무 당하는 판이라 지고는 도망가는 애들도 더러 있었고 윷놀이 <<똥 먹이기>> 때문에 친구들 사이가 벌어지는 일도 종종 있었다. 헌데 재래적인 윷놀이는 너무나 단조로워서 후에는 큰 종이장우에 자동차와 기차 그리고 기선과 비행기 등 교통수단을 그려넣고 정해진 선로에 간혹 지름길도 만들고 후퇴하는 길도 만들어놓은 윷판이 퍽 류행했던 기억이다. 현재도 그림이라곤 전혀 모르는 내가 비행기는 어느 정도 그릴수 있는게 아마 그적에 윷판을 좀 그려본 덕택이라고도 생각된다.
세번째로 기억나는 실내놀이는 화투치기와 트럼프 놀이다. 화투는 현문화관에 미술을 담당한 분이 그려서 간단한 인쇄만 해서 동네 친척집에 놓고 한장에 십전씩 팔었었다. 그림 한장에 48장의 화투가 그려져있어 반성품식이였느데 좀 부지런한 애들이 풀을 끓여놓고 낡은 트럼프장을 오려서는 거기에 화투그림을 하나하나 바르고 나중에 퉁기(清漆)칠까지 하고나면 한 이틀간은 신고해야 했다. 나도 한번은 그렇게 화투 한세트를 제작했느데 셋째형이 어떻게도 나를 구슬려서 내가 놀아보지도 못한 화투를 제가 몇일 놀고는 나한테 돌려주었던 기억도 난다. 화투란 노는 방식이 기껐해야 <<펄 따기>>여서 머리를 굴릴 필요가 없고 재미가 적었던지 후에는 우리는 트럼프 놀이를 더 즐겼었다.누구던지 트럼프 한셋트만 있으면 꽤나 득세나 한것처럼 우쭐렁거리며 애들을 모여놓고 <<3자번지기>> 또는 <<썸지(升级)>>라고도 하는 놀이거나 도둑빼기를 하면 어느덧 방학이 다가고 개학을 맞이게 되였었다. 소학교 5학년때부터였던가? 우리는 내기가 없는 트럼프놀이가 싫어서 집의 석냥을 들고 나가 <<갑오배기>> 또는 <<싼따이>>로 석냥개비 내기를 했는데 애들의 손때가 너무 묻어서 석냥개비를 마찰해도 화약에 불이 일어나지 않으니 종종 엄마의 야단도 맞았다.
물질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가난했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나의 동년. 그 때 모여서 같이 놀던 친구들이 현재는 한국으로 러시아로 많이 나갔고 <<팔팔하지 못한 >> 몇이 아직도 고향을 지키고 있다. 언제이면 또 그들의 얼굴 한번 더 볼수가 있을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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