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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전이면 얼음과자 하나를 사먹던 소시적에는 철길에 버티고 앉아 돌틈 사이로 흘러내려가는 1전짜리 2전짜리 5전짜리 동전을 건져내는 꿈을 엄청나게 꾸었던 기억이다. 교환경제가 빈약했던 시골에서 애들이 느낀 돈의 용도란 기껏해야 사탕 과자를 싣고 시골마을을 돌아다니던 <<마차이동상점>>의 물건을 살수 있다는 그런 정도였으니 그때에 가난은 했지만 돈에 대한 생각이 퍽 단순했기에 괜찮기도 했었다는 판단을 해본다.
그뒤 소학교를 다니면서 돈이 있으면 <<마차이동상점>> 대신 생겨난 공소합작사에 가서 공책도 사고 십몇전이면 카 하고 맛좋은 사이다도 사먹을수 있다는 경험이 쌓이여 유년시기보다도 돈의 용도를 많이 알고 더 좋아하게 되였다.
어느 초겨울에 어째서인지 갑자기 배가 아파서 부친께서 나를 생산대 소수레에 싣고 공사마을로 갔는데 나는 병원 대문을 들어가기도 전에 무엇을 좀 사달라고 떼질을 해서 끝내는 합작사의 신바닥과자와 귤을 얻어먹고나서 아마도 주사 맞고 약먹고 하는 일도 무서웠던지<<아버지 ,내 배 아니 아프꼬마 , 집에 가깁소 >> 해서 과자와 귤로 배 아픈 병을 치료한 전설적인 이야기도 엮은적이 있었으니 얼마나 먹고싶으면 그랬을가고 변명을 해본다.( 이런 연고가 있어 그런지 운청남시인의 소시적에 맞형의 잔치날에 귤을 얻어먹은 일을 그린 시 한수를 아주 즐겨읽는다.)
또 설이면 큰 매형이 주는 20전으로 100발짜리 폭죽을 사다가 하나하나 풀어서는 남들의 종종 걸음뒤에 터뜨리여 누군가 깜짝 놀라는 모습을 구경하며 배를 끌어안고 좋아했던 장난질을 할수 있었다.그 때
우리 조선족 애들은 폭죽을 화약 줄에서 풀어서 호주머니에 넣고 담배장에 불을 달어서 들고다니면서 하나하나씩 터치웠느데 << 일년을 가난하게 살아도 설만은 가난하게 보내지 않느다>>(宁穷一年,不穷一日)라는 생활신조를 지키는 동네 한족집의 애들은 몇백개짜리 폭죽을 설날만이 아니라 정월 보름에도 줄배기로 터뜨리여서 아주 부러웠었다. 그 꿈이 아직도 남아있는지 몇년전에 설에 계림으로 놀러 갔는데 현재는 폭죽을 금지하는 중국의 많은 도시와는 다르게 계림에서는 도시 주변의 큰 광장 하나를 폭죽을 마음대로 터뜨리는 장소로 지정하고 있어 밤에 광장으로 갔다가 아들놈과 둘이서 물동이 만큼 하고 하나에 350원 하는 제일 크고 비싼 花砲 에 눈독을 드렸는데 배동했던 우리집 재정부장(집사람)한테 욕만 실컷 얻어먹고 그날 밤 그 350원짜리를 사서 품에 안고 걸어다니던 꿈만으로 에따지웠다. 그래서 내가 동년시절에 걸렸던 폭죽부족증이 지금도 남아있음을 스스로 판단을 했다.
동년시절의 돈과 나의 관계를 총결하면 대답은 얼음과자와 폭죽 때문에 돈을 좋아했고 그리워했다는답이 나온다. 사실 돈의 사용가치에 대하여 간단하게 유치하게 알았던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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