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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1976
허동식
1976년이면 내가 만 아홉살 되는 해이다. 련발적인 사건들이 중국인들의 마음과 중국의 운명을 크게 흔들어놓던 기억을 더듬어본다.
3월에 개학을 하니 <<우경번안풍>>을 비판한다고 우리 코흘리개 애들도 비판문장을 지어서 흑판보에 가득 붙혀놓았다. <<우경번안풍>>이란 무엇인지 누구도 몰랐지만 비판문장을 쓰면서 어느 정도는 글짓기 련습도 했고 글자를 곱게 쓰느라고 진땀을 펄펄 흘렸다.
4월인가? 주은래 총리가 서거했다는 비보를 접했다. 그적의 신문은 거의 매일이다싶이 1면이 나라 지도자들의 행적을 보도한 글과 사진이 실렸었고 또 인민공사의 영화방영대가 순회방영을 하면 주은래 총리가 외국손님을 만나는 뉴스 영화도 많이 보여주었길래 세상모르는 애들도 주은래 총리의 모습은 잘 알고 있었다. 인자하신 주은래 총리가 저 세상으로 가셨다니 슬퍼해하는 애들도 있었지만 사실 주은래 총리가 서거했는데 슬퍼하지 않으면 반동이라는 욕을 먹을가봐서 슬퍼하는척 하는 애들도 더러 있었다..
청명은 성묘날이라 집집마다 맛있는 음식을 챙기여 좀 먹고나니 또 무슨 천안문사건이라는것이 발생해서 학교에서는 애들을 들볶으며 비판문장도 많이 쓰게 했고 <<소근장을 따라배우>>는 노래도 힘차게 부르게 했다.(유감스럽게도 소근장이 어디에 있는 동네인지 나는 지금도 모른다. 그리고 소근장의 무엇을 따라배웠던지도 기억이 없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개학을 한지 얼마 안되여 또 주덕위원장이 서거했다는 비보를 접했다. 주은래 총리 다음에 주덕위원장이 서거했으니 어른들이 올해는 무슨 해인가고 좀 수근거린다고 느꼈는데 얼마 안되여 또 모주석이 서거했다는 비보를 접했다. 우리는 더욱 큰 슬픔에 잠기고말았다. 남녀로소를 불문하고 검은 완장을 장만해서 팔에 걸었고 작은 흰 종이꽃을 가슴에 걸고 공사마을에 림시로 만든 추도장에 가서 경례를 하고 묵도를 하는 식으로 모주석을 추모했다. 우리 학생들은 학교의 통일안배로 난생처음 추도라는 회에 참가했느데 우는 애들이 참 많았다. 울고는 싶었고 또 슬펐지만도 무슨 영문에선지 나는 눈물은 못흘렸던 기억이다. 다행이 선생님에게 저 놈이 모주석 추도장에 가서 눈물도 아니흘리더라는 고자질을 하는 애가 없어 그럭저럭 고비를 넘겼다.
그 다음 달인가? 일요일날 엄마와 같이 발로 디디는 방아를 찧고 있느데 동네 어른들이 야, 모주석 부인 강청을 잡았다오 하고 서로 소식을 전했다. 처음에는 요언날조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유선방송과 신문을 통해 <<4인방>>을 분쇄했다는 소식이 확인되였고 우리 애들은 또 <<4인방>>을 비판대회도 열었고 의미도모를 비판문장을 엄청나게 썼다.
나느 편벽한 작은 시골에서 이렇게 1976년을 보냈다. 돌이켜보면 동년이였던 나에게는 거의 무의미한 한해였다. 비판문장을 쓰고 슬픔에 잠기고 그리고 공부도 못하고 놀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그저 그렇게 1년을 보냈다.
지금은 애들마저 정치에 내모는 세월과 굿두바이를 했다 이것도 중국이 진보했다는 하나의 유력한 증거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국민들이 자기의 운명을 어느 개인에게나 소수인의 집단에 맡겨야 했던 이야기도 서서히 종말을 보인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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