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사랑하는 우리 ‘가족들’(2)
손룡호
소박하고 꾸밈없는 연기자 천수옥
2017년 12월의 어느 날, 연변시조창단 운영자 리영해의 초청으로 시조창단 년말 총화모임에 참가하였다. 60대를 넘어선 시조창단 할머니들이 무대 우에서 펼치는 공연은 판소리, 민요, 독창, 중창, 합창, 춤 등 종목이 다양하여 볼멋이 있었다. 그중에서 유독 생기 넘치는 한 얼굴이 시선에 확 들어왔다.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무대 아래우를 주름잡으며 날래게 움직이는 활기에 찬 얼굴이였다.
그녀가 바로 천수옥이다. 화룡사람인 그녀는 시조창단 부단장으로서 몸을 사리지 않고 일에 열의를 다하는, 열정이 식을 줄 모르는 불사조 같은 존재였다. 회식자리에서도 술잔을 들었다 하면 단숨에 쭉 마셔버리는 통쾌한 성격이였다.
나는 그녀를 영화배우로 채용하고 싶어 기회를 타 넌지시 제안했다.
“우리 영화협회에서 배우로 쓰고 싶은데요. 부르면 호응할 수 있습니까?”
“불러주면 고맙죠.”
천수옥은 사람 좋게 내 말을 받았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 때 천수옥은 나의 말을 그저 듣기 좋은 롱담으로 받아들였다.
미니영화 《설날》에서
며칠후, 미니영화 《설날》 배우선정 회의에서 천수옥에게 주역인 앞집할머니 역을 맡기기로 하였다. 우리는 정식 영화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확정된 배우들을 모아놓고 먼저 대사련습을 하고 어느 정도 익숙해진 다음 연기련습에 들어간다.
그런데 첫날부터 나는 천수옥의 연기에 실망하고 말았다. 천수옥은 다른 생각을 하면서 집중하지 못하였다. 아마 자꾸 시조창단 활동을 두고 걱정에 잠겨있는 듯하였다. 시조창단 부단장이고 핵심인물이니 당연히 그럴 수도 있었다.
며칠 더 지켜보았지만 그 상이 장상이였다. 비둘기는 콩밭에만 마음이 가있다고 여전히 우리 협회 일보다는 시조창단 일에 더 신경을 쓰는 눈치였다. 내 욕심에 선정하기는 했지만 은근히 서운했다. 아마츄어들이 모여 영화랍시고 찍는다고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솔직히 우리 협회를 아마츄어들의 모임이라고 우습게 보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으니 내 립장에서는 당연히 그런 짐작을 하게 되였다.
“어째 집중을 하지 않습니까? 하기 싫으면 안해도 됩니다.”
그러자 천수옥은 잠시 생각하더니 차분히 입을 열었다.
“하루만 시간을 더 줄 수 있나요?”
나는 별 기대없이 그저 고개만 끄덕이였다. 다음 날에도 그 모양이면 단연히 갈아치워야 하였다.
과연 다음 날 천수옥은 제시간에 나왔다. 천수옥은 다른 배우들과 달리 하루밤 새에 대사까지 몽땅 외우고 나왔을 뿐만 아니라 연기도 너무 자연스러웠다. 어제까지만 해도 연기에 집중 못하던 할머니가 하루밤 새에 뭔 둔갑술을 했나 싶을 정도였다. 나는 놀랍고 믿어지지가 않아 나처럼 천수옥에게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극본작가 허룡석과 시선이 마주쳤다. 채용하느냐 못하느냐가 아주 명료해졌다. 잘하면 채용, 못하면 탈락이라고 무언의 약속을 했었는데 천수옥의 연기를 보고 나니 채용여부는 두말할 것도 없었다.
천수옥의 연기는 소박하고 꾸밈이 없어 자연스럽고 진실하다. 이것은 전문 연기훈련을 거친 전업배우들과 다른 점이자 그녀의 남다른 매력이였다. 그녀의 입에서는 우리말 사투리들이 자주, 아주 자연스럽게 쏟아져나왔는데 너무나 친숙하고 생활감이 느껴졌다. 《설날》에서 천수옥은 “야, 추운데 길목에 나와 뭘 함둥… 감기 걸리겠습꾸마.” 등 향토미가 물씬 풍기는 사투리를 맛갈나게 잘 구사하였다. 그리고 감독이 지정한 연기외에도 아주 자연스럽게 소소한 동작들을 스스로 알아서 적절하게 취하여 영화에 생동감과 진실감을 부여했다. 《설날》에서 어린 손자가 새벽에 일어나 불을 때자고 다그칠 때 누워서 손자를 쳐다보다가 천천히 일어날 때의 표정, 설날이라고 엄마, 아빠를 기다리는 어린 손자의 간절한 마음을 헤아리는 듯한 자상한 표정은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영화 《황혼의 정》에서도 그녀는 소박하고 꾸밈없는 연기를 보여주며 시청자들을 울렸다. 자기를 찾아온 사람이 친아들이 확실한지 찬찬히 훑어보고 나서 돌아설 때의 사색에 잠긴 그 눈빛은 지금도 내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천수옥은 자기 분량의 촬영이 끝나면 인츰 자리를 뜨는 것이 아니라 한참 동안 그대로 연기상태에 빠져있군 한다. 이 점은 아주 보귀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아마츄어들은 감독의 컷 사인이 떨어지면 하던 연기를 멈춘다. 그러나 성숙된 연기자는 대본 속 인물의 성격과 정서를 그냥 유지하기에 관성에 의해 연기를 멈추지 않고 계속하게 된다. 사실 이 때 촬영기는 계속 돌아간다. 왜냐하면 후기편집할 때 생각외로 건질 만한 좋은 화면들이 꽤나 있기 때문이다.
미니영화 《마음의 물결이 흘러가는 곳》에서 천수옥은 며느리가 출국한 사이에 아들이 첫사랑과 만나고 있는 사실을 알고 다잡기 위하여 남편한테 일러주는 장면이 있다. 천수옥은 컷 사인이 떨어졌음에도 영화 속 인물정서에 깊이 빠져든 채 속 탄 엄마의 마음을 계속 이어갔다. 그 장면이 훨씬 더 자연스럽고 실감나서 대본에는 없었지만 편집해넣었다. 천수옥의 연기관성은 참으로 귀중하고 영화화면편집에 도움을 줄 때가 많았다.
영화 《황혼의 정》에서
천수옥은 매사에 열의를 다 쏟아붓는 성격의 소유자이다. 영화 《황혼의 정》을 촬영할 때였다. 5월 하순이라 밖은 서서히 여름 기온으로 접어드는데 촬영장소인 지하창고는 아직 한기가 빠지지 않아 여전히 찬기운이 감돌았다. 당시 천수옥은 방광염으로 병원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였다. 이날, 찬 바닥에 누워 촬영하는 씬이 있었고 촬영이 반복되면서 찬 바닥에 누워있는 시간이 길어졌음에도 천수옥은 촬영 내내 불평 한마디, 아프다는 소리 한마디 없었다. 결국 방광염이 도져 한주일간 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아야 했고 퇴원하자마자 촬영현장으로 달려나왔다.
천수옥은 책임심이 강하고 사업열정이 아주 높아 협회 모든 활동에 팔을 걷고 나선다. 회원들의 모임이 끝나고 그 뒤거두매를 전담하는 사람 역시 천수옥이였다.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일수록 몇걸음 더 걸어서, 손에 물을 더 묻혀가고 허리를 더 굽혀서 일하는 그녀, 회원들 속에서 항상 솔선수범하고 전반 국면을 돌보면서 협회사업이 무난히 진척되도록 말없이 뒤받침해주는 그녀, 다른 사람들과 낯을 붉힌 적이 없고 더우기 뒤에서 누구를 힐난한 적이 없는 그녀는 참으로 돋보인다.
천수옥은 일찍 화룡에서 경찰, 부녀사업, 정부공무원으로 근무한 경력이 있는 우수공산당원이였다. 오늘도 그녀는 우리 민족의 전통시조문학을 이어가는 사업에 로심초사하고 중화민족의 영상영화문화공동체의 융합과 발전을 위해 연변영화드라마애호가협회 부회장이란 직책을 걸머메고 인생황혼기에 자기의 혼신을 다 바치고 있다.
손룡호 | 연변영화드라마애호가협회 회장
《예술세계》 2022년 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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