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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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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깊은’ 인연을 만드는 사람들 댓글:  조회:523  추천:0  2021-08-27
   ‘깊은’ 인연을 만드는 사람들    —연변영화드라마애호가협회 미니영화 《깊은 인연》 개봉   □리아        ‘인연’, 우리말 사전에서 “사물간에 서로 까닭이 있어서 맺어지는 련계”라는 뜻으로 풀이된 이 단어는 흔히 남녀 러브라인이 이어지는 스토리에서도 단골메뉴처럼 나온다. 그러다보니 로맨스류 작품에서 극적 효과를 준답시고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인연의 예측불허의 무한대의 가능성을 시사해주는 귀맛 솔깃해지는 말까지 나왔으니 우리 일상에서 그 의미가 시사하는 반경이 얼마인지를 짚어보는 게 별로 힘들지 않다. 물론 관객이나 독자들의 심금을 울리고 감정선을 살짝 건드리는 인연도 있어 더구나 흥미롭다. 나로 말하면 최근에 미니영화 《깊은 인연》을 보면서 인연의 의미를 다시금 새김질할 수 있어 감성인식에서 리성인식에로 넘어뛴듯이 들뜨게 된다.    이 미니영화에서 주인공인 택배회사 총경리 김미영은 부하직원의 실수로 제시간에 배달되지 못한 택배물을 직접 전해주러 수령인 박영일을 찾아가게 된다. 박영일이 설레임 가득히 가족들과 함께 택배물을 열어보는데 그 속에는 한장의 사진이 들어있었다. 무심결에 색 바랜 그 옛 사진을 엿보고 그녀는 무척 놀란다. 이와 똑같은 사진이 그녀의 집에도 있었으니 말이다. 과거 동북군정대학 출신이였던 그녀의 할아버지와 그 전우들이 함께 찍은 사진이였다. 공교롭다 할가, 그 무렵 김미영의 아버지는 부친의 자취와 당시의 진실한 력사문헌자료를 알아보려고 이 옛 사진 속 인물들의 후대들을 찾고 있는 중이였다. 알고보니 박영일인즉 아버지가 찾고 있던 옛 사진 속 인물들의 후손의 한사람이였다. 더욱 놀라웁게도 그녀는 눈앞에 나타난 또 다른 우연과 마주하게 된다. 그녀는 박영일네 집에서 몇년전 홍수와 박투하는 최전선에서 영광스럽게 희생된 자기 군인약혼자와 박영일이 함께 찍은 사진도 보게 된다. 박영일은 그녀의 약혼자하고는 전우 사이였던 것이다. 우연이 겹치면 인연이라 할가. 영화의 결말부분에서는 남녀 주인공의 대화를 통해 인연이 닿는 사람들은 조만간 만나서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가게 된다는 드라마틱한 결과를 시사해주고 있다.    사진 한장, 어쩌면 너무 가늘고 약한 인연의 고리임에도 너무 아득히 오랜 세월 속에서도 그 인연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결국 해피엔딩을 맞이할 수 있었다는 내용으로 이어가게 되여 가슴을 잔잔히 울린다.    두터운 정을 나누며 맺어진 동북군정대학 로일대 혁명가들의 인연이 사진 한장으로 그 후세에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로일대 혁명가들의 혁명정신과 우수한 혁명전통을 이어받은 자녀들 중에는 오늘날 군인으로서 인민의 생명안전을 지키기 위해 목숨도 서슴없이 바치는 전사가 있는가 하면 맡은 바 일터에서 당원이란 이름에 손색없이 열심히 일하고 있는 보통 일군들도 있다. 그리고 그 후세들 속에서 알게 모르게 얕거나 깊은 인연이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영화는 인연을 매개물로 삼고 선인들의 뒤를 이어 그 후손들이 혁명과 건설의 위업을 줄기차게 밀고나가는 거세찬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예술세계》 2021년 4호
8    길가에 피여난 이름없는 풀일지라도 댓글:  조회:462  추천:0  2021-08-26
   길가에 피여난 이름없는 풀일지라도    —웃음으로 무대를 주름 잡는 배우 김영식   □리은희          연변에서 ‘앵무새’ 하면 남녀로소를 불문하고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으리만치 알려져있다. 성급 무형문화유산 설창예술류 전승인인 김영식, 자신의 본명보다도 ‘앵무새’라는 별칭으로 더 유명한 그의 삶을 들어보려고 무형문화유산 전승기지인 연길시조선족무형문화유산보호중심을 찾았다. 조용하고 정가로운 사무실 분위기는 이야기 나누기에 아늑하게 와닿았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    도문시 석현진이 고향인 김영식은 어릴 때부터 언어방면에 남다른 싹수를 가지고 있었다.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모택동의 시사 〈정강산에 다시 올라〉를 암송하라고 작업을 포치하면 5분도 안되여 토 하나 틀리지 않고 암송해 친구들 앞에서 표현하였고 학교의 각종 활동에서 시랑송 표현도 하였다. 12살 무렵, 앞집에 사는 일본인 할머니한테서 일본어를 배웠는데 1년 쯤 지나서 일본어로 대화도 가능하게 되였다. 그 때까지만 해도 그의 목표는 대학교에서 일본어를 전공하는 것이였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매일 일본어 책을 읽으며 실력을 쌓아갔다. 그러던 그의 꿈은 어느 한순간 새로운 길로 돌려지게 되였다. 사람의 꿈은 늘 바꿔지기 마련이라더라도 너무나도 짧은 순간에 이뤄져 그 만큼 경이로웠다.    1979년의 어느 날, 강건너 마을인 송림에서 문예공연이 펼쳐졌다. 텔레비죤이 귀한 시기라 마을사람들은 좋은 구경거리가 생겼다며 공연장 앞에 삼삼오오 모였고 김영식도 거기에 끼였다. 다양한 공연종목들이 펼쳐진 가운데 유독 김영식의 심금을 울린 것은 만담배우 강동춘이 표현한 만담이였다. 구수한 우리말로 재미 있고 익살스럽게 이야기를 엮어가는 표현에 푹 빠져버린 김영식은 필연코 만담배우가 되리라 마음 먹게 되였다. ‘어떻게 하면 우수한 만담배우로 될 수 있을가?’ 집으로 돌아온 김영식은 괜히 설레여서 그 날 밤 잠까지 설쳤다. 이튿날부터 그는 일본어책을 한쪽으로 밀어버리고 조선어책을 읽으면서 우리말을 차곡차곡 다듬어보았다. “해금연주하는 외삼촌을 따라 해금이나 배울 것이지 만담은 뭐하러 배우냐.” 부모님의 반대에도 김영식의 굳은 의지는 결코 꺾이지 않았다. 그러다 ‘책만 읽어서야 언제 만담배우가 되랴.’는 생각에 여기저기 수소문하여 송림에 사는 작가 김창봉(만담 〈술〉, 재담 〈입담풀이〉 등을 창작)을 찾아가 제자로 받아달라고 언감생심 청탁하였다. 안면부지인 어린아이의 소행을 기특하게 여긴 김창봉은 흔쾌히 허락하였고 그 날 이후로 김영식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김창봉의 댁에 다니면서 재담, 만담 표현기교를 배웠다.    처음 재담을 접했을 때 김영식은 관객들의 시선을 ‘강탈’하자면 소리부터 높아야 된다는 나름의 생각에 수업만 시작되면 우정 목청을 높여서 주변의 반응을 살폈다. 인차 김창봉은 따끔하게 충고해주었다. “영식아, 재담이든 만담이든 잘하는 사람일수록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한단다. 능력 있는 목공은 못을 적게 사용하고도 좋은 물건을 만들 수 있지만 수준 미달인 목공은 같은 제품을 만들면서도 못을 배로 사용하게 되거든. 재담이나 만담을 할 때 꼭 내용의 중점을 잘 파악하고 소리의 높낮이를 조절하여야 한다. 대구 소리만 높여서야 어찌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겠느냐.” 그후, 김영식은 꾸준히 기교를 배우는 한편 라지오에서 방송되는 〈과학할아버지와 꽃분이〉, 림양길선생의 재담 등을 청취하며 그들의 말투를 따라해보기도 하였다. 한달 두달 지나자 김영식의 재능을 인정해주는 사람들이 한명, 두명 늘었고 급기야 마을행사나 환갑잔치 등 모임에 주례로 초청받게도 되였다. 그렇게 김영식은 어린 나이에 동네어른들 앞에서 아직 익숙하다고 하기 힘든 재담을 표현하게 되였는데 다행히도 모두들 김영식이 무대에 오르기만 하면 동네가 떠나갈듯 왁자지껄 웃음보를 터뜨리면서 반겼기에 커다란 위안을 받을 수 있었다.      풀 같은 인생    1981년, 연길에 와서 김영식은 김창봉의 알선으로 강동춘을 스승으로 모시고 재담을 배우게 되였다. 강동춘의 많은 제자들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우수했던 그는 1985년에 해란강구연단에 취직하게 되였고 3년 동안 월급 없이 강동춘, 최수봉을 따라다니며 무대경험을 쌓았다. 1986년, 재담 〈비결〉로 연변TV음력설문예야회 무대에 올랐고 1988년, 소품 〈깍쟁이우승컵 결승전〉, 만담 〈중성어〉, 〈질투병〉이 히트 치면서 대중들에게 점차 얼굴이 알려지게 되였다.    김영식은 지금도 만담 〈중성어〉를 첫 공연할 때 있었던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 때 화룡극장에서 공연하였는데 리허설을 하려고 보니 만담용 무대 소도구가 없었다. 아침에 호텔에서 급히 나오면서 빠뜨렸던 것이다. 강동춘에게 사실을 알리고 다시 호텔로 돌아가 소도구를 가지고 부랴부랴 극장에 들어가려는데 극장직원이 대문 앞을 막아서며 입장권을 보여달라고 하였다. 그 당시 배우들은 대부분 잘생긴 외모를 소유했기에 아무리 자초지종을 설명해도 “외모가 배우감이 아닌데, 어디서 거짓말이냐.”며 김영식의 말을 믿어줄 념을 안했다. 그렇게 한참 싱갱이를 하던 와중에 강동춘이 김영식을 찾으러 나와서야 무사히 극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억울하기 그지없었으나 공연시 박장대소하는 관객들의 모습에 서운한 감정이 눈 녹듯 사라졌다고 한다.    “해란강구연단에 있는 동안 훌륭한 스승님 덕분에 기교면에서 많이 향상되였습니다. 강동춘선생은 공연이 끝나면 꼭 저와 김홍옥을 불러 무대표현을 총화해주었고 부족점을 지적해주었습니다. 같은 내용을 하루에 세번씩 공연할 때도 있었으니 어찌 수준이 늘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스승님을 따라다니며 만담, 재담 기교를 배우던 김영식은 해란강구연단의 해체로 아쉽게도 꿈의 날개를 접어야 했다. 그러나 자신의 꿈을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실오리같은 희망을 안고 연변연극단에 찾아갔고 결국 접수실에서 당직을 서는 조건으로 림시 취직하게 되였다. 연변연극단에 있는 동안 그는 배우들과 함께 무대에 올라 천덕스런 연기를 보여주었고 저녁마다 접수실에서 《문학개론》을 비롯한 서적을 탐독하며 문학공부에 몰두하였다.    1994년, 김영식에게 새로운 도전의 기회가 찾아왔다. 그동안 공연을 하며 인연을 맺어왔던 연변TV방송국 문예부의 감독으로부터 〈주말극장〉프로의 구성작가를 맡아보라는 제안을 받게 되였다. 밤을 패가며 했던 문학공부가 빛을 발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1997년, 〈주말극장〉프로에 ‘앵무새’코너를 창설하고 〈모스크바중국어방송〉, 〈편지〉 등 만담을 표현하였는데 작품마다 히트를 쳤다. 특히 〈모스크바중국어방송〉에서 앵무새가 남을 따라하듯이 여러 나라 아나운서의 흉내를 신통스럽게 내고 성대모사까지 맛갈스럽게 잘하여 ‘앵무새’란 별칭을 얻기도 하였는데 그 당시 대중들은 김영식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앵무새’ 하면 모두 알아봐줄 정도였다. 이렇게 시작한 구성작가의 길은 연변TV방송국 〈백두대축제〉프로에까지 이어졌다.    2001년, 연길시조선족구연단으로 전근한 김영식은 업무단장을 맡고 작품창작에 정력을 쏟았다. 당시 시장경제의 물결 속에서 관객들의 심미적 감상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김영식은 꾸준히 새로운 프로들을 개발해나갔다. 그 시기 창작한 재담 〈길쭉이 짤쭉이〉, 노래이야기 〈그 때 그 시절〉 등은 관객들에게 큰 웃음을 선사하였다. 2007년, 리경화와 함께 출연한 재담 〈노래번역〉은 전국소수민족곡예전시공연 2등상을 수상하였고 한달 뒤 두 사람은 중앙텔레비죤방송프로 〈곡원잡담〉에 등장해 특유의 입담으로 시청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이는 중앙텔레비죤방송에 나간 첫 조선족 재담으로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웃음 찾아 삼만리    “‘앵무새’는 왜 이리 하나도 안 늙나 그래…”    “여러분이 그리워 늙을 새가 없어요. 하하하…”    2009년, 연길시조선족무형문화유산보호중심으로 자리를 옮긴 김영식은 십여년간 줄곧 연변의 8개 현, 시의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혜민공연에 정열을 쏟았다. 어찌나 자주 다녔는지 이젠 익숙하다 못해 동네 골목골목이 다 환할 정도였다. 혜민공연을 내려가면 동네어르신들은 텔레비죤에서 봤던 배우들이 왔다며 반겨주고 오래전부터 알고지내던 사이인듯 스스럼없이 문안인사를 보낸다. 맛갈나는 입담, 구성작가로서의 경험, 각종 활동으로 쌓은 사회실력… 김영식은 혜민공연에서 매번 사회는 물론 프로구성과 원고 작성까지 도맡아하였다.    “제가 하는 일이 별거 있나요. 제가 이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은 저만 봐도 웃음보를 터뜨려주는 관객들 덕분입니다.”라고 어깨를 낮추는 김영식임에도 그의 재치 있는 입담과 천연덕스러운 연기는 관객들의 웃음주머니를 풀어놓기에 충분했다.    2018년, 왕청현 하마탕에 내려가 공연할 때였다. 날씨가 우중충하여 설마 하면서 공연을 시작하였는데 하필이면 클라이막스 부분에서 비가 쏟아질 줄이야. 중도에 공연을 멈출 수도 없고, 배우들도 끝까지 공연을 이어가리라는 결의를 보인 터라 김영식은 비를 무릅쓰고 무대에 올라갔다. 객석에서 박수소리가 울려퍼져 한번 둘러보았더니 객석은 빈자리 하나 없이 꽉 차있었다. 어떤 관객은 공연이 끝날 때까지 김영식에게 우산을 펼쳐주기도 하였다. 공연을 하다 보면 종종 생기는 이런 감동적이고 고마운 일들은 김영식에게 더 좋은 작품을 창작할 수 있는 긍정에너지로 되였다.    혜민공연을 다니면서 김영식은 늘 우리말 구연을 더 널리 알리기 위한 방도를 모색하였다. 그러던 중 아름다운 우리 전통음악에 해학적이고 절주감이 있는 우리말 입담을 곁들이면 언어가 다른 민족들도 즐길 수 있지 않을가 라는 기발한 착상을 하게 되였다. 그렇게 창작된 작품이 마당놀이형식의 우리말 구연이였다. 2019년, 드디여 김영식이 창작, 연출을 맡고 연길시조선족무형문화유산보호중심에서 공연한 마당놀이 〈우리 마을〉이 관객들과 만나게 되였다. 55분 분량으로 된 이 공연은 〈오늘 오신 손님〉, 〈해방된 기쁨〉, 〈그 때 그 시절〉, 〈어머니〉, 〈고향〉 등 5개 부분으로 구성되였고 재담이나 만담, 판소리로 막간을 장식하는 형식으로 기대 이상의 성공을 거두었다. 그 해 7월, 마당놀이는 북경에서 열린 중국곡예가협회 설립 70주년 축하 회보공연 무대에 올랐고, 같은 해 내몽골자치구 훅호트시에서 펼쳐진 제7회 전국소수민족곡예콩쿠르에 참가하여 최우수상을, 2020년 9월에는 연변문예계 최고상인 진달래문예상까지 수상하는 감격을 누렸다. 이는 어려움을 딛고 꿈을 향해 달려온 김영식의 의욕이 반짝 빛나는 순간이였다.    최근에는 언변도 있고 노래도 잘하는 다재다능한 신진 만담배우 김하영을 발굴해낸 것이 최대의 기쁨이라고, 이제 남은 과제는 무형문화유산 전승인으로서 만담, 재담 교과서를 만들어 후세에 남기는 것이라고 흡족한 심경을 터놓는다. 우수한 만담배우가 되리라는 목표를 위해 끊임없이 달려온 김영식, 그는 자신을 풀 같은 존재라고 한다. 겨우내 잠들었다가 봄이면 다시 싹을 틔우는, 화려하지는 않더라도 강인한 의지를 가진 풀 말이다.    취재기사를 마무리며 김영식이 자신의 인생길을 떠올리면서 썼다는 시 〈나는 풀이다〉를 적어본다.      나는 풀이다    길가에 피여난 이름없는 풀이다    철따라 피고 지고, 졌다가 다시 피는    나는 풀이다      풀이면 풀답게 살아야 하는데    가끔은 진달래가 부럽다    때로는 장미꽃 되려고 애도 써본다    지금은 꽃도 지고 푸르른 세상    모두가 한때 영광인 줄 이제야 알겠다      나는 풀이다    세월의 길목에 피여난 한포기의 풀    풀잎에 이슬이 맺히면    새로운 태양이 떠올라    또 다른 하루를 만든다    나는 풀이다   《예술세계》 2021년 4호
7    《예술세계》2021년 4호 댓글:  조회:669  추천:0  2021-08-26
6    무대에 오를 수 있을 때 마음껏 춤 춰라 댓글:  조회:712  추천:0  2021-08-10
무대에 오를 수 있을 때 마음껏 춤 춰라 —연변가무단 부단장, 국가 1급 배우 함순녀의 예술인생 안상근     프롤로그   “무대에 오를 수 있을 때 마음껏 춤 춰라. 그리고 혼신을 뜨겁게 불태우라.” 현임 연변가무단 부단장이며 중국무용가협회 부주석, 제11기, 제13기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인 국가 1급 배우 함순녀가 후배들에게 입버릇처럼 당부하는 진정 고인 말이다.   내가 올라가 춤을 출 수 있는 무대가 있다는 것은 아직 젊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며 그 무대에서 뜨겁게 혼신을 불태우고 노력하다 보면 성공적인 인생이 반드시 펼쳐진다는 자신의 경력으로부터 우러나온 인생 조언이다.   함순녀는 사실 그렇게 살아왔다.   서른살 때인가, 그녀는 자신이 무용재능을 펼쳐보일 수 있는 무대가 결코 영원하지는 않다는 것을 느꼈다. 마흔을 넘기면 무대에 오르기 어려운 무용수의 무대인생은 어찌 보면 매우 짧다. 그 때 그녀는 내가 무대 우에서 춤 출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하는 예감이 문득 들었다고 한다.   정작 무대인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절박감에서일가, 큰 무대, 작은 무대를 막론하고 오르는 무대마다 최선을 다하고 혼신의 열정을 쏟았다. 함순녀의 보람찬 예술생애를 돌아보면 예술가의 뜨거운 열정과 끈질긴 추구 그리고 피타는 노력으로 쌓아올린 빛나는 예술의 상아탑을 만나볼 수 있다.     나이를 바꾸면서까지 간절했던 무용수의 꿈   함순녀는 1964년 6월에 연길시에서 태여났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 나이를 한살 더 많은 1963년생으로 바꾼 적이 있다. 바로 연변예술학교 학생모집시험을 보기 위해서였다.   연길시 태평소학교를 다닐 때 함순녀는 우연히 집단체조 련습과정에서 동작이 규범적이고 아름다워 학교 무용선생님의 눈에 들게 되였다. 그렇게 연길시 태평소학교 문예선전대에 들어가게 된 것이 함순녀가 무용을 접하게 된 첫시작이였다.   우수한 성적으로 연길시1중에 진학한 후 문체반에 들어갔는데 초중 2학년을 다니던 1977년에 연변예술학교 학생모집시험이 있었다. 아직 초중 2학년이다보니 시험에 응시하려면 한살이 모자라는 상황이였다.   당시 사회적으로 연변예술학교에 입학하는 것은 곧 배우가 되는, 출세의 지름길이였던 때였으니 유혹도 컸다. 그 때 함순녀 역시 리록순과 같은 훌륭한 무용수가 되려는 꿈을 안고 있었으니 더구나 시험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도 나이는 한살 적지만 경험 삼아 시험이야 못 보겠는가 하면서 등을 떠밀어주는 통에 함순녀는 결국 시험장에 들어서는 용기를 가지게 되였다. 물론 나이는 한살 더 많은 1963년생으로 적고 말이다.   당시 연변의 각 학교들마다 문예선전대의 실력들이 만만치 않다보니 실력 있는 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탄탄한 실력의 경쟁자들을 제치고 함순녀는 예선합격의 첫 관문을 넘었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이 합격한 사실을 후에야 알게 되였다. 연변예술학교에서 예선에 합격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주일 동안 학습반을 꾸리고 또 한번 시험을 쳐서 최종 합격생을 뽑기로 했는데 연길시1중에서 그녀에게 예선합격통지를 전해주지 않았기에 그녀는 자기가 예선에서 합격한 사실을 감감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시험을 보고난 후의 간절한 기대 때문이였는지 어느 날 밤, 함순녀는 혼자 연변예술학교에 가서 시험을 보는 꿈을 꾸었다. 꿈이야기를 들은 어머니는 혼자 속을 끓이지 말고 직접 찾아가서 시험결과를 알아보라며 등을 떠밀었다. 그녀는 설레이는 가슴을 안고 연변예술학교를 찾아갔다.   당시 연변예술학교와 함순녀가 다니던 연길시1중은 가까이 린접해있었는데 연변예술학교에 찾아가니 안면 있는 한 녀성 분이 그녀를 보고 왜 이제야 왔는가고 나무랐다. 함순녀가 학교로 오가는 길에서 자주 만났고 딱히 인사는 하지 않았지만 눈길이 마주치면 눈인사를 보내주던 분이였다. 알고보니 그 분은 연변예술학교 무용교원 박용원선생님이였다. 후에야 안 일이지만 함순녀의 늘씬한 키와 무용수로 클 싹수를 눈여겨보고 만나면 반갑게 눈인사를 보내주었던 것이였다.   박용원선생님은 함순녀가 1호로 시험에 합격되였음을 알려주었고 예선합격생들을 상대로 점호할 때마다 그녀가 보이지 않아 은근히 기다리던 중이였다고 알려주었다.   최종합격을 위한 시험을 봐야 했으므로 그 날 결국 함순녀는 혼자서 연변예술학교 선생님들이 모인 앞에서 시험을 보았다. 시험장에 홀로 서있었던 자신의 꿈이 신통히도 맞아떨어진 것이였다.   시험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어느 하루, 연변예술학교의 장영순선생님이 직접 연길시1중에 찾아왔다. 학교에서 합격통지를 보낸 지 한참 됐는데 함순녀한테서 아무 소식이 없자 직접 학교로 찾아온 것이였다. 알고보니 담임선생님이 함순녀가 공부를 잘하니 향후 대학에 가는 게 걱정 없다고 생각하고 그녀가 연변예술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아까워서 합격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무용에 대한 아름다운 동경에 불타있던 함순녀에게 있어서 연변예술학교는 더없는 유혹이였다.   그녀는 결국 연변예술학교에 입학하고야 말았다. 그 해 연변예술학교 무용전공에 연길시에서 단 2명만이 최종 합격했는데 그중에는 함순녀도 들어있었다.   그런데 연변예술학교에 붙고 나서 신체검사를 했는데 생활형편이 어려웠던 때라 몸무게가 겨우 76근으로 신체가 너무 허약했다. 교의선생님은 함순녀가 힘든 무용수업을 견지하기 어려울 거라면서 그녀의 입학을 반대했다. 그 때, 장영순선생님이 나서서 만약에 이 학생이 신체가 허약해서 무용을 못할 상황이 된다면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두둔해주었고 결국 그녀는 연변예술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되였다.   그 해 연변예술학교 무용학부에서는 녀자 17명, 남자 12명의 무용전공 학생들을 모집했는데 함순녀는 나이를 한살 더 불려서 응시했음에도 학생들 가운데서 제일 어린 나이였다.     피타는 노력의 결실   연변예술학교에 입학한 후 함순녀는 설날에 단 하루만 휴식했을 뿐 방학에도 쉬지 않고 무용련습을 견지했다고 터놓는다. 남보다 더 피타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한 영원히 정상에 설 수 없음을 절감해서였다.   당시 입학생들 중에는 할빈 등 대도시의 소년궁 같은 곳에서 이미 무용을 정규적으로 배워가지고 온 동학들도 많았는데 확실히 함순녀보다 실력이 우위였다. 그들과의 차이를 줄이고 또 추월하려면 사실 꾸준한 련습과 피타는 노력밖에는 별다른 지름길이 없었다. “눈만 뜨면 련습했어요.”   함순녀는 그 때를 돌이켜보면서 먼 추억 속에 젖어든듯 말했다. 그녀는 숙소 침대 옆에 무용신발을 미리 놓아두고 새벽에 날도 채 밝기 전에 살금살금 일어나서는 어둠 속을 더듬어 신발을 찾아신고 무용련습실로 달려나가군 했다. 무용련습실에서 전등도 켜지 않은 채 련습에 몰두했다. 행여 전등을 켜면 맞은켠 숙소의 동학들이 알아채고 련습하러 달려올가 봐 ‘고심’했다고 한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내내 그녀의 일상은 련습, 련습 또 련습으로 이어졌다. 꾸준한 의지력 그리고 피타는 노력이 있었기에 함순녀는 반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음에도 공부를 제일 잘했고 해마다 3호학생으로 표창 받았으며 우수한 성적으로 연변예술학교를 졸업하게 되였다.   1981년, 연변예술학교를 졸업할 때 학교에서는 함순녀를 학교에 교원으로 남기려고 했다. 그 때 연변가무단의 최옥주 업무단장 역시 연변예술학교에 무용을 잘하는 졸업생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은근히 함순녀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일이 되려고 그랬는지 졸업하면서 함순녀는 편제 제한으로 학교에 남지 못하고 연변가무단에 배치 받게 되였다. 연변가무단에 온 후 얼마 안되여 함순녀는 또 가무단의 추천으로 북경 해방군예술학원에 가서 한 학기 동안 무용을 연수하게 되였다. 자신의 수준을 향상시키려면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함순녀는 어떠한 배움의 기회든지 소홀히 하지 않았고 열심히 공부했다.   1982년에 함순녀는 또 연변가무단의 배려로 상해무용학원에 가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였다. 전국에서 50명의 학원을 모집했는데 거기서도 함순녀는 가장 나이가 어렸다. 상해무용학원에서 1년간 함순녀는 무용학원 본과생들이 배우는 과정을 몽땅 배워냈다. 어느 과목이나 모두 열심히 배워 학습성적도 전부 A학점을 맞았고 제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당시 함순녀의 우수한 성적과 성장 가능성을 눈여겨본 상해무용학원의 고전무용 담당선생님은 그녀를 졸업후 학교에 조교로 남기려고 지켜보고 있었다. 인생의 더욱 큰 발전과 성공을 위해서라면 상해 같은 대도시의 명문대학에 몸을 담는 것이 사실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이기에 엄청난 유혹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가 이곳에 와서 공부하고 또 성장할 수 있기까지는 연변가무단이라는 조직의 적극적인 지지와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걸 잊지 않았다. 사리사욕 때문에 결코 조직의 기대와 희망을 저버리고 상해무용학원에 남을 수는 없었다. 고향에 돌아가 배운 지식과 실력으로 더욱 아름다운 예술의 무대에 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결연히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고향 연변으로 돌아오는 렬차에 몸을 실었다.     배운 것과 실천의 유기적인 결합—두각을 나타내다   연변가무단에 돌아온 후 함순녀는 배우생활을 터득하고 경험을 쌓는 과정에서 배운 것과 실천의 유기적인 결합을 통해 차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배운 지식과 실천에서 갈등도 느꼈다. 실천무대에서는 무용동작의 확장성을 강하게 요구했는데 그러한 차이점들을 터득하지 못하다보니 점차 실천 속에서 하나둘 알아가야 했다.   1983년부터 함순녀는 근 1년간의 시간을 들여서 서양 발레무용을 무대에 올리기 위한 련습에 들어갔는데 연변 무용력사상 첫 발레무용 표현의 선두 주자가 되였다. 그 때 함순녀는 세계적인 발레무용극 〈돈 끼호떼〉중의 쌍무장면을 련습하여 무대에 올렸는데 큰 인기를 끌었다. 1984년에 문화극장에서 첫 발레무용공연이 있었는데 당시만 해도 서양 발레무용에 대해 문외한이던 관객들에게는 발레무용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민망해서 눈을 가리고 보는 관객들도 있었지만 손가락 사이로 엿보는 관객들의 호기심 어린 눈길에서 새로운 것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절절한 동경과 추구가 엿보였다고 함순녀는 그 때를 떠올렸다. 연변에도 서양 발레무용을 하는 무용가가 있다는 찬탄과 박수갈채 속에서 함순녀는 차츰 실력을 쌓아가게 되였다.   1986년, 제2회 전국무용콩쿠르에서 함순녀는 독무 〈수양버들〉로 전국 무용계를 놀래웠다. 당시 전국적으로도 혁신의식을 제창하던 때였는데 저명한 안무가 리승숙선생이 〈수양버들〉 독무를 창작하고 함순녀가 표현을 맡았다. 리승숙선생은 수양버들의 잔잔한 몸짓과 광풍폭우 속에서의 몸부림 등 다양한 형상을 무용화해 조선족녀성의 외유내강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전국무용콩쿠르에 선 보일 비중 있는 무용작품이였기에 그녀는 어느 한 부분이라도 소홀히 할세라 1년간이나 련습에 련습을 거듭했다. 결국 콩쿠르에 참가한 독무 〈수양버들〉은 창작 3등상과 표현 3등상을 받아안았다. 전국적인 콩쿠르에서 이 같은 성적을 따냈다는 것은 대단한 영예였다. “조선족이 몸으로 수양버들의 다양한 형상을 무용화한 매우 훌륭하고 실력 있는 무용작품”이라는 업계 권위인사들의 높은 평가도 받았다.   사실, 학업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도 함순녀는 줄곧 여러해 동안 게으름 없이 이를 악물고 무용련습에 몰두해왔다. 그 계단을 그녀는 성장하는 과정이였고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오는 과정이였다고 말한다. 꾸준한 탐구와 노력으로 이루어낸 탄탄한 실력이 비로소 모든 무용작품들을 능히 소화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최고의 무용예술가 함순녀를 빚어낸 것이였다. 많은 무용작품들에서 함순녀가 주역이 되였고 이름난 안무가들도 함순녀를 찾기 시작했다.   1992년에 함순녀는 쌍둥이아들을 보았다. 출산후, 함순녀는 애를 낳았다고 그냥 있으면 그동안 갈고 닦은 기량이 녹 쓸 것을 우려해 계속해서 업무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했기에 해마다 업무회보에서 1등을 확보했다. 쌍둥이를 해산하고 나서 단 1년 만에 완벽한 무용수의 몸매를 다시 회복했다고 하니 그녀가 쏟아부은 노력의 대가가 가히 짐작되고도 남음이 있다.   1998년에는 35세 이하 년령대가 참가하는 ‘전국 독무 쌍무 삼인무 콩쿠르’에 34세의 나이로 참가했음에도 우수상까지 탔다.   1981년에 연변예술학교 무용학부를 졸업한 후, 연변가무단 무용배우로 예술인생의 첫발자국을 내디딘 지도 어언 40년 세월이 흘렀다. 함순녀가 출연한 많은 작품들은 국내외의 콩쿠르에서 큰 상들을 휩쓸었고 미국, 로씨야 등 10여개 나라와 지역을 방문해 공연하면서 민족무용예술의 정화를 널리 알렸다. 함순녀가 주역을 맡은 대형 민족무용서사시 〈장백정〉, 〈춘향전〉은 국가문화부에서 수여한 최고상인 ‘문화대상’, ‘5개 1 공정상’을 받았다.   2002년, 함순녀는 연변가무단 무용부 부장 직무를 내려놓고 2008년까지 연변예술학교 객원교수 신분으로 있으면서 신진과 후대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동안 함순녀는 훌륭한 학원들을 많이 양성하여 발레무용계에 수송했다. 그들 중 최령은 북경무용학원 발레무용학부에 입학했으며 졸업후 우수한 발레무용교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함순녀는 2009년 1월에 연변가무단 단장조리에 이어 6월에 연변가무단 부단장으로 임명되였다.   연변가무단 부단장으로 임명된 후 그녀는 〈장백산 아리랑〉, 〈아리랑꽃〉 등 많은 작품 창작에 참여했고 〈노래하노라 장백산〉 등 작품의 예술감독을 맡았으며 제4회 전국소수민족문예공연극종목 금상, 제14회 문화상 평의 우수극종목상, 문화안무연출상 등 수두룩한 영예를 받아안았다. 그녀는 중국무용가협회 조직론단, 전국공연 등 여러가지 방식을 통해 조선족무용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중국 무용계에서의 조선족무용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데 적극적이면서도 커다란 기여를 했다.   2021년 2월, 함순녀는 중국무용가협회 부주석으로 당선되였다.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의 직책, 민생문제에도 눈길 돌려   함순녀는 문화예술분야에서 뛰여난 인재이고 또 괄목할 만한 성과들을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의 직책을 짊어지고 예술분야는 물론 민생문제에까지 고루 눈길을 돌린 합격된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로도 손색이 없다.   함순녀는 제11기, 제13기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이다.   지난 3월 5일, 북경에서 소집된 제13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4차 회의에서 함순녀는 ‘정부에서 거가양로봉사력량을 강화할 데 관한 건의’를 내놓으면서 로인들의 다층차, 다양화한 양로수요를 만족시켜야 한다고 제기했다. 문화예술분야에 몸 담고 있는 함순녀대표임에도 전국인민대표대회 회의에서 제기한 제안은 민생 관련 문제였다.   이미 2기째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 자격으로 전국 량회에 참가하고 있는 함순녀는 처음에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자신이 몸 담고 있는 예술, 문화 발전 등 범위에서 많이 사색하고 또 제안했다. 그러나 다년간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의 직무를 수행하는 과정에 사회 각 방면을 모두 골고루 살피고 돌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였다고 한다. 그래서 평소에 항상 사회를 살펴보고 생각하고 민생의 불편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였다고 그녀는 속심을 터놓았다.   함순녀는 특히 지난 2019년에 〈미성년자보호법〉도 시대발전에 걸맞게 수정해야 한다는 제안을 제기했는데 전국인민대표대회 우수제안에 등록되여 보람을 느끼게 되였다.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로서 자기 분야만 생각하지 말고 항상 사회와 주변을 관찰하게 되고 어떻게 하면 불편한 것들을 더욱 편리하게 만들 수 있을가 하는 사색을 하게 된다고 함순녀대표는 진솔하게 고백했다.   올해 제13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4차 회의에 참가한 감수에 대해 함순녀는 전국인민대표대회 사업보고에서 ‘14.5’계획 기간 수차 경제방면의 질적 발전을 강조하였고 문화사업 발전에서 고품질의 우수작품을 어떻게 창조할 것인가가 아주 관건적인 핵심키워드라고 한 점이 가장 인상 깊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시대와 인민에게 부끄럽지 않은 문화예술 우수작품을 창작하는 데 모를 박고 정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업성공과 가정화목 ‘두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그 비결은?   1984년에 함순녀가 연변 무용력사상 처음으로 서양 발레무용으로 된 남녀쌍무 〈돈 끼호떼〉를 무대에 올려 큰 인기를 얻었다는 이야기를 우에서 서술한 적이 있다. 그 쌍무의 남성파트너인 김광희가 바로 함순녀의 남편이다.   사실 김광희는 함순녀와 함께 상해무용학원에서 공부하였고 함께 연변가무단에서 무용수로 활약하였다. 그들은 서로 믿고 리해하고 지지해주면서 행복하고 원만한 가정을 이루어낸 원앙부부이다.   “가정을 이룬 후 제일 첫째 가는 행복의 조건은 가정경영이라고 생각했어요. 가정에 충실해야 할 뿐만 아니라 사업에서 적어도 내 앞의 뽈은 잘 차보자는 의욕을 가졌어요.”   부부가 살아가면서 어찌 매일같이 맑은 날만 있으랴. 부부가 항상 서로를 배려하고 너그럽게 감싸주면서 가정을 영위해왔기에 사업성공과 가정화목의 ‘두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자녀교육에서도 함순녀는 엄한 편이였다고 한다.   아들쌍둥이를 양육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직접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모를 것이다. 아이들이 매일 어지럽혀놓은 집안을 청소하는 일만으로도 혼자힘으로는 벅차고 기진맥진할 판이였다. 그래서 애들에게 장난감을 가지고 놀되 규정된 청소시간만 되면 반드시 원 위치에 질서정연하게 갖다 놓아야 한다는 약속을 했다.   그리고 애들에게 어릴 때부터 자기의 물건은 자기절로 정리하는 법을 가르쳤다. 옷이나 속벌, 양말 같은 것들도 서랍장에 넣어두는 위치를 알려주어 저절로 알아서 챙기도록 했고 옷이 어지러워지면 지정된 장소에 모아놓게 하는 등 생활습관들을 일상화했다. 이렇게 되니 애들의 성장과정에서 자립성이 키워져 일일이 부모손을 거치지 않아도 되였고 애들이 집을 떠나 대학생활도 무난하게 잘할 수 있게 되였다.   말을 알아듣기 시작해서부터 모든 일을 자기절로 하게 하는 습관을 키워주었던 것이 정말 잘한 일이였다고 함순녀는 말했다. 현재 함순녀의 쌍둥이아들들은 모두 대학을 졸업하고 각각 북경과 연길에서 사업에 참가하였다.     에필로그   함순녀에게 있어서 2016년의 무용극 〈아리랑꽃〉은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이였다. 쉰살이 넘은 나이로 다시 무대에 올라 작품을 열연할 수 있게 될 줄은 그녀도 미처 몰랐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나도 큰 자부심과 행복이였다.   더우기 무용극 〈아리랑꽃〉에서 함순녀가 표현한 것은 한 무용예술가의 성장과정을 보여준 축도였는데 그것이 더더욱 자신의 인생을 말하는 것 같아 감회가 깊었고 잘 표현할 수 있게 되였다고 함순녀는 감개무량해했다. 무용극 〈아리랑꽃〉이 당시 전국을 들썽케 했던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지금 함순녀는 춤 추는 무용예술가의 무대에서는 내려왔다. 하지만 또 다른 인생무대에서 계속하여 예술인생의 아름다운 배역을 멋지게 표현해나가고 있다.   함순녀는 자신이 걸어온 40년 예술인생의 지나온 발자욱을 돌아보면서 후배들에게 항상 들려주군 하는 말이 있다.    “순간순간의 기회를 모두 소중히 여기고 마음껏 재능을 펼치라. 무엇을 바라지 말고 조건을 따지지 말고 열정을 가지고 노력하느라면 성과가 오고 영예도 따라온다. 내 인생이 그러했다. 먼저 노력을 기울이고 성과를 따내면 반드시 긍정을 받게 되는 것이다…”   함순녀는 언제라도 무대에 다시 올라 춤을 추고 싶다고 말한다. 또한 그럴 준비가 되여있다고 말한다. 그녀는 지금도 인생의 또 다른 무대에서 뜨거운 인생열정과 추구를 가슴에 가득 담은 채 혼신을 불태우는 아름다운 춤사위를 계속해서 펼쳐가고 있다.   《예술세계》 2021년 3호
5    인생의 희로애락을 두줄 현에 담아 댓글:  조회:835  추천:0  2021-06-08
인생의 희로애락을 두줄 현에 담아 □리은희         단 두가닥의 현으로 기쁨, 슬픔 등 내면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해금은 우리 민족의 정서를 표현하는 데 무엇보다 적합한 악기라 할 수 있다. 우리 민족 전통악기중 사부(丝部)에 속하는 해금은 두줄 사이로 발현되는 미묘한 소리와 가슴을 파헤치는 절절한 음색으로 현재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2020년, 조선족해금이 국가급 무형문화유산 목록에 오르면서 국가차원의 보호와 중시를 받게 된 데는 길림성 무형문화유산 해금예술 대표전승인 김철의 역할이 매우 컸다.     해금과의 운명적인 만남   예술가 가문에서 태여난 김철은 어릴 때부터 음악에 남다른 자질을 보였다. 11살에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하여 김철은 초중 2학년 때부터는 왕청림업국문공단 공연에 가끔씩 바이올린 연주자로 나서게 되였다. 그런 그가 해금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79년, 연변구연단에 출근하여 조선족 해금예술 제4대 전승인 리일남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게 되면서부터였다. 그러다 1981년 11월, 연변구연단과 연길시문공단이 합병하여 연길시조선족예술단이 설립되고 연변 최초로 조선족민족악단이 세워지면서 김철과 해금은 끊을 수 없는 인연이 되였다.   서양악기가 대세를 이루던 당시, 두줄의 떨림이 빚어내는 선률에 매료되다 못해 김철은 이 멋진 악기의 매력을 좀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는 데 정열을 쏟았다. 해금을 널리 알리려면 우선 자신의 소질과 기교부터 높여야 한다는 판단에 365일 하루도 빠짐없이 해금련습에 빠져들어갔다. 해금은 현을 미세하게 누르면서 음을 잡아야 하는 악기라 조금만 잘못 눌러도 음이 변하였다. 매일 현을 누르다보니 손가락에서는 살갗도 벗겨지는가 하면 피까지 새여나왔다. 그래도 그에게 휴식이란 하나의 사치에 불과하였다. 모두가 환락의 도가니에 빠져있는 설날에도 해금은 그의 손을 떠나지 않았다. 공연이 없는 날에는 하루 12시간씩 련습을 강행했다는 김철, 그의 노력의 대가는 리유 없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1992년 제14회 아시아예술절에서, 1999년 조선 평양에서 개최된 ‘4월의 봄’ 국제예술절에서 〈다시 핀 도라지꽃〉을 연주하여 금상의 영예를 안게 되였다.   1996년, 중국 조선족 제1회 민족기악음악회가 연길에서 펼쳐졌다. 우리 민족악기를 살리기 위해 안국민, 최삼명, 최창규, 허원식, 리일남 등 로일대예술가들을 모시고 펼쳐진 이 음악회는 당시 상당한 호평을 받았고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애절한 소리를 담은 해금의 존재도 그 때 사람들에게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연변조선족무형문화유산보호중심(원 연길시조선족예술단)에서는 우리 민족 전통악기를 계승하고 보급하는 일에 앞장 서왔습니다. 해마다 민족기악음악회를 열고 민족악기로 연주되는 아름다운 멜로디를 대중들에게 선물하지요. 이는 내가 민족악기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깊이 연구하게 된 계기가 되였습니다.”   연변조선족무형문화유산보호중심에서는 독특한 음색의 해금을 무용곡이나 기타 창작곡에 자주 등장시켰고 음악회를 펼칠 때마다 해금독주를 필수 종목으로 올리였다. 이처럼 해금은 연변의 각종 무대에 자주 등장하면서 점차 사람들에게 더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2018년 9월, ‘김철(해금, 작품)음악회’가 연길국제회의전시예술쎈터 연예극장에서 열렸다. 전파와 전승은 반드시 동시에 진행되여야 한다는 취지로 기획되고 연변에서 열린 첫 민족기악독주음악회였다. 김철의 제자들인 연길시 공원소학교 해금양성반 학생들의 민족관현악 〈아리랑〉 연주로 시작된 이날 음악회에서 김철의 해금독주와 해금, 소금, 중금, 바이올린 등 관현악기가 한데 어우러진 민족관현악 등은 음악회를 찾은 관객들의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았다.         연변 특색을 띤 개량해금   한국의 해금과 조선의 해금을 연주하던 리일남선생은 명주선을 사용한 전통해금은 민족성이 돋보이고 깊은 우리 멋은 낼 수 있지만 반응이 느려 현대적이고 기교적인 곡을 연주할 수 없음을 보아내고 20세기 60년대에 전통해금에 기초하여 개량된 철선을 사용한 2선 해금을 제작해냈다. 리일남선생한테서 개량해금을 배우던 김철은 련습과정에서 개량해금에 여러가지 아쉬움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개량해금의 장점을 살리면서 단점을 보완할 대책이 없을가?’ 매일 방도를 모색하던 김철은 해금에 연변의 색갈을 입혀 개량해금을 더 다듬고 풍성하게 하는 작업에 앞장 서리라는 의욕을 다지게 되였다.   1996년 8월, 그는 개인 자금으로 북경에서 각종 재료를 구입하고 동료인 리동식, 진경수, 최석권과 함께 집에서 해금 10대를 만들었다. 하지만 노력이 무색하게 당시 이들은 원하는 음색을 찾지 못하였고 해금 제작에 실패하고 말았다. 1999년, 연길에 민족악기연구소 생산기지가 설립되였다. 민족악기연구소의 설립은 거듭되는 실패로 한동안 악기제작에 동력을 잃었던 김철에게 재차 희망의 불씨를 심어주었다. 그는 장인들과의 충분한 소통과 교류를 통해 반드시 최고의 해금을 만들어보리라 다짐하고 연길시 민족악기연구소 작업현장으로 발품을 팔았다. 개량해금의 특유의 음색을 찾기 위한 도전은 만만치 않았다. 그는 실패하면 그 원인을 분석하고 직접 조률을 진행하면서 끊임없이 연구에 파묻혔다. 2003년, 꾸준한 노력 끝에 드디여 조선해금과 한국해금과 구별되는 연변 특유의 음을 소유한 개량해금을 성공적으로 제작해냈다. 스승님이 시도하고 만들었던 개량해금을 김철이 더 다듬고 꾸준히 연구하여 최종 완성시켰던 것이다.   “해금을 만드는 과정은 매우 복잡하고 힘들었습니다. 중국 조선족 개량해금의 현은 명주선이 아닌 철선으로 대체되였고 몸통부분은 대나무, 고로쇠나무, 백송으로 만들었습니다. 또한 선이 두줄이다보니 제작면에서도 상당한 내공을 필요로 합니다.”   해금을 직접 만들고 연주까지 하다보니 김철의 두 손은 성할 날이 없었다. 그의 희생과 노력으로 제작된 중국 조선족 개량해금은 음역도 넓고 음색도 풍부하여 우리 민족의 깊은 정서를 담은 음악을 연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속도가 빠른 곡과 현대적인 곡도 연주할 수 있었다.   2006년, 김철은 한국 일파가야금합주단 10주년 공연에 초청 받아 연변의 해금곡 〈설화아리랑〉(황창주 작곡)을 연주하여 빠른 속도의 곡도 자유롭게 연주할 수 있는 중국 조선족 개량해금을 세상에 알렸으며 2018년 11월, 한국에서 열린 ‘아시아 민족음악의 밤’에 초청 받아 해금독주 〈다시 핀 도라지꽃〉을 연주하여 큰 사랑을 받았다.       롱음의 변신   롱음은 줄을 흔들어서 떠는 소리이다. 해금은 떨림의 폭에 따라 슬픔, 기쁨 등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   다년간 김철은 조선족전통음악예술 및 무형문화유산의 발전과 전승에 심혈을 기울여왔다. 그는 악기가 발전하려면 새로운 연주법도 개발되여야 한다는 리념을 갖고 있었다. 하여 음악작품의 다원화 수요와 해금의 음악표현력을 높이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연주법을 연구하고 탐구하였다. 2015년, 그는 반복적인 실천을 거쳐 해금의 전통연주기법을 기초로 바이올린 연주법을 결합한 연변롱음을 만들어내게 되였다. 연변롱음은 손가락으로 원을 그리듯 뱅뱅 돌리면서 현을 누르는 기법으로서 현을 눌러서 떨림음을 만드는 기존의 롱음기법과 큰 차이를 보이였다. 나사가 탈리면서 들어가는 듯한 느낌으로 연주하는 연변롱음은 음악에 감칠맛을 더해주고 선률에 담긴 깊은 정서를 더 끌어낼 수 있었다.     2020 연변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음력설문예야회 ‘봄이 오는 소리’에 해금, 바이올린, 피아노, 첼로, 손풍금 5중주 〈왕벌의 비행〉이 공연되여 큰 화제로 떠올랐다. 로씨야의 작곡가 림스끼-꼬르싸꼬브가 창작한 이 곡은 벌떼의 습격을 받는 백조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었다. 굉장히 빠른 곡으로도 유명하여 그 때까지만 해도 조선민족악기로 연주하기는 처음이였다.   “민족악기로는 불가능하다는 사람들의 편견을 깨뜨리고 싶었습니다. 우리 민족악기로 어떠한 곡이든 연주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어 더욱 이를 악물고 련습했던 것 같습니다.”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하루라도 빠질세라 해금련습을 이어가고 있는 김철, 무뎌져갈가봐 자신을 다잡으려고 지금도 련습을 통해 기량을 끊임없이 갈고 닦는다. 그는 전승인으로서 후대양성사업도 소홀히 할 수 없다며 후반생의 정열을 후대양성에 쏟고 싶다고 고백한다. 두줄 현에 인생의 희로애락을 담은 그의 연주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예술세계》 2021년 2호
4    방송원이 된 기쁨 댓글:  조회:814  추천:2  2021-05-11
방송원이 된 기쁨 □서방흥      1970년 6월 29일, 나는 아침 일찍 훈춘—도문행 뻐스에 몸을 실었다. 산길이 험악하여 내내 뻐스는 장장 3~4시간 덜컹거리며 달려서야 도문역에 도착하였다. 이어 렬차에 올라 한시간 남짓 지나 연길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저녁 무렵이였다.    역에 마중 나온 연변인민방송국 일군들을 따라 무작정 들어선 곳이 바로 방송국 울안 동쪽에 자리 잡은 단층숙사였다. 창문너머로 라지오형태로 지은 아담한 방송국 2층 청사가 한눈에 안겨왔다. 나의 마음은 저으기 설레였다. 그 때의 방송국청사는 아마 지금의 국제호텔처럼 멋져보였던 것 같다.    나는 흥분된 마음을 눅잦히면서 필기장이며 수첩, 만년필 등을 다시 멜가방에 정리해넣었다.    이번 걸음은 방송원강습반에 참가하라는 통지를 받고 오게 된 것이다.    이튿날 아침 8시 반, 2층에 있는 방송조 사무실에서 나는 그동안 라지오를 통해서만 들어왔던 목소리의 주인공들을 만나게 되였다. 일일이 악수하며 인사를 나누었는데 내가 그렇게도 마음속으로 그리던 묵직하고 굵은 톤의 남성 방송원과 친절하면서도 부드러운 톤의 녀성 방송원의 손을 잡는 순간, 너무 격동되여 오래동안 잡은 손을 놓지 못했다.    서로 인사를 마치고 바로 강습이 시작되였다. 방송조 조장이 방송원 모집의 전반 과정, 두주간의 수업내용과 강습요구를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이번 강습에는 400여명 응시자 가운데서 예비합격자로 뽑힌 남자 4명, 녀자 6명 이렇게 도합 10명이 참가하게 되였다. 방송국에서는 이전처럼 모집광고를 내지 않고 직접 각 현, 시에 내려가 여러 지방을 돌면서 선발하였다. 방송조 조장은 강습을 거친 후 재평가를 통해 최종 남자 2명, 녀자 3명을 남길 예정이더라도 조건미달시 한두명만 남길 수도 있다면서 강습생들더러 마음의 준비를 잘하고 자기의 능력과 자질을 유감없이 보여줄 것을 희망하였다.    강습반에서는 화술의 기초로부터 시작하여 뉴스를 비롯한 순서예고, 일기예보, 통신, 실화 등 다양한 쟝르의 문장표달을 가르쳤다. 화술을 처음 접하는 나로서는 많은 것들이 신기하였다. 잘 배워야겠다는 다짐으로 저녁시간에도 쉬지 않고 학습과 훈련을 계속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힘들고 뜻 대로 되지 않아 조바심이 났고 은근히 불안해났다. 마지막 시험을 며칠 앞두고 나는 죽기내기로 발음법을 익히고 여러 쟝르의 문장들을 밤 늦게까지 소리 내여 읽으면서 각고의 열정을 쏟았다. 특히 사전에 내준 준비원고를 말하는 식으로 자연스럽게, 모든 발음이 정확하도록 애쓰면서 곱씹고 또 곱씹었다.    그렇게 두주간의 강습을 마친 우리는 마지막날 평가시험을 치르게 되였다. 시험형식에 따라 사전에 준비한 원고와 즉석에서 내준 다른 한편의 글을 읽고  록음하게 되였다.    ‘이 록음에 근거하여 최후로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는지? 강습반에서의 총적 학습과 훈련정황에 준하는지?’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록음을 마친 후 자기도 마음에 들지 않아 아쉬움이 남았다. 다시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다시 록음한들 얼마나 큰 차이가 있으랴.    제1단계 시험합격 통지서를 받은 후부터 강습이 끝날 때까지 늘 이러저러한 우려와 압력 속에서 지냈지만 그래도 언제나 마음은 기뻤고 한가닥 희망은 남아있어 힘이 되였다. 짧은 기간의 학습이였으나 배운 것이 많았다. 그러나 학습을 마치고 남긴 록음이 최후를 결정한다는 심사기준이 떠오르자 갑자기 기쁨도 즐거움도 가뭇없이 사라져버렸다. 한편 강습시간을 연장하여 더 배우고 훈련한다면 꼭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신심도 생겼다. 그렇다고 방송국에 그냥 버티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천근 짐을 진 듯한 무거운 마음으로 연길을 떠났다.    시간은 빨리도 흘러 강습반에 참가한 지도 어언 9개월이 지났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가고 또 봄이 왔다. 그 사이 나는 인민공사(지금은 훈춘시 양포만족향)의 선전간사를 맡고 드바삐 보내다보니 방송원 강습에 갔다 온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느 하루, 일 보러 포자연대대에 내려갔다가 사무실에 들어섰는데 인민공사 우편배달원이 웃는 얼굴로 나에게 편지봉투 하나를 건네주었다. 연변인민방송국에서 온 편지였다. 순간, 나의 마음이 두방망이질하기 시작하였다. 속으로는 ‘안되면 말지.’ 하면서도 ‘합격되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앞서면서 봉투를 열 용기가 안 났다. 한참후에야 나는 긴 호흡을 하고 나서 편지봉투를 열었다. 빨간 연변인민방송국 도장이 찍힌 방송원 합격통지서가 눈에 확 안겨들었다.      “서방흥동무:    동무가 연변인민방송국 방송원으로 합격되였음을 알리며 열렬한 축하를 보냅니다. 4월 30일까지 호구, 식량, 조직관계 수속을 하여가지고 본 방송국에 도착하십시오.      연변인민방송국      1971년 4월 1일”      나는 날듯이 기뻤다. 그러면서도 하고 있는 인민공사일 때문에 우려심도 없지 않았다. 사실 방송원시험의 전반 과정을 인민공사 지도부에서는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인민공사 당위서기는 상급에서 요구하는 인재를 보내줘야지 하면서 흔쾌히 허락해주었다.    1971년 4월 21일, 나는 인민공사의 동료들과 마을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고향을 떠났다. 정든 고향, 정든 사람들과 헤여지는 순간 방송원으로 되였다는 기쁨보다는 소중한 그 무엇을 잃은 것 같은 서운한 감정이 가슴 속에서 북받쳐올랐다. 차창가에 몸을 기댄 나는 고향사람들의 바람에 어긋나지 않게 첫시작부터 잘해보리라 속다짐하였다.    내가 연길역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1시였다. 마중 나온 방송국 찌프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방송국이 아니라 축구장이였다. 축구장의 열기는 대단하였다. 방송국 임직원들이 박수를 치며 응원했고 두 팀이 격렬하게 경기를 치르고 있었다. 알아보니 문화계통 축구시합이였다. 어리둥절함도 잠시, 이 때에야 나는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처음 방송원시험 면접 때 무슨 특장이 있느냐고 묻기에 “학교에서 축구를 좀 찼다.”고 하였던 게 떠올랐다. 한편 그 때 ‘학교’ 발음이 ‘핵꾜’로 되여 창피했던 일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방송국 책임자가 심판원한테 뭐라고 말하자 한 선수가 나오고 내가 들어가게 되였다. 유니폼은 그대로 웃옷만 바꿔입고 아래는 내복(아래우에 고무줄을 넣은 속옷)만 입은 채로였다. 왼쪽 윙어(왼쪽 날개 공격수) 위치에 배치되였으나 경기가 시작되자 오른쪽과 왼쪽을 번갈아 뛰며 미드필드 역할을 하게 되였다. 지금 생각해도 그 날 일이 눈에 선하다. 내복을 기폭처럼 날리며 나는 뽈을 몰고 문대로 향해 뛰였고 응원소리와 함께 뽈은 그대로 꼴문 안에 날아들었다.    그 이튿날은 목요일, 나의 첫 출근 날이였다. 신입방송원들 모두에게 전용 사무상과 걸상이 차례졌다.     첫 회의에서 방송조 조장은 첫걸음을 잘 내디뎌야 한다면서 정식 방송을 시작하기 전까지 집중훈련과 함께 선배방송원들이 한 사람씩 맡아 지도하게 된다고 하였다. 나의 지도선생은 녀자방송원이였다.    회의후 우리는 록음실에 들어가 록음기 조작법을 비롯한 전반 프로제작과정을 돌아보았다.    나의 학습과 훈련은 지도교원의 요구에 따라 이뤄졌다. 처음은 발음법칙의 장악과 함께 발음을 정확하게 하는 것이였는데 자음발음들에서의 혀의 위치, 모음발음들에서의 입술모양 등 발음기관의 정확한 부위를 찾아 발음해야 했다.    처음 받아쥔 문장 가운데서 ‘오늘 낮부터’, ‘맞고’, ‘변명’, ‘몇몇이’ 이런 단어들을 발음해보게 했는데 [오늘 낟부터]가 아니라 [오늘 납부터]로, [맏꼬]가 아니라 [막꼬]로, [변명]이 아니라 [볌명]으로, [면며치]가 아니라 [몀며치]로 틀리게 발음하게 되는 원인을 찾아 시정하도록 했다. 발음은 습관적으로 틀리게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고서는 쉽사리 고쳐지지 않았다. 이렇게 매 원고를 련습할 때마다 발음을 계속 고쳐야 했고 내용표달을 위한 끊기와 잇기 등 화술의 기초적인 부분의 학습과 훈련을 하루도 빠짐없이 해야 했다.    어느 하루, 나는 그동안 수집하여 만든 발음훈련자료를 지도교원에게 보여드렸다.      [훈련자료]    1. 나갔는가: 학교에서 상급생이 나갔는가 살피였다.    2. 돋구는, 마련했다: 구미를 돋구는 음식을 마련했다.    3. 몇몇: 선생님은 몇몇 학생들과 함께 병문안을 갔다.    4. 눈물: 밥 먹기 전부터 눈물이 앞섰다.    5. 전문: 고중, 중등전문학교 학생들의 생활을 반영했다.    6. 인물: 새로운 인물들이 용솟음쳐나왔다.    7. 내쫓고: 채소밭에서 닭을 내쫓고 있었다.    8. 몇백원: 그들은 몇백원의 돈을 들였다.    9. 옷차림: 람루한 옷차림에 때투성이였다.    10. 네댓번씩: 하루에도 네댓번씩 먹어댔다.    이 훈련자료는 정확한 받침소리 발음과 발음법칙을 제대로 익히기 위해 나의 발음실정에 따라 만든 것이였다. 선생님은 잘 만들었다고 치하하면서 나더러 읽어보라고 하였다. 나는 혀를 분주히 웃이뿌리에 붙였다 떼면서 [ㄴ], [ㄷ] 받침 발음을 정확하게 내는 데 주의하였다. 선생님은 발음이 많이 좋아졌다고 하면서 왜 우리말의 긴 음(장음)을 전혀 발음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사실 우리말에 장음이 있다는 것은 강습을 통해 알고 있지만 어떤 음절이 긴 음인지 도저히 가릴 수 없었다고 이실직고하였다. 선생님은 웃으면서 장음에 대해 알려주었다.    “훈련자료의 ‘구미를 돋구는 음식을 마련했다’에서 [구], [음], [했]은 다 긴 음입니다. 긴 음은 모두 사전에 표기가 되여있는데요. 조선에서는 긴 음 우에 짧은 금을 그어 표기했습니다. 이제 훈련자료에서 긴 음들을 찾아보십시오.”    나는 사전을 뒤져가며 훈련자료에서 긴 음을 찾아내면서 열심히 장음을 익혔다.    그후 장음(장단법칙)뿐만 아니라 우리말 음절의 고저법칙과 강약법칙 수업이 계속되였다. 아무리 힘들어도 기초를 든든히 다지는 것이 후날 방송을 잘할 수 있는 기본임을 알고 있었기에 마음을 다잡고 필사적으로 공부하고 훈련하였다.    정식방송전의 학습과 련습은 이렇게 하루하루 이어졌다. 한달이 지나도록 정식 방송에 나가라는 지시는 없었다. “언제면 너의 방송을 들을 수 있느냐?”는 고향친구들의 편지를 받을 때마다 저도 모르게 조바심이 들었고 기다려지는 마음이 더 간절해졌다.     어느 날 아침, 신입방송원들의 회의가 있었다. 회의가 끝난 뒤 조장이 낮방송 순서예고 원고를 한편씩 나누어주면서 당부하였다.     “이건 이미 방송된 낮방송 순서예고인데 오늘 오전 모두 잘 련습해보세요. 오후에 검사하겠어요.”     나는 정신을 집중해 소리내여 읽었다. 그리고는 어려운 발음과 장음단어를 찾아보았다.     (원고의 장음은 타자의 편리를 위해 두점을 찍어 표기하였다.)       [낮방송순서]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낮방:송을 시:작하겠습니다.     본 방:송국에서는 중파 12:06키로싸이클 파장 2:48.8메터로 방:송하고 있습니다.     먼저 이 시간 이:후에 진행될 방:송순서를 예:고해드리겠습니다.     이 순서소개에 이어서     11시 15분 노래 〈일:할수록 성수나요〉, 〈모를 내세〉 그외 한곡     11시 30분 경제정보     11시 35분 매:주일가 〈오:월의 찬가〉     11시 40분 특집방:송     11시 45분 청년생활     12시 00분 전 주 각 방:송소 중계방:송 및 일기예:보     12시 15분 광:고     12시 20분 리:론학습     12시 30분 음악 〈백산의 붉은 꽃〉     12시 35분 광:고     12시 40분 소:설련속랑:독 〈조야와 수라〉 제:1회     12시 55분 중앙농업방:송학교강좌     13시 20분 노래 〈꽃 피는 마을〉 그외 몇곡     13시 40분 낮방:송이 끝납니다.     이:상 말:씀드린 것은 이 시간 이:후에 진행될 방:송순서였습니다.      오후에 출근하자 신입방송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조장은 방송프로예고 원고를 정식 방송한다는 자세로 읽어보라고 포치하였다. 신입방송원들은 저저마다 열심히 방송하였다. 프로예고 방송이 끝나자 조장은 이렇게 말하였다.    “방송프로예고는 주로 전달을 위주로 하는 만큼 그 표현에서 발음을 똑똑히 하면서 말에 가깝게 해야 합니다. 프로예고의 내용 리해는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청중들이 그 소개에 의하여 선택성 있게 시간에 맞춰 방송을 청취하게 되므로 시간과 프로내용은 어느 하나도 소홀함이 없이 똑똑히 전달되도록 표현해야 합니다.    방금 동무들이 원고작업에 기초하여 자기의 개성과 특성을 살려 프로예고를 방송했는데 모두 괜찮게 되였습니다. 그중에서도 감정표달이나 발음을 입말에 보다 가깝게 한 서방흥동무의 표달이 비교적 잘되였습니다. 그의 표달에서는 첫마디 인사말에서부터 청중을 존경하고 벗으로 사귀는 그러한 다정다감한 감정이 안받침되여있었습니다. 이러한 감정이 계속되면서 반복되는 방송시간 안내에서까지 극력 말로 표현하려 했기에 방송이 뚝뚝 끊기는 것을 피면할 수 있었고 반복되는 것 같은 억양의 빈도를 줄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발음뿐만 아니라 장음단어들을 제대로 찾아 발음한 데서 방송흐름이 유순하여 듣기에도 좋았습니다.”    조장은 앞으로 빠른 기한내에 방송프로예고와 같은 간단한 프로들부터 시작하여 정식 방송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과 간단한 것일지라도 모두 종합적인 표현기교를 요구하는 만큼 련습과 훈련에서 파고드는 정신을 가질 것을 바란다고 하면서 회의를 마쳤다.    나는 비록 칭찬을 받았지만 도리여 자기의 부족함을 잘 알고 있었기에 부끄럽게 생각되였다. 그 이후로 자기의 학습계획에 따라 더 열심히 훈련해나갔다.    지도교원은 자기의 방송당번 때마다 자기가 담당하는 프로예고를 나더러 먼저 표현해보게 하고서는 나타나는 문제들을 하나하나 시정해주었고 일기예보도 때가 되면 나더러 기상국에 전화를 걸어 먼저 한문으로 받은 후 조선문으로 번역하고 그것을 표현해보게 하였다.    며칠후, 오전 9시가 갓 넘자 조장은 래일 방송프로예고라고 하면서 나더러 먼저 원고작업을 해보라고 하였다. 나는 은근히 긴장되였지만 마음을 다잡고 내용을 훑어보면서 발음과 장음, 표현에서 나타나는 문제들을 찾아보았다.    30분후였다. 조장은 자기가 맡은 프로의 록음을 끝낸 후 사무실로 올라왔다.    “프로예고 원고작업을 끝냈지요?”    조장은 나의 곁에 와 앉으며 자못 엄숙하게 묻는 것이였다.    “네.”    “그럼 좋습니다. 먼저 정식 방송한다는 기분으로 읽어보십시오. 래일 하루 프로예고 록음은 동무가 담당하기로 결정되였습니다.”    “네? 제가 말입니까?”    나는 저으기 놀랐다. 훈련할수록 나 자신이 진정 방송원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을 깊이 알고 있었기에 이렇게 갑자기 마이크 앞에 서게 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이건 조직의 결정입니다. 별다른 우려를 갖지 말고 자기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해보십시오.”    나는 큰숨을 몰아쉬고 참답게 방송해나갔다. 어쩐지 며칠전에 선생님 앞에서 훈련하며 읽을 때보다 자꾸 긴장해났다.    아차, 그만 실수가 생겼다.    “…아침방송은 8시에 끝납니다. 다음 낮방송은 10시 50분에 시작하여 순서예고 이어서 노래를 보내드립니다. 다…달님은…”    아침방송 프로예고를 아주 ‘멋지게’ 방송하다가 그만 낮방송 프로예고중의 〈달님은 내 사랑〉에서 희미하게 찍힌 글자 때문에 꺽꺽거리고 말았다.    아침방송 프로예고에서는 낮방송과 저녁방송의 예고까지 하기로 되여있다. 나는 비록 낮방송 프로예고에서 틀렸지만 말없이 아침방송 프로예고 첫시작부터 다시 읽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어길 수 없는 ‘규정’이였다. 그런데 그 날은 실수가 참 많았다. 벌써 세번째나 첫머리부터 다시 읽기 시작하였다. 나는 네번째 만에야 아침프로예고 방송을 한곳도 틀리지 않고, 그것도 나로서는 최고 수준이라 할 만치 마쳤다.    “수고했습니다. 정식으로 방송에 내보낸다니 대단히 긴장되는가 보군요. 이제 곧 록음실에 들어가 록음하겠는데 그 땐 긴장을 풀고 대담하게 해보십시오. 오늘 긴장해서인지 소리가 좀 높았습니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하면서 록음실에 들어가 정식 록음할 때의 자세, 마이크와의 거리 등과 일부 주의해야 할 점들에 대하여 재차 까근히 알려주었다.    “이번 록음방송은 동무가 방송계에 발을 들여놓은 후 처음 청취자들과 대면하는 프로입니다. 어떻습니까? 잘할 수 있겠죠?”    “네!”    나는 록음하기 전의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리용하여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한번 련습하였다.    록음준비가 다되였다. 마이크를 마주하고 앉은 나는 심호흡을 한 후 록음 키를 당겼다.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아침방송을 시작하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침착하게 방송해나갔다. 록음실 밖에서는 선생님을 비롯한 몇몇 방송원들과 다른 신입방송원들이 듣고 있었다.    나는 끝내 한번도 틀리지 않고 아침프로예고 방송록음을 끝냈다. 4분 20초였다. 뒤이어 낮방송 프로예고와 저녁방송 프로예고의 록음도 순리롭게 끝냈다.    록음실에서 나오니 선생님이 나의 손을 덥석 잡아주었다. 나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내돋았다. 나는 자기의 방송이 성공적이였는지 아니였는지를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선생님이 그렇게도 기뻐하는 것을 보니 말 못할 느낌이 가슴을 꽉 메우며 치밀어 오르더니 눈물이 되여 왈칵 쏟아져나왔다.    그동안 자신이 들인 피타는 노력 그리고 나에게 몰부은 선생님들의 심혈이 헛되지 않고 이 시각 자그마한 열매라도 맺혀 보답하게 되였다는 데서 오는 기쁨의 눈물이였다.    나는 마침내 방송인생에서의 첫걸음을 내디디였다.    《예술세계》 2021년 2호 ---------------------------------------------------- 서방흥 프로필 길림성 훈춘 출생 중국 조선족 아나운서 제1임 방송지도 연변대학 통신학부 중문학부 졸업 1984년—2007년, 연변인민방송국 방송부 주임 력임 1986년, 1988년, 1990년, 1992년 길림성방송콩쿠르 특등상 1994년, 길림성 10대 방송원(十佳播音员)으로 선발 《방송원입문》(1995년), 《현대화술론》(2002년), 《말하기와 읽기 기교》(2012년) 등 저서 출간 2017년, 중공연변주위, 연변조선족자치주인민정부 특출기여상 수상
3    조선족 전통민족악기 저대 그리고 전승인 리금호 댓글:  조회:894  추천:0  2021-04-23
     조선족 전통민족악기 저대 그리고 전승인 리금호      □ 리아      조선족 전통민족악기라고 하면 흔히 가야금이나 해금, 퉁소 등이 제일 먼저 떠오르게 된다. 소수민족중에서 조선족이 보유하고 있는 민족악기가 가장 많다지만 대표적인 몇가지 악기를 제외하면 많이 생소하게만 와닿는다. 최근 몇년래 전통민족악기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데 그중 성급 무형문화유산에 등록된 저대(大笒, 대금이라고도 불림)라는 악기가 주목할 만하다. 이는 그 전승인인 리금호의 저대에 대한 애정과 갈라놓을 수 없다.           어린시절, 리금호는 악기연주에 능했던 아버지의 영향하에 희미하게나마 예술가의 꿈을 꾸게 되였다. 특히 손풍금을 연주하는 아버지가 멋져보여 어린 나이에 손풍금연주가로 되고 싶은 꿈을 가졌지만 당시 가정형편에 손풍금을 배운다는 건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이 막연하였다. 쪼들리는 살림 앞에서 아버지는 눈물을 머금고 20전짜리 아동용 피리를 사서 어린 아들의 손에 쥐여줄 수밖에 없었다. 바라던 손풍금은 아니더라도 피리에서 흘러나오는 선률은 그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다보니 그는 혼자 장난감 삼아 피리를 불군 하였다. 어린아이의 한낱 단순한 놀이처럼 보였던 이 과정이 될성부를 나무의 떡잎이 자라나는 순간임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녕안현조선족중학교(현재 녕안시조선족중학교)에 재학시, 학교 음악행사에서 학생들이 장기자랑하는 자리가 생기자 리금호는 피리를 들고 무대에 올랐다.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고 장난감 같은 피리로 한 연주는 엄청난 박수갈채를 받았고 음악선생님은 바로 그를 학교 악대에 받아들였다. 음악선생님은 그에게 플류트를 쥐여주며 전문적으로 배울 것을 건의하였다. 그 때로부터 막연하기만 했던 음악꿈이 또렷한 초점으로 자리 잡게 되였다.      18살 되던 해, 도문시가무단(현 도문시문화관) 악대가 마을에 위문공연을 왔는데 구경하던 리금호는 한 악사가 플류트와 아주 흡사한 악기를 연주하는 것을 보게 되였다. 자신이 배우고 있는 플류트와 비슷했지만 서양의 고급스러운 느낌이 묻어나는 플류트의 선률과 달리 동방 특히 우리 민족의 정서가 담겨있는 듯한 선률에 그는 바로 매료되였고 큰 호기심을 품게 되였다. 그 악사와 안면을 트고 이야기도 나누고 싶었는데 악대는 공연이 끝나자마자 다음 공연장소로 옮길 차비를 하고 있었다. 리금호는 악대 성원들이 악기나 무대설비를 옮기는 작업을 거들어주면서 그 악사와 가까워지려고 의식적으로 다가갔다. 악사의 이름은 김두일, 그가 연주하던 악기는 조선족 전통민족악기인 저대였다. 조선족의 전통악기란 말에 저대의 매력이 더한층 크게 느껴졌다. 리금호는 기회를 놓칠세라 김두일선생에게 저대를 배우고 싶은 의도를 밝히고 제자로 받아달라고 간청했다. 젊은이의 뜨거운 열정에 감복된 김두일선생은 흔쾌히 승낙했다. 그렇게 리금호는 첫 계몽스승의 밑에서 후날 그의 음악인생의 동반자가 될 저대를 배우게 되였다.      리금호에게 저대를 가르치면서 김두일선생은 그의 악기 연주소질을 아주 높게 보고 그의 음악인생이 좀더 광활한 곳에서 펼쳐지기를 바랐다. 음악에 대한 전문지식도 필요하다고 판단한 김두일선생은 리금호가 연변예술학교에 가서 전문적으로 배우도록 적극 부추겨주었다. 스승의 지지하에 리금호는 연변예술학교에서 2년 동안 연수과정을 거치며 음악지식을 습득하였고 그 곳에서 그의 두번째 스승인 신용춘선생을 만나게 되였다. 뛰여난 연주가인 신용춘선생한테서 3년 가까이 저대연주를 배우고 난 리금호는 그 연주실력을 인정 받아 1985년에 안도현문공단 저대연주자로 되였다.      그래도 리금호는 여전히 자신의 실력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이 무렵, 당시 연변가무단 악대 대장이였던 김동설선생의 저대 연주실력이 대단하다는 소문을 듣고 그의 문하에서 실력을 한층 다지기로 마음 먹었다. 그렇더라도 안도현문공단 저대연주자 자리를 놓자니 너무 아쉬웠다. 고민 끝에 두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 뒤로 그는 안도와 연길을 오가면서 저대연주자로서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한편 배움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리금호의 저대 연주실력은 나날이 향상해갔고 1993년에 연변가무단의 저대연주자 자리를 얻게 되였으며 2012년에는 길림성문화청에서 주최한 제5회 길림성중청년배우평의콩쿠르에서 민족관현악 중년조 2등상을 수상하는 등 여러 성과들을 수확하게 되였다. 그럼에도 그는 배움의 길에서의 질주를 멈추지 않았다. 이토록 저대에 쏟아부은 리금호의 수많은 피땀은 2015년, 성급 무형문화유산 민족악기 저대의 대표전승인이란 영예로 꽃펴날 수 있게 되였다.      21세기에 들어서 많은 조선족 전통민족악기가 사회 각계층의 관심과 중시를 받으면서 주급, 성급, 국가급 무형문화유산 명부에 이름을 올리게 되였다. 그중 저대가 2009년, 2012년에 선후로 주급, 성급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였다. 영광스럽게 저대전승인으로 된 리금호는 드높은 책임감과 사명감을 지니고 저대의 전승, 보급 작업에 심혈을 쏟아부었다.           2012년, 연길시 흥안소학교가 ‘연길시조선족전통악기기지학교’로 지정되여 리금호는 전교 학생들을 상대로 전통고음저대(소금)를 가르쳤다. 그리고   연길시조선족무형문화유산보호중심의 단소연주자 렴영식과 함께 학교 악대의 70여명 학생들을 맡아 가르쳤는데 리금호는 저대, 중음저대, 고음저대를, 렴영식은 단소와 퉁소를 가르쳤다. 그는 공연활동이 많을 때면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삐 보냈지만 학생들을 가르치러 가는 길이라면 언제나 열정으로 부풀어있었다. 학교교문에 들어서면 “저대선생님께서 오셨다!” 하며 저 멀리서부터 달려와 주위에 옹기종기 몰려드는 아이들은 그의 활력소가 되기에 충분했다. 생전 처음 보는 악기라며 저대를 조심스레 만져보던 아이가 어느덧 무대공연에 나설 정도로 실력이 쑥쑥 향상되여 멋들어진 곡을 뽑아내는 것을 볼 때마다 그는 안 먹어도 배 부르다는 즐거움이라는 게 어떠한 건지 잘 알 것 같았다.      너무나 보람찬 일을 하면서도 리금호는 가끔 현실 앞에서 막막함을 느낄 때가 있었다. 저대는 다른 민족악기에 비해 보급과 후대 양성 과정에 많은 애로사항이 놓여있어서이다. 우선 저대는 배움에서 난이도가 아주 높은 악기다. 숙련되게 연주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려면 많은 시간과 품을 들여야 하니 배우려는 사람들이 드물다. 또한 천명 동시 연주로 기네스기록을 세운 가야금, 국가급 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퉁소 등 명성 높은 쟁쟁한 악기들에 비해 대중성이나 사회적 인지도에서 다소 밀리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과거 악대에서 홀로 저대 연주를 담당하고 있던 시절에 비하면 현재 저대가 기대 이상으로 널리 보급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리금호는 자신한다. 아직 갈길이 멀 뿐이지 가야 할 방향은 명확하다고. 앞으로 보다 더 많은 어린 후대들에게 저대를 전수하고 또 저대가 국가급 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될 수 있도록 노력을 경주한다면 멀지 않아 저대도 가야금, 해금 못지 않게 조선족 대표악기로 자리매김하게 되리라고.            이제 몇년 뒤면 퇴직할 나이지만 저대를 보급, 전승하는 일에서 리금호의 열정은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현재 연길시조선족무형문화유산보호중심에 있는 동년배 조선족 전통악기 연주자들과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 늘 토론한다. 그리고 다양한 전통악기를 체험할 수 있고 배울 수 있는 학원을 꾸려 전문적으로 후대양성에 뛰여들 계획을 세우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어쩔 수 없이 2020년은 공백으로 되였지만 해마다 책임지고 조직하는 ‘무형문화의 메아리’ 음악연주회도 꾸준히 이어나갈 계획이다.      갓 저대를 손에 쥐게 된 18살 때만 해도 리금호는 이 악기를 반평생 넘게 손에서 놓지 않게 될 줄은, 또 성급 무형문화유산 전승인이란 자리까지 오르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스스로 기술을 배우는 것에 만족하던 데로부터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저대를 알리고 전승, 보급시키는 과정에 그는 저대에 대한 사랑이 더한층 숭고한 경지로 승화되였음을 페부로 느끼고 있다. 훌륭한 저대연주가로 되고 싶었던 젊은 시절의 꿈을 이루고 나니 그 뒤에는 민족악기—저대의 전승과 보급이라는 더 큰 그림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자신의 인생에서 너무 큰 한자리를 차지해버린 저대를 향한 리금호의 발걸음은 오늘도 여전히 힘차고 씩씩하다.               《예술세계》 2021년 1호
2    《예술세계》2021년 2호 댓글:  조회:592  추천:0  2021-04-22
1    《예술세계》2021년 1호 댓글:  조회:504  추천:0  2021-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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