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개방 40주년 기념 특별기획―‘내 고향은 지금(15)’[서란편―신선촌]
이웃마을 회방툰의 박준영로인과 깍듯이 인사를 나누는 리화툰 출신의 본문 저자./유경봉기자 찍음
오랜만에 고향을 찾아 볼 기회가 생겼다.
길림신문사 서란취재팀과 함께 신안향으로부터 시작해서 나의 고향 리화툰까지 둘러볼 계획이다.
5월 30일, 장춘에서 출발해 점심때쯤 서란에 도착한 한정일 부총편이 인솔한 취재팀은 간단한 점심을 먹고 2인 1조가 되여 각자 4개 촌으로 내려갔다.
나는 한정일 부총편, 유경봉 부주임과 함께 한팀이 되여 오후 2시쯤 신안향에 도착했다. 신선촌의 강일남 촌서기가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좌로부터 신선촌 회방툰 김태길 툰장과 강일남 촌지부서기, 우정군 촌회계 등 촌간부들.
기자님들은 신선촌의 취재로부터 시작했지만 나는 내가 자라고 공부하고 정이 들었던 고향- 리화툰이 더 궁금했다.
기자님들이 신선촌을 취재하는 동안 나는 리화툰 김수길 툰장과 함께 신안에서 15리 떨어진 리화툰으로 발길을 돌렸다.
저녁 8시쯤, 택시에서 내려 마을 어구에 들어서자 개구리 울음소리만은 여전히 요란스레 나를 반긴다.
그러나 마을을 보는 순간, 기쁨보다 한숨이 앞섰다. 마을 어구에 있던 제일 컸던 상점이 지금은 조그마한 소매점으로 변하면서 나머지는 창고로 변해있었다.
한일자로 정연하게 줄지어져있던 집들도 온데간데 없고 들쭉날쭉 몇채만이 휑뎅그레 남아있었다.
선후로 회방촌(현재의 회방툰)의 촌사무실과 촌위생소로 쓰이던 초가집이 볼품없이 허름해져있다.
나는 내가 살던 집을 찾아봤다. 다행히 한족주민이 살고있어서 초가집이였지만 그나마 그대로 보존되여 있었다. 그러나 28년의 세월이 흘러 더욱 허름해졌다. 차마 들어가 볼 엄두를 못내고 사진 한컷을 남기고는 돌아섰다.
나는 김수길 툰장네 집에서 둘이 맥주를 마시며 리화에 대해 좀 더 상세히 알수가 있었다.
내가 있을 때, 1990년까지만 해도 조선족이 130여호가 되였지만 지금은 6-7호만 달랑 남아있다는 것이였다.
좀 더 나은 생활을 위해,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한국으로, 대도시로 뿔뿔이 흩어졌다. 나도 그중 일부분이였다.
페교된지 오래 된 신안조선족소학교의 허름한 교문이 길손을 반긴다.
신안의 유일한 조선족소학교가 리화툰(그때는 리화촌이였음)에 있었다. 이제는 인구류출로 페교되여 황페해졌고 운동장은 콩밭으로 변해버렸다.
조선족들이 부치는 수전과 한전은 고향을 떠나면서 타민족 주민들에게 헐값으로 양도되였고 어떤 분은 타민족 주민에게 높은 리자돈을 빌리다보니 토지마저 찾을 수 없게 되였다.
뒤늦게 찾아와 울면서 땅을 치며 통곡한 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우리는 고향 떠난 이방인이 되였던 것이다.
수백명 학생이 즐겁게 뛰여놀던 신안조선족소학교 운동장은 콩밭으로 변해버렸다.
지금 고향에는 움직이기 불편한 어르신들이 남아있다. 김수길 툰장도 68세이지만 아침마다 어르신들의 집들을 돌아보며 문안인사와 함께 어떤 도움이 필요한 지부터 알아보는 것이 첫 일과이다.
저녁마다 동네어구에서 만나 장기판을 벌이고 당구도 치고 잡담도 하고 웅성웅성하기도 하던 동네는 이제는 력사속으로 사라졌다.
고향에 젊은이들도 있었으나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보다 편안하게 공부를 시키기 위해 부득이 서란시내로 이사해서 공부를 시킨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나도 고향을 배반했다 할가? 좀 더 편안하게 살아보자고 서란시내에 집을 장만했으니 말이다.
마음 한편으로는 서글프기도 하다.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말을 하고 있지만 그것이 언제가 될런지?
김태길 툰장네가 마련해 준 푸짐한 아침상이 정겹기만 하다.
/배영춘통신원
서란시 신안향 리화촌(현재의 신선촌 리화툰) 출생.
현재 한국과 중국을 오가면서 생활.
재한동포문인협회 이사 겸 사무국 부국장.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