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룡강신문=하얼빈) 사찰은 공사현장 그 자체였다. 시멘트를 반죽하는 기계가 굉음을 뿜고 있었고, 전당을 에워싼 비계(飛階)로 인부들이 분주히 오르내리고 있었다. 오불꼬불한 산길의 끝머리에 나타난 지상사(至相寺)는 잠에서 금방 깨어난 듯 그렇게 어수선한 모습으로 일행을 맞고 있었다.
"당(唐)나라 때의 지상사 모습을 복구하고 있는데요." 도전 스님이 해석하는 말이었다.
지상사는 서안(西安)의 남쪽에 있는 종남산(終南山)의 천자욕(天子峪)에 위치한다. 천자욕은 당(唐)나라 고종(高宗) 이치(李治)가 출생한 곳이라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그래서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이 천자욕의 지상사를 여러 번 참배하고 향을 피워 올렸다고 한다.
역설적이지만 지상사는 대륙의 멸불(滅佛) 운동으로 인해 생겨났다. 대륙에서 불교가 한창 자리를 잡고 있던 북위(北魏)와 북주(北周) 시기 멸불 운동이 일어났다. 이때 경성(京城) 장안(長安)에서 승려들은 근처의 종남산에 도망하여 역량을 보존했다.
북주시기 장안의 명승 보안(普安)은 종남산의 천자욕 서쪽비탈에 은거하고 있었다고 '속고승전(續高僧傳)'이 전하고 있다. 나중에 보안은 법난을 피하여 산속을 들어온 승려들을 종남산 서쪽비탈의 유밀(幽密)한 처소에 안치한다. 정작 보안은 홀로 몸을 드러내고 날마다 탁발하여 승려들의 입고 먹는 것을 제공했다. 그리하여 여러 승려들은 수행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들은 보안과 함께 종남산에 선후로 불사(佛舍) 27개를 세웠다. 이 불사가 바로 지상사의 추형(雛形)을 만든 것이다.
수(隋)나라 문제(文帝) 개황(開皇, 581~600) 초년, 지상사가 종남산에서 정식으로 창립되었다. 불교의 종파인 화엄종(華嚴宗)은 지상사에서 전승(傳承)의 법계(法系)를 형성하고 있었다. 지상사는 시초부터 화엄학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도장이었다. 일찍 승려 보안이 화엄을 존숭했고, 뒤이어 고승 지정(智正)이 이곳에 와서 화엄을 연구했다. 화엄종의 2조 지엄(智儼)은 12살 때 지상사에 출가하며 지상사에서 지정의 '화엄경' 강설을 들었으며 또 지상사에서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연구했던 것이다.
지상사는 흥성할 때 규모가 무려 7백여 정보에 달했고 그 기세가 종남산의 산세처럼 웅장했다.
"오동나무가 숲을 이루면 봉황이 날아든다." 당나라 고종(高宗) 영휘(永輝) 2년(651), 신라의 명승 의상(義湘)이 장안에 들어오며 지상사에 체류했다. 또 효충(孝忠), 승전(勝詮), 도량(道亮), 보양(寶壤) 등 신라승려가 지상사를 찾아왔다.
옛날의 여느 명승처럼 의상도 고서의 행간에 신이(神異)한 행적을 남긴다. 사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의상전교(義湘傳敎)'는 소설 같은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고승) 지엄은 전날 밤 이상한 꿈을 꾸었다. 큰 나무 하나가 해동에서 났는데, 가지와 잎이 널리 퍼져서 중국까지 와서 덮였다. 또 가지 위에는 봉황새의 둥지가 있었고 둥지에는 마니보주(摩尼寶珠)가 있어 그 광채가 먼 곳까지 비쳤다. 꿈에서 깨자 놀랍고 이상해서 집을 깨끗이 소제하고 기다리는데 의상이 왔다. 그래서 지엄은 특별한 예로 의상을 맞고 조용히 말했다. '어젯밤의 꿈은 그대가 내게 올 징조였구려.' 입실을 허락하니 의상은 '화엄경'의 세밀한 곳까지 해석했다. 지엄은 영질(靈質)을 만난 것을 기뻐해마지 않았다."
사실 이에 앞서 의상은 벌써 '소설' 같은 이야기를 만들고 있었고 '소설' 같은 인물을 만나고 있었다. '삼국유사', '대장경(大藏經)', '송고승전(宋高僧傳)' 등 옛 문헌에 기록된 이야기의 판본은 약간씩 차이를 보이지만 대체적인 줄거리는 비슷하다.
의상은 29세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는데, 부처의 교화를 보려고 650년 중국행을 단행했다. 그런데 요동의 변방에서 고구려 순라군에 의해 첩자로 잡히며 수십일 만에 겨우 풀려난다. 의상의 육로를 통한 첫 번째 입당(入唐) 시도는 이로써 실패로 끝나는 것이다.
가만, 이때 의상을 동행한 인물은 원효(元曉)로서 훗날 의상과 쌍벽을 이룬 한국 불교계의 고승이다.
원효는 의상보다 8세 위인데 의상과 친교를 맺었고 함께 고구려의 승려 보덕(普德)으로부터 '열반경(涅槃經)'을 배웠다고 한다. 그때의 신라 풍조에 따라 당나라 유학을 결심하고 의상과 함께 중원으로 떠났던 것이다. 661년, 원효는 의상과 함께 다시 당나라로 들어가려고 한다. 원효는 여로에서 무덤의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그 자리에서 득도, "심외무법(心外無法), 모든 것은 내 마음에 달려있다"는 것을 깨우치며 의상과 헤어져 돌아갔다. 그 후 원효는 민중 교화의 승려로 되어 당시의 귀족적 불교를 민중불교로 바꿨다. 에피소드라고 할까, 와중에 원효가 파계를 하여 요석(搖石) 공주와 더불어 낳은 아들 설총(薛聰)은 우리말 표기법인 이두를 집대성한 신라의 대학자로 거듭난다.
한편 의상은 홀로 당나라 사신의 배를 타고 마침내 산동반도의 등주(登州)의 해안에 상륙했다. 의상은 현지의 한 불교신자의 집에 잠깐 기숙을 하는데, 신자는 그의 용모가 출중한 걸 보고 며칠 더 묵게 했다. 신자에게 선묘(善妙)라고 부르는 딸이 있었으며 손재주가 좋고 용모가 예뻤다. 선묘는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지만, 의상의 마음을 돌려세우지 못했다. 이에 선묘는 도심(道心)을 얻고 불교에 귀의할 것을 발원한다.
의상은 장안으로 떠나며 종남산에 들어가서 화엄종의 2조 지엄(智嚴)으로부터 8년 동안 화엄을 공부했다. 화엄종의 3조인 법장(法藏)은 그의 친밀한 법우(法友)였다.
스승 지엄이 입적(入寂)한 얼마 후인 670년 의상은 급급히 귀국길에 올랐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의상은 당나라의 신라 침공을 알리기 위해서 길을 떠났다고 한다. 이때 의상은 또 등주에서 상선에 탑승했다. 이 소식을 들은 선묘가 미리 준비했던 법복과 집기를 들고 부랴부랴 부두에 달려왔다. 그러나 상선은 저만치 멀리 떠나간 뒤였다. 선묘는 "용으로 되어 스님의 배가 무사히 신라로 돌아갈 있도록 돕겠다"면서 바다에 투신한다. 과연 선묘는 용으로 형체를 나타내고 배를 밀어 저쪽 바다 건너 반도의 기슭에 닿게 했다.
선묘의 사랑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신라에 도착한 의상은 화엄종을 전파할 장소로 태백산을 점찍었다. 사찰을 지을 때 도둑떼가 몰려와서 공사가 중단되었다. 그러자 의상을 따라온 선묘가 다시 용으로 나타나서 신력(神力)을 현시했으며 이에 도둑떼는 별수 없이 물러갔다. 선묘는 이때부터 부석사(浮石寺)를 수호하기 위해 석룡(石龍)으로 변해서 사찰의 뜰에 묻혔다고 한다. 실제로 사찰의 뜰에서 언제인가 석룡 몸체의 일부가 발견되었다고 하니 바다를 건넌 선묘의 사랑 이야기가 전설인지 진실인지 헛갈린다.
어찌됐거나 의상이 세운 부석사는 허망 지은 이야기가 아니다. 의상은 676년 한국 화엄의 근본도량이 된 이 부석사를 태백산(경상북도 봉황산)에 창건했으며, 그 후 이를 시작으로 전국 각 지역에 10개의 화엄종 사찰을 지었다. 부석사는 떠있는 바위가 있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사찰의 부석 아래에는 틈이 있어서 실을 당기면 걸림 없이 드나든다는 얘기가 항간에 전하고 있다.
"우리 지상사가 본뜨고 있는 건축구조는 바로 부석사(浮石寺)인데요." 도전 스님은 종남산에 새로 일어서는 지상사의 모습을 이렇게 밝히고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부석사는 옛 지상사를 상당 부분 베끼고 있다는 것이다. 역시 참조물(參照物)이 되고 있는 일본 교토의 고찰도 당나라 때의 풍격이며 지상사의 옛 모습을 더듬을 수 있다고 한다.
천 년 전, 지상사는 해동에 건너간 후 정작 대륙에서는 본래의 형체를 잃었다. 당나라 무종(武宗, 814~846)이 도교를 신봉하면서 또 멸불 운동을 단행, 842년부터 4년간 무려 40,000개의 사찰을 폐쇄했던 것이다. 이 멸불의 불길은 장안 부근의 명찰인 지상사에 선참으로 당겨 붙었다. 지장사의 "종과 구리 조각상은 돈을 주조했고, 쇠로 만든 조각상은 두드려서 농기구로 만들었으며 승려는 전부 환속했으며" 건물은 훼손되었다.
민국(民國, 1912~1949) 시기 종남산의 천자욕에는 사찰이 다시 수풀처럼 일떠서고 있었다. 공화국이 창립된 시초인 1950년에 지음하여 사찰은 승려가 30여명 있었고 건물이 80여간 있었으며 땅이 2,3백 정보 되었다고 한다.
"그때 사찰 주변에 7층 이상의 사리탑만 해도 27채나 되었다고 합니다." 도전 스님의 한탄 섞인 말이었다.
현재 사찰에는 유물이라곤 자곡(紫谷) 선사의 열반탑(涅槃塔) 탑신 하나뿐만 남아있다고 한다. 자곡 선사는 청나라 강희(康熙) 황제의 국사(國師)이다. 자곡 선사가 은거하면서 사찰 이름은 국청선사(國淸禪寺)로 개명했다.
그야말로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뽑아버린 형국이었다. 국청사로 개명한 후 지상사의 옛 이름은 집단기억에서 차츰 소실되었다. 20여 년 전, 한국의 일부 유지인사들이 여러 해 동안의 현지 조사와 탐방을 거쳐 비로소 국청사의 옛 이름을 다시 찾았던 것이다. 그 무렵 한국 화엄의 조사(祖師)인 의상을 기리어 특별히 세운 기념비가 뜰의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있었다.
한국 승려들은 우리 일행이 도착하기 하루 전에도 지상사를 다녀갔다고 한다. 도전 스님은 지상사는 수련장소라고 하면서 한국 승려들은 거개 여행사를 통해 지상사를 견학하고 의상 법사를 기리고 있다고 밝혔다.
어찌됐거나 이 한국 승려들은 행운아였다. 약 30년 전, 도전 스님이 산에 올랐을 때에는 사찰의 흔적마저 얼마 남아있지 않았다고 한다. 극좌운동인 '문화대혁명' 시기 '홍위병(紅衛兵)'들이 사찰의 건물과 사리탑을 거의 다 허물어버렸던 것이다. 이어 지난 세기 80년대에는 부근의 촌민이 땅을 파서 문물을 도굴했다고 한다. 그때는 마침 대륙에서 문물 가격이 한창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울지도 웃지도 못할 이야기가 생겨났다. 사리탑의 금으로 된 함을 발견한 농부가 정작 함에 있는 물건은 버렸다고 한다. 진주를 버리고 진주함을 챙긴 것. 지금도 함에 있던 그 보물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껍데기만 남은 이 함은 현재 국가급 문물로 되어 섬서성(陝西省) 역사박물관에 소장되고 있단다.
사찰의 옛 이름과 더불어 만날 수 있는 천년의 옛 기억은 또 하나 있었다. 뜰에는 당나라 때 승려들이 심었다고 전하는 천년 묵은 홰나무가 있었다. 예전에 이런 고목은 사찰 주변에 200여 그루 있었다고 한다. 지난 세기 70년대 말 촌민들이 남벌하면서 종당에는 홰나무 한 그루가 홀로 서있게 된 것이다.
카메라에 홰나무를 담다 말고 부지중 한숨을 길게 흘렸다. "도서실이라면 옛 장서(藏書)는 한권 밖에 없는 셈이네요."
정말이지 의상의 이야기는 인제 홰나무처럼 사찰의 외로운 고목으로 남고 있었다. 사찰은 다시 천 년 전의 원상을 찾고 있지만, 복구한 이 '법기(法器)'가 천년의 옛 이야기를 모두 담아낼 수 있을지 궁금했다.
사찰 저쪽에서 독경 소리가 혼잡한 동음을 헤집고 잔잔히 들리고 있었다. 저도 몰래 의상을 찬(讚)한 '삼국유사'의 시 구절을 머리에 떠올렸다.
"덤불을 헤치고 바다를 건너 연기와 티끌 무릅쓰니,
지상사의 문이 열려 귀한 손님 접대했네.
화엄을 캐다가 고국(故國)에 심었으니,종남산과 태백산이 함께 봄을 맞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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