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주간이 만난 사람 (4) 장익선
연변대학예술학원 장익선 음악학박사를 찾아서
음악 혹은 노래라함은 우리가 그림자처럼 늘 곁에 두고 함께 지내는 삶의 동반자와 다름이 없다. 특히 한많고 설음많은 우리민족에게 노래는 정서의 표현이요 심미의 발상이며 삶의 기록이라 하겠다. 머나먼 력사는 제쳐놓고도 오늘날 우리는 회사 또는 취중 뒤풀이로 늘 노래방을 찾게 된다.
노래는 별다른 전업적 훈련을 받지 않고도 엄청나게 잘 부르는 고수들이 많다. 기능적 면에서 출중하기에 “쟁이”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쟁이”는 일정한 과정을 거치면“한계”에 부딪치게 되며 체력적, 의식적 제한으로 하여 발전을 멈추게 되는 것이다.
“황제는 왜 그런 음악 들었을까?”
기자에게 재미있는 물음을 던진것이다.
우리가 자주 부르는 서민음악과는 달리 궁중에는 궁중음악이라는것이 생겨났고 황제는 그런 궁중음악을 즐겨들었다. 서민음악은 왜 듣지 않았을까?
느리고 천천히 배회하는, 점잖게 무게를 싣는 그런 궁중음악만을 즐겼을까?
“알아주고 이끌어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모른다하여 부정하지 말고 배척은 더욱 말며 받아들이고 연구하고 알아가지고 내것으로 가공하여 흡수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문인들은 사색하고 심사숙고하고 무아지경에 빠져들어가는 문인음악에 도취
했었다.
“먹고 놀고 즐기는 노래는 음악의 표층이요, 음악의 심층에는 사상과 화합이 이루어 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한마디 해석 밑바탕에는 그가 바친 인생 한부분이 고스란히 스며있었다.
불혹지년을 넘긴 그가 한국류학 길에 들어선것은 특별한 리유가 있은것도 아니다. 단지 남들이 박사하고 돌아온 것이 자극제가 되어 “승벽심”에 이 험난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당시 그는 이미 대학교 부교수직함을 가지고있었다. 2002년의 일이었다.
인민폐 10만원을 지니고 학문의 돌다리를 두드렸다. 한양대학에 입학하여 학비를 내고 류학생 보증금 지불하고, 숙소를 마련하고, 그는 하루밤 사이에“거지” 가 되였다. 한명 없는, 원군이 없이 고립된 “무인도”에 갇힌 것이다. 전부재산이 고작 한화 10만원, 입학파티를 연다고해서 또 한화 1만원을 내야했다. 그것도 외국인류학생이라 배려하여 참석비가 1만 5000원인데 1만원만 받은 것이다.
고생을 사서 한 셈이다. 소설에서나 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아침에는 김밥을 먹어야 했고 2시간 넘게 지하철에서 끄떡이다가 점심에는 물이나 차물로 대충 요기하고 저녁에는 라면으로 속을 덥히였다.
나이를 턱대고 염체불문하고 지도교수에게 연구실을 빌려쓰겠다고 해서 다행히 책읽을 장소가 생겼고 점심에 차물의 혜택도 향수할 수 있었다.고난의 행군을 이어갔다. 수업받고 페이퍼 쓰고 리포트 제충하고 또 다음날 수업을 준비하고, 악보그리기를 컴퓨터에서 새롭게 배워야 했고 학부보충을 받아야 했고 지도교수 따라 세미나에 참석하고, 정말로 팽이처럼 돌아쳤다. 긴긴 터널은 끝이 보이기 시작하고 처음에는 무료로 출연하여 악기를 연주했다. 단소가 그의 특기였다. 이어 출연비를 받게 되고 대학교 특강에 출강하게 되었다. 박사공부 만 3년 동기생4명 중 장익선은 유일하게 음악학박위를 수여받았다. 졸업론문은 ≪연변민요의 음악적 특성과 전승양상에 대한 연구≫였다.
“공자는 예악( )를 늘 말했습니다. 음악이 나라를 다스리는데 그렇듯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음악을 통하여 화합이 추진되고 감정을 교류하고 집단의지를 굳히고 의식을 통일하는 것이다. 술마시다 싸움질 하는 광경을 보았어도 노래부르다가 때리고 까부시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이다.
한 지역의 개척사를 보면 가장 먼저 찾아오는 사람이 탐험가이고 그 뒤를 이
어 종교인이 오고 또 뒤에는 상인이 오고, 정치인이 오고 음악, 문화인들이 찾아온다.
이러한 종교인은 나중에는 지역음악을 흡수하게 되고 그것을 종교음악과 결부하여 새로운 경전음악을 만들어 갔다. 지역과 민족과 고유문화가 융합되는 과정이며 이 또한 당지에 새로운 문화가 싹트는 과정이며 넓혀지는 과정이다.
졸업후 귀국하여 모교에서 후대양성에 힘쓰면서 장익선 박사는 조선족지역을 답사하면서 민요수집에 참여, 민요의 수집과 정리, 발굴에 힘썼다. 2008년에는 “진달래”컵 중국조선족전통음악무용경연대회를 개최, 작년까지 4회를 거쳐, 대회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옛날 악기는 사람따라 이동했을거고, 다만 기록이 남아있지 않을 뿐이다. 이런 민족악기에 대한 발굴과 재현 역시 장익선박사가 연구하는 하나 분야이다. 현재 동아음악고고학회 비서장으로 사업하고 있는 그의 소개에 따르면 금년도 행사는 중국 소주에서 거행, 소주공업단지에서 50만원, 중국음악학원에서 100만원을 출자한 “우리 음악에는 서민음악이 많다. 하나만을 알고 다른 것을 모르면 정서가 단순해진다. 영양실조에 걸린다는 말이다. 우리 또한 “쟁이”가 되지 말고학문을 닦는 학자가 되어야 한다. 음악이 왜서 탄생했고 어떻게 생겨났으며 앞으로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것을 고민하고 연구해야 한다. 연변의식은 너무 좁다. 음악에서 방법론, 사유정체성을 버리지 말았으면 좋겠다.”
음악학문에 다소 먼저 입문한 선배로서 자신의 할 일은 교량작용이라 한다. 옳은 말씀인 것이다.
글 육삼 사진 박군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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