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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해양지질연구분야의 조선족 선두주자
조글로미디어(ZOGLO) 2013년4월10일 08시49분    조회:4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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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허동우


정년퇴직후에도 국가 해양지질사업에 혼신을 다하는 허동우연구원

정년퇴직한후에도 국가의 대형 프로젝트 자문위원으로 있으면서 필생의 정력을 지질해양연구사업에 바쳐온 한분이 있다. 이번 청도행 취재에서 첫사람으로 만난 원 청도해양지질연구소의 부소장이였던 허동우(许东禹)박사(75세, 연구원)이다.

워낙은 10여년전인 1996년이 정년퇴직하는 해였는데 허동우박사의 재능과 역할을 중히 여긴 상급기관의 우격다짐(?)으로 결국 3년 뒤에야 정년퇴직할수 있었고 정년퇴직뒤에도 국가의 대형 자연과학 프로젝트 자문위원으로 있으면서 퇴직후의 안락한 생활보다는 퇴직전과 여전한, 어찌 보면 고령으로서는 재직시기를 초과하는 열정과 정력, 심혈로 남은 인생을 불태우고있었다.

재직때에 못지 않은 열정으로 해양지질사업에 심혈을
6일 오후 청도에 도착하자마자 그대로 청도에 있는 지인의 안내하에 허동우교수의 저택에서 허교수를 취재하게 되였다. 75세의 고령임에도 아래층 문어구까지 마중나와 우리를 기다리는 허동우박사를 보니 어딘가 조금 불편한듯 보였다. 취재하면서 알고보니 올해에 들어 잦은 학술연구회의 및 해양지질연구과제때문에 바삐 보내던중 북경에서 열린 한차례 회의에 참가했다가 쓰러졌다고 한다. 다행히 부인이 함께 동행한터라 급히 병원으로 호송했기에 최악의 상황을 모면할수 있었다고 한다.

허동우교수에 따르면 올해에만 해도 항주, 하문, 광주, 북경 등지에서 열린 여러차례의 학술회의, 해양지질연구행사에 참가하느라 눈코뜰새 없이 바삐 보냈다고 한다. 비록 퇴직한지는 10여년이 되였지만 여전히 국가급과제를 맡고있다는 허교수, 현재 그의 주도하에 《대양광산지질학》대형연구총서가 중국해양출판사에 의해 출판중이며 멀지 않아 산뜻한 책자로 지질학계와 만난다고 한다.

허동우박사와 해양지질학의 인연은 어느덧 40여년이 되여온다. 조양천태생인 허동우선생은 1960년 장춘지질학원(현재 길림대학에 편입) 지질학부를 졸업한 뒤 그해 학교에 남아 대학교수로 사업하다가 4년 뒤인 1964년 국가지질부 해양지질과학연구소로 전근, 1970년부터 1978년까지 국가지질총국 제2해양지질조사대대에서 사업하였으며 1978년 청도해양지질연구소에 자리를 옮긴 뒤 1999년 8월 퇴직할 때까지 줄곧 이곳에서 해양지질연구에 몸을 담가왔다.

1987년 연구원 직함을 취득하였고 1992년부터 국무원 특수수당금을 향수하였으며 현재에도 여전히 자연과학분야의 국가 대형프로젝트인 “국가중대기초연구발전전망계획” 즉 “973프로젝트” 자원환경분야의 자문위원으로 있었다. “973프로젝트”는 1997년 중국정부가 과학자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국가중점기초연구발전전망계획을 작성하고 국가의 중대한 수요에 대비해 실시한 중점기초연구를 말하는데 이는 중국이 기초연구를 강화하고 자주혁신능력을 끌어올리기 위한 중대한 조치로 풀이되고있다. 1998년 “973프로젝트”가 실시된 이래 농업, 에너지, 정보, 자원환경, 인구 및 건강, 재료, 종합교차, 중요과학전연지대 등 령역에 대하여 중대한 포치를 하고 전문가자문소조, 령역자문소조를 설치하였는데 허동우연구원은 자원환경령역 자문위원이였다.

이외 그는 청도해양지질연구소 과학기술자문위원회 부주임, 중국대양광산협회 지질탐사소조 전문가, 국가“전속경제구와 대륙붕탐측” 전문가소조 전문가, 전국해양과학기술명사 편집심사위원회 위원 등 직을 맡고 로년을 불태우고있었다. 국가자연과학상, 국가자연과학기금회 평의위원, 중국해양호수소택학회, 중국해양법학회 리사 등 직도 담당하기도 했었다.

해양지질 탐사 및 연구에 몸 담아온 40여년
해양지질사업에 종사한 40여년간 선후로 “전국해안벨트조사”, “중미장강입구 및 린근륙가동력학합작연구(지질소조 조장)”, “태평양중부다금속결핵조사연구(수석과학자조리 및 과학연구대상 책임자)”, “대륙붕 및 린근해역 기초환경도편집” 과제총괄, “전속경제구 및 대륙붕탐측” 등 국가의 중대한 과학연구프로젝트에 참여하였으며 단독 혹은 제1주필로 《다금속결핵종합연구(10부작 계렬총서)》, 《다금속결핵특징 및 생성원인》, 《다금속결핵형성의 고대 해양환경》, 《중국근해지질》 등 수십편의 저서를 집필, 출간하고 《지구과학대사전》, 《영한지질사전》, 《중국대백과전서》 등 사서의 편찬사업에 참가하고 영문판 《해양지질학》, 《고대해양학》, 일본어판 《호형군도》, 《해저지구과학》 등 외국문전문도서의 번역교열에 참가하였다.

또한 여러차례 지질광산부를 대표하여 타이, 말레이시아, 일본, 한국 등 나라와의 침적동력학면의 합작연구와 대양지질광산 및 천연가스수합물 면의 과학고찰을 진행하였으며 수차 국제지질대회, 아시아해양지질대회, 국제대양광산자원대회 등 국제학술대회, 국제극지 및 해양공정학회 년차회의, 국제해양광산채굴학술포럼 등 학술회의에 참가하여 론문을 발표하고 테마발언을 하기도 하였다.

리론에서뿐만아니라 허동우연구원은 태평양 심해저 광물개발에 참여하고있는 중국의 단독개발광구(7만 5000평방메터) 확정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것으로도 알려졌다. 하와이 동남방 2000킬로메터 지역 수심 4800∼5200킬로메터의 태평양 심해저 광물개발은 지난 82년 유엔해양법협약이 채택되고 인류 전체의 유산으로 선언되면서부터 시작됐다. 이 협약에 따라 미국, 일본, 프랑스, 옛쏘련, 영국, 독일, 중국 등은 국제해저기구에 광구등록을 하고 해저개발기관을 설립하거나 민간기업들이 국제컨소시엄에 참여해 적극적인 탐사활동을 벌려왔다. 중국은 지난 90년 광구등록을 마친후 탐사활동을 벌려 98년 경제성이 없는 광구를 제외한 단독개발광구를 확정지었으며 이 과정에서 허동우박사의 연구론문이 큰 역할을 한 가운데 허동우연구원은 탐사에 직접 참여한것으로 밝혀졌다.

허동우박사에 따르면 지난 1984년 중국이 태평양 심해저 탐사를 위해 조직한 `MIDPA-84 해양탐사대'에 참가해 6개월간 4700여메터의 심해저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고 한다. 11명의 세계 유명과학자가운데 유일한 조선족이였던 허동우연구원은 이후 중국태평양광산조사준비회 기술책임자로 발령받고 여러차례 탐사를 거듭해 마침내 태평양 심해저에 매장되여있는 망간(MN)의 분포와 특징, 개발과 관련한 우수한 론문을 써 중국이 단독개발광구를 얻는데 기여했다.

이러한 공로로 허동우연구원은 선후로 지질광산부 과학기술진보상, 전국과학기술정보우수성과상, 국가중대과학기술연구성과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선후로 청도시, 산동성 및 전국민족단결 선진개인, 지질광산부 우수공산당원, 청도시 선진일군, 로력모범, 10대 과학기술스타 등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허동우연구원은 태평양 해저탐사연구를 벌릴 당시 중국의 종합국력이 낮아 받아야만 했던 설음, 상상도 못할 어려움 그리고 사회주의국가에서 왔다는 리유로 배척받았던 사연을 이야기하면서 이러한것들은 오늘날 모든 심혈을 국가의 해양지질사업에 혼신을 다하게 하는 동력으로 되고있다고 감개무량하게 말한다.

지질학분야 조선족 적어, 자연과학기술에 대한 중시 불러일으켜야
허동우교수가 장춘지질학원을 다닐 때까지는 지질학분야를 전공하는 조선족들이 어느 정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지금 지질학에 관심을 두거나 전공하려는 조선족학생이 거의 없다고 하면서 “지금 세대들의 인생관에 커다란 차별이 존재하고 있음을 설명한다”고 주장한다.자신이 대학공부를 하던 그때를 회상하며 허동우연구원은 “지질분야는 고생을 사서 하는 사업이였지만 학생들은 졸업한 뒤면 너도나도 야외탐사를 나가려고 했다”고 말한다.

“당시 우리는 바로 공산당의 덕분에 배움의 길을 걸었고 인생의 좋은 시기를 맞이하였기에 그에 보답하려는 마음이 강렬했다”며 어렸을 때 가마니를 짜서 팔아 공부하고 삼베천으로 된 옷을 입고다니던 어렵게 살던 때를 생각하면 열심히 일하지 않을수 없다고 퇴직한 뒤에도 열심히 일하는 리유를 밝혔다.

그렇게 열심히 일해왔음에도 동란의 년대에 례외없이 비판대상이 되였다고 한다. 자기가 가르치던 제자가 이웃나라로 갔다는 리유로 “특무”라는 억울한 루명을 쓰고 9개월간 감옥에 갇혀있으면서 정신적인 타격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국가해양지질사업에 대한 그의 사심없은 기여는 끝나지 않았고 지금도 이어지고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조선족대학생들을 보면 과학연구보다도 금전을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게 그의 견해였다.

“지질학분야를 살펴보면 북경대를 포함해 제1지망으로 지질학을 선택하는 경우가 거의 없으며 특히 조선족이 더욱 없다. 또 대학을 졸업한뒤 외자기업 등에는 많이 가려 하지만 과학연구에 종사하려는 조선족들이 적다고 생각된다”며 “국가자연과학상에 조선족도 당당하게 한자리 차지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지금의 상황으로서는 걱정이 가지 않을수 없다”고 가슴아파했다.

허동우교수가 지질학을 배울 당시 두다리에 의거하여야 했던 지질학연구면의 락후한 시설, 조건, 대우와는 비할바 없이 지금은 교통, 통신, 대우 등 면에서 많이 발달하였다고 하면서 경제도 중시하여야 하지만 조선족으로서 이 사회에 당당히 서려면 과학기술에 대한 중시도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연변의 대학에서도 자연과학기술 중점프로젝트를 쟁취할 필요가 있다고 하면서 특히 국가자연과학기술상 평의심사에 참가하면서 느낀 유감과 가장 가슴 아픈 사연이라면 조선족이 거의 없는 사실이라고 했다.

허동우연구원은 “우리 조선족은 우수한 민족이고 총명하고 재질이 있는 민족”이라며 우리는 이러한 우수성을 널리 알려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75세, 어찌보면 마땅히 건강을 챙기며 한가한 만년을 보내야 할 시기여야 하였지만 허동우연구원은 여전히 해양지질학연구를 향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있었다.


연변일보 전윤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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