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조선족연구분야의 세계적 권위》ㅡ황유복
조글로미디어(ZOGLO) 2013년8월26일 13시41분    조회:9944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황유복

황유복 략력

1966년 중앙민족대학 력사학부 민족사 전공졸업.1966년 7월부터 중앙민족대학에서 봉직.1987년 9월ㅡ1988년 12월, 미국 하버드대학 교환교수.1984년부터, 미국, 일본, 카나다, 쏘련, 몽골, 한국, 호주 등 20여개 대 학에 강의 경력.

1972년, 중앙민족대학 조선어문학과 창설. 1993년, 중앙민족대학 한국문화연구소 창설.1989년 3월, 북경조선어학교 창설, 무료로 민족어교육실시.

현재, 중앙민족대학 한국문화연구소 소장, 박사생 지도교수.중국조선민족사학회 명예회장, 연변조선족자치주 사회경제발전고문 등.주요저서: 《중국조선민족연구》, 《중국조선족사회문화의 연구》, 《Chinas Minority Nationalities》, 《중조불교문화교류사》, 《봉사도》 등 39권 출판.론문: 《The history Migration of Koreans into China》 등 200여편 발표.

《조선족이라는 명칭을 최초로 세계에 심어준 학자》, 《조선족연구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 《중-한문화교류사연구와 국제관계연구의 대가》, 이는 황유복교수의 연구분야에 한한 대한 학계의 평가, 하지만 그는 연구만이 아닌《민족과 사회 진보를 위한 학문》을 주장한, 몸소 민족학연구와 민족진보를 위한 사회실천을 병행하며 평생을 조선족사회를 위해 헌신해온《실천형학자》로 진정《겨레와 함께 숨쉬는 지성인》의 모습을 우리는 그한테서 엿볼수 있다. 그가 바로 황유복교수이다.

조선족연구 위해 민족학 학자의 길 선택

1943년 길림성 영길현 쌍하진 부근의 신농장에서 유복자로 태여난 황유복선생은 두살나던 해에 어머니까지 여의고 강인한 할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1957년 그는《반우파투쟁》을 경험하게 되면서《우리(조선족)는 누구인가?》라는 문제의 답안을 찾기 위해 중국에서 유일하게 민족사전공이 개설된 중앙민족대학에 진학하기로 결심한다.

노력의 결실로 1961년 그는 소원대로 중앙민족대학 력사학부(5년제)에 입학, 1966년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한 그는 은사의 추천으로 본 대학의 조교로 취직이 결정된다. 그러나《학문에 이르는 길》은 그렇게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10년의《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속에서 그는《나는 자유를 지향하는 아름다운 꿈과 희망을 잃지 않았기때문에 삶의 어려운 고비들을 이겨낼수 있었다.》고 회고하였다.

그가 말하는《꿈과 희망》은 단연코 《학자의 길》을 걷는것이였다. 《문혁》기간 중국인민해방군 북경군구 공병(工程兵)부대에서 2년간 《단련》을 거친 그는 1979년 사령부 정치부주임이 영급(营级) 참모로 정치부에 남으라고 면담했을 때 단연 거절하고 대학으로 다시 돌아왔으며 1979년 제5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2차회의이후 전국인민대표대회 민족위원회 처장으로 내정되였으나 그 역시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학자의 길을 고집하였다. 대학에서도 여러번 학부주임이나 학원(단과 대학)원장으로 초대된적이 있지만 그는 조금도 동요없이 사양하고만다. 그것은 그가 일찍 조선족연구를 위한 민족학학자의 길을 선택했기때문이다.

《조선족》이라는 이름을 세계에 알리기 시작

전국각지 조선족단체들의 요청으로 황유복교수는 해마다 조선족 정체성, 현황, 전망 등을 둘러싸고 특강을 하고있다.(사진은 길림성경제과학기술발전진흥총회 요청으로 장춘시에서 특강을 하고있는 장면)

1978년《개혁개방》로선이 확정되면서 황유복선생은《꿈》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조선족은 중국 56개 민족중의 하나다. 1980년대에 진입하면서 황유복교수는 조선족이라는 이름이 서방세계에서 《한민족》, 《한인》이라고 번역되는것이 달갑지 않았고《조선족》이라는 명칭을 세계에 심어놓기로 결심한다.

1984년 그가 코네티컷대학 초청으로 처음 미국에 갔을 때, 그는 뉴욕에서 개최된《제1차 해외한민족회의》에 참석해《중국에 있어서의 조선족의 실태와 그의 장래》라는 론문을 발표하였다. 그런데 그때까지 《조선족》이라는 명칭에 생소했던 현지의 신문들은 《조선족》을 모두 《한인》혹은 《한민족》으로 고쳐서 보도하였던것이다.

《세계신보》사에서 그의《조선족》관련 론문을 부탁해왔을 때 그는 《조선족》이란 이름을 고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고 1985년 1월 1일자로 《세계의 <코리아타운>을 간다(중국편)》를 발표하였다. 이 론문이 바로 미국 등 서방세계에서 처음으로 《조선족》이란 이름으로 중국조선족을 소개한 론문이였던것이다.

그 이후 1985년 조선족명칭으로 중국조선족 관련 론문이 륙속 일본에서 발표됐고 1987년 그가 미국 하버드대학 교환교수로 초청되여가면서 미국의 주요 한글신문에서 황유복교수의 요구에 따라 《조선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1980년대에서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황교수의 끈질긴 노력의 결실로 미국, 일본, 한국 등 나라들에서《조선족》이라는 명칭이 공식 사용되게 되였다.

현재까지 황유복교수는 20권에 달하는 조선족에 관한 연구저서들을 출판하였고 110여편의 조선족관련 론문을 발표했는바 국내외로부터《조선족연구의 대표적권위자》, 《조선족연구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로 평가받고있다.

또한 그는 중-한관계 관련해 무게있는 저서 8권과 론문 30여편을 발표하면서 국내외에서 《중-한문화교류사연구의 1인자》로 평가받고있을뿐더러 중국의 가장 권위있는 영문신문인 《중국일보》의 동북아국제관계평론가로 중국국가지도자들의 반도문제언론을 세계에 해독해주는 등 국제관계연구 대가이기도 하다.

조선족사회 발전 위한《일벌레》

황유복교수 발기로 1994년부터 조선족발전을 위한 학술심포지엄은 해마다 개최되고있다.(사진은 2012년 장춘에서 개최된 학술심포지엄, 당해 주제는 《조선족 문화사업과 문화산업발전》이였다.)

황유복교수에게는《일벌레》라는 별명이 따라다닌다. 평일은 물론 주말이나 공휴일이 따로 없이 너무나 많은 일들을 하고있기때문이다. 민족학연구와 민족진보를 위한 사회실천 병행, 민족을 위한 일에 부지런히 달려온 그다.

1972년, 그는 중앙민족대학에 조선어학과를 설립하는 일에 성공하였고 거기에서 3년간 《조선문학》강의를 담당하기도 했다. 1989년 황교수는 북경교육당국의 인가를 받아 《북경조선어학교》를 설립하여 무료로 조선족청소년들한테 우리글을 가르쳤다. 뿐만아니라 그는 지방도시의 요청을 받아들여 심양, 장춘, 단동, 등10개 도시에 북경조선어학교 분교를 설립하여 민족언어교육을 실시하고있는바 지금까지 24년째 무료로 운영되고있다.

199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조선족사회의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황교수는 1994년《제1회조선족발전을 위한 학술심포지엄》을 시작으로 금년까지 제18회로 조선족발전을 위한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해왔다. 매회 학술심포지엄은 조선족사회의 발전과 변화에 호흡을 맞추면서 각 분야의 석학, 전문가들과 경제인들 그리고 조선족사회의 지도간부들이 한자리에 모여 조선족공동체가 당면한 문제점들을 보다 랭엄하게 분석하고 해법을 찾는데 힘과 지혜를 모았다.

매번 심포지엄을 통해 황교수는 조선족사회의 여러가지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였으며 특히 조선족의 전면발전에서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새로운 민족문화의 창출이 가장 중요하다는것을 재확인하게 되였다. 그러한 목표를 이룩하기 위해 합법적인 NGO조직 결성이 필요했다. 그의 노력끝에 2007년 중국 국가민정부로부터 국가1급 학회인《중국조선민족사학회》설립인가를 받아냈고 2008년부터 좀 더 효과적으로 조선족발전을 위해 노력해오고 있다.

이외 한국진출의 조선족로무자들의 권익보장과 대우개선,《남호장학회》설립하여 조선족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운영난에 처한 《도라지》잡지사에 자금지원을,억울한 조선족농민을 도와 정부기관으로부터 거액의 배상금을 받아내게끔 도와준 일, 조선족농촌의 진흥을 위해 신 농촌건설, 민속촌 건설, 농촌문화산업추진, 조선족 쌀 브랜드화 등 여러가지 일들을 추진해나가고있다.

그의 삶에 짙게 깔린《생명의 원색》

《황유복교수 교육생애 45주년 기념학술좌담회》에서 국내외학자, 중앙민족대학 지도자, 제자들이 한결같이 그의 업적을 긍정함과 동시에 인격매력을 치하했다.

《일벌레》인 그는 손님이 찾아와 차 한잔하면서 이야기나누는것, 론문을 쓰다가 짬을 내여 수필을 쓰는것, 출장다녀오는것, 전화하거나 받는 것 등을 휴식이라고 한다.

1994년부터 지금까지 황교수는 매년 평균 4차례 국외 대학이나 국제학술회의에 초청되여 강의나 론문발표를 하게 된다. 강연비나 원고료 등을 계산하면 200만원 정도 된다. 황교수는 이 돈 전부를 우리말교육과 어려운 학생들을 돕는데 쓰면서 본인은 지금까지 줄곧 검소하고 꾸밈없는 생활을 하고있다. 남들은 자가용승용차를 몰고 다니는데 그는 지금도 30년이 넘는 고물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2000년《제6회 조선족발전을 위한 학술심포지엄》리셉션에서 당시 전국정치협상회의 조남기부주석은 함께 참석한 6명의 조선족장군들에게 《황교수야말로 조선족의 진정한 영웅입니다.》라고 평가하였다.

《황유복교수 교육생애 45주년 기념학술좌담회》때 민족학-사회학학원의 지도자들과 동료교수들은 이구동성으로 명예, 지위나 리득을 남들에게 양보해온 그의 초탈하고 겸손한 인품을 칭찬했다.

그의 일생에 대해 중앙민족대학 오상순교수는 《학문을 위한 끊임없는 탐구의 일생, 일편단심 조선족사회를 위해 헌신한 일생, 없는 자, 불행한 자, 약한 자를 도와주며 살아온 일생》이라고 요약하고있다.

진정 황유복교수의 삶은《민족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을 가진 학자》의 삶이고 이 역시 그의 성품이고 인격이며 그의 민족적사명감 뒤에 짙게 깔린 생명의 원색이다.


길림신문 최화기자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편벽한 변강지구에서 청춘을 불태우는 김혜영담임교원의 교육사랑 소학년 5학년 9명 《자식》들에 둘러싸인 《어머니》선생 흑룡강성 학강지구의 라북현(북위 48도 위치)은 흑룡강을 사이두고 로씨야와 마주하고있다. 이곳에 중국조선족학교로 제일 북단에 있는 학교가 있는데 그 학교가 바로 라북현조선족학교이다. 지난 ...
  • 2013-06-26
  • -흑룡강성 가목사조선족기초교육센터 현희교원의 이야기 민족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안고 그녀는 십여년간 민족기초교육에 몸담갔다. 소학교 담임으로부터 정교처 주임직을 겸하기까지 평범한 일터에서 그는 말없이 학생들을 키웠다. 그가 바로 흑룡강성 가목사조선족기초교육센터의 현희선생님이다. 일전 기자일행이 이 학...
  • 2013-06-25
  • 항일구국운동의 선구자   림민호는 1904년 1월 3일 조선 함경북도 회령의 한 빈농가정에서 태여났다. 그 이듬해에 일가는 두만강을 건너 룡정에 이주, 후에 화룡현 동성촌 고성툰으로 옮겨갔다. 1919년 룡정의 3.13반일시위 운동에서 그는 비록 열다섯살에 나는 소년이였지만 친구와 둘이서 천주교 례배당 종루에 올라...
  • 2013-06-25
  • -연변장백호랑이팀 키퍼코치 정영학씨 흔히들 축구에서의 꼴키퍼를 《최후의 보루》이자 《팀의 절반》이라 부른다. 무엇이 어찌됐든 실점을 막기 위해서는 상대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도사려야 하고 온 몸을 내던져 막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6월 18일, 연변장백호랑이팀(이하 연변팀)에서 키퍼코치로 활약하고 있...
  • 2013-06-24
  • 길림성교육계통사덕선진, 연변주우수담임교원인 화룡시제3중학교 김신옥교원의 교육사랑 학생들과 함께라면 늘 즐겁다는 김신옥선생님(가운데). 교육사업에 대한 끝없는 애착과 지칠줄 모르는 열정, 능수능란한 교수실력으로 30년을 하루와 같이 교단을 지켜온 선생님이 있다. 그가 바로 길림성교육계통사덕선진, 연변주우...
  • 2013-06-20
  • 연무전통태극권 김태익 사부를 만나다 제자들과 함께 수련하고있다 지난 6일 한국 광명시 시민체육장에서 한창 태극권을 수련하고있는 조선족 김태익 사부를 만났다. 2008년 제8차 국제태극권경기에서 태권, 태검 두 종목의 1등 수상자로 현재 한국에서 수십명의 수련자를 가르치고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서 기...
  • 2013-06-20
  • 손수 흙을 이개여 그릇을 만드는 도예가들, 우리 연변에서도 “흙으로 그릇 만드는 사람”이라고 당차게 밝히는 20대 젊은이가 현재 잔잔한 인기를 구가하고있다. 현재 연길 공원가두 발전 항달1품에서 “와이도자기공방”가게를 운영중인 박룡칠(29)씨, 곱사란 외모와는 달리 그의 손은 도자기를 빚느...
  • 2013-06-20
  • [조글로 기업탐방1] 식당 음식이 다 맛있다는 건 옛날 이야기가 되여버렸다. 우후죽순마냥 얼싸하게 늘어선 음식점가게 간판들을 보노라면 사람들은 너나없이 맛평가단이 되였다는 것을 짐작할수 있다. 팽창되여가는 우육면, 미선, 윁남쌀국수 등 면들의 치열하고 불타는 전쟁속에서도 조용하면서도 두둑하게 변치...
  • 2013-06-19
  • “저는 컴퓨터나 애니메이션 분야에 대하여 잘 모르는 무역하는 사람입니다. 우연한 기회에 지난 2003년 조선인력을 활용한 컴퓨터애니메이션제작을 시작하게 된것인데 운이 좋은지 그해부터 국가에서 저녁 6시부터 8시까지 국산애니메이션을 방영하여야 한다는 국산애니메이션육성정책이 나왔습니다. 그 정책에 힘입...
  • 2013-06-18
  • 조선어학회 항일투사 ▲ 동덕여고 앨범의 이윤재 이윤재(李允宰, 1888-1943) 선생은 일제시기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자 항일 국어학자였다. 올해는 이윤재 선생 서거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는 숭덕학교 교원시절에 3·1 운동을 주도하였기에, 평양감옥에서 1년 6개월간 옥살이를 하였다. 수양동우회에서 민족의식...
  • 2013-06-18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