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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리명철

《새둥지》건설에 기여한 과학기술전문가, 길림대학 리명철교수를 만나

2009년 국가과학기술진보 2등상을 받아안은 길림대학 리명철교수.

리명철간력:

1951년 8월 연변조선족자치주 도문시 출생.

1973년 10월 – 1981년 10월 길림공업대학 단조학부 본과, 석사연구생.

1981월 10월 –1986월 12월 길릴공업대학 단조공예연구소 부교수.

1987년4월 – 1990년 3월 일본나가오까(长冈)기술과학대학 박사연구생.

1990년 4월 –1993년 6월 일본히다찌(日立)회사 생산기술연구소 박사후 연구.

1993년 8월 –2000년 6월 길림공업대학 단조공예연구소 교수, 부소장, 소장.

2000년 6월 –현재 길림대학 단조공예연구소 소장, 교수, 박사생지도교사.

주요성과와 영예:

《중국기계공업과학기술진보 1등상》, 《국가과학기술진보 2등상》, 《발명창업상 특등상》, 《당대발명가》,《교육부 중국고등학교 과학기술 1등상》, 《중국특허금상》, 《과학기술발명상》, 《상해국제공업박람회창신상》, 《길림성기술발명1등상》 등

《중국기계공업과학기술전문가》, 국무원의《특별수당금향수자》, 교육부 《우수인재양성계획》의 인물, 전국 《백천만인재공정》 첫패의 인물, 《길림성중진(资深)고급전문가》, 《길림성걸출창신창업인재》, 《길림성우수전문가》, 《길림성돌출기여전공기술인재》등 선정.

리명철교수가 실험실에서 다점성형설비의 펀치를 살펴보고있다.

2010년 4월 22일에 국가과학기술부, 국가지적재산권국, 중국과 학기술협회 등에서 주최한 중국 제5회《발명창업상》시상식이 북경인민대회당에서 성황리에 개최되였다. 그때 수상자중에서 특등상을 받고 또한 《현대 발명가》의 칭호를 얻은 학자 한분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가 바로 중국장비제조기술의 기적을 창조하고 선진국에서도 이루지 못한 꿈을 현실로 만든 길림대학 단조공예연구소 소장이며 박사생 지도교사인 리명철(1951년 출생)교수였다. 이번 대상은 그를 비롯한 연구팀이 2009년의 국가과학기술진보상 2등상과 2010년의 중국특허금상에 이어서 획득한 또 하나의 커다란 영예였다.

중국장비제조기술의 기적으로 불려진 《판재무금형다점성형장치》의 기술원리는 우리 나라 4대 발명중의 활자인쇄술과 비슷하다. 《전체》를 여러《부분》으로 나누는 방식에 따라 전통적인 주형을 반복적으로 사용할수 있는 여러 부분으로 나누고 그 배렬을 조절함으로써 수요하는 곡면을 만든다. 도리는 쉬우나 이 기술을 파악하기까지 리명철은 연구팀과 함께 20년의 분투사를 땀으로 엮어왔다.

탐구의 길에 나서다

리명철과 그의 연구팀 팀원들이 함께 성공을 경축하고있다.

1973년 여름, 길림공업대학의 단조학부에 20여살의 조선족청년이 새로 들어왔다. 보통 키에 안경을 썼고 눈빛이 고요하고 태도가 점잖았다. 그 청년이 바로 리명철이였다.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도문시의 궁벽한 작은 마을에서 태여난 그는 초중 1학년까지만 다녔고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농촌의 생산대에서 회계를 맡았다. 그의 아버지는 철도부문의 말단간부이고 어머니는 명예퇴직한 간부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기에 어머니가 혼자서 허약한 몸으로 그와 그의 남동생 셋을 키웠다. 리명철은 반에서 말쑤가 적고 늘 교실 또는 도서관의 한 구석에서 열심히 책을 보는 가장 평범한 학생이였다. 부지런하고 생각이 깊고 책을 탐독하였기에 그는 친구들로부터《로박사》란 별명을 얻게 되였다.

지난 세기 80년대말부터 90년대초까지 리명철은 일본에서 박사과정을 밟았고 박사학위를 따낸후 일본의 한 생산기술연구소에서 박사후과정을 밟았다. 그때 일본이 세계 조선업을 주도했고 거의 50%에 달하는 국제조선주문서가 일본의 조선소로 날아갔다. 그러나 전통조선공예에 따른 저효률이 일본 조선업의 발목을 잡았다. 이 기술난제를 풀기 위해 당시 국제적으로 이름난 여러 연구소 및 대학에서 해결방안을 모색하였으나 성형과정에서의 관건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전망이 별로 밝지 않았지만 한창 일할 나이의 리명철은 의연히 다점성형기술의 연구개발에 뛰여들었다.

다점성형기술이 새로운 기술인데다가 성공할 가망도 보이지 않아 많은 사람들의 중시를 받지 못하였기에 리명철은 필요한 연구경비를 얻기가 어려웠다. 친구들이 여기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고 권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1992년에 리명철은 일본에서 발표한 학술론문에서 그가 연구하고있는 기술을《판재다점성형법》이라 명명하고 동시에 세상에 첫 실용형 무금형다점성형압력기를 내놓음으로써 전문가들의 꿈을 현실로 만들었다. 이때 일본의 기업에서 그를 높은 보수로 정중히 청하였지만 그는 사양하고 가족과 함께 조용히 짐을 꾸리고 조국으로 돌아왔다.

혁신의 길에 나서다

리명철의 연구팀이 다점성형기술로 만든 《복제얼굴》.

그때의 조건으로 국내에서 과학연구를 하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처음에는 연구실에 첨단설비는 고사하고 편한 탁자와 의자조차도 없었으며 486데스크톱 컴퓨터를 사용하였다. 모든것이 일본의 과학연구조건과 비길수가 없었다.

잇달은 도전앞에서 리명철은 연구팀을 구성한후 팀원들을 이끌고 굳센 의지와 과학정신으로 조금씩 혁신하며 완전한 기술을 연구해내기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늘 일에 빠져 자신의 신체를 돌볼 여유가 없었다. 어느 한번 건강검진에서 그의 창자에 용종 3개가 자라고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로 수술을 받은 그에게 의사는 사흘안에 내출혈이 일어나지 않도록 움직이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그러나 안해가 퇴근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리명철은 이미 실험실에 몸을 담았고 방안은 텅 비여있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여러해동안 탐구하고 사고하고 실천을 거듭한 끝에 2001년에 리명철과 그의 연구팀은 국내의 첫 무금형다점성형압력기를 만들어내고 우리 나라 첫 고속렬차의 앞부분 덮개부품의 가공에 부대설비를 제공하였다. 시장을 개척하고 이 기술에 대한 제조업의 인정을 받기 위해 리명철과 팀원들은 거의 모든 학술회의와 주형전시회. 선반전시회 등에 참가하였다. 회의에 직접 참가하지 않고 설비를 전시회에 보내기만 하면 되는 경우에도 그들은 여전히 긴장을 풀지 않았다. 2002년에 연구팀은 북경첨단기술박람회 및 국제선반전시회에서 전시할 시제품을 만들었다. 그러나 북경으로 운송해가기 전날에 시제품의 각 기본구성부품과 관련된 컴퓨터프로그램에 문제가 있다는것이 발견되였다. 그날 저녁 6시부터 이튿날 아침 8시까지 그들은 기본구성부품을 뜯어내고 프로그램을 새로 작성한후 설비를 제때에 북경행 기차에 실어놓았다. 리명철을 비롯한 연구팀은 1993년부터 《판재류 부품의 디지털성형기술》의 연구개발과 특허신청작업을 늦추지 않았다. 관련기술은 국가 《863》 첨단과학기술계획, 국가중점과학기술난제해결계획, 국가자연과학기금 등 20여개 국가 및 부급, 성급 과학연구과제의 지원을 받았고 유럽련맹제6기본협정에서 언급한 협력프로젝트의 지원도 받았다. 그들은 도합 30여개 발명특허를 신청, 이중 18개 항목이 특허권을 받았으며 또 PCT(특허협력조약)를 통해 미국, 한국, 일본과 유럽에서의 국제특허보호도 3개 항목을 신청, 이중 1개 항목이 미국특허권을 얻었다. 연구팀은 이 기술을 중심으로 많은 특허를 신청하여《특허풀》을 구축함으로써 관련 기술이 전면적으로 보호되고 보급될수 있도록 튼튼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지금까지 연구팀이 연구개발한 세계에서 상품으로서의 첫 다점성형기 및 자주적지적재산권을 가진 10여가지 무금형다점성형장비들은 이미 고속렬차, 현대건축, 비행기, 선박, 의학 등 많은 분야에 응용되였고 관련 제품들도 국외로 판매되였다. 이는 당해 기술의 응용기술분야에서의 발명창조수준을 충분히 보여주고있다.

《새둥지》건설에 기여하다

무금형다점성형기술을 리용하여 건설된 북경올림픽 주경기장의 《새둥지》.

비록 기술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지만 리명철을 비롯한 연구팀이 크게 인기를 받게 한 항목은 세인의 주목을 받은 북경올림픽 주경기장인《새둥지》였다.

2005년 6월의 어느 하루, 리명철은 인터넷에서《새둥지》건설에 일부 국제성적인 기술난제에 부딪쳤다는 보도를 무심결에 보게 되였다. 난제중의 하나가 바로《새둥지》의 강판부품의 성형문제였다. 리명철은 그들의 연구성과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고 즉시 시공사인 절강정공강구조유한회사와 련락을 취하도록 사람을 파견하였다. 절강정공에서도 관심을 보이며 연구팀더러 먼저 실제부품의 3분의 1을 모형으로 만들어보라고 요구하였다. 이것이 쉬운 일은 아니였다. 《새둥지》에 쓰이는 강판은 두께가 10미리메터에서 60미리메터 사이이며 곡률도 같지 않아 모양이 아주 복잡하였다. 그러나 리명철을 비롯한 연구팀은 이미 다점성형기술을 파악하였기에 며칠만에 모형을 만들어냈다. 이에 절강정공은 감탄을 금치 못하였고 쾌속조정다점성형설비 한대를 주문하고 2개월내로 납품하도록 재촉하였다.

중국 백년의 올림픽 꿈을 실현하고 중국의 주요건물을 건설하는데 기여한다는 점에서 이번 기술난제해결의 의의를 가히 짐작할수 있다. 리명철은 연구원들을 이끌고 밤낮으로 연구한 끝에 끝내 설비를 앞당겨 제작해냈다. 전통적인 조선기술로 모양이 복잡한 강판을 만들려면 하루나 이틀이 걸려야 했지만 리명철의 연구팀에서 연구개발한 설비로 십여분이면 충분했다. 또한 무금형다점성형기술로 만든 강판은 모양과 사이즈가 아주 정확하고 조립, 용접에 아주 쉬우며 표면이 반드러움 등 높은 질을 확보하였다.

품평회에서 북경의 전문가들은 절강정공에서 건설한 《새둥지》를 높이 평가하면서 찬탄을 아끼지 않았고 특히 리명철을 비롯한 연구팀을 《시간이 가장 짧았지만 가장 높은 질을 보장했다》고 극구 칭찬하였다.

리명철교수가 품평회에서 발언하고있다.

20년을 하루와 같이 연구한 보람으로 리명철은 선후로《중국기계공업과학기술전문가》, 국무원의《특별수당금향수자》, 교육부 《우수인재양성계획》의 인물, 전국 《백천만인재공정》 첫패의 인물, 《길림성중진(资深)고급전문가》, 《길림성걸출창신창업인재》, 《길림성우수전문가》, 《길림성돌출기여전공기술인재》로 선정, 《중국기계공업과학기술진보 1등상》, 《교육부 중국고등학교 과학기술 1등상》, 《과학기술발명상》, 《상해국제공업박람회창신상》, 《길림성기술발명1등상》 등 영예를 받아안았으며 국내외에서 발표한 《다점성형장비개발》에 관한 론문만도 230여편에 달한다.

동시에 그는 사회 각 분야의 인정도 받게 되였는바 지난 2013년 20일엔 길림성조선족경제과학기술진흥총회, 중국조선민족사학회와 중국국제방송국 동북아중아센터, 흑룡강신문사, 료녕조선문보, 길림신문사, 연변텔레비죤방송국 등에서 공동주최한 시상식에서 개혁개방과 현대화건설에 기여가 큰 20명 《감동중국 조선족걸출인물》중의 한사람으로 평선되였다.

영예를 안으면서도 그는 여전히 겸손한 태도로 《영예는 나에 대한 고무격려와 편달입니다. 제가 걸어야 할 앞길은 아직 멉니다.》라고 차분하게 말한다.

리명철교수를 비롯한 연구팀이 과제를 연구하고있다.

 

길림신문 신정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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