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가수 박혜자 '탄탄한 가수가 될거에요!'
조글로미디어(ZOGLO) 2016년2월19일 22시47분    조회:6818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박혜자

[청춘은 예쁘다]박혜자 “중국농민가요대회” 내 꿈에 대해 확신 열어준 곳, 탄탄한 가수가 될거에요!”


오디션에 참가했던 기억을 이야기하고 있는 혜자양

설명절 연휴기간이였던 정월 초닷새날, 길림성 연길시공안국신고쎈터 골목에 위치한 한 카페에서 혜자양을 만났다. 설명절 기간에도 혜자양은 변함없이 무대에 올라 “TOP ENTERTAINMENT”를 찾아온 손님들에게 멋진 노래를 선물하느라 바삐 보냈다. “중국농민가요대회”에 참가해 얼굴을 널리 알린 혜자양이였지만 전과 다를바없는 평범한 무대생활에 충실하고 있었다.
1년전 이맘때도 그랬다. 밤무대에서 노래를 하고있는 혜자양에게 생각지도 않게 기회가 찾아들었다.

설명절기간 “TOP ENTERTAINMENT”에서 손님들에게 멋진 노래를 선물하고 있는 혜자양

[박혜자] “같이 일하는 선배분께서 저를 추천해 주셨습니다. 안휘 위성텔레비죤방송국 프로듀서가 농민가요대회 참가자를 찾으러 연길에 왔다는 것이였습니다. 어느날 그 프로듀서님께서 정말로 저를 찾아와서 출전할 의향이 없냐고 물으시더군요. 처음엔 거절했죠, 그러다가 그분의 권고대로 록음을 하고 동영상도 찍고 하다보니 점차 마음이 동하더라고요. 그렇게 영상물과 록음자료들을 제작해서 보냈어요, 그쪽 총감독님이 마음에 들어한다는 소식에 참가하기로 결정했어요” #

제5차 중국농민가요대회 대기실에서 출연진과 함께

혹여 시간랑비가 아닐가, 위험하진 않을가 많이 망설였지만 이런 큰 대회에 한번쯤 참가해서 경험을 쌓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에 혜자양은 과감히 안휘행을 택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 안휘 위성텔레비죤 공개방송홀에는 혜자양의 상상속 그 화려한 무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주로 조선족 청중들을 대상으로 노래를 불러왔던 혜자양이 한어말 노래를 단시일내에 소화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였다. 워낙에 아는 노래가 몇곡 없었던터라 출전을 위해서는 담당 지도원의 추천곡을 그때그때 받아서 짧은 연습시간동안 바로바로 흡수해야 했기 때문이였다.

[박혜자]

아는 한어말 노래가 없다보니 담당 지도원에게서 추천받은 노래를 해야 했습니다. 그때그때 받아서 배우다보니 가사를 외우기가 가장 어려웠습니다. 대회가 시작되기 전까지도 저의 지도원은 손에 땀을 쥐였었죠. 저도 자신이 없어하고 그 분도 연습 무대에서 자꾸 실수하는 저를 보면서 확신을 갖지 못한 상황이였습니다. 리허설이 시작되기 전이였습니다. 현장 감독님들이 저에게 ‘모두 너의 편이다’라는 말을 해주셨습니다, 얼마나 힘이되던지…” #

리허설 무대가 아닌 정식 무대에 올라 전주곡이 흐르던 그때 혜자양은 어떤 생각을 했을가?

1라운드 대결에서 “꿈처럼 자유롭게”를 열창하고 있는 혜자양

[박혜자] “일단 가사를 틀리게 부르지 말아야지 생각했습니다, 가사가 틀려서 주위사람들에게 실망을 주는 일은 원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눈을 감고 지도원이 가르쳐준 사항들을 념두에 두고 노래를 시작했습니다. ‘꿈처럼 자유롭게’라는 노래였는데 가운데 우리말로 번역해서 부르게 되였어요, 그 부분에 이르니 시름이 확 놓이더군요. 그래서 눈을 떴는데 관중들의 큰 환호성을 받았어요, 심사위원들의 밝은 표정도 눈에 들어왔고요. 긴장이 완전히 풀렸습니다. 2차 대결 때는 400명 가까이되는 관중들이 저의 이름을 불러주더군요, 탈락했지만 참 감동적인 순간이였습니다. 눈물이 절로 나더라구요. (웃음)” #

꽃파는 혜자양 ^^

오디션기간에 대결과 연습에 치이다 보니 고향의 분위기도 잘 몰랐다는 혜자양, 자신을 응원해주시는 분들이 많았다는 것도 나중에서야 알았다고 했다. 혜자양은 노래를 전문적으로 배운적이 없었다. 주위 선배님이나 동료들의 노래하는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면서 거기에 자기만의 색갈을 넣어 따라부르는 게 전부였다.

[박혜자] “정말 노래를 잘 하고 싶은 데 목이 자꾸 쉬고 아프고 하니까 심할 때는 혼자서 운적도 있습니다. 그런 저를 보면서 주위 선배님들께서 조언해주셨고 저도 자주 그분들께 가르침을 청했습니다. 한때는 근처 선배님을 찾아서 록음을 해보기도 했죠.” #

저의 유년기는요~

중학교시절부터 노래를 전문적으로 배우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반대가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갈등끝에 연변대학 예술학원 음악교육학과에 진하기로 최종 합의를 보았지만 혜자양은 음악교육 역시 자신의 진로가 아님을 깨달았다.

작은 체구에서 어떻게 그런 담량이 나왔을가. 대학시절 혜자양은 학업을 접고 무작정 중국음악학원을 찾아갔다. 단순히 자신의 노래 기질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제1차 중국농민가요대회 전국 순회탤런트쇼에서 유명 기타리스트랑

[박혜자] “아무 사람도 모르는 상황에서 무작정 찾아갔습니다. 중국음악학원에 도착해서 보안일군의 안내를 받아 교무처로 갔습니다. 목소리를 검증받고 싶어서 왔다고 저의 의사를 이야기했죠. 그랬더니 저를 음성 정밀검사실로 데리고 가는거에요. 저처럼 저음을 내는 사람은 리론상 키가 아주 크거나 목이 길어야 하는데 저는 정반대였거든요. 검사결과 다행히 이상은 없었습니다. 일단 목소리는 인정받았으니 다시 연변대학 예술학원으로 돌아와서 음악표현 학과에 재입학하려는 희망을 안고 말이죠.”

그렇게 다시 연변대학 예술학원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현실은 또 그게 아니였다. 음악교육학과에서 음악표현학과로 바꾸기엔 여러가지 제한 사항들이 많았고, 그래서 혜자양은 다시 음악교육학과에 재입학해 어머니의 당부대로 음악교육 학위를 수여받았다.

예쁘게 봐주세요!

얼핏 보기에는 달라진 게 없는듯 보였지만 오디션에 참가한 6개월간 혜자양은 많이 참 성장했고 28년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간들을 보냈다. 하지만 “득” 뒤에는 늘 “실”이 따르기 마련이라고 혜자양은 말한다. “몰라도 되는데 알아지는 것”이 많았다면서 혜자양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박혜자] “대회에 참가하기 전과 비교했을 때 제가 많이 소심해졌다는 생각이 들어요. 많은 분들이 저를 알아봐 주시고 관심을 가져주는 건 너무 고마운데 또 한편으로는 이런 이야기도 돌더라구요. ‘대회에 한번 출전하더니 이러쿵 저러쿵 …’ 너무 평범한 삶을 살아온 저에겐 너무 큰 스트레스로 다가왔습니다. 제가 그렇게 크게 뜬 것도 아니고 ㅋㅋㅋ 시간이 지나면 점차 나아지겠죠, 그래도 저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분들이 더 많다는 게 고마울 따름입니다.” #

저의 아빠에요!

힘겹게 지켜온 꿈에 날개를 달아준 “중국 농민가요대회”의 잊지못할 추억들을 회상하며 혜자양은 꿈너머에 자리한 아름다운 날들을 이야기했다.

[박혜자] “ ‘중국농민가요대회’ 같은 큰 무대에 기회가 된다면 또 한번 참가하고 싶습니다. 요즘따라 왠지 자꾸 그때의 그 감동과 짜릿함을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습니다. 엄마, 아빠가 한국에 계세요, 음악으로 어떻게든 성공을 해서 하루 빨리 부모님과 함께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2015년 저의 노래를 많이 사랑해주시고

또 저를 많이 응원해주셔서 너무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더 좋은 모습 보여드릴테니까요 기대해주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감사합니다!”

글/구서림 사진/ 리향화 
중앙인민방송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일전 길림성 영길현 구전수리전업1국에서 근무하다 정년퇴직하였다는 김기영씨(71)가 불편한 몸으로 기자를 찾아왔다. 두툼한 자료봉투를 꺼내놓으며 털어놓는 사연인즉 독립군의감(醫監)출신인 부친 김환(金煥)의 독립투쟁경력이 해빛을 보게 해달라는것이였다. 본인의 조사자료와 한국, 연변대학 등지에서 수집한 문헌자료...
  • 2005-12-15
  • [원제: 동심에 살던 그 시절이 그리워] 일찍 중국선진생산자의 일원으로 중국군영회(群英會)에 참가하고 소수민족대표로 주은래 등 중앙지도자들의 접견을 받았던 최윤복로인(76세)은 근 반세기가 지난 오늘이지만 그때의 그 영광이 새삼스럽기만 하단다. 최윤복은 1948년에 화룡중학교를 졸업하고 18세의 어린 나이에 화룡...
  • 2005-12-14
  • 중국 일류 대학생들의 선두인물 권정 김호림ㅣ중국국제방송국 기자 jinhulin@hanmail.net 권정(權靜), 그 이름에 사람들은 거개 생소함을 느낀다. 그러나 북경 대학입시 수석합격자라고 하면 대뜸 “아, 그 애 말이예요”하고 저마다 엄지손가락을 내밀군 한다. 북경에서는 2000년에 아주 드물게 2000년에 대학입시성적 성적...
  • 2005-12-14
  • [한겨레] 말총머리 휘날리며 날카롭게 상대를 쏘아보던 자오즈민. 2.5g짜리 탁구공 하나의 마술로 세계를 제패하며 중국 마녀군단의 선봉에 섰던 그는 1989년 한국 남자탁구 국가대표 안재형(41)과 결혼해 큰 화제를 뿌렸다. 한국과 중국이 적대국이었던 시절, 이 둘은 탁구를 통한 ‘이념과 국경을 초월한 사랑’으로 모두...
  • 2005-12-10
  • 장백조선족자치현 십이도구진 십이도구촌의 리병권농민은 북오미자재배로 치부의 길을 개척하고있다. 올해 49세인 리병권농민은 2003년에 과전현 등지에 가 자비로 북오미자재배기술을 배운후 퇴경환림으로 지난해 촌의 42무에 달하는 다락밭을 도급맡았다. 그는 선후로 9만여원의 자금을 들여 외지로부터 당지 기후에 적합...
  • 2005-12-08
  • [원제:김부인모피복장회사 신장 개업] 조선족 기업가 최명철씨가 총경리를 맡고있는 김부인모피복장회사가 지난 2일 할빈 도외구에서 성대한 의식을 가지고 신장개업에 들어갔다. 40여년이란 오랜 력사를 가지고 있는 김부인모피복장회사는 최근 년간 미국, 한국, 일본 등 나라들을 비롯한 국내외 수십여개 모피복장유명회사...
  • 2005-12-08
  • 한 평범한 가정주부가 연구 발명해낸 “일종 대퇴골괴사치료약물 및 그 제법”이 국가발명특허를 따내여 린근의 주의를 끌고 있다. 훈춘시에 거주하고있는 김영자(50세)는 다년간의 투병중 꾸준히 병마와 싸워가며 자기 몸을 제1실험실로 삼아 마침내 국가특허약물을 연구발명하기에까지 이른 것이다. 18살 꽃나이시절에 그...
  • 2005-12-08
  • 가렬처절한 조국해방전쟁에서 두손을 잃었으나 《이 생명 다할때까지 혁명하겠다》는 호언을 남겼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퇴역해 한생을 묵묵히 농업생산에 종사한 이가 있다. 그가 바로 전국군인모범으로 주덕, 주은래의 접견을 받았던 리수봉(78세)로인. 유소년시절부터 심양, 할빈 등 지를 류리걸식하던 리수봉씨는 1945년...
  • 2005-12-07
  • 우리 민족이 북방지역 벼재배력사를 개척한지 120여년이 되는데 그동안 북방입쌀 생산, 발전에 불후의 기여를 하고 많은 시대적과학기술일군을 배태시켰다. 20세기말 특히는 시장경제가 활성화하여 입쌀미질경쟁이 치렬할 때 국가특수대우향수자이며 길림성농업과학원 김윤주(지금 김심인이라 부름)연구원은 세계에서 처음으...
  • 2005-12-06
  • 12월 4일 제5차 《전국법제선전일》을 맞으며 2005년 《년도10대법제인물》 평선결과가 발표되였다. 이들로는 허문유: 료녕성공안청 형사정찰총대 대장 형사경찰의 본보기. 동려화: 공익변호사 약자의 권익 수호자. 진건교: 호남성인대 대표 마음은 언제나 민중과 함께. 중국법률원조기금회: 약세군체를 위해 소송을 걸고 자...
  • 2005-12-06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