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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5)- "일본은 '빵굴라'"
조글로미디어(ZOGLO) 2005년10월24일 14시07분    조회:1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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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기 일가는 길림시 교외의 가반가에 눌러 앉았다. 길림시에서 서북쪽으로 공장구역-하다만을 지난 송화강 나루터를 지나면 불과 십리도 못 되는 시골이었다. 일명 북길림이라 했다. "길림시에서 동쪽으로 이십 리를 가면 신길림이 있었죠. 일본인 마을이었지요. 만주석유회사도 있고, 잘사는 동네였습니다. 신길림에 사는 일본인은 1등 국민. 북길림에 사는 조선인과 중국인은 2등 신민이라 했지요." 소학교(초등학교)때 김 철은 '똘똘한 학생'이었다. 한번은 동급생 둘과 함께 썰매를 타려 신길림에 갔다. 거리에서 젠자이(팥죽)을 사먹는 데 지나가던 일본 애가 괜히 시비를 걸었다. "고노야로 조센징!(요 놈의 존선놈)" 이도 모자랐던지 느닷없이 김 철의 뺨을 후려쳤다. 또한 젠자이 컵에다 '쿠사이(더럽다)'라며 침을 뱉은 후 빼앗아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김 철은 더는 참을 수 없어 고시나게(유도의 '허리 뜨기')로 냅다 박고 튀었다. 일본인들은 '조센징(조선인)이라 하다가 나중엔 '조'는 빼고 '센징'이라 했다. 일제의 창씨 개명 서슬에 김 철은 가나우리 류소(金海 龍煥)가 된다. 소학교 6학년 때. 스트라이크(동맹 휴학)주모자가 된다. 일본에 아부하는 교장을 쫓아내자고 했다. 결국 무기정학을 당한다. 이때 학질에 걸려 생사를 헤매기도 했다. 1945년 8.15광복. 모두들 '일본은 빵굴라'라 했다. '빵굴라'는 일본식 표현으로 '빵구 났다'즉. 구멍이 뚫렸다는 것인데 '망했다''무너졌다'는 의미였다. 광복의 기쁨도 잠깐이었다. 국민당과 공산당이 대치하는 내란이 터졌다. 김상기 일가는 다시 유랑 길에 올랐다. 북으로, 북으로 갔다. 한 달을 걸어 목단강에 이르렀다. 그 곳에서 '고향으로 가는 남행 열차'에 올랐다. 열차 안에서 누군가는 '간다간다 떠나간다 안개 속의 그 항구..'라는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남행 열차는 노송령에서 사고 말았다. 고향은 꿈길에서만 머물고 말았다. 다시 용정으로 갔다. 고단했다. 가진 것 없는 자는 어딜 가나 마찬가지였다. 김 철을 아버지와 함께 품팔이도 해야만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었다. 아버지는 그 가난한 중에도 아들을, 민족투사들의 요람-대성중학교에 넣었다. 어머니를 따라 떡 장사도 하고 나무꾼 노릇을 하느라 일쑤 수업을 빼먹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용정에선 끼니가 간데 없었다. 어머니까지 장사를 했지만 여섯 식구의 창자는 늘 썰렁했다. 다시 흑룡강성 해림현 신안진 '우바거우'로 옮겨갔다. 무서운 산골이었다. 마을의 곰보 가수-영삼 아저씨는 김 철의 우상이었다. 가수가 되고 싶었다. "아저씨, 저도 가수가 될 수 없나요?" "네가 가수 되면 내 밥통이 떨어지는데…." 다음날 그를 따라 늑대바윗골 폭포로 갔다. 폭포에 대고 노래를 하라 했다. 세 번목에서 피가 터지면 명가수가 된다고 했다. 두 번째 목에 피가 터질 무렵, 잔칫집에서 먹은 막걸리 때문에 아예 목이 닫혀 버렸다. 가수는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말았다. 대성중학교에 몇 개월 다닌 푼수로 소학교 훈장질까지 했다. 다시 신안진 중학교에 들어갔다. 추석 운동대회에서 마라톤 대회에 나가 1등을 했다. 목단강 고급중학교에 다닐 때는 목단강시 마라톤대회에 1등, 다시 전 동북지구 운동대회에서 2등을 했다. 이는 소학교 때, 30리 길을 내달린 게 바탕이 된 것이다. 1950년. 한국 전쟁 때, 목단강 고중 학생이었다. 지원군이 된다. 학생복 차림으로 심양 소가툰 역에서 군용열차를 탄다. 제3야전군에 배속됐다. 문예공작반 무용수가 된다. 11월말. 눈보라 사나운 압록강 변. 집안에서 비밀리에 강을 건넜다. 앞은 만포진. 전선에선 'B 29'미군 폭격기가 가장 무서웠다. 하루 2백 리 강행군. 함경북도 삼수갑산 근처인 류담에서 미 해군 제1사단과 맞닥뜨렸다. 영하 38도의, 엄동설한이었다. 방한화나 털모자도 없이, 우등불도 못 피우고 밤을 샜다. 눈보라 속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그곳에서 뜻밖에 존경하는 시인 조기천을 만났다. 이때 러시아의 '사바케 댄스'가 유행이었다. 러시아 10월 혁명 때 소련 홍군이 추던 춤이다. 전 지원군 예술 콩쿠르에 김 철의 무용창작극 '공병무'가 1등을 한다. 이어 북경 전인민해방군 예술대회에도 참가, 역시 1등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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