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김봉관- 반세기 교향곡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5월22일 11시05분    조회:7169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1

흔히 기자들을 일컬어서 발로 뛰는 사람들이라 칭한다. 견문이 많아야 현장감이 있는 신문기사를 많이 써낼수 있다느 말로 풀이된다.  하지만 음악가가 발로 뛴다면 보편적인 통념을 거부할수도 있다.

그런데 이 통념을 깨친 음악가가 있는데 그가 바로 《중국조선족민 간음악집》(이하 음악집으로 략함)을 펴낸 김봉관음악가다. 이 음악집에는 음악가가 50여년동안 수집, 정리한 1050수의 민요작품들이 수록되여 있는데 수학적인 개념이 작동하는 계량단위에서 1050쪽이라는 부피보다도 4키로그람이란 무게로 정의해보면 정답이 나올듯도하다. 책을 무게로 계산하면 무식이 파도친다고 비난할수도 있는데 이 책을 받아들 때 첫 느낌이 지나칠 정도로 무겁다는것이다. 그만큼 이 무게에 정비례되게 작가의 심혈이 깃들어 있다면 독자들은 그제야 깨도가 될것이다. 장장 반세기동안 수집했고 작가가 6년동안 정리하고 오선보에 올리기까지 그야말로 아라비안나이트 같은 이야기 전설이 숨어 있다.



2



선사시대로부터 시작된 우리민족의 민간음악은 구전력사가 길고 그 수가 많고 전파령역이 넓은것이 특징이다. 민간음악은 선률적인 측면에 서는 우리민족음악의 기초이고 가사적인 측면에서느 민족시가가 그 모체로 된다. 구슬도 꿰여야 보배라고 민간에 산적한 민간음악은 발굴해야 그 가치가 발휘된다.

건국후 자지주정부는 많은 인력, 물력을 투입하여 민간문예를 수집,정리하게 했는데 민간음악도 이 시기부터 발굴되고 정리되기 시작했다. 자치주제1임서기 주덕해는 “불끄러 가는 소방차의 속도로 민간예술발굴, 정리 사업을 다그치라” 고 호소했다. 때를 맞추어 1961년 국가문화부와 중국음악가협회에서 련합통지를 발부하여 국가적인 범위에서 문간문예 정리 사업에 사업에 힘을 실어주었다. 이 시기가 첫번째 정리시 기였는데 김봉관음악가는 이 시기부터 정리사업에 참가했다. “연변문간 문예연구소조”가 발족되면서 《가야금곡집》과《조선민가집》이 내부자료 등사본으로 5집까지  편찬되였다. 하지만 가석하게도 문화대혁명시기에 분실되거나 소각되였다.

1978년 국가문화부. 국가민족사무위원회와 중국음악가협회의 “2000년 까지 중국의 예술집성을 완성할데 대한 지시” 정신에 따라 연변에서는 6인음악발굴소조를 발족시켰다. 당시 이들의 설비라야 고작 새장구하나와 “601”표 카세트록음기한대, 록음테프 4개가 고작이였다. 이때로부터 두번째로 시작한 민간음악 발굴사업 강행군이 시작되였다. 김봉관음악가는 당시 39세였는데 6인조에서 제일 나이가 어린지라 20키로그람이나 되는 새장구를 메고 하루에 20-50리씩 걸어다니기가 일쑤였다. 마을에 찾아가면 로인회관에(당시는독보조)찾아가 먼저 술상을 차리고 오락을 이끌어내면서 민간예술인들의 참여를 유도했다. 당시 정리사업에 참가했던 6명가운데서 김봉관음악가만은 술을 마실줄 몰랐는데 록음, 기보, 정리 사업은 당연히 김봉관음악가의 몫이였다.

현재까지 연변에서는 도합 세차례에 달하는 민간예술발굴사업을 진척 시켰는데 김봉관씨는 세차례의 발굴사업에 다 참가한 음악가로 남았다. 이 시기부터 연변의 문화일군인들은 국내의 250여개 현시와 650여개의 마을(지점)을 답사했고 만여명에 달하는 민간예술인들을 방문했고 3000여 수에 달하는 민요, 판소리를 청취했고 그 중에서 1000여수에 달하는 민간 음악작품을 발굴 정리했다.


3



김봉관음악가는 올래 70세인데도 컴퓨터를 능란하게 다룰줄 알고 음악소프트웨어를 능란하게 사용한다. 하지만 이렇게 되기까지 그야말로 눈물나는 사연이 깃들어 있다. 도합 세차례에 정리사업에 참가한것만치 김봉관음악가의 손에는 방대한 자료가 남아 있었다. 2002년도에 이런 소식 을 입수한 한국충북대학으로부터 한국에서 출판할 의향을 전해왔다. 이때로부터 1년반동안 출판에 넘길 음악원고를 정리하였다. 정리한 원고꾸 레미를 메고 한국으로 나갔는데 출판사측에서 손으로 옮긴 음악원 고(오선보가 부착된 원고)는 채납할수 없다고 했다.컴퓨터에 입력했다가 다시 이동하드로 출력한 원고를 쓴다고 했다.

“내 인생에서 제일 부끄러운때가 바로 그 날이였습니다. 컴퓨터를 모른다는 말이 왜 그리도 얼굴이 달아 오르던지” 김봉관음악가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감개무량한 표정을 보였다. 집으로 돌아 온 후 중고컴퓨터를 얻어 컴퓨터 공부를 시작하면서 다시 일년동안 1500수를 컴퓨터에 입력했다. 이제 남은 7곡만 입력하면 완성되는 판에 음악소프트웨어 가 기능을 잃으면서 오선보가 하얗게 되고 긴 오선보만 한줄 달랑 건너가는 현상이 나왔다. 너무 애가 타서 전문가들을 찾아 다녔는데 모두가 모른 다고 했다. 마지막에 심양에 찾아가 전문가의 도움을 청했는데 전문가는 소프트워 문제가 아니라 낡은 컴퓨터의 하드웨어가 문제라고 회복할수 없다고 도리머리를 저었다. “하늘이 노랗게 보인다”는 말은 이런 겨우를 두고 생긴 말이다. 새 컴퓨터를 사고 다시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컴퓨터에 입력한 후 다시 이동하드에 다시 입력했는데 이번에는 손녀가 이동하드에 유희프로그램을 다운받으면서  하드에 정착한 음악소프트웨어와 이동하드 까지 고장냈다. 또다시 처음부터 시작했다. 이렇게 간신히 완성하여 한국 으로 다시 나갔는데 출판사측에서 보더니 오선보가  한국의 “휘날레” 판본 이 아니고 “앵콜”판본이라 사용할수 없다고 했다.

재기의 의욕도 바야흐로 잃어가는데 어느날인가 주당위선전부 채영춘 부부장과 주문화국심수옥국장이 김봉관음악가를 찾았다. 이렇게 되여 김봉 관씨가 50년동안 심혈을 기울인 《음악집》이 고고성을 터지면서 출판 되였다. 남희철교수의 말대로《음악집》은 “진, 선, 미” 를 골고루 갖춘 책이고 중국조선족 음악의 가장 보귀한 책으로 남았다.


글/사진 최국철 허성기자

연변일보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미시간 대학을 졸업한 강유진 군은 2005년 재학시 앤아버 시의원직에 출마했다가 낙선했지만 3년만에 의원보다 더 나은 대통령 특별보좌관이라는 위치에 올라서게 되었다. 강 군은 지난해 11월 10일 비행기에 오르면서 오바마 후보가 강유진 군의 등을 치며 격려하는 사진과 12월 21일 하와이에서 대통령 당선자와 골프...
  • 2009-05-26
  • 1흔히 기자들을 일컬어서 발로 뛰는 사람들이라 칭한다. 견문이 많아야 현장감이 있는 신문기사를 많이 써낼수 있다느 말로 풀이된다.  하지만 음악가가 발로 뛴다면 보편적인 통념을 거부할수도 있다. 그런데 이 통념을 깨친 음악가가 있는데 그가 바로 《중국조선족민 간음악집》(이하 음악집으로 략함)을 펴낸...
  • 2009-05-22
  • “성공자의 과거가 비참할수록 행복하다.” 한국련속극에 나오는 이 대사를 좌우명처럼 여기는 예술인이 있다. 가요 “모두다 갔다”, “인생살이”, “금이야”, “마음부자 제일부자” 등 노래를 불러 대중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아안은 대중가수 최승화, 신물나는 가난...
  • 2009-05-22
  • “동포연구 ‘한우물 파기’ 올해로 20년 맞았다” 해외한민족연구소 이윤기 소장, 다음달 1일 연구소 창립 20주년 기념식 개최 동포문제가 주목받지 못하던 1989년부터 중국과 CIS지역 동포들을 위해 다양한 사업을 펼쳐온 해외한민족연구소(소장 이윤기·사진)가 다음달 1일로 창립 20주년을 맞...
  • 2009-05-21
  • 지난 12일, 금융위기와 조선족기업경제발전 포럼에 참석한 장춘(长春)의 대화호텔 이규광 동사장이 포럼을 통해 '건전한 기업과 충실한 경영가가 되는 길'이라는 주제로 연설을 했다. 이규광 동사장은 "창춘은 정치와 문화가 함께 발달한 도시로써 창춘의 기업인들이 그 영향을 받고 있다. 경제활동에서 치밀한 ...
  • 2009-05-18
  • "평범속의 휘황" -조선예술품소장애호가 위배평 취재기 중조수교 60주년을 맞으며 가동된 "중조친선의 해"를 계기로 조선예술품 소장가 위배평씨를 취재하기위해 그의 사업터를 찾은 것은 해빛도 따사로운 5월의 하루였다. 위배평씨의 사업터인 베이징시 공상행정관리국 해전분국 자죽원 공상소를...
  • 2009-05-16
  • 연변에서 코리아복장 유한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손향 동사장이 지난 13일, 금융위기와 중국조선족기업발전 포럼에 참석했다. "기업인들이 한대 모여 정보를 교환하고 문제점을 상호 보완해주는 자리라 생각돼 바쁜 일정에도 참석하게 됐다"고 포럼참석 계기를 밝혔다.손향 동사장은 "작년보다 참석 인원이 많...
  • 2009-05-15
  • 색스폰으로 엮는 연주와 전수의 인생—음악학원 군악학교 등에 18명의 제자 수송우리 연변은 해방전에 이미 규모를 갖춘 관악대가 여럿 있었고 해방후엔 학교를 위주로 각 현, 시마다 관악대가 활약했다. 또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관악연주가들을 양성해 국내 큰 악단은 물론 해방군 각 군악대에도 대량 수송했다. 오...
  • 2009-05-14
  • 20여년간 한 일터에서 재능을 아낌없이 발휘 현재 연변대학부속병원 영상1과 주임으로 활약하고있는 조지매는 대학입시를 회복한뒤의 첫 패 대학생으로 1982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연변의학원 의료전업을 졸업하고 학교에 남아 근무했다. 20여년간 그는 라사마냥 연변대학부속병원이라는 이 기계에서 착실하게 사업하면서 그...
  • 2009-05-14
  • 20여수의 히트곡을 만들어낸 대중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작곡가 고창모   지나온 삶을 돌이켜보면 모든것이 운명적이였다. 음악의 길을 선택하게 된것도, 사랑하는 안해를 만나게 된것도, 연변에서 작곡생활을 하게 된것도… 청춘을 문화대혁명이란 특별한 시대에 보내게 되여 조금은 힘들었지만 그는 결코 불행...
  • 2009-05-12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