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의 끝까지 연필로 악보를 쓸것이다
민족적특색이 농후한 아름다운 선률의 서정적노래를 많이 창작하여 연변인민들에게 처음으로 대중적노래의 진수를 보여준 최삼명선생의 창작좌우명은 “민족적이고 대중적이고 과학적인 노래를 만들자”는것이다. 그래서인지 《내 고향 오솔길》, 《두루미》, 《왜 물어보나》, 《방천의 해당화》 등 그가 작곡한 많은 노래들은 선률이 짧고 입에 쉽게 오르며 기억하기 쉬워서 대중들이 즐겨부른다.
1955년 국비류학생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립음악대학 작곡학부에서 5년간 류학하고 돌아온 최삼명선생은 우월한 창작조건, 높은 경제대우, 광활한 무대 등 많은 유혹들을 물리치고 오로지 우리 민족음악을 창작하고싶은 일편단심으로 연변에 뿌리박았다. 자기 민족의 토양을 떠나면 민족음악작품을 쓸수 없다는 확신때문이였다.
어려서부터 심어진 꿈
1932년 3월 1일, 흑룡강성 밀산현의 한 농민의 가정에서 태여난 최삼명은 어려서부터 노래를 곧잘 불렀다. 1930년대 류행되던 흘러간 노래 《비단장사 왕서방》, 《눈물 젖은 두만강》 등을 유성기판으로 배우기도 하고 단소, 북 등 간단한 악기들도 곧잘 다루었다.
이렇게 음악에 애착을 보인 그가 음악의 길을 걷기로 마음을 굳힌것은 10살때 《OK연출단》의 공연을 보고서였다. 10리길을 도보로 다녀와서 공연을 본후 일주일간 자지 못하고 고민하였다. 어린 나이임에도 “음악을 하려면 저 사람들을 따라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였지만 겨우 10살인 그로서는 용빼는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미 꿈은 명확히 섰다. 그는 14살때 동명촌소학교 제1기 아동단 단장으로 되였고 촌문공단이 설립되자 독창가수 겸 합창지휘로 활약하면서 의용군, 독립군과 팔로군의 장병들을 위한 위문공연에 수차 참가하였다.
1947년 5월 25일, 최삼명은 동북민주련군에 입대하여 간호사로 있으면서 같은 련의 회계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고 대고도 자습하였다. 입대후 지금의 《해방군군가》로 된 《해방군행진곡》을 통해 작곡가 정률성을 알게 되였고 “나도 음악을 잘해서 정률성처럼 훌륭한 작품을 쓰고싶다”는 생각 즉 작곡가로 되고싶다는 명확한 리상을 갖게 되였다.
1949년말, 최삼명은 할빈송강로예문공단 조선대에 바이올린수로 들어가면서 진정으로 음악의 길을 걷게 되였다. 이듬해 로예문공단이 연변문공단과 합병하였고 그는 계속 바이올린수로 활약하였다. 당시 그의 처녀작 동요 《병아리》가 발표되였다.
국가에서 보내준 류학
1955년 최삼명은 행운스럽게 국가에서 보내주는 류학을 가게 되였다. 북경대학에서 5명, 연변에서 2명을 뽑은 7명중의 한명으로 조선국립음악대학 작곡학부에서 공부를 시작한 그는 당시 쏘련에 연수를 다녀온 조길석, 신도선 등 유명한 음악인들로부터 민족전통음악은 물론 서양의 선진적인 음악리론까지 배우게 되였다. 또한 그는 작곡학부에서 조선민요를 1년, 판소리를 3년 배웠다. 판소리를 하도 잘 불러 교원들이 그에게 작곡을 그만두고 판소리를 전공하라는 충고까지 줄 정도였다.
최삼명이 류학시절에 창작한 노래 《산으로 가나 벌로 가나》는 《조선음악》잡지에 실렸고 노래 《안녕히 가십시오 지원군동지》는 조선에서 방송으로 전파를 탔다. 또 현악4중주 《행복》은 평양모란봉지상극장에서 열린 조선음악가동맹여름음악회에서 공연되였다. 당시 학생작품으로 이 무대에 오른다는것은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가 졸업작품으로 내놓은 교향시 《해란강》 역시 평양모란봉지상극장에서 열린 제7기졸업식에서 음악대학교향악단의 연주로 공연되였는데 아주 높은 평가를 받았다. 당시 조선음악가동맹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이였던 신도선은 “매년마다 이런 교향시가 나온다면 우리 조선음악은 희망이 있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민족풍격이 농후한 작곡가
1959년, 류학을 마치고 돌아올 때의 최삼명은 이미 날개돋힌 말처럼 비범한 재주를 갖춘 음악인이였다. 하여 중앙민족가무단, 중앙민족대학 예술학부, 심양군구 전진가무단 등 좋은 단위들의 초빙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우월한 창작조건이나 높은 경제대우를 마다하고 우리 민족의 집거지 연변에 돌아왔다. 심지어 1961년도에는 유명한 작곡가 정률성도 중앙악단에서 함께 일하자고 제의하였으나 완곡하게 거절하였다.
1959년 10월부터 최삼명선생은 선후하여 연변예술학교 작곡교연실 주임, 연변가무단 창작평론실 주임으로 있으면서 근 800여수의 음악작품을 창작하였고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예술계에서는 최삼명을 “미(3)로 시작하는 작곡가이다”고 평가한다. 우리 전통민가가 대부분 “미”로 시작하는데 전통음악에 푹 젖어있던 그 역시 《사과배 따는 처녀》등 노래를 비롯한 많은 노래들을 떼기 쉬운 “미”로 시작하였던것이다.
연변가무단 창작평론실에 전근하여서 창작한 《친선의 꽃》, 《물길따라 천리길》, 《비단공의 노래》 등 노래들은 인차 대중들속에 전파되면서 인기곡으로 되였다. 한창 작곡열이 오를 때 문화대혁명이 일어났고 그는 민족풍격이 너무 진하다는 리유로 “복고주의경향이 강하다”는 지적을 받았고 “주덕해의 흑수재(黑秀才)”라는 비판을 받았으며 “자산계급예술권위”라는 모자까지 썼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소신을 굽힐줄 몰랐다.
주렁진 열매 뛰여난 성과
문화대혁명이 끝난후 1978년 그는 첫 작품 《아, 고향아》를 작곡하였다. 당시 중앙에서 《내 고향》이란 영화를 찍으러 연변에 왔었다. 그때 주제곡이 바로 최정연이 작사한 《아, 고향아》였다. 당시 중앙에서 파견해내려온 록음사가 조선족이였는데 글쎄 록음을 9번이나 반복해 하였다. 옆에서 듣기에도 노래를 잘 불렀는데 웬 영문인지 모두들 궁금하였다. 록음이 끝나고 저녁식사때 록음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미안하다”며 머리숙여 사과하였다. 그리고는 “이렇게 민족풍격이 짙고 아름다우며 서정적인 노래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음악에 도취되다보니 첫 7번은 기계를 조작하지도 못한채 감상만 했습니다. 마지막 두번에 가까스로 록음하는데만 전념하였습니다”고 솔직히 고백하였다.
그후 최삼명이 작곡한 많은 노래들이 히트곡으로 되여 대중들속에 널리 전파되였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당시 최삼명의 노래를 불러 인기가수로 활약했던 한국화가 도문 석현에 공연을 갔었다. 자신의 종목이 끝나서 홀로 초대소에 돌아오는데 두 남자가 따라오는것이였다. 너무나 두려웠던 그녀가 긴장해서 “왜 따라오냐”고 묻자 한 남자가 “묻지 말고 살짝쿵 따라나오라면서요?”하고 노래로 익살스레 대답하고나서 “밤길이 어두워 보호해주려고 따라온것”이라고 해석하였다. 바로 노래 《왜 물어보나》의 팬들이였던것이다. 이처럼 최삼명의 많은 노래들은 대중적이여서 남녀로소가 즐겨불렀다.
그는 선후로 《사과배 따는 처녀》, 《두루미》, 《내 고향 오솔길》 등 예술가곡 500여수, 《첫봄》, 《민들레》, 《아리랑》등 20여부의 영화와 TV련속극음악 그리고 《홍매송》, 《논물관리원》, 《삼천리강산》 등 무용곡 20여부 창작하였다. 그외에도 교향시, 가극, 가무극, 대합창곡 등 많은 쟝르의 곡들을 창작하였다.
특히 1990년에 안국민, 허원식, 최창규 등 작곡가들과 함께 세번의 실패끝에 3년만에 성공시킨 가극 《아리랑》은 우리 민족 가극의 령을 돌파하였다. 당시 가극 《아리랑》은 호남성 주주시에서 열린 “전국가극제2차콩클”에 참가하여 “우리 나라 가극창작의 리정비”라는 높은 평가를 받으며 유일한 우수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받아안았고 그 이듬해에는 중앙문화부 “문화상”평의위원회로부터 제1기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50여년의 음악창작중 수많은 영예와 상을 받아안았는바 1991년 성정부로부터 대공을 기입받았고 1999년에는 중국세기예술금상평의위원회로부터 유일한 조선족음악인으로 금상을 수상했으며 2007년 12월 연변주정부로부터 민족문화사업특수공헌인물상을 받는 영광을 누렸다.
령감은 소중히 작품은 신중히
많은 작품들을 씀에 있어서 그는 “령감이란 손님은 게으름뱅이를 싫어한다. 이 손님을 제때에 접대하지 않으면 다시 오지 않는다”를 좌우명으로 삼고 언제 어디서든지 령감이 떠오르면 제때에 적어두군 하였다.
1995년말 연변TV방송국에서 그에게 양력설문예프로에서 대합창곡으로 부를 리선호의 시 《 종소리 울린다》에 곡을 달아달라고 부탁하였다. 늘 머리속에 가사를 되새기며 곡을 연구하던 어느날 오도저수지에 놀러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뻐스안에서 갑자기 령감이 떠올랐다. 그런데 적으려고 보니 종이와 펜이 없었다. 호주머니를 뒤져보니 1원짜리 지페가 있었다. 그는 얼른 차장한테서 원주필을 빌려서 그 1원짜리 지페에 곡을 적어내려갔다. 그렇게 1996년 양력설문예프로 대합창곡이 탄생하였다. 지금도 그의 안해는 그 1원짜리 지페를 고이 보관하고있다.
노래 《사과배 따는 처녀》도 외지에서 돌아와 연변가무단에 막 도착하였는데 갑자기 령감이 떠올랐다. 그는 인차 땅에 쭈크리고 앉아 종이쪼각을 무릎에 대고 곡을 적기 시작했다.
이렇게 불쑥불쑥 떠오르는 령감들을 그는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고 제때에 적었다. 하여 많은 명곡들이 종이쪼각, 기차표, 사진봉투, 전화번호책, 명함장 등에서부터 시작되였다.
조선렬차원이 달리는 렬차에서 뛰여내려 살얼음판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화룡의 녀자애를 구한 사실을 표현한 가무극 《친선의 물결》중의 독창곡 《친선의 꽃》은 그가 작품을 토론하는 과정에서 곡이 떠올라 30분간에 써내려간 곡이다. 또 시인 리상각의 부탁으로 작곡하게 된 《간호원의 노래》는 단 15분간에 작곡된 곡이다. 리상각이 전화로 시를 불러줄 때 첫가사를 보면서 선률이 떠올랐던것이다.
최삼명선생은 “작곡가는 편안히 누워서 명곡이 나오기를 기다려서는 안된다. 많이는 격정에서 우러나온 곡들이 격이 맞고 선률이 아름답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모든 곡들이 다 쉽게 급히 나온것만은 아니였다. 최삼명선생은 작품을 발표함에 있어서 언제나 신중했다. 시급한 작품을 제외한 모든 작품들은 완성한후 책상서랍에 넣어두었다. 며칠후 다시 떠올려봐서 뚜렷하게 떠오르면 좋은 곡이라 판단하고 발표했다. 그는 “나 자신마저 어렴풋하면 대중들이 좋아할리 없다. 내 마음에 딱 들고 기억이 잘되는 곡이라야 대중들이 쉽게 받아들인다”며 한 작품을 반복적으로 세련되게 다듬군 하였다.
홀시할수 없는 안해의 내조
최삼명선생이 수백여편의 훌륭한 곡을 써낼수 있은데는 착하고 재주있는 안해의 내조가 컸다. 당시 연변가무단의 무용수로 활약했던 안해 윤청자는 자신의 사업도 바빴지만 가정일을 전담하였다. 그는 집안의 크고작은 일은 물론 자녀교양을 도맡았고 시부모까지 모셨다. 우로 형님이 두분 계셨지만 모시고싶다는 남편의 의사를 존중하여 10여년간 시부모를 공대하였고 자신의 손으로 마지막길을 보내드렸다. 이런 안해에게 늘 고마운 그는 “우리 집사람은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이다”고 안해자랑을 아끼지 않았다.
그외 안해는 최삼명의 훌륭한 “비서”이기도 했다. 온갖 잡동사니에 적은 초본이나 이를 정리한 완성작품 그리고 출판작품까지 따로따로 세분하여 봉투에 잘 보관하는 안해였다. 하여 그의 모든 재료들은 기본상 원본대로 소중히 보관되여있다. 물론 그 자신은 어느 작품들이 어디에 보관되여있는지를 전혀 모른다. 필요할 때마다 안해에게 부탁하면 되니깐.
그리고 안해는 최삼명작품의 첫 관람자이고 평가자였다. 매번 작품이 나오면 언제나 안해에게 먼저 들려주었다. 그러면 안해는 꼭 감상을 말해주었다. 특히 그의 다른 작품에서 쓰였던 곡들은 예리하게 짚어내여 귀띔해준다. 처음에 최삼명은 “당연히 내 작품이니깐 공통점이 있기 마련이지”하면서 고집했지만 후에 곰곰히 되새겨보니 안해의 말처럼 새 풍격이 잘 나오지 못한면이 있었다. 안무가( 蹈)이기에 곡에 익숙한 윤청자는 “좋은 곡을 들으면 신기하게 외워진다. 그래서 히트곡이 탄생할 때면 미리 예감이 온다”며 감개무량하게 말했다.
이렇게 무던한 안해였지만 최삼명부부는 결코 깨알이 쏟아지는 생활만 한것이 아니였다. 여느 집과 똑같이 소리높여 싸우는 가정불화도 많았다. 애주가이고 애연가였던 최삼명선생의 술주정 특히 건강때문에였다. 술주정은 그래도 참을수 있었으나 간경화복수와 신염복수라는 무서운 진단을 받은후에는 더욱 그러했다. 안해의 바가지에 끄떡없던 최삼명도 끝내는 곰곰히 자기반성을 했다.
“국가에서 류학을 보내 작곡가로 키워준 국가의 빚을 갚기도전에 쓰러질수는 없다. 어떻게든 술과 담배를 끊고 건강을 되찾아 훌륭한 곡들을 창작하여 빚을 갚아야지”하고 다짐한 그는 술과 담배를 끊고 병치료에 열중하는 한편 걷기, 낚시 등 운동으로 건강을 되찾기 시작했다.
최삼명의 작곡을 두고도 그들 부부는 회사에서나 집에서 늘 쟁론이 분분했다. 특히 무용곡을 창작했을 때 최삼명은 음악곡식으로 정확하게 하기에 노력했고 무용창작을 하는 안해는 무용작품의 결구와 정서를 많이 고려했다. 안해는 성격이 급한 남편이 화를 낼가봐 늘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그러면 아니나다를가 남편이 “음악의 곡식이 정확하면 결구도 완벽해지는 법이요”하고 버럭 소리를 지르군 했다. 결국 안해가 지고말아야 했다. 이를 두고 안해는 “후에 보면 그래도 그이가 정확했다. 내가 무용정서를 너무 고려한것”이라며 “패자”임을 승인했다.
이렇게 서로 쟁론하면서 창작하고 안무를 한 《홍매송》, 《과원은 우리 집》, 《삼천리강산》 등 무용은 중앙으로부터 1, 2등상을, 성으로부터 1,2등상을 수상하였다.
작곡가의 안해로 제일 힘들었던 점에 대해 물으면 윤청자는 “음악인이여서 성격변화가 많다. 인내심이 많은편인 나로서도 그걸 맞추기가 참 힘들었다”고 토로하고나서 “그래도 좋은 작품이 발표될 때마다 함께 흥분하고 기뻐했다”며 활짝 웃었다.
건강비결과 과외애호
1993년 리직휴양한 최삼명선생은 계속 왕성한 정력과 열정으로 창작을 하고있다. 특히 《낳은 정 키운 정》과 같은 TV음악창작을 위해 많은 심혈을 기울였다. 이미 78세의 고령이지만 아직도 놀라운 정력과 체력을 가지고있는 최삼명의 몸관리비법은 무엇일가?
우선은 중국과학원 종신교수의 《로년건강312안마법》을 아침저녁으로 견지하여 머리를 맑게 하고 몸균형을 잡아주며 밥맛이 당기게 한다. 다음은 매일 몇백회씩 머리를 빗어주어 뇌신경을 활약시키고 뇌출혈과 뇌혈전을 방지한다. 또한 가끔 낚시하러 다니고 안해와 함께 걷기활동을 하거나 등산을 하기도 한다. 이외 중요한것은 모든 울화를 속에 담아두지 않는것이다. 노래하거나 등산하여 소리지르는것으로 고민들을 제때에 털어버린다.
최삼명선생의 객실에는 리직휴양후 창작한 근예(根 )작품이 많이 진렬되여있다. 다람쥐, 우주인, 공룡, 물을 마시는 타조, 물소 탄 아이, 술을 끊는 코빨간 로인, 토끼전(자라등 타고 룡궁으로 들어가는 토끼), 정지된 세 괴물 등 60여점의 근예작품이 있는데 대부분 작품이 30%만 가공하고 70%는 원유의 모양을 살린것이였다. 그중에서 제일 인상깊은것은 세 괴물이 각각 다른 방향으로 가려고 하기에 서로 움직이지 못하고있는 모습을 그린 “정지된 세 괴물”이다. 어쩌면 우리에게 많은 철학적도리를 설명해줄수 있는 그런 작품이다.
전직조각사 못지 않은 근사한 작품들을 만들어낸 최삼명선생은 근예작품이 될듯한 나무뿌리를 찾아 자주 산에 오르고 저수지를 찾았다. 대부분 작품들이 놓인것으로 보아 그럴듯한 모형을 찾기 힘들었지만 그는 예리한 눈길로 뿌리를 돌려보면서 뜻있는 형상들을 상상해내군 한다. 최삼명선생은 “근예작품이 음악창작에도 큰 도움을 준다”고 말하고나서 “뿌리를 보면서 여러가지 련상들을 하게 되는데 이는 음악에서 생각지 못한 경지를 알게 해준다”며 근예작품에 대한 애착을 내비치였다.
이미 1981년에 작곡집 《내 고향 오솔길》, 1982년에 두번째 작곡집 《최삼명작곡집》을 출판한 최삼명선생은 《최삼명가곡가요전집》을 출판할 계획으로 2년에 거쳐 자신의 800여수의 작품들을 정리, 편집하였다. 곧 출시될 최삼명선생의 《최삼명가곡가요전집》이 연변음악계에 새로운 생기와 활력을 불어주기를 기대한다.
연변라지오TV신문 최설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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