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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건일-동북아,조선반도문제 수석전문가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12월24일 08시15분    조회:8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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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건일, 동북아시아 및 조선반도 문제 수석전문가
 

--중국사회과학원 아시아태평양연구소 동북아연구센터 주임 박건일연구원에 대한 이야기

흔히 19세기는 유럽의 세기, 20세기는 미국의 세기, 21세기는 아시아의 세기라고 일컫는다. 즉 18세기중후반 산업공업화혁명으로 부상한 유럽이 세계를 제패해오던 시기는 이미 까마득한 옛날로 되였고 두차례 세계대전의 세례를 겪으면서 급부상해온 초강대국 미국의 고속성장도 이제는 기대하기가 어려운 반면에 세계경제성장의 미래는 아시아에 있다는 말로 되겠다. 특히 세계경제발전의 견인차역할을 놀게 될 중국, 아시아의 전통경제강국 일본, 신흥발달국가 한국 등이 운집해있는 동북아시아는 아시아의 구심점으로 불리우기에 손색이 없다. 게다가 랭전시대의 최후의 산물이라고 불리우는 조선반도문제의 존재로 하여 이 지역은 현재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 초점지역의 하나로 되고있다. 

우리의 주변 지역 및 세계 초점지역으로서의 동북아시아는 우리 나라 대외교류 및 지역안전면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있으며 따라서 현재 이 지역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있다. 국무원산하의 사업단위인 중국사회과학원은 수십년간 줄곧 국제관계연구에서 최고권위를 자랑해오고있으며 중국사회과학원 아시아태평양연구소 동북아시아연구센터 주임 및 지역안전연구센터 부주임 박건일연구원이 현재 이 연구령역에서 단연 제1인자로 꼽힌다.

연변대학에 최고점수로 입문
“저는 대학교 때 물리가 전공이였습니다.” 박건일연구원은 자신이 리공계출신이라고 소개했다. 뿐만아니라 석박사는 모두 지리학을 나왔다. 리공계 출신이 사회학을 연구한다는게 보기드문 일이기도 하거니와 리공계 출신으로 사회학연구에서 남들보다 더 우수한 성적을 이룩할수 있었다는게 더 뜻밖이였다. 하지만 박건일연구원의 끈질긴 인생분투경력으로부터 이런 의문들이 하나하나 풀렸다.

연길태생인 박건일연구원은 소학교부터 고중까지 줄곧 한족학교를 다니게 된다. 이는 그때만 해도 연변의 조선족치고 흔치않은 일이였다. 사실상 박건일의 부모님도 한족학교에 보내기싶어 보낸건 아니였다. 여기에 이런 사연이 있다. 박건일이 소학교에 붙는 해인 1969년은 문화대혁명이 한창 열기띠게 진행될 때라 교육환경이 렬악했다. 그때 집주변에는 민영으로 운영되는 조선족학교 한개소가 있었다. 그런데 박건일을 이 민영조선족소학교에 붙여놓으니 1주일만에 학교 선생님이 부모를 찾아왔다. 박건일이 수업시간에 자기가 안다고 먼저 소리쳐 도무지 강의를 진행해나갈수 없으니 어떻게 다른 학교로 전학해갈수 없겠는가 하는것이였다. 워낙 박건일은 두살때 이미 천자문을 뗏고 소학교 다니기전에 이미 우리말로 편지를 쓸수 있는 수준을 갖춘 “신동”이였기에 소학교 1학년공부는 그에게 있어서 식은죽먹기였던것이다. 이에 박건일의 부모님은 하는수없이 연길시 태평조선족소학교에 수소문해보았다. 그런데 그곳도 명액이 차서 받을수 없다는것이였다. 그때 그 학교 교원이 내놓은 제안이 바로 박건일을 한족학교에 보내라는것이였다. 비록 그때 박건일이 한어는 할줄 몰랐지만 한자는 많이 알고있었고 또 한족학교에 가면 장난기를 거두는데에도 도움이 될것 같아서 부모는 박건일을 한족소학교에 보낸다. 

우여곡절끝에 한족학교를 다니게 된 박건일은 소학교기간 줄곧 반장을 해왔고 이어 우수한 성적으로 길림성중점중학교의 하나로 꼽히는 연길시2중에 붙게 된다. 그때 동북지구의 한족학교들에서는 쏘련 진보도전투의 영향으로 로어를 배우는 열조가 일어났고 그 영향으로 박건일도 초고중 5년간 줄곧 로어를 배웠다. 5년간 로어공부에 매진한 결과 박건일의 로어수준은 그때 대학교 로어전문학과 1학년생의 수준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그는 초고중때 어문성적이 특별히 좋았고 그의 작문은 늘 학년의 모범글이 되여 이반저반 전시되군 했다. 초중을 졸업할 무렵 그의 작문은 또 연변중학생작문선에 입선되였으며 이로하여 원고료를 탄 경력도 있다. 한편 부모님들이 모두 인테리였던 연고로 집에는 정치서적들이 많았고 박건일은 어릴때부터 정치에 남다른 흥미를 가져왔었다. 인문학과 관련된 이런 우세를 계속 확보해나가면 나중에 연구 기관이나 단체에서 학문을 연구하는것은 어쩌면 물흐르듯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박건일은 고중때 리과를 선택하게 된다. 리공계를 나와야만 재간을 배울수 있다는 부모님의 권고를 받아들인것이다. 리공계를 선택한후 그는 문과류는 자신이 있었던지라 아예 뒤켠으로 밀어놓고 수학, 물리, 화학 등 리과류 과목에만 신경을 썼고 그 덕분으로 대학입시때에는 리과류 과목의 점수가 많이 올라갔고 지어 문과류 성적을 초과했다. 이는 또 박건일이 연변대학 물리계를 지망하게 된 계기로 되기도 했다.

그해 연변대학의 450명 신입생중 박건일의 성적이 최고였는데 2등하고도 70점이나 되는 격차를 보였다. 사실상 박건일의 대학입시성적으로는 적어도 길림대학은 갈수 있었다. 그도 외지 대학교에 가는게 소원이였다. 그런데 그때 부모님의 적은 로임으로 많은 식솔이 생활해나가야 하는 박건일네 가정형편으로 그를 외지에 보내 공부시킨다는것은 힘에 부치는 일이였다. 집형편을 잘 알고있는 박건일은 두말없이 연변대학에 짐을 싸들고 왔다. 대학교기간 그는 또 과학철학에 푹 빠져버린다. 물리학이 전공이였던 그는 점차 물리에도 흥취를 보이기 시작했고 장래에 원자탄전문가 혹은 아인슈타인, 뉴톤 등 위대한 과학가로 되려는 꿈도 꾸어왔다. 그때 도서관으로 뻔질나게 다니면서 과학가 및 과학발전사들을 료해하는 과정에서 박건일은 아인슈타인과 같은 유명한 과학가들 대다수가 철학적두뇌를 갖고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에서 힌트를 받은 그는 과학철학서적들을 다시 뒤적이기 시작했다. 과학철학, 철학사 등 서적을 보는것만으로도 부족하다고 생각된 그는 아예 연변대학 정치계 과목을 모두 청강하는 열정을 보여주었다. 

철학의 매력에 흠뻑 빠진 그는 연구생지망도 아예 길림대학 과학철학계를 선택했다. 당시 길림대학 과학철학계는 국내에서 설립된 시간이 비교적 오래됐고 지명도도 높았다. 철학과는 평소에 기초를 잘 닦아놓았으니 문제없었고 외국어도 영어, 로어, 일어 3가지 언어중 한가지만 선택해 치면 된다는것이였다. 당시 연변대학에는 로어과가 설치돼있지 않고 영어만 배워주었는데 박건일은 영어뿐만아니라 로어책도 손에서 놓지 않은지라 로어시험에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연구생시험 한달을 앞두고 외국어는 꼭 영어로 쳐야 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비록 대학교에서 2년간 영어를 착실히 배웠지만 이 기초로 연구생시험에 합격된다는것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결국 외국어때문에 박건일은 연구생의 꿈을 접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런데 엎친데 덮친격으로 연구생시험을 치르느라고 물리학과의 한 과목을 못본 일이 있는데 보충시험을 보는데서 사달이 생겼다. 박건일 뒤에 앉은 학생이 그의 시험지를 그대로 베껴썼는데 이것이 들통났던것이다. 박건일이 고의적으로 보여준게 아니라고 설명해도 소용이 없었다. 이 사태는 박건일의 졸업배치에 직접 영향을 주었다. 원래 학교에 남기로 했던 분배계획은 취소되고 교육국 아니면 중학교 교원중에서 고르라고 했다. 연구생공부를 더 해서 더 큰 무대에서 꿈을 이루고싶었던 박건일에게 있어서 이는 반가운 소식이 아니였다. 생각끝에 선택한것이 료녕성조선족사범학교였다. 집이 먼것이 흠집이였지만 자신만의 시간을 어느정도 확보할수 있다는 우점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졸업분배가 끝나서 얼마 안되여 그는 심양행기차에 올랐다. 방학기간이여서 아직 새 단위에 등록할 시간이 많이 남아있는 상황이였지만 환경도 익숙할겸 먼저 떠났던것이다. 당시 조선족사범학교에서는 전자화교육을 보급하려고 했지만 적임자가 없어서 고민하던 중이였는데 박건일이 오니 아예 그한테 맡겨버렸다. 그래서 처음에는 계산기, 텔레비죤, 록음기, 환등기 등 전기설비들과 씨름했다. 대학교때 학생회 부주석을 하면서 이런 설비들을 많이 다뤄왔던 그라 문제될것 없었다. 그때 이런 설비들은 대다수가 외국제로 전부가 영어로 됐다. 그런데 영어를 배우지 못했던 사범학교 학생들은 이를 장악하기 어려워했다. 그래서 박건일은 아예 저녁시간을 리용해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1986년 박건일이 연변대학을 졸업한지 꼬박 2년이 되는 해에 연변대학에서는 정치계 교원을 모집하게 됐다. 문화대혁명기간 취소당했던 연변대학 정치계는 이때 시대요구에 따라 새로 회복하게 됐던것이다. 이때 박건일이 적임자로 찍혔다. 연변대학 인사처 처장이 직접 료녕성사범학교에 와서 박건일의 조동문제를 토론했고 사범학교에서는 아쉬운대로 그를 놓아주었다. 박건일은 연변대학에 온 후 반주임을 맡는다 강의를 맡는다 하며 바삐 돌아쳤다. 하지만 과학철학책과 외국어는 항상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러는 도중에 그에게 천재일우의 기회가 나진다. 1991년도의 어느날 학교 교무처에 일보러 왔던 그는 이곳에서 길림성교육청의 통지문을 하나 보게 된다. 내용인즉 국가에서 로씨야류학인원을 모집하는데 연변대학에 요구가 부합되는 인원이 있으면 추천하라는것이였다. 당시 연변대학에는 로어를 장악한 교직원이 거의 전무한 원인으로 이에 신청한 사람이 없었던것이다. 박건일은 자기가 한번 여기에 나서보겠다고 요구했고 학교측의 동의를 얻었다. 이어 길림성교육청, 국가교육위원회의 엄격한 선발을 통해 그는 최종 로씨야국비장학생의 한명으로 지정됐다. 이어 전국에서 선발된 48명의 국비장학생은 먼저 사천성 성도과학기술대학에서 1년간 로어공부를 더 한 후 이듬해에 륙속 로씨야로 파견됐다.

령으로부터 시작한 지리학박사공부
“저를 모스크바대학에 배치하던군요. 그런데 전공이 골을 때렸습니다. 지리학이였거든요.” 박건일연구원은 허구픈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가 쏘련으로 류학가던 때는 구쏘련이 갓 해체된 때라 국가질서가 엉망이였고 그들의 류학계획에도 차질이 생겼다. 원래 중국류학생을 받기로 합의보았던 쏘련의 대학들에서 못받겠다고 나눕는 일이 비일비재였고 그래서 중국류학생들을 배치하는것이 그때 큰 문제로 됐다. 사람을 밀어넣는게 급하니 전공따위는 따질 겨를이 없었다. 박건일연구원은 중국대사관 교육참사를 찾아가 과학철학을 목적으로 온 쏘련행인데 지리학박사공부는 말도 안된다고 딱 잡아뗐다. 그리고 방법이 정말로 없으면 울라지보스또크의 극동대학 과학철학계를 가겠다고 했다. 교육참사는 그래도 모스크바대학이 명문대학으로 그곳에서 공부하는게 좋다고 그를 설득했다. 한편 주위에서 간 중국학자들도 장래 중국이 발전하면 지리학인재에 대한 수요가 엄청날것이므로 그래도 지리학을 하는게 좋다고 권고했다. 박건일연구원의 로씨야 지도교수도 그의 자료를 보고는 지리학을 전공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고 고무해주었다. 그래서 생각을 고쳐먹고 지리학을 전공하기로 했다. 마침 그때 두만강지역개발이 가동되기 시작했는데 이걸 쩨마로 지리학연구를 진행하면 효과가 좋을것 같았다. 그래서 국내에 자료를 부탁하고 두만강지역 현장에도 자주 다니면서 론문들을 작성해나갔다. “두만강지역 사회 및 경제 지리학문제”, “두만강지역 지형학과 지구생태학문제” 등 무게있는 론문들이 륙속 발표됐고 무난히 지리학 석박사 통합과정을 마쳤다.

쏘련 모스크바대학에서의 석박사 통합과정을 마친 후 박건일연구원은 1997년 연변대학에 되돌아오게 된다. 그런데 그가 배운 “공정지형학”은 연변대학에서 사용이 불가능했다. 이 학과의 연구에 필요한 실험실을 만드는데 드는 비용만 해도 300만원이였다. 300만원이면 그때 일반 실험실을 대여섯개 만들수 있었다. 연변대학에서 금방 그에게 실험실을 만들어줄 형편도 못되였다. 그래서 머리도 쉬울겸 국내형세도 료해할겸 한달간의 말미를 맡고 북경행에 올랐다. 북경에서 친구들을 만나게 됐는데 그들의 한결같은 의견이 바로 북경에 남으라는것이였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직장물색에 나섰다. 북경대, 청화대, 인민대 등 북경시 9개소 유명대학교들을 찾아보았고 이런 단위들에서도 전부가 그를 받을 의향이 있었지만 어쩐지 자신이 배운 지식이 유용하게 사용되는것 같지 않아 모두 마음에 썩 내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숙소에서 “광명일보”를 읽던 중 신문에 실린 중국사회과학원 20주년 기념행사보도가 시선을 끌었다. 특히 아시아태평양연구소 소개에 마음이 동했다. 자신이 장악하고있는 4가지 언어가 전부 유용하게 사용될것 같고 비록 국제관계를 전문적으로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경력으로 구체문제 연구에 들어가서는 남한테 뒤질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이튿날 신문 한장을 달랑 들고 아시아태평양연구소를 찾아갔다.

아시아태평양연구소의 동북아문제 수석전문가
“소장은 내가 다른 사람의 소개도 없이 신문을 읽고 찾아왔다니 어이없는지 피식 웃더라구요.” 하지만 소장은 당돌하게 찾아온 이 젊은이가 마음에 들었느지 짧은 면접으로 박건일연구원의 실력을 체크해본 후 당장에서 연구소에서 받겠다고 승낙했다. 그때 아시아태평양연구소의 동북아문제 권위전문가인 한진섭교수가 년세가 많은 연고로 그 뒤를 이을 인재가 급수됐던것이다. 그런데 박건일연구원이 찾아왔으니 그야말로 복덩이가 저절로 굴러온 셈이였다. 

아시아태평양연구소에서는 박건일연구원에게 국제관계분야를 맡기면서 3년간의 시간을 주겠으니 이 기간 실무를 익숙히 장악하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그후 얼마 안되여 아시아금융위기가 터지면서 박건일연구원은 바로 연구소의 구체업무에 돌입했다. 1997년 타이에서 시작된 아세아금융위기는 동남아를 휩쓸었으며 이어 홍콩, 한국, 일본 등지를 강타했다. 탄탄하게 성장하고있다던 아시아 각국이 금융위기앞에서 련쇄반응을 일으키자 중국정부에서는 이에 대한 원인분석이 시급했다. 따라서 중국사회과학원에서는 이를 중점연구과제로 삼고 연구에 들어갔다. 그때 박건일연구원에게 맡겨진 임무가 “한국관련연구”였다. 짧은 시간내에 보고를 바쳐야 했으므로 시간이 촉박했다. 처음에는 금융관련보도를 엄청나게 봤다. 그런데 전부가 경제술어들이다보니 모를 말들이 많았다. 그래서 경제학서적들을 보풀이 일도록 들춰보았고 잡지와 신문들은 아예 집에 메고가서 참빗질했다. 한달동안 신문, 잡지, 책들과 싱갱이질한 덕분으로 금융위기원인을 터득할수 있었고 이어 훌륭한 보고가 완성됐다. 그후 박건일연구원 등 여러 사람들의 공동집필로 완성된 “아시아금융위기의 최후분석”이란 보고서는 책자로도 출판됐고 이 책은 또 중국사회과학원의 1등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받아안았다. 아시아금융위기때문에 박건일연구원은 경제학공부를 한번 단단히 했다고 했다. 

1998년 8월 30일 조선에서 광명성1호를 발사하면서 조선반도 핵문제가 터졌다. 그때 많은 미국전문가들이 이 상황을 료해하러 중국에 왔다갔으며 그때 이런 전문가들을 접대하는 과정에서 박건일연구원은 아주 짧은 시간내에 조선반도 핵문제를 몽땅 장악하게 됐다. 그리고 2년도 안돼 탄탄한 실무능력을 바탕으로 국제무대에 나가기 시작했으며 또 아시아태평양연구소의 로전문가 한집섭교수의 뒤를 이어 중앙텔레비죤 제4채널에 동북아문제 특별론설원으로 나왔다. 박건일연구원은 재치있는 언어로 동북아시아 및 조선반도 정세를 깊이있게 분석하여 청취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으며 지금은 중앙텔레비죤 제4채널뿐만아니라 기타 채널에서도 의례 박건일연구원부터 찾는다.

“지금 조선반도를 둘러싼 언론환경을 볼 때 서방언론이 절대적우세를 차지하고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반인들은 이런 언론에 끌려가기 쉽상입니다.” 박건일연구원은 언론의 객관성을 강조했다. 현재 중국의 일반인들은 주로 “참고소식” 등 신문들을 통해 국제정보를 접수하는데 현재 여기에 나오는 보도의 절대 대부분이 서방의 외신보도들인것이다. 이런 원인으로 박건일연구원은 외지에 출장을 나가지 않는한 텔레비죤에서 부르면 빠짐없이 참가한다. 학자로서의 사명감을 느꼈기때문이다.
현재 박건일연구원은 중국아시아태평양학회 조선반도분회 회장, 중국조선반도문제연구회 회장, 중국아시아태평양연구협회 사무총장, 중한우호협회 리사, 중일민간전략대화위원회 위원, 중미민간전략대화위원회 위원, 중국과학학및과학기술정책위원회 리사 등 사회직무도 담당하고있으며 “중국에서의 조선반도연구”, “중한관계와 동북아세아공동체” 등 여러권의 저서들을 내놓았으며 여러차례 국가급, 성급 상을 수상했다. 

우연이라고 할까. 현재 아시아태평양연구소를 비롯한 중국사회과학원의 국제관계연구소들은 모두 중화민국림시정부 단기서집정부 옛터에 자리잡고있다. 청조말년 해군의 경비를 류용해 수건한 이 유럽 고전식건축물들은 그후 원세개정부 대통령부, 단기서집정부, 중국침략 일본 화북주둔군 총사령부 등으로 사용돼왔으며 오랜기간 중국의 치욕적인 력사를 현장에서 목격해왔다. 또한 이곳은 1926년 3월 18일 수도 각계 군중 수천명이 중국공산당과 리대소 등의 령도하에 일본제국주의의 중국주권침략을 반대하는 청원운동을 벌리다 단기서 매국정부의 피비린 탄압을 받은 “3.18참안”발생지이기도 하다. 박건일연구원의 취재를 마치며 이 고풍스러운 건물의 대문앞에 전시된 “3.18참안”의 안내판을 스쳐지나는 필자는 문득 중국근대사의 산 견증인이기도 한 이곳에 아시아태평양연구소 등 국제문제연구소가 들어있다는 이 사실은 어쩌면 과거를 잊지 말고 새 지평을 열어갔으면 하는 우리 새 시대의 간절한 기대가 안받침되여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기분이 한결 숭엄해졌다.

중국민족 2009년 제6기 리호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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