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새납을 민족악기로 보급하고싶다
료녕성 유일의 장새납 전문연주자 우춘광을 만나
[인터넷료녕신문 2011-04-19 박경상, 김룡호 기자]
대련시조선족문화예술관에 우리의 전통악기 장새납 전문연주자가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았갔을 때는 오후 퇴근시간, 정문에 들어서자 어디선가 쿵당거리는 장고소리가 진동했다. 수십명이 모여 무슨 공연이라도 하는듯 4층건물 전체가 장고소리에 푹 묻혀있었다. 하지만 4층의 한 훈련실 문을 열다가 그만 얼어붙었다. 텅빈 방에서 젊은 남자 혼자서 신나게 장고를 두드리고있지 않는가?
인기척에 머리를 든 젊은 총각은 바로 우춘광씨, 료녕성 유일의 장새납 전문연주자란다. 기자는 그와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올해 29세의 우춘광은 길림 도문사람이였다. 부모가 모두 현지에서 잘 알려진 예술인이였기에 그의 예술감각은 남달랐다. 유치원때부터 노래를 잘 불렀지만 그를 발견한것은 어느 우연한 기회에 만난 성악교원, 성악교원의 제의로 도문시철로실험소학교에 전근하여 이 교원한테서 전문 성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소학교 4학년때 벌써 로씨야와 한국에 출국공연을 할만큼 전도가 밝은 가수였었다. 1994년 연변예술학교에 입학해 소학반 2년, 중전반 6년, 본과반 4년까지 모두 마치고 2006년 졸업할 때 이 학교에 직원모집을 온 대련시문화관 황호철관장에게 “발견”되여 대련에 오게 되였던것이다.
장새납은 예술학교에 입학해서 배우게 되였다고 한다. 예술학교 지망은 성악으로 했는데 “남자는 변성기를 잘못 넘기면 위험하다”는 권고를 받아들여 김용일교수를 스승으로 모시고 장새납을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노래하기보다 불편했는데 점차 애착이 가면서 손에서 떨어질줄 몰랐다.
“장새납”은 중국의 “새납(載納)에서 유래한것으로 민간에서는 호적, 새납, 칠적, 날라리 등으로 불린다. 고려말 조선반도에 전해져 대취타(大吹打), 정대업(定大業) 등에 쓰였다. 음량이 크며 운지법(運指法)과 음의 높낮이는 향피리와 비슷하나 전체적인 음의 높이가 한옥타브 높게 되여있다. 조선에 전해진후 그 모양과 연주법이 개량되여 현재의 장새납이 된것이다. 한국에서는 태평소라 부르는데 충무공 리순신장군의 시조에 나오는 호가라는 악기도 장새납을 가리키는것이다.
우춘광에 의하면 장새납은 한국에서는 민속악기로 별로 발전이 없었지만 조선에서는 그 형태와 연주법을 개량하여 현대악기로 발전시키였다. 대표적인 연주곡은 “그네 뛰는 처녀”였다.
우춘광이 대련시조선족문화예술관에 와보니 료녕성에는 장새납 전문연주자가 자신뿐이였다. 그는 이 우세를 틀어쥐고 본격적으로 장새납과 민속악기 보급에 나섰다. 불과 몇년내에 그가 지도한 작품들은 2007년 료녕성군성상, 2008년 료녕성소수민족표연상 등 묵직한 상들을 타기 시작했다. 그중 료녕성소수민족경연은 문화관계통에서는 최고의 대회였다. 그가 지도한 학생들은 연변예술학교 등 전문학교들에 륙속 입학하고있다.
대학시절 꿈이 연변 제일의 장새납연주자가 되는것이였는데 현재 동세대에서 일인자로 꼽힌다고 한다. 그가 소지하고있는 장새납은 20여년전 조선에서 제작된것으로 어느 한국인이 만원에 팔라는것도 마다했다고 한다.
“수제비 만드는 사람이 국수 못 만들랴”는 말처럼 우춘광은 장새납뿐만아니라 모든 관현악기를 잘 다루며 업무특성상 장고 등 다른 민속악기들도 열심히 독파하여 대련시조선족문화예술관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인재로 꼽히고있다.
그는 “대련지역은 조선족문화가 많이 알려지지 않았기에 학생들로부터 시작하여 장새납을 가르치면서 제한된 지역과 공간에서나마 우리의 전통악기 장새납의 보급을 추진하고싶다.”며 “장새납소리가 우리 민족이 모인 곳마다 울려퍼지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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