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혼자서라도 록색입쌀진지 지키려는 서선촌 서기
조글로미디어(ZOGLO) 2011년12월7일 09시16분    조회:5362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리경수

<농촌에 가보다 > 새농촌건설에서의 통화현 조선족농촌 현황(2)

지난 세기 50년대 량질입쌀생산으로 주은래총리로부터 상장 수여받아

서선촌 리경수서기.

[길림신문 2011-12-06 장춘영 홍옥 기자 ]서선촌은 통화현 강전진의 소속으로서 통화현의 남단에 위치해 있으며 통화현 소재지인 쾌대무진과 31킬로메터 떨어져 있다. 통화현 강전진에는 13개 촌이 있는데 이중 서선촌, 민생촌, 동평촌 3개 조선족촌이 있다. 서선촌은 산좋고 물좋고 공기 또한 좋고 공장오염이 없는 곳으로 통화현의 소강남이라고 부르고있다. 서선촌은 또 길림성의 유명브랜드입쌀 《서강공미(西江贡米)》의 원산지이자 록색입쌀 생산지이기도 하여 이름이 있다.

서선촌ㅡ 유명브랜드입쌀 《서강공미》의 원산지

현재 중국 특히 길림성의 입쌀생산판매자라면 《서강공미》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통화현의 《서강공미》는 지난 세기 50년대에 벌써 중국에 널리 알려져있었다. 당시 서선촌에서 생산하는 입쌀로 주은래총리로부터 상장을 받아안은 영광까지 지녔다.

당시 대천원향 서강작업구라고 불리던 곳에 벼농사를 하는 조선족마을이 있었는데 그 조선족마을에서 생산해낸 입쌀이 향기롭고 감미로와 1957년에 대천원향 서강작업구가 전국선진으로 평의받고 주은래총리로부터 상장을 받아안았다. 그 조선족마을이 바로 지금의 서선촌이다. 당시 서선촌이 대천원향 서강작업구에 귀속되였는지라 서강작업구의 한족서기가 주은래총리로부터 상장을 받았었다.

그후 서강작업구가 서강촌이 되고 촌에는 조선족과 한족들이 함께 살고있었다. 조선족들이 근면하고 부지런하여 농토수리건설이나 농업생산을 막론하고 모두 앞장에 섰고 향, 진의 선진이라면 대부분 조선족들의 몫이였다.

1980년에 서선촌은 서강촌에서 분리되여 단독으로 서선촌을 설립했다. 초대서기는 김병무, 초대촌장은 최용서, 제2기 서기는 정영곤, 촌장은 김창도, 제 3기에는 김재홍이 서기로 지금의 서선촌의 서기 리경수가 촌장을 맡았다.

올해 58세 나는 리경수서기는 1987년도에 촌장으로 당선된후 촌주임, 서기를 력임하다 지금은 서기 겸 촌주임을 맡고있는데 올해가 촌간부로 있은지 24번째 되는 해이다.

리경수서기에 따르면 시장경제가 실시되면서 당시의 강전진 식량창고에서 서선촌에서 생산되는 입쌀을 《서강공미》로 등록하는 바람에 현재 서선촌에서 생산되는 입쌀이 진짜 《서강공미》이나 《서강공미》 상표를 달지 못하고있는데 그 피해가 막심하다.

서선촌의 량질입쌀을 토대로 현재 통화현에서는 《서강공미》 생산지를 약 700, 800무 늘리고 브랜드판촉을 강화하고있다. 현재 《서강공미》는 길림성 유명브랜드농산물, 중국록색식품, 중국(회안)량질입쌀박람교역회 10대 금상제품이란 미명을 갖고있다.

2005년 8월 13일, 통화시를 시찰하러 온 10기 전국정협 부주석인 장회서가 《서강공미》를 소개받고 친히 서강공미 원산지인 서선촌의 리경수서기를 만나 담소하면서 기념사진까지 남겼다.

안개속의 서선촌.

성실과 근면으로 록색입쌀 생산

서선촌에는 98호 농가에 호적인구가 357명 있으며 80여명이 한국로무를 떠났고 60여명이 연해지역에서 일하고있다. 현재 150명 촌민이 마을을 지키고있는데 대부분 로약자들이다. 서선촌의 경작지면적은 966무(1무에 667평방메터), 이중 764무가 논이고 200여무가 밭이다.

리경수서기는 《서선촌은 이미 토지류전을 완성했고 토지임대시 반드시 촌민위원회를 거쳐야 한다. 현재 농사를 짓는 조선족이 두집뿐이고 대부분 토지를 기타민족이 다루고있다》며 《앞으로 이 두 조선족농가에서도 농사를 지으려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리경수서기에 따르면 서선촌의 700여무 논중에 200무를 록색입쌀생산지로 만들었는바 통화현강달미업과 10년 계약을 맺고 주문생산을 하고있다. 서선촌의 록색입쌀은 통화현강달미업에서 판매를 책임지고 록우(绿优)상표를 달고 팔고있으며 기타 입쌀은 정급 등 상표로 팔고있다.

리경수서기는 《록색입쌀 생산기지를 더 늘일수는 있으나 판매때문에 더 늘이지는 못하는 실정이다. 중개소를 거쳐 팔기 때문에 생산지에서 쌀로 500그람에 3원 50전좌우로 팔리고있으나 정밀포장을 거친후 500그람에 30원씩 파는 슈퍼도 있다》고 밝혔다.

리경수서기는 《록색입쌀을 생산하려면 우선 농약을 써왔던 땅을 3년 넘게 잘 가꾸어야 농약잔류가 없어진다. 이외에도 토지영양성분이 표준에 도달해야 하고 공기, 물, 일조시간이 표준에 부합돼야 하며 공장오염이 없어야 한다. 서선촌은 통화현의 소강남으로서 록색입쌀 생산에 알맞는 고장이다. 서선촌에서는 또 삼도하(三道河) 물로 관개하는데 이 강은 샘물로 형성된것이다. 거기에 농약을 전혀 쓰지 않고 농가비료와 사람에게 해가 없는 생물농약을 쓰며 김을 맨다》면서 《록색입쌀을 생산하는데 원가가 높은것은 물론 정성이 더 든다. 특히 진짜 록색입쌀을 생산하려면 성실함도 록색입쌀생산 조건중의 하나이다》고 털어놓는다.

촌의 유일한 재산ㅡ 원 동평소학교의 건물과 운동장은?

서선촌에는 호도거리를 시작하기전에 인삼장이 있은 외에 다른 집체경제는 없었다. 학생원천때문에 원래 강전진정부에서 지은 종합교수청사에서 공부하던 조선족소학반도 2010년에 페지되였다.

조선족소학교였던 동평소학교는 서선촌과 조선족촌인 동평촌이 함께 투자건설했다. 2004년 강전진정부에서 촌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평소학교의 15무 땅을 점하고 종합교수청사를 지었다. 진정부에서는 조선족소학반으로 쓰였던 종합교수청사 3층을 서선촌과 동평촌에 주려고 하나 촌민들은 원 동평소학교 건물과 나머지 운동장을 돌려줄것을 요구하고있다.

이 문제로 리경수서기는 동평촌의 간부와 함께 진정부와 진일보로 되는 협상을 할 계획이다.

《계획경제시기 조선족들은 부지런하고 일 잘하고 열정이 높아 전 향에서 이름을 떨쳤다. 시장경제에 들어서면서 많은 조선족들이 해내외로 떠난데다가 자원우세가 결핍하고 교제범위가 좁은 등 원인으로 조선족촌들은 새농촌건설에서 기타 촌에 비해 뒤떨어지고있다. 통화현에서는 3년전에 기업, 단위에서 농촌과 손을 잡는 보보(包保)제도를 실시했다. 재력이 있고 능력이 있는 기업이나 단위의 도움을 받고 일어선 촌들이 많으나 서선촌은 그렇지 못하고있다》. 리서기는 이렇게 말하면서 《그래도 통화현민족종교국에서 우리 촌을 맡았기에 도랑을 만들고 집집마다 담장을 쌓게 되고 현재정국의 투자로 보행거리도 만들게 되였다》고 기뻐했다.

 자식반대 불구 록색입쌀 살리려고 농사짓는 촌간부

리경수서기의 슬하에는 딸 둘과 아들 하나 있다. 두딸은 통화지구에서 슈퍼를 경영하고있고 아들은 심양에서 슈퍼를 경영하고있는데 모두 장사가 잘 되는 편이다.

리경수서기는 자류지를 다루어오다 2006년부터 2010년까지 련속 5년간 50무되는 논을 혼자 다루어왔다. 성실함과 근면으로 록색입쌀진지를 지키고싶단다. 자식들은 아버지의 로고를 헤아려 농사를 짓지 말것을 권고하나 리서기는 금년에는 개인일로 농사를 짓지 않았지만 래년에는 계속 농사를 지을 타산이다.

리경수서기는 《자그마한 땅을 붙이는것으로 잘 살수 없기에 능력이 있는 청장년들이 살길을 찾아 외지로 떠날수밖에 없다. 서선촌는 그래도 록색입쌀을 생산하기 때문에 그나마 남보다 농사수입이 좀 높다하지만 대규모 생산을 해야만 더 많은 수입을 얻을수 있다. 촌간부후계자로 5, 6명 넘게 입당시키며 양성했지만 살길을 찾아 모두 떠나갔다. 지금은 조선족촌민에게 시집온 고중졸업생 한족녀성이 부녀주임 겸 회계를 맡고있다》며 서선촌의 우세인 록색입쌀생산을 계속 이어가고 발전시키려면 인재가 수요된다고 말했다.

리경수서기는 5년 유효한 한국방문비자가 있지만 올해 한국에 갔다가 촌사무가 걱정되여 인차 돌아왔다. 그는 《한국에서 일하는 대부분 조선족들은 아침에 일찍 일하러 나가서는 저녁 늦게 돌아오는데 참말 힘들게 살고있다. 텔레비나 신문을 볼 사이없이 보내고있는데 이대로 10년만 지나면 현시대의 뒤꽁무니에 설수밖에 없다. 농사를 지으려고 해도 과학영농을 해야 하는 지금 시대에서 밀려나는 일이 없도록 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면서 한국에 있는 조선족들이 앞으로 10년사이에 중국에 돌아와 고향건설에 몸담그고 우수한 인재들이 찾아와 촌경제를 춰세웠으면 하는 바램을 내비쳤다.

서선촌의 록색입쌀발전에 대해 리경수서기는 가공공장은 꾸릴수 있으나 판매가 걱정이다, 다시 말해 창업은 쉬우나 경영에 어려움이 있다는것이다. 그는 판매가 가능하다면 서선촌에서 록색입쌀생산지를 300무는 더 늘릴수 있다고 했다.

리서기는 《앞으로 상황이 악화되여 록색입쌀을 지을 사람이 없다하면 나 혼자서라도, 단 수십무 땅이라도 서선촌의 록색입쌀진지를 굳건히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서선촌의 전화: 139-4351-2922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미시간 대학을 졸업한 강유진 군은 2005년 재학시 앤아버 시의원직에 출마했다가 낙선했지만 3년만에 의원보다 더 나은 대통령 특별보좌관이라는 위치에 올라서게 되었다. 강 군은 지난해 11월 10일 비행기에 오르면서 오바마 후보가 강유진 군의 등을 치며 격려하는 사진과 12월 21일 하와이에서 대통령 당선자와 골프...
  • 2009-05-26
  • 1흔히 기자들을 일컬어서 발로 뛰는 사람들이라 칭한다. 견문이 많아야 현장감이 있는 신문기사를 많이 써낼수 있다느 말로 풀이된다.  하지만 음악가가 발로 뛴다면 보편적인 통념을 거부할수도 있다. 그런데 이 통념을 깨친 음악가가 있는데 그가 바로 《중국조선족민 간음악집》(이하 음악집으로 략함)을 펴낸...
  • 2009-05-22
  • “성공자의 과거가 비참할수록 행복하다.” 한국련속극에 나오는 이 대사를 좌우명처럼 여기는 예술인이 있다. 가요 “모두다 갔다”, “인생살이”, “금이야”, “마음부자 제일부자” 등 노래를 불러 대중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아안은 대중가수 최승화, 신물나는 가난...
  • 2009-05-22
  • “동포연구 ‘한우물 파기’ 올해로 20년 맞았다” 해외한민족연구소 이윤기 소장, 다음달 1일 연구소 창립 20주년 기념식 개최 동포문제가 주목받지 못하던 1989년부터 중국과 CIS지역 동포들을 위해 다양한 사업을 펼쳐온 해외한민족연구소(소장 이윤기·사진)가 다음달 1일로 창립 20주년을 맞...
  • 2009-05-21
  • 지난 12일, 금융위기와 조선족기업경제발전 포럼에 참석한 장춘(长春)의 대화호텔 이규광 동사장이 포럼을 통해 '건전한 기업과 충실한 경영가가 되는 길'이라는 주제로 연설을 했다. 이규광 동사장은 "창춘은 정치와 문화가 함께 발달한 도시로써 창춘의 기업인들이 그 영향을 받고 있다. 경제활동에서 치밀한 ...
  • 2009-05-18
  • "평범속의 휘황" -조선예술품소장애호가 위배평 취재기 중조수교 60주년을 맞으며 가동된 "중조친선의 해"를 계기로 조선예술품 소장가 위배평씨를 취재하기위해 그의 사업터를 찾은 것은 해빛도 따사로운 5월의 하루였다. 위배평씨의 사업터인 베이징시 공상행정관리국 해전분국 자죽원 공상소를...
  • 2009-05-16
  • 연변에서 코리아복장 유한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손향 동사장이 지난 13일, 금융위기와 중국조선족기업발전 포럼에 참석했다. "기업인들이 한대 모여 정보를 교환하고 문제점을 상호 보완해주는 자리라 생각돼 바쁜 일정에도 참석하게 됐다"고 포럼참석 계기를 밝혔다.손향 동사장은 "작년보다 참석 인원이 많...
  • 2009-05-15
  • 색스폰으로 엮는 연주와 전수의 인생—음악학원 군악학교 등에 18명의 제자 수송우리 연변은 해방전에 이미 규모를 갖춘 관악대가 여럿 있었고 해방후엔 학교를 위주로 각 현, 시마다 관악대가 활약했다. 또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관악연주가들을 양성해 국내 큰 악단은 물론 해방군 각 군악대에도 대량 수송했다. 오...
  • 2009-05-14
  • 20여년간 한 일터에서 재능을 아낌없이 발휘 현재 연변대학부속병원 영상1과 주임으로 활약하고있는 조지매는 대학입시를 회복한뒤의 첫 패 대학생으로 1982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연변의학원 의료전업을 졸업하고 학교에 남아 근무했다. 20여년간 그는 라사마냥 연변대학부속병원이라는 이 기계에서 착실하게 사업하면서 그...
  • 2009-05-14
  • 20여수의 히트곡을 만들어낸 대중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작곡가 고창모   지나온 삶을 돌이켜보면 모든것이 운명적이였다. 음악의 길을 선택하게 된것도, 사랑하는 안해를 만나게 된것도, 연변에서 작곡생활을 하게 된것도… 청춘을 문화대혁명이란 특별한 시대에 보내게 되여 조금은 힘들었지만 그는 결코 불행...
  • 2009-05-12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