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옛날과 지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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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중국력사상 가장 잔인한 10대 살인백정 댓글:  조회:4831  추천:0  2009-04-08
중국고대사에 나타난 10명의 살인미치광이들은 사람을 죽이고도 눈 한번 깜짝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의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면서 피빚을 얼마나 졌는지 모른다. 따라서 “백정”이라는 두글자로 그들을 형용하는것이 가장 적절할것이다. 그럼 아래에 력대 10명 살인백정의 “걸작”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철혈백정 백기(白起): 공손계라고도 불리운 백기는 전국시기의 진나라 대장군이였다. 싸움판에서 백기가 어찌나 무자비했던지 6국의 군대들은 백기가 군사를 거느리고 온다는 말만 들어도 혼비백산할 지경이였다. 사서에 기재된데 의하면 당시 다른 나라들에서는 모두 진나라와 싸울 엄두를 못냈다. 사서는 뒤에 주해를 달았는데 그 내용은 진나라에 백기가 있었기때문에 모두들 무서워했다고 밝혔다. 기원전 294년, 백기는 군사를 거느리고 한나라와 위(魏)나라를 치면서 이궐(이궐: 지금의 하남성 락양시 룡문지역)에서 한위련합군을 격파했는데 적군의 수급을 벤것만도 24만개에 달했다. 기원전 278년, 군사를 거느리고 초(楚)나라공략에 나선 백기는 물을 터뜨려 언성(언성: 지금의 하북성 의성 동남쪽)이 잠기게 함으로써 군민사망자수가 수십만명에 이르게 하여 시체가 사처로 물우에서 떠다니게 하였다.   기원전 273년, 백기는 군사를 이끌고 조나라와 연나라의 련합군을 공격, 화양(화양: 지금의 하남성 신정북)에서 조연련합군을 대패시켰는데 그가 벤 수급만도 13만개에 달했다. 후에 백기는 또 조나라장군 가언과 일전을 벌렸는데 물을 리용해 조나라병사 2만명을 익사시켰다. 기원전 264년, 백기는 한나라를 공략하며 한나라 생력군 5만여명의 목을 전부 베였다. 기원전 260년, 조나라와의 장평전투에서 백기는 생포한 조나라군사 40만명을 생매장하고 겨우 240명의 소졸을 돌려보내 소식을 전하게 했다. 이로써 추산으로 도합 100만여명을 살해한 백기는 통계가 불완전한 살인장부를 가지고있다. 량계초의 고증에 따르면 옹근 전국시기에 도합 200만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그중 절반의 생명을 백기가 죽여버렸다.   잔인한 살인백정(辣手屠夫) 조조(曹操): 조조는 란세의 간웅일뿐만아니라 잔인하기 그지없는 살인백정이였다. 기원 193년, 도겸을 공략할 때 서주대도살을 감행, 기재에 따르면 남녀로소 가리지 않고 10만여명을 살해했을뿐만아니라 개든 닭이든 짐승조차도 가만놔두지 않고 닥치는대로 죽여 도처에 시체가 널린 까닭에 사수하까지 막혀 흐르지 못하는 정도가 되였다. 이밖에 조조는 장막을 치면서 옹성(雍城)토벌을 감행했고 려포를 치면서 팽성(彭城)토벌을 감행했으며 원상을 치면서 업성토벌을 감행하고 오환을 치면서 류성(柳城)토벌을 감행했는데 이르는 곳마다에서 모조리 죽이는 정책을 실시하여 그 수단이 극히 잔인함을 보여주었다.   미치광이살인백정 황소: 당조말년의 농민기의군 수령 황소는 횡포하고 지독하기로 소문났다. 황소는 장안성을 함락한후 사람을 어찌나 많이 죽였는지 시체가 온 거리에 널려있을 정도였다. 후에 관군이 다시 장안성을 수복한후 백성들은 완전히 관군의 립장에 서서 “황소가 사람을 마구 죽여 피가 온 성안에 질벅했다”고 공소했다. 《구당서》의 기재에 따르면 “황소가 군사를 거느리고 진주를 1년간 포위하고있었는데 량초가 다 떨어지자 수백개의 대형 돌절구를 만들어놓고 펀히 살아있는 백성들과 포로들을 남녀로소 구분없이 돌절구에 넣고 찧어서 그 고기를 병사들이 먹게 했다. 진주 4개주의 백성들을 다 잡아먹고나자 황소는 또 하남, 허, 당 등 10개주의 백성들에게도 마수를 뻗쳤다. 황소는 또 광주 대사에서 학살을 감행했는데 아랍 등 무슬린상인들을 20여만명 살해했다. 과연 그 미친듯한 살인행각은 사람들로 하여금 모골이 송연해지게 하였다.   야만백정 테무진: 테무진이 세운 몽골제국의 패업은 가히 수많은 사람의 백골로 세운것이라고 말할수 있다. 기원 1215년, 테무진은 금나라의 도성 중도(지금의 북경)를 함락했는데 성안의 백성들을 한달동안이나 대도살했다. 당시 100만명을 헤아리는 사람들이 그 재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기원 1221년, 테무진은 한차례 서방정벌에서 대도살을 감행했는데 당시 몽골병사 5만명이 매인 평균 24명의 백성을 도살함으로써 도합 12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최악의 백정(屠夫之最)   구비라이(忽必烈): 이 원나라의 건립자는 종족멸종의 정책을 시행하여 한족들을 대거 학살했는데 그 사망자는 1800만명이 넘었다. 중국 북방의 90%의 한족평민들은 대부분 그 종족멸종의 참극에 희생양이 되고말았다. 구비라이가 사천에서 대도살을 감행하기전에 300만~2000만명의 인구가 있었는데 도살후 80만명도 남지 않았다. 이 인간성을 상실한 종족멸종행위는 기니스세계기록대전에 수록(1985년)되였다.   랭혈백정(冷血屠夫)  주원장(朱元璋): 이 목동은 황제가 된후 갑자기 마음이 변하여 공신, 조신들을 마구 학살했다. 사서에 기재된데 의하면 호유용, 리선장, 란옥삼 사건에서 도합 10만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주원장은 재위 30년간 20만명을 살해했는데 공신들은 기본상 다 죽여버렸다. 주원장은 상우춘(常遇春)에게 이쁜 첩을 안겨주었는데 상우춘의 안해가 그 첩의 손목을 잘라버렸다. 이를 알게 된 주원장은 즉시 사람을 보내여 상우춘의 안해를 죽여버리고 그 갈비뼈를 삶아서 상우춘 및 대신들이 식용하게 하였다. 주원장은 또 사람의 가죽을 바르는 형벌을 만들어 잔인한 본색을 세상에 알리였다. 변태백정 주체: 애비 주원장에 비해 주체 역시 살인백정으로 손색이 없었다. 1402년, 그는 친조카 건문제의 황위를 빼앗은후 건문제궁의 녀관, 태감 등 모든 사람들을 다 죽여버렸는데 한번에 1만 4000명이나 학살했다. 그는 또 건문제에게 충성하던 옛신하 방효유 등을 전부 살해했는데 그의 “10족”까지 화를 면치 못했다. 그리고 방효유의 안해 및 그 가족중의 녀자들은 군영에 가두어놓고 병사들이 마음껏 즐기게 했는데 한명의 녀자가 밤낮이 따로 없이 20여명 사내들의 수욕을 만족시켜야 했다. 그러다가 육신이 지쳐서 죽는 녀자는 시체를 가져다 개에게 먹이게 했다. 영락말년, 주체는 또 한번 궁녀, 환관들에 대한 대도살을 감행했는데 이번 대참사에서 살해된 궁녀만도 근 3000명에 달했다. 림종을 앞두고도 학살본성을 잊지 않은 주체는 바로 죽는 날에도 30여명의 궁녀들을 목을 매달아 죽여버림으로써 자기와 함께 묻게 했다. 과연 명실상부한 변태살인백정이였다. 야성백정 장헌충: 명나라말년의 기의군 장령이였던 장헌충은 군사를 거느리고 성도를 함락한후 3일동안의 대학살을 명령했다. 그로서 3일후 대학살을 그만둔후에도 장헌충은 의연히 날마다 100여명씩 살해했다. 그러다가 청나라군이 몰려오자 장헌충은 곧바로 도망쳤다. 바로 대군이 성도에서 도망치기전에 그는 참혹한 “4광정책”을 실시했는데 그것이 바로 사천인을 모조리 죽이고 일반백성으로부터 군인가족(로약자와 환자, 부상자)에 이르기까지 또 자기 군사들중에 있는 호북병사와 사천병사들 그리고 최초에 자기를 따르며 사선을 넘나들던 친병들까지 모조리 죽여 그 고기를 베여 군량으로 했다. 기재에 따르면 어느날 저녁, 장헌충은 자기가 부르는데 대답하지 않았다는 리유로 명령을 내려 자기의 어린 아들을 죽이고는 이튿날 후회마지 않다가 처첩들을 불러 왜 아들을 구하지 않았느냐고 문책했다.   그리고는 처첩들은 물론 자기 아들을 죽인 도부수들까지 모조리 죽여버렸다. 장헌충은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여러가지로 만들어냈는데 그중에는 백관들앞에서 10마리의 개를 풀어놓아 개가 누구한테 가서 냄새를 맡으면 곧 그를 죽여버렸는데 이것을 가리켜 “천살”이라고 했다. 장헌충은 매번 사람을 죽일 때마다 상세하게 기록해놓았는데 그중에는 사람머리가 몇무지이고 사람의 손이 몇무지이며 사람의 귀가 몇무지라는것까지 다 기록되여있었다. 마성을 함락한후 그는 부녀들의 발을 잘라내여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가장 이뻐하는 첩을 데려다 참관시켰다. 그런데 첩이 웃으면서 “보기는 좋으나 아름다운게 부족해요. 이쁜 발 한쌍이 더 있었으면 좋겠어요.”라고 하자 장헌충은 “너의 발이 제일 예쁘다”며 바로 그 첩의 발을 잘라내여 “발산더미”에 올려놓았다.   흡혈백정(嗜血屠夫)  누르하치: 누르하치는 군사를 거느리고 료동지구를 점령한후 당지 가난한 사람들이 생활이 바빠 반란이라도 일으킬가봐 료동지구의 빈민들을 모조리 붙잡아다 살해했다. 후에 또 료동의 부자들이 압박에 못이겨 반항할가봐 두려워 료동지구의 부자들도 대부분 다 죽여버렸다. 누르하치는 료동백성 도합 300여만명을 살해했는데 료동지구의 한족들은 기본상 다 화를 면치 못했다. 이는 피를 보기 좋아하는 누르하치의 본성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지옥백정 다탁: 청나라 예친왕(豫 王)인 다탁은 1645년에 군사를 거느리고 양주를 포위한후 대포를 쏘아 성문을 열고 양주성에 짓쳐들어갔다. 다탁은 련속 10일간 대도살을 감행해 양주백성 80만명을 살해했다. 이로써 번화하던 양주성은 순식간에 인간지옥으로 변했다. 청나라군이 양주백성들을 보는대로 살해하다보니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이게 되였는데 어린애들도 재화를 피하지 못했다. 나중에 련못도 피로 물들어 벌겋게 되였는데 이런 상황을 만들어낸 다탁이야말로 명실상부한 지옥백정임에 틀림없다.    《신랑넷》    
17    돈에 눈이 어두워 타락된 형사경찰대장 댓글:  조회:4363  추천:0  2009-04-08
장위는 남방 모 도시의 형사경찰대 대장이고 리청은 라지오방송국 인기사회자이다. 두 사람은 첫눈에 정이 들어 번개식결혼을 했다. 결혼후 리청이 성라지오방송국으로 전근되여 신혼부부는 아쉬운대로 갈라져 생활해야 했다. 리청은 중층간부로 승진했지만 장위는 여전히 제자리에 머물고있었다. 장위는 자신의 체면을 세우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여 그는 몇년간 애써 분투하여 따낸 형사결찰대 대장직을 버리더라도 돈을 벌려 했다. 나중에 그가 찾은것이 년봉30만원인 해외 보안직이였는데 출국꿈이 깨지고말았다. 후에 장위는 돈많은 “누님”을 만나서 그와 손잡고 비법적인 수단으로 많은 돈을 긁어모았다. 장위는 안해뿐만아니라 지위, 명예 모든것을 잃었다…   영웅과 미녀 첫눈에 반하다 장위(1973년생)는 우수한 성적으로 경찰학교를 졸업하고 공안파출소에 배치받았다. 장위는 그동안 여러번 공을 세웠고 2003년 8월에 공안분국형사경찰대 대장으로 승급했다. 장위는 출근하자마자 “경원사회구역에 도적이 들었다”는 제보를 받았다. 그는 경찰들을 거느리고 사건현장에 달려갔다. 젊고 예쁜 한 녀자가 열정적으로 경찰들을 맞이했다. 그 녀자를 본 장위는 일순간 멍해졌다. 이 녀자가 바로 라지오방송국의 인기사회자 리청이였다. 리청은 장위에게 도적이 든 사연을 말했다. “국경절휴가에 향항으로 관광을 떠난 사이에 집에 도적이 들었습니다. 금손목시계와 노트북이 없어졌어요.” 장위는 조사를 끝마치고 리청에게 명함장을 주면서 일이 있으면 련계하라고 했다. 명함장을 받아쥔 리청은 놀라했다. “며칠전에 국제마약사건을 해명한 그 유명한 형사경찰이 바로 당신인가요? 참 반가습니다. 이렇게 만나다니.” 리청은 며칠전에 장위의 영웅사적을 보도한적이 있었다. 장위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번 사건도 꼭 밝혀내여 물건을 되찾아주겠습니다.”고 말했다. 이틀후 리청은 장위의 전화를 받았다. “사회자님, 도적을 붙잡았습니다. 물건을 찾아가십시오.” 리청은 돌려받은 노트북이 켜지지 않는다고 장위에게 전화를 했다.  장위는 도적을 다시 심문했다. 도적은 부속품을 뜯어내여 팔았다고 탄백했다. 장위는 리청에게 설명하고나서 퇴근후 자기가 부속품을 사주겠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장위와 리청은 첫 만남에서 서로 눈이 맞아 사랑하다가 2003년 12월 25일에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후 장위와 리청은 샹그리라로 밀월을 떠났다. 하지만 도중에 리청이 성라지오방송국으로 전근되였으니 속히 돌아와 수속을 밟아야 한다는 긴급전화가 올줄이야. 리청과 장위는 아쉬운대로 밀월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음성양쇠”배후의 실망과 고통 교통이 좋아 이 도시에서 성소재지로 가려면 아주 편리했다. 하지만 장위는 사업때문에 성소재지로 갈 시간이 없었고 리청도 일이 바빠 남편을 찾아가지 못했다. 하여 신혼부부인데도 한달에 겨우 한번 만날 정도였다. 장위는 안해가 있는 성소재지로 전근하려고 노력하였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리청도 큰 압력을 받고있었다. 청취자들은 원 사회자의 풍격에 습관되여서인지 리청의 사회에 불만이 많았다. 총편집이 리청을 찾아 청취률이 계속 하강하면 자리를 내놓으라고 했다. 리청은 청취률을 높이려면 원래의 틀에서 벗어나 프로를 대대적으로 개편해야 한다고 제의했다. 개편한후에도 청취률이 올라가지 못하면 그때에 가서 스스로 물러나겠으니 한번만 기회를 달라고 사정했다. 리청이 개편하여 새로 꾸린 프로가  인기를 끌었고 청취률도 대폭 늘어나 라지오방송국의 명프로로 탈바꿈했다. 이때로부터 리청은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고 각종 사회활동도 많아지기 시작했다. 2004년 6월, 장위는 승급할 기회를 놓치고 너무도 상심해 안해한테 놀러갔다.  리청은 교제가 빈번했고 남편과 같이 있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주말에 리청은 남편을 기쁘게 해주려고 친구의 자가용차를 빌려와 교외에서 하루를 보내자고 제의했다. 남편이 차를 몰고 교외로 가는데 리청의 핸드폰이 울리였다. 리청은 미안해하면서 남편을 보고 말했다. “여보, 오늘 안되겠어요. 급한 일이 있으니 지금 돌아가야 해요. 차를 돌리세요.” 장위는 못들은척하면서 계속 차를 앞으로 몰았다. 리청은 화를 냈다. “단위에 급한 일이 있으니 돌아가야 해요. 차를 세우지 않으면 난 뛰여내리겠어요.  50만원 광고계약과 관계되는 일이니 빨리 차를 돌리세요.” 장위는 성소재지에 더는 있을 멋이 없어서 인차 돌아갔다. 리청은 그동안 남편을 너무 랭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시간을 타서 2000원짜리 고급양복을 사들고 친구의 고급승용차를 몰고 남편에게로 왔다. 리청은 집에 가지 않고 남편이 근무하는 공안분국마당에서 남편이 퇴근하기를 기다렸다. 때마침 남편이 동료들과 함께 퇴근하느라 대문을 나왔다. 리청이 차에서 내려 남편에게로 다가가는데 생각밖에 남편은 리청을 본체만체하면서 자기 오토바이를 타고 자리를 피하는것이였다. 집에 돌아와 리청은 왜 그러는가고 물었다. 그러자 남편이 버럭 화를 냈다. “내가 돈이 없는줄 나도 잘 알고있소. 당신이 유명한 사회자라는것도 모두들 알고있소. 고급승용차를 몰고와 날 망신주려고 그러는거요? 남들이 날 어떻게 보겠소?” 리청은 “당신 참 이상해요. 남들이 뭐라 말하든지 뭐가 대수죠? 우리 둘만 서로 사랑하고 행복하게 지내면 안되나요?”라고 말했다. “당신이 이렇게 날 망신주고도 우리 행복할수 있소?” “체면따위가 그리 중요해요? 당신이 능력있으면 난 집에서 애를 낳아 키우면서 가정주부로 되겠어요. 누군 사회교제가 좋아서 그래요? 나도 인젠 너무 힘들고 지겨워요. 하지만 사업때문에 별수 없어요. 당신 왜 조금도 리해 못해요?” 이튿날 리청은 성소재지로 떠나면서 남편을 위로했다. “여보, 너무 상심해하지 말아요. 난 당신의 능력을 믿어요.” 장위는 안해의 생일선물로 7만원을 주고 자가용차를 샀다. 하지만 생각밖에 리청은 살바엔 돈을 좀 보태여 더 좋은것을 사면 좋지 않는가, 이런 차는 모양도 없고 기능도 차하다고 나무리였다. 장위는 안해의 생일연회에 참석했다. 안해의 동료와 친구들은 모두 고급자가용차를 몰고왔다. 이때에야 장위는 자신이 너무 비천하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리청이 성소재지에서 사회교제가 많으며 늘 돈많은 부자들과 휩쓸려다니고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장위는 믿어지지 않았지만 어쩐지 기분은 좋지 않았다. 그는 아이가 있으면 부부의 감정이 흔들리지 않을것이라고 생각했다. 2005년 국경절휴가에 장위는 안해보러 성소재지로 갔다. 이때 리청은 보도부주임으로 승진하고 새집도 분배받았다. 저녁에 장위는 안해를 품에 안고 말했다. “친구들이  모두 아이를 낳아 키우고있는데 참 부럽습데. 우리도 아이를 낳아 키우기요.” 리청은 사업에서 한창 성과를 올리고있는 시기에 아이를 낳고싶지 않았다. “당신의 심정을 리해해요. 하지만 2년만 더 기다려주세요. 나의 사업이 안정되면 그때에 가서 아이를 낳아 키우자요..” 남편은 당금 아이를 낳아 키우자고 우기였고 안해는 안된다고 견결히 반대했다. 하여 둘은 처음으로 얼굴을 붉히면서 다투었다… 자신의 체면을 세우려다 범죄길로 2006년 음력설에 대학교 동창생들의 모임이 있었다. 동창생들은 장위가 좋은 안해를 만났다면서 부러워했다. 하지만 장위는 시뿌둥했다. “난 너희들이 생각하는것처럼 행복하지 않아. ” 이때 리청이 부국장으로 제발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장위는 이대로 계속 발전하면 사회적직위차이로 혼인도 위험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장위는 어떻게 하면 자신의 지위를 높일수 있고 안해와 짝지지 않을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고있었다. 한 동창생이 장위를 보고 말했다. “너도 알고있지? 종위말인데, 그자식이 지금 오스트랄리아에서 보안원으로 일하고있는데 1년수입이 30만원이래.” 며칠후 장위는 종위의 소식을 알아내고 QQ로 그와 대화를 했다. 종위는 “헛생각을 버리고 착실히 살거라. 보안일이 뭐가 좋다고 출국하려 하니? 그 좋은 직업을 버리면 후회할거다.”라고 권고했다. 그러자 장위는 출국하여 꼭 돈을 벌어야 한다면서 출국할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사정했다.장위는 그날 저녁으로 안해에게 전화를 했다. “오스트랄리아에 있는 동창생이 경찰자리를 알선해주었소. 1년수입이 지금 내 로임의 10배나 된다고 하오.” 장위는 체면때문에 차마 보안일군이라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경찰직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리청은 반대하지 않았지만 “잘 생각한후 결정하세요. 외국생활이 생각한것처럼 쉽지는 않을겁니다. 신중하세요.”라고 타일렀다. 2006년 4월, 장위가 북경에 가서 로무송출에 관해 알아보니 중개비용이 18만원이였다. 장위에게는 그만한 돈이 없었다. 친구의 알선으로 장위는 조연홍이란 녀성을 만났다. 조연홍은 남편도 있고 자식도 있는 녀자였지만 1000만원을 가진 대부자였다. 조연홍은 장위가 가지고온 서류를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형사경찰대장이 외국의  보안일군으로 가려 하니 참 우스워요. 돈을 위해서라면 나가지 말고 나와 함께 일해보자요. 돈을 많이 주겠어요. 어때요?” 그날 저녁 조연홍은 술상을 차리고 장위를 대접했다. 밤중에 장위가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고 불을 켜니 조연홍이 알몸으로 자기옆에 누워있었다. 장위가 그녀를 밀어내자 그녀는 장위의 품에 감겨들면서 “나와 함께 일해보자요. 난 당신과 같은 영웅이 마음에 들어요.”라고 말했다. 이튿날 저녁, 장위는 비행기를 타고 성소재지로 돌아갔다. 떠날 때 조연홍은 장위에게 돈 2만원을 주면서 “그동안의 수고비입니다. 난 당신을 기다리겠어요.”라고 말했다. 저녁 8시에 리청은 자가용차를 몰고 공항에 나가 남편을 마중했다. “지금 우리 힘들더라도 참고 이겨내자요. 나도 줄을 달아 당신을 꼭 성소재지로 전근시키겠어요.” 장위는 안해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큰돈을 벌고싶었다. 그는 큰 결심을 내리고 북경에 있는 조연홍에게 전화를 했다. 사실 조연홍이 남을 도와 밀입국하는 일을 하고있었다. 장위는 직무의 편리를 리용하여 밀입국자들에게 가짜호적부와 가짜신분증을 만들어주면 된다고 하면서 매 사람에게서 1만원 내지 4만원을 벌수 있다고 했다. 그후 성소재지에 있는 리청은 남편이 한 녀성과 부정당한 관계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고 또 남편에게 출처가 불투명한 돈이 있는것을 발견했다. 장위는 돈벌이에 정신을 팔다보니 사업에서 오차가 많이 생겨 비판을 받았다. 결국 그는 죄가 두려워 사직하고 북경에 있는 조연홍을 찾아갔다. 2007년 10월, 장위와 리청은 리혼했다. 2008년, 조연홍은 장위을 보고 오스트랄리아로 피신하라고 알려주고는 자기는 미국으로 도망쳤다. 장위는 부모님들을 만나보려고 고향에 갔다가 경찰에게 잡혔다. 조사결과 장위와 조연홍이 손잡고 선후로 50여명의 밀입국자들을 외국에 보내주고 장위 혼자서만 비법적으로 90여만원을 받아먹은 사실이 밝혀졌다. 《지음》    
16    중국주일점령군 파견되지 못한 내막 댓글:  조회:5798  추천:1  2009-04-08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투항한후 미국정부는 중국정부에 련합군을 도와 부대를 일본에 파병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국제, 국내 형세의 변화로 하여 중국은 전승국으로서의 이 권리를 결국 상실하고말았다. 1945년 9월, 미국정부는 미국주재 중국대사관을 통해 중국정부에 공문을 보내왔다. 대체적인 뜻은 “중국정부가 부대를 파견하여 련합군이 일본을 점령하는데 협조해달라는것”이였다. 국민당정부는 당시 국내정세를 고려하여 려단규모의 지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전하는데 의하면 중국과 미국 쌍방은 일찍 중국주일점령군파견문제에 대하여 여러차례 협상을 하였다. 처음에 미국에서는 5만명의 군사를 요구했고 손립인이 지휘하는 신1군을 지명하여 이 임무를 담당하도록 요청했다. 신1군은 전부 미국식으로 무장했고 손립인도 미국버지니아군사학교를 졸업하였다. 손립인은 미국의 여러 장군들과 안면이 있었고 신1군은 광주에 주둔하고있었으므로 일본으로 가기도 편리했다. 국민당정부는 신1군을 파견하는것을 동의하지 않았다. 신1군은 당시 국민당군대에서 첫번째 혹은 두번째로 가는 전투력을 가진 부대였고 일찍 동북으로 옮겨가 임무를 수행하기로 결정되여있었다. 국민당정부는 전투력이 강한 정예부대를 국내에서 유용하게 활용하고싶었던것이다. 미국측은 다시 최소한 사단규모로 보내달라고 요청했으며 사단규모가 아니면 의미가 없다고 했다. 여러번 검토한 끝에 국민당정부는 1만 5000명으로 편제된 사단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결정된 부대는 1945년 12월에 하노이에 가서 항복을 받은 영예1사단으로 구성된 륙군67사단이였다. 이 사단의 사단장은 대견이였다. 이듬해 4월, 영예2사단은 남경정부의 명령을 받고 하이퐁으로 가서 명령을 기다리고있었다. 련합군 총사령부가 처음에 중국주일점령군 주둔지로 정한 곳은 니아까따현을 중심으로 하는 호꾸리꾸지역이였다. 국민당정부는 니아까따는 일본의 중요한 지역도 아니고 공업지역도 아니며 산이 많고 사람이 적은 곳이여서 중국점령군의 체면이 서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시꼬꾸를 주둔지로 해달라고 제의했다. 그곳은 대공업지역은 아니지만 완전한 하나의 섬이여서 중국군대가 이곳에 주둔한다면 다른 나라에서 온 부대와 접촉할 일이 없으므로 관리하기 편리했다. 련합군에서는 시꼬꾸는 이미 영국군의 주둔지로 결정되였다고 중국측에 통지했다. 중국측은 다시 큐슈를 요청했다. 큐슈는 상해와 가깝기에 보급이나 련락이 모두 편리하다고 설명했다. 나중에 련합군총사령부는 아이치현을 중심으로하여 시즈오까와 미에 2개현을 포함한 곳을 지정해주었다. 아이치의 현정부소재지 나고야시는 일본의 제3대공업지역이였고 시즈오까는 농업지역이여서 주둔하기 편리한 곳이였다. 이리하여 중국주일점령군이 주둔할 곳이 정해졌으며 미군 제8군의 지휘를 받기로 결정되였다. 1946년 5월초, 장개석은 남경에서 제67사단의 사단장 대견을 접견했으며 3차례에 거쳐 련급이상의 모든 장교들을 접견했다. 5월 27일, 련합군일본관제위원회 중국대표단 단장인 주세명은 대견과 함께 일본으로 갔다. 그들은 완전무장하고 일본에 들어가서 전승국의 위엄을 보여주었다. 먼저 일본에 도착한 중국점령군 사전파견부대는 주로 련합군총사령부와 미군 제8군과 련락을 취했다. 사전파견부대는 또 중국군이 주둔할 주둔지와 부대건물현황을 살펴보았다. 대견 등은 비행기편으로 일본 아츠기공항에 도착한후 군용찌프차를 타고 도꾜로  떠났다. 6월 4일 오전, 도꾜에 도착한 대견과 주세명은 함께 련합군총사령관 맥아더장군을 만났다. 사령관은 대견에게 67사단의 편제장비일람표를 건네주면서 두가지 임무를 내렸다. 첫째, 미군에 각급장병의 급여수당표를 요구해서 중국점령군의 장병 급여수당표를 초안하는데 참고하도록 하라. 둘째, 자동차문제를 계속 련락해보라. 제67사단은 모두 1만 4500명인데 3개 보병련대, 1개 운수련대, 1개 전차대대, 1개 공병대대, 1개 통신대대, 1개 특수임무중대 그리고 1개의 야전군병원과 200여명의 의료대, 100여명의 선전대로 구성되였다. 그리하여 전체 사단의 급여수당은 괜찮은편이였고 비용도 많이 들었다. 당시 딸라를 단위로 계산했는데 미군기준보다 장교는 30~50%가 낮고 병사는 약 20%가 낮았다. 최저급인 2등병의 매달 로임은 20딸라였다. 가장 높은 소장인 사단장은 매달 430딸라였다. 이렇게 계산하면 전체 사단의 고정된 급여수당으로 매달 50만딸라가량 수요되였다. 여기에 출장비, 교육련습비 등 각종 잡비를 포함하면 매달 적어도 200만딸라가 필요했다. 중국점령군의 사전파견부대가 일본에 도착한후 약 1주일이 지나서 련합군총사령부 참모처는 중국측과 첫번째 회의를 가졌다. 67사단은 3가지 중화기가 있었는데 자동차가 끄는것도 있고 말이나 당나귀에 싣고 다니는것도 있었다. 그리하여 말과 당나귀 문제가 중점적으로 화제에 올랐다. 동물이 휴대한 전염병독을 막기 위해 련합군총사령부는 말과 당나귀는 반드시 해안에서 검역을 받아야 한다고 제의했다. 모든 동물들이 검역을 받으려면 대략 3~6개월의 시간이 필요했다. 중국측은 시간을 앞당기기 위해 자동차를 보충해줄것을 요구했다. 중국군대가 사용하는 연료는 주로 나무장작이였는데 련합군총사령부는 일본점령규정에 따라 장작을 일본에서 징용하거나 구매할수 없다고 하면서 반드시 중국에서 운송해와야 한다고 했다. 중국측에서 장작을 사용하게 되면 전 사단이 매달 450톤씩 써야 하므로 운송량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중국측은 이 상황을 국내에 보고하여 석탄과 기름으로 장작을 대체하자고 건의했다. 미군측은 련합군이 점령한 일본의 일부 법규를 추려서 중국측에 알려주었다. 첫째는 미군의 일본에 대한 통제권이고 둘째는 각국 점령군의 생활비용, 물자는 모두 본국이 부담하며 일본에서 나무 하나 풀 한포기 가져가서는 안된다. 중국점령군의 사전파견인원은 요꼬하마에서 7월중순까지 기다렸는데 아무런 소식도 받지 못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장개석은 중국점령군을 일본에 파견하는데 동의하지 않았다. 점령군을 일본에 파견하는데 드는 1개사단의 비용이면 중국내에서 10개의 사단을 운영할수 있었다. 장개석이 보기에 이것은 아무런 득도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 절박한 문제는 공산당과의 내전이였고 모든 병력을 내전에 투입하여야 했던것이다. 장개석의 계산으로는 로남(산동남부)과 강소 태흥지구를 얻기만 하면 바로 사단을 빼내서 원래 계획대로 일본에 보내기로 했다. 이 67사단은 해안, 여고에 도착한후 얼마 되지 않아 속유, 담진림이 이끄는 화동야전군에게 완전히 전멸당하고말았다. 당초 미국이 장개석에게 부대를 파견해달라고 요청한것은 다른 속셈이 있었다. 즉 쏘련으로부터 미국 혼자 일본을 점령하였다는 비난을 받는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중국군대가 전승국의 립장에서 일본에 파견되는것은 얻기 힘든 기회이며 세계에 중국의 위험을 보여주는 좋은 기회였는데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15    죽음보다 강한 모성애 댓글:  조회:4661  추천:0  2009-04-07
깊은 산속에 젊은 부부와 아이들이 살고있었다. 어느날 남편이 시내에 볼일이 있어 사흘동안 집을 비우게 되여 안해는 혼자서 아이들을 보살폈다. 남편을 떠나보내고난 안해는 뒤뜰의 장작더미를 가져다가 불을 지펴 밥을 지을 생각으로 뒤뜰에 갔다가 그만 장작더미속에 숨어있던 뱀에게 물리고말았다. 그 순간 안해의 머리속에는 수많은 생각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뱀에게 물렸으니 독이 온몸에 퍼질테고 남편은 사흘뒤에나 돌아올텐데 꼼짝없이 죽게 생겼구나. 내가 죽으면 아이들은 사흘동안 어떻게 지낼가?) 순간적으로 이런 생각이 미치자 그녀는 빨리 아이들을 위해 사흘동안 지낼수 있도록 일을 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장작더미를 가져다가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서 큰딸에게 불을 지피는 방법을 가르쳐주어 사흘동안 계속 불을 지필수 있도록 하고 먹을것을 준비해서 아이들의 손이 닿는 곳에 놓아두었다. 그리고는 아이들을 불러모아 이야기를 했다. “얘들아! 엄마가 깨여나지 않아도 놀라지 말고 무서워하지도 말아라. 잘 지내고있으면 곧 아빠가 돌아오신단다.” 그녀는 아이들을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몸을 아끼지 않고 애를 썼다. 그러자 그녀의 몸에는 땀이 물 흐르듯 흘러내렸다. 그렇게 흘러내리는 땀이 그녀 몸속의 독기를 제거해주었다. 하루밤이 지나고 이틀밤이 지나도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사실에 그녀는 스스로도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아마도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에 죽음조차도 머리를 숙였는가보다.                                      《가정문적보》  
14    오토바이를 탄 남녀 댓글:  조회:4517  추천:0  2009-04-07
어느날 남자와 녀자가 오토바이를 타게 되였다. 남자는 녀자를 깊이 사랑했지만 녀자는 남자에게 별로 호감이 없었다. 그저 친구정도로 좋아하고있을뿐이였다. 달리는 오토바이에 처음 앉아보는 녀자는 처음에는 즐거워했지만 속도가 점점 빨라지자 무서워서 앞에 있는 남자에게 말했다. “나 무서워! 속도 좀 죽여!” 그때 남자가 말했다. "나를 꽉 안아주면 속도를 죽일게.” 이 말에 녀자는 남자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속도는 죽어들지 않았기때문에 녀자는 남자에게 다시 한번 말했다. “난 정말 무서워! 장난치지 말고 속도 좀 죽여줘!” 남자는 말했다.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줘. 그럼 속도를 죽일게.” 녀자는 속도가 빨라지는것이 너무 무서워서 남자에게 말했다. “사랑해! 난 널 사랑해! 그러니깐 제발 속도좀 죽여줘!” 그러나 속도는 계속 빨랐다. 이에 약간 화가 난 녀자는 “야, 정말 속도 좀 죽이라니깐!”라고 소리쳤다. 남자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녀자에게 말했다.“네가 지금 내 안전모를 벗겨서 쓰면 정말로 속도를 죽일게.” 녀자는 무서워 떨면서 간신히 남자의 안전모를 벗겨 자신의 머리에 썼다. 얼마후 오토바이사고가 났는데 남자는 그 자리에서 사망되고 뒤에 앉았던 녀자는 경상을 입었다. 교통경찰이 녀자에게 사고원인을 알려주었다. “원인은 제동기고장입니다!” 녀자는 울면서 남자의 시신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가정백과보》    
13    사랑의 진실 댓글:  조회:4503  추천:0  2009-04-07
어떤 남자에게 사랑하는 녀자가 생기게 되였다. 하지만 녀자는 질투심이 강하여 자꾸만 남자에게 “당신은 내가 좋아? 아니면 당신 어머니가 좋아?” 라고 물어보았다. 그때마다 남자는 “그…글쎄…”하면서 냉큼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렸다. 두 녀인 모두 남자에겐 소중했기때문이다. 하지만 질투심 많은 녀자는 그냥 따지고들었다. “당신이 날 사랑하지 않는구나!” “아…아냐…사랑해.” “그럼 증명해봐!” “어…어떻게?” 남자는 (이 녀자가 설마 무식하게 하늘의 별을 따오라고 하진 않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녀자는 더 무서운 말을 했다. “날 더 사랑한다면 당신 어머니의 심장을 내게 가져와봐요!” 남자는 순간 갈등했다.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준 어머니를 택하느냐, 아니면 자기의 인생을 같이 할 사랑하는 녀자를 택하느냐? 남자는 한참동안 갈등하다가 끝내 사랑하는 녀자를 선택하기로 했다. 남자는 어머니의 심장을 꺼내가지고 사랑하는 녀자에게로 달려갔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달려가다가 그만 돌뿌리에 걸려서 넘어지고말았다. 그러자 넘어지며 땅바닥에 나뒹굴어진 어머니의 심장이 아들을 보고 말했다. “아가야! 어디 다친 곳은 없니?”                                                                      《도시생활보》    
12    욕망의 심연 댓글:  조회:4495  추천:0  2009-04-07
반옥매는 22살에 입당했고 31살에 남경시 서하구민정국 부국장에 임명되였으며 38살에 남경시 지도간부 첫 출국양성반에 뽑혀 전도가 유망한 녀간부로 소문났다. 그녀는 남경시와 서하구 인민대표, 강소성과 남경시 당대표대회 대표로 선출되였으며 가두기층지도직무를 10년동안 맡으면서 로임도 변변히 내주지 못하고있던 가두를 경제총량이 일약 전 시에서 앞장선 가두로 만들어서 재무세금수입만 해도 5억원에 달하게 했다. 원 남경시 서하구 구장조리이며 매고교가두사업위원회 서기였던 그녀는 처음 1만원을 수뢰하면서부터 점차 수백만원의 거액을 수뢰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되였다. 심사를 받기전까지 그녀의 호주머니에는 이미 인민페 792만여원, 미국화페 50만딸라의 거액이 들어갔다. “그것은 마치 악몽과도 같았다. 꿈속에서 나는 깊고도 어두컴컴한 우물속으로 깊숙이 빠져들어갔다. 결사적으로 두손을 내밀어 우물밖으로 나가려고 아득바득거렸지만 그럴수록 수렁속으로 더 깊이 빠져들어갔다. 주위는 온통 어둠뿐이였다. 나의 령혼은 이렇게 스스로 깊이 매장되였고 나의 인생은 이렇게 스스로 죄악적인 마침표를 찍었다.” 이것은 반옥매가 남경시규률검사위원회의 조사를 받을 때 참회서에 쓴 내용이다. 2007년 1월, 남경시규률검사위원회에서 부패사건을 조사할 때 심사를 받던 고모의 입에서 “나는 반옥매서기한테 몇십만딸라를 가져다준적이 있습니다”라는 말이 나왔다. 무심중에 튀여나온 이 말은 사건수사일군들의 의문을 자아냈다. 처급간부가 이렇게 담이 클수 있을가? 은행에서도 한번에 내올수 없는 거액의 외화가 어디서 왔을가? 남경시규률검사위원회의 지도부에서는 이 정황을 회보받은후 고도의 중시를 돌리면서 의심되는 점을 하나도 놓치지 말고 모든 힘을 다해 사건을 해명라고 지시했다. 수사일군들은 주밀한 방안을 세우고 사건해명에 달라붙었다. 그들은 자금원천부터 착수하여 비밀리에 조사하기 시작했다. 법률대학본과를 자습한적 있는 반옥매는 냄새를 맡고 조사에 항거하기 위해 대책을 마련했다. 그녀는 한편으로는 해당인원들과 입을 맞추면서 공수동맹을 맺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처에 뛰여다니면서 관계망을 통해 수사소식을 탐지하면서 물증을 없애여 조직의 심사를 피면하려고 시도했다.남경시규률검사위원회에서 반옥매의 위법문제를 초보적으로 장악했을 때는 2007년 음력설이였다. 음력설기간의 복잡한 원인을 고려하여 남경시규률검사위원회에서는 잠시 움직이지 않기로 결정했다. 2007년 2월 26일, 남경시규률검사위원회의 지도자들은 사건수사일군들을 데리고 서하구에 와서 서하구위원회의 주요지도자에게 사건정황을 알렸다. 그날 점심에 반옥매는 남경시규률검사위원회의 사건수사사무실로 붙잡혀갔다. 갑자기 들이닥친 변고에 반옥매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자칫하면 아름다운 꿈이 순식간에 사라질수 있다고 생각했다. 고모가 자신을 팔아먹지 않을것이라고 믿은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있으리라 마음먹었다. 고모는 2005년 5월에 회뢰혐의로 조사를 받은적이 있었는데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기때문에 그 일이 있은후 반옥매는 그를 보고 “조직의 고험을 겪은 사람”이라고 칭찬했으며 그를 더욱 믿게 되였다. 이번에도 반옥매는 고모를 믿고 “나는 다른 사람의 돈을 받은적이 없습니다. 나는 경제문제에서 깨끗한 사람입니다”라는 말만 반복했다. 사건수사일군들이 조사자료를 보여주자 그녀는 조직에서 장악한 정황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녀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수뢰한 돈이 천문학적인 수자이기때문에 자신이 입을 열기만 하면 중병을 앓고있는 남편이 혼자서 어린 아이를 돌볼수 없게 된다것을 알고있었다. 이런 모성애가 그녀를 더욱 침묵을 지키게 했다. 그녀는 매일 라지오방송체조를 하면서 자신의 투지를 다졌다.하지만 사건수사일군이 거듭 공세를 들이대자 그녀는 견디지 못하고 마음의 방선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반옥매가 가장 근심하는것이 초중 3학년에 다니는 아이라는것을 알게 된 수사일군들은 그녀의 아이가 공부하고있는 학교를 찾아가서 마음놓고 공부하도록 좋은 환경을 마련해주었다. 그리하여 그녀의 아이는 중점고중에 입학할수 있게 되였다. 조직에서 자신의 가족에 대해 이렇게 관심해주자 감화를 받은 반옥매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2008년 3월 10일 오후 4시, 반옥매는 고모에게서 거액의 뢰물을 받은 경과를 털어놓았으며 가족에게 편지를 써서 뢰물로 받은 돈을 바치게 했다. 그날밤 9시,  사건수사일군들은 반옥매의 부모집에 감추었던 미국화페 53만딸라와 인민페 170만원을 전부 찾아냈는데 저울에 달아보니 26킬로그람이 넘어되였다. 은행사업일군이 이 돈을 기계로 세는데 1시간 30분이 걸렸다. 군인가정에서 태여난 반옥매는 중학교를 졸업한후 중국인민해방군에 입대하여 부대에서 입당했으며 제대후 남경시 서하구에 돌아와 사업했다. 처음에 사업을 착실하게 하여 조직과 지도자의 신임을 얻은 그녀는 선후로 서하구쌍옹판공실 주임, 서하구민정국 부국장, 매고교진 진장, 매고교가두판사처 주임 겸 서기, 서하구 구장조리 등을 력임했었다. 일부 기업의 총경리들과 하급단위에서는 그녀의 환심을 사려고 명절마다 뢰물을 들고왔으나 그녀는 모두 거절했다. 하지만 점차 사업압력이 커지고 사회암흑면을 접촉하면서 권력을 리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욕망이 생겨났다. 그녀는 참회서에 “나는 처음 권력을 잡았을 때는 사업을 잘하여 자아가치를 실현하려고 했지만 점차 권력을 마음대로 리용할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을 때는 심리균형을 잃고 범죄의 심연속으로 빠져들어갔다”라고 썼다.   반옥매의 수뢰는 고모로부터 시작되였다. 고모는 반옥매가 관할하는 매고교가두 어느 촌의 지부서기였다. 처음에 반옥매는 고모의 잘못을 회의에서 비판했는데 고모는 상급인 그녀에게 잘보이려고 2000년 음력설에 2병의 고급술과 1만원의 현금을 들고 반옥매의 집을 찾아왔다. 그 당시 반옥매는 집에 없었는데 후에 그 돈을 돌려주지 못했다. 돈을 받은 그녀는 더는 고모를 비판할수 없었다. 2001년 9월, 반옥매가 경외양성반에 뽑혀 출국할 때 고모는 1만딸라의 현금을 가져다주었는데 반옥매는 자신이 고모의 일을 해주었으니 응당한 보수라고 생각하면서 주머니에 챙겨넣었다. 2002년, 반옥매가 매고교가두판사처의 당위서기로 승진하여 제1책임자로 되자 고모는 더욱 바싹 달라붙었다. 2003년, 남경시에서 화서촌을 따라 배워 농민의 새마을을 집중건설하면서 토지개발은 황금알을 낳을수 있는 노다지판이 되였다. 고모는 회사를 세우고 자기가 관할하는 중심촌의 집체토지개발을 도맡았다. 그후 얼마 안되여 중심촌의 항목이 규범화되지 않는다는 리유로 시에서는 공사와 판매를 중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반옥매는 세금징수를 완성하였다는 리유로 고모를 도와 순조롭게 관을 넘게 했다. 그후 고모는 짐을 벗어던지고 회사를 더욱 크게 발전시켰다. 2005년 11월, 고모는 현금 80만원을 반옥매에게 주었는데 반옥매는 웃으면서 받아넣었다. 제1책임자의 자리에 앉은 반옥매는 직위가 높지 않았지만 권력은 상당했다. 탐욕에 눈이 어두워진 그녀는 더욱 대담하게 부패의 길로 나아갔다. 반옥매는 권세를 장악한 몇몇 친구들과 불법상인들을 모아놓고 동맹을 맺은후 부패의 길로 나아갔다. 서하구 매고교가두에서 원예구역을 건설할 때 반옥매와 진녕(원 매고교가두 주임, 원 서하구재정국 국장)은 서로 의기투합하여 국가재산을 갉아먹었다. 그들은 먼저 향항상인 진모와 결탁하여 남경 모 공업무역유한회사를 세운후 원예구내의 100무나 되는 토지를 시장가격보다 낮은 가격(매무에 8만원)에 진모한테 팔았다. 그후 진모는 공업무역유한회사의 명의로 이 100무의 토지를 매무에 24만원의 가격으로 남경 모 체육용품회사에 넘겨주어 1500여만원의 폭리를 얻었다. 사후 반옥매와 진영은 진모한테서 각각 480만원을 받아서 챙겼다. 신분이 폭로되는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반옥매는 공업무역유한회사를 세우고 등록할 때 친척의 이름으로 등록하고 회사의 34%의 주권을 차지했으며 진녕도 친척의 이름으로 등록하고 회사의 33%의 주권을 가졌다. 그들은 회사를 통하여 토지를 되넘겨 팔아먹으면서 끝없는 탐욕의 주머니에 검은돈을 채워넣었다. 남경시규률검사위원회 사건수사일군은 “반옥매의 사건은 표면상에서는 단독으로 고립된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복잡한 관계망이 얽힌 규모가 큰 부패사건이다”고 말했다. 특히 소수의 “제1책임자”들은 토지를 눅은 가격에 사서 비싼 가격에 되넘겨 팔아먹으면서 집단화부패의 길로 나갔다. 이미 반옥매사건과 관련된 규률과 법을 위반한 당원간부 15명을 조사해냈는데 그중 처급간부가 8명이고 청급간부가 1명이다.   2009년 2월25일, 남경시중급인민법원에서는 1심판결에서 반옥매를 사형 집행유예 2년에 처하고 정치권리를 종신박탈하며 전부의 개인재산을 몰수한다고 판결했다. 반옥매는 자신의 죄를 참회하면서 “만약 나에게 삶의 길이 주어진다면 꼭 법을 지키며 한평생 속죄하겠다”고 말했다. 금년에 46살인 반옥매는 일시적인 탐욕의 대가로 인생의 황금기에 차디찬 철창속에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양자석간》    
11    중국1천3백년간의 인재선발제도-과거 댓글:  조회:3966  추천:0  2009-04-04
  과거(科擧)는 중국 고대 지식인들이 참가하는 인재선발 고시이며 역대 봉건왕조에서 시험으로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이다. 과거제는 수조때부터 시행되어 청조 광서황제시기 최후의 진사고시를 마지막으로, 약 1천3백여년을 거쳤다.   청조시기 과거제도는 초보적 고시와 정식 고시 두개 단계로 나뉘었다. 정식 고시는 또한 향시(鄕試), 회시(會試), 전시(殿試) 등 3가지로 나뉜다. 청조 과거제도 규정에 따르면 시험에 합격한 자는 리부(吏部)에서 등록한 후 일정한 관직을 얻을 수 있는데 당시 현급 관리에 상당했다. 물론 이 직위는 매우 적은 것으로서 해마다 약 40~130명의 명액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명, 청조시기 규정한 과거시험 문장제식은 팔고문(八股文)으로 되어 있는데 출제시 "사서오경"을 벗어나지 못하며 사서오경 해석은 또한 주희(朱熹)가 편집한 "사서오경"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 학생들은 규정된 서경만 읽어야 했고 출제된 제목에 근거해 규정된 문장격식과 수식어로 작문을 지어야 했다. 이와같은 형식에서 우리는 당시 사람들의 사상에 대한 속박이 어느 정도로 심했는가를 가늠할 수 있다.   송조시기에 이르러 과거시험은 출신이나 빈부와 상관없이 모두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부터 정부에서 인재선발에 대한 요구를 낮추었고 사회 중하층 지식분자들도 과거시험을 통해 사회 상층에서 유동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정책은 전체 사회안정을 유지하는데 적극적 역할을 일으켰으며 한마디로 과거제는 지식인들을 농락, 조종하는 효과적인 방법으로서 봉건통치를 공고히 하는데 도움을 제공했다.     과거제도는 하층 지식분자들에게 벼슬길을 제공했을뿐만 아니라 조정에서 관원을 선택하는 범위를 넓혀 중국 역사상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다. 1천3백여년간 지속된 과거제도로 인해 수십만명의 진사(進士), 거인(擧人)과 수재는 수백만명에 달한다. 물론 전부 학식이 높은 인사들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첩첩난관을 극복해 과거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은 대부분 출중한 인재로서 높은 문화수양을 구비한 정치가, 군사가, 경제학가, 행정관리 전문가들이다. 이 사람들이 없다면 중국의 대당성세, 남북송의 번화, 원명시기의 강성, 청조의 대일통이 없었을 것이다.   팔고문을 시험내용으로 하는 과거제도는 청조시기까지 지속되었는데 그 폐단은 속속 드러나기 시작했다. 청조초기 일부 대신들은 개혁할 것을 건의했으나 통치자들은 문화집권주의를 시행하기 위해 과거시험을 한족 사대부를 농락하는 수단과 지식인들의 사상을 구속하는 도구로 삼아왔다. 경서와 팔고문을 기계적으로 암기만 하면 관리직을 얻을 수 있는 과거제도, 시험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해마다 성장세를 보였다. 합격인수를 제한하기 위해 출제자는 늘 시험명제를 아무런 가치가 없는, 문자유희에 가까운 난제와 이상한 문제를 내놓았기에 시험생은 명제에만 파묻혔으며 과거시험제도는 점점 굳어져갔고 정치 혁신, 과학문화 발전의 중대한 장애로 되었다. 청조말기 광서황제시기에 이르러 근대 과학문화의 전파와 국내 민주혁명운동의 고조로 인해 청정부에서는 강박에 못이겨 천여년간 지속된 과거시험제도를 폐지하게 되었다.   단일한 문화시험만으로 관리직을 부여하는 과거제도는 취할바는 못되지만 세습과 추천 등 제도와 비교할때 상대적으로 공평, 공개 및 공정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의 시험제도는 일정한 정도에서 여전히 과거제도의 연속으로 볼 수 있다.   제공:중국국제방송  
10    중국시인중에서 누가 가장 유명한가? 댓글:  조회:3453  추천:0  2009-04-03
  중국은 시국(詩國)이다.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 혹은 가장 위대한 시인이 누구냐는 물음에는 아마도 어느 정도의 교육을 받은 중국인이라면 몇명의 대표적인 시인을 말 할수 있다. 하지만 중국 시인들중에서 시를 가장 많이 쓴 시인이 누구냐 하면 대답이 쉽게 나오지 못할 것이다.   사실 매 시대마다 기준이 있고 매개 사회계층에는 논리와 미학기준이 있기 때문에 중국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이 누군가 하는 문제에 대해 자고로 논쟁은 그칠새 없었다.   하지만 중국 고대 저명시인 중에서 시를 가장 많이 쓴 사람이 누군가 하는 문제는 쉽게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시 수량이 "굳은 기준"으로 될 수있기 때문이다.   기재에 의하면 이태백이 평생 남긴 시가는 약 990수, 두보는 1,400수, 백거이는 2,800수, 소식(소동파)은 약 4,000수라고 한다. 애국시인 굴원은 비록 시 편폭이 길지만 수량을 놓고 볼때 겨우 25편에 불과하다.   자료에 의하면 륙유는 시를 가장 많이 남긴 시인으로 알려졌다. 그는 평생 2만여수의 시를 썼으며 오늘날 보존된 시만 해도 9,329수에 달한다. 물론 수량도 중요하지만 질을 홀시할 수 없다. 청조황제 건륭은 평생 지은 시가 42,250수에 달하지만 세인들에 널리 전해지지 못했으므로 일류 시인이라고 말 할수 없는 것이다.   륙유는 인구에 회자한 명언과 명구를 민간에 많이 남겼다. 하지만 그가 중화역사에서 사람들의 찬양을 받아온 것은 시짓기뿐만 아니라 그의 위대한 애국주의 정신때문이다.   륙유가 생활한 시대는 중화민족이 역사상 가장 굴욕받은 시대라 할 수 있다. 수백년간의 송왕조는 부패와 쇠락의 길로 나아갔고, 북방의 여진족이 송왕조를 점차 침범했으며 황제는 겁먹은 쥐처럼 비겁하게 현실을 회피할때 륙유 등 소수의 애국주의자들은 용감하게 맞서 싸웠던 것이다. 평생 풍상고초를 겪어온 륙유의 노년시대는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나라가 망하고 동배들이 흩어져 그의 시도 더이상 독자가 없어 본인한테 쓰는 "외로운 시"가 된 것이다.   륙유의 시는 그야말로 완벽한 작품이라 할 수 있는데 특히 그가 세상뜨기전에 지은 "시아(示兒)"시는 중화 천추 시역사의 위대한 편장으로서 전체 세계문학사에서도 보기드문 명작이다.   륙유가 중국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는 여부에 대해서는 물론 단도직입적으로 결론을 내릴 수 없지만 그의 빛나는 재능과 위대한 애국심은 우리가 지극히 탄복하는 바이다.    
9    돌아갈수 없는 마음 댓글:  조회:4358  추천:0  2009-04-03
몇년전 어느 시골마을에 서로 사랑하는 처녀와 총각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마음뿐 결혼할수 없었다. 총각은 너무 가난했고 처녀는 가난한 시골이 싫었기때문이였다. 그러다가 처녀는 도시의 갑부집에 시집을 갔고 총각은 처녀만 생각하면서 부지런히 농사를 지었다. 도시로 시집간 처녀는 궁전같이 호화로운 집에서 살면서 먹고싶은것을 다 먹고 입고싶은것을 다 입고 고급술집에도 출입하면서 날마다 호강했지만 고요한 밤이면 시골총각이 그리워 눈물로 베개잇을 적시기도 했다. 그녀의 도시남편은 착한 남자였다. 이미전에 그녀와 시골총각의 관계를 알고 있었고 안해가 시집와서도 시골총각을 그리고있는것을 보고 마음이 몹시 아팠다. 어느날 남편은 안해를 불러놓고 이런 이야기를 했다.  “옛날에 예쁘게 생긴 강아지가 양떼를 모는 일을 하고있었어. 그런데 어느날 도시에서 한 부자가 놀러왔다가 양치기를 하는 개가 너무 힘들어 보여서  (맨날 사람들이 먹다 남은 밥이나 먹고 컹컹 짖느라고 목도 쉬여있고) 양치기주인한테 사정을 했대. 부자는 그 강아지를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하면서 도시로 데리고왔어. 그리고 몸도 깨끗하게 씻어주었고 시골에선 먹어보지 못한 맛있는것도 주었으며 침대에서 재워주기까지 했대. 그랬는데도 이 양치기 개가 가끔씩 하늘을 보면서 하루종일 짖었다고 해. 처음엔 몰랐는데 알고보니깐 그런 날에는 하늘에 양떼같은 구름이 있더래. 양치기개는 도시에 와서도 양떼가 그리워서 구름을 보고 그렇게 짖었던거지. 그래서 부자는 너무 마음이 아파서 그 양치기개를 다시 목장으로 데려다주기로 결심했대. 여보, 난 양치기개가 시골로 돌아가서 다시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그 말을 들은 안해는 남편의 뜻을 깨닫고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그 양치기개는 다시 행복해질수 있을가요? 있던 곳으로 돌아가면 예전과 똑같아질가요? 만약 양치기개가 목장으로 돌아갔는데 양들이 이미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면? 양떼 모는 법을 잊어버렸으면? 혹은 그곳에 이미 다른 양치기개가 있으면? 돌아갔는데 차가운 목장바닥 대신 부자의 따뜻한 집이 그리워진다면? 사람들이 먹다 남은 밥 대신 부자가 주던 기름진 음식이 그리워진다면? 그리고 강아지는 다른 주인을 따라왔으니 새 주인에게 충성해야죠. 이젠 당신이 보내준다고 해도 나는 못 돌아가요. 당신이 내가 힘들어보여서 여기까지 데리고왔잖아요. 그러니깐 끝까지 책임져야 해요. 미안해요. 이제는 양떼를 잊고 당신만을 사랑할게요.” 안해는 남편의 품에 안겨 울었다. 남편도 안해를 꼭 껴안아주었다.          《가정백과보》  
8    안해의 호흡기를 빼버린 남편 댓글:  조회:4279  추천:0  2009-04-02
1975년에 무한시에서 태여난 호청은 1999년에 심수의 갑부한테 시집을 갔다.   2009년 2월 9일, 호청은 자택에서 갑자기 혼미상태에 빠져 심수시제2인민병원의 중병간호실에 실려가 치료를 받았다. 2009년 2월 16일, 안해의 병문안을 갔던 호청의 남편은 갑자기 의료일군들의 저지하는데도 불구하고 안해 몸의 호흡기를 빼버렸다. 그때문에 그의 안해는 순식간에 사망됐다. 현재 호청의 남편 문모는 심수시 복전구공안국에 의해 형사구류되였다. 문모는 경찰의 심문을 받을 때 “제가 호흡기를 빼버린것은 안해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였습니다”라고 말했다. 문모의 이런 행동은 안해를 사랑해서인가? 안해를 살해하기 위해서인가? 이 사실은 심수시민들과 네티즌( 民)들의 화제를 모았다.   호청의 어머니와 언니는 지금 심수에서 후사를 치룬후 호청의 9살된 딸과 4살된 아들을 보살피고있다. 호청의 어머니와 언니는 가정형편이 어렵기때문에 변호사를 청하지 못하여 《무한석간》을 통하여 면비봉사를 해줄 변호사를 찾고있다.   10년전 호청은 중남정법학원에서 공부할 때 동창생이며 재벌2세인 문모를 알게 되여 졸업후 결혼했다.그녀는 2009년 2월 9일인 보름날 저녁에 침실에서 혼미상태에 빠져 병원에 실려갔는데 구급을 거쳤으나 깨여나지 못했으며 식물인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2009년 2월 16일 오후, 호청의 남편 문모는 호청이 끼고있는 산소호흡관을 빼버렸는데 10분후에 호청은 사망됐다.   2009년 2월 18일, 공안국에서는 호청의 시신을 검사했는데 2~3일후 검사결과가 나오면 소식공개회를 열고 사회에 공개하겠다고 말했다. 호청의 가족에서는 변호사를 청해 진실을 밝히는것으로 억울하게 사망된 딸을 위로하겠다고 말했다.   호청과 문모는 결혼후 5층짜리 별장에서 살았다. 호청부부는 4층에 거주했고 아들과 딸은 3층에 거주했다. 심수의 날씨가 더웠기때문에 호청의 어머니가 무한에서 딸의 집으로 놀러왔을 때 2층에 거주했다. 보름날 저녁 8시, 호청의 어머니는 딸의 침실에서 사위가 “어머니, 큰일 났어요! 빨리…” 라고 급하게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급히 4층으로 올라가보니 딸이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는데 사위와 손녀가 인공호흡을 시키고있었다. 호청의 어머니는 그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사위는 내딸이 저절로 침실에서 넘어져 혼미상태에 빠졌다고 했는데 내가 보기엔 사위가 내 딸과 다투다가 내딸을 때려서 쓰러뜨린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호청의 남편 문모에게는 문샘이란 형님이 있었는데 문샘은 옆집 별장에 살고 있었다. 소식을 들은 문샘은 즉시 호청을 자기의 자가용차로 병원에 실어다주었다. 구급을 거쳐 호청은 호흡을 회복했고 심장도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날밤, 호청은 심수시제2인민병원으로 옮겨갔는데 의사는 병이 위급하다고 했다. 다시 구급을 거쳐 호청은 병세가 안정되였고 산소호흡기를 낀채 중병실로 들어갔다.   그후 며칠동안 병원에서는 병이 위급하다는 통지서를 내보내지 않았다. 7일동안 호청은 줄곧 혼미상태에 빠진채 깨여나지 못했다. 무한에 있는 호청의 언니는 호청의 시집에서 호청의 치료를 포기할가봐 무한의 일을 제쳐놓고 심수로 달려왔다. 호청의 어머니와 언니는 문모가 호청의 치료를 포기할 뜻이 있었다고 느꼈다. 2000년초에 호청의 시아버지는 술을 마시고 토하다가 구토물이 기관에 들어가 대뇌산소결핍을 초래하여 식물인이 되다싶이 됐다.   회복될 가망이 없는것을 본 호청의 시집에서는 치료를 포기했는데 결국 호청의 시아버지는 사망되고말았다. 그러나 문모의 형님 문샘은 자신의 아버지가 사망된것은 다른 원인때문이지 치료를 포기하여 조성된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이를 부인했다.   호청의 언니는 정성을 다 바치면 녀동생이 꼭 깨여날수 있을것이라고 믿었다. 그녀는 여러번이나 문모에게 “호청은 꼭 깨여날수 있을것이요. 믿어야 하오. 그리고 절대 포기하지 말아야 하오”라고 말했다. 의외의 일이 발생하는것을 방지하기 위해 호청의 언니는 의사를 보고 “만약 치료를 포기한다면 환자의 친정과 시집 쌍방의 동의가 있어야 합니다. 어느 일방에서 마음대로 치료를 포기하지 못하게 해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2009년 2월 16일 오전에 호청의 시어머니, 문모, 문샘은 의사에게 호청의 병세에 대해 물었다. 의사는 “환자가 호흡기를 달고있는 시간이 너무 길어서 입의 통기관이 몸의 점막과 한데 붙었을 가능성이 있으니 수술을 하여 기관을 가르고 담액을 끄집어내온후 다시 산소관을 꽂아야 합니다. 이렇게 한다고 해도 환자의 치료에는 큰 효과가 없을것 같습니다”라고 알려주었다.   그날 오후였다. 매일 한시간의 면회시간밖에 주어지지 않았기때문에 문모가 들어갈 때 호청의 언니는 “20분만 있다가 나와야 하오. 그 다음 내가 들어가겠으니깐”라고 말했다. 20분이 지나자 호청의 언니는 들어갈 준비를 하느라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런데 그때 병실안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즉시 안으로 달려들어가보니 문모가 한손으로 호청의 머리를 안고 자신의 머리를 호청의 가슴에 파묻고는 울면서 호청의 몸에 있는 산소호흡관, 수액관, 많은 검측의기가 련결되여있는 관을 일시에 콱 빼버리는것이였다.   “이게 무슨 짓이예요? 왜서 호흡관을 뽑는가요?”   간호원들이 다급하게 소리쳐서야 멍해있던 호청의 언니는 무슨 일이 발생했는가를 알게 되였다. 문모는 울면서 “난 안해가 고통스러워하는것을 더는 볼수가 없소!”라고 소리쳤다. 문모는 안해의 머리를 안고 안해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채 계속 울어댔다. 10분후 호청의 낯색이 파랗게 변했는데 의사가 왔을 때는 이미 사망된 상태였다. 문모는 안해의 시신이 사체실로 실려가기전까지 줄곧 안해의 시신을 꼭 껴안고있었다.   그날 오후 4시 4분에 호청의 언니는 공안국에 사건을 제보했다. 심수시 복전구공안국 화부파출소의 경찰들이 현장에 와서 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경찰들은 의사와 간호원 그리고 환자의 가족을 모두 파출소에 불러다가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날, 문모는 고의살인죄혐의로 공안국에 형사구류되였다.   2009년 2월 18일, 기자는 심수시제2인민병원에 찾아갔는데 병원 중병실사업 일군들에 따르면 그당시 중병실에는 7~8명의 간호사들이 있었다. 그녀들은 문모가 산소호흡관을 뽑는것을 보고 제지하려고 했지만 문모의 힘을 당할수 없었다고 말했다.   의료일군들은 문모의 행위에 대해 부동한 각도로 보면서 부동한 결론을 내렸다. 어떤 사람들은 문모의 행위는 살인이라고 했고 어떤 사람들은 문모가 안해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한 행위이니 리해해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날 기자는 또 비통에 쌓여있는 호청의 어머니와 언니를 만나보았다. 그들은 사위의 집에 거주하면서 호청의 아들과 딸을 보살펴주고있었다. 그들은 기자를 보자 울면서 경제형편때문에 심수에서 변호사를 청할수 없으니깐 기자더러 무한에 돌아가면 무료봉사를 제공해주는 변호사를 청해달라고 부탁했다.   호청의 9살된 딸은 이미 엄마가 사망된것을 알고 통곡했지만 4살된 아들은 무슨 일이 생겼는지도 모르고 “엄마는 어디 갔어?’라고 자꾸만 물어보았다..호청과 문모는 처음에 부부감정이 매우 좋았지만 최근에 와서 문모가 늦게 귀가하지 않으면 외박하는 바람에 자꾸만 다투었다. 호청의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치료를 받아도 식물인이 된다는 말을 듣고 아들을 불러서 “호청이 향항에 수백만원의 보험에 투자했는데 만약 식물인이 되면 보상금을 받을수 없을뿐만아니라 치료비까지 지불하게 되잖아. 빨리 죽는게 낫지”라고 말했다. 호청의 어머니는 당시 그 말을 듣고 몹시 분개했다.   문모의 형님 문샘도 호청의 어머니를 보고 “만약 호청이 식물인이 된다면 잠시는 모르지만 시간이 오래되면 문모도 부부의 감정이 없어지고 남과 같아질것입니다. 본인에게도 식물인이 되여 사는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것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호청의 시집에서는 처음부터 문모와 호청의 결혼을 반대했었다. 문모는 심수의 본지방사람이고 호청은 무한 사람이였기때문이였다. 문모의 3남매는 나란히 붙은 3채의 5층짜리 별장을 가지고있었고 저마다 바오마(  )를 몰고다녔다. 또 한해에 수십만원씩 세를 받는 부동산까지 가지고있었는데 이 부동산이 파가이주하면 수천만원의 보상을 받을수 있었다. 호청은 생전에 늘 친정어머니한테 “시어머니는 돈이 있으면 있을수록 더 돈을 탐내요. 심수의 본지방사람들은 모두 돈이 많아서 딸이 시집가면 거액의 재산을 주어서 보낸다면서 외지의 가난한 지방에서 온 저를 자꾸만 업신여겨요”라고 말했다.   호청의 어머니는 “법률공부를 한 사람(사위 문모)이 이런 일을 저지르다니요?”라고 몹시 분개해하면서 꼭 변호사를 청해서 진실을 밝히는것으로 억울하게 죽은 딸을 위로하겠다고 말했다.   《무한석간》  
7    신중국 개국대전의 숨겨진 이야기 댓글:  조회:3043  추천:0  2009-04-02
1949년 10월 1일의 개국대전이 열리기 하루전날 밤에 회인당에서 외국손님을 접대하는 국연이 있었다. 국연에는 모태주, 통화포도주 등 여러가지 중국명주가 올랐으며 어떤것들은 이미 병마개가 열려있어 대청안에 짙은 술향기가 풍기였다.   사업일군들은 비록 매우 바빴지만 한편으로 매우 흥분되여있었다. 하지만 회인당의 입구에 서있는 중앙경위처의 처장인 왕동흥과 부처장인 리복곤의 표정은 남들과 달랐다. 그들은 국가지도자들의 안전이 더욱 걱정되였던것이다.   리복곤은 검사실 주임인 왕학빈을 불러내여 낮은 소리로 지시했다. “학빈동지, 중앙지도동지들이 래일 천안문에 오르셔야 하니 술을 과하게 마시면 절대 안되오. 어떤 일이 있든간에 한사람도 술에 취해서 쓰러지게 해서는 안되오. 방법을 강구해 처리하시오.” 그리하여 외국손님에게는 진짜술을 대접하고 국가지도자들에게는 물로 술을 대신하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이날 국연에 구쏘련을 비롯한 동구라파 사회주의국가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등 형제나라에서 온 귀빈들도 참석했다.   연회가 시작되였다. 류소기는 담담하면서 아무 맛도 없는 “술”을 맛보았다. 한잔을 마시였지만 여전히 기쁜 얼굴이였고 전혀 신경쓰지 않는 표정이였다. 류소기는 쏘련에서 온 손님들과 자주 건배를 했다. 하지만 주은래의 반응은 달랐다. 주은래는 술잔을 한번 들어마시고는 맛이 다르다는것을 알아차리고 눈섭을 잠간 찌푸리더니 사방을 둘러보다가 시선을 왕학빈 등에게로 향했다. 주은래는 손님들을 제대로 접대하지 못하는것을 걱정했으며 만일 손님들이 이런 술을 마신다면 어떻게 수습할지… 이때 마침 비서인 하겸이 주은래의 귀가에 몇마디 속삭였다. 그러자 대뜸 눈빛이 부드러워진 주은래는 술잔을 들고 외국손님들과 건배를 했다. 모택동은 “매운것”을 즐긴 반면 술에 대해서는 전혀 흥취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모택동은 두잔의 차잎으로 된 “적포도주”를 마시였는데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주덕은 이미 술이 가짜라는 통보을 받았다. 그는 몇번 가짜술을 마신후 성차지 않아서 몰래 진짜모태주를 몇잔 마시였다. 임필시는 당시 고혈압으로 앓다보니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하지만 외국손님들의 술잔에 부은것은 진짜 중국의 명주였다. 그들은 중국명주가 맛이 참 좋다면서 흥이 도도해 잔을 들면 밑굽을 쭉쭉 냈다. 어떤 손님들은 취하기도 했지만 흥이 나서 옆에 있는 사람에게 술잔을 권하면서 계속 마시였다.   당시 국가지도자들은 아무맛도 없는 “술”을 많이 마시였지만 전혀 취해 쓰러지지 않고 외국손님들과 자리를 함께 한 국연을 마칠수 있었다.   《해방군보》  
6    신중국 수도의 최초 후보지는 할빈 댓글:  조회:4144  추천:0  2009-04-02
신중국 수도의 최초 후보지는 북경이 아니라 흑룡강성의 할빈이였다고 한다.   모택동은 중국을 하나의 거대한 새와 같이 보았다. 흑룡강성은 마치 날개를 펼친 백조와 같았는데. 할빈은 바로 이 백조의 목아래에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할빈을 “백조의 목아래에 있는 진주”라고 부르기도 했다.   할빈은 일찍 제국주의의 침략과 략탈을 경험했다. 30여개 국가의 교민들이 모여있었고 16개 국가의 령사관이 설립되여있는 할빈은 로씨야를 위주로 한 국제적인 도시로 성장하였다. 수천개의 공상기업들이 세워지고 형형색색의 유럽풍건축물도 들어섰다. 도꾜, 런던, 빠리, 베를린, 뉴욕 등 세계1류도시들과 무역도 빈번해지면서 중국 동북지방에서 최대의 시장으로 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일본제국주의의 14년에 걸친 식민통치는 끝났다. 하지만 국민당의 군대가 대거 동북으로 몰려와 항전의 승리과실을 빼앗으려 했다.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동북민주련군은 피를 흘리면서 일본침략자를 몰아내고 해방시킨 땅을 지켜내기 위해 국만당군대와 치렬한 전투를 벌렸다. 가장 먼저 공산당에 의해 해방된 도시 할빈은 중공중앙 동북국, 동북행정위원회의 소재지였으며 동북해방구의 정치,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였다. 뿐만아니라 할빈이 당시 가장 안전한 도시라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 리유는 쏘련에 가장 가깝고 쏘련의 지원과 도움을 받기 가장 편리한 지역이였기때문에 모택동과 중공중앙에서는 할빈을 특별시로 정하고 할빈에서 신중국을 세울것을 준비하였다.   모택동과 중공중앙에서는 동북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있었지만 할빈은 상당히 먼곳에 있었으므로 한꺼번에 옮겨가는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중간의 기착지가 필요했고 중간기착지로 선정한 곳은 화북의 피서산장이 있는 승덕(承德)이였다. 승덕을 당중앙의 림시소재지로 하였다. 료심전투의 전날 동북야전군의 최고지휘관 림표와 라영환은 당중앙에 중앙정부를 동북으로 옮기는 일에 대한 답신을 요청하였다. 모택동은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여 “당중앙은 반드시 관내에 머물러있어야 하므로 나는 잠시 떠나지 않겠다”고 표했다.   비록 모택동과 당중앙이 동북 할빈으로 옮기는 일은 잠시 중단되였지만 당중앙을 할빈으로 옮기는 예비업무는 차질없이 진행되고있었다. 이를 위해 중공중앙 부주석인 주은래는 중앙경비대대(당중앙경호부대)를 둘로 나누어 일부분은 남겨서 당중앙을 보위하는 책임을 지고 여전히 중앙경비대대로 부르며 일부분은 “중앙선행경비대대”로 개칭하여 오열에게 대대장을 맡기고 리일민을 정치위원으로 하여 모두 400명으로 구성했다. 1945년 10월 2일, 오열과 리일민은 중앙선행경비대대를 이끌고 동북에서 책임을 맡고있던 리부춘에게로 갔다. 그들은 연안에서 출발하여 30여일의 행군을 거쳐 기찰열요해방구 소재지인 승덕으로 가서 할빈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그런데 바로 이때 동북의 정세가 급격하게 변했다. 국민당이 미국의 지지하에 동북에 병력을 증원하여 교통요지를 점령했다. 모택동은 동북정세를 분석하고 과감하게 “당중앙은 승덕으로 옮기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렸다. 중앙군사위원회는 명령을 내려 중앙선행경비대대를 현지에서 개편하여 기찰열요군구에 예속시키였다.   1948년 4월 20일, 모택동은 전국에 신정치협상회의를 소집하고 련합정부의 설립을 호소했다. 모택동의 호소문은 전국각계인사들의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당시 국민당이 여전히 중국의 절반을 점령하고있는 상황에서 저명한 민주인사들을 대련을 거쳐 할빈으로 보내는 일은 건국의 큰 일이였고 절대 홀시해서는 안될 일이였다. 모택동과 주은래는 친히 여러가지 호송방안을 짜놓고 재검토했다. 몇차례의 곡절을 거쳐 주은래의 세심한 계획대로 심균유, 곽말약, 리제심 등 민주인사들이 세차례에 나누어 안전하게 할빈에 도착했다. 황염배 등 제4차로 떠난 민주인사들은 1949년 3월 14일에 향항에서 출발하였는데 이때 공산당이 령도하는 동북야전군이 료심전역에서 대승리를 거둔 뒤 남하하여 북경과 천진을 해방시켰다. 중공중앙에서는 할빈에서 열려던 신정치협상회의를 북경에서 개최하기로 결정지었다. 모택동과 주은래의 이러한 조치는 매우 현명했다. 1949년에 중국공산당이 북경에서 소집한 신정치협상회의에는 300여명의 민주인사들이 참가했다.   이때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중국인민해방군은 료심전역, 평진전역, 회해전역 이 3대전역에서 대승리를 거두고 국민당군대에 비해 절대적우세를 차지했으며 절반 중국이 이미 해방되였다. 모택동은 전중국이 곧 해방될것이라고 예감하고 더는 신중국 수도를 북방에 둘 필요가 없다며 평화적으로 해방된 북평(지금의 북경)이 더 좋을것이라고 생각했다.   북경에서 열린 신정치협상회의에서 신중국의 수도를 북경으로 정했으며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였다.                                    (력사문헌)   
5    왕아침과 그의 자식들의 범죄실록 댓글:  조회:3967  추천:0  2009-04-01
료녕성 부신시중급인민법원 원 부원장 왕효운이 사사로운 정에 얽매여 법을 외곡한 죄로 3년판결을 받았다. 왕효운의 아버지 왕아침은 부신시 원 당위서기였다. 딸의 사건이 터지기 직전에 왕아침은 허위자본등록죄와 직무침해죄로 8년판결을 받았고 아들 왕효군도 공범으로 판결을 면치 못했다. 결국 고위직에 있는 한가정에서 3명이나 판결을 받고 옥살이를 해 당지에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 왕아침 "어르신"   부친: 퇴직후 법을 무시하고 재물을 긁어 모으다 2005년 7월 18일, 료녕성규률검사위원회 특별사건수사조의 책임자가 왕아침을 찾아 조직의 조사에 협조해줄것을 부탁했다. 헌데 생각밖으로 왕아침은 그 책임자를 보고 “넌 나와 말할 자격이 없어. 뭐 처장이라고? 급도 안되는 주제에 썩 물어가라”고 호령했다. 이미 퇴직한지 오랜 국가간부가 당의 규률을 무시하고 이처럼 제멋대로 횡포하게 날뛰고있었으니 참 우스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왕아침은 일찍 료녕조양중형기계공장 재회과 과장으로 있었다. 그는 1980년에 공장장으로 승급했으며 공장장으로 있는 동안 대담하게 일련의 개혁을 실시하여 경제적효과성을 올림으로써 “전국5.1로동훈장”을 수여받았다. 1986년에 왕아침은 조양시당위 부서기로부터 부신시 대리시장으로 승진했다. 그후 그는 선후로 부신시 시장, 시당위서기, 시인대상무위원회 주임으로 사업하다가 1998년에 정년퇴직했다. 왕아침은 관직에서 물러나자마자 장사를 시작했다. 2002년 2월, 왕아침은 명예고문의 신분으로 부신(阜新)상업무역성항목을 개발하는 민영기업인 쌍룡회사에서 한자리를 차지했고 후에 이 항목의 총지휘와 재무총감을 맡았다. 쌍룡회사에 발을 붙힌후 왕아침은 회사의 책임자인 고문화에게 “남아프리카국적”을 가진 아들 왕효군과 손잡고 외자기업성질을 띤 화룡회사로 다시 등록할것을 제의하며 외자기업은 정책상에서 많은 혜택을 볼수 있으니 자신이 나서서 밀어줄것이라고 했다. 이리하여 고문화의 회사등록자금은 800만원으로 등록되였고 “남아프리카국적”을 가진 왕효군이 외상신분으로 40%의 주식을 점하며 회사 부리사장으로 되였고 고문화는 60%의 주식을 가진채 회사 리사장자리를 지키게 되였다. 2003년 8월, 상업무역성 주체공사가 준공되였다. 왕아침은 또 고문화를 협박하여 쌍방의 투자를 각각 400만원으로 변경시키고 아들 왕효군이 회사의 50% 주식을 차지하게 했다. 2004년 2월, 상업무역성항목이 거의 완공되였다. 왕아침은 회사를 가일층 통제하기 위해 고문화더러 리사장자리를 왕효군에게 내주라고 강요했다. 하지만 고문화는 자기가 피땀으로 일떠세운 회사이니 그렇게는 할수 없다면서 동의하지 않았다. 왕아침은 고문화가 치부할수 있는 지름길을 가로막는다고 생각되여 그를 물리칠 음모를 꾸미였다. 왕아침은 아들 왕효군의 이름으로 고문화가 가짜투자를 했고 또 공금을 류용했다고 공안부문에 적발했다. 당시 왕아침의 딸 왕효운이 부신시공안국 부국장으로 있었으며 다른 아들 왕모모도  시공안국 치안지대 부지대장으로 있었다. 2004년 3월, 고문화가 북경으로 출장갔다가 부신시공안국 경찰들에게 잡혀 돌아왔다. 고문화는 억울하게 11개월동안 구류되였다. 그동안 고문화는 왕아침일가의 범죄행위를 여러번 해당부문에 적발했다. 해당부문에서는 세심한 조사를 거쳐 법을 어긴 왕아침과 그의 아들, 딸을 체포했다. 2007년 7월, 단동시중급인민법원에서는 심사중에 왕아침과 왕효군 등이 화룡회사를 경영할 때 허위자금등록행위가 있고 또 왕아침이 직무의 편리를 리용해 화룡회사의 평가가격 477만여원을 비법적으로 잘라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법원에서는 허위자금등록죄와 직무침해죄로 왕아침을 유기징역 8년에 언도하고 아들 왕효군을 허위자금등록죄로 유기징역 1년 6개월에 언도했다. 료녕성사회과학원 연구원 호소풍은 권력을 잃은 지도자들이 죄를 범할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왕아침과 같은 “제1책임자”들이 만약 계획적으로 평상시보다 더 많은 재부를 긁어모으려고 한다면 흔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고 했다. 딸: 가족의 리익을 위해 법을 외곡하다 왕아침이 잡혀간후 딸 왕효운의 위법행위가 백일하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왕효운은 1995년부터 2005년 11월까지 10년간  부신시공안국 부국장으로 있었으며 주로 사회치안, 호적관리, 순라경찰 등 부문을 책임졌다. 왕효운의 동생 왕모모는 2002년 9월부터 부신시공안국 치안지대 부지대장으로 있었다. “누나가 동생을 관리”하는 3년간 부신시의 사회치안은 사실상 이  왕씨가문의 오누이가 손에 쥐고 놀았다. 왕아침사건이 발생한후 상급공안기관에서는 왕효운을 부신시중급인민법원 부원장으로 전근시키고 동생 왕모모의 사업을 중지시켰다. 조사과정에서 2004년 2월 23일, 부신시화륭부동산회사 경리인 고문화의 운전수 허녕이 여러통의 적발신을 가지고 료녕성정협위원회를 찾아간적이 있었는데 그속에 왕효운과 관련된 내용도 들어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2005년 4월 4일, 왕효운은 앙심을 품고 부신시 해주구인민법원 원장인 곽해충에게 허녕이 모해죄와 비방죄를 범하였으니 그에 대한 형사책임을 추궁하라고 지시했다. 곽해충은 왕효운의 명령을 받고 즉시 립건하라는 지시를 내리였다. 4월 10일, 허녕은 왕효운의 무함으로 억울하게 해주구법원에 불리워가서 구류되였다. 2008년초, 료녕성흥성시인민법원에서는 곽해충이 사사로운 정에 얽매여 법을 외곡한 사건을 조사심리했다. 하지만 곽해충은 “죄를 뉘우치는 태도”가 비교적 좋기에 형사처분을 면하였다. 흥성시인민법원에서는 왕효운이 권력을 리용하여 사법일군들에게 죄없는 사람을 립건추궁하라고 지시한것은 사사로운 정에 얽매여 법을 외곡한 죄가 구성된다고 인정하고 1심에서 유기징역 3년에 언도했다. 료녕성사회과학원 호소풍연구원은 왕효운의 범죄사실은 그녀의 부친인 왕아침사건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해석했다. 만약 고문화 등이 왕아침의 범죄사실을 공안기관에 적발하지 않았다면 허녕은 왕효운에 의해 간수소에 들어가지 않았을것이다. 왕효운은 부친을 위해 당의 규률를 위반하고 나라의 법을 무시하면서 범죄의 길에 들어섰던것이다. 부신시당위의 한 지도자는 “경찰내부에서 왕효운의 사업능력을 인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녀가 부국장까지 승진할수 있은것은 아버지의 힘이 더 큰 작용을 했을거라고 인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왕아침은 자신의 영향력으로 자녀들을 요직에 배치했고 그로써 왕씨가문이 부신에서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고 제멋대로 횡포하게 날뛸수 있었던것이다”고 말했다. “제1책임자”는 퇴직후에도 감독을 받아야 한다 사건조사중 왕아침이 부신시의 주요책임자로 있은 10여년간 많은 자기 친신들을 제발시켰기에 퇴직후에도 그가 나서면 해결못할 일이 없었다. 왕아침같은 “제1책임자”가 퇴직한후 누가 그들을 감독하며 또 어떻게 감독해야 할지 주요한 사화과제로 제기되고있다.   일부 간부와 군중들의 반영에 의하면 왕아침은 직위에서 물러난후에도 늘 시당위와 시정부의 사업을 간섭했으며 지어 조직을 위협하기까지 하면서 고문화와 모순이 있을 때 자녀들이 정법기관에서 사업하는 편리를 리용하여 보복을 했을뿐만아니라 시당위 주요지도자를 찾아가 고문화를 잡아들여 판결하라고 강요했다. 부신시당위 부서기 우언량은 기자의 취재를 접수할 때 이렇게 말했다. “퇴직한 지도간부들에게 실제권력은 없으나 영향력은 여전히 존재한다. 만약 그 영향력이 불정상적인 방향으로 사용된다면 사회에 큰 해를 주게 된다.” 호소풍연구원 등 전문가들은 퇴직한 지도간부들이 장사를 할 때 명확한 제한이 있어야 한다고 건의했다. 즉 퇴직한후 몇년간 장사를 하지 못하게 해야 하고 그들에 대한 감독을 강화해야 하며 상급의 규률검사위원회와 조직부문에서 정기적으로 퇴직한 지도간부들을 방문하고 그들의 사회활동과 사상동태를 료해하며 불정상적인 기미가 보이면 당장에서 일깨워주고 제지시키는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법제문췌보》  
4    신중국 수도의 최초 후보지는 할빈 댓글:  조회:2821  추천:0  2009-04-01
  신중국 수도의 최초 후보지는 북경이 아니라 흑룡강성의 할빈이였다고 한다.   모택동은 중국을 하나의 거대한 새와 같이 보았다. 흑룡강성은 마치 날개를 펼친 백조와 같았는데. 할빈은 바로 이 백조의 목아래에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할빈을 “백조의 목아래에 있는 진주”라고 부르기도 했다.   할빈은 일찍 제국주의의 침략과 략탈을 경험했다. 30여개 국가의 교민들이 모여있었고 16개 국가의 령사관이 설립되여있는 할빈은 로씨야를 위주로 한 국제적인 도시로 성장하였다. 수천개의 공상기업들이 세워지고 형형색색의 유럽풍건축물도 들어섰다. 도꾜, 런던, 빠리, 베를린, 뉴욕 등 세계1류도시들과 무역도 빈번해지면서 중국 동북지방에서 최대의 시장으로 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일본제국주의의 14년에 걸친 식민통치는 끝났다. 하지만 국민당의 군대가 대거 동북으로 몰려와 항전의 승리과실을 빼앗으려 했다.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동북민주련군은 피를 흘리면서 일본침략자를 몰아내고 해방시킨 땅을 지켜내기 위해 국만당군대와 치렬한 전투를 벌렸다. 가장 먼저 공산당에 의해 해방된 도시 할빈은 중공중앙 동북국, 동북행정위원회의 소재지였으며 동북해방구의 정치,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였다. 뿐만아니라 할빈이 당시 가장 안전한 도시라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 리유는 쏘련에 가장 가깝고 쏘련의 지원과 도움을 받기 가장 편리한 지역이였기때문에 모택동과 중공중앙에서는 할빈을 특별시로 정하고 할빈에서 신중국을 세울것을 준비하였다.   모택동과 중공중앙에서는 동북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있었지만 할빈은 상당히 먼곳에 있었으므로 한꺼번에 옮겨가는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중간의 기착지가 필요했고 중간기착지로 선정한 곳은 화북의 피서산장이 있는 승덕(承德)이였다. 승덕을 당중앙의 림시소재지로 하였다. 료심전투의 전날 동북야전군의 최고지휘관 림표와 라영환은 당중앙에 중앙정부를 동북으로 옮기는 일에 대한 답신을 요청하였다. 모택동은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여 “당중앙은 반드시 관내에 머물러있어야 하므로 나는 잠시 떠나지 않겠다”고 표했다.   비록 모택동과 당중앙이 동북 할빈으로 옮기는 일은 잠시 중단되였지만 당중앙을 할빈으로 옮기는 예비업무는 차질없이 진행되고있었다. 이를 위해 중공중앙 부주석인 주은래는 중앙경비대대(당중앙경호부대)를 둘로 나누어 일부분은 남겨서 당중앙을 보위하는 책임을 지고 여전히 중앙경비대대로 부르며 일부분은 “중앙선행경비대대”로 개칭하여 오열에게 대대장을 맡기고 리일민을 정치위원으로 하여 모두 400명으로 구성했다. 1945년 10월 2일, 오열과 리일민은 중앙선행경비대대를 이끌고 동북에서 책임을 맡고있던 리부춘에게로 갔다. 그들은 연안에서 출발하여 30여일의 행군을 거쳐 기찰열요해방구 소재지인 승덕으로 가서 할빈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그런데 바로 이때 동북의 정세가 급격하게 변했다. 국민당이 미국의 지지하에 동북에 병력을 증원하여 교통요지를 점령했다. 모택동은 동북정세를 분석하고 과감하게 “당중앙은 승덕으로 옮기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렸다. 중앙군사위원회는 명령을 내려 중앙선행경비대대를 현지에서 개편하여 기찰열요군구에 예속시키였다.   1948년 4월 20일, 모택동은 전국에 신정치협상회의를 소집하고 련합정부의 설립을 호소했다. 모택동의 호소문은 전국각계인사들의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당시 국민당이 여전히 중국의 절반을 점령하고있는 상황에서 저명한 민주인사들을 대련을 거쳐 할빈으로 보내는 일은 건국의 큰 일이였고 절대 홀시해서는 안될 일이였다. 모택동과 주은래는 친히 여러가지 호송방안을 짜놓고 재검토했다. 몇차례의 곡절을 거쳐 주은래의 세심한 계획대로 심균유, 곽말약, 리제심 등 민주인사들이 세차례에 나누어 안전하게 할빈에 도착했다. 황염배 등 제4차로 떠난 민주인사들은 1949년 3월 14일에 향항에서 출발하였는데 이때 공산당이 령도하는 동북야전군이 료심전역에서 대승리를 거둔 뒤 남하하여 북경과 천진을 해방시켰다. 중공중앙에서는 할빈에서 열려던 신정치협상회의를 북경에서 개최하기로 결정지었다. 모택동과 주은래의 이러한 조치는 매우 현명했다. 1949년에 중국공산당이 북경에서 소집한 신정치협상회의에는 300여명의 민주인사들이 참가했다.   이때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중국인민해방군은 료심전역, 평진전역, 회해전역 이 3대전역에서 대승리를 거두고 국민당군대에 비해 절대적우세를 차지했으며 절반 중국이 이미 해방되였다. 모택동은 전중국이 곧 해방될것이라고 예감하고 더는 신중국 수도를 북방에 둘 필요가 없다며 평화적으로 해방된 북평(지금의 북경)이 더 좋을것이라고 생각했다.   북경에서 열린 신정치협상회의에서 신중국의 수도를 북경으로 정했으며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였다.  (력사문현)   제공:연변라지오텔레비죤신문    
3    라체사진 찍은 강탈법을 잡은 녀성 이야기 댓글:  조회:5998  추천:0  2009-03-27
2008년 4월, 중경시의 한 녀공무원 배문려는 인터넷에 집을 세준다는 광고를 냈다. 하지만 이 광고가 “원앙새강도”를 불러들일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4월 8일 집을 세맡겠다던 “부부”가 배문려를 랍치하고 그녀가 휴대한 은행카드, 목걸이, 금반지 등을 모조리 략탈해갔으며 또 비렬하게 라체사진을 찍어낸후 인테넷에 올리겠다고 위협하면서 협잡하려 했다. 결국 배문려는 추호의 두려움도 없이 용감하게 맞서 싸웠으며 공안기관을 협조하여 한무리 강도집단을 일망타진했다. 집을 세주려다 화를 자초 올해 26살인 배문려는 2004년 9월에 대학본과를 졸업하고 공무원시험에 합격되여 중경시 모 사업단위에 취직했다. 총명하고 진취심이 강한 배문려는 몇년후 부주임으로 승급했으며 2006년에는 연구생시험에 합격됐다. 석사공부를 마친 남자친구 단학수는 중경시당위 모 기관에서 사업했다. 사귄지 오래된 이들은 2009년 상반년에 결혼하기로 약속했다. 2008년 2월, 이들은 양광화원단지에 새 아빠트를 사서 장식해놓고 결혼하면 함께 생활하기로 했다. 하지만 새집을 너무 오래 비워두는것 같아 상론을 거친후 집을 세주기로 했다. 2008년 3월 28일, 배문려는 중경시가옥정보넷에 집을 세준다는 광고를 냈다. 4월 8일 오후 4시경, 배문려는 집을 세맡겠다는 한 녀자의 전화를 받았다. 두 사람은 저녁에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날 저녁 남차친구가 연장작업을 하기에 배문려는 혼자 떠났다. 저녁 8시쯤에 실팍한 30대녀자가 한 남자를 데리고 양광화원단지에 나타났다. 배문려는 그들을 데리고 집구경을 시켰다. 배문려와 실팍한 녀인이 서로 말을 주고받는 사이에 남자가 가만히 출입문을 닫아걸었다. 사실 그들은 집을 세맡는다는 명의로 전문 사기치고 강탈하는 한쌍의 “강도련인”이였다. 남자는 위강이라고 하는데 중경시 남안구사람이며 1981년생이였다. 녀자는 묘신이라고 하는데 남자보다 8살 더 많았다. 두 사람은 고정된 직업이 없었다. 10분후 집을 돌아보고나서 그들은 한달에 500원으로 집을 세맡겠다고 했다. 그런데 배문려가 탁자에 엎드려 계약서를 쓰고있을 때 뒤에 있던 위강이가 갑자기 달려들어 배문려의 목을 조르면서 “소리치면 죽여버릴테다”고 위협했다. 묘신은 침실에 들어가 침대보를 갈기갈기 찢어 끈을 만들었다. 그 끈으로 두 사람은 배문려를 꽁꽁 묶어놓았다. 묘신은 배문려의 목걸이와 약혼반지를 빼앗아내고 또 배문려의 핸드빽에서 현금 1500여원과 일본제 디지털사진기, 삼성표 핸드폰, 6장의 은행카드를 들춰냈다. 하지만 6장의 은행카드에 9000원밖에 없는것을 확인한후 그들은 아주 실망했다. 노기등등해진 위강은 날카로운 비수를 뽑아 배문려의 얼굴에 대고 “오늘 네년의 얼굴에 칼흔적을 남겨놓을테다. 명심해, 이후 낯선 사람을 경솔하게 믿지 말기를 바란다”고 으르렁거렸다. 그러자 배문려는 짐짓 가련한 표정을 짓고 애원했다. “오빠, 언니, 집에 욕심나는것이 있으면 몽땅 가져가요. 난 당신들과 원쑤진일도 없는데 제발 놓아주세요. 그리고 빨리 이곳을 떠나세요. 이제 곧 남자친구가 친구들을 데리고 마작놀러 올것이니 서둘러야 해요.”  묘신도 배문려가 가련해보이는지 위강을 보고 “그만해요. 이년도 불쌍해요. 값진 물건을 가지고 빨리 떠나자요.”라고 말하면서 그만두라고 했다. 그리고 은행카드를 가지고 밖에 나가 망을 보는 짝패와 함께 자동인출기에서 현금을 꺼낸후 다시 올라와 집을 털기 시작했다. 그들은 손목시계 2개, 금반지 2개, 황금목걸이 1개, 고급화장품 등 값진 물건들을 들춰냈다. 이때 위강은 배문려를 침실로 끌고간후 침대에 묶어놓고 돈과 재물을 숨겨놓은 곳을 대라고 협박했다. 배문려는 자신이 강하게 나오면 해를 입게 될것을 잘 알고있었다. 그는 이자를 진정시키기 위해 놓아주면 집에 돌아가 결혼준비로 부모님들이 저금해놓은 10만원을 주겠다고 말했다.위강은 더는 돈이 나올수 없음을 느꼈는지 얼굴이 반반한 배문려에게 딴 마음을 먹었다. 그는 침실문을 닫아걸고 손수건으로 배문려의 입을 틀어막은후 가위로 그녀의 옷을 갈기갈기 오려내기 시작했다. 위강이 달려들자 배문려는 결사적으로 반항했고 결국 위강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위강은 침실밖에 있는 묘신이 들을가봐 배문려의 귀빰을 후려갈기고는 그만두었다. 묘신은 침실에 들어와서 거의 알몸으로 된 배문려를 보더니 뭐하느냐고 위강에게 따지고들었다. 그러자 위강은 핸드폰으로 배문려를 사진찍으면서 “이년이 우릴 찾아와 시끄럽게 굴면 라체사진을 인터넷에 올릴것이야.”라고 말했다. 이때 아래서 망을 보던 짝패가 현금 1.9만원(배문려의 신용카드는 透支信用 였기에 1만원을 더 내올수 있었음)을 꺼냈다고 하면서 어서 떠나자고 재촉했다… 광고를 미끼로 강탈범을 낚다 그날 저녁 10시 30분경에 단학수가 연장작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배문려가 집에 없었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다. 배문려가 낮에 집을 세맡으려는 사람이 있어 세양광화원단지에 간다고 했는데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는지 걱정된 단학수는 택시를 잡아타고 세양광화원단지로 달려갔다. 단학수가 집문을 열고 보니 집안이 란장판이 되였고 침실에서 한 녀자가 신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침실문을 열어보니 배문려가 알몸으로 된채 꽁꽁 묶여있었다. 단학수는 인차 배문려를 병원으로 데려갔다. 의사는 외상이 좀 있지만 치료받으면 인차 나을것 같다고 하면서도 정신상 심한 타격을 받았기에 잘 위로해주라고 부탁했다. 4월 12일, 배문려는 단학수와 함께 공안기관을 찾아가 강탈당했다고 제보하면서 혐의자들의 외모특징을 제공했다. 경찰들은 배문려가 제공한 정보에 근거하여 분석을 거친후 이자들이 근간에 련속 발생한 입실강탈강간사건과 관계있다고 판정했다. 배문려는 이처럼 많은 자매들이 무고하게 피해를 본것을 보고 더욱 격분했다. 그녀는 경찰을 도와 입실강탈범을 꼭 잡아내리라 다짐했다.배문려는 이자들이 계속 입실강탈하는것을 보면 긍정코 새로운 목표를 노릴것이라고 단정했다. 그는 신문과 인터넷에 집을 세준다는 광고를 내면 강탈범들이 꼭 올가미에 걸려들것이라고 판단했다. 이는 전번처럼 위험성이 있지만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2008년 5월 10일, 배문려와 단학수는 중경의 여러 신문사와 광고회사를 찾아가 집을 세준다는 광고를 냈다. 이름도 왕설이라는 가명으로 하고 집도 황관명주단지이며 련계전화도 새로 바꾸었다. 5월 16일 저녁, 집을 세맡겠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배문려는 이튿날 저녁에 만나자고 약속했다. 이튿날 오전 배문려는 파출소에 알렸다. 저녁 8시에 단학수가 들어있는 아빠트부근에 그자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자들은 배문려를 발견하고 속았다고 소리치면서 차를 돌려 뺑소니쳤다. 5월 20일, 배문려는 위강의 공갈전화를 받았다. “너 감히 경찰에 알려? 꼭 복수할테야. 3일내에 현금 10만원을 내 구좌에 넣지 않으면 너의 그 잘난 라체사진을 인터넷에 올려 공개하겠다.” 공갈전화를 받은 배문려의 심정은 무거웠고 불안했다. “제발 사진을 인터넷에 올리지 말아요. 돈은 요구한대로 주겠어요. 먼저 3만원을 주고 당신이 나의 앞에서 그 사진을 없애버리면 나머지 돈은 현금으로 주겠어요.” 위강은 배문려의 QQ주소를 요구했다. 배문려는 이자들의 더 많은 정보를 수집하려고 QQ주소를 알려주었다. 이튿날 배문려는 공안기관을 찾아가 그자들이 인터넷에 꼭 오를것이라고 알렸다. 기술인군들은 그자와 대화할 때 될수록 시간을 끌라고 알려주었다. 저녁에 배문려와 위강이 인테넷에서 만나 대화를 했고 경찰들은 위강이 머물러있는 지점을 알아냈다. 하지만 경찰들이 찾아갔을 때 집은 텅 비여있었다. 5월 30일, 위강이 인터넷에 또 나타났다. 위강은 돈을 주지 않으면 라체사진을 인터넷에 올리겠다고 협박했다. 배문려는 위강과 대화를 하면서 시간을 끄는 한편 또 경찰에 알렸다. 기술인군들은 마침내 위강 등이 들어박혀있는 곳을 알아내고 형사경찰대대에 알렸다. 형사경찰들은 즉시 행동하여 위강과 묘신 그리고 공범인 묘항, 리치 등 4명 강탈혐의자를 나포했다. 2009년 1월 16일, 중경시인민검찰원 제5분원에서는 위강, 묘신 등 4명을 강탈죄, 강간죄, 부녀희롱죄 등으로 법원에 기소했다. 이 사건을 책임진 검찰관은 집을 세주려는 주인들에게 충고를 주었다. 집을 팔거나 세를 주는 광고를 낼 때 정규적인 신문이나 광고회사를 통해 내야 하고 낯선 사람이 집을 사겠다고 하면 사람들이 많은 공공장소에서 만나는것이 좋으며 상대방의 신분증을 꼭 확인하는것이 바람직하다. 또 낯선 사람이 집을 보려 할 때 녀주인 혼자 만나지 말고 동행자 혹은 남편이 동반하는것이 안전하다. 그리고 출입문을 잠그지 말아야 한다.                 《지음》   
2    모택동의 첫사랑 도사영 댓글:  조회:6957  추천:2  2009-03-21
  실제사진 도사영     중앙TV 제1채널에서 방송한 모택동, 채화삼 등 초기 혁명가들의 청년시대를 그린 련속극 “흡동학소년(恰同学少年)”에서 모택동과 도사영(陶斯咏)의 사랑이야기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모택동의 첫사랑녀성의 이름은 도의(陶毅),  자는 사영(斯咏)이며 호남성 상담(湘潭)사람이다. 당시 도씨집안은 모두 장사로 이사를 갔었다. 도사영은 부유한 상인집안의 아가씨로서 주남녀자중학교(周南女中)를 졸업했으며 당시 “장강이남제일재녀(长江以南第一才女)”라는 칭호를 가지고있었다. 그녀는 1920년대 장사학계의 풍운인물이였다. 호남학생련합회 회장이며 호남각계련합회 회장직을 맡았다.   소자승(萧子升)과 이례용(易礼容) 등의 기억에 의하면 도사영은 키도 크고 재주도 뛰여났으며 성격도 아주 강한 장사의 유명한 미녀라고 한다.   도사영은 1896년에 태여났다. 그녀는 주남녀자학교의 수재이고 전형적인 새시대 녀성이며 사상이 진보적이고 교육구국을 주장해왔다. 도사영은 신민학회활동에 참가하면서 모택동을 알게 되였고 또 모택동을 애모했으며 모택동을 사랑했다. 모택동도 지식이 있고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현대적인 도사영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모두 개성이 강한 까닭에 결국 합치지 못하고 나중에 헤여지고말았다. 도사영에게는 이 사랑이 평생 유일한 사랑이였으며 이후 다시 련애를 하지도 않았고 결혼도 하지 않았다.   1919년부터 1920년까지 두 사람은 장사에서 함께 “문화서점(文化书店)”을 꾸리였고 열렬한 사랑에 빠지였다. 그러나 한 사람은 중국의 운명을 개변시키려는 원대한 포부를 품고있었으나 다른 한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하여 두 사람은 좋아하다가도 헤여지고 헤여졌다가도 다시 화해할 때가 많았다.   도사영아가씨가 바로 신민학회 “통신집(通信集)”중에서 나오는 도의이다. 도사영은 향경여(向警予), 임배도(任培道)와 함께 “삼자매”로 불리웠으며 동시에 양창제(杨昌济)선생의 추천으로 신민학회에 가입했다. 도사영은 미녀이며 재녀일뿐만이니라 담도 크고 일처리도 깔끔하게 하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모택동과 도사영은 사상과 신념이 서로 달라 결국 헤여지게 되였다.     (앞줄 왼쪽 두번째가 도사영,뒤줄 왼쪽 네번째가 모택동)   1921년, 중국공산당 제1차대표대회가 결속된후 회의에 참석한 대표들은 활동경비로 돈 50냥을 받아가지고 돌아갔다. 모택동은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항주, 남경 등지를 돌아보았다. 당시 모택동은 남경에서 첫사랑이였던 도사영을 만나 옛정을 나누었다.   모택동의 첫째부인인 양개혜는 모택동이 도사영과 헤여진후 북경으로 가서 모택동을 만났으며 후에 결혼을 했다.   결혼후에도 모택동은 도사영과의 첫사랑을 잊지 못했다. 모택동의 사랑시 《하신랑.별우(贺新郎。别友》는 1922년에 도사영을 그리워 쓴것이였다. 당시 모택동은 양개혜와 결혼한지 1년이 더 되였다. 이 일때문에 양개혜는 모택동과 크게 다투기도 했다. 후에 양개혜는 모택동의 심정을 리해해주었으며 서로 오해를 풀었다.   도사영은 평생을 녀성교육발전에 기여했다. 도사영은 상해, 장사 등지에서 녀자학교를 세우고 정령(丁玲) 등 적지 않은 제자들을 양성해냈다.   주남녀자학교에서는 도사영, 향경여, 채창을 “주남삼걸(周南三杰)”이라고 불렀다. 향경여는 졸업후 고향인 서포에서 학교를 세웠고 도사영은 모교에 남아서 기숙사 사감으로 있었다. 두 사람은 친분이 있어 아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향경여는 일이 있어 장사로 올 때면 늘 친구인 도사영을 찾아왔다. 1918년 9월, 채창은 향경여에게 장사로 와서 함께 녀자프랑스류학준비학교를 세우자고 제의했다. 향경여는 좋은 생각이라면서 바로 동의하고 고향 서포를 떠나 장사로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향경여는 도사영과 함께 신민학회에 가입하고 이 학회의 첫번째 녀회원으로 됐다.    영화속의 청년 모택동                                                                                                                       영화속의 도사영   모택동과 도사영은 한고향사람이지만 집안환경은 너무 차이가 났다. 도씨집안은 상담일대의 부자집안이였다. 도씨집안에서는 도사영이 모택동과 사귀는것을 견결히 반대했다. 또한 두 사람의 리상도 서로 달라 더이상 관계를 발전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헤여진후에도 우정은 여전히 지속되였다. 1920년 7월, 모택동이 “문화서점”을 꾸리고있을 때 도사영은 주요한 투자자의 한사람이였다. 즉 당시 은원 10원을 낸 3명중의 한사람이였다. 그해 10월, 모택동이 호남혁명정부의 명의로 호남인민헌법회의를 열고 호남헌법을 제정할것을 제의할 때에도 도사영은 모택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주었다.   모택동이 도사영과 헤여진후 호남성학생련합회의 주석인 팽황(彭璜)이 도사영을 열렬히 추구했지만 도사영은 견결히 거절했다. 도사영은 1931년 35살 나이에 병으로 장사에서 돌아갔다.(중국경제넷)   제공: 연변라지오TV신문 태림수  
1    진시황, 중국관광을 주도한다 댓글:  조회:4527  추천:0  2009-03-18
    중국관광개발에 공헌이 큰 진시황   진시황은 중국력사상 최초로 통일된 다민족전제주의중앙집권국가를 건립하였다. 그의 가장 큰 력사적공헌은 중국을 력사상 최초로 정치적통일을 하고 “차동궤, 서동문( 同 ,  同文)”을 이루어 후대에 통일을 추구하는 기초를 닦아놓은것이다. 진시황의 력사적공헌은 아주 많다. 여기에서 일일이 언급하지 않지만 사람들이 주의하지 않은 부분을 얘기할가 한다. 진시황은 력사상 관광개발에 대한 공헌이 가장 큰 사람이다. 당시 진시황은 천인공노를 두려워하지 않고 여러사람의 의견을 배척하면서 과감하게 만리장성을 쌓았다. 그리고 인류력사상 가장 방대한 공사를 완성하여 후세인들에게 아주 뛰여난 관광지를 제공해주었다. 관광업의 각도에서 보면 그의 안목은 1000년이상을 갔으니 얼마나 멀리 내다본것인가? 만리에 이어지는 장성은 다만 성벽이 아니라 성장(城 ), 적루(  ), 관성( 城), 돈보(墩堡), 영성( 城), 진성봉화대( 城烽火台) 등 각종 방어공사로 구성된 완미한 방어공사체계이다. 이 방어공사체계는 각급군사지휘체계의 단계별 지휘와 통제를 받았다. 장성은 후세에 영향을 크게 미친 위대한 공사이다. 군사적가치는 이미 력사에 매몰되였지만 관광가치는 갈수록 커지고있다. 진시황이 투자개발한 관광지로는 또 서안의 진시황병마용이 있다. 이는 만리장성과 더불어 현재 중국에서 입장료가 가장 높은 두개의 관광지이다. 그리고 외화을 가장 많이 벌어들이는 곳이기도 하다. 많은 나라의 국가원수들이 중국에 오면 반드시 북경의 장성과 서안의 병마용을 참관하지 않았던가? 국내의 어느 곳이든 이처럼 명성이 높지는 못하다. 진시황릉은 거대한 규모와 풍부한 부장품으로 력대제왕릉중 최고이다. 또한 세계최대의 황제릉이기도 하다. 일찍 1987년에 세계문화유산목록에 등재되였다. 이것도 진시황이 관광개발측면에서 이룬 성과이기도 하다. 진시황릉의 전체면적은 56.25평방킬로메터에 달한다. 이 면적은 오문3개, 자금성 78개의 면적에 달한다.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진시황이 13살에 진나라왕위를 계승했을 때 자신의 릉원을 짓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가 죽은후에도 채 완공되지 않은 이 방대한 황제릉은 건축시간이 38년에 달했다. 공사에 참가한 사람이 72만명에 달했으니 이는 당시 전국총인구의 1/10이나 된것이다. 진시황이 6개 나라를 통일한후 일찍 천하의 병기를 몰수하도록 명을 내리고 12동인(十二 人)을 주조했는데 각각 17만킬로그람에 달했다고 한다. 이처럼 크고 제작이 정교한 동인은 력사상 드문것이다. 12동인은 진시황이 생전에 좋아했던것이여서 진시황릉이 완공된후 다른 물품들과 함께 부장품으로 릉묘에 묻었다고 한다. 현재 중국의 문화재보호기술이 높지 못해 진시황릉의 지궁은 아직 열지 않고있다. 이 지궁은 아주 크고 대량의 진귀한 보물을 보관하고있으며 또한 각종 기관이 설치되여있다. 지궁이 열리면 진시황이 개발한 또 하나의 세상을 놀래울 관광경관이 나타날수도 있다. 진시황은 관광지를 널리 개발했을뿐만아니라 자주 관광을 다녔다고 한다. 려행가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그는 6번의 대규모 순유(巡游)를 했으며 명산명승지에 비석을 세워 자신의 사적을 기록했다. 북으로는 진황도에서 남으로는 강소, 절강, 호북, 호남에 이르고 동으로는 산동연해지방, 서로는 감숙 롱서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의 족적이 남아있다. 추봉산(산동), 태산, 지불도(연태), 회직(절강 소흥), 갈석(하북 창려) 등에 모두 그가 돌에 새겨놓은 글이 남아있으며 자연경관을 더욱 돋보이게 해주었다. 산동성 영성( 城)에 있는 성산두는 천진두라고도 하는데 이곳은 중국에서 태양이 가장 먼저 뜨는 곳이다. 천진두는 진시황이 친히 명명한것이기도 하다. 《사기 진시황본기》에 “당시 진시황은 문무백관을 이끌고 함양에서 나와 동으로 순유하였다. 황제의 수레와 말이 성산두에 이르렀을 때 구름과 안개로 뒤덮이고 바다에 물안개가 가득했다. 이것을 본 진시황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마음이 상쾌해져서 이렇게 말했다. ‘선경이로다, 하늘의 끝이로다’”라고 기록되여있다. 당시 진시황이 순유했던 명산명승지는 현재 거의 모두 국가급의 명승지로 지정되였다. 진시황이 개발한 관광지의 품격이 높고 관광수입이 높은 점은 놀랄만한 정도이다. 만일 중국에서 수천년의 관광업개발의 공헌을 따져 상을 준다면 가장 큰 상은 당연히 이 천고일제 진시황에게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고 말하는 력사학자들도 있다.    제공:연변라지오TV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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