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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남성 건강일 댓글:  조회:1071  추천:0  2020-10-27
삶과 문화   세계보건기구에서 매년 10월 28일을 ‘세계 남성성건강일’로 확정한 데 비추어 국가인구계획출산위원회에서 국무원의 비준을 거쳐 20년 전 즉 2000년에 매년 10월 28일을 중국 남성들의 명절로 즉 ‘남성건강일’로 지정한 일은 오늘날 사람들의 시야에서, 우리의 생활권에서 사라지고 있다. 나라적으로 10월 28일을 ‘남성건강일’로 정한 것은 그로서의 특별한 의의가 있다. ‘남성건강일’의 주제는 가정의 생활 질에 영향 주는 ‘성기능장애(ED)’를 비롯한 남성들의 전위선염, 전위선비대증, 고혈압병, 당뇨병, 만성피로증후군, 비만증후군, 탈모증 등에 관심을 돌릴 것을 제시함으로써 전사회에 남성들의 건강에 주의를 둘 것을 호소하는 것이였다. 남성 생식기계통 건강상태가 날로 악화되고 있는 것과 선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는 것은 지금 전반 사회적으로 아직 이에 대하여 보편적인 중시를 돌리지 못하고 있는 것인데 남성들 자체를 망라하여 일부분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은 태도를 취하고 있다. 사회행위 전통으로부터 보면 남성들은 자신을 망라하여 그 어떤 사람의 건강이든 관심을 돌리지 않는다. 남성들은 장시기 동안 건강문제를 홀시하는 습관을 형성하였다. 보다 명확하게 말하여 . 사실상 남성과 녀성들의 가장 큰 부동점은 남성은 일생동안 자신의 신체상태에 대하여 적게 근심하는 것이다. 오늘날 응급환자의 3분의2가 남성들이라고 한다. 이러한 원인의 하나가 바로 남성들이 늘 건강한 사나이가 되여야 한다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갖고 있어서 병원에 가 암검사를 망라한 전면검사를 받기 싫어하는 데 있다. 2017년 3월에 상해에서 개최된 ‘제5회 남성건강국제회의’에서는 녀성이 남성보다 7년 정도 오래 사는 리유에 대하여 열띤 토론이 있었다. 20세기 20년대만 하여도 녀성은 남성보다 겨우 1년을 더 장수하였다고 한다. 수많은 의사가 남성의 수명이 짧은 주원인이 호르몬에 있다고 본다. 무엇보다 남성에게는 녀성의 뇌와 심장 그리고 뼈속에 충분히 들어있는 항스트레스 호르몬인 에스트론겐(雌激素)이 없는데 이 상태는 갱년기까지 지속된다고 한다. 또한 호르몬 성장호르몬과 멜라토닌(褪黑激素)의 생성도 같은 나이의 녀성에 비해 남성이 더 일찍 줄어든다고 한다. 멜라토닌은 로화를 방지하는 작용으로 각광받고 있다. 지금 사오십대가 되면 많은 남성들이 성기능장애 증후군이라는 문제로 고민하게 된다. 의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최근년간 남성의 정자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녀성은 페경기 후에도 호르몬의 균형을 의학적 수단으로 유지할 수 있는 반면 늙은 남성의 테스토스테론(睾丸素)의 결핍은 약을 복용하여도 개선되지 않는다고 한다. 최근년간 호르몬이 남성의 몸에 어떤 부작용을 일으키는지 충분한 연구가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고 의학자들이 침통하게 느끼고 있다. 이러한 리유는 여태껏 이른바 ‘남성의 갱년기’가 무시되여왔기 때문이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항간에서는 갱년기란 남성에게는 없는 줄로, 정력이 약한 남성을 골려주는 대명사로 취급되였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사회적으로 앞장에 선 남성은 녀성에게 인기가 있는 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성은 녀성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일터에서 파김치 되도록 일하고 격렬한 스포츠에까지 열중하여 목숨을 내걸기도 하는게 아닐가. 그 뿐인가. 피로한 하루 근무를 마치고는 흔한 명태쪼각이나 칼로리 높은 쏘세지와 같은 간단한 안주에 독주까지 마셔대기가 일쑤니 건강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지 않은가. 나라에서 10월 28일에 특별한 뜻을 부여한 후 많은 녀성들은 혹여 ‘남성건강일’을 단순한 남성들의 ‘성건강 경축일’로 볼 수도 있다. 20년 전에 나라에서 ‘남성건강일’을 설립한 것은 남성들의 건강이 이미 전사회의 주목을 받고 있다는 점을 설명한다.   기실 남성의 성건강에는 신체건강, 행위건강, 심리건강 등 제 방면이 망라된다. 지금 남성건강이란 말이 나오기만 하면 녀성들은 일반적으로 한가지 내용으로만 인정하고 있는데 기실 이는 오해인 것이다. 그러므로 녀성들은 남성들 신체건강의 제반 요소에 각별한 관심을 두고 해마다 10월 28일을 잊지 말고 즐거운 마음으로 ‘남성명절’을 맞이하며 그날이 되면 책임감을 갖고 남성들의 건강을 축하하는 의미로 간소한 행사를 조직하여 자못 뜻깊게 보내는 것도 무방할 것이다. 해마다 3.8절을 쇠는 취지가 바로 남성들에게 절대 잊지 말고 평소 녀성들의 존재를 중요시하고 그녀들을 많이 관심하고 이쁘게 봐주며 사랑의 손길을 많이 보내주라고 충고를 주는 뜻이 아닌가. 그러니 평소에 남성건강을 항상 념두에 두고 있다는 의미에서 간소하게 남성명절을 쇠는 것도 문제점으로는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연변일보 
36    조국청사에 빛날 조선족의 불멸의 위훈 댓글:  조회:1763  추천:0  2019-09-24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70돐을 맞이하는 요즈음 경건한 마음으로 해방전쟁시기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토비숙청, 주구청산, 참군참전, 전선원호, 토지개혁의 제1선에서 주력군으로 활약하면서 동북해방전쟁 나아가서는 전국 해방전쟁의 력사적 승리를 이룩하는 데 뛰여난 기여를 한 조선족인민들의 업적을 돌이켜보노라면 그 감회가 새삼스럽다. 우리 민족은 14년간의 간고한 항일혁명투쟁의 행정 속에서도 줄곧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불요불굴의 정신과 분진하는 민족적 기개를 떨치면서 력사에 감동적이고 눈물겨운 한페지를 남기였다.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이 무조건 투항을 선포함으로써 중국인민의 항일전쟁은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항전의 승리로 하여 국내의 계급관계에는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즉 중국공산당을 대표로 하는 인민대중과 대지주, 대자본가의 리익을 대표하는 국민당과의 모순이 주요한 모순으로 상승한 것이다. 중국공산당은 항전승리의 과실을 보위하면서 평화롭고 민주주의적이며 광명한 새 중국을 건립하려고 한 반면 국민당은 항전승리의 과실을 찬탈하고 대지주, 대자산계급의 리익을 대표하는 반식민지, 반봉건적인 사회제도를 유지하려고 시도하였다. 항일전쟁이 승리한 1945년 당시 동북의 조선족은 약 230만명에 달하였는데 주로 동만, 북만, 남만 등지에 크고 작은 집거구를 형성하고 생활하고 있었다. 광복 이후 국민당군의 ‘선견대’는 연변 5개 현의 지주, 토호, 자본가, 관료 등을 중심으로 국민당조직을 세웠는데 연길에는 국민당 길림성당무 판사처와 국민당 연길현당부 등이 설치되였고 각지에서는 토호, 특무, 지주를 중심으로 하는 ‘치안유지회’가 조직되였다. 길림시에는 괴뢰만주국시기 조선인민회 회장이였던 리대성 등이 국민당 리종대 등과 결탁하여 길림시조선인회를 건립하고 조선족들은 국민당을 따라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광복 후 할빈에서는 국민당에 투신한 권영조 등 소수의 사람들이 ‘국민당지방공작자’요, ‘국민당선견대’요 하고 자칭하면서 국민당정부의 할빈시 접수요원과 중앙군을 영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외에도 조선족들이 비교적 집결되여있던 목단강에는 고려인협회가 나와 협해한 민족주의사상을 선전하였고 남만지역에서도 조선인회가 조선족사회의 일반사무를 장악하고 국민당을 따르도록 조선족들을 선동하였다. 이러한 정황에서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있는 민주동맹, 청년동맹, 부녀동맹 등 혁명단체와 조선의용군 그리고 후에 동북행정위원회의 비준을 받고 설립된 연변전원공서는 조선족집거구의 특수상황에 비추어 많은 지방간부들을 기층에 파견하여 “민족평등의 원칙에 따라 조선족의 정치, 경제, 문화의 해방과 발전권리를 보장하고 민족의 언어문자, 풍속습관, 종교신앙을 존중한다.”는 우리 당의 민족정책을 널리 선전하고 참답게 시행하는 데 모를 박았다. 할빈, 목단강과 통화 지역의 조선족인민들 속에 심입한 조선족로간부 주덕해, 방호산 등은 공산당원을 발전시키고 당의 기층조직과 각급 민주동맹 혹은 민주련맹, 조선독립동맹 등을 조직하여 광범한 조선족인민들을 중국공산당의 두리에 단합시켰다. 이에 대비하여 당시 국민당특파원들은 국민당을 따르도록 농민들을 강요, 선동하는가 하면 이른바 ‘정통’관념에 빠진 기타 민족들의 심리를 리용하여  민족관계를 도발하고 사건을 조작하며 민심을 교란하였다. 바로 이와 같은 혼란한 사회상황에서도 우리 조선족인민은 당과 지방정부의 령도하에 협애한 민족주의자들과 날카롭게 맞서 투쟁하면서 여러가지 형식을 통하여 평화를 거부하고 전면적 내전을 시도하는 국민당의 음모를 남김없이 폭로, 비판하였다. 이때로부터 동북지역의 조선족들은 중국공산당의 령도를 견결히 옹호하고 공산당을 따라 국민당정부를 뒤엎는 투쟁에 앞장서 싸우며 자기의 피와 목숨으로 동북근거지를 창설, 보위하기 위하여 최대의 민족적 희생을 아끼지 않았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을 위한 성스러운 위업에 자기의 심혈을 다 쏟아부었다. 해방전쟁시기 동북3성에서 조선족청장년 6만 2942명이 참군하였는데 이는 해방구 조선족인구의 5% 이상을 차지하였다. 원 송강성에서는 1만 2600명의 조선족이 참군하였고 원 료동성에서는 8753명의 조선족이 참군하였다. 연변 5개 현에서는 3만 4855명의 조선족이 참군하였는데 연변지역 참군 총인수의 85%를 차지하였다. 이들은 동북해방전쟁의 장춘포위전, 사평해방전투, 황화산-철령 요격전, 금주성공략전, 흑산-대호산 저격전, 심양해방전투 등 주요 전투와 전역에서 민족의 기개와 영예를 떨쳤는가 하면 전국 해방단계의 평진전역, 장강도하작전, 의창-사시 전역, 대용-상식 전투, 중경해방전투, 해남도상륙전, 상서토비숙청전 등에서도 영용완강하게 싸우면서 새 중국의 창건을 위해 불후의 군공을 세웠다. 전방의 자제병들이 영용히 싸워 군공을 세웠는가 하면 후방의 조선족인민들도 전선을 지원하는 일에 떨쳐나섰다. 조선족집거구에서는 ‘부모가 아들을 군대에 보내고 안해가 남편을 전선에 보내며 형제들이 앞을 다투어 참군하는’ 현상이 비일비재하였다. 심지어 부자간과 부부간이 함께 참군하고 갓 결혼한 새색시가 남편을 전선에 내보내는 감동적인 일도 많았었다. 연길시제2중학교 2개 초중졸업반의 91명 학생들이 몽땅 참군하였고 송강성 오상현 민락촌의 조선족 403세대 가운데서  260명이 참군하였으며 녕안현 서안촌의 조선족  300세대 가운데서 124명이 참군하였고 해룡현에서는 2525세대의 조선족 가운데서 760명이 참군하였으며 심양교외인 영수태의 20여세대의 조선족 가운데서 14명의 청년이 참군하였다… 지난 해방전쟁시기에 이룩한 우리 조선족인민들의 불멸의 업적과 위훈은 조국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연변일보 
35    산마다 진달래는 만발하건만… 댓글:  조회:2513  추천:0  2017-05-25
      연변은 로혁명근거지로서 풍부한 홍색관광자원을 갖고있다. 홍색자원의 보호, 발굴, 개발, 리용은 연변의 정치, 경제, 문화, 사회의 발전에 갈수록 중요한 영향을 일으키고있다. “연변 2014년 국민경제 및 사회 발전 통계공보”에 따르면 2014년에 연변에서는 연인수로 1,361.2만명(국내관광객 1,298.4만명, 해외관광객 62.8만명)의 국내외관광객을 접대하였고 216.2억원의 관광수입을 올리였다. 전하는데 의하면 연변관광업의 이 같은 성장은 연변의 혁명유적지, 혁명전적지, 렬사릉원, 기념관, 박물관, 기념비 등을 담체로 한 홍색관광제품개발의 힘을 많이 입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최근년간 연변의 홍색관광은 해마다 수많은 관광객들의 각광을 받고있어 연변관광업에서의 홍색관광의 비중이 갈수록 상승세를 타고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일부 홍색관광제품에는 있지 말아야 할 미비한 점, 있어서는 절대로 안될 흠집들이 나타나 관광객들의 유감을 자아내는 일도 가끔 있으니 참으로 뼈 아픈 일침이 아닐수 없다.       봄기운이 완연한 지난 4월 29일에 북경에서 온 손님들을 모시고 연변의 일부 홍색관광명소를 안내하던중 화룡시 두도진 북산의 정상에 우뚝 솟은 혁명렬사기념비를 돌아보다가 뜻밖의 일에 닥치여 망연자실의 궁지에 빠지였다. 손님들과 함께 10여메터의 높이로 2012년 10월에 축조된 기념비 뒤면에 새겨진 85명 렬사들의 이름을 경건한 마음으로 묵시하면서 렬사비를 첨앙하던중 놀라운 발견이라 할가, 석줄배렬의 제일 아래줄에서 宋风变(송풍변), 宋荣变(송영변)으로 새겨진 두 이름이 유표하게 안겨왔다. 선망의 빛이 어리였던 손님들의 기색은 급전직하로 사라지고 사람마다 이마살을 찡그리면서 촬영까지 하며 이건 완전히 오기된것이라고 혀를 끌끌 차면서 도리머리를 저었다. 손님들의 뜻인즉 宋风变(송풍변)은 응당 宋凤燮(송봉섭)으로, 宋荣变(송영변)은 의례 宋荣燮(송영섭)으로 올려야 한다는것이였다.       얼굴이 따끔해났다. 그래도 주인자태로 나서서 혹시 한족렬사일수도 있지 않겠냐고 변명하면서 얼낌덜낌으로 궁색한 자리를 모면하였다. 사후의 자료확인결과는 더 언급하지 않아도 뻔한 일이다. 그리고 예로부터 우리 민족의 이름에는 왜서 바람 “풍(风)”자가 아니라 봉황새 봉(凤)자를 많이 사용하였는가에 대해서여 구태여 피력하기도 싶지 않다. 또한 우리 민족의 이름에 많이 포섭되고있는 불꽃 “섭(燮)”자가 규범화되지 않은 략자형태인 “변(变)”자로 민간적으로 많이 사용되고있는 상황도 구태여 운운할 기분도 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해당 부분의 통계에 의하면 항일전쟁, 해방전쟁, 조선전쟁에서 희생된 연변지역 혁명렬사는 도합 15,970명인데 그중 조선족렬사가 14,086명이다. 이는 전체 혁명렬사의 88.2%를 차지한다. 1986년 8월 당시 중앙선전부 부부장 겸 문화부 부장이였던 저명한 시인 하경지가 연변시찰시에 남긴 제사—“산마다 진달래요, 마을마다 렬사비”는 항일전쟁시기, 해방전쟁시기, 조선전쟁시기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앞사람이 쓰러지면 뒤사람이 이어가면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에 뛰여난 기여를 한 연변조선족들의 혁명력사에 대한 재조명이고 대집성이며 연변지역의 특유한 홍색문화의 진풍경이다. 얼추 30년이 지난 오늘날에 와서 하경지의 이 제사는 연변홍색관광에 대한 대홍보이자 연변홍색관광산업을 개발함에 있어서의 인기브랜드로 세인들에게 널리 전해지고있다.       물론 해방후 연변의 각급 당위와 정부에서는 혁명렬사들의 업적을 기리고 그들의 영웅사적을 대대로 전해가는것을 력사적사명과 시대적의무로 간주하고 주야장천의 품을 들이여 렬사출생지의 마을마다 혁명렬사기념비를 세웠는가 하면 렬사들의 발자취가 남겨진 일부 유적지와 유적물을 원상복구함으로써 여기에 고스란히 깃든 혁명력사, 혁명이야기, 혁명정신의 함축적내포를 관광객들에게 발현시켜 그들로 하여금 홍색관광체험코스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렬사들의 거룩한 넋을 기리고 류다른 감회를 가지고 혁명전통교양을 받도록 하는데 도움을 주고있는건만 사실이다.      렬사들의 충혼이 담겨져있는 이런 기념비를 떠받드는것은 렬사들을 존중하는것이며 기념비를 륭숭하게 세우는것은 렬사들을 우러러 모시는것이다. 하지만 전후(战后)의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던 지난 50년대에 작성된 렬사들의 서류를 자상히 검토, 정리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를 토대로 후세들에게 홍색문화재를 남겨놓는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의 처사가 아닐수 없다. 력사는 력사사실 그대로 반영하여야 하고 혁명렬사의 인명 같은건 추호의 문자상 오기가 없이 똑똑하게 밝여야 한다. 렬사들의 거룩한 넋을 세세손손 멀고먼 후세까지 전하는것은 매우 성스러운 사업인만큼 우리 모두가 허례허식의 사업작풍에서 철저히 해탈되여 좀더 신경쓰면서 나의 부모, 나의 일가족의 렬사비로 간주한다면 이 같은 엄청한 차질은 얼마라도 피면할수 있다고 보아진다.       예로부터 “집안허물은 밖에 드러내지 말라”고 했다. 집안망신을 “며느리”가 시켰든 “시누이”가 시켰든 “시모”가 시켰든간에 인젠 누구를 나무라고 누구를 핀잔을 줄 때가 아니다. 세인들에게 드러낼건 다 드러내고 보여줄건 다 보여주었기에 공개된 허물이나 다름없으니 부끄러워할 리유도 더는 없다. 이제부터라도 우리 모두가 자기를 새롭게 알고 자기부터 시작하는것만이 옳바른 삶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나름대로 연변 각 현, 시의 렬사 관련 서류와 출판물에 수록된 봉(凤), “섭(燮)” 관련 렬사이름들중 오기될 가능성이 있다고 느껴지는 이름의 일부를 선택한후 한어문자 그대로 올리는바이다.       李风鶴, 金学风, 裴风洙, 崔哲风, 金风哲, 金风龙, 金风录, 金风南, 李风春, 朴风吉, 李风今, 金哲变, 金东变, 徐仁变, 宋君变, 崔风石, 朴炳变, 李亨变, 李云变, 崔承变, 崔龙变, 朴长变, 东春变, 金龙风, 太凤变, 李风律, 徐宽变, 崔风学, 金春変, 南昌変, 权风云, 金风洙…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고 하지만 고친다고 해서 향후 랑패 볼것 없다. 이제라도 선손을 써서 지역마다 혁명렬사 관련 서류와 렬사이름을 망라한 혁명렬사기념비 비문을 자상히 검토한후 즉시 수정할것은 수정함으로써 “산마다 진달래요, 마을마다 렬사비”라는 연변홍색관광산업 브랜드의 정체성을 깨드리지 말고 일사불란으로 잘 보존하는것만이 렬사의 후세다운 자세이고 적중적이며 응분의 처사라 하겠다.. 연변일보 2017-5-25
34    오성붉은기에는 조선족렬사들의 선혈이… 댓글:  조회:2959  추천:1  2016-09-30
                                 오성붉은기에는 조선족렬사들의 선혈이…                                                                                                                                                                                    중화인민공화국 렬사기념일(9월 30일)과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67돐 기념일이 서서히 다가오고있는 요즈음, 물론 해마다 맞는 기념일이건만 올해따라 해방전쟁시기에 피 흘리고 목숨 바친 수천명을 헤아리는 오매불망의 조선족렬사들과 앞사람이 쓰러지면 뒤사람이 이어가면서 동북에서 해남도에 이르는 조국의 광활한 대지를 전전하며 “동북호랑이”의 위풍을 떨친 제4야전군의 조선족장병들을 우러러 떠올려보노라니 그 회포가 그 어느때보다 깊어만 진다.        해방전쟁시기 중국공산당은 국민당반동파들이 도발한 전면내전에 맞서 평화와 민족의 해방을 갈망하는 여러 민족 인민들을 령도하여 기세드높은 인민혁명전쟁으로 제국주의, 봉건주의, 관료자본주의 반동통치를 뒤엎고 신민주주의혁명의 위대한 승리를 쟁취하였다. 이 시기 동북지역의 100여만 조선족인민들은 중국공산당의 령도를 견결히 옹호하고 공산당을 따라 장개석의 국민당정부를 뒤엎는 성스러운 투쟁에서 앞장서 싸우며 자신의 피와 목숨으로 동북근거지를 창설, 보위하기 위하여 최대의 민족적희생을 아끼지 않음으로써 위대한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을 위하여 불멸의 공훈을 세웠다.         “8.15”광복직후 동북에 진출한 동북항일련군 선견대와 조선의용군 장병들 그리고 일찍부터 동북지역에서 지하공작에 종사하던 조선족혁명가들은 튼튼한 동북근거지를 창설할데 관한 중공중앙의 지시정신을 받들어 지방정권건설, 무장부대창설, 토비숙청, 토지개혁 등 일련의 사업을 실속 있게 진행하여 동북근거지를 창설하는 튼튼한 초석을 쌓았다. 이들은 연변민주대동맹, 조선독립동맹 북만특별위원회 등 사회단체를 설립하여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한편 무장부대의 설립에 박차를 가하였다. 팔로군기열료군구의 파견으로 심양에서 지하공작을 하고있던 한청은 광복직후 심양, 영구 일대에서 조선의용군 선견종대를, 김택명은 할빈에서 길흑보안총대 조선독립대대를, 김광협은 목단강에서 고려경찰대를, 강신태는 연길에서 연변경비퇀을 각각 조직하였다. 그리고 조선의용군은 1945년 11월에 제1, 3, 5지대로 편성되여 남만, 북만, 동만으로 진출하였으며 5지대는 길림지역에서 새롭게 7지대까지 내왔다. 이들 무장부대는 후에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 서렬에 편입되였다. 조선의용군 제1지대는 중국인민해방군 제166사로, 제3지대와 제7지대는 목단강군구의 14퇀과 합쳐 중국인민해방군 제164사로, 제5지대는 연변경비 제1, 2퇀과 통합되여 조선의용군 제15, 16퇀으로 편성되였다. 그후 조선의용군 제15퇀은 독립 제6퇀, 제7퇀과 통합되여 중국인민해방군 제156사로, 제16퇀은 독립 제4퇀과 통합되여 중국인민해방군 제47군 141사로 발전하였다. 이외에도 동만, 목단강, 통화 등 지구에서 활동하던 제2선병단의 조선족관병들은 동북인민해방군 포병, 공병, 철도 등 병종에 편입되여 해방전쟁에 참여하였다. 상술한 무장부대들은 광복초기 국민당의 “지하군“ “선견대”, “정진군” 등을 망라한 동북지역의 토비를 숙청하는 작전을 성공적으로 진행하여 인민정권수립과 토지개혁의 순리로운 진행을 보장함으로써 튼튼한 동북근거지의 창설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해방전쟁시기 중국공산당의 민족평등, 민족자치 정책이 실시되면서 중국조선족은 당당한 중국내의 소수민족으로, 인민정권의 진정한 주인으로 되였다. 그리하여 조선족인민들은 자신들이 수립한 인민정권을 보호하고 토지개혁운동에서 분배받은 토지를 지키기 위해 참군, 참전, 전선원호의 고조를 일으켰다. 해방전쟁기간 전 동북지역에서 약 6만 3,000여명의 조선족청장년들이 입대하였는데 이는 조선족 17명당 1명이 참군한 셈이다. 이들은 전략적방어단계(1945.11-1947.4)의 “4보림강”, “3하강남” 전역에서 용맹을 과시하였고 전략적진공단계(1947.5-1948.11)의 장춘포위전, 사평해방전투, 황화산-철령저격전, 금주성공략전, 흑산-대호산저격전, 심양해방전투 등 주요 전투와 전역에서 민족의 기개와 영예를 떨쳤다. 그리고 전국해방단계의 평진전역, 단풍도강작전, 의창—사시전역, 대용—상식전투, 중경해방전투, 해남도상륙전, 상서토비숙청전 등에서도 영용완강하게 싸우면서 맡은바 임무를 훌륭히 완수하여 불멸의 군공을 세웠다. 전방의 자제병들이 영용히 싸워 군공을 세웠는가 하면 후방의 조선족인민들도 자신의 아들딸들을 전방에 내보내고 전선지원사업에서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당시 연변에서 전선으로 나간 담가대와 운수대원들중 3,427명의 립공자와 1,582명의 모범근무자가 용솟음쳐나왔다. 당시 연변의 50여만명 조선족인구중 20만 2,000여명이 담가대, 운수대로 전선지원에 떨쳐나섰다.        최근의 통계에 따르면 해방전쟁시기 연변의 렬사는 4,754명으로서 그중 조선족이 3,813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는 1949년 연변조선족인구 52만 9,000명의 0.72%에 해당하는데 조선족인구 백명중 거의 1명의 렬사가 나온 셈이다. 그리고 녀성렬사 17명중 조선족렬사가 16명이였다. 이 같은 력사사실은 그 인구비률이나 력사적사례에 비추어보아도 전국이나 세계 전쟁사에서 보기 드문 거사라 하겠다. 뿐만아니라 지금까지도 민정부문에 등록되지 않았거나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해방전쟁시기 조선족렬사들이 수백명에 달한다고 한다. 례하면 1948년 2월 16일의 전오가자—고점자전투에서 희생된 530명의 조선족렬사중 반수이상이 반세기 넘도록 이름 없이 외로운 넋으로 길림시 화피창렬사릉원에 묻혀있다고 한다.         이같이 조선족인민들은 새 중국의 탄생을 위하여 매우 큰 대가를 지불하였다. 조선족렬사들과 조선족장병들이 흘린 피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오성붉은기를 더욱 붉게 물들였고 그들이 쌓은 위대한 력사적공훈은 조선족의 혁명투쟁사는 물론이고 나아가 중화민족의 혁명투쟁사에서도 영원히 빛나는 한페지를 장식하였다. 그러하였기에 모택동주석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찬란한 오성붉은기에는 조선(족)렬사들의 선혈이 물들어있다.”(동소붕 저: 《풍우40년(2)》 한문판, 중앙문헌출판사, 1997년판, 제201페지.)고 높이 평가한바 있다.         조국해방전쟁에서 불멸의 업적을 쌓은 조선족렬사들과 조선족장병들의 충혼의백은 오늘날 온 나라 중화민족이 힘차게 가창하는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의 장엄한 선률을 타고 천세만세 길이길이 빛날것이다.                                                                                             《연변일보》2016. 9. 29
33    그대들은 생각해보았는가 댓글:  조회:2554  추천:0  2016-09-09
                                                그대들은 생각해보았는가                                                                                                                                                                            중국  인민항일전쟁승리기념일을 맞이한 요즈음 경건한 마음으로 중국조선족의 항일렬사들을 묵념하노라니 류다른 감회가 새록새록 가슴을 파고든다.         중국조선족의 항일투쟁력사는 다른 민족들의 항일투쟁보다 일찍 시작되였고 또한 걸어온 길이 길었고 어려웠다. 지금 사학계에서는 보통 중국에서의 항일전쟁시간을 두고 “관내의 8년항전”, “동북에서의 14년간의 항일투쟁”이라고 일컫고있다. 그러나 동북에서의 중국조선족의 항일투쟁은 20세기초에 있은 “일로전쟁”후의 1907년부터 1945년에 이르기까지 장장 38년이라는 피어린 투쟁의 력사를 경유하였다고 할수 있다. 1907년 룡정촌 “조선통감부간도파출소”의 설치를 계기로 일제의 침략세력이 중국조선족집거지에 침투되면서 또한 일제가 조선족에 대하여 반식민지통치를 감행함과 아울러 조선족의 반일투쟁도 이와 함께 시작되였다. 민족의식과 반일인재양성에 목적을 둔 반일계몽운동, 반일단체들의 건립과 “3.13”반일운동을 계기로 하여 일어난 대중적시위운동 및 무장반일운동 그리고 1920년대에 일어난 맑스주의전파를 비롯한 여러가지 형태의 반일운동 등 조선족의 반일투쟁은 1931년 “9.18”사변전까지 그칠줄 몰랐다. 그후에도 중국조선족은 동북의 항일투쟁에서 매우 큰 대가를 지불하였다. 남만에서의 리홍광, 리동광, 리민환, 한호, 박한종, 한진, 류만희, 리송파, 엄필순, 량세봉; 북만에서의 허형식, 리복림, 리계동, 리성림, 리학복, 박봉남, 배치운, 박진우, 황옥청, 김정국, 서광해, 마덕산, 박길송 등 수많은 렬사들이 배출되였는가 하면 조선족이 많이 살고있는 연변지역만 하더라도 3,000여명의 조선족항일투사들이 자신의 보귀한 생명을 바쳤다. 연변의 항일시기의 렬사는 해당 부문의 최근 통계에 따르면 3,301명인데 그가운데서 조선족렬사가 3,204명으로서 항일시기 렬사총수의 97%를 차지한다. 여기에는 아직까지도 이름이 밝혀지지 않았거나 또한 가속을 찾지 못하여 렬사증을 발급하지 못한 수많은 렬사들이 포함되지 않았다. 일제의 거듭되는 군사“토벌”과 경제봉쇄로 말미암아 중국조선족항일투사들은 수시로 놈들의 포위와 습격에 맞띄우다보니 생활면의 곤난은 더 말할것도 없었다. 조선족항일련군관병들은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굶주린 창자를 달래였으며 홑옷바람으로 엄동설한을 지내야 했다. 이 같은 어려운 투쟁가운데서 수많은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전해지고있다. 의료설비가 없고 마취약도 없는 조건에서 통조림통으로 자작한 톱을 가지고 동상을 입어 썩기 시작한 자기 발을 스스로 잘라낸 항일련군 제2군 제6사의 군수부장 박순일, 적들에게 체포된후 갖은 혹형에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영용히 싸우다가 생매장을 당한 제1로군 경위려 제3퇀 퇀장 최철관, “녀장수”로 이름을 떨친 제2군 제4사의 녀기관총수 허성숙, 대중을 발동하여 투쟁하다가 적들에게 체포되여 굴함없이 싸우다가 최후를 마친 리추악, 우스훈하에 몸을 던진 항일련군 여덟 자매가운데의 안순복과 리봉선 그리고 이밖에 수많은 조선족렬사들이 살신성인의 자세로 일제와 용감하게 맞서 싸우며 자신의 보귀한 생명을 바쳤다. 참으로 가렬처절하던 동북의 항일투쟁에서 중국조선족이 지불한 대가는 그 인구비률이나 력사적사례에 비추어보아도 세계전쟁사에서 보기 드문 전무후무의 거사라 하겠다.       그리고 항일전쟁시기에 연변에는 336명의 녀성렬사가 나왔는데 그중 조선족녀성렬사가 334명이나 된다. 1980년대 당시 연변라지오방송국에서 근무하던 리선근선생은 최희숙항일렬사의 자료수집으로 동북3성을 답사하던중 기발한 창작령감으로 짧은 시간내에 렬사들을 추모하는 노래 “그대들은 생각해보았는가”의 가사를 창작하였다고 한다. 기실 중국조선족의 항일렬사중 “최희숙”이름을 가진 녀성렬사는 한사람뿐이 아니다. “고분이”란 애명을 가진 연길시 항일렬사 최희숙(崔喜淑)은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2방면군의 재봉대 성원으로 처창즈, 무송, 장백 등 일대를 전전하며 싸웠으며 1941년 2월에 남창수가 인솔하는 소분대를 따라 이동하다가 화룡현 용신구에서 부상을 입고 일제토벌군에게 체포되여 장렬한 최후를 마치였다. 그리고 “작달녀”란 애명을 가진 룡정시 항일렬사 최희숙(崔姬淑)은 연길현항일적위대원으로 부대를 따라 어랑촌항일유격근거지에 전이하여 싸우다가 1934년 8월에 있은 한차례 반포위“토벌”전에서 적탄에 맞아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그대들은 생각해보았는가”는 비록 30여년전에 창작된 노래이라지만 지금도 이 노래의 가사나 가창을 음미하면 음미할수록 그 감수가 새로울뿐만아니라 무엇인가 가슴을 따끔하게 울려주면서 여운을 남기고있다.          오늘과 같은 풍요로운 사회를 후손들에게 물려주려는 신념을 안고 허허벌판 만주벌에서 눈바람을 이겨내며 주야장천으로 싸운 항일투사들, 령어의 몸으로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갖은 혹형을 당하다가 차거운 쇠사슬을 찬채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항일지사들 그리고 지금까지도 산천황야의 무주고혼이 되여 심산의 어느 밀림속에 소리없이 누워있는 항일영렬들의 거룩한 넋은 가수 김은희가 부른 “그대들은 생각해보았는가”의 가창선률을 타고 세세손손 멀고먼 후세까지 긴 여음을 남기면서 전해지리라 믿어의심치 않는다.                                                    봄빛도 정다운 강반에서/ 사랑을 속삭이는 련인들이여                                             텔레비죤앞에 모여앉아/ 이밤을 즐기는 사람들이여                                             그대들은 생각해보았는가/ 이 땅을 찾아준 은인들을                                             아직도 어느 한 심산속에서/ 이름없이 누워있는 렬사들을                                                                                                                                                                                                               ……
32    갑오년의 풍운을 떠본다 댓글:  조회:3060  추천:1  2014-03-01
       최근년간 조어도령유권을 에워싼 중일간의 갈등이 갈수록 팽팽해질 정도로 급물살을 타면서 국부적인 중일해전의 발발이 세인들의 주목을 크게 받고있다. 중일해전과 관련한 왈가왈부의 화제중에서도 “현대판 중일해전은 기껏해야 갑오년 청일해전의 번각본으로 끝날것이다.”는 설파가 중구난방으로 떠돌고있으니 저도 모르게 바로 120년전 갑오년의 풍운을 떠보게 된다.         1894년의 청일갑오해전은 매개 중국인에게 있어서 수난과 치욕의 력사적사건이 아닐수 없다. 당시 세계적으로도 비교적 선진적인 장비를 갖춘 대청국(大清国)의 북양함대가 왜서 단시일내에 복멸의 참패를 당하였을가? 오늘날 중일분쟁위기촉발의 현시점에서 청국 북양함대의 참패교훈을 편린으로나마 새롭게 재검토해보는것은 특수한 시대적귀감이라 느껴진다. 마침 지난 9월 태산—곡부—청도—위해—대련 관광코스를 다녀오면서 필자는 일부러 위해시 류공도의 갑오해전기념관을 찾아 상세한 수치기록까지 하면서 갑오해전의 여러가지 실패원인을 두고 제나름대의 생각을 여러면으로 적어보기도 하였다.        갑오해전패배의 원인은 매우 복잡한 인자들로 이루어진 만큼 그중 력사적으로 많이 거론되였던 북양함대의 건설방략에 관련된 문제만 언급하련다. 해전이 일어나기전 청일 쌍방 해군건설의 전략적구상은 완전히 달랐었다. 서방의 거함중포(巨舰重炮)의 모식을 따른 청국 북양함대의 주력함 정원호(定远号)와 진원호(镇远号)의 배수량은 7335톤으로서 구경 305㎜ 주포 4문과 구경 150㎜ 부포 2문, 어뢰발사기 3문을 배비한데다가 함선의 장갑두께가 300㎜를 초과한데서 당시 세계적으로 선진적인 주력함으로 지목되였는바 일본의 주력함보다 기껏해야 속도가 느릴뿐이였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일본의 최대 함선인 기함 요시노호(吉野号)의 배수량은 5000톤 밖에 안되였다. 뿐만아니라 함선의 시속을 늘이기 위해 일본은 장갑두께를 크게 절감하였을뿐만아니라 주포도 구경이 120~150㎜ 밖에 안되는 속사포를 배비하다보니 시속은 북양함선보다 평균 3분의 1이 더 빨랐다고 한다. 말 그대로 당시 청일해상전은 위력형함대와 기동형함대간의 겨룸이라 할수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청국의 참패로 끝났으니 심사숙고하지 않을수가 없다.         그렇다면 당시 청국의 해군건설전략에서 함선의 시속과 기동성을 홀시하고 쾌속반응능력을 높이지 못한것이 문제점이 아닐가? 하지만 갑오해전의 전황을 더 자상히 따져보면 이런 판단을 소홀히 내릴수가 없다. 쌍방의 포격전에서 일본함대에 발사한 정원호, 진원호 주포의 포탄 197발중 10발만 명중되였고 기타 부포의 포탄 482발중 58발만 명중되였다. 이와는 달리 일본함대의 속사포가 발사한 포탄량은 북양함대를 훨씬 초월하였을뿐만아니라 그 명중률도 대단히 높아서 정원호에만 159발이 명중되였고 진원호에도 220발이나 명중되였다. 허나 일본함대가 포탄을 우박처럼 퍼우어 북양함선의 장갑 겉면을 벌집으로 만들어놓았다지만 한발도 장갑을 제대로 꿰뚫지 못하고 포탑에도 아무런 손상을 주지 못하다보니 치명적인 위협은 없었다고 한다. 그러고보면 일본의 속사포는 전략상에서 성공적인 전례(战例)를 끌어내지 못하였다고 할수 있다. 가령 북양함대 포탄의 명중률이 좀만 더 높았다면 일본함대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수 있었기에 청국의 “거함중포”의 전략에는 문제점이 없다는것이 영국을 비롯한 당시 해상대국들의 일치한 견해이다. 그리하여 중일갑오해전후에 내놓은 해상대국들의 연구보고서는 일본의 해군건설전략에 대해서는 담담한 평가를 하였지만 북양함대의 “거함중포”전략을 찬사하는 글들에서 필묵을 아끼지 않았었다고 한다.        이로부터 북양함대참패의 원인을 함선의 성능이나 해군건설의 전략에서 찾을것이 아니라 구체적해전의 작전지휘, 수병들의 전투사기, 평일훈련내용 등 문제에서 따져보아야 한다. 우선 전술상에서 당시 북양함대는 자체의 장단점에 비추어 알맞춤한 근해에 진을 치고 힘을 축적하고있다가 선불을 걸려고 사처로 북양함대를 찾아헤매면서 핍진한 일본함선이 코앞에 닥치면 중포의 적중사격으로 호되게 답새기는 책략을 취하는것이 상책이라 하겠다. 하지만 광서황제와 군기대신 옹동화를 비롯한 주전파(主战派)들의 독촉과 압력을 이기지 못하여 북양함대는 자체의 장단점을 완전히 포기한채로 전기(战机)를 찾아 출항였으니 “어서 나를 잡아줍소.” 하고 자기를 겨냥한, 수많은 사냥군들이 대기하고있는 허허벌판에 나선 불곰의 신세나 다름없었다. 이러다보니 기동성이 차한 자체의 렬세를 드러낸채로 기동성, 괘속적 우위를 갖고있는 일본함대와 강다짐으로 맞붙었던것이다. 첫 회합의 포격전이 끝나기도 바쁘게 상상외의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기였다. 일본함대의 포탄에 정원호 함교(舰桥)가 박산난데서 사령관 정여창이 중상을 입고 피못에 쓰러졌다. 이는 당시 해전사에서도 보기 힘든 기문이 아닐수가 없다. 설사가상으로 북양함대 주포의 명중률은 일본함대 속사포에 비할바 못될 정도로 매우 낮았다. 이는 마치도 상호간 자체의 목표물을 드러낸 상황에서 저격수의 보총명중률이 아무리 높은들 련발사격을 들이대는 대방 돌격수들의 기관총명중률을 영원히 따를수 없는 격이라 하겠다. 이와 같은 해상전의 수준을 가졌으니 아무리 선진적장비의 함선인들 참패의 고배를 마시는건 당연한 일이 아닐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패의 원인을 밝힘에 있어서 오랜 시간을 두고 북양함대 함선의 성능에 착안점을 두기도 하였으니 “애를 배지 못한 돌계집이 멀쩡한 남편만 탓한” 격이 아닐수 없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이나 전문가들은 북양함대의 “거함중포”의 건설전략을 갑오해전참패의 원인에서 철저히 배제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있다. 중국의 패배와 일본의 승전으로 종말을 지은 갑오해전은 당시 세계적으로 보기드문 대규모의 해상전인만큼 필연적으로 해상대국들마다 여기에 눈길을 모으고 자국의 해군건설을 위한 참고적가치의 발굴에 주력하였다. 영국을 대표로 하는 여러 해상대국들은 향후 전승국인 일본의 “기동, 쾌속의 경험”을 받아들인것이 아니라 여전히 청나라가 선호하였던 “거함중포”의 모식으로 자국의 해군건설에 전력하였다.         싸움에서는 상승장군이 없는 법이다. 120년전에 복잡다단한 력사적챤스와 자국의 근대화우세를 빌어 갑오해전의 승전고를 울린 일본이라고 해서 오늘날 동방의 갑부로 탈바꿈한 중국의 해군을 또다시 쑥대밭으로 만들수는 없거니와 그럴 힘도 없다. 아직도 북양함대를 단시일로 싹쓸이를 했다는 흥분에서 해탈되지 못하였는지 극우파 아베신조정부는, 어제는 조어도주위에서 집무중인 중국의 어정선, 해경선을 요정내겠다는둥 오늘에는 중국의 무인비행기를 떨구어버리겠다는둥 하면서 안하무인격으로 중국과는 추호의 양보도 할수 없다고 강경한 태도를 보여주고있으니 참으로 고양이 웃다가 수염 부러질 일이라 하겠다. 기실 갈수록 기고만장한 아베신조정부는 기껏해야 갖가지 추문으로 국제경찰의 이미지를 크게 흐리우고있는 미국이란 호랑이를 등뒤에 업고는 호가호위(狐假虎威)의 허위적기세를 부리고있을뿐이다.  
31    문치사회가 그립다 댓글:  조회:3744  추천:0  2013-10-23
        전대미문의 급격한 변혁을 특징으로 하고있는 현대사회는 언어문자의 신격한 변화도 초래, 잠만 깨고나면 어디서 생겨나는건지 한무더기의 신조어들이 와르르 쓸어나오는 상황이다. 이러한 신조어들을 제때에 해석하고 뜻풀이를 하려면 당연히 사전을 떠날수가 없다. 그래서인지 옛날에는 출판편집일군이나 언어학자들의 독점물로 되여 보풀이 지도록 뒤지던 사전이였건만 오늘날에 와서는 소학생이 있는 집이라도 사전 한두권씩은 족히 있으니 최근년간에 여러가지 사전들이 얼마나 많이 출판되였음을 어림짐작할수가 있다.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부모님이 사준것도 있겠지만 상으로 받은것도 적지 않을것이다. 사전도 다양한 형식으로 출판되는데다가 학과별로, 분야별로 매우 자상하게 분류되다보니 서점의 사전류 매대에 마주서서 이것저것 펼쳐보다나면 한나절의 시간쯤은 어느결에 지나는지도 모른다.       주지하다싶이 사전이라면 일정한 언어의 단어나 단어결합, 성구적표현 또는 일정한 범위의 대상의 이름을 올리고 풀이한 책으로서 권위성을 갖기마련이다. 그런만큼 사전의 편찬자 또는 출판자는 항상 공구서의 권위성에 모를 박고 사전의 편찬, 출판시에 올림말의 정확한 표기와 과학적인 뜻풀이에 각별한 신경을 쓰면서 가급적으로 문제점들을 피함으로써 공구서의 권위성이 흔들리지 말도록 담보하여야 한다. 하지만 사전출판의 붐과 더불어 문제점도 적지 않게 로출되고있다. 사전 거개가 겉뚜껑에 “신판”이 아니면 “최신판”이라고 유표하게 밝혀놓고있지만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나타나는 새 올림말을 일일이 보충하지 못하고 그 뜻을 새롭게 해석하지 못하였을뿐만아니라 예전의 사전에서 나타난 부정확하고 불합리한 점들을 찾아내여 수정가필도 하지 않았기에 일부 사전들은 명색이 신판이지 기실은 시대의 요구에 수응하기 어려운 구태의연한 공구서의 역할밖에 할수 없는 상황이다.      가장 간단한 일례로 작금에 널리 쓰이고있는 일부 새 사전들에 오른 올림말의 그릇된 대역과 해석 및 비과학적인 뜻풀이 등을 몇가지 내놓을수 있다.      일부 새 사전들에서는 한어의 “黄牛”를 우리 말로 옮겨놓을 때 옛날 사전의 틀린 표기를 그대로 옮겨서 “황소”라고 적고있다. 그러하기에 아직도 일부 번역문도서들에서 “延边黄牛”를 “연변황소”라고 옮겨놓는 일들이 비일비재이다. 《조선말대사전(전 3권)》의 올림말에 따르면 “황소”는 “① 큰 수소. ② 힘이 몹시 센 사람을 비겨 이르는 말”로 뜻풀이되였다. 한어에서의 “延边黄牛”는 누런색을 띤 연변소의 특징을 점찍은것임에도 불구하고 “연변황소”라고 하였으니 연변의 소는 몽땅 큰 수소뿐인것으로 해석되고있다. 그러므로 “延边黄牛”에서의 “黄牛”는 응당 “황우” 또는 “누렁소”(털의 색갈이 누런 소→《조선말대사전》 제1권 899페지)”로 표기하여야 한다. 따라서 “延边黄牛”라면 당연히 “연변황우” 또는 “연변누렁소”로 적어야 함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한어의 “管井”을 “우물뽐프”로 적었는데 이 역시 동문서답식의 대역이 아닐수 없다.“管井”은 우리 말의 어떤 “뽐프”가 아니라 어떤 “우물”을 대상한것이 분명하기에 마땅히 “관우물(물을 얻기 위하여 직경이 작은 관을 땅속에 박아서 만든 우물→《조선말대사전》 제1권 774페지)”로 대역되여야 한다.      또한 한어의 “茶炉”역시 한어글자의 뜻풀이에 따라 “차를 끓이는 곤로”라고 옮겨놓았다. 물론 “차를 끓이는 곤로”란 제품이 새로 나왔다 하더라도 한어 “茶炉”의 원뜻은 “물을 끓이는 소형보이라”임을 알아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茶炉”를 시대의 변화에 수응하여 두가지 내용으로 갈라서 대역하거나 뜻풀이하려면 “물을 끓이는 소형보이라” 또는 “온수보이라”를 앞순위에 둔다면 “茶炉”에 대한 우리 말 대역이나 해석이 완벽해질수 있다고 보아진다.      그리고 또 한어의 “人字梯”를 두고 우리 말로 “사람인자형 사다리”로 적기도 하였다. 물론 한어나 기타 외래어를 우리 말로 옮김에 있어서 독자로 하여금 직접 환하게 터득할수 있는 올림말을 적는것을 원칙으로 내세움은 탓할바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 말 사전에 상응한 올림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해석식올림말 또는 풀이식올림말을 만들어낸다면 우리 말 규범원칙에 어긋나지 않을수가 없다.《조선말대사전(전 3권)》에는 “사다리말”이란 올림말이 있는데 그 뜻인즉 “두 사다리의 웃부분을 한데 결합하고 밑부분을 벌려 안전하게 설수 있게 만든 디딤대”라는것이다. 그러므로 “人字梯”의 적역은 “사다리말”임이 틀림없다.      오래전부터 언어학자들은 “헌법과 문법은 나라의 두 기둥이다”라고 일컬어왔었다고 한다. 사실 헌법이든 문법이든 모두가 사회적약속이라고 할수 있다. 헌법은 사회생활을 위한 국가적약속이요, 문법은 말과 글의 소통방식을 정한 언어적약속이라 하겠다. 헌법과 보통법이 옳바르게 만들어지고 집행되는 사회를 법치(法治)사회라고 한다면 넓은 의미의 문법 즉 우리 말이 옳바르게 표기되고 우리 말의 사용과 규범이 잘되여가는 사회는 문치(文治)사회라 할수 있다. 그러므로 급속한 시대 발전과 더불어 어지러워진 언어문자환경을 수시로 정화할수 있는 각종 류형의 사전의 량도 늘여야겠지만 그 품질을 배로 높이는것이 급선무가 아닐수 없다.   연변일보 10월 23일자
30    녀자, 남자의 귀뺨 그리고… 댓글:  조회:3984  추천:0  2013-04-17
      개혁개방의 30여년의 시간을 경유하여 오늘날 중화민족의 물질생활은 유족스롭게 마련되였다지만 이를 동반한 정신생활은  풍요롭지 못한것 같다. 몸은 편하지만 마음은 오히려 옛날보다 더 불편할 때가 많다. 또한 사회생활의 모든것을 게임의 틀에 딱 견주어서는 네가 패자 아니면 내가 승자라는 이분법적인 결과만 추구하는 바람이 너무도 세다. 한마디로 여유있고 넉넉한 물질생활에 대비하면 정신생활은 도리여 빈곤한 상태에서 해탈되지 못하고 전반 중화민족의 자질향상에 적지 않은 문제점들이 로출되였다.        국내의 한 유명한 사회학자는 최근에 한 민족이 부유한 생활을 마련하자면 30년이 소요되고 한 민족이 부강한 삶의 자세를 내세우자면 50년이 필요되지만 한 민족이 전반적자질의 향상을 이룩하자면 200년이라는 시간을 경유하여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개혁개방이래의 30여년을 거쳐 오늘날 중화민족의 생활은 부유수준에 기본상 기달되였다고 할수 있고 GDP총량도 세계수준의 제2위로 용약 뛰여올랐으며 중국의 경제실력도 많은 령역에서 세계시장을 석권할수 있고 세계경제를 좌지우지할수도 있는 수준에까지 치달아올랐다.       하지만 중화민족은 아직 부강한 삶을 자랑할 때가 아니다. 중국의 경제구조를 보아도 세계의 선진수준을 가진 핵심 기술과 제품들이 적고 관건기술, 주류제품, 핵심설비들은 수입하고있기에 중국은 여전히 가공제조를 주체로 한 경제실체의 수준에 이르고있다. 경제뿐이 아니다. 날로 풍요한 물질적부에 대비하여 우리의 정신적부는 너무나도 빈약한 상태에 처해있다. 오직 자신심, 가치관, 문화의식 등등 면에서 중화민족의 종합적자질이 질적인 향상을 가져와야만 진정으로 중화민족의 부강한 모습을 과시할수 있다.        미국의 영화나 드라마를 보노라면 갱영화(警匪片)이든 무협영화(英雄片)이든 만화영화이든 씨나리오의 슈제트가 복잡다단하고 불가사의하게 꾸며졌지만 에필로그는 거의 한곳으로 즉 정의가 사악을 누르지 않으면 영웅이 마귀를 전승하는것으로 엮어지고있다. 연출들의 시도가 바로 정의와 긍정적인 힘을 선양하려는것이라 하겠다. 미국인들은 바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정의적인 가치관을 수립하도록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있다.        이와는 달리 일본의 영화나 드라마는 례의, 존경, 존엄 등을 망라한 자기 민족의 처세도덕관을 고양한 내용을 많이 담고있다. 그러다보니 일본의 영상물에서는 중국의 영화나 드라마에서 흔히 볼수 있는, “녀자가 남자의 귀뺨을 찰싹찰싹 후려친다”거나 “자식들이 부모들에게 줄욕을 퍼붓는”것과 같은 기본적소양을 어기는 장면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최근 년간, 중국의 영상물은 후궁(后宫)들간의 암투, 가족내의 갈등, 고부간의 새암 등을 주제로 “서로가 숙적이 아니면 앙숙이 되여 속이고 물고뜯고 하는” 이야기를 담은것들을 많이 취급하였다. 이런 비주류적인 영상작품과 영상문화는 사람들의 가치관과 사상리념에 영향을 주기 마련이다. 더우기 이와 같은 비주류적인 문화와 부정적인 힘을 선양하는 사회적환경에서 성장하고있는 차세대들이 도대체 무엇을 배우고있는지 근심걱정이 앞서지 않을수 없다.         중화민족의 전반적자질을 전면적으로 향상시키는것은 중국특색의 사회주의강국을 건설하고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과 “중국의 꿈”을 이룩함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담보로 된다. 미래의 국제적경쟁도 민족의 총체적자질의 경쟁이 틀림없다. 그도 그럴것이 총체적자질은 한 민족의 지속가능한 발전과 밀접히 련관되기때문이다. 이와 같은 총체적자질은 바로 가치관, 정신, 교육, 관념, 문화 등 제 요소의 영향하에서의 기본적소양으로 이루어지므로 우리는 위기감을 가지고 자질향상을 위한 슬로건을 항상 내걸어야 한다.        전사회적으로 주류적인것, 긍적적인것을 전수하고 진취적인것, 락천적인것, 착한것, 도덕적인것 등을 망라한 5천년 중화문화의 핵심적정수를 홍보하여 중화민족의 뉘앙스가 차분한 가치관, 도덕관과 행위준칙을 철칙으로 내세우고 여기에 어울리지 않은 비주류적인것, 부정적인것들이 우리의 시야에서 점차 사라지게 하도록 하는데 진력함으로써 전반 사회와 차세대들에게 자질향상의 량호한 총제적환경과 조건을 마련해주어야 한다.         “중국의 꿈”은 결코 신기루와 같은 환상적이고 공상적인 구상이 아니다. 중화민족이 부유하고 유족한 삶으로만 아니라 량호한 전인민적자질로 하여 세인들의 존경을 받을 때라면 “중국의 꿈”은 서서히 현실로 우리앞에 다가올것이다. 허나 200년이란 자질향상의 소요시간은 너무나도 지루하다. 신들메를 단단히 조이고 조석을 다투면서 자질향상의 코스를 완주하는것이 우리의 옳바른 삶의 자세라 하겠다.  
29    녀성 례찬 댓글:  조회:3347  추천:0  2013-03-06
        조선의 미녀가수 리분희가 가식 없는 창법으로 부른 “녀성은 꽃이라네”를 들을 때면 남성들 거개가 녀성들로 하여 오늘의 세월이 더 밝아져가고 항시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서 환하게 웃으면서 살아간다는 긍지감으로 벅차있다.         하지만 유감스러운것은 우리 사회에서는 오래전부터 녀인에 대한 일종의 선입견이 굳어져있는것 같다. 즉 “녀인(女人)”을 대함에 있어서 “녀(女)”만 더듬어내고 보듬어주려고 하지만 “인(人)”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지고있다. 말하자면 녀인을 성의 매개물로만 간주할뿐 독립적인격을 갖춘 녀성의 이미지를 도외시하고있다는 얘기다. 살아숨쉬는 건강한 녀인이라면 물론 “녀성”과 “인간”의 유기적결합으로 이루어진다는것은 당연한 일이다. 문명하고 품위가 있는 건강한 남자라면 의례 녀인의 몸에서 야릇한 이성적체취도 향수하려는 욕구도 가져야 할뿐만아니라 더우기는 녀성들의 화려한 인간적품위도 감수하고 지켜줄 알아야 한다. 한마디로 녀성에게 있어서 어느것을 앞세우던간에 “인간”과 “녀성”이란 두가지 요인은 불가분의 련관으로 떨어질수 없다는 말이다.         사회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녀성은 원래 남성보다 인간성의 일부 원초적기질 례하면 정감적이고 직감적이며 붙임성이 좋은 등의 기품을 더 많이 지녔었다고 한다. 그런데 오랜 력사와 전반 사회발전의 흐름을 통하여 녀성은 정치, 경제, 사회 분야에서 자신이 떠맡아야 할 책임을 남성에게 시원히 미루었을뿐만아니라 권력과 함께 스트레스까지도 기꺼이 넘겨주었기에 그녀들의 이같은 기질이나 품성이 다소 색바래지게 되였다고 한다. 때문에 불공평한 대우와도 비슷할 정도로 오늘날 녀인들은 바로 “인간”보다는 많이는 출산, 육아 등등의 내용으로 규정된 성적의 이미지가 더 돋보이게 되였다고 해도 분수에 넘치는 말은 아닐것 같다.         중국의 고대철학자 로자는 “조용하고 섬약한 녀성은 충동적이고 강한 성미를 가진 남성보다 뛰여나고(牝常以静胜牡)” “부드럽고 약한것은 굳세고 강한것을 이긴다(柔弱胜刚强)”는 명언을남기였다. 세계적으로도 가장 일찍한 녀성주의자로 알려진 로자나 서방세계의 대문호로 알려진 괴테는 녀성들을 찬미하는 적지 않은 글을 써놓았다. 동서방 두 철인은 녀성들을 두고 인류에게 있어서 영구불멸의 상징으로, 만물을 포용하는 위대함을 지녔다고 극찬하면서 녀성들을 하늘처럼 떠받들었다. 로자나 괴테의 설에 따르면 녀성은 부드럽고 약한 성미속에 강한 기질을 조용히 숨기고있어 녀성의 매력을 더 과시한다고 한다.        “남성은 세계를 정복하는것으로 녀성을 정복하지만 녀성은 남성을 정복하는것으로 세계를 정복한다”고 한 어느 명인의 말이 그른데 없는것 같다.        진정 남성의 발목을 꼭 잡을수 있도록 매력을 가진 녀성은 남자들을 정복할수 있을뿐아니라 녀성들도 정복할수 있다고 한다. 그도 그럴것이 녀성의 몸에서는 성적인 매력도 발산되거니와 인간성의 매력도 과시되고있기때문이다. 성적인 매력은 한 남성을 일시적으로 무너지게 할수 있지만 인간성의 매력은 수많은 남성들의 마음을 영원히 정복할수 있다.         녀성들은 꿈을 즐긴다. 녀성들의 생활에서 꿈은 현실보다 못지 않게 그녀들의 마음을 끌고있다. 이와는 달리 남성들은 거개가 꿈을 믿지 않고 하찮게 여기면서도 현실에 집착하지도 않는다. 그러다가도 인생이 꿈과도 같이 허무하다고 생각될 때면 현실이고 꿈이고 몽땅 부정하고 냉동댕이친다.         녀성이나 남성이나 모두 허영심을 갖고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남성들은 명성을 떨치거나 권위를 자랑하고싶어하지만 녀성들은 많이는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남들에게 깔끔하게 보이도록 옷차림에 각별히 신경을 쓴다. 어떻게 보면 남녀사이의 추구는 정신적추구와 물질적추구의 구분이 확연한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녀성들의 허영심은 내용이 없는 허무하고 표면적인것이고 남성들의 허영심은 실제적내용을 갖고있는것리란 말인가? 어떻게 보면 녀성들은 기껏해야 한폭의 패션적인 치마, 우아한 헤어스타일에 깊은 관심을 두고있는것 같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혼인, 가정, 자식을 대함에 있어서 크나큰 책임감과 실제적인 태도를 보여주고있다. 그러나 남성들이 일단 허영심으로 부푸는 날이면 온 세상을 누비면서 세계를 정복하려는 기세로 인생의 호시절마저 서슴없이 바치려고 한다.         오늘날 사회에서 사람들은 녀성의 자립성을 각별히 중시하고있다. 현대 녀성의 주요특징은 바로 남성한테 의존하는 전통적인 녀성과는 달리 자립성이 강한것이다. 지난날 녀성들은 완전히 남성들한테 의존하였었는데 그 원인은 사회에 있다. 그렇다고 오늘날 사회적원인을 제거했다고 하여 절대적으로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대자연은 남성과 녀성이 서로 의존하면서 생활하도록 꾸며준만큼 누구도 누구를 떠나서는 살수가 없다. 오늘날 남성들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의존하면서 살려는 녀성은 가련해보인다. 반대로 자립성을 지나치게 내세우면서 들랑날랑하는 녀성앞에서는 “자라목 오무라들듯”이 가재걸음부터 치면서 이런 녀성들과 지내는것을 더없이 피곤하게 느낀다. 자립성을 갖고있으면서도 의존감을 보여주려는 스타일의 녀성이라면 가장 리상적이라고 하겠다. 즉 인격상의 독립을 내세우면서도 정감상의 의존을 바라는 녀성이 최고라는 얘기다. 이러한 녀성이야말로 사랑스럽고 또 이런 녀성과 생활한다면 마음이 홀가분하고 또한 항상 생활의 정취가 그윽하여 즐겁기만 할것이다.         문제는 사회가 발전할수록 우리 녀성들은 가끔 현실적인 자아모순속에 빠져 골머리를 앓을 때가 더욱 많다고 느껴지는것이다. 오늘날 사회생활에 있어서 녀성을 침해는것도 남성이지만 녀성을 보호해주는것도 남성이다. 녀성은 항상 남성을 경계하여야 하지만 또 정감상 남성한테 의존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관계를 처리한다는것은 실로 “봄볕은 며느리를 쬐이게 하고 가을볕은 딸을 쬐이게 하는” 심술궂은 시어머니와의 관계를 처리하기보다 더 어렵지 않을수 없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사회, 가정 제 분야에서 항상 환한 웃음을 선사하고 사회적, 가정적 내조를 잘해가면서 조화로운 분위기가 짙도록 이 사회의 어느 구석이라도 모가 나지 않고 둥글둥글하게 꾸미고있는것이 바로 오늘날 녀성들이다.        “3.8”절에 즈음하여 우리 남성들 모두가 진부한 녀성선입견을 포기하고 시대에 부응될수 있는 참신한 녀성관을 앞세우면서 녀성들과 손에 손잡고 이 사회의 조화로운 분위기를 지속적으로 마련하였으면 하는 바램이다.
28    참외밭, 오얏나무… 댓글:  조회:2836  추천:0  2013-03-03
                                 참외밭, 오얏나무…     전국시대 제나라 위왕에게 우희라는 후궁이 있었다. 우희는 위왕을 성심성의껏 모셨뿐만아니라 나라의 앞날을 늘 걱정하는 속 깊은 녀인이였다. 당시 제나라는 주파호라는 간신이 국정을 마음대로 휘둘러왔던탓에 나라가 말할수 없을 정도로 어지러웠고 민심도 불안한 상태였다. 그래서 이를 보다 못한 후궁 우희가 위왕에게 아뢰였다.     “전하, 주파호는 속이 검은 사람이오니 그를 내치시고 북곽선생과 같은 어진 선비를 등용하시오소서.”      우희가 자신을 제거하려 한다는것을 눈치챈 주파호는 오히려 우희와 북곽선생이 오래전부터 눈이 맞아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며 둘을 모함했다. 이를 곧이들은 위왕은 곧장 우희를 옥에 가두고 관원에게 사실 여부를 철저히 조사하라고 명했으나 이미 주파호에게 매수당한 관원들은 우희의 죄를 억지로 꾸미려고 했다. 위왕은 관원들의 보고에 이상한 점이 있는데다가 후궁과 쌓은 정도 있어 직접 우희를 심문하기로 했다. 왕앞에 끌려온 우희는 이렇게 말했다.     “전하, 신첩은 이제까지 한마음으로 전하를 모신지 10년이 되였사오나 오늘날 불행히도 간신들의 모함에 빠졌나이다. 신첩의 결백은 청천백일과 같사옵니다. 만약 신첩에게 죄가 있다면 그것은 ‘과전에 불납리요(瓜田不纳履)’, ‘리하에 부정관이라(李下不整冠)’고 했듯이 남에게 의심받을 일을 피하지 못했다는 부덕한 점이 옵니다. 이제 신첩에게 죽음을 내리신다 해도 더 이상 변명치 않겠사오나 주파호와 같은 간신만은 쫓아내십시오.”      위왕은 우희의 충심에 자신의 아둔함을 깨닫고는 곧바로 주파호 일당을 내치고 우희를 풀어줬으며 어지러운 나라를 바로잡았다.       이때로부터 제나라는 조정에다 “과전불납리, 리하부정관(瓜田不纳履,李下不整冠)”의 괘서를 내붙이고 관리들을 엄하게 다스렸다고 한다. 말하자면 “참외밭에서 신들메를 조이지 말고 오얏나무아래에서 갓을 고쳐쓰지 말라는것, 그 뜻인즉 관리라면 조금이라도 백성들의 의심을 사지 않도록 매사에 조심해야 한다는것이다.    최근에 한 기층법원에서 있은 일이다. 명예권침해사건의 재판을 맡은 법관이 법정에 들어서며 무의식간에 원고와 악수를 나누면서 인사의 말을 나누었다. 헌데 마침 법정에 들어서던 피고가 그 정경을 목격하였다. 물론 피고는 법관이 원고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똑똑히 듣지는 못했지만 원고의 손을 꼭 잡아준 법관의 거동이 눈에 거슬렸다.      사건경과가 매우 간단하여 법관은 인차 원고에 대한 피고의 명예권침해사실을 밝혀내게 되였고 원고의 승소를 판결했다. 헌데 피고는 1심판결에 불복하여 상급법원에 상소하고 또 2심법정에서 상소가 기각당하자 연후에는 신소의 길에 나섰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법관이 사건심리전에 원고와 “손 잡고” 원고를 두둔해나선것만 같았다. 유력한 “증거”라면 개정하기 앞서 법관이 원고와 악수하면서 “의사소통”을 했다는것이다.    피고가 “아다모끼”가 아니냐는 생각도 들지만 원고와 악수를 나눈 법관의 처사도 타당치 않다고 점찍고싶다. 가령 당시 법관이 원고와 악수를 나눈후 돌아서서 피고의 손도 잡아주었더라면 사후 패소한 피고에게 심병을 안겨주지 않았을것이다.     이러고보면 문명의 교제형식으로서의 악수도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할것 같다. 더우기 법정의 최후판결에 관심을 모으고있는 당사자들을 상대함에 있어서 법관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에 각별한 주의를 두는것이 바람직하다. 《법관직업도덕기본준칙》도 “법정내외에서의 자기의 언행을 통하여 공정을 보여주고 사법공정에 대한 대중들의 의심을 풀어주어야 한다”고 명문으로 명확하게 규정하였으니 법관들마다 평소 자기의 이미지를 밝게 내세웠으면 좋겠다.      법관뿐만 아니다. 우리 매 당간부들도 “과전불납리, 리하부정관”의 자률의식을 앞세울 때가 왔음을 가슴 뜨겁게 느껴야 한다. 강한 리더십에 지위가 높은 당간부일수록 뭇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되고 따라서 그에 대한 요구도 매우 높기 마련이다. 그러하기에 미소한 허물이나 실수가 보통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면 례사로운 일로 취급될수는 있어도 당간부들에게 생긴다면 사회적인 큰 물의를 일으켜 우리 당의 형상에 손상을 주고 당사업의 순조로운 진행에 큰 영향을 주기가 십상이다. 한 당간부의 형상은 그의 도덕품성의 여하와 사업실태의 우렬을 보여줄수도 있다지만 더우기는 당의 형상, 정부의 형상과 련관된다는 점을 명심하여야 한다. 광범한 대중들은 당간부라면 당, 정부, 상급지도부의 대표자와 구현자로, 인민리익의 대표자, 실천자로 지목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당간부라면 평소 자신의 일거일동에 항상 류의하면서 자각적으로 의심받을수 있는 일, 오해를 살수 있는 행동거지를 가급적으로 삼가함으로써 부패의 혐의를 받을수 있는 시공간을 철저히 배제해버려야 한다.       당중앙총서기 습근평도 최근에 당중앙정치국회의에서 당간부들이 근검절약하고 청렴하게 행정사무를 수행할데 관한 해당 규정을 엄격하게 준수할데 대하여 특별히 강조하였다. 부패에 물젖지만 않는다고 해서 훌륭한 당간부로 점찍을 시대는 지났다. 18차 당대표대회의 승리적페회와 새로운 당중앙지도부의 결성과 더불어 매 당간부들의 자질에 대한 요구도 그 수위가 일층 높아졌음을 항상 념두에 두어야 한다.   
27    투우장의 각축전은 삼가해야 댓글:  조회:3931  추천:0  2013-02-12
                         투우장의 각축전은 삼가해야       개혁개방정세의 심화와 더불어 경쟁의 리념은 갈수록 우리의 생활과 떨어질수 없게 되였다. 따라서 최근 년간 우리 주변에서 제일 많이 거론되는 화제의 키워드(关键词)가 바로 “경쟁기제의 도입(引入竞争机制)”이 아닌가 싶다. 뿐만아니라 사회생활의 제 분야에서도 경쟁과 관련한 수많은 사항들이 자못 긴장하고 엄한 분위기에 휩싸여 진척되고있다. 례하면 “경쟁에 의한 임직”, “동업자간의 경쟁”, “경쟁도태기제”, “상업경쟁”, “입찰경쟁”, “생존경쟁”, “질적경쟁”, “부문내 경쟁”, “과학기술경쟁”, “인재경쟁”… 등등의 사항들이 살벌한 기운속에서 진행되고있는것은 아니라지만 경쟁자체가 확연한 배타성을 갖고있는만큼 항상 마음을 조이고 정신을 바짝 차리면서 삶을 이어야 할 사연들이 너무나도 많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        중국의 근현대사를 자상히 살펴보면 경쟁은 기실 개혁개방의 산물이 아님을 어렵잖게 느낄수 있다. 근대의 계몽사상가로 명망이 높았던 엄복이 영국의 생물학자 헉슬리의《진화와 륜리》를 번역하여《천연론(天演论)》으로 옮긴후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사물은 경쟁을 통해 자연스럽게 선택되여 적응하는자만이 살아남는다(物竞天择,适者生存)”는 대도리를 크게 깨닫게  되였다. 그러나 당시 중화민족위기의 만회를 위한 무술변법운동이 전국을 휩쓸자 조정의 대신들과 개량주의를 주장한 개화신사들사이에는 변법실시여부를 두고 시야비야 쟁론하지 않으면 변법의 주도권을 누가 쥐여야 하느냐는 문제를 가지고 티각태각 설전을 벌리다가 나중엔 서태후를 정점으로 하는 수구세력에 의해 정치적탄압의 비극이 벌어져 온나라가 아비규환의 수라장을 이루고말았다. 하지만 코앞까지 들어와 바야흐로 중국을 분할하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서방렬강 특히는 일본사람들과의 경쟁앞에서는 너무나도 무기력한 존재로 빛을 잃고말았다. 신해혁명이후에는 민국정부의 여러 파벌의 군벌들이 또 자기의 정치적지반을 세우기 위한 국내경쟁에서 무작정 진을 빼다보니 일본사람들이 힘을 들이지 않고 쳐들어올수 있었다. 민족위망의 고비에 그래도 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으로 전국인민들을 하나로 묶어세우고 대외침입에 항격하면서부터 중화민족은 자기의 존엄을 내세울수 있었다. 이러고 보면 대외를 상대한 경쟁은 매우 좋은 일이라고 할수 있지만 시도 때도 없는 내부적경쟁은 다 리로운것이라고는 할수 없다.       경쟁과 관련한 리론은 다윈의《진화론》에서 왔다지만 사실《진화론》은 경쟁만 언급한것이 아니고 합작을 더 강조하기도 하였다. 크로포트킨이라는 로씨야인은《진화론》에 립각하여 펴낸《호조론(互助论)》이라는 책에서 진화의 과정은 합작의 과정이라고 명확히 천명한바 있다. 그는 “생물의 번식이 무성번식으로부터 유성번식으로 이행한것은 생물진화사에 있어서 일대 큰 변화라고 하지만 유성번식자체는 합작을 떠나서는 이루어질수 없다.”는 매우 간단한 생물현상으로써 자기의《호조론》리론체계를 세웠다. 미국의 심리학자 마슬로우는 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자기의 저서《동기와 인격》에서 다윈과 크로포트킨의 상기 리론을 유기적으로 결합시켜《계통론》을 자상히 천명하기도 하였다.       《계통론》은 “어떤 계통이든지 모두가 명확한 ‘계선’이 있는바 계통내부는 합작을 위주로, 계통외부는 경쟁을 위주로 하여 모든 일이 진행되여야 한다. 가령 계통내부에 유기적인 합작전일체가 이루어지 않고서는 대외경쟁을 운운할 가치도 없다.”고 인정하고있다.        사실 우리 사회는 줄곧 내부적경쟁이 너무 많았기에 경쟁이 결여된 사회라고 할수 없다. 사회생활에서 서로 상대방을 무작정 적수로 생각하고 갖은 방법을 다하여 대방을 궁지에 밀어넣고있는 가슴아픈 일들을 가끔 우리 주변에서 목격할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사회를 대상하지도 않는 “경쟁에 의한 임직(竞争上岗)”의 겨룸은 흔히 눈에 달이 올라 상대방의 약점을 물고 늘어지는 투우장(斗牛场)의 무시무시한 각축전을 방불케 하고있으니 문제가 되지 않을수 없다. 그리고 모든 분야에서 수시로 진행하는 고과평가(考核评比)에서의 매개인들의 “적극적인 발언”도 상호간의 암투와 배척을 내세우는것은 인젠 공개된 비밀로 되고있으니 이와 같은 경쟁이 기업의 발전이나 문명사회구축에 얼마나 큰 도움을 주고있는지 사고하지 않을수 없다. 웬간하면 나라적인 차원에서도 지난세기 90년대 초반에 벌써 “부정경쟁방지법”을 출범시키였겠는가.        경쟁은 한 유기체가 대외를 상대한 경쟁으로 되여야지 내부소모전으로 되여서는 안된다. 경제학의 견지에서 놓고보면 합작이 없을 경우 교역을 할수가 없고 사회학의 각도에서 타산해보면 합작이 없을 경우 단체가 이루어질수 없으며 정치학의 립장에서 따져보면 합작이 없을 경우 민주가 있을수 없고 관리학의 측면에서 헤아려보면 합작이 없을 경우 효률이 나올수가 없다.        경쟁을 옳바른 위치에 놓으라는 뜻이지 결코 경쟁이 나쁘다거나 경쟁을 하지 말라는 권유가 아니다. 말하자면 합작을 선호한다고 해서 경쟁을 밀어버리라는 말이 아니다. 국내나 국외의 선전적인 기업의 운영경험을 더듬어보아도 동업종의 경쟁에서는 “촌토불양, 촌토필쟁(寸土不让,寸土必争)의 강한 이미지를 보여줄 때도 있다지만 기업내부에서는 합작분위기의 형성에 각별한 신경을 써야 한다. 내부의 시기와 질투, 암투로 하여 사분오렬의 상태에 처한 기업이라면 발전, 장대해질리가 만무하다.        국외의 여당과 야당사이의 정치상의 경쟁이 매우 치렬하다는것은 세인들이 다 아는 일이다. 하지만 여당이든 야당이든 당내에서는 일반적으로 줄곧 안정을 담보하고 일치한 정치적주장을 유지하기에 진력하고있다. 그도 그럴것이 내부의 모순과 갈등이 뒤엉킨 정당은 정치분야에서 수많은 유권자들의 옹호와 지지를 받을수 없다. 그러나 외적이 코앞에 들이 닥치여 나라의 안전이 바야흐로 큰 위험을 겪는 경우라면 어제까지만 하여도 의회에서 여당을 두고 삿대질하면서 줄욕을 퍼붓던 야당이건만 오늘부터는 분노의 감정을 해시시 풀고 여당의 정책을 옹호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주위환경의 변화와 더불어 어제까지 경쟁의 적수로 지목되였던 대상이라 하더라도 오늘은 손잡고 나가야 할 파트너로도 될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두어야 한다. 반드시 경쟁하여야 할 시공간에서는 조금도 주저없이 경쟁을 해야겠지만 합작하지 않으면 안될 시공간에서는 합작을 도모하여야 한다는 도리를 깊이 간직하여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제반 사업과 경영 및 관리 모식의 좌표로 굳어지도록 내세울 때가 왔다고 느껴진다.  
26    “득”과 “실”의 인생론 댓글:  조회:4171  추천:1  2012-07-18
      최근 년간 신수 펀펀하던 주위의 정든 동년배친구나 동년배동료들이 하루아침새 갑작스레 쓰러져가는것을 가끔 보노라면 참으로 가슴에 봉창을 하나 내고싶도록 답답한 마음을 달래길 없다. 사후에 곰곰히 되새겨보면 이들은 거개가 가정의 불화나 경제난도 아닌, 평소 품어왔던 사업의 기대치에 훨씬 못 미치는것으로 하여 말하자면 의례 얻어야 할 사업성취를 얻지 못한것으로 하여 또는 무소불능의 사업전성기에 꼭 다잡아야 할 기회를 놓치는것으로 하여 생전에 늘 긴장, 불안, 짜증속에서 지친 삶을 잇다가 일조일석에 우리곁을 영영 떠난 공통점을 갖고있었다. 물론 이전과는 달리 오늘의 시대는 경쟁의 시대인만큼 사람마다 여러 면으로부터 오는 스트레스를 받기 마련이라 하지만 이를 척척 해소하면서 상쾌한 삶의 자세를 유지하는것이 자못 중요하지 않을수 없다.       일전에도 고혈압증후군으로 무척 고생을 하다가 한창 장끼를 부릴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갑자기 타계한 고향친구를 보내고 그에 대한 덕담을 나누는 술좌석에서 생전에 그가 부현급간부직의 승진기회를 잃은후 1년 동안 내내 자반뒤집기로 잠을 설치고 술로써 울적한 마음을 달래였다는 가슴 아픈 사연을 듣고서 가슴속에 갈마드는 찹찹한 생각을 시종 접을수가 없었다.        우리 말 사전에는 “인생의 길하고 흉함과 화와 복이 늘 바뀌여 변화가 많으므로 미리 알기 어렵다”는 뜻을 일컫는 “새옹지마(塞翁之马)”라는 성어가 있다. 옛날 변강 장성기슭의 새옹이라는 늙은이가 기르던 말을 잃어버려 속을 퍽 태웠는데 얼마 지나서 그 말이 호족들의 준마 한마리를 달고 돌아왔다. 그런데 그의 아들이 준마를 타다가 떨어져서 절름발이 될줄을 누가 알았으랴. 헌데 후날 그때문에 동네의 청장년들은 모두 싸움터로 나가 죽었지만 새옹의 아들만은 불구자여서 병역에 뽑히지 못하여 살아남을수 있었다. 이 옛이야기는 우리에게 “얻는것이 있으면 반드시 잃는것이 있고 잃는것이 있으면 반드시 얻는것이 있다”는 도리를 밝혀주고있다.       우리가 항상 얻는것에만 집착하고 잃는것에 전전긍긍하며 살아간다면 우리는 마음이 편안할 사이가 있을수 없다. 인생은 얻고 잃는것의 신진대사활동을 하는것과 다름없다. 이것을 얻으면 다른것을 잃고 다른것을 잃으면 또 다른 얻는것이 있다. “세상만사 새옹지마”라는 옛사람들의 고훈을 진정 삶의 귀감으로 간직할 때도 왔다. 올리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법이니 일시적좌절이나 “실(失)”을 두고 무서워하거나 억지로 이를 회피하는것이 결코 해결책이 아니다. 복잡다단한 사업을 하노라면 얼기설기 얽힌 일들을 두고 어떻게 판단하고 풀고 처리해나가야 할지 가끔 오리무중에 빠져 발을 헛디딜 때도 있으니 이를 너무 가슴에 묻어두지 말아야 한다.       아무것도 가진것 없이 태여나 끊임없이 원하는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지만 얻고난후에는 다시 모든것을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가는것이 우리의 인생사이다. 력사의 흐름에서 한 개인은 그저 대자연속을 바쁘게 지나가는 길손뿐이여서 누구도 영원히 무언가를 소유할수 없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닌줄로 안다. 소원한바를 얻고 잃으면서도 어떻게 이 짧은 인생을 더 즐겁고 더 의미있게 엮는가 하는것이 우리 매 사람들마다 풀어야 할 인생수업의 과제가 아닌가싶다.        물론 인간은 바라고 꿈꾸고 추구하는 고급동물인만큼 살아가는 동안 늘 얻기만을 바라며 더 많고 더 좋은것을 잃어버릴가 두려워하는 심리를 가지는것은 당연한 일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를 인식하고 지배할수 있는 능력을 가졌기에 인생을 단지 밑 빠진 그릇에 집어넣기만 하는것이 아니라 얻고 잃는 신진대사의 과정에서 다른 보통 동물과는 달리 용케도 삶의 평온을 찾으면서 인생의 마라손코스를 완주할수가 있다.        득(得)과 실(失)의 변증관계는 결코 너무 심오하고 메마른 인생철학이 아니다. 한 사람에게 있어서 나이가 점점 많아진다는것은 이미 정해진 생명의 연수(延寿)가 점점 줄어든다는 의미이다. 성숙된 인생단계에 들어섰다는 자체가 세상물정을 모르고 아무 걱정 없이 지냈던 어린 시절을 잃어가는것이라 할수 있다. 사랑하는 안해와 가족을 얻는다는것은 홀로 있으면서 아무에게도 구속받지 않던 열혈의 총각시절을 잃는다는 의미이다. 작가는 시간을 쪼개면서도 작품을 남기는 일로 항상 긍지감을 가지지만 보통 사람들이 즐기는 여유로운 삶을 잃기가 일쑤다. 일단 뭇사람들의 물망에 오른 명인이 되였다 하더라도 유명세를 치르어야 하기에 언행을 조심해야 하므로 상대적으로 자유를 잃지 않으면 안된다.        득과 실의 변증관계에 따르면 잃는것이 있다면 자연히 얻는것이 생기는 법이기도 하다. 자선가는 사재를 쾌척하지만 좋은 사회를 만들어 나갈뿐아니라 사회적존대에 받들려 자부감이 넘치는 삶을 찾을수가 있다. 농민은 일년사철 비지땀을 흘리면서 자신의 체력과 힘을 소모할 대신 무공해쌀을 시장에 내놓는 알찬 로동의 결실을 안아올수 있다. 대학교 교수는 늘 시간을 쪼개고 밤을 패면서 한가로운 삶의 방식을 포기할 대신 과학적론증과 철리가 담긴 훌륭한 학술론문을 내놓을수 있다. 이처럼 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를 잃게 되고 하나를 잃으면 또 다른 하나를 얻을수 있는게 우리의 인생이 아닐가.        이와 같은 득과 실의 변증관계를 항상 념두에 둔다면 우리는 항상 고즈넉한 분위기에서 윤택한 삶을 꾸밀수가 있을것이라 믿어의심치 않는다.  
25    “3 년 자연재해” 재론 댓글:  조회:4069  추천:3  2012-06-20
      1860년 조선반도에 유사이래 보기 드문 대수재가 발생했다. 이러한 현상은 후에도 계속되다가 1869년과 1870년에 또다시 흉년이 발생하여 전무한 대기근이 닥치였다. 하여 19세기 60년대후 압록강북안과 두만강북안은 살길을 찾아 월강하여 괴나리보짐을 푸는 조선인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당지의 황무지를 개간, 경작하면서 나중에 점차 정착이민으로 자리를 굳혀갔다. 길림성의 면적(18.74만km2)을 조금 넘긴 섬나라나 다름없는 조선반도(약 22.22만km2)이기에 수년동안 련이어 자연재해가 닥치였다고 해도 이를 두고 의심하는 사람은 오늘도 없다.       하지만 총면적이 960만평방킬로메터여서 세계륙지면적의 15분의 1, 아세아륙지면적의 4분의 1이나 되여 유럽의 면적과 비슷한 우리 나라가 지난 세기 5,60년대에 련속 3년동안 자연재해를 입었다는 력사에 대해서는 오늘날 반신반의하지 않을수 없다. 황차 우리 나라는 동서의 거리가 5,200km, 동서로 경도 60°를 차지하고 동서로 5개 시구(时区) 즉 동5시구—동9시구 사이에 위치하여있기에 동서 두 끝의 지방시간의 상차는 4시간도 넘는다. 또한 남북의 거리는 5,500km로서 위도 근 50°나 점하고있을뿐만아니라 남북의 태양고도각의 차이가 매우 크므로 낮과 밤의 길이도 같지 않거니와 겨울철 남북의 기온차도 50℃를 넘기고있다. 이처럼 국토가 넓고 지역마다 각이하고 복잡한 자연지리조건을 갖고있는 우리 나라인만큼 국부적지역의 “3년자연재해”는 받아들일수 있는 결론이지만 온 나라의 농촌 곳곳에서 련속 3년동안 쭉정이만 거두어들일 정도로 자연재해를 심하게 입은 흉년이였다는 결론은 사람들을 납득시키기 어렵다.       1959년~1961년을 두고 우리는 “3년자연재해시기” 또는 “3년곤난시기”라고 칭하고있는데 항간에서는 “대식품시기”라고 일컫기도 한다.       이 “3년자연재해시기”의 비정상적사망자의 수효를 두고 상세하게 공포되지는 않았지만 국내적으로는 2,000만이 숨졌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국외적으로는 지어 4,000~5,000만명이 기사하였는 견해도 있다.《중국통계년감》(1983년)에 따르면 1959년~1961년사이에 식량부족으로 비정상적사망률이 전국인구의 18.08‰를 점하였는데 그중 1960년에는 25.43‰나 치달아올랐다고 한다. 우리 나라 해방전쟁시기인 1949년에도 20‰밖에 되지 않았으니 “3년자연재해시기” 대기근의 참상을 여실하게 볼수가 있다. 여죽하였으면 당시 하남성을 돌아보고난 리선념은 굶어죽은 사람이 전쟁판에서 죽은 사람보다 더 많다고 통심까지 하였을가.        그런데 좀 놀라운 일이라면 기아에 허덕이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숨진것은 결코 낟알 구경조차 못해서 아니라 우리의 순박한 농민들이 식량 대부분을 나라에 징구량으로 바쳤기때문이라는것이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당시 하남성 신양지위(信阳地委) 부서기이며 행서전원이였던 장수번(张树藩)은 그때를 회억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당시 신양지구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은것은 해마다 흉작이 들어서가 아닙니다. 그때 크고 작은 량식창고마다 알곡이 차넘치였지만 농민들은 굶을지언정 량식창고 하나도 털지 않았었습니다.”        3년동안 기아에 허덕인 원인을 두고 관방측에서는 선후로 여러가지 해석을 했는데 초기에는 곧바로 전대미문의 지속적인 “자연재해”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러다가 1962년에 있은 “7천명대회(중앙사업회의확대회의)”에서 류소기동지는 그 원인을 두고 “7할의 인적재화, 3할의 자연재해”라는 실사구시적인 평판을 한적이 있었다.        마침 1981년에 열렸던 당중앙위원회 제11기 제6차전원회에서 채택된 “건국이래의 당의 약간한 력사문제에 관한 결의”가 3년대기근의 원인을 두고 “주로는 ‘대약진’운동과 ‘반우경’투쟁의 오유로 말미암아, 그리고 당시에 자연재해가 들고 쏘련정부가 배신적으로 계약을 파기하였기때문에 1959년부터 1961년까지의 기간에 우리의 국민경제는 엄중한 곤난에 봉착하였으며 나라와 인민이 중대한 손실을 입었다.”고 공정하게 지적하였기에 오늘날 우리들은 3년대기근이 주요하게 자연재해에 의해 초래된것이 아니라는 점을 느끼고 “3년자연재해”를 재론할수 있게 되였다.       국내의 이름난 기상수문과학자들이 전국의 120개소의 수문관측소 력대수문자료(1895~1979)에 기초하여 작성한 “전국각지력대한로등급자료표(全国各地历年旱涝等级资料表)”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기타 어느 재해년 또는 평년과 비교할지라도 1959년~1961년 ‘3년재해시기’의 전국의 기후는 ‘천공작미(天公作美)’의 정도로 좋아서 농사에 매우 알맞춤한 기후였다…”         ……              자연은 우리의 삶을 윤택하도록 수많은 혜택을 제공하는 인자한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산업혁명을 겪으면서부터 자연을 착취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인류의 생활에 유조하기만 하면 자연을 길들이고 개조하는데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이것도 성차지 않아서 전례없는 기근이 주요하게 인위적으로 초래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이란 “자애로운 어머니”한테 “3년자연재해”라는 “정치적감투”까지 억지로 들씌웠으니 우리 모두가 자괴감을 가지고 깊이 반성할바라고 심심히 느껴진다.
24    TV시청과 독서 댓글:  조회:3460  추천:3  2012-06-06
      오늘날의 TV문화는 전능적문화의 표징으로 영화문화를 비롯한 기타 문화아이템을 철저히 제압하고 뭇사람들의 마음속에 굳건히 자리매김을 하고있다. 하지만 모든 사물이 량면성, 이중성을 띠고있듯이 TV문화도 가끔 우리들의 옳바른 삶의 자세를 흐트러놓을 때가 있다.        참으로 별인가 싶기도 하다. 평소 책을 읽거나 손에 잡히는 일을 할 때면 일부러 유유한 음악을 풀어놓아도 얼마든지 신나게 병행할수 있는데 유독 텔레비죤을 보는 동안은 전혀 다른 일을 하거나 혼자만의 사유체계를 갖출수 없다. 물론 TV프로제작자의 의도에 쉽게 장단을 맞출수 있는 사람은 생각이 다를수도 있다. 그렇지만 손에 일이 딸리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TV시청은 효용론적인 립장보다는 무용론이 가깝다.        TV시청이 무작정 나쁘다는 말은 아니지만 아무튼 TV시청은 수동적인 행위다고 느껴진다. 이 점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의 반론을 자아낼수도 있다. 하지만 TV시청은 아무런 의사가 없는 애완동물부터 세상물정 모르는 젖먹이까지 누구라도 다 할수 있다는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독서는 이와 달리 능동적인 의식이 따라야만 가능하다. 책 한권을 읽는데는 그만큼 행위 자체에 강한 의지가 없다면 절대 스스로 완성할수가 없다.        간혹 어떤 집에 가보면 구식의 텔레비죤보다도 우선 커다란 책장이 유표하게 안겨오지만 다른 어떤 집에 가보면 책장은 없지만 큼직한 형광판의 신식텔레비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기도 한다. 어느 집에서 서재를 잘 꾸리고 장서를 많이 하였다는것은 이 집 주인이 정신적인 의지가 강한 사람이라 나름대로 느껴진다. “TV중독자”라는 별호를 가진 친구한테 독서절에 새책까지 챙겨주면서 독서취미를 좀 가지라고 권했다가 텔레비죤으로 온 세상 구경을 다해도 못하겠는데 따분한 독서로 시간랑비를 할게 뭐냐 하면서 크게 핀잔까지 받았다. 할 말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 친구는 매일 퇴근하면 쏘파에 엉뎅이를 턱 붙이고는 밥도 쏘파에서 먹으면서 텔레비죤을 시청하는게 유일한 취미고 지어 쏘파에 누워 밤이 새도록 텔레비죤의 모든 채널을 짚어가면서 시청하것이 가장 즐겁다고 한다. 얼마든지 리해가 간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기호가 다른데 나의 생각이 옳다고 권하는것 자체가 너무도 무리하기도 하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생활절주가 빨라짐에 따라, 전날의 아날로그시대로부터 디지털시대가 도래됨에 따라 사람들은 점차 문자에 대한 흥미를 잃고 권태감을 가지면서 그림이나 영상을 통하여 문화생활을 향유하려는것이 오늘의 현실이기도 하다. 웬간하면 오늘날을 두고 독도시대(读图时代) 또는 영상시대라까지 사회학자들이 지적하고있겠는가. 더우기 최근에는 손에 쥐면 놓기 아쉬운 스마트폰과 태플릿PC의 영향으로 도서는 점점 왕따를 당하는 처참한 신세가 되고있는상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TV시청과 독서를 두고 나름대로의 주장을 내세우고싶다.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노상 텔레비죤만 마주앉아있는 행위는 분명 의지력이 약한 소행이요, 수동적이고 분별없는 시간땜질밖에는 더 이상의 정보를 받아들일수 없다. 도서는 문자기재에 의한 문화적전승을 유지해주는 역할을 하고있다. 문자는 추상적인 부호이다. 이런 추상적인 부호로 이루어진 도서인만큼 열독시에 문자의 의미를 리해하자면 사고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하기에 중세기철학자 로크도 “독서의 핵심은 사색이다.”라고 지적한바 있다. 이와는 달리 TV프로는 직접 영상을 시청자들에게 보여주기에 어느 한 장면을 두고 분석해보거나 사고할 필요가 없거니와 또 그럴 겨를도 없다. 집사람이 매일 아침마다 출근시간을 어기면서도 한국드라마에 넋을 잃고있는데 딸애가 간혹 드라마중의 한국인기배우를 두고 재잘재잘 평판이 끝이 없으면 “그만해!” 하고 면박을 주기가 일쑤다. 무안을 당하고 시쁘둥해하는 딸애를 보고는 허구픈 웃음이 나오는걸 겨우 참는다. 집사람을 탓할바가 아니다. 딸애의 평판을 다 들어주면서 드라마내용을 떠나 다른것을 분석, 사고하노라면 드라마의 정채로운 줄거리를 다 놓쳐버리기는 십상이니 말이다. 그래서 딸애의 역성을 들어 텔레비죤시청에 너무 집착하는 사람은 머리가 둔해진다고 일부러 집사람의 약을 올리기도 한다.        사실 문화스낵으로서의 TV프로는 “숙식(熟食)”을 시청자들의 입에 직접 챙겨주는거나 다름없다. 그러하기에 시간이 오래도록 TV시청에만 심취된다면 저도 모르게 폭 넓게 사고하지 않고 깊이 사색하지 않는 라태성사유를 가지지 않을가 생각된다. 민중의 텔레비죤 의존도가 높은 나라라고 해서 문화적 수양과 자질이 높은 나라라고 긍정할 리유는 없다. 오히려 텔레비죤 의존도가 높은 나라일수록 단일하고 메마른 문화생활의 일면을 두드러지게 세인들에게 보여줄수가 있기에 민중의 옳바른 문화적취향을 인도해주는것이 급선무가 아닐수 없다.        TV시청이 무익하고 독서만 유익하다고 일장 역설을 풀어놓고보니 출판일군으로서 “참외장사 제 참외 달다.”는 격이 되여 “제발 우리 책을 많이 사주시고 TV시청은 내동댕이쳐주시소서!”라고 설교하지 않았는지 송구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책을 통하여 삶의 지혜를 얻을수 있다.”거나 “독서는 삶을 풍요롭게 한다.”는 등등의 공허한 구호식으로 독서의 필요성을 설파하기보다 낮지 않을가 하는 생각으로 스스로 위안감을 가진다.
23    이리디움계획의 무산이 준 계시 댓글:  조회:3564  추천:2  2012-05-19
      경영관리에 있어서 꼭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원가계산(成本核算)이다. 규모가 여하하든간에 똑같은 리윤창출을 위한 경영이라면 원가가 낮을수록 수지가 맞기마련이다. 이런 간단한 도리는 누가 모르랴만 경영실천을 살펴보면 오히려 원가를 높인것을 두고 마치 장한 일이라도 해놓은듯 자랑거리로 삼는 경우를 흔이 볼수 있다.        례하면 평소 매스컴을 통하여 “모모 기업이 가장 선진적인 기술과 설비를 인입하였다”거나 “모모 농민이 세계적으로도 가장 선진적인 재배 방법과 기술을 채용하여 과학적영농을 하고있다”는 등등의 기사들을 많이 보고 들을수 있으니말이다. 그러나 이런 선진적인 기술의 원가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은 매우 적은상 싶다. 소액자본의 경영임에도 불구하고 “당나귀 귀치레”의 격으로 가장 선진적인 현대기술을 억지로 인입하면 수지맞을리가 없다. 컴퓨터까지 갖추어놓고 온라인거래를 통하여 앉은 자리에서 남새를 팔고있다는 기사에 언급된 채농의 남새수입이 아무리 짭짤한들 인터넷접속비용을 충족히 지불할 정도로 가관할수가 있을가?       관리학의 리론체계에는 오늘날 세계적으로도 가장 선진적인 조직형식으로 알려진 “매트릭스조직(矩阵组织)”에 관한 리론이 있다. 전하는데 의하면 미국의 항공우주국(航天局)에서 바로 이와 같은 “매트릭스조직”형식을 취하여 우주세계에 대한 연구와 개발 사업을 본격적으로 밀고나가고있다고 한다. 그러나 항공우주국을 제외한 기타 정부기구나 500강이내의 대형기업들은 이런 조직형식을 매우 적게 취한다고 한다. 그 원인은 매우 간단한바 “매트릭스조직”체계는 장점도 많지만 매우 복잡하고 운영원가가 지나치게 높은 단점도 갖고있기때문이라고 한다.        가령 우리가 원가는 뒤전에 두고 선진적인것에만 끌리여 규모가 작은 향진의 기업이거나 수공업적작업의 규모를 갖춘 소기업에도 이와 같은 “매트릭스조직”의 관리모식을 억지로 도입한다면 “소가 웃다가 꾸레미 터질노릇”에 말려들수밖에 없다. 그러하기에 수억원의 운영자금을 갖고있는 대회사가 상장(上市)의 융자형식을 취하는것은 매우 정상적인 기업운영모식이라고 할수 있어도 몇천원밖에 안되는 자금으로 꾸린 가게방에서 하루밤새에 상장한다고 떠들석한다면야 역시 “말에게 실었던 짐을 벼룩등에 싣는” 격이 되는건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의 경영실천을 자상히 훑어보면 아직도 “더벅머리 댕기치레”와 같은 한심한 일들을 가끔 목격할수가 있다. 례하면 일부 대상에 대한 투자를 결정함에 있어서 장래에 나오게 될 경제효익과 관련한 과학적인 론증이 없이 투자액의 증량에만 신경을 쓰는가 하면 실제적수요를 념두에 두지 않고 무작정 “국제선진수준”만 집요하게 추구하기도 한다. 결과 거액의 투자를 물거품으로 날려보내지 않으면 소위 “세계의 앞장에 섰다”는 제품이 소비군체를 잃고마는 궁지에 빠지기도 한다. 이런 비애를 초래하는 원인이 바로 시장을 대상한 원가계산을 자상히 하지 않는데 있다.        벼룩등이 아니라 가령 훤히 트인 넓은 터전에다 륙간대청을 짓더라도 원가는 원가대로 자상히 따지고 시장조사를 착실히 하면서 새 업종을 개발하여야 한다. 미국 이리디움계획의 무산이 이 면에서의 생동하고도 교훈적인 귀감이 되지 않을가 싶다.       1999년에 700Km상공으로 66개의 위성을 쏘아올려서 전세계를 단일한 통신망으로 련결하는 위성휴대전화서비스를 제공하는데 취지를 둔 “이리디움위성통신망계획(铱星电话系统)”이 실시되자 온 지구촌은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 보도에 따르면 유고의 전패로 끝났던 코소보전쟁시 나토의 작전지휘부는 “이리디움위성통신망”의 힘을 입어 큰 전취를 거두었고 중국의 극지고찰팀도 “이리디움위성통신망”의 혜택을 크게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세계의 수많은 유명한 과학자들로부터 “세계10대과학기술진보”의 대상으로 긍정을 받았던 “이리디움위성통신망계획”이였건만 2년도 채 운영되지 못하고 30억딸라가 넘는 채무를 지고 미국의 이리디움회사는 파산을 선고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왜서 이처럼 선진적인 과학기술항목의 개발이 실패로 끝났을가? 도리는 매우 간단하다. 전화가입자(用户) 즉 사용자가 적었기때문이다. 당시 분당 7딸라의 높은 통화료금을 지불하고 이와 같은 첨단과학기술성과를 향수하려는 사람들이 없었다. 물론 “이리디움위성통신망계획”의 실패는 기술의 실패가 아니고 시장의 실패라는 점만은 믿어의심치 않는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여 선진적인 개발항목이지만 원가가 지나치게 높아 상응한 경제효과(替代效应)를 낼수가 없었기에 요절되였다. 한마디로 첨단과학기술성과의 산업화, 시장화 전환을 위한 원가계산을 념두에 두지 않은것으로 초래된 비극이라 할수 있다.        경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매우 간단한 방도를 취하고 품도 매우 적게 들이면서 리상적인 경제효익을 창출하는것이다. 엄무에 정통한 경리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수완은 수지가 맞느냐 맞지 않느냐를 적절하고도 적시적으로 판단하는것이다. 복잡다단한 시장경제의 흐름속에서라도 항상 복잡한 일을 간소한 일로 척척 돌려놓을줄 아는 사람은 총명한 사람이요, 간소하게 처리하여야 할 일이건만 머리가 뜨거워져 억지로 복잡한 일로 밀어붙이는 사람은 “눈은 있어도 망울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가 싶다.
22    “장부일언 중천금”이라 하거늘 댓글:  조회:3328  추천:0  2012-05-16
      중국의 전고에는 “미생지신(尾生之信)”이라는것이 있는데 그 이야기가 자못 감동적이여서 항간에서 미담으로 널리 전해지고있다.       어느 하루 미생이라는 사나이가 한 녀인과 백년가약을 맺고저 다리밑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헌테 미생이가 그 녀인을 기다리고있을 때 홍수가 마구 밀려왔다. 길가던 사람들이 어서 홍수를 피하라고 여러번 권고했건만 미생은 이곳에서의 만남을 기약한 자기부터 남과의 언약을 지키지 않아서야 되겠느냐 하면서 그 자리를 뜨지 않았다. 홍수가 밀린후 사람들은 다리밑에서 미생의 시체를 발견하였는데 그는 두손으로 다리기둥을 꼭 껴안은채 숨졌다.        “미생지신”의 전고는 사내대장부의 한번 약속은 천금보다도 무겁다는 뜻으로 약속을 하였으면 반드시 리행해야 한다는것을 비겨 이르는 “장부일언 중천금”이라는 우리 말 속담의 뜻풀이와도 가까운것이다. 아무튼 이 이야기는 신용이 목숨보다 중요한것으로서 그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꼭 지켜야 한다는 일리를 후세사람들에게 깨우쳐주려는 시도가 분명하다.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링컨이 중학교를 다닐 때 공부성적이 수수하였다. 졸업식에서 미모의 반주임녀선생님이 많은 학생들앞에서 성적이 제일 좋은 남학생한테 키스를 해주자 숱한 남학생들은 부러운 나머지 질투까지 하였다. 공평하지 못하다고 제일 먼저 불만을 느낀 학생이 링컨이였다. 그러자 녀선생님은 그에게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노력하세요. 링컨학생이 사회에 진출하여 뛰여난 일을 해놓으면 제가 꼭 키스를 선물하지요.”        그후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된 링컨에게 녀선생님이 축하신을 보내오자 링컨은 답장을 유모아적으로 썼다.        “선생님은 아직 저한테 키스를 빚지고있습니다!”        ......              귀주성 동인시에서 있은 진실한 이야기이다. 어느 한 학교의 고중 1학년 학생이 자기보다 다섯살 이상인 젊고 예쁘장한 처녀선생님에게 청혼편지를 썼다. 어이없는 편지를 받은 선생님은 그래도 학생의 기분을 잡쳐 학업에 영양줄가봐 관심하는 견지에서 소문을 내지 않고 청혼편지를 되돌리면서 슬그머니 말했다.        “학생은 미숙하니깐 대학에 붙으면 혼사를 담론하자요. 되죠?” 게으름없는 노력으로 마침내 대학에 붙은 학생이 녀선생님을 찾아 다시 청혼을 하자 그녀는 샐쭉 웃으면서 귀띔해주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연구생에 붙은후 혼사를 담론하면 좋지 않을가요?”        몇년후 학생이 연구생시험에 합격된후 미모의 녀선생을 찾았을 때 그녀는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한 몸이였다. 녀선생은 제자가 미련을 버리지 않고 다시 찾아와서 청혼할줄은 생각밖이여서 인차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기를 철저히 포기하도록 깨우쳐줄 심산으로 말했다.        “저한테 남편이 있어요. 그가 사망되면 당신한테 재가하지요.”        예전에 말했던것처럼 녀선생님의 말은 우스개에 지나지 않았지만 학생은 진정으로 믿었것이다. 어느날 밤중에 그 학생은 마침내 녀선생님의 신랑을 살해하였다.        ......               선생님의 키스는 학생을 황홀한 꿈을 꾸게 하는것이다. 그 키스는 어린 링컨에게 분발하여 앞으로 나가도록 떠밀었다고 할수 있다. 귀주성 녀선생의 약속과는 달리 링컨의 녀선생님의 약속은 실현될수 있는것이였다. 가령 후날 링컨이 정말 키스를 요구해도 녀선생님을 궁지로 빠뜨릴 일은 없을게 아닐가.        그러나 고중생의 청혼에 응하여 안겨준 녀선생님의 약속은 실현될수 없는것이다. 그녀는 전혀 가능성이 없는 일이라는걸 뻔히 알면서도 소홀하게 약속하였기에 비극이 생기고야만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사랑의 비극이 아니라 위약의 비극이다.        우의 실례에서 볼수 있다 싶이 우리 모두가 실행할수 없는 언약은 가급적으로 삼가하고 신용을 꼭 지켜가면서 생활을 꾸미는게 자못 중요하다.        헌데 옛사람들도 그처럼 중히 여겨오던 신용이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는 어느때부터인지 먼지가 보얗게 낀채로 어느 구석에 처박혀있음을 직감하지 않을수 없다. 간혹 거리에 나가 물건을 사자해도 가짜, 위조, 저질 상품을 살가봐 우려가 침침하다보니 즐거운 쇼핑기분이곤 없어지군 한다. 또한 이웃사이, 친구사이, 관계단위사이에 가장 간단한 경제거래가 있어도 장차 “유력한 법정증거”를 마련하기 위하여 기어이 차용서나 담보서 같은걸 써받아야 직성이 풀리는걸 어찌할수 없는 일이가 아닌가? 사회적공익활동을 조직하고서도 초청을 받은분들이 아무런 연고나 기별도 없이 제나름대로 오지 않을가봐 근심이 태산같아 전화통에 반나절 매달려 “전화싸인”까지 받아야 발편잠 잘수 있는게 오늘의 현실이다. 서로간에 믿음이 없고서야 이 세상을 어떻게 함께 꾸며 갈수 있으랴. 하여튼 신용이 결여된 우리의 생활은 어쩐지 숨막히고 가슴이 답답해나지 않을수 없다.        사소한 문제는 관계치 않더라도 WTO에 가입하여 국제시장경쟁에 휘말려든 나라나 우리 매개 공민들에게 있어서 신용은 국제시장에 드나들수 있는 비자와도 같다고 할수 있다. 신용만 없다면 국제시장은 우리한테 영원히 문을 열어주지 않는건 물론WTO란 이 예리한 칼에 우리의 경제는 엄중한 치명상을 입고 쓰러지고말것이다.        더 깊이 말해서 오늘날의 신용은 생존의 최후방선이기도 하다. 이 방선만 돌파되는 날이면 질서정연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휩싸였던 우리 생활은 그 기반이 흔들이여 빛을 잃게 되고항상 불안정한 상태에 처하게 되며 무서운 생존의 위기감을 초래한다. 한 나라의 존엄을 내세우자면 사람마다 자기의 신용을 잘 지켜야 한다. 우리 매개 공민들을 놓고 말하면 나라의 존엄과 신용을 지켜나가야 할 신성한 의무를 짊어져야 할 주인 즉 그 존엄과 신용을 실제로 지켜가야 할 임자들이다. 우리 모두 국가의 존엄과 민족의 생존을 항시 념두에 두고 자신의 신용의 이미지를 이 세상에 환하고 새롭게 밝혀주자.  
21    볼쉐비크는 눈물을 흘린다 댓글:  조회:4959  추천:10  2012-04-30
  [7.1수감록]                                       볼쉐비크는 눈물을 흘린다         중화인민공화국 창건전야 즉 당중앙기관을 서백파로부터 북평으로 옮기기직전인 1949년 3월에 모택동주석은 당중앙의 간부들에게 항상 “거안사위(居安思危)”의 우환의식을 념두에 두고 농민봉기 수령 리자성이 정권을 잡았다가 얼마 안되여 실패한 력사적교훈을 자상히 천술한 곽말약의 저서 “갑신삼백년제(甲申三百年祭)”를 계속 읽을것을 강조하면서 승리앞에서 교오자만하지 말고 간고분투의 정신을 발양하며 항상 경각성을 높여 새 정권건설에 힘다할것을 요구하였다. 건국후의 반세기 남짓한 동안 모택동주석이 제기한 우환의식은 신생 정권을 공고히 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우리 당의 제반사업에 줄곧 관통되여왔다.       우환의식이란 무엇인가? 옛사서《좌전(左传)》은 “편안한 때에도 있을수 있는 위험을 생각하여야 한다. 생각하면 준비가 있게 되고 준비가 있으면 우환이 없게 된다(居安思危,思则有备,有备无患)”고 명문으로 밝혀놓았다. 예로부터 전해져온 중화민족의 우환의식은 사회발전의 전화시기 또는 관건시기에 력사적주체가 소유해야 할 예방의식과 예견의식을 일컫는데 위기감, 긴박감, 책임감에서 우러러나오는 견강한 의지와 분발심, 진취심으로 표현된다. 우리 당의 사업은 전인미답의 위대한 거사이다. 그러므로 휘황한 업적을 쌓아올릴 때마다 교오자만하고 게으른 상태에 빠질것이 아니라 발전의 호황세 내면에는 적지 않은 애로와 문제점도 동반하고있다는 점을 꼭 예견하고 상응한 대책을 대야 한다. 과학기술의 일진월보시대에 치렬한 국제적경쟁에 직면하여 우리 나라는 비록 일부 령역에서 확실히 선진국과 떳떳하게 병견할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지만 많은 령역에서는 아직도 크게 뒤떨어져 있다는 점을 명기하여야 한다. 평소 우환의식을 가져야만 자기가 처한 력사적, 시대적 방위를 과학적으로 판단할수 있어 자기의 장점도 알수 있을뿐만아니라 단점도 짚어낼수 있어 사회주의시장경제발전의 새 국면을 간단없이 개척할수 있다.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호금도총서기는 부임되여 한달도 안되는 때인 2002년 12월 5일에 새로 구성된 중앙지도집단을 거느리고 혁명의 성지 서백파의 혁명기념관을 찾아 력사를 되새기고 새로운 력사시기에 “서백파정신”을 새롭게 터득하는것으로써 우리 당의 드높은 정치적각성과 매우 중요한 집권리념을 세인들에게 보여주었다.       중국공산당의 우환의식은 세계 여러 나라 공산당의 주목을 끌고있다.  제일 하위급의 야당으로 정치생활을 겨우 겨우 유지하고있는 자본주의국가의 공산당조직에서도 항상 우환의식을 가지고 자기당 건설에 힘을 들이고있다.       몇년전에 필자가 일본 삽뽀로의 교외에서 관광하고있을 때의 일이다.  련속 며칠동안 매일과 같이 양복을 쭉 차려입은 적지 않는 사람들이 힘겹게 산우에 톺아오르고 점심때에는 산우에 마련한 관광스낵에서 식사하는것이 아니라 사람마다 간단한 도시락을 먹었고 저녁이 되면 또 산아래에 내려가 민박에 투숙하는것을 보았다. 그들은 그 무슨 정부의 관원도 아닌것 같았고 또 관광객들 같지도 않았다. 사후 일본공산당이 이곳에서 대회를 소집하고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일본공산당은 야당이기때문에 활동경비는 전부 당원들이 납부하는 당비에서 온다고 한다. 하여 회의경비를 아끼고저 그들은 회의장소를 산간지대의 정자로 정하고 별장에 투숙한것이 아니라 산아래의 민박에 투숙하였던것이다. 그런데 산을 오르내리다보니 고생이 말이 아니였다. 그렇치만 누구도 원망 한마디 없이 오직 이렇게 하여야만 더 많은 유권자들을 쟁취할수 있다고 인정하고있다.        2003년에 인도공산당 제18차대표대회가 소집되였을 때였다. 당시 날씨가 찌는듯이 무더웠지만 회의장안에는 에어콘이란 한대도 보이지 않고 그저 몇십대의 선풍기들이 동시에 돌아가고있어 회의장소는 요란한 기계소리가 울리는 공장의 생산직장같았다. 비록 조건이 이처럼 차하지만 숙연한 회의장소에는 마치와 낫으로 된 기발 그리고 맑스, 엥겔스, 레닌의 초상화가 걸려있었다. 인도공산당 총비서인 바르단은 연설고도 보지 않고 장장 세시간이나 연설하였다. 그의 발언은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았다. 대회는 이처럼 간편하고 장소는 이처럼 초라하였지만 “혁명이 아직 성공하지 못하였기때문에 동지들은 계속 노력하여야 한다.”는 광명정대하고 강직한 기개가 흘러넘치였다.        집권당지위를 차지하기전의 우리 당의 가난한 정도는 아마 이 세상에는 둘도 없었을것이다. 2004년에 필자는 연안에 가서 참관한적이 있다. 비록 섬북혁명근거지의 간고한 조건에 대하여 필자는 대학교시기의 “중공당사”학과의 수업을 통하여 알고도 남음이 있었지만 연안에 가서 직접 조원, 양가령, 봉황산 등 혁명유적지들을 돌아보면서 그토록 빈곤하고 황량한 곳에서 우리 당이 8년항전을 견지하고 나중에 전국적인 해방을 쟁취한 일을 두고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최근년래 당중앙에서는 집권의 간고한 시련을 이겨내야 한다고 전체 당원들에게 거듭 타일렀다. 집권한지 이미 60여년이 되는 정당이라고 하지만 이런 충고는 아주 필요한것이다. 사실상 지금 우리 당의 일부 간부들속에서 혁명의지가 쇠퇴되고 취지관념이 담담하며 퇴페적이고 향락적인것을 추구하는 기풍이 성행하고있다. 군중들과 실천을 엄중하게 탈리하고있는 그들은 이미 아주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       보도에 따르면 최근년간 기층의 일부 당정기관에서는 당중앙과 국무원의 해당 규정을 어기고 기준을 엄청나게 초과하여 사무청사를 마치도 궁전처럼 으리으리하고 화려하게 지었다. 하지만 그 주위의 백성들의 주택과 학교는 거의 무너져가고있다. 어떤 지방은 국가급빈곤현에 속하지만 고급호텔, 화려한 술집, 다방, 노래방, 사우나, 볼링장 등 사치한 유흥장소가 없는것이 없으며 날마다 이런 곳에 일부 간부들의 승용차들이 실북나들듯이 나드는데 명멸하는 네온등마저 취한듯싶다. 우리 당과 정부의 “가문”을 망치는 행위가 분명하지만 거리낌없이 이는 개혁개방정도가 높은 표징이라고 허울좋게 풀기도 한다.        공산당은 원래 인민리익의 충실한 대표자로서 인민을 위하여 창건되였고 인민의 리익을 위하여 존재하고있다. 그렇기때문에 공산당은 물과 고기의 관계처럼 인민대중과 떨어질수 없는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적지 않은 당원들은 인민대중들과의 혈연적인련계를 강화하는 일을 두고 매우 골치 아픈 일로 간주하고있다. 하다면 이런 괴상한 현상이 더는 발전하게 방임하여서는 안될것이 아닌가!        쏘련의 해체와 더불어 볼쉐비크가 집권당지위를 상실한지도 인젠 20년이 가까와 온다. 허나 야당으로 된 적지 않은 볼쉐비크들은 어언 20년동안 고통스럽게 반성하면서 해마다 11월 7일이면 붉은광장에 모여 회포에 잠겨있다.        2003년에 필자는 초청을 받고 따쥐끼스딴 두샨베시검찰대표단을 접대하는 자리에 앉을 기회를 가지게 되였다. 쏘련의 해체를 언급할 때 그들의 심정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그들은 이토록 유족하고 향상하고있는 중국의 생활모습을 보고 부러움을 금치 못하였다. 그들은 또 당기가 정중히 모셔진 회의실을 보고 눈물까지 흘리였다. 오늘까지도 그때의 그 광경을 생각하면 필자의 마음은 하냥 평온을 찾지 못하고있다.       시대는 진취성을 요구하고 현상태는 우환의식을 부르고있다. 위인 모택동주석은 공화국창건후에도 또 “거안사위”에 관한 새로운 리념 즉 “전쟁에 대처할 준비를 하고 재황에 대처할 준비를 하며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자”를 제기한바 있다. 우리 매개 공산당원들마다 안일한 생활의 흐름속에서도 장래의 우환을 넘려하고 시시각각 자기에 대한 단속을 높이고 호금도총서기를 위수로 한 당중앙의 주위에 굳게 뭉쳐 인민대중들에게 복을 마련해주기 위한 초요사회건설의 떳떳한 주인공으로 나설 때가 되였다.                                                                                          (2010년 7월 1일)    
20    무병장수의 긍지감 댓글:  조회:3328  추천:2  2012-04-28
                                   무병장수의 긍지감       건강과 장수는 모든 사람들의 소원이요, 소망인줄로 안다. 젊은 시절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다가도 일단 50고개를 넘어서부터는 이 문제에 대해 점차 관심도가 높아지기 마련이다. 고금동서의 모든 제왕들은 자기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수중의 권력을 리용하여 이른바 장생불로의 비방을 찾고저 별별 방법과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중세기의 유럽에서 환상적인 물질을 매개로 하여 동, 연, 철 등의 금속으로 귀금속인 금이나 은을 만들수 있다고 믿었고 또 많은 실험을 하였으며 또한 환상적인 물질을 매개로 하여 늙지 않고 죽지 않는 약을 만들수 있으며 지어는 사람까지 만들수 있다고 세인들을 놀래웠던, 오늘날에 말하면 첨단분야의 과학자라고까지 일컬을수 있는 련금술사들마저 나중엔 장생불로약제조에서는 물러나앉고 말았지만 오늘날의 과학자들은 인간의 장수비결을 밝히는 연구에서 전대미문의 기꺼운 성과를 올리고있다.       기실 인류의 수명은 생산력수준의 제고와 더불어 간단없이 연장되여왔다. 생산력이 매우 낮았던 4,000년전의 청동기시대에는 인류의 평균수명이 18세밖에 안되였고 고대로마시대에는 23~25세밖에 안되였다고 한다.       세계적으로 평균수명이 가장 높은 일본의 경우를 보더라도 18세기중엽까지만 하여도 35세밖에 안되였지만 1953년에 와서는 남성이 50.6세, 녀성이 53.9세였고 1965년에는 남성이 67.4세, 녀성이 72.92세였으며 1995년에는 남성이 76.57세, 녀성이 82.98세였고 2006년에 이르러서는 남성이 79세, 녀성이 85.81세나 높아졌다.       중국의 경우 원시사회시기의 중국인선조의 평균수명은 22세밖에 안되였다고 한다. 기원전 21세기의 하조때부터 기원 1911년 신해혁명전까지의 4,000여년동안에 지속된 67개 왕조의 446명 황제(전국시기의 제후국을 망라하지 않음)들은 천방백계로 장생불로를 위해 고심참담하였지만 평균수명이 아쉽게도 42세에서 머물고 말았다. 해방전까지만 하여도 중국인의 평균수명은 35세밖에 안되였지만 해방후 인민생활수준의 향상과 의료보건위생조건의 호전과 더불어 평균수명은 곱절로 높아져 지금은 73.1세를 기록하고있다.        오늘날 세계적인 관심사로 지목된 “로령화”문제는 기실 인류생존년령연장의 기꺼운 성과에 의해 초래된것이다. 기실 “로령화”를 골치아픈 사회적문제로 간단하게 간주하는것은 일면적인 견해로서 다른 시각으로 이를 대하여야 한다.       유엔의 규정에 따르면 60세이상의 인구가 총인구의 10%를 초과하거나 또는 65세이상의 인구가 총인구의 7%를 초과할 경우 로년형국가 또는 로년형지역으로 점찍을수 있다. 세계적으로 가장 빨리 로년형국가로 부상한것은 프랑스라고 한다. 일찍 1865년에 프랑스는 이미 60세이상의 로인들이 총인구의 10.1%를 점하였다. 버금으로 북유럽의 스웨리예는 1890년, 노르웨이는 1891년에 로년형국가의 행렬에 성큼 들어서게 되였다. 2000년말에 12억 9,533만의 총인구를 가진 중국은 당시 이미 60세이상 로인수가 1.3억명이여서 로년화비률이 10.036%에 도달하였기에 유엔으로부터 로년형국가로 인정받았었다. 지금까지 알려진데 의하면 50여개 국가와 지역이 로년형국가의 행렬에 들어섰다.       지금 세계적으로 선진국가의 로년화비률은 21.2%라는 높은 수준까지 보여주고있다. 오늘날 로년화비률의 고저는 한 나라의 발전수준을 가늠함에 있어서 홀시할수 없는 사회적척도로 인정되고있다. 정녕 세계는 이양천년(颐养天年)의 새 시대를 맞이한것이다. 때문에 온 나라 인민들의 무병장수는 그 나라의 영광이자 무병장수자의 자랑이기도 하다. 인류의 평균수명이 100세를 초과하고 지어는 150세를 기록할 날이 멀지 않은 래일에 서서히 현실로 다가올것이다.       그렇다고 건강과 장수는 앉아있으면 스스로 이루어지는것도 아니요 누가 챙겨주어서 성사되는 일도 아니다. 옛사람들도 “나이를 먹기 싫거든 위(胃)를 괴롭히지 말고 발을 많이 쓰라.”는 양생훈을 남기였는데 말하자면 음식을 절제하고 몸을 많이 움직이라는 뜻이다.       무엇이든 과한것이 문제를 일으킨다. 그중에서도 먹는것에 탐하고 과욕을 부리는것은 건강을 해치는 주범이 아닐수 없다. 적게 먹어 탈이 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 염족할 정도로 알맞춤하게 먹는것이 아니라 오늘은 진수성찬접대를 받았다고 과식하고 래일은 산해진미가 차례졌다고 포식하는데다가 먹는것에 비해 움직임이 적기때문에 탈이 나는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다.       “우유를 배달시켜 먹는 사람보다 배달하는 사람이 더 건강하다”는 영국속담, “걸으면 병이 낫는다.”는 스위스의 속담, “건강과 다식(多食)은 동행하지 않는다.”는 뽀르뚜갈 속담이 널리 전해지고있다. 마음의 불균형, 신체의 불균형, 영양의 불균형, 균형된 운동과 근력, 인체의 자연치유력을 좌지우지하는 면역체계의 불균형을 바로잡는것이 건강, 장수의 비결이라는것이 과학자들에 의해 환하게 밝혀지고있으니 건강한 몸과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를 단련해야 한다.  
19    쌀독에서 인심 나건만… 댓글:  조회:3770  추천:16  2012-04-25
         인간은 일정한 시대에 몸을 잠그고 사노라면 버릇되여온 질서와 규칙을 오래동안 지켜내려오면서 삶의 좌표로 삼기가 일쑤다. 헌데 하루가 다르게 사회가 일진월보하는 오늘날 우리의 삶의 자세는 흔히 시대의 흐름에서 뒤떨어진 관습으로 세인들의 눈에 날 때가 많다. 그래서 “제 허물은 남들이 집어낸다”고 옛사람들이 일컬은줄로 안다.       지난해 추석때 일이라 기억된다. 연변병원 동문 건너편은 경도릉원(景都陵园)과 빈장관리처(殡葬管理处)로 올라가는 뻐스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붐비고있었다. 뻐스가 도착하여 차문이 열리기바쁘게 일대 육박전이 벌어졌다. 한발 늦게 승차하면 마치 죽기라도 하는것처럼 밀고닥치며 오르다가도 서로간 몸싸움으로 욕설까지 퍼부으면서 복새판을 벌리였다. 당연히 줄을 서서 승차하기보다 시간은 더 지체되건만 죽기내기로 돌진한다… 승차후엔 희한한 “소품대사”가 터지기도 했다. 손님을 콩나물시루처럼 박아실은 뻐스에 그래도 빈자리가 있는걸 본 한 안로인이 이게 “웬 떡이냐” 싶도록 기뻐서 거기에 막 앉으려는데 앞에 앉았던 사십대중반인듯한 녀성이 쇠붙이로 양철을 긁는 소리를 흉내기라도 하듯 아츠럽게 꾸짖었다.        “손가방을 깔겠슴꾸마—, 어째 보지 못함둥! 그 자리는 임자가 있슴꾸마!”       몸씨름으로 남먼지 승차하고는 후에 오를 가족을 위해 자리를 “예약”해놓은게 분명하였다. 안로인을 모시고 성묘길에 오른 청년이 너무 어이없어서 한마디 내쏘았다.        “아주머니는 그래 자리를 낳고 다님까?”        “낳고 다닌다, 어째? 별 싱거운거 다본다!”        한낮이 되여 귀가뻐스가 도착하자 더 심한 승차경쟁이 터졌다. 먼저 오르려고 정차전인 뻐스에 마구 덮치면서 서로 짓밟기도 하고 뻐스문이 터질 지경으로 비집고 승차하다가 손짐으로 남의 얼굴을 밀치기도 하면서 아우성치는 아비규환의 아수라장…  참아 눈뜨고 보기 어려운 안하무인의 모습들이다. 우리가 어느때부터 이렇게 무질서하게 사는데 익숙해졌을가? 셈평은 갈수록 펴이고 생활수준은 나날이 향상되고있는데 우리 사회문화의식은 어째서 그에 뒤따르지 못하는것일가?       불협화적인 행실과 꼴볼견의 허물은 음식문화에서도 간단없이 로출되고있다. 지난해 휴가차로 가족들과 함께 태산—곡부—청도—위해—연태—대련 관광코스를 다녀왔었다. 점심 느직해서 태안에 도착한 우리 가족은 인차 40여명의 관광팀에 합류되였다. 첫날 점심식사부터 기분이 잡치였다. 원탁 테블에 밀국수(挂面)를 담은 큰 그릇이 오르자 벌떼가 터졌다고 할가? 우구구 몰켜들어서는 자기몫으로 한사발도 아닌 두세사발씩 앞다투어 챙기다보니 우리 가족과 일본손님 몇몇은 나중에 빈그릇만 멍하니 마주하다가 식당에서 내놓은 묵은밥으로 점심을 에때울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밀국수를 욕심스레 챙긴분들은 뒤사람들이 굶든지 먹든지 관계없이 자기 밀국수그릇에 얼굴을 박고 후루룩—후루룩— 요란스레 먹기만 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치렬한 식사전쟁은 완화될줄 모르고 줄곧 이어졌다. 저녁부터 우리 가족은 다른 두 가족과 함께 고정된 “10명식사팀”을 무었는데 다른 두 가족의 음식쟁탈로 하여 우리는 노상 “고래싸움에 치인 새우” 신세가 되군했다. 다른 가족의 두 어른 남자분들이 료리가 상에 오르기바쁘게 누가 빼앗아가기라도 하듯 벌떡 일어나 료리접시를 와락 자기앞으로 당겨 아이들과 부인을 챙겨주고는 거의 빈접시를 만들어서 다시 쮸욱— 상중간에 밀어놓는다. 량이 부족한것도 아니고 일정이 급한것도 아닌데 왜 저럴가? 왜서 아직도 “우선 내것부터 챙겨야 산다”는 의식이 저리도 뿌리깊게 박혀있는지?        우리 말 속담에 모든것이 넉넉하면 자연히 인심도 너그러워진다는 뜻을 일컬는 “쌀독에서 인심 난다”는것이 있다. 참으로 일리가 깊은 글귀라 생각된다. 민중의 고상한 도덕품성의 형성여부는 흔히 사회재부총량의 증감에 의해 좌우지된다는것이 많은 사회학자들의 공통한 견해이다. 하다면 개혁개방정책의 힘을 빌어 13억 인구의 먹고입는 온포문제를 해결한 오늘에 와서도 우리가 여전히 고상한 도덕품성의 결여를 두고 방황해야 하는가? 우리의 쌀독에 거미줄이 얼기설기 쳐있던 일은 인젠 옛말로 되고있는데 우리의 인심만은 왜 이처럼 야박스러울가? 우리의 의식에 아직도 타인에 대한 배려와 관심보다는 “자기중심”이 무엇보다도 앞선 고질적인 관습이 뿌리깊게 배긴것이 문제점이다. 하기에 당연히 준수해야 할 사회규범임에도 지키는 사람이 오히려 이상한 인간으로 주위의 따가운 눈총을 받는 때가 적지 않는것이 어려운 현실이다.        마음의 자세를 바로 잡을 때가 왔다. 매일 산해진미의 진수성찬을 염족한다고 해서 정신문명의 수위가 스스로 높아질수 없다. 고급화장품으로 얼굴을 곱게 치장하고 고급양복에 신사차림으로 나섰다고 해서 다분한 문화적기질을 소유한 시민이라고 떠받들릴 리유는 없다. 호화로운 자가용과 택시가 거리를 꽉 메우도록 누빈다고 해서 고향도시의 문화적품위가 돋보일수 없다. 우리의 GNP, GDP 수준이 균형적인 장성을 유지하고있다고 해서 온 나라 민중들의 이미지가 세인들의 주목을 더욱 끈다고 긍정할수 없다.        예로부터 “집안허물은 밖에 드러내지 말라”고 했다. 허나 집안망신을 시킨 장본인이 “며느리”냐, “시어머니”냐를 따질 때가 아니다. 인젠 세인들에게 드러낼건 다 드러내고 보여줄건 다 보여준 공개된 허물이나 다름없으니 부끄러워할 리유도 더는 없다. 지금부터라도 우리 모두가 자기를 새롭게 알고 자기부터 시작하는것만이 옳바른 삶의 자세이다.  
18    “방환미연”의 삶의 자세 댓글:  조회:3317  추천:3  2012-03-21
      위나라 군주 위문후는 어느 하루 명의 편작에게 “짐이 들은바에 의하면 그대들 3형제 모두가 의사라고 하던데 3형제중 누가 의술이 가장 뛰여난고?” 라고 물었댔는데 편작은 다음과 같이 여실하게 아뢰였다.       “기실 저희 3형제중 맏형님이 의술이 제일 뛰여나고 버금으로 둘째 형님이며 소인의 의술이 제일 떨어진줄로 압니다. 맏형님은 환자가 아픔을 느끼기전에 얼굴빛을 보고 장차 병이 있을것을 압니다. 병이 나기전에 병근을 제거하다보니 고통을 모르고 병을 치료하기에 환자들은 맏형님의 뛰여난 의술을 느끼지 못하고 맏형님도 명의로 이름을 날릴수 없습니다. 둘째 형님은 환자의 병세가 미미할 때 병을 알고 치료해주기에 환자들 거개가 그저 작은 병을 고쳐주었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소인은 환자의 병이 커지고 고통으로 신음을 할 때에야 비로서 병을 짚어내기에 맹약(猛药)도 대접하고 지어는 살을 도려내는 수술도 합니다. 그리하여 환자들은 소인이야말로 진정 병을 뚝 떼준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명의로 소문이 난 리유입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옵니다.”       편작의 실토정은 참으로 오늘날 사회생활의 문제점을 면바로 짚었다고 할수 있다. 잠복되였다가 뛰쳐나온 큰 병을 극약이나 수술칼로 치유하는 의사들은 언제든지 예방사업에 종하사는 방역의무일군들보다 더 인기를 끌거니와 사회적평판도 곱절 높은줄로 안다. 동일한 병에 대한 치료라 할지라도 가령 병이 뛰쳐나오기전에 예방하거나 병이 금방 생길 때 적시에 치료를 하여 중병의 발생을 막았을 경우 아무리 의술이 뛰여난 의사라 할지라도 일반적으로 환자들의 주목을 끌지 못한다. 그러나 가령 환자가 앓아누워서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병상이 중할 때 구급대책으로 치유한다면 이때의 상황은 어떻할가? 병마에 시달리여 고생을 겪을대로 겪은 환자 지어는 죽음까지 선고받고 마지막 지푸래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의사한테 삶의 희망까지 기탁한 환자인만큼 일단 완쾌되였다면 최후의 림상의사를 마치도 두번째 생명을 준 은인으로, 세상에 둘도 없는 명의로 우러러볼수 있다.        우리 주변에는 일단 화재가 생기기만 하면 인력, 물력을 최대한 동원하여 적시적으로 불은 끄는 “진화형인재”가 있는가 하면 화재가 일어나기전에 화재의 위험요소를 짚어내고 인력, 재력을 크게 소모하지도 않고 큰 우환을 사전에 방비하는 “방화형인재”도 있다. 뿐만아니라 “방화대책”이 “진화응급책”보다 품이 적게 들고 효과가 매우 좋다는건 세인이 다 아는 일이다. 예방사업의 성과는 흔히 괄목할만 정도로 눈에 환하게 띄우지 않을수도 있지만 아무런 사고나 화가 발생하지 않는 자체가 바로 “방화형인재”들의 거대한 노력 또는 예방 관련 결책에 의한 결과라는 점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현시대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예측할수 없는 일이 많고 많다. 또한 하루가 다르게 사회가 변하고 우리가 이전에 상상도 못하던 사건과 사회문제들이 수두룩히 로출되고있다. 례하면 우리의 셈평이 날이 갈수록 펴이고 생활수준이 나날이 향상될수록 우리의 건강을 해치는 “수육정(瘦肉精)”, “하수구의 기름(地沟油)”, “멜라민분유(三聚氰胺奶)”, “염색만두(染色馒头)”, 식품첨가제 등 새로운 식품안전문제들이 두드러지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직능부문에서는 여전히 이른바 엄하게 처리하는것을 사업의 중점에 놓고 예방을 위주로 한 관리리념을 여전히 뒤전에 두고있다. 일이 생기면 번마다 엄하게 처리한다고 버쩍 열기를 올리지만 식품안전문제는 또 다른 형식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쳐들고있으니 심사숙고할 문제가 아닐수 없다. 민생을 위협하는 사회문제가 로출되기만 하면 해당 책임자를 철직시키거나 거액의 벌금을 안기고는 문제의 근본해결을 마루리지었다고 와쫙 떠들어대는 자체가 어불성설이 아닐수가 없다. 항상 “방환미연(防患未然)”의 의식을 가지고 평소 엄한 체계적인 예방제도를 철칙으로 내세워야 한다. “고의가랭이를 뜯어 적삼을 꿰매는” 격으로 근본적인 수습대책은 없이 개개의 일이 크게 번져진다음 일시적으로, 피동적으로 응부하는 식의 사업리념을 철저히 포기하여여 한다. “범죄를 예방하는것이 범죄를 타격하는것보다 더 실효적이다”는 사법분야의 사업사로를 귀감으로 삼고 예방을 항상 앞세는 한편 일부 민생과 관련한 민감한 사회문제는 우선 법률과 제도 등으로 그 해결, 처리 방식을 고착시켜야 한다.       오늘날 화근이 될 일에 대해서는 미리 살피고 대비하는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대부분 사람들은 편안할 때는 그때의 안락함에 젖어 위태로움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 그래서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이 생겼는지 모른다. 그러니 무엇보다 사회적인 우환거리를 맹아상태에서 박멸하는것만이 옳바른 삶의 자세이고 향상된 생활을 위한 바탕이며 나아가서는 생활의 질과 품위를 높일수 있도록 행복을 깨닫게 해주는 생활철학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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